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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작업..

내 홈페이지를 잃고, 내가 썼던 글들이 절반 가량이 소실되어, 아무래도 뭔가 흔적을 남겨두는 아카이브 작업이 절실했다. 요 몇일 새로 진보넷에 둥지를 틀고, 네트에 몇몇 흩어져 있는 내 글들 찾아내 겨우 2/3 정도는 건진 듯 하다. 한 40개 정도 가량의 확보된 에세이들만 찾으면 대강 글들을 주섬주섬 모아들인 셈이다. 뭔지모를 기억의 조각들이 석사 졸업이후에 열나게 썼던 내 글에 투영되어 있는 듯 해 그저 버리기가 너무 힘들다. 사라져 버릴 내 글의 흔적들을 모으는 작업을 하는걸 보니 나도 나이가 좀 먹었나부다. 게다 요즘 통 한글쓰는 일이 없어져 버려, 도대체가 한글을 구사하는 기술이 거의 중학생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런 것이 옛글에 대한 연민을 더욱 부채질하는 지도 모르고... 이제 한 1년 반이면 유학생활도 마무린데, 이 곳에 둥지를 틀면서 옛글도 모으고 새글도 올리고, 내 정서관리도 하고, 한글도 좀 써보는 연습장으로 활용해볼란다. 올 한해 여러 블로거들과 누리꾼들이 왕림해 풍성한 블로그가 되길 기원해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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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대학원신문: 인터뷰] 미디어운동으로의 정진

205호 [선배를 만나다] 신문방송학과 대학원 94학번 이광석 미디어운동으로의 정진 미국 유학중인 이광석 선배와 인터뷰하기란 쉽지 않았다. 몇 번 메일을 주고받은 끝에 전화인터뷰를 하기로 하고 지난 금요일 오후 전화를 걸었다. 한시간정도 통화하면서 선배의 유학생활과 현재 관심사 및 여러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광석 선배는 신방과 대학원을 졸업, 99년 미국 텍사스 오스틴 주립대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현재 정보정책 전공으로 박사과정중이다. 우리학교 대학원 졸업이후 <사이버문화정치>와 <디지털 패러독스>라는 책을 내는 등 다양한 저술활동과 강의를 하며 지내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됐다. 처음에는 유학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어쩌다 오게 됐다며, 유학생활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해 초기에는 어려움도 많았다고 한다. 유학중에도 뉴미디어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한겨레신문>에 매주 ‘디지털 사회’ 비평칼럼을 쓰기도 했고, 진보네트워크에서 매달 발간하는 정보운동잡지 <네트워커>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한창 글을 쓸 때는 일주일에 서너편을 쓸 때도 있었다며 요즘은 글쓰기보다는 공부에 전념하고 있다고 했다. <네트워커> 편집위원 활동은 어떻게 하냐는 질문에 <네트워커> 창간멤버이기는 하지만 편집위원 회의에는 한번도 못나갔다며 이름만 편집위원이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꾸준히 네트워커에 글은 쓰고 있는데, 현재 선배가 맡고 있는 꼭지는 <사이방가르드 문화체험>이다. 사이방가르드는 선배가 붙인 개념으로 디지털 시대의 자유로운 실험 정신과 보다 넓은 사회적 차원의 시각으로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정신을 가진 예술가를 발굴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작년 7월 창간부터 매월 꾸준히 발간되는 <네트워커>에 대해 선배는 미국에서도 정보운동만을 위해 발간되는 잡지는 없다며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 했다. 요즘 관심가지고 있는 연구 분야는 세 가지인데, 첫번째는 저작권문제에 대한 것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지적소유권에 대한 부분이라고 했다. 두번째는 공동체 대안운동으로 라디오, 인터넷 등을 활용한 지역공동체 운동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셋째는 비판지리학인데, 이를 사이버 공간에 활용하여 정보에 대한 불평등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다양한 학문영역과 미디어를 접목하여 연구하는 선배가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 유학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선배는 미국은 실용학문 중심이고 비판학문이 약하다며 유학이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라고 했다. 학제간 연구를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학문의 깊이는 없어서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연구자들은 한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더 좋을 거라고 충고했다. 미국에서도 유학생들에게 국내연구자들의 시각이 더 낫다고 말한다며 국내연구자들의 육성을 강조했다. 선배 역시 박사과정 후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사회와 직접 접촉하면서 연구활동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한국에 와서 미디어 연구집단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과 미디어 관련 지역공동체 운동을 하고 싶다는 선배의 이후 활약을 기대해 본다. (이현옥 편집위원 정리) [중앙대대학원신문 200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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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대학원신문] 현단계 한국사회의 대안문화

115호 [문화기획] IMF 시대의 문화 - ③`현단계 한국사회의 대안문화 주류를 치받는 대안문화, ‘다르게 행함’에서 비롯될 것 이광석/ 네트분석가 작년 말부터 시작된 금융 위기의 한파로 크게 타격받는 부분은 대중문화 영역이다. 한 연구기관의 조사에 의하면 IMF이후 소비지출 가운데 가장 먼저 문화비에 대한 지출을 줄이겠다는 응답자가 전체의 65% 이상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말은 곧 일반 서민들의 생활비 항목에서 문화는 늘 사치비용으로 남아있다는 말일 게다. 마찬가지로 LG, 대우,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들이 영상사업에서 손을 떼거나 투자 규모를 축소하고 있다. 경제기반이 흔들리는 차에 기업의 구조조정과 맞물려, 문화 영역을 군살로 취급하겠다는 것이 기업들의 반응이다. 그러고 보면 호·불황 여파에 따라 춤추는 대중문화의 숙명은 아직까지 문화가 대중의 것으로 전유되고 있지 못함을 반영한다. 더 근원적으로 따지자면, 이같은 대중문화의 휘청거리는 몸짓이란 철저히 시장 경제학의 원칙에 문화를 포섭시킨 결과이기도 하다. 90년대 이후에 들어서야 대중들이 맘 편히 향유하던 문화 영역이, 애초부터 자본에 의한 ‘경제적 문화활동’ 혹은 ‘문화적 경제활동’으로 굳어졌던 것은 아니었던가를 되짚어보아야 한다. 문제는 여기서 한술 더 떠 한국 경제와 동반 하락하는 최근의 대중문화산업의 침체 국면에 반발하여, 문화계 행정관료나 유관 유학파 출신들이 내놓은 ‘문화경제학’이란 아이디어다. 한마디로 문화를 확실하게 돈벌이로 만들어, 기업에겐 돈이 되고 대중에겐 양질의 문화적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논리이다. 그 동기는 시장경제 내에서 문화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의 상술적 테크닉에서 출발한다. 최초 이 용어를 사용하였던 존 러스킨(J.Ruskin)의 고민은 산업혁명기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 때문이었다. 그는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의 보장을 위해 자본주의의 피비린내 나는 이윤 논리에 반하여 생산자들에게 문화적 가치를 향유할 권리를 외쳤던 것이다. 러스킨의 사고가 사회적 문화권을 주장한 것이었다면, 현재 국내에서 압도하는 이같은 아이디어는 경제적 문화권의 논리이다. 돈벌이로 전락한 문화 최근 문화경제학의 논리가 더욱 활개치는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IMF라는 심각한 외환 위기를 맞이하여 대중문화의 싹들이 잘려나가는 상황에서, 관료와 자본 공히 국가 경쟁력을 확대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아예 문화를 사업의 주요목표로 삼겠다는 의도이다. 1998년 문화관광부가 발행한 ‘통계로 보는 문화산업’이란 보고서를 보면, 문화산업 시장규모가 97년에 대략 16조 6천억원(추정치)에 이르고 있는데, 돈이 되어도 한참 되는 영역이란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90년대초 이후로 성장한 대중문화가 자생적이고 자율적 토양이 미처 정착되기도 전에 IMF의 한파에 넉다운되었다가, 이제는 완전한 경제 마인드의 수용을 강요받는 사정에 이르러 사망선고를 받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올 만하다. 물론 돈도 벌고, 문화도 향유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는 반론이 일 수 있으나, 문화는 시장의 성격과 자주 충돌한다. 수많은 소수들이 집합화된 형태가 대중이라면, 대중들의 취향이나 목소리가 다를 것이고 문화의 향유 근거들도 다양할 것이다. 문화 생산과 유통을 틀어쥐고 문화의 방향을 잡아나가는 일부 입심좋은 기호제작소들의 논리란 독점의 논리이다. 그들에 의해 독점된 문화가 현실의 대중을 현혹하다보면 방향은 산업적 통계치와 단일의 문화적 포맷으로 잡혀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문화적 대중은 스펙타클에 끌려다니는 불특정 다수의 집합적 군상이 아니다. 이제 한국사회에도 자생적으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문화를 생산하고 즐기는 마니아들과 소수문화집단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에게 문화경제학은 억압의 조건들이다. 그래서 문화에 대한 계몽주의적 대중관, 일의적 문화정책, 대중산업적 지향은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상정되어야 한다. 주변화되지 않는 대안 이른바 ‘대안’(alternative)은 주류를 흠모하거나 대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주류에 대당 관계로써 위치할 수 있는 힘도 없다. 대안은 현실의 주류와 맞먹는 ‘주류적 대안’이 목표도 아니며, 이미 ‘주류적 대안’이 되었을 때는 주류에 합류해 버리는 경향이 강하다. 대안이 대안 능력을 상실해버리면 ‘주변’이 된다. ‘주변’은 주류에 저항하기 보다 주류에 빌붙어 기생한다. 주변화되지 않는 대안은 주류의 장점을 익히나, 동일한 패턴과 규범에 따라 행동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안은 주류화와 주변화라는 양 극단의 불안정한 위치에 놓인다. 물론 추상적 대안과 달리 현실적 대안의 조건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다. 보통 주류를 그리워하는 대안문화는 소수적 목소리를 주류에 편입시켜 버린다. 이로써 대안의 위치는 주류의 파장만을 유연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주류에 대항하여 대안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위로부터의 독점/시장 권력(potestas)을 소수 문화집단들의 힘(potentia)의 집합된 발현으로 극복하는 것. 이것은 일반화되고 보편화된 문화라고 알려진 권력의 담론에 대해, 다양한 공간에서 소수적 주체들의 목소리를 담아 권력의 정보에 충돌시키는 커뮤니케이션 행위에 가깝다. 신좌파 미디어운동가이자 철학자였던 펠릭스 가따리(F.Guattari)는 이같은 대안실험의 가능성을 ‘분자혁명’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 가따리는 권력에 맞서면서도 다양한 주변자들, 소수자를 중심으로 전자적 아고라(agora)를 구축함으로써, 개인들을 주류문화가 강압하는 ‘욕망 모델들’에서 해방시키고자 했다.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단순히 과거 산업시대의 대규모 강제적 억압만으로는 이제 통제가 불충분하다. 단지 커다란 사회적 총체뿐만 아니라, 출생부터 자본주의적 욕망의 모델에 대중을 편입시키는 체제로 보았다. 이미 코드화 되어있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에, 그어진 선(line) 안에 대중을 가두어두는 것을 문제시하였다. 그래서 그는 권력의 담론이 강요하는 그어진 선 밖에서, 성립된 주체를 벗어나, 그리고 초코드적 의미작용에 반발하여 ‘무수히 다양한 분자적 욕망’ 에너지를 해방시키길 바란다. 그는 단수적이고 소수적인 욕망들을 다양성으로, 유동성으로, 시공간적 가변성과 창조성으로 드러내는 대안문화가 가능함을 주시했던 것이다. 한편 소수자들의 대안문화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기는 하지만, 지배문화에 대한 사회·문화적 정의는 여전히 유보된 채 남게 된다. 저항의 과정과 자생성의 분출로는 지배/주류 문화에 대한 타격은 어림없다. 지배/주류에 대한 교란과 소음만 있을 뿐이다. 저항과 대안의 지배적 주류화가 빗나간 전략이라면, 지배/주류에 대한 전국적 수준의 저항과 대안은 각 단위들의 연대와 네트워크화로 가능하다. 단위적 저항과 전국적 저항의 투쟁과 쟁점 모두는 중요하다. 이를테면 소수문화집단들의 전국적 저항의 예로는 그 투쟁의 결과들을 국가 문화정책에 투과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가따리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인습적인 형식과 장르 바깥에서 대안적 문화와 담론 양식을 지속적으로 제공함과 동시에, 이들의 연대를 통해 주류문화에 대한 도전과 이에 따른 정책적 입법화를 함께 도모해야 한다. 가따리가 문제시했던 단일화된 지배적 문화양식과 정책의 조건들은 아직도 살아 있다. 핵심적으로 변한 것은 대중의 환경이다. 인터넷의 보편화, 마니아들의 성장 등을 포함한 근본적인 사회·문화적 양식의 격변을 보여주는 징표들이 등장했다. 이러한 조건들은 시장/독점망에서 비어져 나오는 대안문화의 집합적 연대의 불꽃을 피우게 한다. 특히 네트는 기술적인 가능성과 함께 발·수신자 없는 발언의 가능성을 모두를 포괄한다는 점에서 ‘발언에 대한 독점’뿐만 아니라 ‘기술수단에 대한 독점’의 탈주에 공히 가능성을 높게 두고 있다. 예컨대 주류문화에 대한 기술적 저항으로 시민운동진영에서의 캠코더를 이용한 다큐멘터리 제작, 소수문화 운동가들의 커뮤니티 라디오, 웹진 등의 전자출판,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독립 CD 제작, 컴퓨터 해커들의 사회적 해킹, 가상공동체들의 사이버 결사와 집회, 멕시코 사빠띠스따의 정보게릴라전, 노동자들의 정보교육운동 등이 다각도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정치실험들은 지배적 약호에 대한 저항 뿐만 아니라 기술적 수단을 소수문화집단들이 적극적으로 자기가치화하는 사례로 평가되어야만 한다. 처음부터 기술적 독점에 대한 저항을 통해 지배적 수사에 대한 독점 자체를 차단하여 주류에 거역하는 자발적인 대안문화를 발현시키는 운동은 수사적, 기술적 저항 모두를 토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저항의 형식 변화가 이루어진 데는 대안문화 형성에 있어서의 주체 변화가 이미 자리한다. 과거 한국사회에서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분출했던 문화투쟁은 노동자 문예운동을 필두로 하여, 비디오, 영화, 사진, 팩스, 판화, 벽화, 깃발 등의 다매체를 동원한 민예총과 대학서클, 예술가 집단 중심의 예술운동과 진보적 문화운동 등으로 표출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대안문화 구성체들은 재정의 열악함, 대중 기반의 취약성, 그리고 일괴암적인 체제 이행의 지향성만을 내다보고 진보적 가치와 대중적 가치를 분리하여 사고함으로써, 대중적 가치에 편입되거나 급진적 가치만을 부르짖으면서 근근히 유지하거나 사라지는 수모를 겪었다. 거시적, 일방향적, 계몽적, 단선적인 위로부터의 문화운동관이 문제였던 것이다. 노동자를 포함한 대중들은 계몽의 대상이었지 문화생산의 주체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리고 조직적 대의에 소수의 목소리를 스스로 감춰야 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혁명과 변혁을 얘기하지도 않으며, 그같은 감성과 대의에 호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정세는 과거에 비해 한결 나아졌다. 사회화된 권력의 파장이 엄청날수록 물러날 곳 없는 문화 주체들의 갈등과 꿈틀거림이 격해지고 도도해지기 때문이다. 주류문화에 억압된 ‘욕망’을 탈주하려는 수많은 소수문화들이 자생하며 버팅긴다. 노동자를 포함한 학생, 여성, 동성애자, 빈민, 양아치, 삐끼, 청소년, 게임돌이, 소수 마니아 등등. 이들은 자신만의 문화적 포물선을 그리면서 주류의 지형에 흠집을 내고, 그 그어진 경계를 지워버린다. 주류에 대한 저항함수로서 소수문화 앞으로 지배적 문화는 소수집단들의 문화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 반대로 이들 소수문화들은 주류문화의 물신들을 골고루 먹어치운다. 일본의 닌텐도세대인 ‘오타쿠’처럼, 이들은 문화소비자이자 생산자이다. 주류를 먹고 사는 대안적 문화 형성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주류문화를 즐기다 주류에 포섭되는 경우를 쉬 볼 수 있다. 그러나 쉼없이 팽창하는 단수적 문화 행위자들은 기업문화의 폭격에 맞서 여기저기 참호를 구축하며, 문화 생산/소비자 관계 구조의 대안적이고 모범적 모델을 제공하고 있다. 이젠 다르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다르게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경제적 논리에 문화적 가치가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도, 주류에 억압받는 소수 집단들의 욕망분출의 통로를 마련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다. 결국 주변화하지 않는 대안문화의 구성여부는 소수집단들의 주류에 대한 저항함수로 보아야 하며, 수많은 욕망들을 생산하고 결집하는 데 달려 있다. [중앙대대학원 신문, 200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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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대학원신문] 뉴미디어, 문화와 하이테크의 결합

[문화기획] 미디어로 사회읽기- ④뉴미디어, 문화와 하이테크의 결합 아날로그 권력체계에 흠집내는 디지털세대의 테크노문화 실험 이광석 지난 몇 년 전에 우리에겐 ‘X세대’, ‘신세대’라는 미확인세대의 유행어가 풍미한 적이 있다. 아직까지도 상품광고에서 줄곧 써먹는 이 정체불명 세대 지칭의 정확한 경계선은 없다. 이와 같은 용어의 발원지에는 저 바다 건너 미국적 전통이 놓여 있다. 미국에서 비롯된 새로운 세대의 명칭은 다양하다. ‘X세대’를 포함하여, ‘영상세대’, ‘닌텐도세대’, ‘비디오세대’ 등등의 새로운 조합어들이 창궐한다. 그에 대칭하는 기성세대는 베트남전 이후의 ‘베이비붐 세대’로 뭉뚱그려진다. 말하자면 영상문화와 더불어 사고하고, 길들여지고, 생활하는 세대가 바로 새로운 하이테크의 세대이다. ‘베이비붐 세대’는 반전운동 등을 통해 알려진 히피적 전통을 지닌 세대다. 전후 히피세대는 노자의 도가에 심취하고, 점성술에 의지하고, 피부문신과 LSD를 즐기며, 권위와 자본주의 기계를 경멸한다. 물론 아버지와 아들간에 유전자 요인이 승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영상세대 또한 아버지세대의 모습을 닮고 있다. 일종의 문화적 유전자(밈, meme)를 담지하는 것이다. 하이테크 문화평론가인 마크 더리(M. Dery)에 따르면, 6~70년대 사이키델릭(psychedelic) 문화와 90년대 사이버델릭(cyberdelic) 문화를 구분하는 가장 큰 준거틀로 테크놀로지의 수용 여부를 들고 있다. 요컨대, 현대의 새로운 세대는 테크놀로지와 80년대 대항문화의 새로운 통합을 의미하는 반면, 60년대 대항문화는 촌스럽고 낭만적이며, 반과학적이고 반기술적이다. 이들 영상세대는 정보화사회의 그늘에서 태어나, 세기말의 정신적 혼돈이라는 토양에서 자라나는 문화라는 의미에서, 보다 미디어 친화적이다. 그들은 60년대 이후의 히피적유산을 계승하고 있지만, 히피들보다는 훨씬 복합적이고 심화된 기술의 대항문화적 통찰력을 지닌 집단이다. 90년대 사이버델릭 문화와 닌텐도세대 이 새로운 닌텐도세대는 기성의 제도와 권위를 부정한다. 그들의 차별성은 기술과 영상을 즐긴다는 데 있다. 국내에도 한 때 일본에서 유행한 ‘다마고치’게임이 히트한 적이 있었다. 스크린 안에 새, 물고기 등을 키우고, 번식시키고, 어떻게 하면 빨리 죽일 수 있는가를 즐기는 초등학생들, 우주전쟁과 국지전을 순수한 디지털전쟁의 유희 속에서 즐기는 세대가 바로 닌텐도세대인 것이다. 위험스러운 사실은 문화란 현상이 ‘삶의 방식’이라면, 삶이란 구체적 현실에 도사린 구조적 변인들이 너무 크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이전에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전세계 자본의 ‘창조적 파괴’가 진행되고 있다. 특히 초국적 미디어기업들은 이미 상업 전략과 테크노문화를 결합시키고 있다. 소비문화가 80년대의 가장 특징적 현상이자 자본시장의 텃밭이었다면, 이제 90년대 이래로 21세기의 자본문화전략은 테크노상품에 근거한 문화전략이 된다. 뉴욕대 교수인 앤드류 로스(Andrew Ross)에 따르면, 이러한 변화는 “강건한 신세계의 지속적인 기초를 제공하는 테크노문화와 자본의 불경스런 결혼”에 이른다. 소위 ‘디지털계급’ 혹은 ‘가상계급’에 의해 구상되고, 짜여진 새로운 판(version)이 테크노문화의 상스러운 얼굴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 소비시장의 아날로그 상품들을 그야말로 부드럽게 하고(softening), 디지털화한(digitizing) 상품으로 재생산하여, 새로운 시장에 그럴듯하게 패키지로 포장하여 전시하는 일이다. 예컨대, 상품문화의 테크노적인 혼합은 통칭하여 ‘사이버펑크 토탈패션’이란 미명하에 등장한다. 사이버펑크와 테크노아나키즘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우리는, 관객이 컨베이어벨트를 통과하는 쇼를 관람하듯, 테크노문화를 소비하는 디지털 관음증에 시달릴 수도 있다. 샌디에고의 노교수 허버트 실러(Herbert Schiller)는 이러한 미디어 전략을 ‘토탈 혹은 원스톱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명명했다. 즉 개념화 단계에서 최종 생산, 배달 단계에 이르기까지 그저 미디어자본이 만든 메시지와 이미지를 소비하고, 디지털계급들이 만들어내는 스펙터클을 그저 숨어서 지켜보는 주체들만을 양산한다고 말한다. 물론 기성세대의 아날로그적 관성과 중독증은 디지털 소비문화에 이르면, 한차원 더하여 순응적이고 나약한 모습으로 허우적 거린다. 하지만 디지털문화를 소비하는 다양한 하위집단들 중에는 디지털 자본 환경에 도저히 훈련시키기 어려운 ‘지하의’천덕꾸러기들도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가장 도전적인 그룹은 아나키의 자유분망함과 디지털 정보의 공유를 꿈꾸는 새로운 세대들, 이른바 ‘해커’(hacker) 혹은 문화적 의미로는 ‘사이버펑크’(cyberpunk)라고 불리는 유대인의 하이테크 자손들이 존재한다. 사이버펑크는 사이버(cyber)에서 발생하는 하이테크 하위문화와, 펑크(punk)에서 유발되는 밑바닥 거리문화의 결합물이다. 다시 말해 사이버펑크는 도시 거리문화에 뿌리를 둔 공격적이고 반권위주의적인 펑크적 감수성에, 기술과 인간 사이가 해체될 고도의 테크놀로지 미래를 결합하고 있다. 한편 기술적인 인물보통명사로서 사이버펑크는 ‘해커’의 문화적 대체어이다. 즉 히피의 테크노변종이 해커이자 사이버펑크이다. 사이버펑크는 테크놀로지의 세례를 받았으나, 기술적 미래의 부정적 잠재력과 긍정적 잠재력 모두를 강조한다. 사이버펑크는 컴퓨터를 해방적 추동력과 억압적 장치의 성격 모두를 지닌 야누스적 기계로 간주한다. 작년에 FBI의 끈질긴 수사망에도 18년 동안 굳건히 우편폭탄을 실어나르다 붙잡힘으로써 유나바머(Unabomber)의 반문명주의는 막을 내렸다. 테크노문화에 대한 비적응의 극단적 전형이자, 자본주의의 물질문명에 대한 기성세대의 분노를 표출했던 인물로써 보자면, 조금은 측은한 희생자였다. 어쨌거나 현실에는 이런 구식 러다이트의 빗나간 발악보다는, 해커 혹은 사이버펑크의 문화정치가 그 대중적인 세련됨을 돗보인다. 해커 사회에서 정보와 컴퓨터는 곧 권위의 기반이다. 해커들은 컴퓨터를 사용하여, 예컨대 패스워드 파괴, 트랩도어(trap doors), 트로이목마(Trojan Horse) 등의 기술을 개발하고 전수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권위에 대한 기술적 도전이자, 테크노아나키즘의 실현이다. 해커들 대부분은 해킹을 게임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열광적인 SF 소설의 독자들이다. 그들에게는 해킹의 게임과 사이버펑크 소설이 사회적 실천의 의미와 뒤섞여 있다. 디지털자본가들에게 이들은 골치아픈 존재이다. 디지털 저작권, 보안 등 상품화될 가치들이 있는 것들의 웬만한 것들은 하드웨어, 소프트웨어를 막론하고, 모두 다 변형시키고 풀어헤친다. 닌텐도세대의 자유로움이 현실적인 이윤논리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네트를 방랑하고, 얘기를 나누고, 미지의 것을 탐험하고, 놀길 원한다. 자기만의 영상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고, 공유하는 행위가 그들이 지닌 원칙이다. 독식, 독점, 권위, 논리, 이성보다는 공유, 자유, 개방, 감성이 그 우위에 선다. 분명한 사실은 이들 네트세대가 인터넷이나 영상을 통해 접하는 가공된 현실이란, 그들 자신의 삶이자 현실이란 점이다. 이들에게 영상은 삶의 경험과 기준이다. 텍스트에 친숙한 부모세대는 네트를 두려워한다. 부모세대는 네트를 수렁으로 보며, 자신의 자식들이 그 수렁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과거의 세대는 자신의 두려움을 자식에게 전가한다. 통신모뎀을 빼앗고, 심한 경우엔 컴퓨터 자체를 못쓰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디지털상품의 광고주들도 기성 세대에 대한 급진적인 설득 작업을 펼 수밖에 없다. 그 유명한 최불암이 컴퓨터 광고에 나섰다. 최불암은 컴퓨터에 빠져 정신을 못차리고, 자식은 졸린 눈으로 아버지인 최불암에게 안자느냐고 짜증스럽게 묻는다. 이에 대한 최불암의 응답, “너나 먼저 자, 임마”. 이 배꼽잡는 말은 자식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기성권위에 대한 도전장이다. 부모들이여, 아이들에게서 컴퓨터를 빼앗지 말라! 당신도 최불암 정도로 컴퓨터에 빠질 수 있다. 두려움은 버려라. 아이들은 수렁에 빠진 것이 아니라, 영상과 네트가 그들의 삶일 뿐이라고 부르짓는 것이다. 새로운 네트세대의 무질서 속에서도, 그들에게 내려오는 하위문화적 원칙은 있다. 컴퓨터 접근권을 완전하게 보장하라, 정보를 무조건적으로 공개하라, 모든 권력을 분권화하라, 디지털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라, 권력과 투쟁하라, 권력 체계에 소음(noise)을 되먹임(feedback)하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라(DiY), 극단의 스릴을 즐겨라(surf the edge). 이들의 강령은 크게 보면 두 부분이다. 정보의 자유와 권력의 해체. 그들을 하위문화로 보는 근거는 결국 디지털 정보 독점에 대한 저항과 자유로운 유통의 정신이다. 물리적으로 굳게 잠겨있는 모든 통제권과 이로부터 나오는 약호의 일방성과 규제를 거부하고 공개하려는 것은 신선한 정치 프로젝트가 될 수 있다. 문제라면 이들이 경제적 지위나 신분에 구속받지 않으면서, 단지 정보의 활용 능력에 의해 이합집산한다는 점에서, 과연 대항문화적 주체가 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대항문화 주체를 향하여 사실 21세기는 기성 권위의 힘으로 미래를 헤쳐나가기에는 밑천이 부족하다. 개인의 창조성과 실험성이 미래 준비의 자산이 된다. 여기서 테크노문화 세대의 자기 스스로의 개성과 자유를 발산하는 방식은 매우 중요해진다. 빠르게 적응하고, 혼란스러우나 스스로의 동일성을 찾아내며,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그들의 행동 양식이 장점이 된다. 특히나 대안적 미디어 전략과 관련하여 거대 자본에 의한 첨단장비에 밀리고 있는 실정을 고려한다면, 그들의 테크노문화 실험은 하위문화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 그들은 최선의 문화정치적 비전을 산출해내는데, 충분조건은 아니더라도 필요조건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들의 자유스러움이 앞서 우려한대로 개인 중심의 말초적 디지털 ‘몽환’(hallucination)으로 빠질 수도 있다. 또한 그들의 개성과 자유가 디지털기업이 이끄는 스타일 정치문화의 미끼로 이용될 수도 있다. 신세대 욕망을 자극한 상품의 미끼라는 유혹이 도사릴 수 있는 것이다. 자본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별짓는 그들의 영역화의 작업은 그래서 중요하다. 한편에서는 문화정치학의 새로운 정초와,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문화 실험의 사례들의 발굴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요컨대, 문화의 집단적 표현 형식의 새로운 징후를 읽어내어 이론화하는 것과 테크노문화적 실천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 테크노 시대의 문화집단에 대한 지형짜기와 그 집합적 실천의 모색, 이것이 21세기 문화정치의 화두이자 출발이다. [중앙대 대학원 신문 111호] (200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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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해운사보] N세대의 문화 양식과 서바이벌 게임

N세대의 문화 양식과 서바이벌 게임 X, Y, Z 그리고 N 세대 X, Y, Z, N이 뭐냐고? 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신세대 명명법이다. 대문자 알파벳도 모자라 1318과 386세대처럼 숫자로 그 세대를 가리키는 방식도 등장한다. 여기에선 386을 제외하곤 나머지 모두는 서로 친화력을 지닌 세대들이다. 우 리에게 'X세대'는 '서태지 신드롬'의 촉매로 93,4년에 풍미했던 10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연령층이다. 기성세대 입장에서 보면 X파일처럼 명확히 정의되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세대가 X세대였다. 서열상 X의 동생은 Y다. 작년부터 종종 지상에서 접하곤 하는 'Y세대'는 13∼20살까지 분포해 있다. 평균 나이로 봐선 X보다 Y가 더 어리다. X와 Y의 정서적 공통점은 '새로움', '기성권위에 대한 도전', '반항', '자유', '개성', '감각주의' 등이다. 이들은 컴퓨터와 정보화에 강하고, 패션과 소비에 적극적이며, 개인적 가치를 최고의 자리에 놓는다. 이들 형제간의 차이라면, X가 소수의 아웃사이더 특징을 부각한 반면 Y는 다수의 세대 흐름을 강조하고 있다. 2천년(Y2K)에 주역이 된다는 의미에서 강조된 Y세대는 시기상으로 X세대 논의 이후에 등장한 다수의 신세대이다. 'Z세대'는 1318세대이다. 연령대로는 X와 Y세대에 비해 가장 어리다. 알파벳의 가장 끝자리를 택한 것도 그 이유에서 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N인가? 'N세대'는 네트워크 세대이다. X, Y, Z 삼형제의 가장 특징적인 속성이 N에서 수렴되기 때문이다. 미국식으로 따지면, N세대는 70년대말 이후 태어난 2∼22세까지의 전후 '베이비붐 세대'의 2세들이다. 이 들은 X, Y, Z 삼형제의 공통된 감성과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며, 특히 이들에게 컴퓨터와 인터넷은 삶의 필수 조건이다. 이것과 더불어 사고하고, 길들여지고, 생활하는 세대가 N세대이다. N이 3형제와 다른 차별성은 디지털 기술과 영상을 즐기는 세대임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들에겐 이미 요람에서부터 즐겨온 영상, 인터넷, 게임 등이 삶의 필수 요소들이다. N세대는 네트를 통해 독식, 독점, 권위, 논리, 이성보다는 공유, 자유, 개방, 감성을 터득해 나간다. N세대의 '진짜' 무서운 아이들 얼 마전만 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 새로운 현상이 이 새로운 세대들에게서 목격된다. 송파 여중생들이 8미리 캠코더로 찍은 '너희가 중딩을 아느냐'란 다큐 영화가 연일 화제에 오르고, <밥>이란 순수하게 청소년들이 만든 무가지와 웹진 <채널 10>이 또래들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누리는 등 과거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할 특징적 N세대 문화들이 만개하고 있다. 영상과 인터넷에 친숙한 새로운 세대들은 이같은 소수 문화 형성의 가장 전위에 서있다. 문화 향유와 메시지 생산의 주인으로 이제 나이 어린 청소년이나 신세대가 적극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앞에서 끝으로 이어지는 맥락은 별로다. 그래서 장황하고 지리한 전후 맥락은 좀을 쑤시게 한다. 그림 하나 없는 두툼한 이론서는 그들에게 지옥이나 다름없다. 만화책을 보라. 그들이 만화를 볼 때면 수십권의 책을 쌓아놓고 순식간에 눈을 굴린다. 연배가 적을수록 책읽는 속도는 빨라진다. 이미 그들에겐 영상과 도상(Icons)이 습관화되고, 훨씬 편하다. 고정되어 있는 그림보다는 움직이는 동영상, 평면보다는 3D가, 넓은 길보다는 미로같은 길을 따른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적응력이 강하며, 빠르게 배워나간다. 특히 컴퓨터에서는 더욱 그렇다. 네트는 전후 맥락을 무시한다. 예컨대 하이퍼-링크 기능이 그것이다. 이리저리 네트를 통해 넘나들며, 네트의 속성상 그들은 잠시도 어디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로운 세계를 접한다. 인터넷의 홈페이지도 그 무한한 개성의 표현 방식이다. 영상과 이미지로 자신의 개성을 한껏 홈페이지에 각인한다. 채팅과 게시판에는 새로운 언어형식이 등장한다. '한글맞춤법표준'은 그들에게 권위일 뿐이다. 바로 그들이 새로운 언어의 조합과 통신예절을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다. 기성세대는 청소년 또래집단의 대화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터넷의 기술적 특성은 새로운 세대들에게 가장 적합하다. 스스로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최적의 기회를 디지털이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이들 새로운 세대는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헐렁한 바지를 찢어 질질 끌고 다니거나, 머리를 컬러로 물들이고, 부두교를 연상케하는 장식물과 피어싱(피부뚫기)으로 신체를 치장한다. 일본의 신주꾸 거리를 연상할 정도로 그들의 패션은 원색적이다. 기성세대가 보기에 N세대는 진짜 무서운 아이들이다. 신세대 스스로가 '어른들은 몰라요'를 항변하던 수세기가 가고, 이제는 그들이 미래이자 주인공의 자리로 발탁된다. 21세기는 기성 권위의 힘으로 미래를 헤쳐나가기에는 밑천이 부족하다. 기성세대는 걸림돌이다. 개인의 창조성과 실험성이 N세대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미래에는 N세대가 지닌 개성과 자유를 발산하는 방식이 중요해진다. 빠르게 적응하고, 혼란스러우나 스스로의 동일성을 찾아내며,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그들만의 문화가 부각되는 것이다. N세대의 아슬아슬한 생존 조건 최 근 주요 신문사마다 인터넷 생존 게임을 경쟁적으로 벌이고 있다. 사실 이 서바이벌 게임은 알고보면 물리적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 채, 정해진 시간과 한도액을 가지고서 오로지 인터넷이란 수단을 통해 버티는 미련스런 게임이다. 이 게임의 참여자들은 가상의 네트워크를 통해 떠돌아다닐 순 있어도, 실지 옷가지와 음식, 그리고 여타의 필수품들을 외부에서 일차로 조달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게임 주최측은 참여자들이 외부 접촉없이 정해진 공간 안에서 게임 시간을 초과하여 장기간 머무를 때 생기는 정신적인 스트레스 상황은 고려에 넣고 있지 않다. 어쨌거나 주최측의 의도가 인간에 대한 네트의 무한하고 풍부한 가능성을 계산하고 이벤트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역으로 이 게임은 결국 인간의 생존 조건이 물질 공간에서 주어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워쇼스키 형제가 만든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진정 인간 정신의 세계가 하나의 가상 영역을 만들어낸다. 무중력의 집합적 공동심리가 펼쳐지는 전자장이 펼쳐진다. 가상에서의 식사, 의복, 사랑 등 모든 영역이 진짜인 것처럼 느껴지는 세계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상의 정신 세계 밖에는 기계가 만든 자궁 안에서 인간 자신을 갈아서 만든 양수로 연명하는 자신의 육체가 전제된다. 이처럼 네트의 가상성이 부각될수록 점점 더 현실의 조건과 밀접히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본다면 N세대의 자유분방함이 제대로 된 생존 조건을 찾는 방법은 일차적으로 현실 삶의 결에 달려 있다. 단지 기계의 인터페이스를 통해 소통하는 삶의 조건만이 N세대의 생활 근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성세대의 역할은 중요하다. N세대를 둘러싼 물리적 현실의 질과 결을 규정하는 것이 부모세대인 것이다. 가상과 네트로의 도피가 자라나는 세대를 지극히 무익한 욕망 배설의 말초적 관심사로 빠뜨릴 수도 있다. 이 상황은 기성세대로 하여금 자라나는 신세대의 개성과 자유를 우선 현실 안에서 뿌리내리게 할 의무를 갖도록 한다. 또한 그들의 개성과 자유가 기업의 현금화 관심과 맞물릴 수 있는 소지가 다분히 있다. N세대의 욕망을 자극한 디지털 상품의 미끼라는 유혹이 도사릴 수 있는 것이다. 이미 그들은 거대하고 매혹적인 떠오르는 구매층이 되어버렸다. 예로부터 인구통계학적으로 보면, 젊은 구매자층은 여타 세대에 영향을 미치는 주된 견본 시장 역할을 떠맡았다. 이른바 '청년 숭배 혹은 물신'(Jugendfetisch)은 여타 세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신세대 중심의 상업화 논리를 극대화한 지칭용어이다. 이처럼 N세대에 대한 끊임없는 표적 작업과 유혹은 자유롭게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을 차단하고, 기업의 끝없는 이윤욕의 사슬로 그들을 얽어맬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 또한 N세대에 드리워진 미래의 우울한 '그림자'이다. N세대의 생존 조건은 결국 현실에서의 삶의 조건에 위태로이 매달려 있다. 하지만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럴수록 N세대의 가능성은 더욱 풍부하게 공존한다. 최근 국내에도 번역되어 발간된 {N세대의 무서운 아이들}이란 책에서, 돈 탭스콧(D. Tapscott)은 N세대의 긍정적 가치를 설득력있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기성세대가 지닌 N세대에 대한 우려, 예를 들어 컴퓨터 중독증과 개인주의 성향 등을 기우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N세대는 기성세대와 달리 네트에 상주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자연스레 네트를 통해 또래 집단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사회성과 공동체 의식을 키운다. 받아들여야할 사실은 이들 네트세대가 인터넷이나 영상을 통해 접하는 가공된 현실이란 그들 자신의 삶이자 현실이란 점이다. 그들의 문화 양식 자체가 과거 세대와 달라진 것이다. N세대에게 가상 안에서의 유랑은 현실과 마찬가지로 농축된 삶의 경험이자 바탕이 된다. 그러나 물질 세계의 텍스트에 친숙한 부모세대는 네트를 두려워한다. 부모세대는 네트를 수렁으로 보며, 자신의 자식들이 그 수렁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과거의 세대들은 자신의 두려움을 자식에게 전가한다. 통신모뎀을 빼앗고, 심한 경우엔 컴퓨터 자체를 못쓰게 만든다. 탭스콧의 말대로 앞으로 세상의 모든 변화를 N세대가 주도한다면, 기성세대는 새로운 세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늘릴 필요가 있다. 물론 어느 한 세대의 월권은 자칫 파국에 이를 수도 있다. 정보화 신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억압은 가능성의 영역을 차단하고, 기성세대에 대한 N세대의 완전 부정은 대안없는 일탈로 내달을 수 있다. 기성세대의 이성 능력과 신세대의 자유적 발상이 적절히 어우러질 때만이 N세대의 미래적 가치가 밝을 수 있는 것이다.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한진해운사보> 9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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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교지 <고황>] 인터넷 경제학' 비판 시론

인터넷 경제학' 비판 시론 경희대 교지<고황> 99년 여름호) 1. 네트의 '그늘' 밟기 우리나라 벤처기업이 피부로 겪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겪어야만 하는 현실을, 한 벤처기업가 사장의 말을 빌려 들어보자. "좋은 기술 만들어 인수/합병당하고, 다른 기술 개발해 또 합병당하고 하는 것이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얻는 최상의 성공입니다. 한가지 기술로 자자손손 경영할 회사 만들 생각 말아요."(한겨레신문 5월 24일자) 신지식인 경제 혹은 디지털 경제를 주창하며, '제 2의 건국'을 외치는 현재의 분위기와는 아주 딴판의 주장이다. '포지티브 썸'(positive sum)의 새로운 경제 논리를 달달 외는 디지털 전도사(guru)들이 들으면 찔려하는 구석일 수도 있다. 현재 이같은 현실 경제의 '그늘'은 압도적인 '빛'의 논리에 의해 거의 들춰지지 못하고 있다. 이미 새로운 사회에 대한 낙관론이 지배적이며, 무형의 디지털과 이를 빛으로 속도로 연결하는 네트의 우파 경제학이 우리의 사고를 잠식해가고 있다. 물론 나는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단순 낙관론이나 부정론을 경계하면서, 현재 도래하는 '빛'의 논리를 일부 긍정한다. 같은 맥락에서 현재 침체일로에 놓인 정치경제학이 재생하고 부활하는 길은, 사회 이행의 지표들을 적극적으로 사고하면서도 그 근본적 모순의 연속적 고리들을 밝혀내고 단절하려는 노력들이 부단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까스텔(M. Castells)이 내논 자본주의 '발전양식'으로서의 '정보양식' 개념 등은 그 의의가 크다. 그의 논의는 다름아닌 좌파 내부에 정보혁명과 맞물린 자본주의 경제 이행과 파장에 대한 적극적 사고의 요청이다. 그가 보기에 구체적 현실에 대한 무기력의 심연은 보드리야르가 80년대 이후에 실천 전략으로 삼았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inertia)의 나락일 뿐이다. 새 것에 이끌려 모든 것을 청산한 채 새로운 밀레니움의 선각자입네 하는 천박한 자들이 꼴불견이라 치더라도, 현실 변화에 너무나도 둔감한 채 전통의 잣대만을 들이대는 골통들의 의식이 더욱 전망을 어둡게 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새로운 현실과 관련한 진단과 처방에 긴요한 것은 낙관이냐 비관이냐라는 주관적 전망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 현실에 대한 모순과 발전의 변증법적 긴장을 긴 호흡으로 잡아내는 작업일 것이다. 이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글은 최근 신(新)경제, 네트워크경제, 정보경제 등으로 회자되는 새로운 경제관의 주체들과 그들의 핵심 주장, 그리고 그들의 전자공간에 대한 우파적 전망을 살펴보고, 이를 거슬러 네트의 사회적 성격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전망을 찾아보려 한다. 2. 빈곤과 수확 체감의 불안증 네트 시대의 시장 원리와 관련하여 신경제 이론가들과 디지털 계급의 경전인 [와이어드Wired]는 새로운 경제 신화의 근원지를 제공하고 있다. 이 잡지는 시장의 비예측적이고 결점으로 가득한 메커니즘을 생물학, 전염병학, 유기체론, 생태학, 비선형 물리학, 진화 경제학, 카오스 이론 등의 외피들로 단단히 감싼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자본주의적 시장의 비예측적이고 모순적인 속성 그 자체가 장점이자 네트워크 경제의 법칙인양 추켜세운다. 또 다른 우파 경제학의 산실, 산타페 연구소의 신경제 이론가인 브라이언 아써(W. Brian Arthur)의 그 유명한 논문, [수확 체증과 비즈니스의 신세계](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1996.)에 의거하면, 네트 효과는 산업시대의 '수확 체감'(decreasing returns)의 경제 원리를 물리치고, '수확 체증'(increasing returns)의 새로운 세계로 접어들게 만든 주요인이다. 달리 말해 산업시대의 희소성의 원칙이 네트워크 경제에 이르면 '마찰없는'(friction-free) 풍요의 법칙으로 대체된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l)이 보는 수확 체감이란 시장내 우위의 상품 혹은 기업이 종국에는 한계에 봉착하는 세계이다. 그 이유는 상품의 가격과 시장 점유에 있어서 예측 가능한 균형상태(equilibrium)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이 때의 시장 특성은 완전경쟁 시장, 시장의 예측 가능성, 균형/질서, 과학적 분석, 안정성 등이다. 한편 시장은 변화에 더디고 지속적이며 그 수확이 적다. 그래서 소비자의 수, 지역적 수요, 원재료 접근, 시장 등의 매점이 더 이상 불가능한 시장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네트 경제에서는 구시절의 경제 논리는 종결된다. 풍요와 수확 체증의 신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와이어드]지의 편집장, 케빈 켈리(Kevin Kelly)는 {신경제의 새로운 법칙들}(1998)이란 책을 통해서, 이를 뒷받침하는 두 가지 근거를 들고 있다. 우선 비트 혹은 디지털의 무한한 복제 능력으로 말미암아, 한계비용이 점차적으로 위축되고 상품의 희소성이 복제 능력에 압도당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네트워크의 노드(nodes) 숫자가 산술적으로 증가하나, 네트워크의 가치는 지수적(exponential)으로 폭발한다는 주장이다. 수확 체증의 세계에서는 네가티브(-)가 아닌 포지티브(+) 피드백의 메커니즘이 지배하며, 그 특성으로 시장 불안정성, 비예측성을 장기로 삼는다. 신경제의 이러한 특성들은 실지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서 출발한다. 이같은 모든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과거 좌파들에게 맹렬히 비판받던 시장 기제 등의 모순을 자신의 장점으로 흡수하려는 신경제학의 논리란 마치 스스로의 미천한 부르주아 경제학에 여타 이론들을 혼종교배하려 애쓰는 모습에 다름아니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애초에 산업 시대의 풍요가 경제이론가들에게 강심장을 낳았다면, 신경제적 특성에 대한 강조는 점점 더 압박해 들어오는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서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두려움의 표출이자 편집증적 해결이다. 하지만 신경제론자들이 파괴와 생성의 힘인 인도의 신, 시바(Siva)를 추종하여 자본주의의 불안정성과 비예측성을 논한다면 더 이상 논구할 대상이 못된다. 한편 수확 체증의 혜택은 지속적으로 포지티브한 승자들의 세계에서만 이루어진다. 이끄는 글에서도 한 벤처기업 사장의 말을 빌렸듯이, 시장은 수많은 다수의 약자들에게 어떠한 혜택도 돌아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수확체증은 강자들만이 점유하는 독식의 패권 논리다. 네트워크 경제의 기본 원리로 규모와 범위의 경제가 아직도 지배적인 한 새로움은 어디에도 없다. 결국 신경제론자들에게 네트의 경제적 가치는 실물 경제와 무관하게 주로 추상적 수준에서의 여타 잡종이론 포획의 지수 논리로 낙후한다. 3. 관용과 그 가상의 앙상블 미래 낙관론자들이 보기에 신경제는 공짜와 헐값의 관용으로 찬란한 '풍요의 시대'로 기록된다고 믿는다. 그들이 보는 풍요의 기제는 무엇일까? 그들은 새로운 시대의 두 가지 법칙을 꼽는다. 하나는 마이크로코즘의 혁명인 '무어(G. Moore)의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매크로코즘의 혁명인 '길더(G. Gilder)의 법칙'이다. 전자가 마이크로 칩을 염두에 뒀다면, 후자는 네트의 폭발적 힘을 과대평가 한다. 하이테크 이론가들은 이 두 법칙이 가격 형성에 있어 '逆가격'(Inverse Prices)을 발생시킨다고 본다. 그러나 단지 기술적 혜택만으로 이러한 상황이 도래할 수 있는가? 냉혈한 자본에 어떻게 이같은 아름다운 '공짜'의 미덕이 순간적으로 발기할 수 있을까? 초국적기업들의 소프트웨어 개발비만 해도 천문학적 단위가 투여되는 현실에서, 앞서 두 법칙만으로는 '공짜'란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옛 공장 형님이나 지금이나 그 '이윤'에 대한 헌신이 끈끈하게 맺어져 있는 상황에서. [와이어드]지 98년 3∼5월에 연재된 {신경제 용어사전}을 보면, A항목에 신경제의 핵심 용어로 'Attention Economy'란 개념이 등장한다. 그 번역은 '시선집중 경제'쯤 될까 싶은데, 이는 새로운 상황에서의 미디어 조건, 즉 소비자와의 상호작용성에 따른 시각적 잔상의 논리에 주목한다. 또 다른 연관 단어, 구시대 마케팅의 사활이었던 '시장 지분'(Market Share)에 대비되는 '정신 지분'(Mind Share). 시선을 집중하는 경제는 당연히 가시적인 점유율 뿐만 아니라 마인드의 지분이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아써의 또 다른 제언. 기업은 초기 점유율 확보(installed base)를 위해 엄청나게 할인하고, 능력만 된다면 공짜로라도 뿌려라. 그가 보기에 이같은 자본주의적 관용은 부수/2차 이익의 확보를 가능케 한다. 예컨대, 마이크로소프트(MS)사와 넷스케이프사의 웹 브라우저, 퀄컴의 메일 프로그램 유도라, 맥아피의 바이러스 퇴치용 소프트웨어, 썬의 자바 언어 등은 푸근한 관용과 공짜의 선례들이다. 풍요의 상품 세계에서 자사 상품의 덕목을 부각시키는 법은 '공짜'를 통해 사람의 주의를 끄는 것이다. 한 생산물이 공짜라면, 대개 이를 제공한 회사와 연계된 서비스 상품들은 마인드 확보에 성공한다. 네트 경제하에서 가치 창출이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로 도입되는 이러한 '선물 경제'(gift economy)의 부활은 허구일 뿐이다. 하우크(Wolfgang F. Haug)식으로 얘기하자면, 신흥 자본가들의 이같은 행위는 대중에게 '무관심성의 가상'을 연출한다. 즉 자본의 이윤 논리의 '현금화 관심'을 무관심성인 양 유혹하고 선전하는 행위로 위장한다. 그 궁극적 지향은 '선물 광고' 형식의 맛보기를 통해 구매 충동을 끌어올리거나, 소비자 욕망의 미세한 마인드를 중독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과거의 물리적이고 인구통계학적인 시장 분할식 마케팅 전략이 확장되어 마인드 점유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은 신경제의 소비자 포지셔닝 강도가 더 세졌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한번 하우크의 용어로 돌아가면, 항상 공짜와 헐값의 배후에는 한 기업이 보유하는 시장력 증대의 종합적/총체적/복합적 연출로서의 '현상형상'(Erscheinungsbild)이 자리잡고 있음을 간파해야만 한다. 4. 독점이여, 영원하라! 브라이언 아써는 자본이 시대적 불확실성을 타개하는 방식은 카지노 도박의 스타일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미래 예측력이 화투장을 교묘하게 놀리는 숙련된 자본꾼들의 손끝에 있다는 소리다. 모두 다 '주윤발'이 되라는 소리인데, 그는 이것이 자본 경쟁의 스타일이고 일종의 '방향 감각'이라 칭한다. 심리적 도박판에서 게임의 분별력을 소유한 빌 게이츠는 그래서 선각자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체로 이러한 논리가 첨단을 달리는 하이테크 산업내 경쟁에서 승리하는 비법으로 격상된다. 지식 경제에서는 승자가 모두 것을 차지하는 사활의 경쟁이며, 차기 기술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선각의 마술이 필요하다. 이 얼마나 과거보다 혹독하고 애매한 논리인가. 구시대에는 힘쓰는 자본끼리 나눠먹는 공생의 논리라도 있었다. 이젠 독식과 비상식의 논리가 나머지를 삼킨다. 신경제하에서 독점을 다루는 방식은 어떠한가? 그것은 기술적 용어로 '표준'(standard)과 '록-인'(lock-in)으로 표현된다. '표준'은 디지털 경제의 기본 원칙인 '편리성'에 기초해 보면 모두에게 이로운 것으로 상정된다. 표준의 배후에는 항상 표준을 이끄는 독점적 지배력이 숨어있기 마련인데, 이를 왜곡하는 것으로 사용자들의 '편리성'이 표준의 버팀목이 된다. 그들에게 독점의 폐해에 대한 보완책은 있다. 일개 기업이 기술적 한계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독점적 표준을 누리는 것은 부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한편 '록-인'은 한마디로 기술적 지배력에 도전하는 힘들이 침입하지 못하게 안쪽에서 걸어 잠그는 행위이다. 신경제하에서 기술적 우월에 입각한 록-인은 공정하며, 독점은 필요악이라 본다. 그들이 보기에 록-인은 소비자들에게 중대한 혜택을 주는데, 자본이 록-인을 위해 생산물 가격을 하락시켜, '역가격'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에게 돌아가는 관용의 시발은 록-인에서 온다는 발상이다. 그런 점에서 산업경제와 달리 신경제하의 독점 가격 형성은 별 걱정거리가 아니라고 판단한다. 또한 국가는 자본의 집중과 집적에 따른 독점적 향유를 인정해야 하며, 그 이유는 그들이 보기에 이 일시적 독점은 기업의 혁신과 위험에 대한 도전의 금전적 보상이기 때문이다. 즉 특정 자본이 개발하는 상품 유통의 초기 국면에서 혁신의 인센티브를 보장하는 아량을 보이는 것이 페어 플레이며, 궁극적으로도 그 자본이 시장에 대한 장기적 지배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논리다. 디지털 경제이론가들은 네트 경제에서 자연 독점의 불가능성에 대한 또 다른 이유로 '퇴화'(devolution)의 법칙을 든다. 네트 경제의 생태학적 특성에서 살펴보면, 네트워크나 유기체 환경은 지속적 유동과 비평형성을 강조한다. 퇴화의 원리는 창조와 파괴의 급변하는 커브 속에서 시장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들을 가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인정하듯 정상의 유동성과 수확체증의 국면은 초기 혹은 표준이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시점이다. 그 이후에는 시장력의 고착과 독점이 지배한다. 대체로 정보·통신산업 영역은 영세한 벤처자본에게 상대적으로 많은 새로운 시장진입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어 안정권에 들어서면, 구산업의 행태와 비슷하게 자본의 독점적 확장이 이루어진다. 신산업에 있어 표준과 록-인은 독점을 향한 새로운 히든 카드이다. 다시 한 번 하우크의 '현상형상'은, 네트 경제에 이르면 '고리 형성'(linking)과 '지렛대 작용'(leveraging)이란 독점화 과정으로 발현된다. 이 두 가지 과정은 한 제품의 이용층을 이웃하는 제품으로 자연스럽게 이동시키는 것으로, 이미 MS사가 O/S프로그램으로 DOS→Windows→Win95→Win98→MS Network로 패권화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이렇게 볼 때, 표준과 록-인은 혁신의 인센티브가 아니라, 장기적 독점의 과정을 돈독히 쌓는 작업인 것이다. 또 다른 독점화 과정은 심리적 전술에서도 이루어진다. 예컨대, 경쟁자에게 록-인되었다고 믿게 만드는 기법으로, 사전발표, 페인트(faint), 위협적 동맹, 기술적 치장, 미래적 제휴 관계의 매체 선전, 그리고 발표는 되었으나 상품화가 안된 베이퍼웨어(Vaporware)의 퍼레이드 등이 동원된다. 이로써 완벽한 심리적/물리적 시장 독점의 완벽한 구상이 꾸며지는 것이다. 5. 현실 정치의 비정치화, 그리고 경제화 이제까지 단상적으로 훑고 지나간 몇 가지 논의를 통해서 보자면, 신경제론자들의 네트 시대의 새로운 경제란 산업자본주의의 변형된 적자일 뿐이다. 이제 디지털 경제의 문제는 정치 영역에도 그 무한한 힘을 가동시킨다. 디지털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네트 시대의 정치는 크게 보아 디지털상품을 소비하며 네트에 접속하는 개인들에게 이루어지는 무한한 '권능'(empowerment)의 유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는 새로운 민주적 커뮤니케이션의 건설과 해방의 테크놀로지에 대한 언약으로 이루어진다. 일례로 글로벌 컴퓨터사인 썬(Sun Microsystems)사는 한 광고 지면을 통해, 현실의 종교, 정치, 잘못된 처방의 기술 등 역사적인 모든 것들이 네트워크 컴퓨터 기술과 대당에 서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바로 그들이 개발한 네트워크 기술만이 제현실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군림한다. 또 다른 하이테크 기업의 약속. 미국의 거대 텔레콤 회사인 MCI사는 인터넷 서비스 가입을 가상 공동체 편입의 전제로 약속한다. "매달 9.95달러에 인터넷을 무제한으로: 당신은 이제 시간 제한없이,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빠른 네트워크에 지역적 제한없이 액세스를 할 수 있다. 지금 빨리 전화하여 이 파격적인 3달간 할인 요금으로 가입하여, 글로벌 온라인 공동체의 일부가 되십시오."(Wired, 1997. 10.) 인터넷 접속 비용과 전화비를 낼 수 있는 능력만 된다면, MCI사의 인터넷 가입이 곧장 '글로벌 온라인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 등치된다. 온라인 서비스의 가입이라는 사적인 소비와 온라인 공동체라는 공적 모임이 뒤섞임으로써, 사적 소비 자체가 공동체의 본질인양 호도되는 것이다. 이같이 논의의 과도한 비약을 정보통신기업들이 차용하는데는 대중의 공동체에 대한 욕망을 적절히 간파하는 그들의 능력에 있다. 대중의 욕망은 현대의 지시물 없는 상실감에서 비롯된 치료제 역할로 전통적 공동체의 대체물인 가상공동체를 희구하는데 있다. 글로벌 사기업들은 명민하게도 온라인 공동체를 인터넷의 물적 배경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역할, 그리고 기술의 수용, 대중의 의식적 통합과 친근성, 상품 소비 등을 원활하게 이루기 위한 촉진제로써 보고 있는 것이다. 자본의 비정치화 주도는 결국 경제화를 위한 고리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가상공간의 민주주의적 전망이 사적 자본에 의해 자연스레 편입되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세계를 터는 강도'들은 물리적/정신적 영역에 걸쳐 우파의 비전을 세우고 있다. 그 파장을 비껴가는 길은 내가 보기에 먼지에 쌓인 '경제의 사회화'를 털어 일으켜 세우는 작업일 것이다. 예컨대, 시민단체와 정부 그리고 기업이 모여 신기술 개발의 공적 전망을 세우고, 정부가 나서서 과도한 집중과 독점을 방지하며, 이윤의 결과에 대한 수혜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것 등이 필요하다. 네트의 '빛'이 그 기술적 가능성에 있다고 본다면, 이용 주체들의 좌파적 전망과 사회적 적용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비정치화의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네트적 실천과 연대가 요구되어진다. 이같이 새로운 가상의 '그늘'들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그 속에서의 역공이 가장 큰 무기일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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