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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커] 우울한 특명: 파워레인저, 위험에 처한 인터넷 게시판을 구하라!

우울한 특명: 파워레인저, 위험에 처한 인터넷 게시판을 구하라! 이광석 (suk_lee@jinbo.net) 여섯 살 먹은 아들녀석이 요새 '파워레인저'에 흠뻑 빠져 있다. 도통 다른 건전 명랑 비디오들이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서부 총잡이와 사무라이식 폭력이 난무하는 이 비디오만 보면 여린 감성을 자제 못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파워 레인저! 기다려, 내가 구출하마! 괴물아, 덤벼라, 슉슉, 퍽, 으악". 시청하거나 그 이후에 보여지는 진기한 태도 변화다. 사태가 이쯤되면 난 늘 몸을 불사르며 아들을 상대하는 사악한 괴물이 돼야 한다. 아이가 그토록 좋아하는 파워레인저 시리즈물을 두루 섭렵하다보니 내 눈에 정말 온갖 나쁜 것은 다 들어온다. 폭력은 기본이고, 인종적 편견으로 똘똘 뭉쳤다. 우리 애가 유독 다섯의 레인저 가운데 붉은 옷을 입은 백인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항상 중앙에 서 있고 제일 힘센 백인 레인저는 다른 변두리 넷과 함께 정의의 이름으로 악을 처단키 위해 무력과 폭력도 불사한다. 게다가 파워레인저의 선악 이분법은 상상을 초월한다. 현실은 단순하다. 선과 악, 적과 나 단순 대칭뿐이다. 적같기도 하고 아같기도 한 중간의 인물 설정은 애초에 없다. 또한 극 전개상 악과 적은 뻗거나 반쯤 죽는 정도론 부족하고 완전히 죽어 터지거나 사라져야 직성이 풀린다. 단순무식성은 목적하는 바에 빠르고 쉽게 이르는 방도지만, 그 가는 길에 다양한 경우들이 무시받고 다칠 수 있다. 이분 구도에 사로잡혀 악과 적을 치려다 잘못해 동료를 다치게 하거나 상관없는 제 삼자를 잡는 경우도 생긴다. 마치 미 우익 매파들이 이라크 땅에 뿌렸던 '눈먼' 폭탄들처럼 악의 씨를 말리겠다고 초가삼간은 물론이야 무고한 어린아이들까지 저 세상에 보내는 험한 꼴이 나올 수 있다. 파워레인저식 단순성의 폭력은 사회 곳곳에 배어 있다. 그저 그렇게 나두면 큰 별탈없이 갈 것을 뭔가 가두고 단속해야 직성이 풀리는 심사들이 그렇다. 잡음과 탈이 영원히 사라져야 할 것으로 보이면 이에 대한 무식한 발길질이 저도 모르게 시작된다. 특별히 새롭게 부상하는 문화 현상에 대해 구태의 버릇에 빠진 이들은 스스로 파워레인저가 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젊은이들의 총천연색 머리에 가위를 대거나, 코나 입에 뚫은 링을 잡아당기거나, 인터넷방에 통금 시간을 매기는 둥 비상식의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 얼마전 뉴욕의 한 허름하고 작은 호스텔에 묶은 적이 있다. 뉴욕 맨하턴 시내에서 여러 날을 보내야 했기에 비싼 여관비를 감내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한창 바람의 대학 초년생들이 배낭 여행길 추억을 담기 위해 잠시 머문다는 호스텔이 내 잠자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욱 당황했던 것은 8개 간이 이층 침대가 놓여 있는 방에서 얼굴도 모르는 16명의 지구촌 젊은이들이 뒤섞여 함께 잤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각자 잠자리를 유지한 채로 말이다. 알고 보니 이 작은 공간에 느꼈던 내 당혹감이 얼마나 어줍잖던지. 남녀유별의 설익은 윤리에 감염되어 살아왔던 나로선 이 호스텔의 자율 논리를 금방 깨우치질 못했다. 여럿이 방을 공유하면 슬슬 눈에 보이지않는 에티켓과 질서가 자리잡게 돼 뜬금없이 욕정이 일어설 일이 없었다. 이것이 성인 남녀가 머리 맞대고 자도 별 일이 없던 이유다. 또한 자신이 덮었던 이불을 항상 개고 퇴실시 빨래 수거함에 넣고, 사용한 식기를 각자 닦고, 뒷사람을 위해 화장실의 젖은 수건과 휴지를 갈고, 타인의 수면을 위해 실내 조명을 조절하는 등 투숙객들은 해야할 몫을 한순간에 터득한다. 매일같이 방에서 보는 얼굴들이 여럿 바뀌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규칙은 누가 크게 일러주지 않아도 유지된다. 분명 파워레인저였다면 남녀 혼숙에 의한 음탕 조장 방조죄로 호스텔을 무자비하게 때려잡았을 것이다. 공명심에 부르르 떠는 파워레인저라면 호스텔을 러브호텔로 착각할만하다. 호스텔에 드는 이들이 많다보면 간혹 문제가 있기도 하다. 밖에서 방값을 치르지않은 동료를 몰래 불러들이거나 술먹고 취중 객기를 부려 타인의 수면을 방해하거나 귀중품을 훔치거나 먹고 씻고 뒷처리를 나몰라하는 등 여러 잡음과 탈들이 많다. 하지만, 이는 호스텔의 근본적 운영 규칙을 뒤흔들지 못한다. 수십년간 호스텔 주인이 무리없이 경영해온 노하우는 그저 성별로 갈라놓는 목욕탕같은 단순한 경계와 통제의 규칙이 아니었다. 주인은 자율의 논리가 통제와 감시보다 낫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안다. 요즘 인터넷 게시판을 관리하던 호스텔의 맘좋던 주인을 파워레인저로 전격 교체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 과정에 정보통신부가 나섰다는 얘기가 있다. 파워레인저에게 '실명제'라는 초강력 무기를 쥐어줬다는 소문이다. 이걸로 불순한 게시판문화를 때려잡겠다는 얘기다. 인터넷 문화 현상의 소소한 탈을 다스리겠다고 할 일 많은 한 나라의 정보정책 집행기관이 주책없이 흥분해서야 되겠는가. 그간 게시판의 자율과 건전성이 익명을 이용한 소수 악덕 네티즌들에 의해 위협받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탈을 막겠다고 벌인 실명제가 공공기관 등이 개설한 게시판 참여를 떨어뜨리고 그나마 찾던 발길마저 끊게 만들면서 아예 게시판 문화 존립의 목까지 조르고 있다. 금융 '실명제'로 검은 돈을 양성화해 건전명랑한 시장 경제를 회복하듯 인터넷 게시판문화를 이에 똑같이 견주려하면 곤란하다. 익명이 게시판을 살리고 건강을 키우는 전제라면 전세계 유례없는 실명 도입은 극약 처방과 같다. 파워레인저의 단순 무식한 칼바람만 게시판에 그득해서야 곤란하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전세계의 남녀가 만나도 신기하게 문제없이 잘 유지되는 호스텔의 자율적 논리는 온라인 게시판 또한 가지고 누려야할 문화다. 마땅히 지금 파워레인저에게 내린 정통부의 '위험에 처한 인터넷 게시판을 구하라'는 특명은 거둬져야 한다. 그래야 한국의 게시판 문화가 고사하지 않는다. <끝> 2003. 4. <네트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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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대 교지] 네트의 '파워 엘리트'

네트의 '파워 엘리트' 명지대 교지 수록(99년 6월) 1. 21세기 '파워 엘리트' 분석을 위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와 관련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보다 주목해야할 부분은 과연 글로벌 시대의 '파워 엘리트'의 속성과 계급적 본질이 무엇인가이다. 과거 80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관련하여 소장학자들을 중심으로 붐을 이루었던 연구 내용 중 하나를 꼽으라면, 우리는 계급 분석을 들 수 있다. 그 당시 한국 사회의 계급분석은 대체로 한 사회구성체의 주/부 모순 관계를 밝혀, 적대 관계와 전선 형성 등을 통해 체제 이행의 가능성을 마련하는데 있었다. 주로 경제학이나 사회학계에서 이같은 작업을 수행하였는데, 변혁과 이행의 활로가 막혀버린 90년대에는 실지 계급 분석과 관련된 연구 영역은 비인기 종목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내가 그 비인기 영역을 반복하여 탐구하려고 이런 말들을 내어뱉는 것도 아니며, 본인이 그렇게 정치한 분석을 수행할 능력 또한 없다고 자인한다. 하지만 도대체가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적 권력 유형과 특성이라도 알아야 이에 저항할 수 있는 고리들이 생길텐데, 그 현실적 역학구도에 대한 감이 전혀 잡히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연 현대 권력의 정점은 무엇일까? 추상적으로나마 우리는 초국적 자본가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들간에는 격한 지각변동이 벌어지고 있다. 예컨대, 미래학자인 토플러((A. Toffler)의 '권력이동'이란 사실 글로벌 자본내/간 지각 변동에 대한 자본 내부적 고찰에 해당한다. 글로벌 자본가들의 지속적인 판세 유지와 그들의 새로운 영역 진출, 그리고 새로운 분야에 진출한 디지털자본가들의 전자 프런티어 자리잡기가 한창 진행 중에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서 일반 대중을 호도하는 토플러식의 하이테크 이데올로그들도 소리 높여 새로운 시대를 맞을 예언자적 역할을 자처하기 마련이다. 자유주의에 사로잡힌 정책 관료들은 탈규제 법안과 각종 혜택 조항으로 돈많은 신진 엘리트 회원들의 충실한 조정,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자임한다. 이 파워 계급/계층들은 거대한 물결을 만들어내면서, 새로운 밀레니엄을 위한 권능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2. '권력이동'의 내용 과거 물질 생산에 기반했던 다양한 핵심 인자들은 국제적 네트워크의 등장으로 인해 다종다양한 격변을 치른다. 역사적 조건하에서 진행된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모순이 잠재해있건 아니건간에, 라이히(R. Reich)의 '상징분석가', 토플러의 '코그니테리아'(cogniteria), 그리고 벨(D. Bell) 식의 '지식노동자' 개념 등은 테크노 기술에 의한 계급지형의 본질적 변화를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개념화는 특히 노동자 위상과 관련하여 노동 버전의 새로운 업그레이드를 상정한 용어이다. 즉 이 개념들은 한마디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중 노동자들의 노동 통제권과 관련하여 구상/실행이 통합됨으로써, 그들에게 생산 과정에서의 통제적 자율권이 신장된다는 '마찰없는 자본주의'(friction-free capitalism)의 신버전이다. 어쨌거나 현재 테크노 기술의 위상은 경제적·사회적인 유토피아적 가능성, 자유주의적 전망 등을 포함하며, 더 나아가 물질 세계의 해체까지도 주장하는 다양한 계급과 계층을 생산해내고 있다. 그 중 우리의 관심사는 새로운 지배계급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다. 아마도 90년대 현실의 정치적·경제적 지배계급을 가장 잘 묘사한 용어 중 하나는, 하이테크 이론가인 아서 크로커(A. Kroker)의 글로벌 '가상계급'(virtual class) 개념일 것이다. "인간의 일반 이익을 테크노토피아라는 특수 이익으로 제시하는", 이들 계급의 전선에는 미 행정관료와 디지털 신생자본가들이 포진한다. 크로커가 보는 가상계급의 주체들은, 우선 미래적 비전을 주도하는 실리콘 밸리의 하이테크 자본가들과, 위계상 한 단계 아래의 하이테크 벤처 자본가들, 인공지능 과학자, 엔지니어, 비디오게임 개발자, 컴퓨터 과학자들과 여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 등등으로 구성된다. 이들 가상계급은 20세기의 변종인 약탈적 자본가들과 신종 테크노 엘리트들이 결합된 형태를 띠고 있다. 곧 20세기 말의 하드웨어 지배자가 21세기 소프트웨어 문화를 통제할 것이란 전망이 가능하다. 이들 주체간 계급 전선의 형성은 주로 정책적 '테크노프로젝트'를 통해 이루어지며, 관심사의 조율까지도 이뤄낸다. 물론 가상계급의 전체 조정·관리권은 정부의 손에 달려 있다. 국가는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편견을 가진 개입자로 등장한다. 즉 시장지상주의는 정부의 행위를 줄이지 않으며, 실제적인 면에서 증가시킨다. 정부 행위의 본질적 측면에서, 의도된 산출물을 명령하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독점적 시장을 유지하는 것으로 그 임무를 이동시킨다. 이런 정황에 미루어 짐작해보면, 디지털이란 외피에 가려진 가상계급과 국가 권력장치간의 동침 관계가 새로운 지배계급의 내용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크로커는 90년대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하드 이데올로기'가 급격히 쇠퇴하고, 가상계급의 '소프트 이데올로기'가 주도한다고 바라본다. 포스트자본주의 사회의 통치 엘리트들이 사용하는 보편 언어가 그 중심에 선다는 입장이다. 그가 말하는 소프트 이데올로기는 디제라티와 미국 행정부관료, 디지털 자본계급의 테크노신화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웨스트민스터대학의 하이퍼미디어 연구소 소장인 바브룩(R. Barbrook) 식으로 얘기하자면, 미국 서안의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한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Californian Ideology)가 그 소프트 이데올로기에 해당한다. 3. 테크노 '파워 엘리트'의 속성: 정주권력에서 유목권력으로 도시사회학자인 까스텔(M. Castells)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대의 공간은 '장소공간'(the space of space) 보다 '흐름공간'(the space of flow)이 우위에 선다. 이 말은 자본의 국제적 이동 능력과 추상화가 그 어느 때보다 급진전되었다는 얘기이도 하며, 권력 소재지가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최근 주목받는 네트의 저항적 실천집단인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Critical Art Ensemble)에 따르면, 현대적 권력은 이미 각각의 정주화된 지역, 장소에 머물기보다는 네트워크를 흘러다닌다. 그래서 이들은 현대적 권력 재현의 방식이 정주적(定住的, sedentary) 형태에서 유목적(遊牧的, nomadic) 형태로 이동한다고 본다. 우선 그들이 저항 지점으로 보는 권력은 실체가 없다. 오직 권력은 그 표상으로 드러난다. 기껏해야 '통치계급', '파워 엘리트' 등과 같은 추상화된 명명뿐이다. 우리는 거대 권력을 소재가 상실된 '효과'에 의해서만 체험할 수 있다. 현재 국내를 포함한 아시아 금융 위기라는 사태가 글로벌 핵심자본의 취산(聚散) 과정 속에서 배태된다고 본다면, 그들의 논리는 설득력이 높다. 다른 한편 권력의 유목성은 '속도'를 필요로 한다.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흘러 다닐 때, 권력간 우위는 '시/공간 압축' 능력과 '중력장 극복의 속도전'(escape velocity)에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도시연구가인 비릴리오(P. Virilio)는 이러한 속도성의 원천을 '행동적이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behavioral inertia)에서 찾으며, 이를 과거 '동적인'(dynamic) 물리적 운송 장치들(기차, 오토바이, 자동차, 비행기 등)과 구분하고 있다. 그의 개념에 입각해 보면, 이같은 '속도기계'를 자신의 힘으로 체득한 특권 집단이 새로운 테크노 '파워 엘리트'인 것이다. 4. '역사의 종말'은 어디에도 없다 이제까지의 지배계급의 권력이동을 통해 보자면, 우파 이데올로그인 후쿠야마(F. Hukuyama)가 지리하게 언급한 '역사의 종말'과 같은 새로운 자본주의 역사의 시작은 어디에도 없다. 오직 있다면 자본주의의 계급적 모순과 불평등의 재생산 지형의 연장과 그 변형만 있을 뿐이다. 물론 네트가 마련한 풍부한 기술적 가능성이 우리 앞에 놓여 있긴 하다. 혹자는 네트가 미래의 새로운 천년왕국을 다시 세울 수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실지 "대중에게 모든 권력을!"이란 슬로건의 밑바닥에는 상품화 논리가 각인되어 있다. 최저 균등 이용 요금에서 이용당 요금지불 체계로, 정보의 생산에서 소비로, 정보 추구보다는 오락과 쇼핑으로의 전환은 한마디로 인터넷의 상업화를 지칭한다. 인터넷이 더 나은 것, 즉 정보초고속도로로 바뀔 수 있다는 가상계급들의 비전은 구계획 경제의 국가 프로젝트에 비견할만한 바다. 아니 규모면에서 보면 그 이상이다. 세계경제의 종주국인 미국 행정부에서부터 밀어붙이는 사업 내용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들의 비전은 물활적으로 움직여나가는 네트의 본성을 글로벌 기업의 이윤 동기하에 구획화하려는 음모에 가깝다. 네트의 자생을 가로막는 가상계급의 음습한 기도는 인터넷 모델을 역회전하여 새로운 자본 모델로 바꾸려는데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정치적 근원에서 새로운 계급은 사회적 원칙이 결여된 자유지상주의의 가치관, 정부와 하이테크 기업의 신우익적 행동 방식이 뒤섞여 있다. 새로운 엘리트들이 간간히 드러내는 자유주의적 속성조차 대체로 우파적 경제 논리에 의하여 압도당하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기존 보수 우익체제의 정치적 사고에 그 끈을 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민주적 담화에 역행하여 한층 새로워진 권위주의를 구상하고, 테크노토피아에 반하는 모든 반대를 억압하며, 의회정치를 지적 재산권의 전쟁터로 이끈다. 경제적 정의에 역행하여 약탈적 자본주의의 재부활과, 고용조정에 의한 만성적 실업상태, 사회복지예산 축소 등 신자유주의적이고 기술 합리적인 결합을 시도한다. 이들은 경제적 지형에서 보자면, 철저하게 글로벌 사업의 지배적 세력이자 독점적 세력이다. 이는 자본의 내적 (재)구조화 과정에 따른 구조개편의 경향성과, 신계급 중심으로의 형식적 계급이동에 다름 아니다. 즉 "20세기 하드웨어를 통제하는 자가 21세기 문화의 소프트웨어를 지배"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고전경제학의 역사와 정치를 초월하고 '종말'시키는 자들이 아니라 온존하게 계승하는 부르주아 형님들의 후계자들이다. 5. 신계급의 '위상학적 지형 그리기'를 제안하며 이제 권력에 대한 저항의 조건이 현실의 지배적 지형도를 확보하는 것이라 볼 때, 새로운 권력의 출처와 구성, 성격, 방향 등을 분석하는 일이 시급하다. 다시 말해 새로운 파워 엘리트들의 성격 변화와 그 변화의 진원지, 파워 엘리트를 구성하는 실세들과 그들간, 그들과 구계급간의 관계를 계보적으로 추적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하이테크 정보기술이 주는 무한한 가치만큼이나 이들 계급 내부의 지형도 정확히 결정내리기 어렵긴 하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권력의 확장과 지배에 직면하여 새로운 저항의 방식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으로 권력지형에 대한 밑그림이라도 그려야하는 것이 상책이다. 분명히 새로운 지배계급이 등장하는데는 그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을 것이고, 또한 그들의 연합세력 내지 이데올로그들과 잡다한 지적 돌팔이들이 기생 혹은 연합할 것이란 사실이다. 이 모든 전선을 구체적 일상에다 끌어오는 작업은, 현실 권력지형을 추상적으로 그려봄으로써 저항의 지점들을 확보하기에 중요하다. 일종의 가상계급의 '위상학적 지형 그리기'(topological mapping)가 필요한 것이다. 이 작업의 전략/전술적 의의는, 우선 우파적 정보 담론을 상시적으로 구체적 현실의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네트를 추상성의 나락으로 빠뜨리지 않으면서, 물리적 현실 속에서 좌표점을 찾을 수 있는 작업이다. 둘째, 새로운 지배계급의 계보 그 자체를 추척함으로써 계급간 모순의 지점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를 통해 새로운 저항과 연대의 전선 형성과 새로운 저항 방식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각각의 저항 단위들이 "이젠 그만!"의 즉자적 울림들을 합일된 전자적 파장으로 전환함으로써, 여기저기 권력의 '속도기계'에 속도 지체의 힘을 가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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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과학: 서평] 이제 문제는 정보 게릴라전이다!

<주제서평> 이제 문제는 정보 게릴라전이다! *계간 [문화과학] 15권 1998 가을호 (쎄르지오 볼로냐·안또니오 네그리외 지음/ 이원영 편역, {이딸리아 자율주의 정치철학 .1}, 갈무리, 1997.) (해리 클리버지음/이원영·서창현 옮김, {사빠띠스따-신자유주의, 치아빠스 봉기 그리고 사이버스페이스}, 갈무리, 1998.) 현실 자본주의가 끊임없는 불안정성에 놓이는 중심 원인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정부성에 있는가? 아니면 자본의 태생적인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과 주기적 공황에서 비롯되는가? 오히려 발본적으로는 중세 이후 토지로부터 이탈하여 자본가와의 계약에 의해 노동력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게된 "자유로운 노동자의 통치불가능성"의 시발이 자본에게는 더욱 큰 불안정성으로 다가온다. 자본주의의 역사 이래로 관건은 운동의 객관적 법칙이었다기 보다는 노동 주체가 지닌 자율적 힘과 자본간의 역학관계에 주어져 있었다.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모든 '삶-시간'(life-time)을 '노동-시간'(labor-time)으로 흡수하여, "인간의 생산적 활동을 노동시간으로 전환시키는 가치화(valorization)"를 그 전략으로 삼는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순수 경제 영역을 넘어 '사회-공장', '사회적 테일러리즘'으로 확대하여 재생산 한다. 자본의 '가치화' 영역은 공장 체계를 넘어 전통적 노동자를 포함한 억압받는 모든 이들의 사회적 삶에 걸쳐 있다. 이에 대응하여 새로운 사회적 주체인 피억압자들은 '노동-시간'을 '삶-시간'으로 흡수하는 방향, 즉 네그리의 용어로 '자기-가치화'(self-valorization)의 운동을 취한다. '자기-가치화'의 운동은 '자기-활동성', '거부의 힘', '자생성', '자율성', '자발성', '다양성과 다차원성', '야성적 에너지', '주체적 구성', '과정으로서의 조직' 등등을 담지한다. 이제까지의 주장은 이탈리아 자율주의자들의 글들을 편역한 {이딸리아 자율주의 정치철학} 중, 총론격인 이원영의 [오늘날의 계급 구성과 '자율성' 개념의 발전]에서 찾아낸 주요어들이다. 반대로 자율주의자들의 적대어는 레닌주의적 기획, 주체화가 아닌 대상화, 관료화, 지도, 운동의 객관 법칙, 전위적 대리주의, 투쟁을 객관적 법칙의 효과로 보는 것 등등이 된다. 좌파 내부의 역사를 통해 이원영에게서 탐사된 이같은 적대어의 소재지는 엥겔스를 출발로, 레닌에게서 보다 강화된 형태로 드러난다. 그가 보기에 소위 정통적 좌파들의 역사는 "자기 충족적이고 자율적인 계급주체"와 "자생적이고 과정으로서의 조직관" 대신 계급 주체들의 자율성을 대상화하고 대리적 전위로 대치시키며 권위주의적 당 개념으로 흡수하는 '정박(碇泊)의 정치'였다. 그래서 그는 '정박의 정치'란 자율성의 야성적이고 변덕으로 가득찬 힘과 어울릴 수 없다고 말한다. 계급 주체들이 자기-가치화에 입각하여 "카오스 속에서 두려움이 아니라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정치, 그 유영(遊泳)의 정치"의 가능성을 그 과제로서 던진다. 이원영과 자율주의자들이 보는 '유영의 정치'의 미래 가능태는 디지털 속성에 어울리는 짝이다. 단 계급 주체들이 네트를 변형적이고 자기-가치화에 의거해 이용한다는 조건하에서만 기술적 속성, 즉 개방성, 자율성, 즉시성, 상호소통성 등등이 가능태로써 기다린다. 이 책에 실린 프랑꼬 삐뻬르노(Franco Piperno)가 [기술 혁신과 감성 교육]에서 지적한 바처럼, 문자 문화란 이론과 해석에 의해 결정과 범주로 치달아 버리나, 컴퓨터 기술은 '수행적(operative) 문화', 끊임없는 변형이 가능한 상황을 연출한다. 객관적이고 대상화된 얼개로 규정된 문자 문화의 정치에서 자율적이고 다양하고 다차원적으로 변형하는 디지털 문화의 정치가 자율주의자들의 정치철학을 보다 분명하게 현실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다른 한편으로 추상적으로만 언급된 이같은 자율 운동의 계급 주체들을 묶는 통일, 상호 보완, 연대 등의 과정적 힘 또한 네트의 네트워킹 개념에서 그 구체적 실효를 얻는다. 자율주의자들은 자기-가치화의 가능태를 현실태로 전화하는 진정 제대로 된 실험 대상을 발견했다. 인간의 존엄성, 희망, 삶-시간을 복원키 위한 최초의 정보게릴라 운동이 남미의 한 후미진 지역에서 시작된 것이다. 사빠띠스따가 추구하는 '복수의 울림들과 목소리들의 네트워크', '어조와 수준이 다양한 여러 목소리들의 네트워크'와 '저항과 희망의 네트워크'는 그들 외부에서 객관적 전망하에, 대리적 전위에 의해 대상화하여 그려진 모델이 아니다. 이는 그들 자신의 자기-가치화를 향한 실천을 통해서 생성되는 저항의 과정 모델에 가깝다. 미국내 국가안보의 두뇌집단들이 모여있는 랜드연구소의 연구원, 데이비드 론펠트(David Ronfeldt)는 3년전 내부 보고서를 통해 멕시코의 사빠띠스따를 다루면서, 이제 사회적 네트전(netwar)이 21세기 새로운 초국적 정보전쟁의 원형이 될 것으로 가늠했다. 멕시코 남동부 치아빠스 지역의 라깡도나 정글에서 벌어지는 마야 원주민들과 사빠띠스따들의 투쟁이 미국을 위시한 글로벌 자본의 지칠줄 모르는 확장을 거역하는 국지적 위협으로 상정되고 있는 것이다. 역으로 '야만적' 자본에 대한 이름 없는 한 밀림 지역의 울림을 현실 저항의 적극적인 정치 실험대로 평가하는 일군의 불경스런 이들도 존재한다. 이미 국내에도 알려진 바 있는 북미의 대표적인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이자 텍사스 대학의 경제학 교수인 해리 클리버(Harry Cleaver)도 이런 축에 낀다. 자신의 홈페이지가 차단될 정도로 미국내에서도 '악명'을 날리는 그는 현재 웹에서 '치아빠스 95'를 운영하며, 사빠띠스따에 관련된 자신의 디지털 논문들을 등록해 놓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 갈무리 출판사가 새로운 정보자본의 논리를 피억압 계층의 현실 대안적 무기로 되돌리려는 기획의 첫번째 일환으로 그의 디지털 논문들을 정리하여 이를 번역해 내놓았다. 클리버의 {사빠띠스따}에서는, 최근 국내에서도 구조조정의 고통을 감내할 것을 요구하는 초국적 금융자본체인 국제통화기금(IMF),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멕시코 자국내 제도혁명당(PRI)의 신자유주의에 맞서 그들이 왜 총을 들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그 지구촌의 변방에서 사이버전(cyberwar) 혹은 "말과 이미지의 정보전"을 펼칠 수 있었는가 등의 문제를 상세히 살피고 있다. 올해 초 뉴욕의 오토노미디어(Autonomedia) 출판사에서 발행된 {사빠띠스따!}가 사빠띠스따 혁명군 자신의 인터뷰, 선언문, 성명서 등을 모은 1차 자료라면, 국내에 번역된 {사빠띠스따}는 한 북미 지식인의 활동과 눈으로 본 2차 분석글이다. 2차 문건은 아무래도 정치적 해석의 정향성이 문제의 빌미로 비쳐질 수 있으나, 다행히도 클리버가 보는 저항 단위의 자기활동성에 입각한 분석은 사빠띠스따의 정보게릴라전의 구체적인 맥락에 충실하다. 역자인 이원영의 부록 논문에서도 사빠띠스따와 관련하여 좌파내 국제주의자와 자율주의자간에 벌어지는 엇갈린 평가를 정리하면서, 이같은 좌파내 논쟁의 승화를 통해 그 자율주의적 실험 안에서 자본에 대한 저항의 "새로운 상상력과 지혜"를 수확해낼 수 있길 바란다. 이 책을 통해, 더 나아가 그들의 정치 실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사실은, 최근 한창 과잉 포장되고 있는 전자공간에 대한 실천적 기대감이란 것도 현실 지형에서 행하는 저항 단위들의 권력에 반하는 거부와 실천 행위의 결합 없이는 디지털 허상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는데 있다. 그 반대로 디지털 영역의 새로운 가능성에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는 유아론적 운동 방식 또한 항간에 유행하는 담화로 표현하자면 '무대포 정신'에 집착한 소모적 몸짓일 뿐이다. 즉 네트의 혁명적 속성과 현실적 실천 내용간의 고도의 맞물림이 저항 효과의 기본 변인이라는 점에 착안해야 한다. 한편 이들을 주시하는 관찰자의 역할은 우선 새로운 투쟁방식을 제대로 이해하고 과장 없이 독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의 문제"로 투사하여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자세이다. 최근 출판 환경의 유익한 특징 중 하나를 꼽는다면, 인터넷에 업로드된 영문 논문들의 저작권을 '좌회'(copyleft)하여 번역 출간하는 경향이다. 지면에 소개된 {사빠띠스따}도 영세한 출판업계에 카피레프트 실현의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인터넷의 광대한 쓰레기 바다에서 항해하다 운좋게 건질 수 있는 디지털 '월척들'(wisdoms)을 시의 적절하게 (하이퍼)텍스트로 공유하고 배포하는 노력들은 미래 출판운동의 정보 게릴라 전술로써 기대할만한 바다. (이광석 /중앙대 신문학과 석사졸, 네트 분석가, [사이버 문화정치]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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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심의조정위원회] 문화유산급의 디지털 마인드웨어를 키우자

新文化人 사랑방: 문화유산급의 디지털 마인드웨어를 키우자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민족국가 고유의, 여러 세대에 걸쳐 계승되고 발전하는 유/무형의 사회·문화적 자산을 지칭해 흔히들 ‘문화유산’이라 한다. 세상이 바뀌면 문화유산의 내용물도 변한다. 역사 유적처럼 방범용 유리를 사이에 두고 멀찍이 떨어져 관찰해야 할 문화유산도 있지만, 현재와 함께 호흡하는 무형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존재한다. 음식 맛, 춤사위, 소리, 관습 등은 다 형체는 없지만 우리만이 가지는 고유의 자산이다. 한편, 이제는 거의 실패한 유산이 돼버렸지만 ‘아래한글’ 소프트웨어도 민족적 자존심을 드높였던 점에서 이에 준한다. 나는 이 모든 무형의 자산들을 합쳐 ‘마인드웨어’로 보고 싶다. 마인드 가치가 물질을 압도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이를 문화유산이나 국가적 자존심으로 격상해 보려는 시각은 드물다. 특히 디지털로 만들어지는 마인드웨어는 시장에서 자라지만, 이를 벗어나 성장한다. 시장의 마인드, 즉 소프트웨어는 당장의 시장 이윤과 밀접하지만, 디지털 마인드웨어는 이를 넘어 한 나라의 경제 인프라와 살림의 백년대계를 세우는데 쓰인다. 결국 마인드웨어의 가치는 국민의 자긍심을 책임질 국가의 노력이 첨가돼야 생명력을 얻는다. 지금처럼 한 나라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즈, 익스플로러, 오피스, 서버 등 하나의 다국적 소프트 ‘제국’에 목을 맨다면 그곳의 디지털 마인드웨어 구상은 부질없다. 이미 올해초 엠에스의 취약한 서버들이 국내 ‘컴퓨터대란’의 주역을 떠맡고, 지난 5월에는 ‘패스포드’인터넷 서비스 이용자 2억명의 비밀번호가 외부에 노출돼 엠에스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판이다. 그럼에도 이 부실한 제국에 한 나라의 디지털 마인드를 담보잡혀 있는 상황은 큰 불운이다. 코드의 개방과 협업 과정에 의해 만들어지는 개방형 소프트웨어가 일반 상업 소프트웨어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상업용 소프트웨어에서 흔히 관찰되는 “보기만하고 만지지마라”식의 소스 코드에 대한 제한적 접근에 비해, 개방형 프로그램은 의도한대로 쉽게 변형 가능하고 여럿의 공유와 검증을 거쳐 보다 안정적 환경을 제공한다. 특히 그 대표격인 리눅스는 생산 과정에서의 경쟁과 비배제의 논리, 그리고 프로그램의 저렴한 가격과 안정성을 각국 정부로부터 인정받아 엠에스의 가장 강력한 대안으로 자리잡고 있다. 일본, 중국, 대만, 필리핀, 영국, 프랑스, 독일, 핀란드, 아르헨티나 등 갈수록 여러 정부들이 보안 능력, 안전성, 경제적 비용면에서 월등한 개방형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국가 정보정책의 미래가 달린 문제라 판단하고 이미 중앙 부처뿐만 아니라 하급 단위의 공공기관들, 자치단체들까지 개방형 소프트웨어를 독려한다고 한다.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진국과 일부 개발국의 이와 같은 독자적 디지털 마인드웨어의 구상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전세계 리눅스 확산을 막기 위해 엠에스가 펼치는 고도의 마케팅 전술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프로그램 할인은 기본이고 공격적인 자본 투자, 비영리 단체 기부나 지원, 프로그램의 일부 소스코드 공개 등으로 투자대상국이 딴맘 먹을 틈을 주지 않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선 우리 정부가 독자적 길을 걷는다 하더라도 비슷한 압력과 회유가 닥칠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하나에 대한 편애와 편중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대안의 가능성은 열어놓는 지혜가 필요하다. 현실적으로도 엠에스 것과 함께 다른 대체 소프트웨어들을 균형있게 쓰려한다는 명분으로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시장의 공정한 경쟁 법칙을 정부가 나서서 지킨다는데 그 누가 말리겠는가. 이것이 가까운 미래에 우리의 새로운 문화유산이 될 디지털 마인드웨어를 세우고 지키는 길이다. [월간 enter 200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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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디지털 예술의 미래

AD 칼럼 (2001. 7.) 디지털 예술의 미래 이광석(AD편집인·뉴미디어평론가) 정확히 10년이 지난 두 번째 뉴욕 나들이다. 맨하튼에 들어섰을 때, 발길이 제일 먼저 닿 았던 곳은 휘트니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이다. 휘트니 미술관은 맨하튼 의 센트럴 파크를 왼쪽으로 끼고, 매디슨 거리와 75가가 만나는 지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인근의 수많은 미술관들을 제쳐놓고 휘트니를 향한 건 나름의 이유가 있다. 3월말부터 시작 해 이제 막바지에 이른 디지털 아트 전시를 보기 위함이었다. 디지털 시대의 예술을 주제로 <비트스트림스 Bitstreams>와 <데이터 다이나믹스 Data Dynamics>란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미 언론에도 이번 기획전이 소개된 바도 있었고, 앞서 열렸던 샌프란시스코 현대 미술관의 <010101>전이 워낙 크게 소개된터라, 상대적으로 이번 휘트니 전시는 김빠진 감 이 없지 않다. 실제 샌프란시스코의 기획전만큼 치밀한 준비도 느껴지지 못했고, 전반적 수 준에서도 크게 색다른 맛을 보기는 어려웠다. 소통하는 디지털 전시는 <비트>보다 <데이터>가 보다 친숙하다. <비트>가 기존 예술 장르에 디지털 현상 을 덧붙인 느낌이 든다면, <데이터>는 디지털 안에서 디지털 예술을 논한다. <비트>가 기 존의 디지털에 흡수되는 모양새라면, <데이터>는 디지털을 가지고 관객과 상호 소통한다. <데이터>는 디지털이 갖고있는 상호작용의 묘미를 살림으로써, 관객을 수동적 역할자로 가 두지 않는다. 반면 <비트>는 대상화된 작품전이란 면에서 전혀 과거의 전시 기획을 벗어나 지 못했다. 전시장과 벽에 걸린 작품이 관객에게 내모는 소외감은 <데이터>에도 여전하다. 관객은 항상 대기하는 위치로 떨어지고, '관람'의 수준에 그친다. 적극적인 개입의 여지란 없다. 그저 응시를 바라는 조작된 사물들만 줄지어 기다린다. <데이터>는 디지털 예술 가운데 특히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데이터의 흐름을 보여주기 위 한 인터넷 영상예술을 의도했다. 관객은 데이터의 흐름을 관찰하고 경험하고 거닐 수 있도 록 설계되었다. 물리적 지형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네트워크에 연결된 채 매순간 지속적으로 재변형/생산되는 디지털 영상의 새로운 형식미를 담고 있다. 물론 관객은 그 '역동성'을 조 작하는 주체로 나선다. 특히 관심을 끌었던 위즈니유스키(Maciej Wisniewski)의 작품 '네토 맷(NETOMAT)'은 인터넷의 잠재의식 속으로 이용자가 참여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이 용자가 모니터에 입력하는 단어나 문장에 따라 인터넷은 예기치않은 방식으로 영상, 문자, 음성, 음악, 동화상의 콜라쥬로 응답한다. 이용자는 끊임없이 인터넷과 색다른 대화를 지속 적으로 건네고 받는 것이다. <데이터>에 참여한 작가들은 거의 모두 95년대 이후에 웹 아 트에 두각을 보인 신세대군이다. 그만큼 작가들은 디지털과 함께 호흡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미학적 완성도를 떠나 새로운 디지털 미학의 인터페이스를 구성하는데 상당히 자유 롭게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줬다. 아날로그 디지털 <비트>에서 관객은 어울림이 불가능한 타자(the other)로만 남는다. 아날로그 시대의 수동 적 관찰은 그대로 유지된다. 새로운 예술의 매체 수단으로서 뉴미디어 기법의 응용이 특징 적이긴 하지만 작가와 관객과의 상호소통은 제한되어 있다. 오히려 작품의 추상성이 관객을 멀리 이격시킬 뿐이다. 물론 브레이트식의 '낯설게하기'(estrangement)와는 전혀 무관하다. 애초부터 관객은 작품으로부터 낯선 이방인으로 멀리 서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흥미있는 작품으로는, 먼저 짐 캠벨(Jim Campbell)의 '모호한 도상 5 번'(ambiguous icon #5, 1990)을 들 수 있다. LED의 붉은 스크린에 불명확한 화소로 만들어 진 인간 형상의 아이콘은 빔 벤더스(Wim Wenders)의 '이 세상 끝날 때까지'(Until the End of the World, 1991)에 나오는 꿈의 디지털 영상과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 라짜리니(Robert Lazzarini)의 작품 '해골들'(Skulls, 2000)은 사방의 흰 벽에 걸린 백색의 해골들을 일그러뜨려 관객에게 디지털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착시 현상을 유발한다. 실제 해골을 레이저 스 캐닝하여 만들어진 이 왜곡된 상은 사이버공간의 시각적 본질이 무엇인가를 되묻게 한다. 해독(Jon Haddock)은 실제의 보도 사진을 포토샵으로 재구성하여 마치 '심스'(Sims) 시뮬레 이션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게임의 케릭터 이미지들의 공간처럼 뒤바꾼다. 그의 작품들은 역 사의 있는 현실을 가상의 오락과 뒤섞어놓음으로써 현실과 가상간의 경계를 뒤흔든다. <비트>만의 다른 특이한 점은 주되게 청각적 매체를 이용했다는데 있다. 건축회사 로텍 (LOT/EK)이 설치한 '사운드채널'(Sound-Channel, 2001)은 디지털 시대의 음악을 관객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작업에는 '사이버네틱 작곡'으로 디지털 아 방가르드 음악을 선보인 디제이 스푸키(DJ Spooky, 본명: Paul D. Miller)가 참여하고 있었 다. 디지털의 예술값 부리나케 동전 주차한 곳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번 전시회에서 디지털의 형식적 차용이 아닌 디지털 감각이 제대로 체화된 미적 생산물들이 언제쯤 보편화될 수 있 을까하는 아쉬움이었다. 그러고는, <데이터>와 <비트>를 사이보그의 유형으로 본다면 안드 로이드(Android)와 인공지능(AI)에 빗댈 수 있다는 엉뚱한 생각이 돌연 들었다. 둘 다 기계 와 유기체간의 결합물이지만 합일의 배율이 틀리다. 단순히 보면 안드로이드는 기계에, 인공 지능은 유기체에 가깝다. 안드로이드가 인공지능에 비해 저급한 것은 기계의 유기적 구성도 에서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데이터>는 인공지능과, <비트>는 안드로이드와 닮 아있다. 그만큼 디지털을 새로운 시대의 미적 표현으로 활용하는데 차이가 있다는 얘기다. 디지털로 완전히 새로 쓴 예술의 문법은 작품과 관객의 관계 설정을 분명 달리해야 한다. 이 점에서 <비트>는 디지털을 덧칠한 정도다. 디지털이 지닌 무한히 자유로운 소통성을 고 려한다면 디지털이 단지 형식적 재료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뉴미디어를 예술 창작의 수단으 로 활용한다고 해서 디지털 예술이란 새 명패를 쉽게 달진 못한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데 이터>에서 디지털 예술의 긍정적 미래를 조금이나마 감지한데 있다. <비트스트림스> 참고사이트: http://www.whitney.org/bitstre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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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네트에서 삶 나누기

네트에서 삶 나누기 자본주의 소유권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 인터넷 곳곳에서 번져가고 있다. 네트에서 시작 된 컴퓨터 전문가들의 작은 정보공유 정신이 들불처럼 번지면서, 상혼으로 퇴색된 닷컴의 영역을 내부로부터 침식하고 있다. 네트워크를 통해 네티즌들은 자신이 가지고있는 정보를 교환하는 법을 깨치자마자, 덜익은 정보들을 서로의 노력으로 가공하여 완성시키는 법도 터 득해간다. 이탈리아의 한 연인 예술가는 이같은 네트의 정보공유 정신을 극단으로 밀고 간다. 열린 소스(open source)나 자원의 공개라는 차원으로는 부족해, 이들은 '삶의 공유'(life sharing)를 주장한다. 이들의 홈페이지는 컴퓨터 하드웨어의 내용과 일치한다. 그래서, 이 연인들의 페이지를 접속하여 만나는 메시지는 "이제 당신은 내 컴퓨터 안으로 들어왔다"는 내용이다. 홈페이지 안에는 그들이 깔아놓은 프로그램들뿐만 아니라, 서로 주고받은 은밀한 편지들, 내려받은 파일들이 디렉토리 형식으로 공개되어 있다. 홈에 들어가면 마치 윈도우즈 탐색 창처럼 내용들의 목록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게다 그 목록은 죽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사용자에 의해 갱신된다. 물론 하드웨어 목록의 어느 곳도 접근이 가능하게 열려있다. 대개 우리는 컴퓨터의 내용 열람을 막기위해 외부 접근에 대한 잠금 명령을 설정해두지만, 이들 컴퓨터의 내용은 전적으로 '공유'에 입각한다. 삶의 공유는 이들에게 일종의 예술 프로젝트다. 올 1월 1일에 시작한 이들의 프로젝트는 비록 미약하나마 예술단체의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새로운 예술 장르로 각광받는 네트의 예술이 제도화된 틀 안에 정착하는 최근 경향을 고려하면, 이들의 전위적 시도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음악파일들의 교환을 통해 정보공유 정신을 네티즌 스 스로 확인한 바처럼, '삶의 공유 예술프로젝트'는 냅스터에서 이루어진 MP3 파일 공유에 직 접적 영향을 받았다. 0100101110101101.org란 그들의 홈페이지 주소에서 뭔가를 상징하는 듯한 0과 1의 조합이 신선하다. 잠시만 한눈을 팔고 주소를 입력해도 에러 메시지가 튀어나오는, 암기력의 수준을 조롱하는, 그리고 누군가의 컴퓨터에 접속할 수 있는 암호처럼, 이 16자리의 홈페이지 주소 는 흥미를 끈다. 이들은 주소를 무작위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를 옮기면 '4BAD'란 의미를 갖는다. 닷컴에 대한 해악성을 일컫는 말일까? 이들 예술가는 이미 다른 예술 사이트들을 복제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여 예술계의 못말리는 악동들로 정평이 나 있던 참이어서, 이들 의 주소가 그저 우연만은 아닌 듯 하다. 이들의 페이지에 방문하는 네티즌은 컴퓨터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정보들을 나누는 것뿐만 아니라 하드웨어의 내용을 통해 이들이 디지털화한 삶을 같이 공유하는 방법을 체득해 간 다. 상대가 지닌 음악파일들에서 그의 취향을 읽고, 내려받은 파일들에서 그의 성향과 취미 를 간파할 수 있다. 이는 프라이버시의 논란을 넘어서, 상대에 의해 동의로 이루어지는 내밀 한 삶의 공유에 해당한다. 그러면서 닷컴 외곽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발견하게 된 다. 방문객은 은밀하고 조용히 공유의 정치적 메시지를 스스로 배워나간다. 네트의 전위예술 이 비자본주의적 태도의 중요한 매개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가면 갈수록 인간 뇌의 기능을 컴퓨터 하드에 의탁하면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의 입구에서 마주치는 "지금 당신은 내 컴퓨터에 들어왔다"라는 메시지는 '지금 당신은 내 삶으로 들어왔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컴퓨터 는 현대인의 삶과 뗄 수 없는 일부가 되고 있다. 그런 컴퓨터들이 공개되어 서로 엮이고 서 로를 공유한다면 그 삶들은 보다 풍요로워질 것이다. 마치 처음에는 보잘 것 없이 시작해도 냅스터에 연결된 네티즌들의 점점 증가하는 숫자들이 정보의 공유력을 엄청나게 배가하듯, 삶들의 공유가 하나하나 늘수록 거기서 얻는 윤택함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것이다. 그것이 열린 정보운동이 가진 힘을 실현하는 궁극의 공유정신이 아닐까? (2001. 5월) / 이광석: AD편집인·뉴미디어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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