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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대학원신문]: 엔트로피의 전자적 파장을 높여라!

엔트로피의 전자적 파장을 높여라! 이화여대 대학원신문 (98년 12월 게재) 이광석 네트의 디지털 정보가 여러 개의 조각들(packets)로 쪼개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주소지를 찾아다니다 결국 하나의 정보로 합쳐지듯, 광통신에 떠다니는 각양각색의 정치적 주장과 논쟁의 경합(flame wars)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전자게시판에서, 뉴스그룹에서, 채팅공간에서 이합집산하며 꾸물꾸물 전자조직을 구성한다. 물리적/물질적 공간이 주던 지역적 한계는, 전자공간의 네트워크적 속성으로 말미암아 그 틈새가 메워지고, 그 외연을 비트로 확장시킨다. 전자네트워크로 인해 전세계의 내노라하는 비정부기구들(NGOs)의 활동 폭이 더욱 커져가고 있다. 범지구적으로 집단과 집단, 조직과 조직의 연대와 연합의 활로가 새롭게 펼쳐지고 있다. 이제 권력과 자본이 새롭게 직면한 문제는 이같은 네트워크형 조직들을 재흡수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NGOs의 힘을 확장하는 비트적 공간이란 바로 이 굳건한 현실에서의(on the ground) 투쟁을 대체하기 보다는, 현실의 투쟁을 가시화하고 이를 엮어내는 전자적 격자인 셈이다. 대 항 집단들이 시도하는 아래로부터의 횡단적 연결이, 그 수위에서 ''가상코뮨''(virtual commune)이나 붉은 기가 휘날리는 ''제 5인터내셔널''(fifth international)의 이상적 전망으로부터, 마을공동체의 신화에 사로잡힌 비트적 연장물, 즉 가상공동체라는 조금은 철부지한 영토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나, 이와 같은 미래적 전망은 실천 주체들이 가늠하는 구체적 현실과의 목적의식적 결합 속에서만 가능하다. 어쨌거나 네트 문화정치의 미래 기획에 있어서 이 모든 동적인 실천의 움직임들이 현재 정보자본주의를 배회하는 유령임에는 분명하다. 네트워크 공간에 대한 디지털적 해석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려는 수많은 그룹들이 번창하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극소전자혁명에 의한 ''비트뱅''(Bit-bang)의 파고가 좀 더 특이하게 네트행 동주의에 영향력을 발휘한 사례로는 맨 먼저 사빠띠스따의 정보 게릴라전을 꼽을 수 있다.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EZLN)은 지구촌의 이름없는 남부 멕시코 치아빠스(Chiapas) 지역의 라깡도나(Lacandona) 정글에서 나와, 최근 20여년간 지속된 멕시코 정부와 해외 다국적자본의 억압과 침탈에 분노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의 유명세에는 매체에 비친 부사령관 마르꼬스의 인텔리적 카르스마도 한몫 했으나, 기실 그 근저에는 기술적으로 글로벌 투쟁의 촉매제가 되었던 커뮤니케이션 전략과 수많은 정보 네트워크의 확장 능력이 존재했다. 그들은 지배력에 대한 국지적인 물리적 저항과 실천 활동과 함께, 전세계적인 전자 게릴라전을 펼칠 것을 제안한다. 그들은 지배의 약호를 교란하는 각 집단들의 해방적 디지털 약호들이 미시적 정치 투쟁의 전략으로 기능할 수 있고, 이 흩어진 해방의 약호들을 엮을 수 있는 힘은 네트를 통해 거둘 수 있음을 우리 모두에게 인지시켰다. 즉 그들은 조직화의 주요 매체로써 인터넷이 갖는 속성을 충분히 활용하여, 현실의 게릴라전과 말과 이미지의 정보전을 동시에 병행하는 방법을 시사했던 것이다. 이것이 한 이름 모르는 치아빠스 지역을 보편적인 실천 사례로써 짚어보게 만드는 근거이다. 두 번째 사례로써 버클리 대학의 대학원생들이 정치토론을 통해 만들어낸 배드 서브젝츠(Bad Subjects)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지식인들이 전자공간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적절한 실천 지침과, 21세기 지식인 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BS는 새로운 사이버영토가 사회적 불평등과 불의를 제거하기 보다 실천의 엘리트 영역으로 남아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들은 온라인 실천을 통해 유용한 정치 조직체 건설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현재 또 다른 좌파적 냉소주의 혹은 주변화에 다름 아니라고 얘기한다. 현재 사이버공간이 비록 이윤의 장으로 활용된다 하더라도, 현재 진행형의 새로운 인간관계의 네트워크이기에, 반자본주의적 경제 공간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사이버공간에서의 정치적 잠재력의 추동이 최종 목표가 아니며, 그 공간을 현실세계의 사회변화를 위한 추진력으로서 활용하는 것을 그 궁극에 둔다. 이들은 현재 인터넷 웹상의 잡지, 즉 웹진을 40호까지 발행하면서, 신좌파적 기획, 다양한 의사소통로, 체계적인 웹진 발행 등등으로 인해, 그리고 사이버공간에서 대중적이고 진보적인 입지를 확보한 그룹이라는 점에서, 어느 웹진 보다도 중요한 관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래 운동의 새로운 징후로 해커 전위대와 전자프런티어재단(EFF)을 들고자 한다. 이들은 20세기의 막바지에 등장한 새로운 실천 부류들이다. 또한 어느 개인 혹은 단체들보다도 훨씬 기술적 이용에 능숙한 전문가 부류들이다. 10대를 중심으로 한 해커들은 그들 자신의 윤리, 즉 컴퓨터 접근권, 정보의 공개성, 권력의 분권화 등 그 진보적 측면을 지닌다. 문제는 이같은 해커들의 아나키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본성을 그들의 개별성과 계급적 특권에서 분리하여 사회적 저항으로 접합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한편 권력에 의한 해커의 억압적 조건을 간파한 일부 지식인들이 전자 시민단체를 결성하게된 계기는, 1990년 미국에서의 일명 ''선데블 작전''(Operation Sun Devil)이라 불리는 디지털 지하세계에 대한 대검거 작전이었다. 이들은 해커들에 대한 정부의 과잉 검거, 수색과 압수가 부당하게 인권과 표현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바로 EFF는 이같은 해커사냥에 대응하여 만들어진 시민자유론자들의 단체이다. 예컨대 검거 중 보여주었던, 컴퓨터장비와 데이터 압류, 출판 등의 표현물에 대한 제한, 부당한 폭력 등에 맞서, 그들은 기금 모금, 법적 행동과 후원 등으로 정세를 반전시켰다. 이같은 정부의 독단적, 억압적, 비합의적 월권에 반응하여, 네티즌들을 보호하는데 사법적, 제도적 투쟁을 거쳤던 사람들이 모였던 것이다. 특히 그 구성원들의 명망성으로 이름을 날리는 EFF는 암호화, 표현의 자유 등의 주장을 통해 전자 시민권 보호에 앞장서고 있다. 우리 실정에서 보면 최근 도청, 감시카메라, 전자주민카드 등 시민의 사생활과 관련된 문제들을 쟁점화하는데 요구되어지는 전문 시민단체들이 아쉽다고 볼 때, 이들의 사안별 공론화와 일정 부분 정책에 현실화시키는 입안 능력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눈여겨볼 점이 많다.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이같은 실험들의 밑바닥 정서에는 단수적 욕망이 자유롭게 발현되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투쟁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 실험은 다양한 공간에서 소수적 주체들의 목소리를 담아 권력의 정보에 충돌시키는 커뮤니케이션 행위인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지배적인 스펙터클에 대한 ''교란'', ''단절'', ''중단'', ''전복''이다. 이는 공학적 저항이자, 소위 정보이론에서 얘기하는 엔트로피(entropy)의 요소들이다. 섀논-위버(Shannon-Weaver) 송수신 모델에 기초해보면,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엔트로피가 크면 클수록 전적으로 혼동된 무작위성과 예측 불가능성이 증대한다. 송/수신 모델에서 송신자에서 수신자로 이르는 정보 전달과정이 위계적 질서 혹은 초코드화(overcoding) 과정이라면, 이를 흩뜨리는 파장이 엔트로피이다. 그렇다면 엔트로피는 정보/권력에 대한 다양한 도전적 소음/힘이다. 소음/힘이 증가할수록 정보/권력은 증가하나, 그것이 어느 임계 수준을 넘어버리면 정보/권력은 ''교란''에서 ''단절''과 ''중단''을 거쳐 정보/권력 모델 자체가 ''전복''되어 버린다. 소음/힘은 분자적 활동의 집합화이자 반(反)정보이며, 정보/권력은 대중매체 등에서 나오는 초코드들이다. 권력의 초코드화를 다양한 소음/힘들의 연합으로 전복하는 것이 이들 대안 기획의 핵심이다. 이제 90년대 새로운 엔트로피의 생성 가능성은 인터넷이 마련하고 있다. 인터넷은 다양한 소음/힘들의 흐름을 거대한 저항의 파장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영역이다. 그러나 인터넷에 열광하기 보다는 현실에 정초한 새로운 네트 저항 실험들의 발굴 작업과 동시에 인터넷 정치의 가능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21세기 정치 지형속에서 엔트로피의 집단적 표현 형식에 대한 새로운 징후를 전자 저항 실험들 속에서 읽어내어 이론화하는 것과 이들의 집합적 실천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에 모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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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문화정치: 2장]: 최초의 정보게릴라 운동: 사빠띠스따(Zapatista)의 네트전

[사이버문화정치] (1998) 제 2 장 최초의 정보게릴라 운동: 사빠띠스따(Zapatista)의 네트전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EZLN)의 정치력은, 비트에서 비트로 연결되는 조용한 힘의 축적에 의해 세워졌다." ― 부사령관 마르꼬스(Marcos) 1) 사빠띠스따의 역사와 목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실행 개시일인 1994년 1월 1일,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은 남부 멕시코 치아빠스(Chiapas) 지역의 라깡도나(Lacandona) 정글을 나와 인근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했다. 부사령관인 마르꼬스를 포함한 소수 인텔리 지도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부가 원주민 농민들로 구성된 이들의 작은 봉기는, 멕시코 전역은 물론, 전세계로 그들의 활동을 알리기 위한 서곡에 불과했다. 멕시코는 1980년대초에 시작된 재정 위기 이래로, 보호무역주의에서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펼쳐왔다. 하지만 국민경제를 개방하고, 수출의존적 성장을 추진하면서, 멕시코 정부에 의한 노동자, 농민 압박이 점차 극도에 이르게 된다. 특히 신자유주의 개혁은 제도혁명당(PRI)과 함께하는 살리나스(Salinas) 정권의 재임기간(1988-94)에 정점에 이른다. 농업 분야에서, 살리나스의 NAFTA 대비 프로그램은 멕시코에 해외 투자가들을 끌어들이고, 미국과 캐나다와의 보다 확고한 경제통합을 가속하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그로 인해 멕시코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글로벌 자본의 침투는 과거 수십년간 멕시코 소농민들의 농지 박탈, 궁핍과 함께, 사회적인 양극화와 환경파괴를 자행했고, 결국 이 응축된 모순의 폭발이 1994년 벽두에 발생하게 된 것이다. 달리 보면, '사빠띠스따'의 근원이 1911년 멕시코 혁명의 원주민 영웅, 에밀리아노 사빠따(E. Zapata)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은, 원주민·농민운동의 역사와 함께, 오랜 기간에 걸친 그들의 억압적 상황을 반영한다. 결국 사빠띠스따 봉기의 연원은 20세기초의 농민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가장 가깝게는 최근 20여년간 멕시코 정부와 해외 자본의 억압과 침탈에 대응한 치아빠스의 신(neo)사빠띠스따 혁명으로 요약될 수 있다. 사빠띠스따의 대안과 목표는 과거 레닌주의적 기획을 철저히 거부한다. 오히려 그들 자신의 계급적 다양성에 기반한 풀뿌리 대중조직의 기초 위에, 그들 자신의 민주주의적 자치공간을 원한다. 그 속에서 권력으로부터 배제되고, 억압박는 광범위한 대중의 결속, 그리고 이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과 상호 부조의 통일이 중요하다. 유럽에서 최근 나타나는 민족·인종적 분리주의와 대별해 볼 때, 그들의 차이점은 자본과의 고리를 단절하고, 공동의 연대를 달성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들은 저개발국들의 자본주의적 개발 논리를 벗어나, 그들만의 자율적이고 상호 협력적인 자치권을 이룩하고자 한다. 현 멕시코정권에 의해 사빠띠스따적 의의를 축소하려는 시도에 대한 저항과 함께, 전세계적에밀리아노 사빠따 '야만적 자본주의'에 대항한 투쟁은 자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같은 국제적 반응의 원인은, 대체로 자국내 현대화 프로그램이 농민과 원주민을 배제하는 배타성에 대한,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미국중심의 신세계 질서의 규정성에 대한 반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게릴라운동의 지역적 특수성, 즉 원주민의 정체성 회복과 농민의 토지 획득을 넘어서서, 그리고 제국주의와 그 이론적 표현인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지배형식에 맞서,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무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들의 '간대륙주의'(intercontinentalism)는 "희망을 근거로 한 인간의 존엄한 삶"을 지키기 위한 것이자, 스스로를 다른 지역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시도에 반대하는 것이다. 한편 사빠띠스따 봉기는 최초의 정보 게릴라운동이라는 점이다. 그들에게 기술적으로 글로벌 투쟁의 촉매 역할은 커뮤니케이션 전략에서 시작했다. 그들에 대한 지지를 조직화하는 주요 매체로써 인터넷이 갖는 속성을 충분히 활용하여, 현실의 게릴라전과 말과 이미지의 정보전을 동시에 실행했다. 이것이 한 지구촌의 이름 모르는 치아빠스지역을 보편적인 실천 사례로써 짚어보게 만드는 근거이다. 2) 게릴라 실천운동의 특수성을 보편성으로 (1) 사빠띠스따의 커뮤니케이션 전략 "인터넷과 사이버공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체로 광범위한 수의 자율적이고 상호 연결된 개인들에 의해 창조되는, 경합의 지형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오늘날 그 경합은 다면적이며, 의심할 바 없이, 사이버공간을 에워싸서 그것으로부터 이윤을 수취하려고 하는 기업의 노력과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이버공간을 정교화하고, 또 그것을 이용하려는 수백만의 사람들의 독립적인 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사빠띠스따는 지역적 기초를 글로벌 운동과 결합시키는 '전자미디어 이벤트' 전략을 취한다. 역으로 볼 때, 이미 그들은 현대 지형에서 지역적 투쟁의 고립성이 패배의 운명을 자초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 멕시코 사회를 비롯한 전세계와 소통할 수 있고, 대중과 지식인의 상상력을 사로잡을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해, 그들은 일개 지역의 소규모 투쟁을 전세계 정치의 전면으로 나서게 만들었다. 그 이면에는 네트 전략이 존재한다. 미국내 국가안보의 두뇌집단들이 모여있는 랜드연구소의 연구원, 론펠트(D. Rondfeldt)가 다른 맥락에서 그 현상을 지적했듯이, 사회적 '네트전'(netwar)은 21세기의 새로운 초국적 정보전쟁의 원형이며, 사빠띠스따는 그 실천의 전범이다. 마르꼬스전세계적 연대를 도모하는데, 네트는 최상의 도구였다. 사빠띠스따의 미디어 '이벤트'는 네트 이외에도 다양한 차원에서 그들만의 전술 감각이 동원되었다. 우선 사빠띠스따의 부사령관이자 대변인, 마르꼬스의 역할과 이미지. 자의건 타의건 마르꼬스가 뿜어내는 미쟝센 효과들(예컨대 출신배경, 스키 마스크, 파이프, 인터뷰의 셋팅 등)을 통한 미디어 '이벤트'의 활용은, 그를 포함한 사빠띠스따 그룹의 혁명적 이미지를 대중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전세계의 모든 사람이 똑같이 마스크를 걸침으로써 사빠띠스따가 될 수 있다. 둘째, '이벤트'적 차원과 함께 동원되는 것으로는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구사를 들 수 있다. 물론 정글에 있는 사빠띠스따의 성원 모두가 그 매체들을 직접 활용할 수 있는 여유를 지니지 못하며, 더불어 그들의 메시지가 정부의 군사적 포위망을 뚫고 손으로 직접 전해져야만 하는 것은 분명하나, 이는 멕시코와 해외 비정부기구들(NGOs)의 연대 운동을 통해 전세계로 전달되었다. 초보적 형태의 팩스, 전화에서, 투쟁현장 비디오의 신속한 제작과 유통, 오디오 테잎과 씨디롬에 담긴 인터뷰와 음악, (비)합법 라디오와 커뮤니티 텔레비전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술적 기제들이 동원된다. 특별히 네트의 매체적 기제로는 기간의 논문을 모은 전자책, 투쟁자료의 영구 보존을 위한 FTP나 고퍼사이트의 구축, 웹페이지를 통한 홍보, 비공식적 토론과 논쟁을 위한 포럼 등이 만들어졌다. 셋째, 지역적·국제적 네트연대의 형성. 1990년대 사빠띠스따의 변화는 치아빠스와 멕시코 지역을 엮는 대안적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인 라 네따(La Neta)의 구축과 IGC와 같은 전세계 NGOs와의 연결을 꼽을 수 있다. NGOs는 사빠띠스따의 외곽에서 그 공동체의 말들과 메시지가 사이버공간의 외진 구석까지 확산되도록,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멕시코 정부의 무력진압을 무위화하도록 이끌었다. 마지막으로, 메시지의 신속성과 그 확산. 기존 대중매체가 가지지 못한 네트에서의 신속한 정보유통은, 전세계적 공감대와 연대를 위한 조건이 되었다. 이어 이들 정보에 관심을 갖는 단체들이 사빠띠스따의 정보를 수집, 정렬, 편집하여 알렸고, 추가정보까지 덧붙여 재확산시켰다. 이와 같이 글로벌한 수위에서 진행된 무수한 정보원의 끝없는 가지치기가 종국에는 미세한 글로벌 직조 구조를 만들어냈다. (2) 사이버전(cyberwar)의 궁극적 의미 1996년에 이어 97년 여름, 사빠띠스따는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지구화에 반대하고, 인간의 존엄성, 희망, 삶의 기치아래 소집한 1, 2차 대륙간 회의를 개최함으로써, 세계 각지의 풀뿌리 활동가들이 참석하는 결집력을 과시했다. 이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실재하는 차이들을 벗어나, 모든 개인들, 집단들을 아우르며, 세계 전역의 저항과 반역으로부터 생겨났다. '복수의 울림들과 목소리들의 네트워크', '어조와 수준이 다양한 여러 목소리들의 네트워크',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대항한 저항과 희망의 네트워크. 이들 네트워크의 현실적 차원은 두 가지 핵심적 네트워크를 통해 구성되었다. 하나는 '개개의 투쟁들과 저항들의 집합적 네트워크', 다른 하나는 '전자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 전자는 지배적 권력자가 없는 다양한 저항의 연결체이고, 후자는 유연성과 가변성을 지닌 현실적인 전자 직조구조이다. 응집력있고 글로벌한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적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조건은 네트워크적 실천을 통해 마련된다. '말들의 전쟁', 혹은 사이버전은 "총알보다 더욱 강할 수 있다". 정보와 상호작용을 통해 개개의 투쟁들과 저항이 엮일 수 있는 가능성이 배가된다. 물론 사빠띠스따 내부에서 사용하는 모뎀, 팩스, 이메일이라는 외양이 그들 투쟁의 의미일 수는 없다.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통제권이 생산수단의 통제권을 대체할 수는 없다. 즉, "네트는 민주주의, 혁명 그리고 자기결정에 대한 새로운 정치적 논의들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제공해 주지만, 존재하는 차이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해 주지는 못한다. 네트는 다만 그러한 해결책들을 향한 모색을 가속화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네트는 여러 실천 도구들 중 단지 한 측면만을 보여준다. 가장 중요하게는 현실속에서 농민들의 사투를 건 게릴라전이 그 중심에 있을 수밖에 없고, 네트를 사용하여 말하는 주체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같은 네트의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고, 네트의 가능성을 열려고만 한다면, 그 안에서 자율적인 실천들과 가치들의 반항은 반복적으로 통제 메커니즘을 벗어날 수 있다. 특히 네트의 변형적 이용이 객관적으로 개방성, 자율성, 즉시성, 소통성 등의 특성을 지닌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사빠띠스따의 기치, 즉 통치와 권력에 대한 전면적 거부, 자율과 자치에 입각한 글로벌 연대 등과 만날 때에만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즉 현실 공간에서의 실천 내용이 네트의 유연적 속성과 조우할 때만이, 식민화된 자본주의 공간으로부터의 완전한 탈주의 가능성이 열린다. 1. EZLN은 본래 하나의 정치·군사적 게릴라 집단으로 출발했지만, 원주민 투쟁과의 결합 과정에서 원주민 봉기 조직의 군사부대로 스스로를 전화시켰다.(이원영, [사빠띠스따의 '간대륙주의'와 '민족 자율' 문제], {사빠띠스따}, 갈무리, 1998, 380쪽.) 2. 신자유주의 정책과 꼭 어울리게, 살리나스대통령은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교육받은 경제학자이다. 70년대 이후 저개발국가내 통치엘리트들의 재생산이 미국의 고등교육기관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상기하라. 3. NAFTA에 따른 멕시코의 신자유주의적 재구조화 과정에 대해서는, Barkin, D., "Mexico's Integration into the North American Economy", in Callari, A., Cullenberg, S., & Biewender, C. (eds.), Marxism in the Postmodern Age: Confronting the New World Order, NY: Guilford Press, 1995, pp.472-479 참조. 4. 신자유주의 개혁프로그램은, NAFTA를 통한 국제 경제와의 통합과 더불어, 구체적으로 국영기업의 사유화, 수입관세 삭감, 외국인의 기업소유권 제한 철폐, 농민 보조금 삭감, 농가 신용프로그램 수정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특히 치아빠스 농민과 원주민들이 반발한 직접적 원인으로는, 우선 1992년에 이루어진 농지개혁법(27항의 수정)을 들 수 있다. 정부는 과거 1917년 농민과 원주민들의 혁명을 통해 얻은, 토지의 코뮨적 공동소유권(ejidos)을 농지의 효율성이라는 명목하에 사유화하여, 이를 쉽게 처분할 수 있게 조항을 바꿨다. 이로 인해 초래된 토지가격의 하락, 거대 지주와 자본에 의한 토지 취득 등은 농민과 원주민들을 토지로부터 박탈당하는 현실을 만들어냈다.(Roman, R., & Arregui, V., E., "Zapatismo and the Workers Movement in Mexico at the End of the century", Monthly Review, Vol.49, No.3, July-August 1997, pp.99, 115 참조.) 둘째로는 멕시코의 주농산물인 옥수수와 커피 분야의 타격을 들 수 있다. 북미와의 자유무역 여파로, 특히 치아빠스 지역의 농산물인 옥수수와 커피는 미국의 거대 자본과 경쟁이 될 수 없었으며, 게다가 정부의 농민보조금 삭감으로 인해 이중고를 당해야만 했다.(Otero, G., Scott, S., & Gilbreth, C., "New Technologies, Neoliberalism, and Social Polarization in Mexico's Agriculture", in Davis, J., Hirschl, T., & Stack, M., (eds.), Cutting Edge: Technology, Information, Capitalism and Social Revolution, London: Verso, 1997, pp.264-5 참조.) 5. Otero, Scott, & Gilbreth, ibid., p.254. 6. 이원영, 앞의 논문, 403-438 참조. 7. Cleaver, H., "The Zapatistas and the Electronic Fabric of Struggle", /이원영·서창현역, [사빠띠스따들과 투쟁의 전자적 직조 구조], {사빠띠스따-신자유주의, 치아빠스 봉기, 그리고 사이버스페이스}, 갈무리, 1998, 192쪽 수정하여 인용. 8. Arquilla, J. & Ronfeldt, D., "Cyberwar is Coming!", 1993 참조. 9. 멕시코 정부의 정보에 따르면, 그는 멕시코와 파리에서 사회학과 커뮤니케이션을 수학한 후, 멕시코의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가르쳤고, 1980년대초에 치아빠스 지역으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한다.(Castells, M., The Power of Identity, Vol. II., Oxford: Blackwell, 1997, p.76.) 그래서 까스텔은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마르꼬스가 군사적 전략가로서의 의미를 보여주는 징후가 없는 반면, 그의 엘리트적 능력에서 나오는 전자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활용에 대한 탁월함에 그 비중을 두고 있다.(ibid., p.79.) 10. Castells, M., ibid., pp.79-80 참조. 국내에서 80년대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학생운동권에서 사용했던 시위 도구들의 상징성과 비슷하게, 치아빠스 농민들의 마스크는 멕시코 원주민의 문화 의식(ritual)의 재발현임과 동시에, 그룹의 각 주체들이 공유하는 평등성, 저항 정신을 표현한다.(p.80.) 11. Cleaver, H., 앞의 책, 216-9쪽 참조. 전통적 매체에서 전자매체로, 혹은 전자매체에서 전통적 매체로 가는 다양한 사빠띠스따의 매체전술은 여론 형성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준다. 12. 라 네따는 치아빠스 지역의 NGOs와 다른 멕시코 지역의 수많은 인권 조직들을 연결하는 네트워크이다. 13. 이원영, 앞의 논문, 403, 406-7쪽.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사빠띠스따의 실천적 대의인 네트워크 개념을 보드리야르의 저항매체적 실천 개념에다 일치시킬 수 있는 지점이 발생한다. 보드리야르의 '응답없는 발언'을 복구하는, 네트 저항의 현실적 근거의 사례! 14. 이원영, 위의 논문, 407-8쪽. 15. Castells, M., op. cit., p.81. 16. Cleaver, H., 앞의 논문, 209쪽. 한편 북미 지식인들의 사빠띠스따 평가와 관련하여, 네트의 기술적 속성을 극찬하거나, 심지어 '포스트모던 정치운동'으로 보려는데 대한 비판적 문제 지적은, Nugent, D., "Northern intellectuals and the EZLN", in Wood, M., E. & Foster, B., J. (eds.), In Defense of History: Marxism and the Postmodern Agenda, NY: Monthly Review Press, 1997, pp.164-173 참고할 것. 여기서 필자는 지식인들이 '담론의 정치'를 주장하기 이전에, EZLN을 제대로 이해하고, 과장없이 독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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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디지털 패러독스: 사이버공간의 정치경제학

*책의 원문을 잃었습니다. 우선 목차만 소개합니다. 출판사에다 알아봐야 하겠지만, 글이 수집이 되면 공개를 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저작권이 걸린 문제라 쉽진 않겠지만... [디지털 패러독스: 사이버공간의 정치경제학] (2000) 커뮤니케이션북스. 머리말 제1장. 디지털 미래의 명암 사이에서 제2장. 자본주의의 위기와 정보/공간화 1. 축적 위기와 정보화 1) 축적 위기의 구조 2) 축적 위기와 정보화 3) 축적 시스템의 유연적 전환 2. 흐름의 공간과 정보/공간화 1) 자본주의적 공간의 의미 2) 정보/공간화 3) 공간의 불균등 발전 제3장. 글로벌 자본의 사이버 지형 1. 사이버 지형의 조건들 2. 하이테크 공간의 위상학적 지형도 1) 단일체, 모나드, 노드:정보 도시 2) 지원 구조, 서버:테크노폴 3) 다리/고리들, 네트워크:인트라넷과 CALS 4) 추상 지도, 네트의 표준화:지구방화 3. 사이버 공간 통제의 추상적 지형 제4장. 정보 상품의 반미학 1. 정보 상품 분석의 유산 2. 정보 상품의 반미학적 얼굴 1) '아톰' 시대의 흔적들 2) '새로움'의 물신 3) 디지털 중독 4) 디지털 덫 5) 이종/혼종 교배 3. 정보 미학적 가치의 복원 제5장. 테크노 공간과 소비 문화 1. 일상 공간과 소비 문화 2. 소비 공간의 후기자본주의적 풍경 3. 테크노 소비 공간들 1) 결연한 하이테크의 시연장:엑스포 2) 과잉 생산의 집중된 탈출구:테마 공원 3) 전자 게릴라 공간들:전자 게임방 4. 테크노 소비 공간의 사적 변형 제6장. 네트의 신화와 현실 1. '생각의 속도', 그러나 신체의 경련 2. 디지털 계급의 인터넷 죽이기 3. 테크노 시대의 물신들 1) 사이보기즘(Cyborgism) 2) 구역사의 초월과 청산 3) 정치적 비/탈정치화 4) 디지털 환각 기술 5) '지구촌을 위한 솔루션™ 4. 영구적 '인간의 조건' 제7장. 전자 대안 매체론 1. 대안 매체는 아직도 유효한가 2. 구매체를 위한 '진혼곡' 3. 전자 대안 매체론의 기획 1) 분자운동의 역사 2) 리좀과 네트 3) 전자 저항의 아방가르드 4. 전자적 대안 모델 참고문헌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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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사이버공간과 문화의 글로벌화

*우연치않게 발견한 글입니다. 제 번역글을 다른 사람이 곱게 보관하고 있을 줄이야... 사이버공간과 문화의 글로벌화 - 존 스트래튼 J. Stratton, "Cyberspace and the Globalization of Culture", in D. Porter (ed.), Internet Culture, London: Routledge, 1997, pp.253-275. 사이버공간과 문화의 글로벌화 존 스트래튼 (이광석옮김) -------------------------------------------------------------------------------- 윌리엄 깁슨은 1984년 {뉴로맨서}란 그의 소설에서 컴퓨터 네트워크들의 광범위한 상호접속망으로 매개되는 인간과 기계간의 근본적인 변형을 묘사하기 위해, '사이버공간'이란 개념을 도입한다. 로버트 애드리언(R. Adrian)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깁슨의 뉴로맨서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케이스)은 네트에 '빨려들어간다'(jack in). 그는 단순히 이용자도 아니며, 정보고속도로로 쾌속 질주하는 데이터 자동차의 바퀴 위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는 네트로 사라져 데이터 흐름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깁슨은 자신의 상상력을 성차에 대한 열망과 정체성 구축의 장소인 신체의 상실에 집중한다. 네트워크나, 깁슨이 명명한 '매트릭스'로 빨려들어가는 카우보이나 쟈키는 남성적이다. 그 명칭이 보여주는 것처럼, 매트릭스 그 자체는 여성적이다. 동시에 매트릭스는 어머니이며 연인이다. 이 매트릭스의 이미지 안으로 자궁과 질이 합해지며, 그리고 신체를 뒤로 한 채 매트릭스로 사라지는 그 남자(케이스)는, 프로이트가 언급하듯 여성의 생식기를 신비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그 욕망을 채우는데 성공한다. 곧이어 그는 '고향'으로 귀환한다. 이같은 욕망 실현의 대가는 신체의 상실이다.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인터넷 이용자들이 (상대적으로) 새로운 신체상실의 가상 정체성과 결합되어 느끼는 쾌감과 열망은 이같은 매트릭스의 이미지 안에서 억압받는다. 하지만 어머니/연인으로서의 사이버공간 이미지를 압도하는 또 다른 주제가 있다. 어머니/연인으로서의 매트릭스는 재생산의 장소이다. 그러나 무엇을 재생산하는가? 간단한 답은 자본주의이지만, 그 내용은 보다 뒤얽혀 있다. 마르크스는 {그룬트리쎄}에서 "순환시간은... 노동생산성에 대한 장벽이 된다"고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잇는다. (자본)은 장소간 이동에 소요되는 최소시간을 줄이는 등, 시간을 통해 이 자본(순환) 공간을 괴멸시키려.... 애쓴다. 자본이 더욱 더 발전할수록, 그에 따라 자본이 순환하고, 자본 순환의 공간적 범위를 형성하는 시장도 더욱 확장된다. 동시적으로 자본도 더욱 더 시장의 가일층 거대한 확장을 위해서, 그리고 시간에 의한 공간의 더 큰 소멸을 위해 애쓴다. 순환시간을 줄이려는 자본의 대안은 하비가 간명하게 얘기했던 '공간적 조정'(spatial fix)이다. 이 간결한 용어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리적 공간으로의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확장이란 원재료, 새롭고 값싼 노동 재원, 그리고 새로운 시장을 찾으려는 의도에 있음을 얘기한다. 본인이 주장하고자 하는 사이버공간은 단지 1980년대 후반기에 형성되어 등장하진 않는다. 오히려 사이버공간은 자본의 순환 시간을 가속화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 19세기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 공간은 소비지향 자본주의의 글로벌화와 공간적 조정 가능성의 종결로 새로운 중요성을 담당하게 되었다. 사이버공간의 시작을 고대하면서 찾은 가장 비옥한 지점은 19세기 전반에 발명된 전신에서였다. 제임스 케어리(J. Carey)의 유명한 통찰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전신 발명의 가장 단순하고 가장 중대한 점은 '수송'과 '커뮤니케이션'의 결정적인 분리가 이루어졌다는데 있다." 내 생각으로는 사이버공간의 생산을 알리는 시발은 컴퓨터 도입에 있다기 보다는, 메시지가 일정 거리를 통과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송·수신자가 체험하는 무시할만큼의 시간으로 변한다는 점에서 거리를 극복하는 커뮤니케이션 속도의 증가에 있다. 지리적 공간을 통과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줄어듦으로써, 우리는 은유적으로 지리적 공간이 아주 다른 비지리적 하이퍼공간으로 탈맥락화되고 대체된다고 말할 수 있다. 케어리가 설명한 바처럼, 그 공간내에서 "상징은 지형과는 독립적이 되며, 수송활동보다 더욱 빠르게 독자적으로 움직인다." 달리 말하면 이 공간은 우리가 컴퓨터시대에 당연히 여기게 된 정보를 물신화하는데 있어서 그 전제 조건이다. 우리는 여기서 전신 도입의 또 다른 측면이 있음을 관찰해야 한다. 케어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전신의 효과는 아주 단순하다. 즉 전신은 공간내 시장들을 균등하게 한다. 전신을 통해 모든 사람들은 교역 목적을 위한 동일 장소에 있게 된다. 전신은 지형을 무관하게끔 한다. 전신은 모든 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조건이 가격결정에 관계맺도록 한다. 고전적 의미에서 완전한 정보소비의 실현은 아주 미미한 예외를 제하곤 여기저기서 자의적인 가능성을 제거한다. 케어리는 여기서 전신이 자본주의적 교환에 복무한다고 여긴다.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바처럼, 만약 화폐가 보편척도라면, 그 이유는 상품이 거래될 때 모든 상품의 비교 가능한 교환가치로 기능하기 때문이며, 그렇다면 전신은 모든 지역 시장들을 단일의 하이퍼마켓으로 해소하는 과정을 시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개 거래가 지리적 공간에 걸쳐 정보 전송의 무능력을 드러낸 지점에서, 실시간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는 하이퍼공간내에 동질화된 하이퍼마켓을 만들어내고 있다. 20세기 후반기, 특히 1970년대 초 이래로 화폐 스스로가 상품으로 물신화되었을 때, 이 하이퍼공간의 시장은 화폐 그 자체만을 거래하는데 이상적이다. 이 과정은 실질상 금본위제를 벗어난 글로벌 운동과 결합되나, 점차 금융자본의 중요도가 증가한다는 점이 이러한 과정의 가장 분명한 사실이다. 화폐와 생산은 이제 직접적으로 연계하지 않으며, 이 화폐는 (세계) 주식교환, 환차 이익을 노린 투기, 혹은 고금리 추구를 통해 훨씬 많은 돈을 만들어내는데 이용된다. 하비는 이 새로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1972년 이후 시기에 특별한 점은 금융시장의 예외적인 융성과 변형이라는데 있다. 거기엔 금융자본이 자본주의 내부에서 최고의 (하지만 제한되게) 중요한 지위를 점한 듯 싶던 시기―예컨대, 1890년에서 1929년의 시기―와 같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국면이 존재했었고, 오로지 뒤이어 오는 투기성 자금의 붕괴에서만 그 지위를 상실했을 뿐이다. 하지만 현재 국면에서 전지구적 규모의 고도로 복잡한 금융 조정시스템의 도래와 맞물려서 진행되는 새로운 금융장치와 시장의 폭발만큼이나, 주요 금융기관의 권력집중은 그리 크지 않다. 이 고도로 복잡한 글로벌체계의 번영은, 점차 복잡해져가는 컴퓨터의 발전과 일국을 막론하고 국제적으로 각각의 지점들을 연결하는 자동화되고 디지털화된 텔레커뮤니케이션 시스템과의 결합으로 가능해졌다. 정보와 동일하게 화폐의 상품화로 인해 우리는 다시끔 전송체계로서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를 재구성하게 된다. 우리는 거리가 소멸되고 순수 이동이 장소와 외연을 대체해버린 하이퍼공간을 통해 이 새로운 상품들을 전송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교환체계 내부에서 지리적 공간이 생산 (그리고 소비)의 장소로 바뀌고 식민화되었다면, 하이퍼공간 그 자체는 자본주의 맥락안에서 발전된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산물일 뿐이다. 사이버공간의 영역은 근본적으로 탈영토화되어 있다. 들뢰즈(G. Deleuze)와 가따리(F. Guattari)는 [앙띠오이디푸스Anti-Oedipus]란 책에서 어떻게 자본주의가 탈영토화하고 재영토화하는가를 묘사하면서 장소의 역사를 구성한다. 로버트 영(R. Young)은 이들이 주장하는 부분을 잘 정리해 놓았다. 생산과 노동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을 추상적인 화폐 가치로 변화시키기 위해, (자본주의는) 흐름을 해독하고, 사회성(socius)을 '탈영토화' 한다. 자본주의는 교환의 보편형식을 손에 넣기 위해, 곧장 재영토화한다.―지역, 국가, 가족과 같은 '모든 종류의 잔여적, 인공적, 상상적, 혹은 상징적 영토성을 세우거나 탈환한다'. 영은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앙띠오이디푸스}를 재인용하고 있다. 이중의 운동이 존재하는데, 그 하나는 해독과 탈영토화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폭력적이고 인위적인 재영토화에 관한 것이다. 자본주의 기계가 흐름을 해독하고 공리화하여 이것으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하면서 탈영토화를 거듭하면 할수록, 정부 관료, 사법권, 질서 등의 종속장치들은 그 과정에서 잉여가치의 훨씬 큰 몫을 흡수하면서 재영토화를 위해 더욱 매진한다. 영은 이같은 묘사가 '서구' 산업화의 역사에 적합할뿐더러 '서구의' 식민화 과정에 적절하다고 지적한다. 자본주의의 교환은 새로운 공간조직을 생산하는데, 이 공간은 교환과 함께 투영되고 판옵티콘적인 관심사로 구성된다. 장 보드리야르(J. Baudrillard)가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투영되고 판옵티콘적 공간과, (그 공간에서는 '객관적' 권력의 실체에 대한 모든 고전적인 분석과 밀접한 도덕가설만 잔존한다.) 그런 연유로 인해 스펙타클적 요소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비록 그가 과장되게 스펙타클 세계의 종말을 선언한다 하더라도, 앞으로 정보초고속도로로써 사이버공간을 재개념화하려는 시도는 자본, 커뮤니케이션 미디어, 그리고 국민국가간을 연결하고자 하는 향수를 보여주고 있다. 상호작용적 인터넷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민주적 유권자와 '수동적' 청중―후자는 현대 민주국가 내부에서 전통적 대중매체의 등장으로 인한 그 결과물로서 작동한다―간에 이루어져온 균형 상황이 깨져 나갈 것이다. 사이버공간의 개막은 현재 자본주의의 교환체계 내부에서 하이퍼 탈영토화의 새로운 운동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이버공간의 나날의 새로운 표현, 즉 인터넷은 맥켄지 워크(M. Wark)의 용어인 일종의 벡터(vector)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자본과 군사력 양자 모두는 벡터와는 일정한 간격이 있다. 즉 벡터는 장소, 문화, 영토, 전통 등의 특수성에 해당하는 시·공간을 가로질러 이를 추상화하는 기술이다. 벡터의 가속적 발전은 예외없이 모더니티와 동질적이며, 군사력과 기업의 결합된 이해가 그 후원자이다. 2차대전 이후의 역사에서 나타난 경제 국제화의 맥락하에서 볼 때, 우리는 이 새로운 형태의 하이퍼 탈영토화를 자본주의의 글로벌화의 일환으로 진행된 공간적 조정의 확대로 해석할 수 있다. 애퍼듀라이(A. Appadurai)가 주장하는 바처럼, "우리는 신글로벌 문화경제를 중층적이고 이접적(離接的, disjunctive)인 질서로 이해해야만 하며, 이러한 질서는 더 이상 현재의 중심-주변부 모델로는 (다중의 중심과 다중의 주변부로 설명하는 모델조차도) 설명될 수 없다." 애파듀라이의 강조점은 글로벌 자본주의가 이원적 위치성보다는 흐름의 견지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데 있다.그는 '글로벌 문화흐름'의 다섯 가지 차원―에스노스케이프(민족적 영역), 미디어스케이프(미디어 영역), 파이넌스케이프(금융 영역), 이데오스케이프(이데올로기 영역)―을 확증하는 구조물을 제안한다. 그는 들뢰즈와 가따리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주장하는데, 이러한 다섯 가지 문화흐름이 점차 사람, 이미지, 상품, 돈, 이념의 탈영토화나 본인이 앞서 얘기한 하이퍼 탈영토화로 이끈다. 그는 인터넷―1994년 약 3천만의 인터넷 이용자들 가운데 대략 2천 5백만이 미국인이며, 모든 사람들은 컴퓨터, 전화, 정보 공급업자에 액서스하고자 한다―접속에 관한 중대한 한계를 인정한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은 애파듀라이가 묘사한 글로벌 흐름의 강화에 있어서 중요한 벡터이다. 애퍼듀라이의 중심-주변부 모델에 대한 메타포는 17세기 식민주의의 확산으로부터 전개된 글로벌 질서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그의 메타포는 '서구'에 대한 주변부의 관계가 일차적으로 잉여가치의 원천으로 기능하는 것을 상정하면서 펼치는, 궁극적으로 현대의 '선진'국들로 구성된 유럽과 미국의 핵심부에 반대한다. 이와 같은 국민국가의 개념은 '서구' 모더니티 수출의 가장 성공적인 것 중 하나였다. 사실상 서구의 국민국가 내부에서, 그리고 그 국민국가를 통해서 그 초점을 맞추는, 포상 관계(emplaced relations)의 개념은 중심-주변부 모델에 중요하다. 애퍼듀라이는 어떻게 이 관계들이 전화되었는지를 얘기하고 있다. 문화의 글로벌화는 문화의 동질화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글로벌화는 동질화의 다양한 장치들(군비, 광고 테크닉, 언어 헤게모니, 의류 스타일 등등)의 사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지역의 정치·문화적 경제는 이 동질화의 장치들을 흡수하며, 단지 주권, 자유기업, 근본주의 등과 같은 이질적 대화로 귀환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국가는 글로벌 흐름의 완전 개방화라는 점차 미묘한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완전 개방을 막음으로써, 중국 신드롬 등의 폭동이 국민국가를 위협하며, 그리고 국민국가는 미얀마, 알바니아, 북한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낸 민족적 단계를 벗어난다. 메타포의 변화를 통해 나타난 글로벌 자본주의의 재조직화는 국민국가의 체험을 변경시키고 있다. 중심-주변부 축을 따라 조직된 자본주의 세계는 공간, 특히 국민국가와 그 국민국가의 식민지적 부속국들로 조직된 지리적 공간에 의해 지배된다. 글로벌 흐름은 국민국가의 자본주의적 역동성이 발휘된 결과물이지만, 동시에 이 흐름은 강제적으로 과거의 국민국가적 현실을 자명하게 드러낸다. 다른 어떤 것도 인터넷만큼이나 이를 분명하게 드러내진 못하고 있다. 전신·전화의 등장으로 인한 커뮤니케이션의 즉시성은, 두 가지 이유로 인해 국민국가를 묶는데 일조하고 있다. 첫째는, 이 두 가지 기술은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를 동질화하려는 맥락에서 이용되고 있다. 이 기술이 국가의 관료적·관리적 시스템 내부에서 이용되고, 기술과 시민과의 직접적 연계와 이 기술들이 군사력과 경찰 통제력을 제어하도록 하는 권력의 집중화 경향, 이 양자 모두는 이 국가간 결합의 과정을 강화한다. 둘째는, 국민국가 내부에서는 이 기술들을 우선적으로 이용하였다. 하지만 1970년대 새로운 텔레커뮤니케이션 기술은―예컨대 위성의 이용을 포함하여― 국제 전화 통화를 더욱 값싸게 이용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무엇보다도 시민 이용자들에게 보다 분명해졌다. 케어리의 주장을 재정리한 워크는, "철도와 더불어 전신과 전화의 벡터는 국가간 커뮤니케이션의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고 논평했다. 케어리는 "어떤 의미에서 철도와 운하가 시장을 지역화했다면, 전신은 그 시장을 국제화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통신기술들은 내적 동질화로의 경향, 즉 국민국가의 주요 테마 중 하나이다. 이용자가 하이퍼공간을 정적이고 포상된 공간으로 인지한다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이 순간적으로 기능한다는데 있다. 정보와 화폐―다른 상품과 달리 이 두 가지는 그 자체내에 사용가치를 지니지않으며 단지 교환기능만을 지닌다―모두의 질적 특수성은 인터넷의 벡터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순화된다. 이 특수성은 그 두가지 상품이, 특히 중요하게는 다른 국민국가로 "단지 들어갈 수" 있는지를 떠보면서, 더욱 더 "다른 쪽 세계에 거주하는"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경우로 바꾸고 있다. 국민국가는 스스로를 다른 국민국가들과는 차별적인 것으로 한정하고 동질화를 꾀하려 한다, 과거의 예로 봐서, 국가는 타국들과의 차별성을 국민국가의 경계와 그 경계에 의해 구획지어진 내부에 공간적으로 한정되었으며, 물질적이고 문화적 환경으로 표현하였다. 사람들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를 국제적으로 사용했을 때, 수송으로부터 커뮤니케이션의 분리가 의미하는 것은, 특유의 지리적 공간성으로 표현된 국민국가의 민족 의식이 감소되었다는데 있다. 이러한 전망에서 볼 때, 인터넷의 하이퍼공간은 민족문화의 권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국민국가의 지리적 공간편성을 제거해 버렸다. 일본과 싱가포르같은 수많은 국민국가들이 그들 국가내의 시민들이 인터넷에 접속 가능해지는 것에 대해 주저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일반적인 이유 때문이다. 대부분의 국민국가들이 국제 전화 통화의 일대일 상호작용성에 대한 통제력의 결핍을―아마 내부의 폭동의 시기를 제외하곤―기꺼이 허용할 채비를 갖춘 반면, 인터넷은 증가된 커뮤니케이션의 질적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고로 논리상 현재 인터넷을 장악한 국민국가내 시민들은 인터넷 기술을 보다 덜 위협적으로 느끼게 되며, 역으로 그러한 장악이 자신의 문화적 통합성을 위협한다고 느끼는 국가들은 더욱 적대적 반응을 보여줄 것이다. 이는 영어의 보편화와 로마식 알파벳 문자의 사용뿐만 아니라, 사이버공간을 지배하는 여러 유용한 정보와 문화적으로 특수한 상호작용 방식의 결과이기도 하다. 예컨대 최근 중심적으로 논의되는 자유, 검열, 인권의 수사학. 하지만 인터넷의 글로벌 흐름에 대한 미국의 지배가 지속되리란 보장은 없다. 여기에는 실제로 아이러니가―혹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내 모순으로 묘사했던 것이―숨어있다. 현재 미국은 인본주의적 사명의 분위기를 만들어낸 프로젝트, 즉 '글로벌 정보하부구조'(GII)를 구축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떠맡고 있다. 미부통령 앨 고어는 1994년 일본 쿄토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GII를 구축하려는 노력은 이데올로기를 뛰어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부여하므로써, 전세계의 모든 시민들에게 혜택이 돌아 갈 수 있는 하부구조를 제공한다는 공통의 목표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 정보하부구조를 이용함에 따라, 개별 경제단위를 원조하고, 보건·교육·환경보호·민주주의를 증진할 것이다. 보건·교육·환경을 끼워넣은 의미는 경제적 목표와 정치적 목표에 대한 이중성을 크게 강조하는 것이다. 고어는 인터넷이 부여한 정보접근의 '자유'가 권위주의적 국민국가들 내부의 민주화 운동과 절대적으로 상관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미국은 경제적(그리고 이데올로기적)우위를 지키기 위해 GII를 촉진하고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많은 비미국인들과 비영어권 사람들이 그 대열에 합류했을 때, 인터넷 사용에 대한 미국의 헤게모니가 좀 더 강하게 지속되고 있다. 경제질서와 인터넷의 결합은 국제전기통신협회(ITU)이 GII에 적용했던 5가지 원칙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는 '사적 투자, 시장중심의 경쟁, 유연 규제체계, 비차별적 접근, 그리고 보편적 서비스'이다. 앞의 세가지 원칙은 GII의 구축, 소유권, 그리고 경영에 대한 자본주의적 형식을 강조한다. 나머지 두가지 원칙은 시청자에 관한 내용이다. 후자의 내용은 전세계의 시민을 일종의 시청자로 구성한다는 취지 혹은 부여받은 유토피아적 특성, 이념이다. 여기서 우리가 진행되고 있는 현실을 완전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고어가 행한 인터넷에서 정보초고속도로의 수사적 이동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이 연관성에 주목한다면, GII의 구축이란 무한 팽창의 미디어기업들에게 인터렉티브 상품 전달시스템의 기초를 제공에 다름아님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이 시장자본의 꿈이 성취될 것인가? 워크는 군사적·기업적 용어를 사용하여, "더욱 빠르고, 더욱 값싸고, 보다 유연적이고, 훨씬 광대역의 벡터들을 통해서, 이 벡터들에 전략적 우위를 가지고 접근할 수 있는 자본들이 어떻게 무장하는지"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애드리언은 전화가 지닌 부가가치 서비스의 성장 전망의 한계성을 유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역폭의 증가가 미치는 그 결과를 알고 있다. 전화 공간은 대역폭의 증가로 상업 선전에 적합해진다. 즉 정보오락 상품들이 그 공간을 점유하고, 쇼핑몰로 뒤바꾼다. 이 기업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인터렉티브 케이블 TV이다. 이 케이블 TV는 케이블상에 거의 어떠한 공간도 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 상호작용성은 일종의 경품처럼 제시되는 온라인 쇼핑, 비디오게임, 전화를 통한 유료 영화 등으로 한정된다. 이처럼 한정된 의미의 정보고속도로는 온라인으로 구입하고 소비할 수 있는 생산, 서비스, 정보, 오락의 전시장일 뿐이다. 앞서 기업들이 이념적으로 상호작용성을 제한하고자 한다는 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전화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비교해서 대중 커뮤니케이션 매체로 진전되지 않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전화는 탈중심적이고 인터렉티브하다. 전화와 동일한 통신기술에 기초한 인터넷은 전자우편이나 '대화'와 같은 일대일 상호작용, 그리고 동시적이고 다발적인 상호작용의 유즈넷, 리스트서브 리스트(LISTSERV lists), 인터넷 릴레이 채팅(IRC)와 같이 매우 다양한 일대다 상호작용을 행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현대 국민국가의 조직과 함께 전개된 라디오와 텔레비전 기술방식과는 그 기능적 연관성에 있어서 대조적이다. 앤더슨(B. Anderson)은 현재를 적절하게 드러낸 이미지란 점에서 국가를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y)로 묘사했다. 그는 일련의 신화와 지식의 공유가 국민적 정서를 생산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신문이 신화와 지식의 공유를 발생시키는 한 수단으로 출발했다고 주장한다. 앤더슨은 남미에 관해 서술하면서, 신문의 전신으로 다음의 내용을 실은 가제뜨(gazette)를 언급하고 있다. 가제뜨는 식민지에 대한 정치적 임명권, 그리고 중심도시들에 관한 뉴스―선박이 입·출항할 때, 어느 항구에서 어떤 상품들을 가지고 얼마에 거래되었다는 따위의 상업적 뉴스―와 나란히, 부자들의 결혼 등도 다루고 있다. 달리 말해서 이 곳에서는 선박, 저 곳에서는 결혼, 그리고 이 곳에서는 주교, 저 곳에서는 가격을 얘기하는 것은 바로 식민통치와 시장체계, 그 자체내 구조를 보여준다. 이러한 식으로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의 신문에 실린 선박, 교량, 부교, 가격 등은 특수하게 모인 비슷한 독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이들 사이에 상상된 공동체를 창출했다. 앤더슨은 신문의 '뉴스'적 측면이 발전됨에 따라, "신문 그 자체의 개념으로 인해 '세계의 사건들'이 각 지방의 독자들에게 특수한 상상의 세계로 굴절된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신문의 '발명'과 국민국가의 등장간의 연관성 속에서 또 다른 두 가지 발전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현대 공론장의 형성과 대중 시청자의 형성이다. 하버마스는 현대 공론 영역의 등장에 대한 영향력있는 논의를 통해서, 부르조아적 발전이 자본주의 시장의 확산이라는 맥락하에서 발생했던 것처럼 공론장 또한 이 맥락 속에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공론장을 민주주의의 기능에 핵심 요소라고 본다. "정치영역의 기능 요소로서 공론장이, 시민사회의 욕구에 따른 국가권력과 함께 시민사회의 자체 접합을 위한 일종의 기관처럼 규범적 지위를 얻었다"고 그는 제안한다. 인쇄 문화, 그 중에서도 특히 신문 문화에 기초한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은 민주사회의 주된 정치적 논쟁장이다. 이 점에서 신문은 일차적으로 공개된 논쟁을 모사하거나 보조한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신문의 역할이 존재한다.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앤더슨은 신문이 독자에게 정보를 알림으로써 국민국가내에 상상된 공동체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후에 등장하는 대중매체인 라디오와 텔레비전처럼, 신문 또한 상호작용적이 아니라는데 있다. 신문의 국가내 상상된 공동체 구성은 침묵하는 대중을 구축하므로써 이루어진다. 존 하틀리(J. Hartley)는 공론장 구성에서의 대중매체의 역할에 대해 훨씬 비판적 관점을 강조하면서, 앞서의 접근 방식을 한 단계 높이고 있다. 하틀리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상황과 현대적 상황을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오늘날에는 물리적인 공론 영역이 부재하며, 정치는 '민중적'이지 않다. 동시대의 정치는 두 가지 의미에서 대리적이다. 즉 선택된 소수만이 시민을 대표하며, 정치는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거쳐 공중에게 제시된다. 대리적 정치공간은 말 그대로 영상들로 이루어지며, 그 영상들이 공론 영역을 구성한다. 공론장의 구성을 영상들로 국한할 필요는 없다. 공론장은 (신문의) 인쇄물이나 (라디오의) 음성도 포함하고 있다. 하틀리는 공론장의 발생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토마스 홉스가 현대의 정치 국가를 이론화한 {리바이어던Leviathan}(1651)의 최초 시도로 회귀하여 살피고 있다. 리바이어던이 한치의 에누리없이 완전하게 대표자의 권력을 승계하여 생명을 얻는 바로 그 때..., 이제부터 시민 주체들(사적 개인들)은 리바이어던이 그 주체들에게 '위임하거나' 양도한 것들을 수행한다. 간단히 말해 공중은 자신의 주권을 리바이어던에게 이양하며, 그런고로 리바이어던은 공중의 창조자가 된다. "종종 절대군주제와 동등하게 취급하는 초강력 국가, 즉 리바이어던은 이제 민주주의가 가능한 정치적 조직체가 되버린다. 이는 정치 참여가 공중의 사라짐이라는 표상으로 전화되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공중이 시청자로 전화되었다. 이엔 앙(I. Ang)은 대중매체 시청자의 광범위한 구성을 논하면서, 기본적으로 시청자 구성을 두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즉 텔레비전의 분화가 상업서비스 형태와 공공서비스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을 반영하여, 이른바 시장형 시청자(audience-as-market)와 공적 시청자(audience-as-public)로 나누는 것이다. 비록 그 두 가지가 본질적인 측면에서 구분되나, "두 종류의 제도가 불가피하게 정복 대상으로서의 시청자에 관한 도구적 관점을 강화한다.... 두 가지 경우에 시청자는 구조적으로 단선적이고 일방향적인 과정의 끝에 수동적으로 놓인다"고 그녀는 지적한다. 시청자는 이 지배적인 시청자의 광범위한 구성으로 인하여 집중하고, 대량화하고, 수동적으로 된다. 앙이 텔레비전에 집중하여 저술하고 있지만, 그녀가 천착한 시청자에 대한 이해란 현대의 국민국가내 공론장의 보편화된 특성일 뿐이다. 앤더슨은 어떻게 국가의 탄생이 시청자로 하여금 상상된 공동체로 전화하여 국가의 성원들을 구성하는가를 묘사한다. 하틀리는 유사하게 민주주의 국가의 통제 과정을 제시한다. 하버마스에게는 신문의 역할, 그리고 공론장의 퇴보를 가져온 새로운 시·청각 매체간에 불연속성이 존재한 반면, 하틀리는 이 시·청각 매체를 신문이 항상 그 일부가 되어 동일한 과정을 연속하는 것으로 본다. 하틀리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현재 왜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집중화된 커뮤니케이션 전달체계로 발전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간단히 말해 국민국가의 상상된 공동체, 그 국가의 공론장, 그리고 그 국가의 시청자는 관념적으로 공통의 경계에 서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누구나 여러 포럼 가운데에서 자신의 관점을 제시할 수 있는 권한과 함께, 인터넷의 보편적 상호작용성은 (저널리스트적인 객관성 개념에 전형적인) 공공 정보, 그리고 민주주의적 국민국가의 상상된 공동체 형성에 중심적 특성, 즉 개인 견해간 차이에 위협을 안겨주고 있다. 지난 수 년간에 걸쳐 대중매체와 시청자 형식을 재구성하기 시작한 미디어 발전의 두 경향이 존재한다. 첫째는 케이블 TV의 확산으로 채널 다양화로의 이동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는 내로우캐스팅과 '대중매체'라는 범주에 대한 의문을 보편화시켰다. 둘째는 보다 확대된 상호작용성으로의 이동이다. 이는 VCR의 사용에서 페이퍼뷰까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시청하길 원하는 프로그램을 주문할 수 있는 능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인터넷은 이 두 가지 발전에 대해서 질적인 이동을 촉진한다. 앙에 의해 묘사된 수동적인 미디어 시청자는 인터넷의 경우에 (상호)능동적이 되며, 완전하게 미디어 생산물의 제작에 참여한다. 그것은 '정보초고속도로' 개념을 향한 수사학적 이동의 중심부에 있는 또 다른 대중매체 전달체계로 인터넷을 '재형성하려는' 시도이다. 전통적인 대중매체의 시청자가 이미지를 소비한다면, 정보초고속도로의 잘 은폐된 목적은 대중매체의 수동적이고 수신만 하는 시청자를 능동적이고, 소비하는 시청자로 전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시청자는 단지 이미지들뿐만이 아니라, (댓가를 지불하고) 온라인상에서 유용한 광범위한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한다. 시민들이 형식상 국민국가의 물질적이고 규율적인 표현물에 의해 규정되는 일상생활의 생산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맡을 것이라는, 미셸 드 세르토(M. de Certeau)의 {일상생활의 실천The Practice of Everyday Life}의 급진적 내용에서, 그는 "주변성(marginality)이 오늘날 더 이상 소수집단으로 제한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적이고 침투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계속해서, "주변성이 보편화되고, 주변 집단은 이제 침묵하는 다수가 되었다"라고 주장한다. 드 세르토가 얘기한 내용은 앤더슨, 하틀리, 앙이 표현한 과정들을 이어받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논의는 탈대중화와 상호작용성에 의해 위협받음으로써 표현되며, 이 두 가지 특성은 모두 과거 대중매체로 인해 침묵하는 대중의 '공론적' 주장으로 여겨지고, 대중매체의 현대 형식내에서 인터넷의 액서스 구조에 중심이 된다. 멕시코의 아메리카 인디언들인 치파스와 같이 소수의 침묵이 강요된 집단이 인터넷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칠 수 있으며, 누군가 그들의 의견을 뉴스그룹을 통해 강력히 알린다면, 미디어 조직과 시청자의 구성뿐만 아니라 단일의 특수적인 상상된 공동체(규율적이고 그 규율에 따르는 공론장)의 형성과 국민국가 그 자체의 이해 방식도 바뀌어간다. 인터넷은 글로벌 흐름내에서 하나 이상의 벡터로 기능하면서, 국민국가의 수사학을 동질성에서 다문화주의로 이동시키고, 국민국가의 정치를 계급 중심에서 이익 중심으로 이동시켰다. 우리는 이제 처음에 고어가 인터넷에서 정보초고속도로로 수사(와 물질 형태)를 바꾸는 것에 대한 관심사와 함께, 완전하게 겹쳐있는 필연적인 두 번째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경제적 고려점에 더하여 인터넷이 현대 대중매체 보다 훨씬 나은 것으로 재구성하며, 그리고 인터넷이 장차 국민국가의 제도형태에 덜 위협적인 것으로 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과거의 '시청자'가 자신의 관점을 능동적으로 제시하게끔 하는 매우 새로운 공론장 개념과, 공동체 개념 사이를 주의깊게 구분해야만 한다. 특히 미국의 인터넷에 대한 논의에서는, 이 두 가지 개념이 통합되는 경향이 있다. 기본적으로 현대 공론장 개념은 사적 생활과 공적 생활 사이의 구별에 따른다. 공적 생활영역인 공론장은 현대에는 공유된 지식 공간과 정치 공간에 해당한다. 앤더슨과 하틀리는 18세기 이래로 전개된 전통적인 신문의 여러 정보가 현대 공론장 형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본인은 앞서 시민/시청자는 현대의 공론장내에서 침묵하기를 강요받는다라고 제안했다. 이 상황은 실제 조금 더 복잡하게 이루어진다. 18세기 런던의 살롱문화(coffee house)에서 오늘날 사무실내 차마시는 시간의 토론에 이르기까지, 여기에서 진행된 문제 설정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문제 설정이란 대중매체에서 제시한 정보로 제한받으며, 미디어와 시청자의 구조적 관계는 미디어 조직 내부의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와 토크 라디오의 표현 이외에는 거의 어떠한 응답이나 다른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인터넷은 시청자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포럼을 제공한다. 제이 웨스톤(J. Weston)은 "구자유와 신기술-공동체 네트워킹의 진화"이란 논문에서, 인터넷의 잠재력을 매우 분명하게 제시한다. 인터넷은 대체로 사람들 스스로의 발언대를 구하는 것과 관련되며, 공적인 방식으로 서로가 발언하고, 서로간에 전달되는 내용은 중요성에 있어 분절적이고 심지어 이차적이다. 대중매체는 (개인의) 존재를 확인하지도, 확인할 수도 없다. 시청자의 시장은 존재하지만, 독자, 청취자, 혹은 관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웨스톤의 논문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그는 시민이 공론장에서 발언할 수 있는 가능성이란 대중매체의 전개에 의해 제한받았던 일종의 '구자유'라고 믿는다. 나는 본질적으로 이것이 전혀 구자유가 아니라, 실제로 현대국가의 존재 방식인 민주주의가 현존하는 자유의 환상 가운데에서 구축되었다고 보고 싶다. 공동체 논의는 현대―서로간에 얘기를 주고받는 사람들에 대한―인터렉티브 커뮤니케이션 개념의 공론장 논의와 일치하여 나타난다. 그러나 현대 서구에서 '공동체'는 한편으로 향수적인 내용을 함축하여 전한다. 공동체는, 현대의 기초적 변화―통속화, 도시화, 자본주의, 산업화, 그리고 물론 국민국가의 출현―로 인해 대인간 상호작용의 분열과 당연한 도덕 질서의 상실이 발생하기 이전에, 생활양식이 신비적인 방식으로 이해되는 근본적 '공유감'에 속한다. 미국내에서 현대 이전 시기의 공동체에 대한 이 향수적 신비화는 '소규모 마을'의 이데올로기의 일종이다. 루스 로젠(R. Rosen)은 그 근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835년 초 토크빌은, 미국인들이 대리적 공동 생활을 제공하는 광범위하게 결합된 네트워크를 구성하느라고 분주하다고 지적한다. 도시가 팽창하는 것처럼, 아직도 미국인들은 아득히 지나쳐 버린 소규모 마을을 슬퍼한다. 미국인들이 강제로 익명성이나 도시 생활에 맞닥뜨리도록 강요받을수록, 그들은 안정성, 면대면 면식, 공유 가치들, 마을의 도덕적 책임성을 더욱 더 신비화했다. 20세기 초의 수십년간 그러한 신비화는 진보당의 개혁자들이 미국 도시를 소규모 마을로 새롭게 고치려는 시도에 자극을 주는 만큼이나 더욱 강화되었다. 하워드 레인골드(H. Rheingold)의 {가상공동체-컴퓨터화된 세계에서 연결하기}(1994)란 책은 아마도 가장 널리 애독하는 인터넷 입문서이다. 레인골드의 책 제목은 그가 바라보는 인터넷의 이용의 전제 조건을 시사하고 있다. 그는 서문에서 WELL에 대해 언급한다. 현재 인터넷에 연결된 WELL은 "중규모의 컴퓨터 컨퍼러싱 공동체"이며, 그는 이 가상공동체의 성원이기도 하다. 수년전의 가상마을과 구별되는 여러 특성들을 지닌 통일체로서, WELL은 소규모 마을이지만, 이제는 네트의 활발하고, 윙윙거리는 혼돈으로 인해 그 마을 입구가 개방된 채로 유지된다. 여기서 WELL은 소규모 마을과 닮은 어떤 것이기 보다는, 바로 그 소규모 마을로 묘사된다. 인터넷의 WELL은 비교적 도시에 가까운 것 같다. 레인골드는 이 가상 '도시'안에서 비슷한 관심사를 지닌 사람들로 구성된 가상공동체내의 일원이 되는 것을 가능케 한다. 흥미롭게도 로젠의 주장대로라면, 레인골드는 그 연결점을 멜로드라마에서 찾고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특이한 가상공동체의 변화를 지켜본다는 것은 자신만의 인류학적 스릴과, 그 공동체는 관객을 배역과 분리시키는 어떠한 경계도 지니지 않으면서, 끝없이 아마츄어적인 멜로드라마를 훔쳐보는 흔하디 흔한 관음증 증세를 갖게 한다. 인터넷의 미국적 체험에 있어서, 공동체 이미지의 중요성은 개인적 회상을 통해 얘기될 수 있다. 1994년 11월 19일, 피터 맥더모트(P. F. McDermott)는 CPSR-GLOBAL LISTSERV의 질문에 대한 장문의 답장을 보냈다. 질문인 즉슨, "누군가가 왜 인터넷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미국내에서 그토록 대중적이 되었는가를 물었고, 여타 동일 수준의 선진국들과 미국이 다른 어떤 특별한 이유가 존재하는 지도 묻고 있었다." 맥더모트는 인터넷을 찾아 다니고, '공동체 의식'에 잠기는 그 자신의 즐거움을 묘사한 후, 계속해서 그는 인터넷에서 제공하는 그 공동체에 대한 근거들을 깊이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종류의 미국문화가 공동체 의식과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해 내 스스로 놀란다. (그렇다, 우리는 바로 이 공동체 기반 위에서만이 우리 자신의 문화를 지닌다.) 나는 지난 2,30년간을 거치면서 미국내 공동체가 파괴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놀란다. 나의 부모가 어른이 되가면서, 부모세대의 가족들 모두는 이웃과 알고 지냈다. 하지만 나는 내 친구들이 이제 거의 어떠한 이웃도 알지 못하며, 동네에 사는 다른 가족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수도 없이 들었다. (이와 같은 것이 내가 단지 상상하는 것들이 아니라면)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상실이며, 공동체에 대한 대응적 모색이 바로 미국에서 인터넷이 대중화되는 한 이유가 되지 않겠는가. 맥더모트는 이 의미심장한 설명을 통해서 부모 세대와 자신의 세대 사이에 '공동체' 파괴가 자리하고 있음을 얘기하고 있다. 인터넷은 그에게 그의 부모가 속해있던 현실 공동체에 대한 가상 대체물이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미국내 삶의 질이 하락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으며, 인터넷에서 구성된 가상공동체가 그 균형을 되찾는데 일조하리라 여긴다. 우리는 그와 유사한 관점을 CPSR-GLOBAL에 베른트 프로만(B. Frohmann)이 쓴 메일에서도 볼 수 있다. 프로만은 유럽적인 시각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수사적 질문을 던진다. "사이버동료들(Cyber-buddies)의 공동체 개념의 매력성이, 미국내 공론장의 퇴보에 직접적으로 비례하여 그 힘을 획득하고 있으며, 공론장이 쇼핑 몰과 디트로이트의 르네상스 센터와 같은 거대 기업본부 등의 사적 공간으로 대체된다." 프로만은 계속해서 미국 도시와 유럽의 수많은 도시들의 건조환경과 비교하고 있다. 나는 최근 그라즈의 회의석상에서 동료들에게 말을 건넸을 때, 그들 중 대부분이 미국의 사이버공동체에 대한 전형적인 자만심을 어리둥절해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당신이 확대된 공론장을 지닌 도시안에 거주하며, 그리고 도시안의 사람들이 (공적으로 유지되는) 공간에서의 교류에 실제적 기회와 장소들을 갖는다면, 그들의 반응은 이해할만한 것이다. 결국 당신은 사람들 사이의 의미있는 연결 장소로써 '정보초고속도로'에 대한 선전이란 조금은 웃기는 짓이라 여기기 십상이다. 단지 하이퍼공간에 존재하는 가상공동체가 인간 서로간에 지리학적 간격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포함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라면, 프로만의 오류는 현실 공동체와 가상공동체를 글자 그대로 동등하게 다루는데 있다. 하지만 그가 유럽과 미국 도시의 물질적 형식을 비교하면서 지적하는 바는 시사적이며, 그의 지적은 신비적 공동체를 향한 미국 문화의 특별하게 진전된 갈망과 같은 것으로 그 의미가 보충될 수 있다. 결국 유럽도시는 광장들로 구성된 현대 이전의 센터들이 조성되어 있는 반면에, 미국의 모든 도시는 현대적이며 자본주의적 교환, 특혜 사업, 그리고 지금의 쇼핑몰의 요구에 따라 형성되었다. 현재 미국의 소규모 마을에는 공공 특수기관, 교회, 마을 사무소 혹은 우체국까지도 있다. 소규모 마을과 같은 미국의 공동체 이미지는, 그 동일한 이미지를 이용하여 이른바 커뮤니티 네트워크, 혹은 프리넷(Freenet)을 기획하게 되었던 실제 근거이다. 레이 아취(R. Archee)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프리넷의 주된 철학과 근본적 전제는 커뮤니티 컴퓨터 네트워크에... 힘을 불어넣는 일이다. 이러한 철학과 전제는, 그 네트워크들이 자유롭거나, 혹은 요금을 지불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일반인들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 즉 정보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한다 하더라도 유효하다. 제이 웨스톤은 캐나다의 내셔널 캐피털 프리넷을 기초로 삼으면서, 이 상호 의사소통의 네트워크들에서 강화되는 힘의 본질을 강조한다. 내셔널 캐피털 프리넷은 개인, 집단, 조직 모두가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무언의 플랫폼, 즉 상상된 공론장이다. 그곳에서의 분쟁과 논쟁은 그 공동체 내부에서 이미 발생하고 있는 분쟁과 논쟁의 징후로써 발생할 수 있다. ...그러한 공간은 프리넷에 대신한 어떤 공적이거나 사적인 조직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네트에 의해서만 오직 구성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공동체 개념과 광범위한 기초하에 놓인 새로운 상호작용의 공론장 구성이 불투명해지는가를 지켜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터넷이 소규모 마을의 공동체 모델을 (재)창출한다고 여겨지는 반면, 우리는 여기서 캐나다의 내셔널 캐피털 프리넷이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조건을 제공한다기 보다는 기존에 존재하는 공동체로부터 발생했으며, 이전에 침묵하는 사람들의 발언이 가능해진 가상 공론장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웨스톤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공적인 소속'과 '참여 민주주의'와 같은 표현들은 우리의 수사적 전통에 아로새겨져 있으나, 이 표현들에 대한 자명한 수용은 항상 동일하게, 확실한 접근 무능성을 그 전제 조건으로 하였다. 언제나 우리에게 소속과 참여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을 앞서지 못한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달리 말해 웨스톤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란 전형적으로 민주주의의 실제와 반목하면서, 최소한 공공 미디어의 영역내에 머무른다고 봄으로써 하틀리와 그 주장이 일치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지적해야 할 것이 있다. 인터넷(혹은 프리넷)은 실제 소규모 마을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면, 누가 그 안에 거주하는가? 본인의 이 질문은 누가 현재 인터넷에 실질적인 접근권을 지니는가를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터넷이 공동체의 신화를 (특히 미국인들에게) 현실화하는 역할을 한다면, 그리고 공동체 신화가 미국의 소규모 마을에 대한 신화적 이미지의 노스텔지어로 표현된다면, 누가 이 신화적인 소규모 마을의 거주민들인가? 오늘날 정체성의 구체화는 대개 코베너 머서(K. Mercer)가 지적한 이른바 "아주 근친한 '인종-계급-성'에 대한 주문"의 세 가지 구도를 통해 드러나며, 정체성은 점차 서구의 거주민들이 타민족의 정체성과 마주쳤을 때 이를 판독하는 세 가지 표식들을 반영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현대 도시생활의 기호 체험에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도시의 기호 현상은 형상과 외관을 필요로 한다. 인터넷의 신화적인 가상의 소규모 마을 공동체에서는 이와 같은 분명한 기호 체험이 부족하다. 인터넷 거주자들이 육체가 이탈된 결과는, '현실' 생활에서 차지하는 내용 보다, 서로 다른 성별, 계급적 배경, 혹은 개인사를 보여주는 이름, 프로필, 목소리 등의 가상 정체성 구축이 가능해지게 한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너무나도 자주 온라인 세계가 스스로의 준거틀로 삼는 전형적인 소규모 마을간에, 얼마나 많은 현실적인 차이점이 실제 조정 가능할 수 있을까? 어쨌든 미국적 견지에서 보자면, 인종적 다양성은 널리 공유된 이상으로 여겨지는 만큼이나 현대 도시에서 진행되는 공동체의 쇠퇴과 붕괴에 대한 완곡한 표현인 듯 하다. 특히 이엔 앙과 본인이 다른 지면을 빌어 설명했던 것과 같이, 항상 미국내 흑인의 인종적 차이는 오늘날 이미 벌어진 간극으로 영구 존재하는데, 이는 미국내 동질적 정체성을 구성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로젠이 지적한 미국의 신비화된 소규모 마을, 그리고 그 안에 공유된 도덕 질서는 미국내 흑인(혹은 아시아인)이 아니라 유럽태생의 (아마도 대개는 2세대인) 백인 정착자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 분명하다. 이 근면한 반(半)-전원의 백인들은 소규모 마을을 도시로 변형시키는 한편, 미국내 부르조아의 구체화된 노동 윤리(개인의 자조를 통한 성공)를 제시하면서, 중산층으로 상향 이동하였다. 그리고 모든 도시의 중요한 공직은 남성들만이 차지했다. 인터넷 그 자체의 순수성과는 별도로, 우리는 미국인이 공동체를 인터넷으로 신비화하는 작업이란, 우선 백인 중산층 남성의 지배와 그들의 문화 소비를 재창하고자 하는 신비화된 초창기의 현대적 공동체에 대한 향수적 꿈을 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차이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 세워진 이질적 국민국가를 구성하려는 현대의 시도와 무관하게, 소규모 마을 공동체의 이미지는 뒤죽박죽의 동질화된 정치의 도가니속에서 단일의 새로운 미국민의 정체성으로 자리잡는다. 본인이 앞서 지적했던 바처럼, 아직까지는 어떤 미국인도 인터넷이 미국문화에 미치는 위협에 관해 불평하지 않는다. 글로벌 정보하부구조에 대해 고어가 천명한 감춰져있고 순진하기까지한 발상은, 유럽의 계몽주의적 가치들에 기초한 미국 이데올로기가 인터넷 공동체을 향한 동질적 기초를 형성할 것이라는데 있다. 인권, 개인주의, 민주주의와 같은 계몽주의적 가치들은 자본주의의 확산이라는 고어의 또 다른 관심사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인터넷을 정보초고속도로로 전화시키고자하는 이같은 결정은, 현대의 대중매체적 관계로 인터넷을 되돌리고, 작금의 공공 언로에 대한 접근을 차별적인 소비상품에 대한 제한되고 인터렉티브한 선택으로 변형시키고, 그 과정에서 국민국가의 재구성을 둔화시킴으로써, 소수 집단의 액서스란 '문제점들'과 대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미국인의 하이퍼공간에 대한 자본주의적 지배가 계속되거나, 서로 다른 언어, 문화, 그리고 비경제적 관심사가 자리잡는 어떤 공간이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같은 대치상황이 온존할 것이다. -------------------------------------------------------------------------------- 미주 1. 이 논문의 출처는 J. Stratton, "Cyberspace and the Globalization of Culture", D. Porter ed., Internet Culture, London: Routledge, 1997, pp.253-275. 2. 그는 커틴 기술대학의 커뮤니케이션과 문화연구학부내 문화연구 상임강사이다. 그의 가장 최근 저작은 Writing Sites: A Geneology of Postmodern World(1992)와 The Desirable Body: Cultural Fetishism and the Erotics of Consumption(1996) 이다. 3. Robert Adrian, "Infobahn Blues," CTHEORY, article 21, 1995. ctheory@concordia.ca의전자메일을 통한 접촉도 가능. 그리고 William Gibson, Neuromancer, New York: Ace Books, 1984. 4. 마이클 하임(M. Heim)은 [사이버공간의 에로스적 존재론], {가상현실의 형이상학}, 옥스퍼드출판사, 1995, p.88에서, 깁슨의 매트릭스에 대한 정확한 에로스적 기원을 보여주고 있다. 즉 "매트릭스라는 말은 에로스 발생의 근거, 즉 "어머니"란 뜻의 라틴어에서 생겼다"고 지적한다. 5. Karl Marx, Grundrisse, London: New Left Review, 1973, p.539. 6. David Harvey, The Limits to Capital, Oxford: Basil Blackwell, 1982. 7. James Carey, Communication as Culture: Essays on Media and Society, Boston: Unwin Hyman, 1988, p.213. 8. Carey, ibid., p.213. 9. Carey, ibid., p.217. 10. David Harvey, The Condition of Postmodernity: An Enquiry into the Origin of Cultural Change, Oxford: Basil Blackwell, 1989, pp.192-4. 11. Robert Young, Colonial Desire: Hybridity in Theory, Culture and Race, London: Routledge, 1995, p.169. 12. Gilles Deleuze and Felix Guattari,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London: Athlone, 1984, pp.34-5. 13. Jean Baudrillard, Simulations, New York: Semiotexte, 1983, p.54. 14. McKenzie Wark, "What does Capital Wants? Coparate Desire and the Infobahn Fantasy," Media Information Australia 74(Nov. 1994), p.18의 내용을 Howard Rheingold, The Virtual Community: Homesteading on the Electronic Frontier, Mass.: Addison-Wesley, 1993, p.67에서 재인용. 여기서 레인골드는 인터넷의 기술적 역사를 1960년대와 70년대 미국방성의 DARPA로부터 성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15. Arjun Appadurai, "Difference in the Global Cultural Economy," in Mike Featherstone, ed., Global Culture: Nationalism, Globalization and Modernity, London: Sage, 1990, p.296. 16. Appadurai, ibid., p.307. 17. Wark, ibid., p.19. 18. Carey, ibid., p.217. 19. 일본은 인터넷이 일본 문화에 대한 외부의 영향력이 증대하고 있다는데 그 관심을 둔다. 밥 죤스턴(Bob Johnstone)은 Wired 2.2(Feb. 1994), pp.38-42의 "Wiring Japan"이란 글에서 일본이 인터넷과의 연결에 더딘 이유를, "인터넷의 자유롭게 굴러가는 민주주의적 방식이 일본의 가장 권위주의적인 전통과 맞부닥뜨리는 두 문화의 정면충돌" 효과에서 찾고 있다. 싱가폴에서는 최초 관료들의 수많은 주저 이후에, 현재는 일반 대중이 고무되어 인터넷을 싱가폴의 현대화 드라이브의 일부로서 접근중이다. 동시에 아직은 '서구의' 타락상에 대비되는 '아시아의' 도덕적 효과들에 대한 관심이 잔존한다. 20. 1994년 9월 22일, 일본 교토의 국제 전기통신협회(ITU) 주최 전세계 컨퍼런스에서 앨 고어 부통령이 위성을 통해 전송된 연설문. 이 글에서는 뉴스그룹인 LISTSERV CPSR-GLOBAL에서 그 내용을 취하고 있음. 21. Gore, ibid., "Remarks." 22. Wark, ibid., p.18. 23. Adrian, ibid., "Infobahn Blues." 24. Benedict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London: Verso, 1983. 25. Anderson, ibid., pp.62-3. 26. Jurgen Habermas, The Structural Transformation of the Public Sphere: An Inquiry into a Category of Bourgeois Society, Cambridge, Mass.: MIT Press, 1989, p.74. 27. John Hartley, The Politics of Pictures; The Creation of the Public in the Age of Popular Media, London: Routledge, 1992, p.35. 28. Hartley, ibid., pp.124-5. 29. Ien Ang, Desperately Seeking the Audience, London: Routledge, 1990, pp.31-2. 30. Michel de Certeau, The Practice of Everyday Lif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4, p.xvii. 31. 예를 들어, Richard Sennett, The Fall of Public Ma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7.을 참조할 것. 32. Jay Weston, "Old Freedoms and New Technologies: The Evolution of Community Networking," electronically published in cyberjournal@Sunnyside.Com, Dec. 22, 1994. 33. Ruth Rosen, "Soap Operas; The Search for Yesterday," in Todd Gitlin ed., Watching Television: A Pantheon Guide to Popular Culture, New York: Pantheon, 1986, pp.47-8. 34. Rheingold, The Virtual Community, pp.10-1.(레인골드 책의 부제는 여러 판에서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35. Peter F. McDermott, "US NII for GII," CPSR-GLOBAL LISTSERV, nov. 19, 1994. 36. Bernd Frohmann, "Electronic Communities," CPSR-GLOBAL, nov. 23, 1994. 37. Ray Archee, "The NII and Community Computer Networks: Highway, Tollway or Backroad," Media Information Australia 74, 1994, p.51. 38. Weston, ibid. 39. Weston, ibid. 40. Kobena Mercer, "'1968': Periodizing Politics and Identity," Welcome to the Jungle: New Positions in Black Cultural Studies, London: Routledge, 1994, p.288. 41. Jon Stratton and Ien Ang, "Multicultural Imagined Communities: Cultural Difference and National Identity in Australia and the USA," Continuum 8.4, pp.12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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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문화정치-6장] 네트의 시민운동가들: 전자프런티어재단(EFF)과 그 구성원

*제 1996년 책 <사이버 문화정치(문화과학)>의 디지털본을 유실하고, 다른 곳에서 이 문서만을 발견했습니다. 참고바람. 6장. 네트의 시민운동가들: 전자프런티어재단(EFF)과 그 구성원 1. 전자 결속의 희망 근대사회 이래로 시민사회의 영역은 공론장(public sphere)으로서 보다는, 어지 중간한 선에서 국가 권력과 대중을 화해시키거나 조율시키는 역할을 담당해왔다. 국가 권력의 입장에서 보자면, 시민운동은 혁명이란 완벽한 체제 이탈을 막는 도구로 양성화시키는 측면이 강했고, 민중적 시각 에서 보자면 의회적, 합법적 틀거리 속에 그들의 주장이 이입될 수 있다는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시민운동은 여타 실천 지형에서의 역량에서 보다 그들 국가의 성격에 크게 좌우되며, 그 합 의 과정이야 어떻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가치가 그나마 유지되는 국가일수록 시민운동 영역과 쉽게 결합되는 측면이 강했다. 요컨대, 국가권력의 여하에 따라 시민권은 수축/팽창하거나 권력 의 경계 외곽으로 밀린다. 그들에게는 주로 정책적, 입법적, 행정적 현안에서의 여론화를 통한 법 안 수정 작업이 주목표가 되며, 운동의 전술은 대중매체 활용, 거리 시위, 팜플렛 배포, 피켓 동 원, 연구실 실험 등 다양하게 펼쳐진다. 그들은 물리적 폭력성을 응축한 도구들의 과격한 사용을 철저히 배격한다. 근대적 폭력 수단을 무장해제 시킴으로써, 시민운동은 체제 혹은 제도권에 대 한 영향력을, 그리고 보다 원활한 대중적 입지를 획득해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한편 그들은 특 수한 지반성에 기초한 집단적인 주장을 통해 대중성을 확보한다. 이들은 이해에 기반하여 혹은 인구통계학적 변인에 따라 정체성을 구획 짓고, 자본/노동 대당관계에서의 근본적 모순만큼이나 스스로를 동등하게 취급하려 애쓰며, 자신의 가치를 옹호하고 변호한다. 이제는 이들 집단이 가 진 태생성과 함께 사안별, 이슈별 공동화가 오히려 대중에게 적극적인 소속 의식을 심어준다. 역 사적 맥락 하에서 보자면, 뭉뚱그려 좌파라 호명되던 일단의 그룹들은 시민운동권과의 연동이 가 장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계층이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이 급진적 인자들은 종종 명분상의 이유로 제도권과 자연스레 공동 전선을 형성하거나 편입되는 경향이 있었다. 일부는 정치권력과 노선상의 부조응으로 인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의 길을 찾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시민운동권 내 부에서 자유주의적 좌파라고 불리길 바라는 엘리트 상층부가 개혁적 정당과 조우하는 경우는 다 반사이다. 정권의 측면에서 보아도 시민운동 진영을 합의와 동의의 기제로 끌어들이는 일은 중요 하며, 여론정치를 이끄는데 중요한 동력이 된다. 어쨌든 비합법적 수단을 통한 총체적인 전망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실천 방식의 변화를 꾀하는 시민운동권의 움직임을 읽어낼 필요는 있다. 과거와 달리 시민 계급·계층간 이동성에 의한 집단화는 더욱 극대화되는 추세이다. 네트의 디지털 정보가 패킷(packet)으로 쪼개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주소지를 찾아다니다 결국 하나의 정보로 합쳐지듯, 광통신에 떠다니는 각양각색의 정치적 주장과 논쟁의 경합('flame wars')은 살 아있는 유기체처럼 전자게시판에서, 뉴스그룹에서, 채팅공간에서 이합집산하며 꾸물꾸물 전자조 직을 구성한다. 물리적/물질적 공간이 주던 지역적 한계가, 전자공간의 네트워크적 속성으로 말 미암아 그 틈새를 메우고, 그 외연을 비트로 확장시킨다. 전자네트워크로 인해 전세계의 내노라 하는 NGO의 활동 폭이 더욱 커져가고 있다. 범지구적으로 집단과 집단, 조직과 조직의 연대와 연합의 활로가 새롭게 펼쳐지고 있다. 이제 권력과 자본이 새롭게 직면한 문제는 이같은 네트워 크형 조직들을 재흡수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나는 당연하게도 NGO 의 힘을 확장하는 비트적 공간이 바로 이 굳건한 현실에서의(on the ground) 투쟁을 대체하기 보다는, 현실의 투쟁을 가시화하고 이를 엮어낸다는데서 그 공간적 실천의 출발점을 두고자 한 다. 대항 집단들이 시도하는 아래로부터의 횡단적 연결이, 그 수위에서 '가상코뮨'(virtual commune)이나 '제 5 인터내셔널'(fifth international)의 붉은 기가 휘날리는 이상적 전망으로부터, 마을공동체의 신화에 사로잡힌 비트적 연장물, 즉 가상공동체라는 조금은 철부지한 영토관에 이 르기까지 다양하나, 이와 같은 미래적 전망은 실천 주체들이 가늠하는 구체적 현실과의 목적의식 적 결합 속에서만 가능하다. 어쨌거나 네트 문화정치의 미래 기획에 있어서 이 모든 동적인 움 직임들이 현재 정보"자본주의를 배회하는 유령"임에는 분명하다. 80년대 극소전자혁명에 의한 '비트뱅'(Bit-bang)의 파고가 좀 더 특이하게 네트행동주의 (net.activism)에 영향력을 발휘한 사례는, 자유주의적 시각의 변종들이 우글대는 미국에서 시작 되었다. 네트를 아직 개척되지 않은 미 서부에 비유하여, 이 공간에 대한 디지털적 해석과 새로 운 가치를 창출하려는 수많은 그룹들이 번창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특징적인 면모를 지닌 집단 은 단연 '전자프런티어재단'(EFF: Electronic Frontier Foundation)이다. 최근 네트의 정치, 사회, 문화적 가치 논쟁과 관련하여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으나, 보다 이들을 차별화하는 것들은 크게 정치적, 현실적 영향력과 그 구성원들의 엘리트적 명망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국내에서도 EFF의 활동에 대해서 간헐적인 언급이 있었으나, 이 단체의 출생 배경과 현실 활동,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면모에 대한 논의를 좀 더 장황하게 풀어갈 필요가 있다. 2. 사이버엘리트들에 의한 EFF 결성 60년대말 해커들은 순수한 정보욕에서 출발하여, 70년대 정보공유 정신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80년대 이후 대다수가 디지털자본으로의 병합이 이루어졌고, 그 주변에 디지털 지하세계의 탕아 들이 잠복하고 있는 형세였다. 이 문제아들의 정치적 성향에서 비롯된 사회적 해킹, 혹은 프리킹 으로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사례들이 급증함으로써, 특히 미국방성을 비롯한 정부기관, AT&T 등의 전화 회사, 물리학이나 핵개발 관련 연구소 등이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 이런 상황 에서 해커에 대한 대대적 진압은 필수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1990년 일명 '선데블 작 전'(Operation Sun Devil)이라 불리는 디지털 지하세계에 대한 대검거 작전이 수행되었다. 일반 적으로 네티즌에 대한 억압적 상황을 상시 검열과 불시 진압으로 가름해 본다면, 해커단속은 전 국적인 규모로써 후자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해커들은 이 사건을 통해 철없는 문제아에서, 현대문 명에 도전하는 사회의 불순세력으로 급상한다. 시크릿 서비스의 잇따른 해커들의 검거, 수색과 압수가 이루어졌고, 개중에는 부당하게 혐의를 받고 재판에 기소되는 해커들도 존재했다. 스털링 은 선데블작전의 공세로 자국내 상황이 '해커 히스테리'적 분위기였으며, 궁극적으로 미사법부와 디지털자본이 사이버공간에 내린 1차 경고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S279) 경고는 좀 더 강한 경 고와 폭력이 장차 동원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경고는 매카시의 마녀사냥만큼이나 정치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바로 EFF는 이같은 해커사냥에 대응하여 만들어진 시민자유론자들의 단체이다. 예컨대 시크 릿 서비스가 검거 중 보여주었던, 컴퓨터장비와 데이터 압류, 출판 등의 표현물에 대한 제한, 부 당한 폭력 등에 맞서, 그들은 기금 모금, 법적 행동과 후원 등으로 정세를 반전시켰다. 이같은 정부의 독단적, 억압적, 비합의적 월권에 반응하여, 네티즌들을 보호하는데 사법적, 제도적 투쟁 을 거쳤던 사람들이 모여 만든 것이 EFF의 출생 배경이다. 그래서 EFF는 일명 '해커 변호재 단'(hacker defense fund)이라는 별칭도 얻게 된다. EFF의 초대 설립 멤버는 제리 버만(J. Berman), 마이크 고드윈(M. Godwin), 존 페리 바를로우(J. P. Barlow), 미첼 케이퍼(M. Kapor), 스튜워트 브랜드(S. Brand), 에스더 다이슨(E. Dyson), 존 길모어(J. Gilmore), 워즈 니악 등으로 구성되었다. 비영리, 비정파적 조직으로서 EFF는 기본적인 시민권 보호를 최우선으 로 삼고, 보다 나은 방식으로 사이버공간을 규제할 수 있는 법들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부당하게 기소되는 해커를 변호하는 법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EFF는 1992년 이전에 미국시민 자유연맹(ACLU: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의 행동가였던 버만이 맡고 있는 워싱턴 사무 실에 추가로, 현재 법률고문인 고드윈을 고용하여 새로운 지부를 세움으로써 풀뿌리 행동주의자 들의 강력한 조직으로 진화한다. 어느 정도 EFF는 두 가지 행동주의적 접근을 수용하려고 노력 했다. 그 단체는 새로 세워진 캠브리지 지국 중심의 '풀뿌리 모델'(grassroots model)과 애초 워 싱턴 본부에서의 '로비 모델'(lobby model)이라는 두 가지 모두를 채택함으로써 정치 행동의 효 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1993년에 EFF는 대정부 로비활동, 법률작업 등으로 활 동 영역을 축소하고 캠브리지 사무실에서 철수한다. 1994년 미국내 절충적인 전화법안에 대한 지 지로 인해, EFF의 '로비 모델'은 행동주의자들에게 거센 비난을 받으면서, 재정 문제와 회원들의 사분 오열로 조직적 문제를 떠안게 되었다. 그 후 버만은 EFF를 떠나 민주주의/기술 센터(CDT: Center for Democracy and Technology)를 만들고, EFF는 미서해안의 베이 지역으로 이동하여, 다시금 풀뿌리적 기초를 고려한 효율적 행동주의 조직으로 거듭나게 되고, 현재까지 이르고 있 다. 문제는 그들이 일차적으로 프라이버시, 액세스, 자유 의사표현과 같은 실리콘 밸리의 디지 털 기업의 시각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후에서 살펴보겠지만 그들은 일종의 시장 지향 적 정치행동주의에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실리콘 밸리의 기업들이 생각하는 자유롭 고 개방된 조건하에서의 사이버공간 구축만이 시장 체제와 어울릴 수 있다는 확신에 EFF도 동 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미국 의회내 민주당-실리콘 밸리-EFF의 삼박자의 구성은 국가-자본-시민의 3요소를 대표하는 21세기 정보초고속도로의 주체로 정리되고, 동시에 현실 미래적 비전으로 자리잡기 위한 냄새를 풍기게 된다. 어쨌든 EFF의 영향력 하에서 수많은 사이버 시민단체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자국내 EFF-오스틴 등과 국외의 EF-오스트렐리아, EF-캐나다, EF-아일랜드, EF-일본, EF-노르웨이, EF-스페인이 만들어졌고, 또 다른 비슷한 류 의 시민단체들, 즉 CDT와 그 소속단체인 CIEC(the Citizens' Internet Empowerment Coalition), VTW(Voters Telecommunication Watch), 원래는 NTE(Not the EFF)이라는 명칭을 지녔던 뉴욕의 SEA(Society for Electronic Access) 등이 생겨났다. 3. 자유방임의 전자프런티어 정치학 EFF는 그들의 활동을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누고 있다. 첫째, 근본적인 시민권의 보장 을 위해 노력한다. 둘째, 네티즌의 권익을 대변한다. 셋째, 커뮤니티를 구축한다. 먼저 시민권과 관련한 그들의 활동은, 네트 범법자 재판에 대한 스폰서 역할, 법적 권리에 문제가 있는 회원에 게 자유로운 전화서비스 제공, 시민권과 관계하는 정보백서 발간 등으로 압축될 수 있다. 네티즌 의 권익은, 예컨대 '공통된 소통원칙'(common carriage principles)에 입각한 자유로운 의사 표현, 네티즌의 정보접근권 확보, 네티즌의 사생활 보장, 정보생산물의 자유로운 분배 등에 입각하여 정책적·사법적·기술적 수단을 동원하거나 이를 지지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커뮤니티의 구축 은 우선 풀뿌리 조직의 건설과 이에 대한 지원, 그들에 대한 법적·기술적 자문, 그리고 EFF의 다양한 매체전술, 기관 발행물을 통한 선전으로 구성된다. 그들의 매체 전략은 다양한 채널에 걸 쳐 있다. 그들의 가장 큰 소구 대상은 온라인 공동체들이다. 신생 혹은 기존 정보시민단체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확대하기 위한 작업으로, 그들은 기관지인 계간 <이펙터 EFFector>와 전자 뉴 스레터인 <이펙터 온라인 EFFector Online>을 발행하고 있다. EFF는 자신의 FTP, 고퍼, 웹 서 버를 운영하면서 전자도서관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엄청난 관련 문서들을 저장하여, 서치엔진 등을 통해 열람할 수 있게 해놓았다. 또한 유즈넷의 뉴스그룹(comp.org.eff.talk)과 함께 인터넷 포럼을 구성할 수 있게 하여, 웰(WELL), 컴퓨서브(CompuServe), 제니(GEnie), 워먼스 와이어(Women's Wire) 등의 네트워크에서 풀뿌리 활동가들의 논쟁장인 게시판을 운영하고 있다. 전자적 홍보와 구분하여 그들의 온라인 행동주의의 가능성은 전자메일 캠페인과 온라인 정치 조직화의 사업에 서 이루어진다. 한때 국내에서도 크게 알려지게 되어 큰 호응을 받았던 블루리본 캠페인, 그리고 FBI의 반테러법안에 반격하여 '사회적 책임을 생각하는 컴퓨터 전문가모임'(CPSR: Computer Professionals for Social Responsibility) 등의 시민단체들과 함께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외 쳤던 '골든키 캠페인'(Golden-Key Campaign)은 바로 이러한 네트 시민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써 평가할 수 있다. EFF는 사이버공간을 비적대적 방식으로, 그리고 약간은 질서 잡힌 개척지로 여기면서, 그들 자신이 컴퓨터 사용자와 법 집행자들간에 논리적 가교 역할을 한다고 자임한다. 그리고 이들은 상대적으로 제도권의 정당 정치에 입각하여 네트를 주목하지는 않는다. 정당 정치가 정부의 위계 구조를 반영한다면, 컴퓨터를 매개로 한 사이버행동주의는 어떠한 제도 정당이나, 위계구조, 기성 원칙을 위배한다. 사이버행동주의자들은 정교한 철학이나 강령을 구성하려 애쓰기보다는, 관성화 된 신념체계를 정보와 주장의 사이클로 대체하여 그에 걸맞는 네트망을 구축한다. 일반적으로 테 크노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경향성을 공유하고 있다. 60년대 히피의 변종들은 비합법적 해커들만 이 아니다. 산업시대의 잉여가치를 탈산업시대의 가치체계로 포섭하려고 실리콘 밸리에 들어가거 나, 혹은 합법적 시민운동 지형을 통해 구체적인 자유주의 정신을 선전하려는 일군도 있었다. EFF의 구성원들은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같은 역사적 맥락은 EFF의 구성원들 의 면모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EFF의 마담격인 바를로우는 대단히 특이한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1980년대 후반에 공화당원으로 활동했으며, 한때 히피 록그룹 그레이트풀 데드(Grateful Dead)의 작사가이자 와이오밍주의 목축업자이기도 했다. 스털링에 따르면, "그는 시인과 같은 간 결하고 다채로운 문체를 소유했다. 그는 또한 저널리스트의 날카로움, 즉석에서의 기지, 그리고 개인적 매력으로 볼 수 있는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S235). 바를로우는 사이버공간을 디지털 추상공간의 은유에서 미서부 시대의 전자적 개척지로 표현함으로써, 네티즌들에게 그 공 간을 현실로 사고할 수 있게 하는 문필가적 역량을 발휘했다. 그는 사이버공간을 정착될 과정으 로서의 개척지며, 산업시대의 무분별하고 힘센 이주민들에게 네트의 원주민들이 위협받는 공간으 로 바라본다. 그가 보기에 수세기전부터 '산업시대의 정권'이 자행한 물질세계의 통치권은 사이버 공간에 통용되서는 안되는 '프런티어'이어야 한다. 그 곳은 질서, 권위, 통제 등의 물질공간의 속 성이 온존하고 확대되는 곳이 아니라, 사이버공간 자체의 불문법, 즉 계약, 관계, 사유 등으로 이 루어진 질서 잡힌 '마음의 문명'이 세워질 곳이다. 그리고 그에게 사이버공간의 정보는, 끊임없이 이동하고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체험되는 '활동'(an activity)이며, 자유롭게 복제되고 변화하는 '생 명체'(a life form)이며, 소유라기 보다는 '관계'(a relationship)이다. 이같은 정보의 영상화된 조 합으로써 사이버공간은 과거의 권력/자본이 아직까지는 배제된, 희망의 설원으로 남아 있다. 한 편 그의 절친한 동료이자 네트시민운동의 거물로 알려진 케이퍼도 현실에서의 사업가다운 기질 과 자유주의적 성향이 그의 바탕을 이룬다. 바를로우보다 케이퍼는 더욱 대단한 재력가다. 그는 EFF 설립 후에 미국내 상위 1-2%에 들 정도의 거부였고, 첫 해 약 25만 달러의 EFF 예산을 순 수한 사비로만 충당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S286) 앞서 EFF의 두 가지 모델 중 '로비모델'을 들었던 것처럼, 미국의 특수한 전통 하에서 EFF의 의회로비는 주요 법안처리와 관 련하여 중요한 실천 영역을 차지한다. EFF 노선 안에서 이 두 모델 중 어떤 쪽을 택해야할지 조 직내 진통을 겪기도 했지만, 만약 현실적으로 그들이 자금력과 지명도가 없었다면 EFF의 성장이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구성원들의 경제적 능력은 대외적 효과 면에서 정적인 상관 관계를 지녔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케이퍼는 비관료적 면모와 함께, 미국의 자유주의적 전통을 '제퍼슨 자유주의'(Jeffersonian Liberalism)로 표현하는데 앞장선다. 제퍼슨주 의의 핵심은 엘리트주의에서 평등주의로, 위계적 질서에서 탈중심화된 구조로 변화하는 개인주의 적 자유주의의 이상 실현이다. 그에게 사이버공간이 바로 이 제퍼슨주의를 발현할 토양이 된 다. 문제라면 전자공간에는 권력의 과도한 개입과 자본의 상업화가 자유주의를 억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볼 때 궁극적 장애물은 거대기업이며, 사적 기업들의 시민권 부식에 대한 정부의 감독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더불어 정부는 네티즌의 자유를 가로막아서도 안되며, 공익을 고려하는 선에서 최소로 개입하고, 조정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본다. 바를로우는 기술적 관점에서, 암호화 기술과 패킷전환 아키텍쳐가 결합되어 수많은 네티즌에게 퍼져나간다 면, 이같은 권력의 통제권은 상실될 것으로 예견한다. 즉 사생활을 보장해줄 수 있는 기술적 프로그램의 확보를 통해서 보편적 자유가 실현될 것이라 보고 있다. 요컨대, 네트 공간안에서 표 현의 자유, 암호화를 통한 사생활 보장, 비차별적 액세스권, 정당한 지적 재산권 설정, 거대자본/ 권력으로부터의 네티즌 보호 등등은 이들이 관심을 갖는 사회적 자유주의의 실천 대상들이다. 아직까지는 더 지켜보아야 할 상황이지만, EFF가 시민운동단체로서 성공한 요인은 크게 보 면, 보수화된 미국내 정서에서 그들의 자유론적 논지가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 일정 정 도 미행정부와 밀접한 공조 관계를 지닌다는 점, 미래적 전망에 있어서 EFF내 구성원들이 정보 사회론의 제도적 지형을 형성하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엘리트들이라는 점, 재정상의 능력을 통해 시민운동의 난점을 뛰어넘었다는 점 등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4. 사이버공간의 독립선언? 하이퍼 미디어연구소의 바브룩은, 바를로우의 [사이버공간의 독립선언]을 '캘리포니아 이데올 로기'의 파산 선고라고 단정한다. 여기서 '이데올로기'의 발원지는 미서안의 실리콘 밸리이며, 그 연합전선은 신우익(클린턴/고어 행정부, 민주당, 기술관료 등)과 미서안의 하이테크기업들, 그리 고 시민운동 진영으로 짜여진다. 이들 가상계급 전선에게는 새로운 제퍼슨 민주주의의 부활에 대 한 약속이 내부의 결속을 유지했다. 그러나, 바브룩은 그들 사이에서 '이데올로기'적 모순, 즉 신 좌파인 EFF를 비롯한 사이버 시민운동단체들의 급진성, 그리고 신우익과 자본가들의 보수성 사 이에서 빚어진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전자의 자유 정신에 입각한 '사회적 자유주의'와 후자의 자유시장 원리에 입각한 '경제적 자유주의'가 '하이테크 제퍼슨 민주주의'라는 지주로 버티다, 결 국 후자의 승리로 끝나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연합을 끝장낸 정책적 현실물은 1995년의 전 기통신 개혁법안의 통과이다. 탈규제의 수사와 시장지상주의로 가득찬 이 법안은, "큰 것은 더욱 크게, 그리고 더욱 수직적으로 통합되도록 의도된" 기업논리의 대변자(by and for business) 구실 을 했다. 즉 급진/진보의 내용은 대중성으로 귀결되고, 급진적 히피 출신의 신좌파의 자유주의 전통이 우파적 시장경제의 이상에 압도당한다. 그래서 바브룩은 바를로우의 [선언]이 신좌파적 입지의 상실에 기초한 선언이라고 주장한다. 즉 우파와 좌파간의 동침을 가능하게 했던 신좌파적 자유정신이란 단서조항도, 시간이 진행함에 따라 우파적 상업화 논리의 헤게모니에 밀려, 결국 초현실의 지점, 즉 전자개척지의 목가적인 카우보이가 되기를 부르짖는 도피성 [선언]을 작성하 게 만들었다고 본다. 이제 그는 사이버공간의 '코요테'라 불린다. 바를로우는 "디지털 도시 안에 서 삶의 사회적 모순에 직면할 수 없게 된 가운데, 이제 전자 개척지에 사는 가상 카우보이들과 합류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고독하게 테크노 벌판을 어슬렁거리는 테크노히피가 된 것이다. 이러한 정황 하에서 그나마 현실에 개입하려 했던 좌파적 사이버히피들은 사이버공간의 변방에 내몰리고, 이미 그리고 점차 네트 홍보자들의 신화가 현실을 독점하게 된다. 미국의 히피적 전통 도 현실적으로는 사회성을 결여한 자유지상주의로, 신우익의 경제적 자유주의의 우세 논리로 귀 착된 것이다. 바브룩의 평가와 함께, BS 편집자인 조셉 로커드(J. Lockard)의 견해도 눈여겨볼 만하다. 로 커드는 바를로우가 '반사회적 단자론(monadism)'에 기반하고 있다고 본다. 즉 사회적 욕구와 인 간의 상호의존 보다는 사적인 전자 정보에 대한 보안망을 치는데 치중하는 행위는 고립과 특권 에 기반한 정서라고 말하면서, 이는 결국 반공동체적이고 자유방임적인 전자프런티어 정치의 고 립적 효과로 드러난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그의 [선언]에서 얘기하는 '테크노 개척정 신'(techno-frontierism)은 이른바 '추한' 역사로부터 도망가기 위한 행동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다. 본인이 볼 때, 보통 디지털공간의 '개척지 은유'는 건설, 완성되어야 할 것으로 디지털공간을 바 라봄으로써, 현실적으로 곧장 자본주의적 식민화와 결합하는 경향이 강하다. 바를로우는 추상적 으로 테크노 개척지를 자유와 정신의 공간으로 논함으로써, 식민론자들에게 무력화되고 만다. 다 시 말해, 그는 공간을 현실/가상으로 이중화하여, 은유적 가상공간을 실제의 탈공간 영역으로 간 주함으로써, 가상공간을 현실 공간의 역학과 동떨어진 환상의 어떤 곳으로 놓고 있다. 이 부분이 그의 신좌파/히피적 자유주의의 속성에서 연유한 논리적 귀결인지도 모른다. EFF의 구성원들을 살펴보면, 앞서 보았듯이 정치적 근원에서 그들은 히피의 급진성을 거세하여 사회성이 결여된 자 유지상주의의 신좌파적 사고와, 정부와 하이테크 기업의 신우익적 행동 방식이 뒤섞인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 결국은 그의 이상과 무관하게, 사이버공간의 미래 전망은 현실적으로 최소한의 정부권력/기업논리 개입론, 더 나아가 클린턴/고어 행정부의 구상에 입각한 '정보초고속도로'로 귀착되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미국내 네트 시민단체들은 복지, 환경, 국방, 과세 등의 정치적 문제를 등한시하 고, 일종의 기본권 운동으로 그 급이 격하된 측면이 강하다. 그리고 EFF의 사례를 통해 보았지 만, 시민단체의 이상이 정부와 자본의 논리에 말려드는 형세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보 여준 장점은, 미래 비전과 관련하여 시민단체가 적극적인 제도 개입을 할 수 있다는 것, 가상공 간의 시민 조직이 현실적으로도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사안별로 대중의 실천력을 몰아갈 수 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오히려 시민단체들의 목적 의식적인 네트적 결합을 도모함에 있 어서 봉착하는 문제는, 특히 기술과 관련된 자금, 그리고 지속적 정보 흐름의 유지에 필요한 '학 습곡선'(learning curve)과 시간 등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문제점들은 단기적으로 현 시민단체들 을 괴롭힐 수 있는 난제이며, 일정 정도 인터넷이 범용화되면 풀릴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요 컨대, 변화되는 현실 지형에서 이제는 한 집단이 지닌 급진성의 추상화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그 집단 속에서 모색하며 이루어내는 사안들의 관철이 전술적으로 더욱 중요해진다고 볼 때, 후 자에 가까운 EFF는 새로운 사이버 시민운동의 성공적 사례로써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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