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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Digital] 러디즘(Luddism), 사이버공간, 그리고 희망

러디즘(Luddism), 사이버공간, 그리고 희망 이광석: AD편집인·뉴미디어평론가 Kevin Robins, Into the Image: Culture and politics in the field of vision (London: Routledge, 1996) Kevin Robins and Frank Webster, Times of the Technoculture: From the information society to the virtual life (London: Routledge, 1999) 속칭 좌파 사이에서 정보기술이 자본주의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중심적으로 논했던 인 물은 드물다. 기껏해야 인터넷과 정보혁명의 위력이 가시화되고 나서야 그 가치에 주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케빈 로빈스는 이미 80년대초부터 프랭크 웹스터와 함께 이 방면에서 공동 작업을 수행했던 몇 안되는 중요한 인물이다. 이 둘은 공동 집필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정도로, 20년이상 같이 작업을 꾸준히 수행해오고 있다. 버밍엄 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있는 웹스터는 이미 국내에 {정보사회이론Theories of the Information Society(Routledge, 1995)}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사회학의 전통에서 정보사회 이론가들을 재해석했고, 최근에는 정보 시대의 교육에 관심을 두는 학자다. 웹스터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로빈스는 문화지리학 교수로 있다가, 몇 년 전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 커뮤니케이션학과로 옮긴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 족적에서도 묻어 나지만 문화론적 전통에 대한 감각도 뛰어나 현대 정보사회 해석과 관련하여 상당히 재치있 는 입담을 구사하고 있기도 하다. 로빈스가 지금까지 낸 수서너 권들의 저술에 비해 여기 소개할 두 권의 책은 현실 사이버 문화의 논의를 포괄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테크노문화의 시대: 정보 사회에서 가상 삶으로}는 책이 발행되기 이전까지 대중화된 주류 사이버문화론에 대한 광범 위한 비판을 수행하고 있다. 이 책은 비록 웹스터와의 공동 저작이긴 하지만, 3부의 일부 교 육과 관련한 장들을 제외하곤 이제까지 작업과는 달리 거의 로빈스가 주축이 되어 책을 집 필한 것으로 보인다. 책은 기존에 이들이 가졌던 러다이트에 대한 역사적 재해석과 이를 바탕으로 현재 논의되 는 사이버문화의 낙관적 견해에 대한 비판을 폭넓게 벌이고 있다. 이들은 산업혁명 초기 영 국의 기계파괴운동이었던 러디즘(Luddism)이, 일자리에 위협을 느낀 노동자들이 기계를 파 괴했던 무식하고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자본주의의 기술 변화와 재편에 대응한 폭넓은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파악한다.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기술 저항의 중요한 사건으로 러디즘을 평가하고 있다. 사이버문화의 새로운 현실에 이르면, 러디즘은 웹 을 이용한 네트워크 게릴라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지녔다고 본다. 러디즘의 역사적 전통을 통해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사이버정치의 기획을 짜자는 의도다. 러디즘에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읽는다. 로빈스는 정보사회를 주도하는 자본주의 기획이 전방위에 걸쳐 인간을 관리하는 통제 시 스템으로 본다. 일상의 '동원'(mobilization) 체계는 이를 지칭한다. 저자는 동원의 기제를 통해 여가와 노동 시간의 경계가 사라진 새로운 사회화된 노동자와 공장의 비관적 미래를 진 단한다. 또한 이런 현실을 정당화하는 기술 유토피아의 논의들이 갖고있는 신화의 논리를 조목조목 짚고 있다. 그의 단독 저술인 {이미지 속으로: 이미지 영역의 문화와 정치}는 사이 버문화의 신비화된 논리와 폭넓게는 현대 영상문화 전반이 갖고있는 주술적인 면모를 뒤집 는 작업이다. 기술 진보의 신화가 반영된 무의식이 '보이는 것'(the visual)에 삼투되어 현실을 어떻게 왜곡시키는가를 관찰한다. 두 권의 책은 현실에 숨어드는 사이버문화의 우파적 비전에 대한 구체적 비판의 증거물이 다. 물론 로빈스의 시각에는 권력으로부터 움치고 뛸 수도 없는 왜소한 일상 인간의 모습이 철저히 반영되어 있다. 혹자는 이렇게 완벽히 통제된 현실에서 과연 정치적 혹은 대안적 가 능성을 내올 수 있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로빈스의 장점은 정보 현실에 대한 철저한 비관론에서 나온다. 현실에 대한 참담한 해석이 새로운 가능성을 말살 하지 않는다는 역설을 주목하자. 오히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상황을 인정하는 것이 턱 없는 기대감보다는 생산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로빈스의 논의는 끝없는 절망이나 패배로 회 귀하지 않는다. 러디즘의 유산을 통해 새로운 사이버 문화정치의 가능성을 내다본 것처럼, 그에게 희망의 근거는 존재한다. 새로운 기술의 변화가 올 때 이와 결합된 권력의 실체를 이해하는 것, 대응하는 것, 그리고 이를 자신의 것으로 재전유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 의 희망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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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이후 선언문

디지털 이후 선언문 (After Digital Manifestos) BY 이광석 1. 디지털은 총체적 혁명이다. 기계 혁명이 단지 공장굴뚝시대에 국한된 힘이었다면, 디지 털은 새로운 시대에 완전히 새로이 쓰여지는 문법이다. 이제까지 혁명이라 얘기한 것들은 인간 삶의 일부만을 변화시켰을 뿐이다. 디지털은 이 모든 혁명들의 혁명이다. 삶의 결 하나 하나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것, 그것이 디지털이 만들어내는 거대 혁명이다. 과거 체제 적 모순의 반항이 공산주의였다면, 궁극적으로 인간 삶의 모순에 대한 극복의 기획이 디지 털 사회혁명이다. 디지털은 미래 우리 삶의 궁극적인 구상이다. 그 혁명은 과거의 것들을 새로이 디지털의 문법으로 바꾸고, 현재의 것들을 거대한 디지털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하고, '디지털 이 후'(After Digital)를 설계하는 역사의 흐름이다. 그래서, MIT 미디어랩(Media Lab.)의 네그 로폰테(Nichlas Negroponte)가 말한 '디지털이다'(Being Digital)는 과거형이다. 이제는 디지털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디지털이 된 사회의 미래를 우리 삶에 비추어 찬찬히 구상하는 '디지털이다' 이후의 또 다른 문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2. 디지털은 상호 관계이자 만남이다. 디지털이 고립되면, 곧 멍청해진다. 만나지 못하면 디지털은 반쪽일 수밖에 없다. 관계는 상대방을 전제한다. 더불어 상대와의 연결도 전제한 다. 상대방과 연결이 없으면 디지털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디지털을 연결하는 네 트워크가 중요하다. 디지털이 마음껏 흘러다닐 수 있는 통로와 그 디지털이 정박할 수 있는 컴퓨터들이 있다면, 디지털은 무럭무럭 자란다. 디지털이 한 곳에 몰리거나 가고자 하는 상 대에 갈 수 없다면, 디지털에 병이 생기고 장애가 생긴다. 디지털은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힘을 쓸 수 있다. 인간들이 사용하는 모든 멍청한 물건들에 디지털이 나다니는 통로를 만든다면, 그 멍청한 물건들은 분명 상호 관계를 맺고 똑똑해질 것이다. 이러한 관계 를 막는 어떠한 시도들도 반역이다. 디지털이 원하는 상호 만남의 원리를 위배하기 때문이 다. 디지털을 성숙시키는 방법은 장소나 때를 막론하고 서로 연결시키는 노력이다. 상호 관계의 현실태는 지구촌을 가로지르는 인터넷이다. 이는 인간들의 작은 관계망이 거 대화하여 만들어졌고, 지금도 계속해서 그 망은 자율적으로 구성된다. 우리는 그 속을 흐르 는 것을 디지털 정보라 지칭한다. '정보의 바다'는 그 망 속을 끊임없이 흐르는 무수한 정보 의 거대한 물결을 가리킨다. 미세한 관계망이 모여 거대한 정보의 물결을 형성하고, 우리는 그 파도를 타면서 정보를 낚아오는 것이다. 잘못된 관계와 연결은 잘못된 정보의 원인이다. 예컨대, 포르노 사이트의 암초에 좌초하거나 그 파도에 휩쓸리는 근거는 잘못된 관계와 만 남에 이끌릴 경우에 발생한다. 어쨌든 우리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무수한 관계망에 이 끌리고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이는 '디지털 이후' 사회에서 잘 적응해나가야 할 새로운 원칙 이다. 3. 디지털은 자유로움과 속도이다. 디지털에 있어서 자유는 맨 먼저 인간 살덩이로부터의 자유를 전제한다. 인간의 육체는 제약이고 족쇄이다. 초월의 욕망은 인간에게 근원적이다. 시공간의 제약을 극복하여 우리는 네트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다. 물리적 공간 이동 없이 도 붙박힌 자리에서 지구 끝을 배회한다. 프랑스의 도시연구가인 비릴리오(Paul Virilio)도 동의하듯, 지난 시기가 '동적인'(dynamic) 수송 장치들(기차, 오토바이, 자동차, 비행기 등)이 중심이었다면, 현대의 디지털 혁명은 '행동적이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behavioral inertia)의 속도-기계를 창조했다. 가만히 터미널에 고정된 인간에게 속도감은 시각적이지 않다. 디지털 속도감의 정체는 아직까지 시각적인 것보다 인간 상상 속의 자유로움이다. 즉 육체를 이탈하여 시공간을 넘어 다른 이와 접촉하고, 그 곳을 경험하고 있다는 상상력이 속 도감을 불러일으킨다. 디지털의 자유로움과 속도는 육체 이탈을 느끼는 중요한 수단이다. 둘 중에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인간의 디지털 체감은 떨어진다. 어디에서든 접속하기가 어렵 고, 어디든 가기가 힘들고, 변형이 불가능하다면 디지털의 자유로움에 장애가 발생한다. 마 찬가지로 디지털을 실어나르는 통로가 좁거나 없거나 가로막혔을 경우에도 속도감은 사라진 다. 디지털의 자유로움은 그 자체의 성질에서도 드러난다. 디지털은 아톰과 달리 무한히 변형 할 수 있고, 덧붙일 수 있고, 복제 가능하다. 디지털이 상품이 되려면 그 자유로움의 일부를 통제하면 된다. 디지털의 상품화를 원하는 자에게 그 자유로움의 통제권을 주는 것이다. 물 론 그 권한을 공개해버리면, 그 디지털 상품은 상품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한다. 그래서 디 지털의 고유한 자유로움은 개방되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4. 디지털은 평등과 해방이다. 디지털은 권위를 부정한다. 장소에 따라, 시간에 따라 배열 된 모든 사물은 디지털에 이르면 동일하게 취급된다. 설사 멍멍이와 대화를 나누더라도 우 리가 그것이 동물인지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것처럼, 디지털은 모든 사물을 동등하게 대한 다. 디지털은 그 자체로 불평등한 관계를 일소한다. 수직적이고 피라밋 구조는 디지털과 불 편하다. 디지털은 수평적 네트워크를 선호한다. 디지털은 해방이다. 모든 닫혀진 정보들은 디지털에 이르러 해방된다. 무한한 복제의 가능 성은 배고픈 이들을 위해 행한 예수의 기적만큼이나 해방적이다. 첫 작성자가 기록한 디지 털 정보는 의미가 없다. 다른 사용자에 의해 그 정보는 또 다시 변형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디지털 정보 앞에서는 주인이다.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디지털을 꾸미고 바꿀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 앞에서 '저자의 권위'(authorship)를 부르짖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디지털 이후'에는 디지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이를 이용할 수 있는지 여부가 더욱 더 중요하게 부각된다. 그것이 해방의 필요조건이다. 5. 디지털은 새로움과 잡종이다. 우선 디지털은 이제까지 존재했던 과거의 모든 문법을 뒤 집는다는 점에서 새롭다. 산업 시대의 모든 물건들은 디지털 시대에 다시 쓰여진다. 구시대 의 퇴물들은 인공 지능과 디지털 칩을 내장한 채 새롭게 태어난다. 한편 디지털 시대의 사 물들은 여태까지 없었던 새로운 쓰임새를 위해 준비한다. 디지털 정보도 끊임없이 갱신한다. 과거의 것들의 지속적인 업데이트와 버전업은 디지털 시대의 필수 조건이다. 무한히 변형 가능한 속성은 하나의 정보를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새로이 짜게 만든다. 누군가에 의해 변 형된 정보가 새로운 창작 활동이 되는 것이다. 진짜는 없다. 오직 '잡종'(hybrid)과 새로움이 있을 뿐이다. 디지털에서 순종을 찾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디지털의 자유로운 잡종은 새로움의 조건이다. 잡종은 디지털과 디지털의 난잡한 결혼이다. 이를 쉽고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디지털만이 지닌 기술적 특성이다. 결국 디지털은 근원이 없다. 단지 잡종과 혼합이 있을 뿐이다. 잡종이 되기까지 디지털의 관계와 만남이 전제되어야하듯, 새로움의 근거는 디지털간의 조우에서 마련된다. 될 수 있으면 서로 많은 디지털을 '관계하도록 하는 것'(communication)이 '디지털 이후'의 새로움의 실체들을 대할 수 있는 방법이다. 6. 디지털은 나눔과 공유이다. 디지털의 속성은 애초부터 배타적이고 독점적이지 못하다. 독점적 지위는 하나의 빵을 얻기 위해 다수가 경쟁하는 환경에서 나왔다. 디지털은 이를 극 복한다. 한 사람의 이용이 타인의 또 다른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의 정보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어도 자신의 원정보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디지털이 지닌 나 눔과 공유의 혁명적 특징이다. 디지털의 독점은 디지털의 자유로운 본성을 위배한다. 독점과 배타적인 점유는 근본적으로 나눔과 공유의 원리를 거스른다. 디지털은 모든 이들을 이롭게 하기에 '사회적'(societal)이다. 독식은 디지털이 공개되고 공유될 때 깨진다. 즉 디지털의 사회화가 이루어지면, 그 정보의 독식권은 영원히 사라진다. 게다가 네트워크를 타고넘음으로써 그 나눔과 공유의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물리적 경계를 뛰어넘는 디지털의 속성은 나눔과 베품의 정신을 전범위로 확대한다. 더딘 면대면(F2F) 커뮤니케이션을 디지털 네트워크로 연결함으로써, 누구든지 그 공유의 혜택에 한발 다가서게 된다. 7. 디지털은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엄밀히 얘기해서 디지털 그 자체가 아니라, 디지털의 '관계망'들(inter-networks)이 그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그 유기체는 고정적이지 않다. 계속 해서 끊임없이 자란다. 새롭게 태어나는 노드들(nodes)을 자신의 망 안으로 끌어들이고, 스 스로 몸집을 키워간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디지털의 순환은 자율적이고 비선형적이다. 물 론 정체되거나 막히는 지점도 존재한다. 하지만 대체로 그 디지털 흐름을 방해하는 어떤 장 애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생물 유기체 피부막 속으로 흐르는 혈액처럼, 디지털은 그것에 자양분을 공급한다. 살아 숨쉬는 생물처럼, 디지털 덩어리는 끊임없이 꿈틀거린다. 마치 <매트릭스>(Matrix) 영화에 서 터미널 인간들이 기계 탯줄에 온 몸이 매달린 채로 살아가듯, 우리는 네트의 광활한 자 궁에 접속되어 삶을 유지할지도 모른다. '매트릭스' 용어 자체가 '어머니'(mother)와 태초의 '자궁'을 암시하는 것처럼, 디지털 네트워크는 우리가 태어난 자궁과 같은 삶의 모태가 된다. 이 거대한 자궁은 우리 삶의 한가운데에 깊게 뿌리박고 서 있다. 8. 디지털은 그래서 문화요 삶이다. 디지털은 경제, 정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삶의 모든 측면의 변화이기에, 이는 문명의 전환이다. 총체적 변화이다. 문화가 인간 일상의 삶을 지칭 한다면, 디지털은 우리의 거대한 문화이자 삶의 변화다. 전자 상거래와 닷컴기업, 전자정부 가 디지털의 전부가 아니다. 하지만 차가운 은색의 디지털 비전만이 아니라, 디지털 자궁처 럼 친근한 무언가가 존재한다. 보다 근원적으로 디지털 문화의 핵심에는 인간이 있다. 유토피아의 미래에 인간이 빠지면 기형적 기계주의만 남는다. 우리의 '디지털 이후'는 인간과 문화가 중심에 선다. 경제, 정치 등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새로운 디지털 창조물들과 이를 이용하는 휴머니즘적 인간형을 합친 것이 디지털의 문화를 가꾸어나간다. 디지털 문화는 전 영역에서 상호 발달 하는 디지털 혁명의 가치를 고립분산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디지털 문화란 시각을 통해, 우리는 겉보기에 단순히 한 영역에서의 변화로 간주하는 것들이 다른 영역에서의 변화와 긴 밀히 엮여있음을 감지해낼 수 있다. 9. 디지털은 족쇄다. 디지털은 역설이다. 족쇄는 해방과 평등에 배치되지 않는다. 비록 족쇄 가 단지 미래의 가능성일지라도 억압적 미래상을 미리 그려보아야만 한다. SF소설을 쓰는 사이버펑크(cyberpunk) 작가들처럼, 우리는 미래의 암울한 모습에 대한 자화상을 비춰볼 필 요가 있다. 디지털 휴머니즘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한다. '디지털 이후' 는 단지 찬란한 디지털 시대만을 예견하지 않는다. 디지털은 빛과 마찬가지로 그림자를 지 닌다. 그 곳에는 화려하고 역동적인 도시가 존재하지만, 한 쪽 켠에는 축축한 빈민굴의 냄새 도 맡을 수 있다. 디지털이 지닌 혁명성이 누군가에 의해 거세되면, 자연 그것은 현실처럼 폭력과 억압이 공존하는 또 다른 족쇄가 된다. 디지털 혁명성의 찬란함은 더러운 반역의 거울 이미지다. 디 지털은 이처럼 야누스적이다. 디지털 현실과 미래에는 빛과 그림자가 뒤섞여 공존한다. 이렇 듯 디지털의 명암 속에서 인간의 얼굴을 찾아내는 작업이 디지털 휴머니즘의 살아있는 기획 이다. 10. 디지털은 결국 '인간의 얼굴'이다. 디지털 미래는 인간이 고민하고 만들어내는 세상이 다. 디지털 자체만으로 장밋빛 미래는 도래하지 않는다. 디지털의 생생히 살아있음과 새로 움, 해방감과 평등의 느낌은 '인간의 얼굴' 안에서만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땅에 딛고선 현실의 생생한 조건이다. 디지털 혁명과 그 문화를 체감하는 인간의 조건이 빠지면, 미래는 암울한 야만이거나 단지 상상계이기 때문이다. 또한 새로운 디지털 문화의 원형(prototype)은 비즈니스맨에서도 대중 정치가의 논의에서도 찾기 어렵다. 오히려 디지털 문화 현실을 깊게 호흡할 수 있는 '디지털 휴머니스트'가 필요하다. 이는 인간을 중심에 놓고 '디지털 이후'를 사고하는 자들을 지칭한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은빛의 차가운 냉기를 품어내지만 인간 의 얼굴을 한 디지털 전사들이 그들이다. 이제 우리는 '디지털 이후'에 살아갈 '인간의 얼굴' 을 그리는 작업을 시작하는 첫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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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대학원신문] 디지털 노마디즘의 모순적 지위

디지털 노마디즘의 모순적 지위 자유로움은 인간 신체의 해방적 느낌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느낌에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는 이제까지 크게 두 번이다. 우선 19세기초 자본주의는 봉건 권력의 토지에 예속되었던 인간 신체의 자유로움을 약속했다. 인간은 자유 계약을 통해 자신의 신체를 거 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형식적인 신체의 자유는 궁극적으로 통제와 구속의 거 울임이 드러났다. 자유 계약은 자본주의의 생산 관계에 들어가면서 신체 구속의 증명이 되 었다. 대표적으로 테일러 할아버지가 계시한 공장의 과학적 경영은 신체의 자유를 갈기갈기 찢어 시분할 관리하는 생산 미학의 절정이었다. 이제 20세기말 인간 신체의 자유는 디지털 혁명으로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게 되었다. 디 지털의 자유로움은 인간을 끊임없이 부유하게 만들고 있다. 디지털이 선사한 자유로움은 끊 임없는 유목과 이동의 전제가 되었다. 디지털은 공장과 사무실로부터 노동자들을 해방시키 고, 한 장소와 지역의 구심력에 구멍을 내고 있다. 이는 진정한 인간 해방의 징후인가? 아니 면, 디지털 기술이 마련한 노마디즘의 새로운 가능성이 고작해야 19세기에 자본주의가 제시 했던 자유 계약의 새로운 업데이트 버전일 뿐일까? 이 글은 신체 자유의 필요 조건인 노마디즘을 양가적 차원에서 본다. 권력의 노마디즘과 저항의 노마디즘. 전자는 후자를 필연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새로운 디지털을 이 용하여 노마디즘을 기획한다는 점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이다. 이에 반해 후자는 권력의 통제 에 대항한 힘의 생성을 포착한다. 디지털 노마디즘의 긍정적 가치는 물론 후자의 관찰을 통 해 얻을 수 있다. 권력의 노마디즘 새로운 권력의 특성은 디지털 네트워크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 디지털 노마디즘의 생성 조건은 애초에 권력의 아이디어에 가깝다. 과거에는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기 마련이었다. 볼셰비키 들이 쨔르 체제를 뒤집기 위해 크렘린 궁전으로 진격했던 것처럼, 권력에 대항하 는 혁명 그룹들은 대상화된 권력의 실체에 대한 '장악'의 개념을 사용했다. 장악과 진격은 멈춰진 대상을 필요로 한다. 멈춰있는 상태의 권력, 이는 '정주 권력'(sedentary power)이다. 새로운 권력은 자유롭게 이동한다. 네트워크망을 타고 전세계를 누빈다. 권력이 분산되고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쉽게 옮겨 다닌다. 네트워크망을 통해 권력의 공간 확장과 이동이 이루어진다.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란 책에서 마누엘 카스텔은 새로운 공간의 변화를 '장소'(place)에 서 '흐름'(flow)의 전환으로 파악한다. 그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모이고 흩어지 는 동태적인 권력의 '흐름'을 읽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디지털 네 트워크다. 그래서, 새로운 권력의 호칭은 '노마드 권력'이다. 이 새로운 권력이 요구하는 디 지털 노마디즘은 우선 효율성(efficiency)에 근거한다. 자본의 순환을 빛의 속도로 만들고, 적재적소에 자본을 분배하려는 욕구는 기본적으로 효율성의 원칙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어 떤 기업이든 원활한 정보 이동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자본간 경쟁에서 사멸할 수밖에 없다. 둘째는 연장(extension)이다. 다른 말로 연장은 통제력이다. 연장은 쉽게 생각하면 몸통에 달려있는 길게 연결된 보철물과 같다. [매트릭스] 영화에 나오는 신체의 구멍에 연결된 포 트 단자들을 상기하라. 연장은 관리와 통제를 행하는 중심을 갖는다. 그것이 연장인 이유다. 연장은 통제력의 확장/대 욕구에서 생긴다. 디지털 노마드 권력의 새로운 능력은 실시간 통 제력에 있다. 디지털 접속은 전세계를 단일로 묶고, 디지털 연장을 통해 권력을 확장한다. 마지막으로 공간의 소멸(disappearance of space)이다. 디지털 이데올로그들은 공간 압축 능력을 단지 디지털 기술의 가공할 능력을 설명하는데 이용한다. 하지만, 물리적 공간의 탈 출은 있을 수 없는 얘기다. 현실의 공간은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굴레다. 오히려 공간의 소 멸은 단일화된 권력의 장을 시사한다. 오늘날 공항에서 노트북을 챙기고, 셀룰러 폰을 목에 걸고, 개인 디지털 보조장치(PDA)를 손에 들고, 디지털 시계로 전자 메일을 확인하는 사람 들을 쉽게 목도할 수 있다. 현대의 이러한 일상 풍경이 주는 공통점은 접속된 인간의 모습 이다. 자유로운 신체 이동 능력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오히려 끝없이 권력에 접속되고 연결된다. 지구촌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일하는 지구촌 노동자의 미래상은 사이버펑크들만 의 지나친 공상이 아니다. 공간의 소멸은 물리적 공간의 소멸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이 행사 되었던 가시적 거리감의 소멸이다. 공간의 소멸은 권력의 새로운 디지털 장을 전제하고 있 는 것이다. 사이비 노마디즘 이 세 가지 전제들은 권력이 디지털 노마디즘에 집착하는 직접적 이유다. 효율성은 권력 의 생산에, 연장은 권력의 확대에, 공간의 소멸은 권력의 관리에 기여한다. 디지털 노마디즘 이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드러난다면, 이 세 가지는 현실 노마디즘의 본질과 목적을 드러낸 다. 권력의 노마디즘에는 정처없이 떠도는 정보의 흐름은 없다. 권력의 노마디즘은 일정한 방향을 갖고 움직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정형으로 보이지만 이것의 흐름에는 규칙성이 발 견된다. 그 규칙성은 권력의 위계적인 명령에 의해 부과된 것이다. 예컨대, 전세계 노드를 타고 흐르는 정보들 중 고급 정보들의 집적과 관리는 거대 기업본부(HQ)의 중앙 컴퓨터에 서 이루어진다. 평등하고 물활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던 디지털 정보들이 권력의 파장 에 걸리면 위계적이고 불균등하게 갈린다. 노마디즘의 자유로움이 권력에 의해 다시 한번 산산히 조각난다. 역설적으로 권력의 생산, 확대, 관리의 목적된 노마디즘은 진짜 노마디즘이 아니다. 이는 '사이비 노마디즘'(pseudo-nomadism)이다. 디지털의 진정한 가치와 거기서 생성되는 노마디 즘을 철저히 악용하는 구자본주의 생산의 논리다. 권력으로 지칭되는 주원천이 무엇보다 자 본력에 있다고 본다면, 권력이 이용하는 노마디즘의 정체는 쉽게 폭로된다. 부유하는 유목 자체의 자유로운 신체적 가능성보다 유목에 의해 유지되는 체계적 약탈의 역사에 디지털 시 대의 권력은 열광한다. 새로운 권력에게 유목은 자유로운 자본의 이동이다. 물론 고대의 노 마디즘과 다른 점은 디지털이란 수사어다. 비가시적이고 기동력있는 약탈의 노마디즘이 현 대의 권력이 주력하는 바다. 결국 디지털 노마디즘의 수사는 권력의 것이다. 각자의 목 뒷덜미에 포트가 뚫려 망망한 네트의 바다로 사라지는 비운의 미래 인간들처럼, [동물의 왕국]에서 꼬리표나 추적 장치가 붙어 초원으로 사라지는 야생 동물들처럼, 권력이 의도하는 노마디즘은 끊임없이 탈주하려 고 하고 탈주했다고 느끼지만 종국에는 권력의 파장에서 한발자국도 못벗어나는 사이비 노 마딕 현실을 기획하는 일이다. 저항의 노마디즘 진정한 노마드는 모든 권력화된 디지털 영토를 저항의 기폭제로 삼는다. 최근에 이탈리아 자율주의자인 안토니오 네그리와 듀크대학의 영문학 교수인 마이클 하트가 같이 쓴 {제국 Empire}(2000)이란 저술에서 얘기되었던 것처럼, 권력의 외부 혹은 바깥으로 보이는 장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곳에서 저항해야 한다. 그들은 저항의 편재성을 일 컬어 복수자들의 '저항되기'(being-against)로 표현한다. '저항되기'는 일상화된 저항의 표현이다. 저항되기는 노마디즘을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권력이 노마디즘을 재생산의 수단으로 이용하는데 반해, 새로운 디지털 야만인의 무리들은 이를 저항의 방식으로 이해한다.이른바 저항의 노마디즘은 권력이 악용하는 디지털의 노마드적 가치를 재전유한다. 유목적 약탈보다는 자유로운 신체를 전제한 유목적 가치에서 저항은 힘을 얻는다. 디지털 노마디즘은 제도, 관습, 경계, 명령 등으로부터 철저히 멀어지려 한다. 권력의 사이비 노마디즘은 저항의 다층적 연결과 동시다발적인 진지전에 의해 발작을 일으킨다. '저항되기'가 일상적이고 미시적 실천과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듯이, 유목민적 삶을 살아가는 현대의 야만인들은 권력이 쳐놓은 그물 하나하나에서 그 저항과 반대의 고리들을 발견한다. '저항되기'는 체념과 희망의 변증법이다. 체념은 권력의 파장으로부터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는 현실 인식에서 생긴다. 그러나 희망은 체념을 물구나무 세울 때 얻어지는 부정의 결 과다. 체념은 현실을 버리거나 외면하기 보다 희망의 씨앗을 가꾸기 위해 필요하다. 이런 점 에서 21세기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사이비 노마디즘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오히 려 철저히 권력이 지향하는 디지털 노마디즘의 가치를 주목하고, 현실 체념의 극한까지 밀 고갈 필요가 있다. 체념에서 멈추면 오직 나락만이 있을 뿐이다. 연이어 부정의 과정을 수행 해야 한다. '저항되기'는 체념을 극복하는 부정의 능동적 과정이다. 디지털 노마디즘을 가치 화하는 노력은 희망을 실은 '저항되기'에 있다. 현실의 '저항되기'는 희망을 가꾸는 방법이자 사이비 노마디즘을 무력화하는 힘이다. // (연세대 대학원신문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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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넷] 자유주의 시민운동의 허약증후군

자유주의 시민운동의 허약증후군 //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광풍이 인다. 미국은 정체불명의 '선악' 편가르기 전쟁에 빠져, 그 누구의 제지없이, 그 누가 억울하게 당하는지도 모른 채 제멋대로 시퍼런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 뉴욕의 동시다발 테러 이후 이름값하는 거대 언론사들의 보수적 논조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애국주의를 고취하는 내용이 지면과 방송을 장식하는 동안, 눈먼 폭탄에 스러진 아프간 양민들의 떼죽음은 아랑곳없다. 이에 질세라 언론을 쥐락펴락하며 왜곡 정보를 키우려던 국방부의 '영향정보국'의 구상이 억세게 운이 나빴던지 전세계 여론에 밀려 어쩔수없이 문을 닫게 됐다. 각종 인권 침해 소지를 안은 소위 '애국법'과 각종 보안, 감시법안들이 칼춤의 미친 바람을 부채질한다. 엄청난 반동의 흐름에 딴지를 거는 이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 힘은 미약하지만 애국주의의 대중 최면을 막아보려는 자유주의 시민운동단체들과 비판적 지식인들이 존재한 다. 하지만, 이들에서도 상황은 그리 밝지 못하다. 일부 시민운동 활동가들이 미친 칼춤의 동조자로 나서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난 해말 <뉴욕타임스>에 꽤 유명한 한 시민운동가가 글을 기고해 논란이 일었다. 문제가 된 '전자 신원카드(national ID card)를 왜 두려워하나' 란 칼럼에서 그는 잠재적 테러의 사회적 안전망으로 지문 판독용 칩을 내장한 전자 신원카 드의 도입을 뜬금없이 제안했다. 시민의 프라이버시 권리는 상황에 따라 그 기능이 달라져 야 하며, 국가 위기시에 그 권리를 돌볼 여유는 없다며 전자 신원카드 도입의 당위성을 강 변한다. 불과 두어 해 만에 급부상해 인터넷 시민운동단체로 자리잡은 '프라이버시재단'도 매한가 지다. 덴버 소재의 이 재단은 이제까지 디지털 녹화장치 '티보'에 의한 시청자 감청, 웹 페이지에 숨겨진 그림파일 '웹버그'와 전자우편을 통한 인터넷 이용자 감청, 각종 첨단장치에 의한 노동자 감시 등 기업들의 최첨단 정보 수집 능력을 폭로해 언론의 큰 관심을 끌어왔다. 그런데, 이 단체의 영향력을 좌우했던 한 활동가가 안면 판독과 전자 신원카드의 개발을 주 업종으로 삼는 보안업체를 차려 독립한 일이 생겼다. 어이없게도 정세 변화의 흐름을 탄 그 의 '기회주의적' 행보로 프라이버시재단의 장래가 아예 불투명하게 바뀌었다. 이미 애국전의 수행 이전에도 일부 시민운동진영, 특히 정보운동단체들에게서 그 보수적 징후들이 돌출하곤 했다. 예를 들어, '표현의 자유'에 대한 폭넓은 인권 해석을 소비자 권리 로 한정해 인터넷에서 나치물품 경매를 옹호하거나 인터넷상의 인종차별이나 어린이 프라이 버시 보호에 대한 미온적 태도를 보임으로써 전자프런티어재단(EFF) 등의 여러 정보운동단 체들은 이미 자신들의 부실한 정치적 지향들을 하나둘 드러낸 경험이 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에서 특히 이들의 보수적 입지가 드러나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시장 자유주의'의 철학에서 비롯한다. 계급이나 시민 개념보다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 주체 인 소비자를 중심에 두고 그 권리 신장에만 주력해온 시장주의 원칙이 이들 입지의 보수성 을 키워왔다. 그래서, 안건이 사회·정치적 논의로 확대되면 속수무책이거나, 심지어는 보수 집단의 바람잡이로 전락하는 경향이 있다. 자유주의를 소비권 확대로만 재려다보니 보다 큰 시야를 잃고만다. 다시말해, 넘쳐나는 '시장'에 비해 이들의 자유주의에는 '사회'가 빈곤했다. 소비자 권리의 일반화에 급급하면, 자연 일국내 혹은 국가간의 역사적 특수성과 맥락이나 사회적 불균등에서 비롯된 인권 침해 요인들을 간과하는 오류가 생긴다. 나치 옹호론도 그 빗나간 경우다. 소비자 중심주의와 시장 자유주의에 정신이 혼미한데다, 대정부 로비 중심의 활동, 비대화된 조직 구조 등 미 시민운동계의 고질적인 병폐들이 안에서부터 좀먹는데야 어찌 파시즘의 칼춤 장단에 휘둘리지 않고 견디겠는가. (진보넷 원고 200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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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로 가는길] 디지털 점집의 역술가들

디지털 점집의 역술가들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국내에 신세대풍 점집과 사주카페와 함께 인터넷에 점술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의 젊은층을 중심으로 확산된다고 여기니 그리 상쾌해 보이진 않는다. 재미삼아 찾는 점집이라지만, 그만큼 우리 사회 현실에 대한 비관적이고 불확실한 전망이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는 얘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극도로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심정적 불안이 자연스레 점술을 현대인들의 일상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정작 역술가가 치는 점괘가 시원 찮아도 사주풀이만 좋다면 무슨 대수일까 싶기도 하다. 까짓것 엉터리 사주풀이라도 복채 건네는 이의 기분만 좋으면 그만 아니냐는 항변도 나올 법하다. 하지만, 판이 커져 속칭 사 이비 역술가들의 점괘가 우리네 사는 현실을 좌우하면 이미 재미나 정보 제공이란 차원을 벗어난다. 있는 현실에 비해 과장된 운명이나 낙관론이 지배하기 시작한다. 사이비 역술은 점집 구들에 자리 틀고 앉아서 입발린 운명을 예언하는데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과 지식을 빙자하여 매체를 통해 거짓 정보를 유포하는 이들도 사이비 역 술의 축에 낀다. 누가 이렇듯 거짓 정보를 유포하는가? 디지털 '현자'로까지 추대되는 우파 논객들, 소위 디지털 시대의 점술가들이 그 주범이다. 이들이 행하는 디지털 미래의 유채색 은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을 가리는 수단으로 곧잘 둔갑했다. 이들에게 인터넷의 미래는 무 궁무진한 기술 변화의 가능성으로 언급되지만 실제 그 변화와 방향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관리되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은 실종된다. 정보의 질적 가치나 기술 변화의 지향뿐만 아 니라 누구를 위한 정보화인지, 디지털과 인터넷이 또 다른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하는지 등 에 의문을 갖는 것은 처음부터 금기시된다. 이들이 치는 괘는, 자본주의 위기는 경기 변동으 로, 저항은 체제의 역기능으로, 모순은 기껏해야 마찰 혹은 갈등으로, 정보공유는 시장 파괴 란 원칙에 의해 움직인다. 이들은 디지털 시대의 가시적 현상들을 주워담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경영·경제 법칙들을 만들고 각종 기업 강연과 언론플레이를 통해 '신경제'라는 신화를 세웠다. 첨단의 기술 현상과 운명론의 결합을 그리 낯설지않게 만든 장본인들인 셈이다. 이 들을 급으로 따지자면 개인의 운명이 아닌 사회 전체의 운명을 예언하고 사회적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 역술가들에 해당한다. 그러나, 꼭 2년전부터 시작된 미국 경제의 불황이 이 역 술가들의 점괘가 사이비라는 점을 폭로했다. 이들에게 선뜻 복채를 내놓았던 사람들은 지난 몇 년간 하이테크 산업에도 구경제에서처럼 장기적 불황, 대규모 정리해고, 노조 설립 탄압 등 과거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는다는 사실을 지켜보았다. 신경제의 거품이 걷히면 주위에 기생하던 역술가들의 움직임 또한 잦아드는 것이 당연하건만, 이들은 불투명한 미래의 불안 감을 틈타 다시 디지털 현자인양 행세하며 나서고 있다. 마냥 첨단 기술에 기댄 이들의 장 밋빛 진단에 진저리가 날 때도 됐는데도 말이다. 자본주의 발전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증대할수록 우리는 경제 연구소의 통계 예측에 비해 현자들의 말한마디에 더 큰 권위를 느낀다. 그래서인지 지난 수년간 디지털 역술가들 의 점집 노릇을 해왔던 디지털 경제지들은 신경제 스타로 대접받는 현자들을 다시금 대거 영입하기 시작했다. 한 디지털 잡지는 재밌게도 디지털 역술가들의 얼굴을 앞면에 담고, 뒷 면에는 관련 정보를 실은 그림 카드 모음을 보너스로 싣는 파격을 보여준다. 코흘리개 아이 들간에 고가에 거래되던 포케몬 카드와 흡사한 디지털 현자들의 얼굴이 새겨진 일명 '딱지' 모음을 고안해냈다. 딱지 뒷면의 스타 정보에는 출생과 간단한 약력 외에도 별표로 등급을 매기는 스타 파워(별점), 1회 강연료, 특기사항 등이 기록돼 있다. 단연 피터 드러커는 모든 디지털 역술가들의 스승격이다. 유일하게 그의 별점은 다섯이다. 경영 전략 분석의 대가로 불리는 마이클 포터는 별 넷에 1회 강연료가 무려 7만 달러다. 이 에 비해 <디지털자본>이란 책으로 유명한 돈 탭스콧이나 <마이크로코즘>의 조지 길더는 딱지 경쟁력이 약한 편이다. 마치 괴물 혹은 로봇에 대한 정보가 상세히 분석된 아이들의 딱지처럼 디지털 시대의 역술가들의 몸값이 보기좋게 매겨져 있다. 지금과 같은 경제 불황 에도 불구하고 몸값이 이 정도라면 호황기에 누렸던 이들의 유명세는 짐작하고도 남을만하 다. 비록 국적은 미국이지만 이들이 내리는 점괘는 세계를 상대한다. 전세계 경제인, 정부 관 료, 지식인의 의식은 이 스타 역술가들의 점괘에 쉽게 의존했다. 포케몬 딱지를 수집하는 아 이들의 빗나간 동심처럼 이들 스타들은 전세계 여론 주도층의 마음을 사로잡는 딱지 속 스 타들이었다. 우리 정부도 큰 돈 써가며 이들을 모셔왔지만, 신격화된 딱지 스타들이 치는 점 괘가 이름값만큼 그리 신통치 못했다. 이들이 내리는 모순 부재의 현실과 미래 진단은 오히 려 오류로 가득했다. 인터넷 현실의 비판적 접근을 기술 지상론으로 입막고, 신경제의 장밋 빛 신화를 후발국들에 퍼뜨리면서 또 다른 종속의 쓴맛을 보게하는 대신 스타 점쟁이들은 두둑한 복채를 챙겼다. 그런 이들이 이제 무너져내리는 닷컴 기업들 앞에 줄줄이 자리깔고 앉아 회생의 처방전을 갖고있노라고 또 한번 사이비 행각을 벌이고 있다. (정보화로 가는길, 200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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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넷] 신종 학교 괴담

신종 학교 괴담 미국의 학교 당국자들은 요즘 학생들을 때려잡기에 여념이 없다. 미시간의 한 학교에서는 경찰까지 동원해 20여명의 남녀 학생들의 속옷까지 벗기고 잃어버린 돈을 찾는 해프닝이 벌 어졌다. 그러나, 돈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혐의를 받았던 학생들은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미시건주의 이 지역 교육청은 미 수정헌법이 보장한 비상식적인 조사에 응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침해한 근거로 곧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에 의해 기소되었다. 올해 들어 지방 교육청이 학생들의 강제 정학을 명령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고딩 시 절 학교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다가, 혹은 운동권 대학생 형의 이상한 책을 학교에 갖고와서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읽다가 정학을 먹기도 하던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 무슨 그게 대수냐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학의 근거라는 것이 자신의 컴퓨터를 집에서 가지고 논 죄밖에 없다면 어떨까? 워싱턴주의 한 공립학교의 학생은 자신이 다니는 학교의 교감을 패 러디한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다, 강제 정학을 당했다. 이것이 신종 정학의 근거다. 같은 주의 다른 학군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이 학생은 자신이 다니는 학교의 비공 식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학생들이 학교 생활하면서 벌어지는 여러 논의들을 수렴하는 장으 로 활용했다. 이 사이트를 운영하는 닉 엠멧이란 학생의 불행은, 한 친구가 재미로 자신의 가짜 사망 기사를 써보자고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학생들의 연이은 가짜 부고들이 게시판 에 올라오면서, 이 사이트는 인기가 절정에 올랐다. 곧바로 이 사이트가 '히트 리스트'에 올 랐다는 한 텔레비전의 뉴스 오보로, 그 파장을 염려한 엠멧과 친구들은 서둘러 사이트를 폐 쇄해버렸다. 그러나, 이 지역 학교 당국은 학생들에게 5일 정학을 명령했고, 이들의 부모들 이 연방법원에 정학 명령 정지를 요청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법원은 다행히도 엠멧의 사건에 대해 학생들의 편에 섰다. 법원 판결문에서는, 이처럼 학 생들이 학교 밖에서 자신의 시간대에 집에서 컴퓨터를 사용하는 행위는 명백히 학교 당국의 권한이나 통제 밖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이 패러디 부고들이 누군가를 위협하거나 명백히 폭력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고 덧붙였다. 당연히 그에게 내린 정학은 거 둬졌다. 대체로 이런 부류의 사건들은 공립학교의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자신의 제작물을 만들거나 배포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선에서 마무리되고 있다. 다시 엠멧은 학교를 다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법원의 판결이 나기 전까지 학교 당국으로부터 입은 정신적이고 시간적 피해를 누가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학생들에게 권위는 학교다. 학교측에 대한 학생들의 승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이같은 권위에 대한 패러디 사이트들의 운영이 사실상 심리적으로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 법정 투쟁을 감내하면 서 패러디 사이트를 운영하기에는 이들은 너무 여리기에 마음의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있을 판례에도 이 사건들이 긍정적 영향을 주겠지만, 본질적으로 학교 당 국에 대한 학생들의 불신의 골은 깊어질 것이다. (진보넷 200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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