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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회주의인가'는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미국 좌파잡지 ‘먼슬리 리뷰’ 창간호(1949년 5월)에 쓴 글이다. 매카시즘의 미친바람이 몰아치던 즈음, ‘천재’와 동의어이던(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과학자의 ‘사회주의 선동’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먼슬리 리뷰’는 지금도 창간 특집호를 꾸밀 때면 이 글을 다시 게재한다.
(아래, 리오 휴버먼은 1968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먼슬리 리뷰' 편집자였다. 그의 동료 폴 스위지는 지난 2월 세상을 떠났다.)
왜 사회주의인가? (WHY SOCIALISM?)
알버트 아인슈타인
경제나 사회 문제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사회주의에 대한 견해를 표현해도 되는 걸까? 나는 몇 가지 이유로 그렇다고 믿는다.
먼저 과학적 지식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방법론상으로 천문학과 경제학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두 분야의 학자들은 모두 많은 현상들의 관계를 가능한 한 명확하게 하기 위해 현상들의 일반적인 법칙을 찾으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방법론 차이가 분명히 있다. 경제학에서 일반 법칙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따로 떼어내서 정확하게 평가하기 어려운 많은 요인들이 경제 현상들에 종종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른바 인류의 문명사가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축적된 경험은, 잘 알려진 대로 본질적으로 경제적이지 않은 원인의 영향을 받았고 또 이것의 제약을 받아왔다. 예를 들어, 역사상 대부분의 나라들은 정복 덕분에 존재했다. 정복하는 이들은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점령지에서 특권층이 됐다. 그들은 땅 소유권을 독점했고 자기 계급 사람을 성직자로 임명했다. 교육을 통제한 성직자들은 계급 구별을 영원한 제도로 정착시켰고 사람들이 사회행동을 할 때 (상당 부분 무의식적으로) 따르게 되는 가치체계를 창조했다.
그러나 말하자면 역사적 전통은 과거의 이야기다. 토르스테인 베블린이 인간 발전의 "약탈 단계"라고 부른 것을 우리는 진정으로 넘어서지 못했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경제적 사실들은 이 단계에 속한다. 또 여기서 추출한 법칙을 다른 단계에 적용할 수도 없다.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적이 인간 발전의 약탈 단계를 극복하고 전진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 단계 경제학은 미래 사회주의 사회에 빛을 제시하기 어렵다.
둘째로, 사회주의는 사회윤리적 목적을 향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과학은 목적을 창조할 수 없다. 이것을 사람에게 주입시키는 것은 더군다나 못한다. 기껏해야 과학은 이런 목적을 이루는 도구를 제시할 뿐이다. 목적을 인식하는 것은 높은 윤리적 이상을 갖춘 사람들이며, 이 목표가 사산한 것이 아니라 활력 있는 것이라면 이를 입양해서 키우는 것은 사회의 점진적인 진화를 결정하는 많은 사람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사람 문제에 관한 한 과학과 과학적 방법을 과대평가하지 않아야 한다. 또 우리는 사회 조직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해 의사 표시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전문가들뿐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인간 사회가 위기를 겪고 있으며 안정성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수없이 많다. 개인들이 크든 작든 자신 스스로가 소속된 집단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 이런 상황의 특징이다. 내가 말하는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개인적인 경험을 소개한다. 나는 최근에 지식인이며 인격자인 사람과 또 다른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다시 전쟁이 난다면 인류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생각돼, 초국가 조직만이 이런 위험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내 손님은 냉철하게 말했다. "인류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왜 그렇게 반대하십니까?"
한 세기 전만 해도 이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이들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발언은 자신의 평정을 찾는 데 실패하고 성공에 대한 희망조차 잃어버린 이들이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스런 고독과 고립의 표현인데, 요즘 많은 사람이 이런 고통을 겪고 있다. 원인이 뭘까? 탈출구는 있는가?
이런 질문을 제기하기는 쉽지만 어느 정도라도 확실한 답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해볼 작정이다. 물론 나는 우리의 감정과 시도가 종종 서로 모순되고 모호하며 그래서 쉽고 간단한 수식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람은 언제나 고독한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 고독한 존재로서 사람은 자신과 자기 주변 인물들의 존재를 지키려고 하고, 개인적인 요구를 만족시키려 하며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계발하려고 한다. 사회적 존재로서는, 주변 인물들에게서 평가받고 사랑을 받으려 하며 그들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며 그들의 생활여건을 개선하려고 한다. 종종 모순적인 이런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만이 사람의 특징을 설명한다. 또 사람의 심리적 평정은 이 두 가지 유형의 노력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이 노력은 사회의 복지에도 기여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 고독한 존재라는 측면과 사회적 존재라는 측면 가운데 어느 면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나느냐는 주로 유전에 의해 결정될 여지가 크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발현되는 인간의 개성은 대개 그가 자란 환경과 사회 구조, 그 사회의 전통, 그리고 특정 행위들에 대한 그 사회의 평가에 따라 형성된다. 개인에게 "사회"의 추상적 개념은, 자신의 동시대인 및 이전 세대 사람 전체와 맺는 직접, 간접적인 관계의 합이다. 개인은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노력하고 일할 수 있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지적이며 감성적인 존재로서 개인은 또한 많은 부분을 사회에 의존한다. 그래서 사회의 틀 밖에서 사람을 생각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에게 음식, 옷, 집, 도구, 언어, 생각의 형태, 생각의 내용 대부분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사회"이다. 사람이 생을 유지하는 것은 "사회"라는 간단한 단어 뒤에 숨어있는 현재와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이 한 일과 성과 덕분이다.
그래서 명백한 사실은, 개인이 사회에 의존하는 것이 개미나 벌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질 수 없는 본성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개미와 벌의 삶 전체가 세세한 부분까지 유전적 본능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과 달리, 인간 사회의 형태와 상호관계는 아주 다양하며 변화할 수 있다. 기억, 새로운 조합을 할 수 있는 능력, 언어라는 선물이, 사람에게 생물적 요구와 무관한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발전은 전통, 조직, 문학, 과학기술적 성과, 예술작품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이 과정에 의식적인 생각과 요구가 개입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해준다.
사람은 유전을 통해 태어날 때 생물학적 특성을 갖춘다. 여기에는 인류를 특징짓는 자연적인 요청도 포함되는데, 우리는 이를 고정되고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게다가 사람은 사는 동안 의사소통을 비롯한 다양한 통로를 통해 사회가 제시하는 문화적 특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문화적 특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뀔 수 있는 것인 동시에, 상당한 정도까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다. 현대 인류학의 원시문화 비교연구 덕분에 우리는 사람의 사회적 행위가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적 유형, 조직 형태에 따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됐다. 사람의 운명을 개선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은 인류의 생물학적 특성 때문에 서로를 멸망시키거나 잔인한 자기 파괴적인 운명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저주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을 만족스럽게 하기 위해 사회구조와 문화적 태도를 어떻게 바꿔야하는가 하고 자문할 때는, 사람이 바꿀 수 없는 특정한 조건이 있다는 점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생물학적 본성은 바꿀 수 없다. 게다가 지난 몇 세기동안 이룩한 기술적, 인류통계적 발전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조건들을 만들어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람이 많기 때문에, 노동과 고도로 중앙집중적인 생산 설비의 극단적인 분리는 전적으로 피할 수 없다. 개인이나 작은 집단이 자급자족할 수 있던 목가적인 시대는 영원히 사라졌다. 인류가 생산과 소비의 지구촌을 구성했다고 말하는 것은 약간 과장된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이제 우리 시대 위기의 본질을 간략하게 지적할 수 있는 단계에 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개인은 자신이 사회에 의존한다는 점을 어느 때보다 더 잘 인식하게 됐다. 그러나 개인은 이 의존성을 긍정적인 자산이며 유기적 연관이며 보호해주는 힘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연적인 권리,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적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다. 게다가, 개인적인 욕구는 갈수록 강조되는 반면 원래 이보다 약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욕구는 갈수록 황폐해지는 상황이다.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간에 모든 사람은 이런 황폐화에 시달리고 있다. 이기주의의 포로가 된 인간은 불안해지고 외로우며, 순진하고 단순하며 세련되지 못한 삶의 쾌락을 추구하고 있다. 사람이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면 사회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밖에 길이 없다. 비록 이 의미가 짧고 위험한 것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적 무정부 상태가 악의 진정한 근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앞에는 큰 생산자 집단이 존재한다. 이들은 총체적인 노동의 과실을 강제가 아니라 법적으로 확립된 규칙에 충실해서 빼앗아내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생산 수단 곧 추가적인 자본재 뿐 아니라 소비재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총체적인 생산능력은 대부분 합법적으로 개인의 소유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단순화를 위해 앞으로 나는 생산수단을 나눠 갖지 못한 이들을 "노동자"라고 부르겠다. 이것이 일반적인 용어사용법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은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사는 위치에 있다. 생산수단을 사용해서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재산이 될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낸다. 이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점은 실질 가치로 따진 상품과 임금의 관계다. 노동계약이 "자유롭게" 이뤄지는 한, 노동자가 받는 것은 자신이 생산한 상품의 실질 가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최소한의 필요와 자본가의 노동력 수요에 따라 결정되는데, 이는 일자리를 원하는 노동자 숫자와 관련된다. 이론적으로도 임금은 생산한 것의 가치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은 꼭 이해해야 한다. (자유 경쟁시장에서는 임금도 일반적인 상품가격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 번역자)
사적인 자본은 소수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자본가들의 경쟁 때문이다. 부분적으로는 갈수록 심해지는 노동의 분리와 기술개발이 적은 비용으로도 더 많은 생산단위를 만들도록 유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발전의 결과는 사적 자본의 과두정치(독재정치)다. 이는 민주적인 정치사회에서조차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이다. 실질적인 목적 때문에 유권자를 입법부에서 분리시킨 사적 자본가들의 재정지원을 받거나 영향을 받는 정당이 의회를 구성하게 된 이래로 이는 명백한 진실이다. 이 결과는 시민의 대표가 특권 없는 다수의 이해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현재의 조건에서는 사적 자본가들이 피치 못하게 주요 정보원(언론, 라디오, 교육 등)을 직접, 간접적으로 지배한다. 그래서 시민 각자가 객관적인 결론을 얻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현명하게 활용하기는 너무나 어렵고,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하다.
자본의 사적인 소유에 기초한 경제가 지배하는 상황의 특징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로 생산수단(자본)을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며 소유자는 자신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처분한다. 둘째로, 노동계약은 자유롭게 이뤄진다. 물론 이런 관점에서 완전한 자본주의 사회는 없다. 특히 오랜 힘겨운 정치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이 조금은 개선된 "자유 노동계약"을 특정한 노동자 집단에 적용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로 보면, 현재 경제는 "순수한" 자본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산은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익을 내기 위해 이뤄진다. 일할 능력이 있고 의사도 있는 사람이 모두 일자리를 얻는 장치는 없다. "실업자 군대"는 언제나 존재한다. 노동자는 상시적으로 실업을 걱정한다. 실업자나 저임 노동자는 이익을 내는 시장을 형성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소비재 생산은 제한되고 그 결과는 엄청난 곤궁이다. (물건을 살 능력이 없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자본가는 생산을 줄이고, 이는 또 다시 가난한 이들이 물건을 사기 어렵게 만든다는 뜻: 번역자) 기술 진보는 노동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실업만 증가시키는 결과를 종종 낳는다. 자본가들의 경쟁과 연관된 이윤 동기야말로, 자본 축적과 활용의 불안정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심각한 경기 침체의 원흉이다. 무한 경쟁은 노동의 엄청난 낭비를 유발하며, 내가 위에서 언급한 개인들의 사회의식을 불구로 만든다.
개인을 불구로 만드는 것은 내가 보기에 자본주의의 최대 악이다. 이 악 때문에 우리의 교육체계 전반이 고통을 겪고 있다. 과장된 경쟁을 벌이는 태도가 학생들에게 주입됐고, 그래서 학생들은 미래 직업을 위한 성공을 숭배하게 됐다.
이런 악을 제거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는 교육체계를 동반한 이른바 사회주의 경제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런 경제에서는 생산수단을 사회 전체가 소유하며 계획된 방식으로 이를 활용한다. 생산을 사회의 필요에 맞추는 계획경제는 일감을 일할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분배할 것이고 모든 사람(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에게 생활을 보장할 것이다. 개인의 교육은, 현재 우리 사회의 힘과 성공을 칭송하는 대신에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신장하고 동료들에 대한 책임감을 자신 속에 심으려 시도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계획 경제가 아직은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식의 계획경제는 개인을 완전히 노예화함으로써도 달성할 수 있다. 사회주의를 달성하려면 아주 극도로 어려운 사회-정치적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 문제란, 정치, 경제적 힘의 광범한 중앙집중화를 고려할 때, 관료들이 모든 힘을 장악하고 자만해지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또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보호하고 이를 바탕으로 관료의 권력에 맞서는 민주적인 평형추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사회주의의 목표와 문제를 분명히 하는 것은 지금 이행의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자유롭고 허심탄회한 토론이 강력한 금기사항 아래 억압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기 때문에, 이 잡지의 창간은 공공에 대한 중요한 서비스라고 나는 생각한다. (번역 - 신기섭)
누가 고소득층인가
정부는 빨리 고소득층에 대한 대책을 세우도록하라.... 고소득층이야말 사회를 좀 먹는 암적 존재..
아니 대한민국은 자유시장경제. 그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자유, 우익 용사들이 앞장서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 변호사, 의사 같은 전문직은 말할것도 없고 정부가 진입 규제를 하는 통신, 화학, 운송, 에너지,금융 등이라든지 지하철,철도,전기, 방송 등과 같은 공공 부문에 대해 진입장벽 등 갖가지 규제를 철폐하든지 아님 그 공공성을 유지해야 한다면 그들의 임금이나 복지수준을 민간 수준으로 도로 끌어내려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 그들을 보호할 셈인가?
참고로 전문적인 지식을 요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의 고소득을 창출하는게 아무런 문제될게 없다고 주장하시는 변호사 의사같은 전문직 종사자 여러분들... 이제 그만 닥치고 계시세요. 그게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자유시장의 기본 원칙이 뭡니까? 직업 선택의 자유란게 뭡니까 하고 싶은 누구나 하면 되는것 아닙니까? 지식? 없음 배우면 되는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자격 제도를 통ㅎ 정원을 제한하는건 위헌 아닐런지요?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마치는건 결코 쉽지 않다'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나요?
그리고 정원제와 함께 인허가? 그런 것도 없어야 합니다. 최소한의 기본적 요건만 갖추면 누구나 그 시장에서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신뢰하세요. 시장은 냉정합니다. 택도 안되는 놈이 시장에서 설치지 못하게 정리하지요. 물론 시장이 못하는건 사법당국이 알아서 적절하게 나선다면....
그렇게 될때 고소득층? 양극화 문제 저절로 해결됩니다. 이 업종이 돈 잘 번다. 그러면 그쪽으로 달려갑니다. 수요와 공급 법칙을 믿으세요.
독일 녹색당과 브라질 노동자당의 경험 - 의회의 규율과 문화에 도전하다
서복경/ 국회도서관 입법정보연구관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이 한국 정치사에서 갖는 의미는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이 그 첫 번째라면, 외생 정당의 의회 진입이 두 번째 의미다. 진보정당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상이한 정치적 이념, 정책적 지향에 초점을 둔 접근이다. 외생 정당이란 정당의 엘리트와 지지기반이 의회 외부로부터 생성된 정당을 말한다. 오랫동안 의회활동을 함께 해왔던 정당들에게는 나름대로 공유되는 문화와 규율이 있다. 외생 정당의 의회 진입은 이러한 기존 의회의 규율과 문화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의미한다.
독일 의회의 엄숙주의를 파괴하다
이 두 측면을 모두 갖는, 비교적 최근의 대표적 사례로는 독일 녹색당과 브라질 노동자당을 들 수 있다. 두 정당은 모두 1980년대 초 처음 의회의원을 배출한 뒤 20여년 만에 집권정당이 됐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브라질 노동자당은 2002년 대통령을 배출했고 의회 1당이 됐으며, 녹색당은 사회민주당과의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하지만 두 정당이 의회에 진출하던 시점의 정치 상황과 지향하는 정치적 가치에는 차이가 있으며, 우리나라의 상황과도 많은 차이가 있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의 사례와 바로 연결짓는 데는 무리가 따르지만, 민주노동당이 어떤 변화를 부를 것인지를 가늠해보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다.
독일 녹색당은 분권화·직접민주주의·자결·이해당사자의 공공정책 결정 참여를 표방하며 다양한 환경운동단체, 생태민주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함께 만든 정당이다. 녹색당이 1983년 5.4%의 의석으로 원내에 진출했을 때 사회민주당을 포함한 기존 정당들은 독일 의회의 문화, 의정활동 방식, 새로운 의제의 등장이라는 세 측면에서 도전을 받아야만 했다.
문화적 도전이란 의복예절의 무시, 발언형식 파괴, 선전용 깃발의 회의장 반입 등 관행화된 문화에 대한 의도적 파괴를 말한다. 녹색당은 ‘독일 의회의 엄숙주의에 대한 도전’을 주요 의회 전략으로 택했다. 기존 정당들은 대중적 지지를 의식한 이벤트성 행사라는 비판을 가했지만 유권자들의 호응은 높았다.
또 녹색당은 원내정당의 집행위원회 구성에서 여성의원 비율을 높이고 양성평등 문제를 의회 내에서 공론화했다. 1983년 1차 집행위원회는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3 대 3이었으며 1984년 2차 집행위원회는 6명을 모두 여성으로 구성했다. 녹색당의 여성의원 우대정책은 원내 다른 정당 소속 여성의원들의 지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특히 사민당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 공개 회의석상에서 동료 남성의원들의 성차별적 발언이나 낙태·동성애 문제에 대한 보수적 태도를 공격함으로써 의회의 남성 중심성에 도전하기도 했다.
녹색당의 진입은 기존 정당들의 의정활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1987~90년까지 녹색당 의원들은 모두 1206건의 대정부 정책질의를 했는데, 이 수치는 당시 독일 의회 정책질의의 85%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또한 의원 수가 훨씬 많았던 기민당, 사민당과 거의 대등한 수준의 법률안을 발의함으로써 왕성한 활동력을 과시했다. 이런 노력은 기존 정당들의 더욱 적극적인 의정활동에 자극이 됐다.
의회에 상정되는 의제에서도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환경·여성 문제를 전면에 내걸었던 녹색당의 활동은 여론의 관심을 받았고, 기민당이나 사민당은 어떤 형태로든 이 문제의 대응책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 결과 녹색당이 제안한 법률안은 거의 통과되지 못했지만 기민당이나 사민당은 새로운 법률안이나 수정 법률안을 제기함으로써 관련 입법의 수가 증가하게 됐다.
그러나 녹색당의 원내 활동이 긍정적 효과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1991년 녹색당은 한 석의 하원 의석도 얻지 못했는데, 1983~90년까지 원내 활동이 정체성의 혼란, 내부 분파의 대립 격화를 야기했던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 녹색당은 두 측면에서 문제에 봉착했다. 하나는 의원단의 자율성이 증가하면서 중앙당과 당원의 통제가 어려워진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민당과의 협력에 대한 당내 갈등이었다. 녹색당의 정체성에 맞는 다양한 입법안을 발의했지만 군소정당의 한계로 통과에 이르지 못하자 사민당과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현실주의자들이 늘어났다. 현실적 성과보다는 원칙의 고수를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과 현실주의자들의 갈등은 1988~89년에 이르면 언론을 통한 공개적 대립으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1994년 다시 49석의 의석을 얻은 녹색당 내에서는 현실주의 노선이 힘을 얻었고 2002년 선거 뒤 사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독일의 진보적 유권자들 내에서는 현재 녹색당에 대해 원칙을 포기한 ‘제2의 자유민주당’이라는 비판적 평가에서부터 수권능력을 갖는 정당으로의 변모라는 긍정적 평가가 폭넓게 존재한다. 녹색당의 실험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다.
브라질 노동자당은 1970년대 말 새롭게 등장한 노동운동 조류의 폭넓은 지지를 기반으로 1979년 탄생했다. 그러나 1982년 선거의 결과는 참담했다. 군부가 여전히 집권하고 있던 조건에서 민주화 지지 유권자들의 표는 제1야당인 민주운동당에 집중됐다. 당시 노동자당의 주류였던 노조 지도자들은 현 대통령인 룰라 디 실바를 포함해 대거 현장으로 되돌아갔다.
노동자당의 재기는 1985년 시작된 대통령 직선제 쟁취운동에서부터였다. 1988년 시장선거에서 노동자당은 대도시에서 36명의 시장이 당선되는 것을 비롯해 1천명이 넘는 시의원을 배출했고, 그 여세를 몰아 1989년 룰라는 대통령에 출마했다. 결선투표까지 가서 근소한 표차로 패배하기는 했지만, 노동자당은 점차 연방의회와 지방자치체에서 영향력을 확장해갔다.
대중참여의 대표적 모델, 참여예산제도
노동자당의 의회활동 초점은 참여를 통한 의회활동의 모델을 창출하고 노동자·농민·소수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대중참여 의회정치의 대표 모델로 꼽히는 것이 참여예산제도다. 참여예산제는 부족한 예산을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를 주민의 대표로 구성한 위원회에 묻고 그 의견을 반영하는 제도로, 현재는 다른 정당들도 도입한 성공적인 제도로 꼽힌다. 참여예산제가 가장 모범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포르투알레그레에서는 1989~2000년에 기본 위생시설을 갖춘 가구가 53%에서 85%로 증가했으며 유아사망률이 40%가 감소하는 등의 성과를 낳았다. 또한 정당조직에서 전당대회 이전에 예비회의와 누클레오 제도를 도입해 당원에 의한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냄으로써 기존 정당들과 차별화를 꾀했다.
노동자당의 성장은 자발적 당원 기반을 갖지 못하고 부패했던 기존 정당, 특히 민주화운동 정당이며 집권당이던 민주운동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실망에 기인한 바 크다. 기존 정당에 대한 실망은 당원들의 적극적 참여와 투명성을 보여주었던 노동자당을 기존 정당들과 차별화해주었던 것이다.
<출처> 한겨레21
나는 소망한다.
녹색당과 사민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한 독일의 꿈을 이 땅에서 이루자고.... 녹색당이야말로 풀뿌리 생활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하는바이다. 생계를 위한 직업을 가지면서 각자 녹색당원으로서 하나의 업무를 위해 봉사를 한다면.....멋지지 않을까....하루의 대부분을 노동을 하는데 보낸다는건... 철저하게 자본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게 아닌가 싶다. 그런건 끔찍....
녹색당 웰빙 붐 타고 80여개국서 '뿌리'
독일·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호주 등에선 확고한 '제3당'…아시아선 의회 진출 못해
17대 총선 결과 민주노동당이 국회에 진출할 수 있게 된 것을 계기로 이제 한국에서도 녹색당에 대한 관심이 과거보다 조금은 높아진 것 같다. 한국 정치에서 민주노동당과 같은 노동자와 도시서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책정당이 국회에 진출하게 됨에 따라 녹색정치와 대안정치를 추구하는 사회집단들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주장과 가치를 대변하고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정당을 창당하여 의회에 진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 요시카 피셔 독일 외무장관. 피셔는 녹색당 소속으로 지방의회를 거쳐 중앙정계에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한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아직 가시적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지만 의회민주주의의 전통이 깊은 서구에서는 녹색당이 이미 1980년대부터 의회에 진출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녹색당은 세계 80여개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특히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독일,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호주, 뉴질랜드 등지에서는 중앙의회에 진출하여 연정(聯政)을 통한 집권여당의 경험이 있거나 혹은 제3당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다. 현재는 독일의 녹색당만이 1998년 이후 사민당의 연정 파트너가 되어 집권여당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비록 중앙정치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서구 녹색당들이 지방의회에 진출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창당 초기였던 1970~1980년대의 녹색당은 ‘반(反)정당’ ‘운동정당’ ‘정당 아닌 정당’ ‘대안정당’ 등의 탈규범적이고 투쟁적인 성격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녹색당은 일반 유권자들에게 기성 정당의 하나로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는 녹색당이 실험단계를 거쳐 정책정당으로 안착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제도화된 서구의 녹색당과 달리 개발도상국에서의 녹색당은 아직 환경운동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아시아에서의 녹색당 활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뒤처져 있다. 경제대국이며 민주주의가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비교적 뿌리를 내린 일본에서도 전국 규모의 녹색당 활동은 없으며, 단지 지방 정치집단들 중의 일부가 녹색당을 창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공식적으로 아시아에서는 녹색당 정치인이 (지방)의회에 진출하여 활동하고 있는 국가는 아직 없다.
이같이 녹색당이 각기 상이한 발전단계에 도달해 있는 것은 지역이나 국가에 따라 민주화의 정도와 시민사회 발전, 시민의식의 성숙, 경제 발전에 따른 계층 분화와 중산층 확대, 제도적 기반과 사회 분위기, 그리고 자체적인 자원 동원 능력의 차이에 기인한다.
68학생운동 등 사회변화 의식이 밑바탕
서구에서 녹색당이 창당되어 사회적ㆍ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된 데에는 1968년의 학생운동과 1970년대의 환경운동ㆍ평화운동이 중심이 되는 신(新)사회운동에 의해 기존의 보수적인 사회질서를 해체시키거나 변화시킨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다는 배경이 있다.
녹색당은 바로 이 신사회운동을 주도했던 일부 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창당되었다. 이와 함께 민주적인 사회제도도 녹색정치의 확산에 전제조건이 되고 있다. 신사회운동의 주도 집단들이 운동이라는 좁은 공간을 벗어나 사회여론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표현·결사의 자유, 공정한 비밀ㆍ보통선거를 통한 정권교체 등의 시민권과 정당들의 책임정치에 의한 대의제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만 하는데, 당시 서구에서는 이러한 제도가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끝으로 성숙한 시민사회적 기반이 구축되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다양성 존중, 합의와 대화, 양보와 이해 등이 기본적 가치로 받아들여지는 시민사회가 존재할 수 있어야만 녹색당과 같은 대안정당의 출현이 가능한 것이다. 특정한 지배적 가치에 의해 독점되는 것이 아닌 다양한 가치들이 공존하고 여론화되는 공론(公論)의 마당이 곧 시민사회이며, 녹색 가치도 다른 가치들과 공존하고 경쟁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서구의 시민사회는 바로 이러한 다양성을 용인, 공존을 보장해 주었다. 단일 담론에 의해 독점되고, 다른 담론들을 폭력적·억압적 방법으로 탄압하는 사회에서 녹색담론의 공론화 가능성은 극히 희박해진다.
녹색당 지지자나 동조자들은 현재 인류의 당면 과제가 환경과 생태계의 위기 극복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지구 온난화와 자원의 독점, 그리고 종(種)의 소멸 등에 의해 심각한 환경 재앙이 발생할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가장 잘 이해하고 그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녹색당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환경·생태계 위기극복이 당면 과제”
녹색당은 원전 폐쇄와 재생에너지 실용화, 평화 정착과 군축,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사회적 약자의 이익 대변, 지속가능한 발전을 통한 자원순환형 사회 건설, 참여민주주의 강화, 기상이변과 같은 지구적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개도국 지원 강화 등에 대한 구체적 정책들을 제시하고 있다. 녹색당이 의정활동을 하는 국가에서는 바람과 태양을 이용한 재생에너지ㆍ무공해의 대중교통ㆍ복지ㆍ참여민주주의ㆍ유기농ㆍ개발도상국 지원 등이 실제로 강화ㆍ확대되고 있는 반면, 녹색당이 없거나 그 영향력이 매우 취약한 국가에서는 이런 정책들이 없거나 유명무실한 상태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화석연료 고갈로 인한 가격 상승, 세계화로 인한 경제 불안, 자동화와 정보화로 인한 실업 증대,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 에이즈와 사스와 같은 전염병 확산, 저발전에 기인한 빈곤층 확대, 식량 부족이 야기하는 극빈층 확산, 선진국으로의 난민 유입 급증 등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21세기를 거치는 동안 훨씬 심화되고 악화된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충분한 준비가 있어야만 인류의 미래가 보장될 수 있을 것이다.
녹색당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예측 가능한 미래를 대비하여 현명하고도 실효성 있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 유권자들로부터 지속적인 지지를 얻게 될 것이며 21세기에도 계속해서 확대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미 선진국에서 녹색당의 사회적ㆍ정치적 영향력이 확대되고 유권자들의 지지율이 상승하는 것도 이런 문제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감수성이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주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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