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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4 -- 수원화성 답사

답사(踏査)의 답자는 밟을 답, 사자는 찾을 사입니다.

다시말해 발로 밟아서 찾아본다는 말이지요.

 

둘레가 약 6Km인 수원화성을 답사하고 왔습니다.

오르막 내리막길을 지나 시장통을 거쳐 토담길을 걷는 답사길이 만만한 길은 아니더군요.

 

수원화성(華城)

총길이 : 5,744m

높이 : 4.9-6.2m

면적 : 188,048㎡(지금의 행정구역으로 가늠해보니 서울의 작은 동만한 면적입니다.)

건축시기 : 1794. 1 - 1796. 10 (34개월)

그리고 : 사적 제3호 (1963년 지정),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1997년)

 

수원화성이 지어지기 전에 조선에서는 외척세력의 득세와 정쟁의 와중에

영조(재위기간 1724-1776)는 왕세자인 둘째아들 사도세자(=장헌세자=장조)를

뒤주에 가둬 죽이고 말았다.(1762)

 

부친(사도세자)에 대한 애절한 정을 갖고 즉위한 정조(1776-1800)는 실추된 왕권과

어머니(혜경궁 홍씨=혜빈)에게 효도를 하고자 먼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고

화산부근의 읍치를 지금의 수원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신도시를 건설하게 됩니다.

 

당시에 화산부근의 원주민을 이주시키면서 세제와 주택에 대한 각종 혜택을 주고 살 수

있게끔 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요즘의 신도시건설과 비교해 봅니다.

1990년대에 수도권에 벼락치기로 건설된 신도시들은 수도권 주택가격의 안정과 그에 따른

정권 안정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시행했으며 이로 인해 산본, 평촌의 아파트촌이 생겨나고

분당, 일산의 신도시가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이런 막개발로 원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주택은 투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200여년전에는 원주민들에게 보상과 더불어 신도시에 살 수 있도록 배려했는데

지금의 신도시 개발의 건설행정과 비교됩니다.

 

 #1

 

#2

 

#3

 

#4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 속이 빈 망루를 의미함.

1. 공심돈은 화성에서만 보이는 특이한 시설물 화성에는 현재 동북공심돈(소라각)과

서북공심돈 2개만 남아 있다.

2. 일종의 망루와 같은 것으로 4면을 벽체로 하고 벽체 내부는 3층으로 사다리를 통해

오르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3. 3층에는 망루를 세워 4면에 판문을 설치하였다.

4. 성벽과 망루에 구멍을 뚫어 백자총, 불량기 등의 화포를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5. 다른 성곽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설비로 특이하고 화서문과 잘 어울려 화성의 특이한

경관을 자아낸다.

6. 동북공심돈이 성곽 안쪽에 배치된 반면 서북공심돈은 성곽 바깥쪽에 배치되었다.

치성을 만들고 그 위에 검정 전돌로 쌓은 3층짜리 건물이다.

7. 만약 적들이 화서문을 통해 진격하기를 원한다면 제일 먼저 서북공심돈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묘책이 있어야 할 것인데,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5 서포루

서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중 화성장대와 서일치 사이 서쪽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포루는 치성과 같이 성벽을 돌출시켜 검정 벽돌로 쌓았으며 나무 마루판을 이용 3층으로

구획하였다.

벽면에 포혈을 내어 화포를 두고 위에는 여담(담장)을 둘러 적을 위와 아래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근처의 서암문(암문 : 성벽에 누(樓) 없이 만들어 놓은 문. 적의 눈에 띄지 아니하는 곳에

만들어서 평소에는 돌로 막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에 비상구로 사용)이 적에게 발각되었을때

대비하여 설치하였다.

 

 

#6 화서문의 옹성입니다.

옹성은 성문이 적군에게 공격당하기 쉽기 때문에 성문 외부에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이중의

성벽을 쌓은 것입니다. 모양이 반으로 쪼갠 항아리와 같아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7 앞쪽의 건축물이 서노대이며 쇠뇌라는 큰 활을 쏘던 방어시설입니다.

또한 멀리서 잘 보이기에 깃발을 흔들어 군사명령을 내리기도 했다고합니다.

뒤쪽 기와건물이 서장대(=화성장대)입니다.

 

서장대는 팔달산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지휘소와 주위를 감시하는 기능을

했다고 합니다.

199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복원했지만 2006년 5월에 만취자의 방화로 소실되어 복원공사가

진행중입니다.

서장대에 올라서 성 안팎을 봐야 화성을 제대로 보았다고 말 할 수 있다고 하는데 공사중이라

서노대에 올라보았습니다.

 

 

#8 서노대에서 본 풍경. 오른쪽 아래에 장안문이 보입니다.

 

 

#9

 

서남암문

 

 

#10 서남암문 앞쪽으로 펼쳐진 용도(甬道)

앞쪽으로 긴 통로를 지나면 화양루가 있는데 거기까지의 지세가 높아서 만약 이곳을 적에게

내주게 되면 성안을 공격당할 수도 있기에 성벽을 쌓고 암문을 만든것이다.

 

 

#11 동암문

 

 

#12 서암문

 

 

#13

 

요즘 사람들이 성벽을 따라 걷는 길을 친절하게 시멘트와 돌로 잘 포장해 두었기에 잠시

옛날을 생각하며 따로 흙길을 걸어보았습니다.

 

이런 흙길은 그냥두면 안되나요?

 

 

 

 

#14 성벽을 걷다보면 요즘 돌과 시멘트가 범벅이 된 성벽이 대부분이였습니다.

아마 상당부분 파괴된 것을 보수한것으로 보이는데...

바로 여기 옛것과 새것이 공존해 있습니다.

 

 

#15 수원행궁 앞에서...

 

 

#16 수원행궁의 축소모형입니다.

 

 

#17

 

 

 

#18 거중기입니다.

이 기계로 무거운 돌을 다루어 화성을 건축했다고 합니다.

원래 10년 계획의 공사기간을 3년으로 줄이는데 한 몫했다고 합니다.

 

 

#19

 

 

#20

 

600년 이상된 느티나무이지만 화재로 훼손되었다가 나무살리기로 보호중입니다.

 

 

#21

 

 

#22 왼쪽의 혜경궁 홍씨의 인형입니다.

 

 

#23 #24

 

 

 

 

#25 화성행궁

행궁(行宮)의 이름이 재미있어 자료를 뒤져보니...

임금이 피서, 피한, 요양을 위해 짓기도 했지만 통치력의 효과적인 파급을 위해 지방의 요지에

행궁을 지어 돌아가면서 머물기도 하였습니다. 중국 한나라때에는 행궁이 300여 곳에 이르기도

 하였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4-5개소에 지었다고 합니다.

정조는 여러가지 목적중의 하나로 혜경궁 홍씨를 위해 행궁을 짓고 어머니가 거쳐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26 뒤주 들어가기 체험!!

신라면박스 3개정도 쌓을 수 있는 공간을 가진 뒤주.

 

이것을 보면서....

아버지의 아픈기억이 서려있는 뒤주가 어머니가 머무렀던 행궁에서 체험행사의 하나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하에 있는 정조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27 팔달문

 

 

#28 팔달문

 

 

#29 성벽 바깥쪽입니다. 높이가 상당히 차이가 납니다.

 

 

#30

 

 

#31 봉돈.

멀리 서해에서 까지 봉화신호를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200여년전의 건축물이지만 곡선과 건축술의 예술적 감각이 요즘 건축물과 차이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32 성벽 안쪽입니다.

멀리 창룡문이 보입니다. 그리고 넓고 완만한 경사를 가진 평평한 대지가 있습니다.

 

 

#33 창룡문에 있는 옹성입니다.

옹성의 아래쪽에 쌓인 돌 색깔이 위쪽 돌과 다릅니다. 아마 전쟁통에 파괴된걸 보수한 걸로

보이는데...

 

 

#34 동북노대

 

 

 

#35

 

동장대에 설치된 불랑기 : 휴대용화포입니다.

길이 : 72cm

구경 : 9.5cm

 

 

#36 성을 지키는 무기 : 투석(=비석) 낯설지 않은 아주 오래된 무기이지요.

혹시 하나씩 가져가면 어쩌나 싶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움직이지 않게 투명접착제로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37 홍이포

길이 : 215cm

구경 : 10cm

무게 : 1800kg

사정거리 : 700m

 

 

#38 아래쪽에 용연(연못)과 북수문(=화홍문)이 보입니다.

수원성을 흐르는 물은 용연에서 물이 한 번 휘돌아 나와 북수문을 거쳐 남수문을 지나 빠져

나가게 되어있다.

북수문에는 물속으로 침입하는 적을 막고자 물길에 쇠창살을 만들었습니다.

 

 

 

#39 동북포루

 

 

#40 동장대에 있는 기둥의 밑부분입니다.

200여년전 처음 건축할 때 만든것인지 한국전쟁때 파괴되고나서 30여년전(1975-1979)에

보수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새것처럼 뺀질뺀질한 기둥보다는 훨씬 더 마음에 와닿습니다.

 

 

#41 장안문측면을 찍은 사진입니다.

 

 

#42 장안문

 

 

#43 남포루에서 계단을 내려오다 찍은 수원 시내입니다.

오른쪽에 팔달문이 보이고 왼쪽에 팔달문보다 큰 고딕양식의 교회가 보입니다.

 

저렇게 큰 교회건물을 보면...

몸은 크지만 뇌용량이 작아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채 멸종한 공룡이 생각나는지...

 

 

 

#44

 

순시(巡視)와 영(令)의 깃발이 동서남북에 4가지 색깔로 나부끼고 있습니다.

군사지역이였음을 뜻하는 표시로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군사지역이였지만 지금은 어린이도 뛰어놀고 어른들은 마실나오는 곳입니다.

 

잘 보전해서 후대에 물려주어야할 우리의 유산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사람들 눈높이로 성벽에 90프로 넘게 시멘트로 쳐발라서 보수해둔 모습보다는

부서진 담벼닥 그대로를 역사의 흔적으로 보는것이 더 잘 보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간절하게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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