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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3 -- 기다림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광화문에 있는 예술영화 전용 상영관에서 보기로 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술을
먹거나 영화보자고 하면 바쁜 일 없으면 잘 나온다.

그녀는 술도 잘 먹는다. 그것도 비싼 술보다 싼 술을 잘 먹는다.
밤새 술 먹고 다음날 아침 해장국에 소주를 먹어도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약속시간 5분전에 도착했다. 티켓박스 바로 앞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둘러보니 아직 안 온 것 같다.
영화표를 사고 등받이 없는 긴 의자에 앉아서 잠시 기다렸다.
예술영화 전용 상영관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다. 붐비는 게
싫은 나는 이런 한산함이 좋아 여기서 가끔 영화를 본다.

기다리기 심심해서 가지고 다니는 책을 펼쳐 들었다. 기왕이면
책을 보면서 기다리면 ‘좀 있어’보일 것 같은 얄팍한 계산이 선다.
한쪽으로 다리를 꼬고 무릎위에 책을 올려놓고 본다.

‘몇 줄이나 읽었을까...’
계단을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청각이 예민해진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그녀가 아니다. 한 3년 그녀를 만나고 있지만 구두 신은 걸
한 번도 못 봤다. 늘 헐렁한 운동화 아니면 스포츠 샌들을 신고 온다.

또 누가 오는 발자국 소리가 난다.
“스쓱 스쓱”
바닥엔 카페트가 깔려있어 가까이 오면 발자국 소리가 탁해 진다.
고개를 숙이고 눈의 초점은 책속 문자에 맞춰보지만
시야가 넓어진다. 넓어진 시야에 치마를 입은 여자 다리가 지나간다.
그녀가 아니다. 사적인 자리는 물론이거니와 공적인 자리에서도
치마 입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에이...책이나 보자.”
몇 번 읽었던 곳을 찾아 다시 읽었다.
탁한 발자국 소리가 또다시 가까이 온다. 일부러
고개를 더 숙이고 열중해서 책을 본다. 발자국 소리는
오른쪽 귀에서 들리다 내 앞을 지나 왼쪽 귀로 멀어진다.
이번에도 그녀가 아니다.

내 옆 빈자리에 사람들이 앉는다.
‘그녀가 오면 앉을 자리가 없는데...오면 바로 일어나야지’
시계를 보았다. 7시 20분.
약속시간이 20분이나 지났다.
‘웬일이지? 무슨 일 있나?’
가끔 늦을 때도 있는데 이렇게 늦기는 처음이다.
혹시 몰라 손전화를 꺼내 본다. 연락 온 건 없다.
그녀에겐 전화를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손전화가 없다.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급한 사람들이 알아서
사무실로 전화한다고 한다.

그녀는 시계도 없다. 대충 시간대 까지는 알고 있지만 궁금하면
손목시계까지 차고 있는 내게 물어본다. 그래도 약속시간이
늦었다는 건 알 텐데...나도 답답하지만 그녀도 미안해 할 꺼다.

영화 보기 전에 저녁을 먹기로 해서 시간 여유는 있지만
그래도 좀 불안해 진다.
‘어디쯤 왔을까?’
벌써 7시 30분을 넘어선다.

그때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창피했지만 그냥 나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배낭을 메고 성큼성큼 선머슴같이 걸어온다.
미안하다며 차가 밀려서 늦었다고 한다.
시간이 빠듯했지만 저녁 먼저 먹자며 밖으로 나왔다.
영화를 보고 우리는 언제나처럼 술집으로 향했다.
빈대떡 집에서 막걸리를 먹으며 침 튀기며 서로 영화평을 했다.

그날 그녀는 헤어지기 전에 맑은 국물이 담긴 하얀 비닐 봉다리를
내게 주었다. 직원식당의 솜씨 좋은 요리사가 멸치를 넣고
우려낸 잔치국수 국물이라고 한다.
역시...그녀다운 선물이다.
그치만 이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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