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서프펌] 잊혀진 문명을 찾아서.. 열라 웃김

IF의 역사 5

잊혀진 문명을 찾아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문화의 형태가 유사하게 나타나면 많은 이들은 두 문화 간 연관성을 유추하는 경우가 있다.


돌하루방과 이스터섬의 석상, 이집트 피라밋과 남미 피라밋, 고인돌과 스톤핸지, 태국의 라후족 등이 그런 경우다. 이처럼 한반도에서도 그리스 로마시대와 연관성을 유추할만한 많은 유적들이 발견되면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유적이 처음 발견될 당시 학자들은 기존 한반도 문화와는 너무 다르다 하여 이 문화를 이룬 국가를 ‘딴나라’라 명명하였다. 발굴현장 제6지층에서 ‘시발로마(始發路馬)’라고 적힌 표석이 발견되면서 이것을 근거로 ‘로마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뜻’이라고 속단하는 이도 있고, 몇 해 전 한 방송기자가 최모 대표의 뒤통수에 대고 했던 욕설과 음운이 비슷하다고 유추하는 이도 있으나 극소수의 주장일 뿐 정설은 아니다.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딴나라의 ‘알바’라고 불리는 부랑아 집단이 토론장소마다 출몰하여 연신 ‘시발로마’를 외치고 다녔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단지 부랑아들의 용어정도로만 해석되고 있다.


이 나라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국가적 면모를 갖춘 것은 다까끼아누스 대제 때로 추정된다. 다까끼아누스의 명칭과 출토된 일본도(刀)를 근거로 일본학계에서 ‘일본도래설’을 주장하고 있어 또 한 번 역사분쟁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통치체제는 로마의 원로원과 유사한 것이 있어 ‘내놔라당’이라 하였다. 발굴된 점토판 기록에 로마의 포에니전쟁 상대인 ‘카르타고’ 와 유사한 명칭이 나오는데 “내놔라당이 ‘카를타고’ 재물을 걷으러 다녔다”고 적혀 있다.


일부 학자들은 ‘카를타고’의 ‘카(car)’를 현대적 의미의 ‘차(車)’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이를 뒷받침 할 만한 근거로는 트로이목마와 유사한 ‘또라이목마’라는 것이 있었는데 전쟁에 쓰였던 트로이목마와는 달리 재물을 운반하는데 쓰인 일종의 운반차량이었다고 한다.


법제는 비교적 잘 마련되어 있었으나 대부분의 성문법은 무시되고 「간섭헌법」과 「국보법」만을 중시했다. 이 두 법의 내용은 전하지 않으나 「간섭헌법」은 여러 시책이나 판단을 간섭, 훼방하는 역할을 한 듯하고, 「국보법」은 국가의 보물이나 문화재를 관리하던 법 정도로 유추될 뿐이다. 군역을 회피하는 자가 너무 많아서 군사력은 매우 약했다.


로마의 검투사들처럼 이들도 잔인한 결투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방패를 들어야 할 손엔 뻘건 물감통을, 창이나 검을 들어야 할 손에는 페인트용 ‘롤러 붓’을 들고 결투에 임했다. 따라서 이들을 로마 검투사와 구분지어 ‘칠투사’라고 하였다.


경기방식은 로마시대의 그것처럼 잔혹하진 않았다. 상대의 안면에 먼저 뻘건칠을 하면 승리하게 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뻘건칠을 당한 자는 어디론가 끌려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다가 사라지곤 했다.


심형래의 오래 전 코메디 「변방의 북소리」에서처럼 어느 곳에나 꼭 튀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남들 빨간통 들고 나타날 때 느닷없이 ‘오징어’를 들고 나타난 자가 있었으니 그가 태화니우스다.


오징어 다루는 솜씨가 태극권의 부채술을 능가하였는데 특히 경비서던 군졸들이 타겟이 되었다. 오징어가 식용 外의 용도, 특히 무기로 활용된 예는 세계사적으로 유일할 것이다.


후대의 칠투사 중 출중한 뻘건칠 기교를 가진 자가 있었으니, 그네디에이터(gnediater)라 불렸다. 로마병정의 투구를 빌려 쓴 듯한 높은 두 발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 엠 그네디에이터” 라는 말만 하고 말 수가 매우 적었다.


혹자는 그의 이런 모습이 냉혹한 전사의 모습이라 하였고, 혹자는 원래 구사할 수 있는 단어가 몇 개 안 되서 그렇다고 했다.


그네디에이터 황제 즉위 후에 멀쩡한 황궁이 있음에도 천막을 치고 ‘궁상’을 떨며 자신들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며 노래를 불렀는데 이때 쓰인 음계가 ‘궁상각치우’였다.



밥을 놔두고 쌀드물만 퍼먹으며 누워있던 뱅랼리우스의 궁상맞은 행각을 이미 봐온터라 그네디에이터의 궁상을 그리 의아해 하진 않았다.


그네디에이터에겐 남다른 특기가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가출(家出)’이다. 회충리우스 재위 시절 가출하여 몇 달을 떠돌더니, 몇 년 후 ‘내놔라당’ 전체를 끌고나가 며칠을 밖에서 배회하게 된다. 그 사유에 대해선 밝혀지지 않았다.


그 시대 가출 청소년들에게 ‘집 떠나면 고생이다’ 라는 교훈을 전하기 위한 교육차원의 행위였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일부 넋떨어진 학자들도 있다.


그들 칠투사들에게도 신라화랑의 세속오계와 유사한 계율이 있었다. 그러나 몇 개만이 현존한다.



* 부자유친(富者有親) - 부자(재벌)들과는 친함이 있어야 한다

* 임전무퇴(臨錢無退) - 돈 앞에서는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




등, 대부분 돈과 관련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돈을 환장하도록 좋아한 듯하다.


우리의 국회 본회의장과 유사한 형태의 원형극장이 발굴되며 관련 기록도 함께 발견되었다. 그 기록에 따르면 칠투사 중 연극에 뛰어난 자도 있었으니 그중 대표적인 이가 용가비누스였다.


그의 연기 중 백미는 쓰러지는 연기인데 이 대목에서 관객들은 창자가 끊어지도록 웃었다고 한다. 용가비누스 또한 용맹한 칠투사로 이름을 떨쳤는데 그 일화가 전해진다.


경기를 마친 용가비누스가 목 마름에 녹차를 벌컥거리며 완샷했는데 한 꼬붕이 만류하며 “형님 그건 녹차가 아니고 쥐가 먹고 죽은 오염된 물입니다”라고 하자 용가비누스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굳은 표정으로 “다들 나가 있어라”하고 그 꼬붕을 초죽음으로 만든 후 내지른 말이


“내가 녹차라고 하면 녹차야. 내… 내말에 토… 토… 토다는 새끼는 전부 빠… 빠… 빨갱이야!!”


이 일화는 당대 최고 칠투사로써의 자존심과 기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시대 유명 철학자로는 ‘얼간이좆선 학파’의 ‘갑쬐스토텔레스’가 있다. 그가 주창한 ‘주석궁돌진 이론’, ‘쿠테타권장 이론’ 등은 딴나라 사상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발견되는 방대한 기록에 비추어 민속악(樂)은 상당히 발달 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의 판소리와 유사한 형태의 ‘빨갱이 타령’이 그것이다. 그 중 한 대목을 들어보자. 문어대갈리우스 시대에 빨갱이(?)를 고문하며 부르던 노래이다.


“〔전략〕만일 니가 아니 불면 밤을 새워 조사 끝에 되는 대로 잡아다가 난장형문에 주릿대 방망이 마줏대 망태거리 한 춤 추면 굵은 뼈 부러지고 잔뼈 어시러져 얼맹이 쳇궁기 진가루새듯 그저 솰솰샐 이니 그걸 보는 니 마음에 아니 쫄고 베기겠나 내가 이리 권하기는 위초요 비위조라 너 위허여서 헌 말인디 끝끝내 고집허니 불테면 불고 아니불면 뒈진다~~ 〔후략〕”


기라성 같은 ‘빨갱이 타령’ 명창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 면면이 기록으로 전해진다.


〈주사파 타령〉의 바콩스, 〈홍위병 타령〉의 이문냘레스, 〈이중대 타령〉의 용가비누스, 〈정체성 타령〉의 그네디에이터. 특히 횽근리우스는 5시간 완창동안 관객과 함께 호흡하여 공연이 끝나면 관객모두를 빨갱이로 만들 수 있는 재주를 지녔다고 한다.


재야 빨갱이 타령계의 거목 갑쬐스토텔레스가 〈주석궁 타령〉을 열창할 때면, 신해쉭리우스, 박촨셩리우스 등의 열혈 꼴통 팬들이 흥에 겨운 나머지 단상위로 뛰어올라 스스로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생 지랄들을 해대서 공연장이 개판되기 일쑤였다 한다.


학자들 일각에서는 이 ‘빨갱이 타령’을 유네스코에 ‘세계저질문화유산’으로 등록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으나, ‘국제적 망신’이라는 의견이 우세하여 좌절되었다.


이 정체불명의 문명이 언제 생겼으며, 어디로부터 왔으며, 언제 소멸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궁 속이다. 한반도 전통문화와의 연관성 또한 또렷이 나타난 것이 없어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시대나 문명을 옳고 그름의 기준에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생명이든 문명이든 발전적 진화욕구가 내재되어 있다. 이에 적응치 못하고 퇴보하거나 머무르려 한다면 소멸만이 기다릴 뿐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망했다.




¢(.. *)




ⓒ 역전다방김양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