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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4/07/18

2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07/18
    모기
    free-vahn
  2. 2004/07/18
    봄의 바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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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4/07/18
    왜 기독교는 헤비메틀을 싫어하는가?
    free-vahn
  4. 2004/07/18
    자유로 부터의 도피
    free-vahn
  5. 2004/07/18
    태지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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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4/07/18
    Rock과 Hip Hop은 다르지 않다
    free-vahn

모기

저의 집은 우이동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제 방은 반 지하실 방인데요.. 올해들면서 부터 지하세계로 쫓겨났습니다.

제가 방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주변에 산이 있다보니 환영치 않는 동숙자들과 같이 생활하게 됐는데요...
서울에 있는 집 답지 않게 유난히 제 방엔 곤충들이 많습니다. 돈벌레, 귀뚜라미, 거미 그리고 이름을 모르는 몇 종.... 이렇게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

사실 이들 보다 제가 방에 있는 시간이 적으니 어떻게 보면 이들이 주인이고 제가 손님인 격이 되는데요...

거창한 이유는 없지만 이유없이 곤충을 죽이는게 싫어서 여태껏 살생없이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큰 거미의 경우는 잡아서 추방시키지만...

근데 여름들어 다른 종족이 들어왔는데요...
모깁니다.. 사실은 윤회가 있다면 내생엔 모기로 태어나고 싶었습니다.
포식의 순간이 젤 위험에 노출된 순간인 이들의 스릴있는 생태가 권태로움에 실달렸던 제게 동경이었다면 억지일까요..??

암튼 요새 모기때문에 생태계의 균형을 깨고 있습니다.
집을 나서기전 분무식 살충제를 남발하고 집에 돌아와 죽어있는 곤충들을 보면 묘한 죄책감마저 듭니다.. (그렇다고 수십마리의 곤충과 동숙하는건 아닙니다... ^^)
한편으론 번식을 위해 남의 피를 빨아야 하는 모기의 생리가 불쌍하기까지 하구요...

더러 살다보면 아니 살기위해 악역을 맡아야 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경우는 미필적 고의로 가해자가 될 경우도 있구요... 또 묵시적인 악한이 될 때도 있습니다....

모기를 죽이며.. 좀 더 세련된 악한이 되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정치가를 욕하는 이유는 좀 더 완벽한 거짓말을 하지 않아서"라는 까뮈가 생각나는 장면입니다...
아니면 악한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영악해져야 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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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한 모기 박멸법 없을까요 - 이외수

오늘 춘천은 올들어 가장 기온이 높은 날씨였다.
벌써부터 모기가 방안에 침투해서 손등이며 등판에 빨대를 꽂기 시작한다.
살충제를 뿌리거나 모기향을 피우자니 목감기가 악화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고, 마냥 앉아서 피를 빨리고 있자니 갈수록 짜증이 고조된다. 모기들은 왜 다른 동물의 피를 빨아 먹으면서 종족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을 진화 시켰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나는 다른 곤충들을 죽이게 되면 죄책감을 느끼지만 모기를 죽일 때는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설마 인간들에게 남의 피를 빨면서 사는 놈들은 맞아 죽어도 싸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 그런 식으로 자신들을 진화시키지는 않았겠지. 모기가 눈에 띄는 대로 세차게 손뼉을 마주쳐 보지만 한놈도 걸려들지 않는다. 한쪽 눈이 기능을 상실하고부터 헛손질을 일삼는 일이 많아졌다. 나는 그만 수타식 모기사냥을 포기해 버린다. 그래, 빨아 먹고 싶은 대로 빨아 먹어라. 니들도 배 부르면 자빠져 자겠지. 짜증을 가라앉히고 비디오 삼매경에나 빠져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긁적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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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바람에..

예비군 훈련 기간입니다. 날씨의 변화에 상당히 민감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꽤 날씨란 녀석에게 노출되지 않고 살았네요...

오늘 낮, 도로변에 앉아있었습니다. 자동차의 엔진소리 같은게 들려 고개를 돌렸는데 차가 오지 않고 있습니다. 소리의 주인은 지난 겨울 집요하게 나뭇가지에 매달리다 이제 봄의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들이었습니다..

'아직도 떨어지지 않은 낙엽(?)이 있구나...'
'근데 그 겨우내 잘 게기다가 왜 이제 떨어지지..??'

낙엽이 떨어졌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봄에 다시 자라날 다음 세대의 나뭇잎 때문이겠죠...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뭇잎 조차 자신이 있을 때와 떠날 때를 아는데 ... 사람이란...'

고호라던가 커트 코베인, 짐 모리슨이 동경하던 '자유'라는 것에 다시 생각해봅니다.
궁극의 '자유'란 '자연'스러운게 아닐까..?? 하는 생각..
거대한 섭리에 거스리지 않는 것이란 생각...
'왜 인간만 부자연스러운 존재로 전락해 버렸을까..??'

"잡배에게 칼을 주면 난장질을 하고 무사에게 칼을 주면 칼집에 넣는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 '시점'을 알기 위해 얼마나 더 공부를 해야할까..?? - 비록 공부를 안하고 있지만... ^^




봄의 바람에 ( 아물지 않은 뼈들의 배치 )
- 이외수 -

강으로 가는 물 강으로 가는 모래
정액냄새 화사한 밤꽃 그늘에서
문득 이름을 잊어버린 애인 하나야
나는 허물어져 강으로 간다

미친 바람이 불고 등불이 죽고
헤어진 사람들은 헤어진 땅에서
문풍지를 바르던 겨울이여

죽은 비듬을 털어내는 회양목 둑길에 서면
둑길에는 겨우내 바람뿐이지
아무도 오지 않고
회양목은 회양목끼리 귀를 열어
불려 가는 내 음성을 들었으리

꽃다지 피어 흔들리는 밭머리에 서면
낯 익은 것은 겨우내 모두 죽고
못 잊을 것도 겨우내 모두 죽고
아아 혼자 남아서 허공을 떠다니다가
붙잡은 것 없는 빈손으로 떠다니다가
애인 하나야
끝끝내 나는 허물어져 강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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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독교는 헤비메틀을 싫어하는가?

비교적 보수 기독 교단에 있었던 나는 폐쇄적인 기독 문화에 불만이 많았다.
내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일요일날 가스펠송(복음송가)부르는 것 조차 터부시하던 분위기였다.
더더욱 Rock음악에 빠졌던 고등학교 1학년 시절 기독교는 Rock을 미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왜 일까?

그때 나는 너무나 이것이 불만이어서 여러 반뉴에이지 서적과 사탄 음악에 대한 서적들을 공부했었다.
대게 그때 이런 류의 서적들이란 허접하기 짝이 없었다. 논리적 근거란 찾아보기 힘들고 무조건 나쁘다란 내용들이었다.
오로지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류의 내용이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랩이라던가 헤비메틀을 가스펠송으로 만드는 것은 악이 아니라 주류에 있던 어른들이 생경해하거나 듣기 편하지 않던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명 충돌론을 개입시키지 않고도 주류가 익숙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음악은 마녀사냥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사실 음악의 장르에 따라 종교 음악이 터부시 된다는 것은 담배갑에 쓰여진 금연 광고 만큼 넌센스다.
정가로 선정된 찬송가만 보더라도 동유럽 민요나 가곡, 애국가를 딴 것이 많다.
만약 춘향가에 기독교적 내용을 담은 찬송가를 만든다면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기독교 관련한 종교음악은 그 종교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히브리 기독교들, 더 나아가 유대교들은 히브리안 음악에 따라 종교음악을 만들었다. - 참고로 이 음악은 대부분 3도를 벗어나지 못 한다고 한다.
(사실 역사를 따지자면 기독교 음악은 히브리안 음악이다.)

천주교의 경우는 문화적 자긍심이 강한데 이유는 중세로 부터 시작한 유럽 역사의 문화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럽풍의 고전 클래식 음악들을 선호하고 이 '자긍심'때문에 기독교 보다 종교 음악에 대한 보수성이 강하다고 한다.

한편 기독교는 어떤가? 약간의 맹목을 배제하더라도 어른들, 소위 주류의 집단에 의해서 모든 것이 평가되어진다. 음악의 장르나 형식은 상대적인 것인데 그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기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내가 관심있는건 형식이 아니라 태도나 마음, 의도라는거다.
지금의 어른들이 20년 후에는 랩이나 헤비메틀 가스펠송을 수용할 것이다. 상대적인 자대로 정죄의 자대를 삼을 수 없다. 이런 것을 간과한 이상 기독교는 문명충돌 시대를 수용할 수 없는 보수 수구 세력으로 자리메김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위험할 수 있다. 지금 부쉬와 같은 기독 원리 집단이 한국의 주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양상은 이미 몇 차례 나타났었다. 화이트 엔젤 사건이나 단군상 훼손 사건과 같은...



종교의 교의는 절대적이어야 한다. 종교는 영원한 가치나 불변의 의미를 전제로 하니까...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사적 성향이 개입된 종교라면 종교 자체를 위해서도 위험할 수 있다.


언젠가 미래에 랩이나 헤비메틀이 자연스런 가스펠 문화가 정착된다면 역으로 그들이 정죄의 대상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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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 부터의 도피

자유로 부터의 도피


도피할 수 있는 자유가 과연 진정한 '자유'일까? 의심해보게 된다.
모두가 자유를 원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유를 누릴 줄 모른다. 아니 이기적인 자유를 원한다. 이것은 '자유'란 얼마나 많은 책임들을 감내해야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자유에 따른 소위 책임을 지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야성을 갖고있는 들개는 맑은 배고픔과 지독한 고독을 감내해야 한다. 만약 이런 들개가 안전한 울타리와 제때 나오는 따뜻한 밥을 동경한다면 이미 들개로서 자격을 잃은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자유로 부터 도피하길 원한다.

하지만 기득권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부리기 좋고 불평을 최소화한 마지노선의 그것만을 개인에게 할당하여 자유로의 도피를 유도한다. (마치 노예에게 마약을 허용하여 삶의 의미를 갉아먹게 했던 것 처럼)
이 시스템은 제법 정교하다 할만하다.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 정도면 많이 풍요로와 졌자나..' 내심 긍정하고 있으니까...
이런 안전장치 덕분에 우리는 서로를 적당한 야성을 갖은 집개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이 계약을 자의로든 타의로든 파기한다면 괴씸죄와 더불어 엄청난 패널티를 물게 된다.
서울역과 시청을 지나며 볼 수 있는 수 많은 홈리스족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되지 말아야지..'내심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 서울의 중심이라 할 만한 곳에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실패한 인생'들은 제법 효과적인 협밥의 한 장치가 된다.

이런 정교한 시스템에 더해서 '자유'를 획득하려는 사람은 '초인'적인 각오와 노력이 필요하다. 원래 텍스트인 '자유로 부터의 도피'에서 에리히 프롬은 이를 잘 지적하고 있다. 환경이 날 자유롭게 해주는 것, 다시 말하자면 '~로의 자유:free from'은 나의 노력이 거의 개입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라는 이름의 '자유권 양도'에 지나지 않는다. 들개는 우리에 갖혀도 들개다.
(여담이지만 유독 미국에 히피가 그렇게도 자유로왔던 이유는 아마도 복지체계를 갖출 정도의 미국이 되어졌기 때문 아닐까...?)
이에 대해 프롬은 '자유'에 대해 다시 정의하고 있다. (사실은 둘로 나누고 있지만..)
적어도 '자유'라고 한다면 '~를 향한 자유:free to'여야 한다. 이 '자유'란 것은 보다 많은 적극성을 요구한다. 진짜 '자유'하기 위해선 고독과 싸워야 하며 사회가 제시하는 나의 가치를 쌩까고 나의 가치를 수립할 수 있어야 하며, 존재의 의미를 자신이 찾을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전자의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본다. 길들여진 자유는 '자유'가 아니기 때문에...

한편, 프롬이 지적한 마조히즘과 사디즘과 더불어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더욱 비참한 상황을 연출한다. 엄석대가 만든 시스템은 애초에 자유 자체를 거세하고 있다. 이전에 '자유'에 첨가했던 욕구/실존의 문제가 폭력(더 나아가서 생존 - 마치 우리나라의 홈리스족이나 일부 신용불량자가 그렇듯이 )으로 인해 논외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문열의 모티브가 유신정권이었는데 반해 현재 상황을 보자면 형태만 달랐지 (신 자유주의란 조미료로 무장했지) 그 농도가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다.
이런 야비하고 정교한 시스템 마저도 부정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

한편으론 '자유'라는 것이 이렇게 치열하지만도 않은 것 같다. 강산에란 록커를 통해 느낀건데..
자유란 '자연스러운'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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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지 유감

또 서태지가 왔다..
사실 서태지가 과거 음반무림을 점령했을 때에도 그의 몇 곡을 제외하곤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크로바틱한 댄스를 보여준 '아이들'에게 더 주목했다.

제작년 들어 가끔 서태지 생각이 났었다. 민초들로 부터의 뜨거운 민주화 운동들과 촛불 시위, 반전/반미 시위들 속에 서태지가 일종의 전도사로 등장하길 기대했었다.
몇 년동안 음반을 통해 청소년 문제, 평화, 통일 같은 메시지로 장사해먹었던 그 아닌가?
내심 그의 전략이 값싼 상술이었음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두가 상품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도 상품으로 전락할 수 있다.
냉정하게 예술도 상품인 시대에 대중예술의 컨텐츠가 상술이라고 실망 한다면 내가 너무 착한 척 하는건가?

지난 앨범 발표 후 메체와의 관록 붙은 그의 인터뷰들을 보고 그에 대해 적잖이 놀랐다. 자신에게 불리한 질문들을 아주 교묘하게 무력화 했던 모습들...
서태지는 확실히 방송과 사람들을 잘 요리하는 재주 하난 비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난의 근거들을 더 들고 싶지만 남 비난하는 못된 취미 나올까봐 여기까지 하겠다.. ^^;


하지만... 확실한건 곡과 가사 하난 잘 쓴다.
가끔 서태지를 통해 서정주 선생이 오버랩 되곤 한다.
물론 서태지는 서정주 선생 처럼 모독을 받아 마땅할 만한 행동을 한건 아니지만... 다 차치하고 시 하나는 예술이었던 서정주 선생 처럼 못 마땅한 점이 많지만 태지도 음악 하난 잘 만든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에 한 해서)

끝으로 불평 하나 더 하자면... 그를 천재라고 호칭하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이외수 선생은 천재를 다음 처럼 정의했다.
[수재를 능가하는 인재다. 뛰어난 창의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을 사랑하고 예술을 창조한다. 그러나 천재는 요절한다. 천재는 사회를 수용할 수 있으나 사회가 천재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천재의 죽음은 자살보다 타살에 가깝다.]
천재란 시대와 사회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진짜 천재는 장승업이나 이상 처럼 자신의 삶을 난도질 한 채 예술로 도락하는 사람들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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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ck과 Hip Hop은 다르지 않다

Rock은 백인의 음악이다. 물론 Rock의 역사를 더듬으면 블루스 및 기타 흑인 리듬음악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Rock은 백인 음악이다.
반면 Hip Hop은 흑인의 음악이다. 우리나라 천민에게 교육을 금지한 것 처럼 흑인 노예에게 교육을 금지 시켰기 때문에
교육을 목적으로 만든 음악이라는 설이 있지만 우리나라 가락 처럼 흑인 노예의 울분과 한을 담은 음악이라는게 공론이다.

아무튼 이렇게 뿌리가 다른 두 장르의 교집합을 찾으려는 이유는 나의 음악 편력 때문이다.
우리 또래가 그렇듯 지난 10년 동안 주로 Rock을 들었다. 하지만 Radio Head 이후 매력적인 팀을 찾지 못 하고 음악에도
관심을 가질 수 없을 만큼 지지부진한 생활을 할 때 알게된 음악이 HipHop이다.

사실 HipHop은 댄스 음악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아는 힙합팀이 듀스가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진짜 MC(랩퍼라고 생각하면 될겁니다.)들은 춤을 잘 못 춘다. 손짓 정도가 고작이니까...

Rock의 정신은 자유와 저항이다. Rock씬이 가장 강렬할 때가 베트남 반미 시위 때였으니까 그때 영향이 크리라 생각한다.
자유를 얻기 위해선 저항해야 한다. "저항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자유의 나라에 들어가는 권세를 주셨으니.. " ^^
요즘은 좀 변질됐지만 Rock의 성숙기라 할 수 있는 8~90년대의 정신적 지주적인 로커들은 끊임없이, 집요하게 자유와 저항을 탐했다.
짐 모리슨이 그랬고, 커트 코베인이 그랬고, 지미 핸드릭스가 그랬고 빅토르 최가 그랬고 ...

HipHop은 이 문제를 다르게 풀어간다. 규정하자면 HipHop의 정신도 자유이다. 하지만 HipHop은 이런 개념을 '사는 방법'
으로 구현하려 한다. HipHop을 단지 음악의 장르가 아니라 문화로 보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Rock이 저항으로 자유를 풀어간다면 HipHop은 삶으로 자유를 풀어간다.
여기서 이 둘 간의, 백인과 흑인간의 다른 접근법을 볼 수 있다. 백인은 어떻게서든 획득하려는 'Do'의 성향을 갖은 반면에
흑인은 저절로 이뤄가는 'Be'의 성향을 갖는다. 아마도 발언권이 있는 자와 - 백인 - 없는 자의 차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Rock의 논조는 직설인 반면 HipHop의 논조는 역설이다.

그래서 요새 HipHop을 들으면서 Rock을 들었을 때와 같은 투지가 생긴다.

사람들은 자유를 갈구하지만 자유가 뭔지 모른다. 그래서 제도나 문화, 관습이 내놓은 (정답아닌)모범답안에 따라 살려고 한다.
그래서 불평한다. 이게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의 정의를 찾는 것, 그것을 HIP HOP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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