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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8/24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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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6/08/18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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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6/08/17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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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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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7/16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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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07/16
    바닐라 스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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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6/07/11
    콘스탄트 가드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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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7/10
    순수이성비판 새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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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사랑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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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 문장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신이 없다면"이라는 조건절로 은근슬쩍 가리고 있는 신의 존재여부에 대한 작가(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각이고, 또 하나를 들자면, 만약 다른 텍스트를 활용해서 신에 관한 작가의 입장을 밝힌다 하더라도 이를 저 문장에 적용시켰을 때 도출되는 직설적 결론이 저 문장의 의미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가의 여부이다. 다시 말하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저 명제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신은 없으므로 모든 것이 허용된다", 또는 "신이 있으므로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두 개의 문장 중 어느 것과도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이 명제를 제시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이반에게 가 보자. 물론 이 말을 하면서 이반이 가졌던 생각과 작가의 생각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불일치 자체가 곧 작가의 생각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이반은 일단 무신론자다. 그러나 신을 부정하지는 않는 무신론자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반은 신이 꼭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반이 볼 때 우리 인간들은 본성적인 기질상 우리의 자유를 견뎌내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어떤 일을 오로지 우리의 판단에 의거해 결정해야 한다는 중압감(그리고 아마도 그에 따르는 책임감)을 이겨내지 못한다. 인간은 단순히 자유로운 존재라기 보다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다. 우리의 자유는 우리의 짐이다.

 

따라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마땅한 전능한 신의 존재는 인간의 보다 나은 삶에 필수적이다. 신은 인간에게서 자유를 빼앗고 복종을 강요하지만, 사실 인간은 기꺼이 자신의 자유를 헌납하고 신 앞에 바짝 엎드릴 준비가 되어 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여야 더욱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인간에게는 자유로부터의 해방이 가장 절실한 과제다. 요컨대, 이반은 신이 없다고 믿지만 동시에 신이 필요하다고 믿으며, 신의 필요성에 대한 그의 믿음이 신의 존재여부에 대한 그의 판단을 압도한다. 신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신은 존재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반에게서 위의 명제는 다음과 같은 보충적인(동시에 중심적인) 의미를 갖는다. 만약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므로, 인간은 그와 같은 절대적 자유를 견뎌내지 못하고 자멸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은 인간의 보존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

 

이와 같은 제안은 다소 기만적이다. 왜냐하면 사실은 ①신이 존재하지 않지만, 일반 사람들은 이를 알 필요가 없고 그저 ②신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견디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에게 이를 적용할 때 전자(①)는 후자(②)의 아래에 억압되어 있지만, '신의 부재'를 알고 있는 이반 자신에게 이 모순적 명제를 들이밀면, 억압되었던 '신의 부재'는 결코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반드시 남아서 이반의 자의식(우월감)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부터 이 기만적 명제의 의미는 삐걱거리게 된다.

 

이 명제의 의미가 결국 파열하게 되는 지점은, 의미화될 수 없는 어떤 것, 곧 '실재'가 이반의 명제에 틈입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상징계 안에서 신의 부재는 엄연한 사실이며, 이 사실과 윤리적 강령이 가까스로 봉합되어 있는 것이 이반의 명제였다면, 작가는 이 봉합의 끝 매듭을 살짝 건드리므로써 '사실'이란 상징계 안의 어떤 것에 불과하다는 점, 그리고 그 사실은 실재의 어떤 것이 불가피하게 누락되었기 때문에(의미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로써 존재할 수 있었다는 점을 폭로한 것이다. 끝 매듭이 풀린 봉합은 단번에 해체되었다.

 

그 실재는 곧 스메르쟈코프의 범죄이다. 이반의 '사상적 아들'인 스메르쟈코프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으므로" 그냥 한 번 표도르 카라마조프(이반의 아버지)를 죽여 본다. 이반은 자신의 이론이 '실제로' 아버지의 몸 위에서 시연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상징계 안에서는) 할 수 없었으므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리고 만다(상징계로부터 벗어남).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는 바로 여기에서 이렇게 이반을 단죄하므로써 이반의 명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반의 단죄는 '신의 부재'라는 사실의 거부를 의미한다(①의 소거). 또한 상징계의 한계와, 상징계는 실재의 배제를 통해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 따라서 그렇게 배제된 부분이 사실은 상징계 전체의 의미를 좌우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다. 이반은 자신의 아버지의 육체가 '모든 것이 허용된' 인간의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실재)을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상징계)을 구성했다.

 

'신의 부재'가 부정됨으로써 도스토예프스키의 저 명제는 분명하게 유신론으로 읽힌다. 또한 이론이 아닌 실재의 신앙, 실재의 윤리학으로도 읽힌다. 우리의 삶(과 신앙)에는 가타부타를 따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삶에 대한 이론은 그러한 것들의 배제를 매개로 해서 구성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바로 이론화할 수 없는 것들, 이론의 찌꺼기, 곧 순수한 삶 그 자체이다. 윤리는 직접적으로 삶에 적용되는 것이다.

 

덧) 스메르쟈코프도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지만) 아마 표도르의 아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반의 이론으로 침입한 실재, 곧 그의 이론을 지탱하면서 결코 이론화되지는 않았던 가장 근본적인 사실은 바로 '부친살해'가 된다. (스메르쟈코프가 표도르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 이반의 사상에 의해 살해된 것이므로 부친살해가 맞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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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 원제 Hegel (2000) 

 

 

정   가 : 48,000원

출간일 : 2006-07-31 | ISBN : 8956440832
양장본 | 1088쪽 | 233*162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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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되기 전에 사 놓아야 할 텐데, 가격과 분량이 너무 무겁다. '이제이북스'는 (아주 약간 과장해서) 숭배받아 마땅한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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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bjork - debut(1993)

"비트와 현", 그리고 목소리.

 

tortoise - tnt(1998)

멜로디 없는 장난감나라. 장난감들은 용도를 알 수 없다.

 

mahavishnu orchestra - birds of fire(1972)

진정한 자유. 'one word'

 

the velvet underground - white light / white heat(1967)

뭐지? 이 의외의 편안함은...

 

radiohead - pablo honey(1993)

평범한 밴드의 괜찮은 작품. 혹은, 라디오헤드는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the clash - london calling(1979)

딱히. 가사와 함께 다시 들어야 할 듯.

 

radiohead - the bends(1995)

결코 독특하다고 할 수는 없는 밴드의 아주 뛰어난 작품. 절정의 균형감각.

 

the doors - the doors(1967)

그의 목소리는 다른 선택지를 제시하지 않는다.

 

skunk anansie - paranoid & sunburnt(1995)

견디기 힘든 불쾌한 목소리를 가진, 두말할 필요 없는 최고의 보컬. 메탈도 듣고 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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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 가장 뛰어난 시인들의 경우에도 첫 시집이 대표 시집이 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시적 재능의 성격과 관련되는 것 같다. 수학적 재능이 그렇듯, 시적 재능도 매우 일찍 피어나는 일이 흔하다. 그리고 그런 재능의 극히 일부만이 나이 듦과 더불어 마모하는 일 없이 유지되거나 진화하는 것 같다. 미당은 만년의 다소 흐트러진 듯한 몇몇 작품들을 제외하면, 생애 전체를 통해 자신의 시 언어를 한국어의 최정상에 두었던 매우 예외적인 시인이다. 이젠 너무 남용돼 아무런 울림도 주지 못하는 상투적 표현을 다시 끄집어내자면, 미당의 시 언어들은 지난 세기 한국어에 벼락같이 쏟아진 축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미당의 죽음 앞뒤로 문단 안팎을 소란스럽게 한 그의 정치적 몸가짐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미당의 경우를 두고 시와 정치의 관계를 따져보려는 논자들이 쉽게 치이는 덫은 문학과 삶, 또는 문학과 정치를 모순 없이 일관되게 설명하고자 하는 욕망의 유혹이다. 그래서 그의 행적에 비판적인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그의 시적 성취의 허약함을 찾아내려 하고, 그의 문학적 성취에 매혹된 사람은 되도록 그의 행적을 호의적으로 이해하는 데 기여할 상황논리를 구성하려 애쓴다. 이렇게 문학과 삶을 내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오캄의 면도날처럼 매력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설명의 깔끔함이 아니라 사실 앞에서의 겸손함이다.

 

그렇다면 사실은 어떤가? 미당의 삶은, 적어도 그의 공적 자아의 행적은, 시시한 것이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젊은 시절 태평양전쟁 시기에 쓴 전쟁선동시든 갑년이 넘어 군사깡패에게 바친 생일 축시든, 그런 문자 행위가 그에게 절박한 신체적 위협과 함께 강요되었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그런데도 미당은 천연덕스럽게 그런 역겨운 언어들을 자신의 이름으로 활자화했다. 그리고 아무런 뉘우침 없이 '종천순일從天順日'이라는 궤변으로 그 행적들을 얼버무렸다.

 

그가 비슷한 세대의 몇몇 반동적 문인들에 견주어 실제로 누린 것 없이 이름만 더럽혔다는 점을 들어 도리어 그의 순박함을, 그 '시인됨'을 높이 사주자는 견해도 있다. 그가 실제로 누린 것이 대단찮았느냐는 판단은 별도로 하더라도, 그 사실이 그 행위들의 역겨움을 눅여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그의 공적 자아는 시시한 것이었다. <<화사집>>의 서시序詩 격인 <자화상>의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 / 어떤이는 내눈에서 죄인을 읽고가고 / 어떤이는 내입에서 천치를 읽고가나 /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같은 대목은 그의 생애 전체를 미리 요약하는 예언의 울림으로 파닥거리지만, 이 구절들의 빛나는 진솔함이 그의 휘어진 생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

 

─ 고종석, <<모국어의 속살>>. (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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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저녁만 먹으면 들어와서 몇 시간씩 자고 일어나니, 밤에 잠이 안 와서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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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편

정처없는 블로깅 중 이 시편 8편의 일부분이 적혀있는 포스트를 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고3때의 기억을 음미.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유독 이 구절은 졸업 후에 기독교에 대한 내 감정이 여러 번 변하면서도 잊혀지지 않았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사람의 자식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what is man that you are mindful of him, the son of man that you care for him?)"

[*권고(眷顧): 관심을 가지고 보살핌]

 

노래로 들으면 더욱 감동(?)이 물밀듯이 밀려오겠지만, 인터넷에 올라 있는 것을 찾아봤자 그 '너무 경건한' 기독교합창단식으로 녹음되어 올려져 있을 테니 아예 환상을 깨 버릴지 몰라 찾아보지 않았다. 내가 감정의 격랑을 경험했던 목소리는 파릇파릇한 고등학생 천여명의 합창소리였으므로. 다시 듣기는 힘들겠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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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fiona apple - when the pawn...(1999)

역시 재즈는 취향이 아닌가 봅니다.

 

muse - origin of symmetry(2001)

솔직한 통속성. Plug in baby!

 

sigur rós - ( )(2002)

역시 다른 포스트록 밴드들과는 다른 뭔가가 있다. (비슷한 점-약간의 지겨움-도 있다)

 

pink floyd - the dark side of the moon(1973)

"but the sun is eclipsed by the moon..."

 

flying saucer attack - new lands(1997)

이래서 왔다갔다 하면서 음악들으면 안 된다니깐, 기억나는 게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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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 스카이

시우르 로스의 'untitled 4'가 삽입되어 있다고 해서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 사실은 이 곡 말고도 두 곡이나 더 삽입되어 있었다. 영화는 "노래 분위기 + 소름 끼치는 인간의 심리" 정도랄까... (이미지는 많이 못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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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트 가드너

영화 본 지 조금 되었는데, 그 때의 느낌을 기억하기 위해 포스터와 스틸 컷 몇 장을 올려 놓아야겠다. 우울한 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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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새 번역본

순수이성비판 1   순수이성비판 2

임마누엘 칸트 (지은이), 백종현 (옮긴이) | 아카넷

    

 

 

아카넷은 참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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