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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10/15
    <변화의 지각>에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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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6/10/05
    정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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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6/09/27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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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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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09/23
    그 여자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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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09/19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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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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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ulce et Decorum 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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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6/08/30
    위험한 家系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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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8/27
    오리 망아지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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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지각>에서, 1

두 번째 강의

 

어제 여러분은 제게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여 주신 만큼, 오늘 제가 그것을 이용하려 한다고 해도 놀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여러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재와 우리 사이에 놓아 버린 인공적인 도식을 제쳐 버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되어 버린 어떤 생각이나 지각의 습관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와 운동성에 대한 직접적 지각으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우선 이러한 노력의 결과를 즉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든 변화, 모든 운동을 절대적으로 분할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운동으로부터 시작합시다. 나는 내 손을 A 지점에 두고 있습니다. B 지점으로 손을 옮기면, 나는 AB라는 간격을 가로지르게 됩니다. 저는 A로부터 B에 이르는 이 운동을 본성적으로 단순한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우리들 모두가 직접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A에서 B로 우리의 손을 움직인다고 할 때 우리는 그 중간의 어느 지점에서 손을 멈출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긴 합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 우리가 다루는 것은 [문제의 운동과] 같은 운동이 아닙니다. A부터 B까지의 단일한 운동은 더 이상 있지 않게 되고, 가정에 의해서, 하나의 간격을 사이에 둔 두 개의 운동이 있게 됩니다. 안으로부터 근육 감각을 통해서도, 밖으로부터 시각을 통해서도,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지각을 갖게 됩니다. 만약 내가 A부터 B까지의 운동을 그대로 놓아둔다면, 나는 그 운동이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며, 그것이 분할 불가능하다고 단언해야 합니다.

 

내가 A로부터 B로 움직이는 내 손을 보면서, 그 간격 AB에 대해서 내가 다음과 같이 묘사하여 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간격 AB는 내가 원하는 만큼 많은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으며, 따라서 A에서 B까지의 운동도 내가 원하는 만큼 많은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왜냐면 이 운동은 그 간격에 정확히 들어맞기 때문이다.” 또는: “이동하는 매 순간마다, 그 운동자는 어떤 지점을 지나며, 따라서 그 운동 안에서 원하는 만큼 많은 단계들을 구분해낼 수 있고, 따라서 그 운동은 무한히 분할 가능하다.” 하지만 잠시 숙고해 봅시다. 어떻게 운동이 그것이 가로지르는 공간과 들어맞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움직이는 어떤 것이 움직이지 않는 어떤 것과 일치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움직이는 대상이 그것의 통과 궤도 위의 한 지점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대상은 그곳을 통과합니다, 또는 다른 말로, 그것은 그곳에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거기 멈추었다면 그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에 멈춘다면, 그것은 더 이상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과 동일한 운동이 아닙니다. 그 이행에 아무런 중단이 없다면, 하나의 이동은 항상 단 한 번의 도약에 의해서 완성됩니다. 이 도약은 몇 초, 혹은 몇 날이나 몇 달, 몇 년 동안 지속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도약인 순간, 그것은 분해 불가능합니다. 단지, 일단 이행이 완료되면, 그것의 궤도는 공간이고 공간은 무한정하게 분할 가능하므로, 우리는 운동 자체도 무한정하게 분할 가능할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상상하기를 좋아하는데, 왜냐면 어떤 운동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위치의 변화가 아니라, 위치들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운동이 남기고간 위치, 그것이 차지할 위치, 만약 중간에 멈추었을 경우 그 운동이 차지했을 위치. 우리는 부동성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운동과 운동이 통과한 공간의 지점들의 부동성을 더 잘 일치시킬수록, 우리는 그 운동을 더 잘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실재적 부동성이란, 우리가 그것을 운동의 부재로 이해하는 한에서, 절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운동이 실재 그 자체이며, 우리가 부동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물들의 어떤 상태인데, 이는 두 기차가 평행하는 선로 위에서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을 때 발생하는 어떤 상태와 유비적으로 비슷합니다. 두 기차들 각각은 다른 기차에 앉아 있는 승객들이 보기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예외적인 이러한 상황이 우리에게는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상황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사물들에 대해 행동을 할 수 있으며, 그 사물들도 우리에게 작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기차에 타고 있는 승객들은, 오로지 그들이 “움직이지 않는” 경우에만, 다시 말하면, 그들이 같은 방향과 같은 속도로 가고 있는 경우에만, 문을 통해서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서로에게 말을 건넬 수 있습니다. “부동성”이 우리 행동의 필요조건인 만큼, 우리는 그것을 실재로서 놓고,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며, 우리는 운동 안에 무엇인가가 겹쳐져 놓여 있는 것으로 보게 됩니다. 실행보다 더 정당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마음의 습관을 사변의 영역으로 가져간다면, 우리는 진정한 실재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일부러 만들어낼 것이며, 실재에서 가장 생명력 있는 것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될 것입니다.

 

엘레아의 제논의 증명들을 상기해 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 증명들은 모두 운동과 그 운동이 주파한 공간에 대한 혼동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는 최소한 공간을 다루듯이 운동을 다룰 수 있으리라는 확신, 운동의 마디를 고려하지 않고 그것을 나눌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에 따르면, 아킬레스는 절대로 그가 쫓고 있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거북이가 있던 자리에 아킬레스가 도달하면, 거북이는 그 시간만큼 그보다 멀리 가 있을 것이고, 이것이 무한히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은 수많은 방식으로 이 증명을 반박해 왔는데, 이 방식들은 너무 까다로워서 그 각각의 반박들은 다른 어떤 반박이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권리를 그로부터 빼앗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려운 작업을 쉽게 만드는 아주 간단한 수단이 있었습니다. 아킬레스에게 묻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킬레스가 결국 거북을 따라잡고 심지어 거북을 앞지른 만큼, 바로 그가 다른 누구보다도 그가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 잘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걸어서 움직임으로써 운동의 가능성을 시연해 보였던 고대의 철학자는 옳았습니다. 단, 그 철학자의 유일한 실수는 동작으로만 표현했을 뿐 거기에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킬레스에게 그 경주에 대해서 설명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렇게 답변할 것입니다. “제논은, 내가 있는 지점에서 거북이가 있었던 지점으로 내가 움직이고, 다시 그 지점에서 거북이가 그 때 있었던 다음 지점으로 움직이며, 이와 같이 계속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내가 뛰도록 하는 그의 절차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와 다른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나는 한 걸음을 내딛고, 그 다음에 두 번째 걸음을 내딛고,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마침내 몇 발자국을 디딘 후에 한 발자국을 더 내딛음으로써 그 걸음으로 거북이를 앞지릅니다. 따라서 나는 연속적인 분할 불가능한 행위들을 수행합니다. 나의 진행은 이런 행위들의 연속입니다. 당신은 그 진행을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걸음의 수만큼 나눠서 부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그 진행을 다른 법칙에 따라서 재분절하거나, 그것이 다른 방식으로 분절되어 있다고 가정할 권리가 없습니다. 제논이 한 대로 나아가는 것은, 이 달리기가 마치 그것이 주파한 공간처럼 자의적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행이 실제로 궤도에 들어맞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는 운동과 부동성을 일치시키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를 다른 하나와 혼동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운동에 대해서 그것이 마치 부동성으로 구성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그 운동을 살펴볼 때 마치 그 부동성들을 가지고 운동을 재구성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주장합니다. 우리에게 운동이란 어떤 한 점, 그리고 다른 한 점, 이렇게 무한정하게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다른 무언가가 있으며,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 가는 간격에는 그 간격을 뛰어넘는 이행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심지어 우리가 아직 두 개의 연속적인 점들 사이에는 분명히 어떤 이행을 가정해야 한다고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이행에 우리의 주의를 고정시키는 순간, 우리는 즉시 그 이행을 지점들의 연속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 이행에 대해서 고려해야만 하는 순간까지 그것을 연기합니다. 우리는 이행이 존재한다고 인정하고, 그것에 이름을 부여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 지점이 만족스럽게 자리잡기만 하면 우리는 즉시 그 지점들로 관심을 돌리며 그 점들만을 다루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우리는 운동으로서의 운동의 광경이 우리의 사유 속에 일으킬 수 있는 그러한 어려움들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즉시 운동을 부동성들로 채우게 됩니다. 만약 운동이 모든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즉, 우리가 처음부터 부동성이 실재일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운동은 우리가 그것을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나갈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운동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변화든 이와 같다고 말하겠습니다. 모든 실재적 변화는 분할 불가능한 변화입니다. 우리는 그 변화를 구별되는 상태들의 연속과 같은 것처럼, 그리고 이 상태들이 마치 시간의 선을 형성하는 것처럼 다루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은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반면에, 만약 변화가 우리 안에서 연속적으로 존재하고 사물들 안에서도 그러하다면, 우리들 각각이 “나”라고 부르는 이 끊임없는 변화가 우리가 “사물”이라고 부르는 끊임없는 변화에 대해서 어떤 작용을 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두 변화는 서로에 대해서 앞에서 언급한 두 대의 기차와 같은 상황에 처해져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대상이 색깔을 바꾼다고 말하며, 그리고 여기서 그 변화는 변화의 구성 요소가 되는 색조들의 연속이며, 그 색조들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첫째로, 만약 각각의 색조가 어떤 객관적 실존성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무한히 빠른 진동이며, 곧 변화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가 그에 대해서 갖고 있는 지각은, 그 지각이 주관적인 만큼, 우리의 신체의 일반적 상태의 어떤 고립되고 추상적인 측면에 불과하고, 이 상태는 전체로서 계속해서 변화하면서 이러한 소위 불변적인 지각이 자신의 변화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야기합니다. 사실, 계속해서 변경되지 않는 지각이란 없습니다. 따라서 그 색깔, 우리 밖에 있는 그 색깔은 운동성 그 자체이며, 우리의 신체 또한 운동성입니다. 하지만 사물에 대한 우리 지각의 전체 체계는, 사물에 대한 우리의 행동의 체계와 마찬가지로, 외부와 내부의 운동성 사이에 아까 말한 두 대의 기차와 비슷한 상황을 일으킬 수 있는 방식으로 조절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좀 더 복잡하지만, 같은 종류의 상황입니다. 두 변화가, 대상과 주체의 변화가, 특정 조건 하에서 일어날 때, 그 변화들은 “상태”라고 불리는 특정한 외관을 산출합니다. 그리고 이 “상태들”을 일단 소유하게 되면, 우리의 정신은 그것들을 가지고 변화를 재조립합니다. 반복하건대, 이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변화를 상태들로 분해하는 것은 우리가 사물들에 작용을 가할 수 있게 해 주며, 변화 그 자체보다 상태들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실용적인 관점에서는 유용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 행동에 유리한 것이 사변에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어떤 변화를 정말로 상태들로 구성된 것으로 상상한다면, 당신은 즉시 해결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문제들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 문제들은 오로지 외관만을 다룹니다. 당신은 진정한 실재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됩니다.

 

저는 이 요점을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각자 실제로 한 번 실행에 옮겨 봅시다. 어떤 변화, 어떤 운동의 직접적인 시각을 한 번 갖도록 해 봅시다. 우리는 절대적 분할 불가능성의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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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화

"충남 예산의 한 초등학교 교장의 자살을 둘러싸고 전교조 교사들과 이 나라 교장 선생님들이 벌이고 있는 죽기 살기의 싸움은 저 아이들의 찬란한 생명력 앞에서 수치스럽다. 교장이 젊은 여교사들에게 차 시중을 시킨 일이 발단이라고 한다. 듣기에도 민망하고 꼴 같지도 않다."

 

김훈은 앞 문단들에서 '고3 선배님들'을 응원하러 수능시험 고사장 앞에 진을 치고 서서 '지옥의 문턱 앞에서의 축제'를 벌이는 아이들을 눈물겹게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저 자살 사건으로 화제를 옮기는데, 꼴 같지도 않단다. 어떤 의미에서? 다음 문단을 계속 읽어본다.

 

1) "나는 젊은 여교사가 늙은 교장에게 차 한 잔을 가져다주는 선의와 애정은 예(禮)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저런! 이렇게 나이브하고 고루한 생각을 여과 없이 내뱉다니! 하는 생각이 대번에 든다. 편안하게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우파 김훈이 또 한 건 했나 싶다. 마음을 추스리고 계속 읽어본다.

 

2) "또한 교장이 젊은 여교사에게 차 시중을 시키는 일은 스스로 삼가는 것 또한 예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시금 화들짝 놀란다. 무엇인가? 이 문장은 사실, 당연한 문장이고, 이런 말을 한다고 대단히 진보적인 것도 아닌, 뭐 그렇고 그런 문장이다. 그리고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왜 다시금 놀랐으며, 방금 전 내가 우파 김훈에게 겨누었던 탐탁지 않은 시선이 쥐꼬리 사라지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던 것일까?

 

1)을 말한 사람이 2)를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면 내 분류 체계에는 1)의 화자와 2)의 화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으로 기록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 중간 어딘가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은 위태롭게 경계선 위에 서 있을 뿐 자기만의 이름을 결여하고 있다. 하지만 1) + 2)가 오히려 당연한 생각, 그러니까 더 '객관적인' 생각, 더 '보편적인' 생각이 아닐까? (객관성, 보편성에 대한 경계를 유지하면서)

 

다시 1)을 읽어본다. 아무렇지도 않다. 맞는 말이다.

 

이 사건의 문제는 1)과 2)의 생각 중 어떤 것도 적용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차 한 잔을 가져다주는 '선의와 애정'도 없었고(그게 누구 탓이든), 차 시중을 스스로 삼가는 예도 없었다.

 

그 다음 절차가 사회적 분석, 혹은 권력 분석인데, 김훈은 이걸 전혀 못한다. (아래에 이어지는 바로 다음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데 여기부터는 오차 범위가 너무 크다. 이른바 인간적 현상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고유한 문제다. 하지만 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일단 두고 단락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본다.

 

"거기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면 양쪽이 인의예지의 문제를 스스로 성찰하는 방식으로 해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양쪽이 이른바 '참교육'을 한다는 교사와 교장이 아닌가. 개인적 자율의 영역을 스스로 포기하고 이를 악물고 끝까지 싸우다가 한쪽이 자살을 하고 나니까 양쪽이 각자의 입장을 세력화, 집단화, 이념화, 정치화함으로써 권력투쟁의 전면전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 싸움의 형국은 한마디로 개수작이다."

 

사회가 이렇게 흘러가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 세력화, 이념화, 정치화...등이 '기존 사회'의 모습이다. 따라서 이 '보수적인' 단락의 마지막 부분의 명제는, 뒤집힌 형태로, 어떤 개혁의 요구가 된다. 개인의 개혁, 혹은 윤리적 개혁인 것인데, 그러므로 당연히 집단화, 사회화될 수 없고, 따라서 운동도 될 수 없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은 사회학이 아니라 심리학이 줄 수 있을 것이다.

 

- 김훈, "아이들은 청순하기만 한데"

 

제목은 거짓말이다. 김훈의 줄타기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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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적 삶의 기쁨

… 개를 데리고 산보를 할 때, 나는 개 다리의 움직임에서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을 느낀다. 개 한 마리가 나에게 주는 행복만으로도 나는 오래오래 이 세상에서 살고 싶다. 개 다리가 땅 위에서 걸어갈 때, 개 다리는 땅과 완벽한 교감을 이룬다. 개의 몸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다리가 땅을 밀어내는 저항이다. 개의 몸속에 닿는 이 저항이 개를 달리게 하는데, 이 저항이야말로 개의 살아 있음이다. 개 한 마리가 이 세상의 길 위를 달릴 때, 이 세상에는 놀라운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개를 데리고 공원에서 달릴 때 나와 개가 똑같은 아날로그의 짐승임을 안다. 나는 개와 아무런 차이가 없는, 아날로그 세상의 네발짐승인 것이다. 내 콧구멍에서 김이 날 때, 개 콧구멍에서도 김이 난다. 이 세상의 길바닥을 헤매고 다닌 개의 발바닥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고 내 발바닥에도 굳은살이 박여 있다. 이 굳은살은 각질로 금이 가 있고, 거기에 때가 끼어 있기도 하지만, 나는 사람이나 개의 몸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뢰할 수 있는 부분은 발바닥의 굳은살이라고 생각한다. 그 굳은살은 말랑말랑하지도 않고 딱딱하지도 않다. 그 굳은살은 개나 사람이 이 세상을 딛고 다닌 만큼 단단하거나, 아직 덜 딛고 다닌 만큼 말랑말랑하다. 그래서 개 발바닥의 굳은살은 한 편의 역사를 이루는데, 이 역사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다. 그 역사는 해독하기 어려운 역사인데, 그것이 해독하기 어려운 까닭은 그 역사가 세상과 개 사이에만 이루어진 시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개의 발바닥이나, 두 갈래로 갈라진 돼지 발바닥, 소 발바닥을 들여다볼 때마다 그 존재들의 개별적 삶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목이 멘다. 그리고 못대가리가 휠 때마다 세상과의 교감에 이토록 서툰, 내 생명의 초라함에 문득 놀란다. 아날로그 세상의 슬픔과 기쁨은 등불처럼 환하다. …

 

- 김훈,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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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

01. slowdive - souvlaki space station

02. sigur rós - (untitled 4)

03. azure ray - sleep

04. radiohead - planet telex

05. sunset rubdown - us ones in between

06. smashing pumpkins - mayonaise

07. velvet underground & nico - venus in furs

08. yo la tengo - autumn sweater

09. my bloody valentine - sometimes

10. porcupine tree - shesmovedon

11. antony and the johnsons - hope there's someone

12. jeff buckley - hallelujah

13. coldplay - everything's not lost

14. mono - the remains of the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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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네 집

그 여자네 집 -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6 
박완서 (지은이)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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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 원제 Extremely Loud and Incredibly Close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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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이제 하나 읽고 또 다른 거 읽자.
(그런데 '믿을 수 없게'라는 표현은 흔히 쓰이는 말인가? 보통 '믿을 수 없이'라고 하지 않나? 내 눈에는 영 어색해 보이네. 라임을 맞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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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늘(과 내일 새벽엔) 꼭 발제문 쓴다. 쓰고 주말에 즐겁게.. 읽자.

아, 구질구질.

 

 

 

   봄철날 한종일내 노곤하니 벌불 장난을 한 날 밤이면 으레히 싸개동당을 지나는데 잘망하니 누어 싸는 오줌이 넙적다리를 흐르는 따근따근한 맛 자리에 펑하니 괴이는 척척한 맛

 

   첫여름 이른 저녁을 해치우고 인간들이 모두 터앞에 나와서 물외포기에 당콩포기에 오줌을 주는 때 터앞에 밭마당에 샛길에 떠도는 오줌의 매캐한 재릿한 내음새

 

   긴긴 겨울밤 인간들이 모두 한잠이 들은 재밤중에 나 혼자 일어나서 머리맡 쥐발 같은 새끼요강에 한없이 누는 잘매럽던 오줌의 사르릉 쪼로록 하는 소리

 

   그리고 또 엄매의 말엔 내가 아직 굳은 밥을 모른던 때 살갗 퍼런 막내고무가 잘도 받어 세수를 하였다는 내 오줌빛은 이슬같이 샛맑았다는 것이다

 

- 백석, <동뇨부(童尿賦)>

 

*벌불: 들불 / 싸개동당: 오줌을 참다가 기어코 싸는 장소 / 잘망하니: 얄미우면서도 앙증스런 모습, 얄밉게도 / 물외: 오이 / 당콩: 강낭콩 / 재밤중: 한밤중 / 쥐발 같은: 쥐발같이 앙증맞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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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질구질' 때문에 이게 생각났는데 다시 읽어보니 전혀 그렇지 않고나. 백석은 진정 개그쟁이!

 

여기에 가끔 출몰하는 ㄱㅇ이가 이걸 보면 좋아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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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lce et Decorum Est

Bent double, like old beggars under sacks,

Knock-kneed, coughing like hags, we cursed through sludge,

Till on the haunting flares we turned our backs,

And towards our distant rest began to trudge.

Men marched asleep. Many had lost their boots,

But limped on, blood-shod. All went lame, all blind;

Drunk with fatigue; deaf even to the hoots

Of gas-shell dropping softly behind.

자루를 짊어진 늙은 거지들처럼, 두 배로 휘고,

무릎은 덜컹거리고, 노파처럼 기침하면서, 우리는 진창을 헤치며 저주했다,

그러다 섬광이 출몰하면 등을 돌렸고,

다시 먼 휴식을 향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졸면서 행군했다. 대부분 구두를 잃었으나,

다리를 절며 나아갔다, 피딱지를 신발 삼아. 모두가 절름발이었고, 모두 눈멀었다;

피로에 취해서; 귀도 멀어서 심지어 독가스탄이

뒤로 부드럽게 떨어지며 삐이 소리를 내는 것도 듣지 못했다.

 

Gas! GAS! Quick, boys!─An ecstasy of fumbling,

Fitting the clumsy helmets just in time,

But someone still was yelling out and stumbling

And flound'ring like a man in fire or lime.─

Dim through the misty panes and thick green light,

As under a green sea, I saw him drowning.

In all my dreams before my helpless sight

He plunges at me, guttering, choking, drowning.

가스다, 가스야! 빨리, 제군들!─미친듯이 더듬어

딱 맞춰 투박한 헬멧을 썼건만,

누군가는 아직 소리치며 비틀거리며,

불이나 덫 속에 있는 듯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희뿌연 창과 두꺼운 녹색 빛 사이로 어슴프레

그가 익사하는 게 보였다, 마치 녹색 바다처럼.

내 모든 꿈에서 그는 어쩔 줄 모르는 내 앞에 나와

내게로 달려든다, 흐르며, 질식한 채, 물에 빠지듯.

 

If in some smothering dreams, you too could pace

Behind the wagon that we flung him in,

And watch the white eyes writhing in his face,

His hanging face, like a devil's sick of sin,

If you could hear, at every jolt, the blood

Come gargling from the froth-corrupted lungs

Bitter as the cud

Of vile, incurable sores on innocent tongues,─

My friend, you would not tell with such high zest

To children ardent for some desperate glory,

The old lie: Dulce et decorum est

Pro patria mori.

만약 어떤 숨막히는 꿈에서, 너 또한

우리가 그를 던져넣은 마차 뒤를 따라갈 수 있다면,

그러면서 그의 얼굴 위에서 몸부림치는 그 눈알을 볼 수 있다면,

그 축 늘어진, 악마도 질려버릴듯한 얼굴을,

덜컹거릴 때마다 피가 그르륵 소리를 내며

거품으로 오염된 폐로부터 솟아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결백한 혓바닥에 난 불치의 사악한 종기에 닿은

쓰디쓴 새김질거리처럼,─

친구여, 만약 그렇다면 네가 그토록 높은 열의로

절망적인 영광에 혈안이 된 아이들에게 그런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을,

그 오래된 거짓말: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달콤하고도 바람직하다는 것.

 

─ Wilfred Owen, 'Dulce et Decorum 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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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家系 · 1969

 

1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風病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 매셨다.

 

2

 

   아버지. 그건 우리 닭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성껏 돌보세요. 나는 사료를 한줌 집어던지면서 가지를 먹어 시퍼래진 입술로 투정을 부렸다. 농장의 목책을 훌쩍 뛰어넘으며 아버지는 말했다. 네게 모이를 주기 위해서야. 양계장 너머 뜬, 달걀 노른자처럼 노랗게 곪은 달이 아버지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이리저리 흔들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팔목에 매달려 휘휘 휘파람을 날렸다. 내일은 펌프 가에 꽃 모종을 하자. 무슨 꽃을 보고 싶으냐. 꽃들은 금방 죽어요 아버지. 너도 올봄엔 벌써 열 살이다. 어머니가 양푼 가득 칼국수를 퍼담으시며 말했다. 알아요 나도 이젠 병아리가 아니예요. 어머니. 그런데 웬 칼국수에 이렇게 많이 고춧가루를 치셨을까.

 

3

 

   방죽에서 나는 한참을 기다렸다. 가을 밤의 어둠 속에서 큰누이는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걸어왔다. 이번 달은 공장에서 야근 수당까지 받았어. 초록색 추리닝 윗도리를 하나 사고 싶은데. 요새 친구들이 많이 입고 출근해. 나는 오징어가 먹고 싶어. 그건 오래 씹을 수 있고 맛도 좋으니까.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누이의 도시락 가방 속에서 스푼이 자꾸만 음악 소리를 냈다. 추리닝이 문제겠니. 내년 봄엔 너도 야간 고등학교라도 가야 한다. 어머니. 콩나물에 물은 주셨어요? 콩나물보다 너희들이나 빨리 자라야지. 엎드려서 공부하다가 코를 풀면 언제나 검댕이가 묻어나왔다. 심지를 좀 잘라내. 타버린 심지는 그을음만 나니까. 작은누이가 중얼거렸다. 아버지 좀 보세요. 어떤 약도 듣지 않았잖아요. 아프시기 전에도 아무것도 해논 일이 없구. 어머니가 누이의 뺨을 쳤다. 약값을 줄일 순 없다. 누이가 깎던 감자가 툭 떨어졌다. 실패하시고 나서 아버지는 3년 동안 낚시질만 하셨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너희들을 건졌어. 이웃 농장에 가서 닭도 키우셨다. 땅도 한 뙈기 장만하셨댔었다. 작은누이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죽은 맨드라미처럼 빨간 내복이 스웨터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는 채소 씨앗 대신 알약을 뿌리고 계셨던 거예요.

 

4

 

   지나간 날들을 생각해보면 무엇하겠느냐. 묵은 밭에서 작년에 캐다 만 감자 몇 알 줍는 격이지. 그것도 대개는 썩어 있단다. 아버지는 삽질을 멈추고 채마밭 속에 발목을 묻은 채 담배를 태셨다. 올해는 무얼 심으시겠어요? 뿌리가 질기고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심을 작정이다. 하늘에는 벌써 튀밥 같은 별들이 떴다. 어머니가 그만 씻으시래요. 다음날 무엇을 보여주려고 나팔꽃들은 저렇게 오므라들어 잠을 잘까. 아버지는 흙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셨다.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 더 좋은 땅에 당신을 옮겨 심으시려고.

 

5

 

   선생님. 가정 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돌아왔다. 아버진 좀 어떠시니. 누이의 몸에서 석유 냄새가 났다. 글쎄, 자전거도 타지 않구 책가방을 든 채 백 장을 돌리겠다는 말이냐?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바람에 불려 몇 그루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6

 

   그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 하시고 굳은 혀. 어느 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 털실 뭉치를 감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그러나 썰매를 타다 보면 빙판 밑으로는 푸른 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얼음장 위에서도 종이가 다 탈 때까지 네모반듯한 불들은 꺼지지 않았다. 아주 추운 밤이면 나는 이불 속에서 해바라기 씨앗처럼 동그랗게 잠을 잤다.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소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家系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저 冬至의 불빛 불빛 불빛.

 

─ 기형도, <위험한 家系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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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망아지 토끼

  오리치를 놓으려 아배는 논으로 내려간 지 오래다

  오리는 동비탈에 그림자를 떨어트리며 날어가고 나는 동말랭이에서 강아지처럼 아배를 부르며 울다가

  시악이 나서는 등뒤 개울물에 아배의 신짝과 버선목과 대님오리를 모두 던져버린다

 

  장날 아침에 앞 행길로 엄지 따라 지나가는 망아지를 내라고 나는 조르면

  아배는 행길을 향해서 큰 소리로

  ─ 매지야 오나라

  ─ 매지야 오나라

 

  새하려 가는 아배의 지게에 지워 나는 山으로 가며 토끼를 잡으리라고 생각한다

  맞구멍난 토끼굴을 아배와 내가 막어서면 언제나 토끼새끼는 내 다리 아래로 달어났다

  나는 서글퍼서 서글퍼서 울상을 한다

 

- 백석, <오리 망아지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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