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5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5/22
    정신분석 혁명
    pug
  2. 2006/05/14
    맑스주의의 향연
    pug
  3. 2006/05/13
    라디오헤드 신드롬의 정체
    pug
  4. 2006/05/11
    2006년 5월
    pug
  5. 2006/05/11
    죄와 벌
    pug
  6. 2006/05/11
    이반 일리치의 죽음
    pug
  7. 2006/05/10
    라스트 데이즈
    pug
  8. 2006/05/10
    싹트는 생명
    pug
  9. 2006/05/09
    퍼스의 기호 사상
    pug
  10. 2006/05/02
    언어
    pug

정신분석 혁명

정신분석 혁명 - 프로이트의 삶과 저작 
마르트 로베르 (지은이), 이재형 (옮긴이) | 문예출판사
 
 
 
"프로이트 개론서의 고전." '프로이트의 삶과 사상에 대한 친절한 입문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맑스주의의 향연

맑스주의의 향연 - 컬리지언총서 22 | 원제 Adventures in Marxism
마샬 버먼 (지은이), 문명식 (옮긴이) | 이후
 

 

 

========================================

 

 

13장이 벤야민에 관한 것.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라디오헤드 신드롬의 정체

라디오헤드 신드롬의 정체
장호연 bubbler@naver.com | contributor
 

정규 앨범 발매에 앞서 mp3 파일이 인터넷에 유출되는 현상은 이제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놀랍다면 화이트 스트라이프스(The White Stripes)에서 최근 스피리추얼라이즈드(Spiritualized)에 이르기까지 mp3 파일 유출 관련 뉴스가 미디어의 중요한 기사거리로 자리잡은 속도와 (의도했든 안 했든) 그것이 갖는 홍보 효과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 뮤지션의 인기를 말해주는 한 척도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네임밸류가 높은 뮤지션일수록 뉴스는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유출 시점 또한 빠르다. 심지어는 잘못 확인된 음원이나 채 녹음이 완료되기도 전의 음원이 떠돌아다니기도 한다.

금년도 가장 기대를 모으고 있는 화제작인 라디오헤드(Radiohead)의 6집은 이런 소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정식 발매일을 세 달이나 남겨둔 지난 3월말 믹싱도 마치지 않은 채로 인터넷에 등장한 [Hail to the Thief]는 네티즌들의 열렬한 관심 속에 폭발적인 다운로드로 이어졌다. 한편 이보다 조금 앞서 밴드는 정규 앨범에 앞서 소규모 투어를 갖겠다는 발표를 내놓았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다섯 개 도시에서 열리는 이번 공연은 특히 6년 만에 처음으로 갖는 실내 공연이라는 점에서 팬들의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게다가 이미 인터넷에 공개(?)된 음원이 지난 앨범들이 보여준 지나친 실험성의 우려를 불식시키듯 좀더 대중친화적인 사운드를 담고 있었던 터라 기대가 더욱 컸다. 홈페이지를 통해서만 판매된 공연 티켓은 당연히 수시간만에 매진이 되었다. (한편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티켓 역시 오프닝을 맡은 R.E.M.과 더불어 라디오헤드의 참가 소식이 알려지면서 기록적인 시간만에 매진되었다.)

지난 토요일부터 더블린에서 시작된 이번 투어는 예상대로 미디어의 대대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NME는 (그렇게 구하기 어려웠다는) 티켓을 경품으로 제시하며 독자들의 관심을 유도했고, 거의 매공연 리뷰를 신속하게 홈페이지에 올리는 열의를 보여주었다. 멀리 미국과 일본에서 이들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의 인터뷰까지 실으면서 말이다. 월요일자 몇몇 일간지들도 이들의 공연을 관심 있게 보도하는 등 이런 열기는 정식으로 앨범이 발매되는 6월초에 정점에 달할 전망이다. 그런데 대체 이런 열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라디오헤드 '신드롬'이라 불러도 좋을 이런 열광에는 뭔가 별난 구석이 있어 보인다. 사실 대중성으로만 따지자면 라디오헤드만큼 음반 판매량이 유명세에 못 미치는 밴드도 없을 것이다. 물론 이들이 현재 거의 유일하게 영국이 세계에 내세울 만한 밴드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신드롬은 비단 영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록 음악의 미래라는 설명은? 미래를 진단하는 일에 일관된 합의를 끌어내는 것도 어렵거니와, 여기에는 록 음악이 현대 문화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설명해야 하는 까다로움 또한 따른다.

운이 좋게도 티켓을 구한 나는 셋째 날(5월 19일) 벨파스트(Waterfront)에서 공연을 보면서 나름대로 의문을 풀었다. 이는 잠시 뒤로 미루고 먼저 공연장 분위기부터 스케치하자. 이들의 인기를 실감했던 것은 벨파스트에서 공연이 열리던 날 시내 호스텔 예약이 일치감치 끝났다는 점이다. 물론 공연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성수기도 아니고 주말도 아니고, 유명한 관광 도시도 아닌 점을 생각한다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공연장소를 확인하러 간 오전부터 공연장 주변에서 사진찍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일본인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실제 공연장에서는 수많은 인파에 묻혀 이들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일본에서 라디오헤드를 보러 많은 사람들이 떠났다는 소문이 사실인 듯했다. 모르긴 해도 유럽이나 미국에서 건너온 사람들도 제법 되었을 것이다. 라디오헤드의 팬덤이 국제적임을 새삼 확인한 순간이었다.

이들의 공연의 시작은 여느 공연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등장한 이들은 첫 싱글로 결정된 "There There"를 시작으로 신곡들과 예전 곡들을 적절히 오가며 연주했다. 인터넷으로 얻은 첫날 공연리스트는 이들이 다른 곡들과 순서로 공연을 채운 탓에 별 쓸모가 없었다. 솔직히 첫 느낌은 과도한 기대에 다소 못 미쳤다. 경력에 비해 손발이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고, 여기에 영국 밴드는 미국 밴드에 비해 라이브가 딸린다는, 경험상에서 얻은 편견이 더해졌다. 그런데 곧 나는 정신없이 이들에 홀려들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톰 요크(Thom Yorke)의 마술에 홀려들고 있었다.

한마디로 공연장에서 만난 라디오헤드(톰 요크)는 우리가 가장 편안하게 생각해온 예술가 이미지에 정확히 부합하는 밴드였다. 즉, 영감에 사로잡힌 천재이자 그들만의 세계의 창조자였다. 사실 천재니 영감이니 자율성이니 하는 관념들은 19세기 낭만주의 시대로부터 이어져온 미학으로 서구의 클래식 문화 전통의 우월성을 확보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20세기의 대중 문화와는 근본적인 충돌을 보였고, 그 과정에서 록 음악은 밴드 공동체와 진정성(authenticity)이라는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냈다. 즉, 록 음악은 개인의 산물이 아니라 밴드 멤버들 간의 공동 작업의 소산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동시대를 반영하는 산물로서 리얼리티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체계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면 낭만적인 예술가상은 간단하게 폐기처분 되었을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여전히 예술가에게 특별한 뭔가를 기대한다. "예술가는 시대의 예민한 촉수"라는 말을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예술가, 특히 음악가가 본질적으로 자기들과 다른 세계를 갖고 있을 것이라도 믿는다. 이는 저널이나 아티스트 전기물에서 '표현'이라는 말이 여전히 득세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데, 아마 이것이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은 공연장일 것이다. 여기서 모든 사운드는 마치 보컬리스트의 '직접적인' 표현인 것처럼 연출되고 경험된다.

라디오헤드의 공연장에서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철저하게 톰에 집중된다. (물론 모든 공연이 그런 것은 아니다. 화이트 스프라이프스의 공연은 맥과 잭의 주고받음으로 긴장감과 재미를 높이고 있고, 욜라 텡고(Yo La Tengo)의 경우 악기를 서로 바꿔 연주함으로써 멤버들간의 평등한 관계를 잃지 않는다.) 이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톰 요크의 목소리다. 독특한 울림과 풍부한 표현력을 자랑하는 그의 목소리는 이들의 음악에 담긴 다른 멤버들의 아이디어와 노고를 '간단히' 그의 표현으로 만들어버린다. 풍부한 성량과 카리스마로 무장된 목소리가 신들린 듯한 제스처와 만날 때, 무대에는 오직 톰 요크밖에 보이지 않는다. 즉, 라디오헤드는 그의 메신저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 이런 점은 이들의 음악에서도 어느 정도 확인될 수 있다. 라디오헤드의 곡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도처에 분석이 불가능해 보이는 즉흥성이 발견된다(특히 [Kid A] 앨범이 그렇다). 블러(Blur)의 음악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고민 끝에 이뤄낸 사운드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데, 라디오헤드의 경우 멤버들이 만나 사운드를 하나하나 구축해가는 광경보다 톰이 영감에 홀려서 혹은 꿈속에서 계시를 받아 적어낸 사운드라는 비유가 더 적절해 보인다. 물론 우열을 가리자는 의미가 아니라 음악 구조가 환기시키는 이미지가 전혀 다르다는 뜻이다. 그만큼 라디오헤드의 음악은 곡 진행을 예측하기가 어렵고 화성이나 선율 진행이 독특하다.

이들의 사운드가 [OK Computer]부터 점차 세상과 거리를 두고 우주적인 사운드스케이프로 이동하는 것도 이런 심증에 힘을 더한다. 몽롱하고 수수께끼 같은 사운드와 톰 요크 특유의 웅얼거리는 보컬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라디오헤드만의 세계의 징표가 되었다. (꿈, 무의식이야말로 예술가를 상징하는 기표가 아닌가.) 그래서 이들이 커버곡을 연주한다는 것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우며, 다른 밴드가 라디오헤드의 곡을 연주하는 것 역시 선뜻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라면, 한때 자발적인 표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간주되었던 테크놀로지가 라디오헤드의 경우 표현성을 드높이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칸트의 말대로 "천재는 스스로에게 부과된 하나의 법"이므로 천재를 규율할 수 있는 것은 천재 자신밖에 없다. 그래서 라디오헤드 이후는 있지만 라디오헤드 이전은 없다. 라디오헤드에 대한 열광은 거의 [OK Computer]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앞서의 두 음반이 그런지와 느슨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데 비해 이 음반은 전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혹은 개척한 것처럼 들렸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트렌드나 로컬 씬과 무관한, 말 그대로 스스로 규율을 창안해낸 창조자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라디오헤드가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말은 거의 들리지 않은 반면, 트래비스(Travis)로부터 콜드플레이(Coldplay)에 이르기까지 199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영국의 기타팝 밴드들은 다들 라디오헤드의 적자로 거론되는 상황을 맞이했다.

톰 요크의 퍼스낼러티 또한 낭만적인 예술가상에 더없이 잘 들어맞는다. 그의 예민한 목소리는 세상과의 불화를 혼자 짊어진 듯 들리며, 왜소한 체격 또한 병을 앓듯 마른 체형을 선호했던 낭만주의 예술가 신화에 부합한다. 천재는 시대로부터 외면을 받는다는 말은 이들의 컬트적 팬덤과 연결되며, 예술은 시공을 초월한다는 통념은 팬덤의 국제적 양상과 일치한다. 예술가 신비주의는 이들의 인터뷰가 톰보다는 다른 멤버들에 의해 주로 이뤄짐으로써 유지된다. 게다가 그의 목소리와 무대에서 보여지는 제스처에서 예술가의 상징인 정신분열적 양상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또한 진정한 예술가는 대중에 영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음악에서 업템포의 발랄한 댄스 곡을 찾기 어렵다는 점과 연결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공연장 입구에 붙은 모싱을 금지한다는 안내말은 사실 불필요했다. 이들의 음악은 모싱은 고사하고 박수조차 치기 어렵다.

이상이 라디오헤드의 공연을 보면서 나름대로 얻은 해답들이다. 정리하자면, 수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영감에 찬 초월적 예술가라는 이미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있으며, 이는 라디오헤드의 경우 록 이데올로기의 정반대편에서 극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영화 담론에서 작가주의 관점이, 영화 자체의 산업적인 속성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공연장에서 연출되는 이미지와 실제 모습과의 거리라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으며, 이렇듯 예술가상을 강화하기 위해 연출되는 콘서트가 비단 라디오헤드만은 아닐 것이다. 다른 점은 (그리고 이점이야말로 이들에 대한 이상 열기를 설명해주는 것일 텐데) 그 '강도'에 있다. 그래서 이런 해석에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애석하게도 하나밖에 없다. 라디오헤드의 공연을 직접 보면서 톰 요크의 마술에 홀려들어 보라고.

한 가지 말하고 싶은 점은 톰 요크가 모차르트로 대표되는 천재 음악가상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이다. 모차르트처럼 음악적 재능은 탁월하지만 사회적으로 무능한 사람도 아니고, 또 로큰롤 초기부터 있어왔던 기인(奇人)과도 구별된다. 그는 사회와의 소통에 실패해 자폐적인 세계에 함몰되는 사람이 아니라 철저히 자신의 광기를 통제하는 사람이다. 뭔가에 홀린 듯 신들린 제스처와 목소리를 들려주다가도 곡이 끝나고 불이 꺼지면 다시 평정심을 되찾는 통제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그런 극단적인 정서를 오가려면 엄청난 신경쇠약을 감내해야 할 것 같다.) 기타의 조율 상태나 사운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연주 도중 무대를 떠나버리는 괴팍함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무대로 돌아와 곡을 연주했다. 종종 청중들에게 말을 건네기도 했고 간간히 유머를 던져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결코 동시대와 떨어진 세계에 살지 않는다는 점이다. 로스 엔젤레스 거리에 붙은 포스터 광고로 화제를 모은 "We Suck Young Blood"는 헐리우드에 대한 경멸을 담은 곡이고, "The Gloaming"을 연주할 때 톰은 "We need to stop them"이라고 말하면서 부시 행정부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했다. 아니 모든 것은 앨범 제목 속에 잘 드러나 있다. [Hail to the Thief]에서 도둑은 앨 고어로부터 대통령 직을 빼앗아 간 부시를 가리키는 말로, 부시의 취임식 때 일부 청중들이 내던진 말이라고 한다. 20030522

 

www.weiv.co.kr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년 5월

radiohead - kid A(2000)

한 곡만 듣고 놀래 자빠졌는데, 다 들어보니 그 정도는 아니었다는.


yo la tengo - i can hear the heart beating as one(1997)

꿈같은 'autumn sweater'.

 

boris - pink(2005)

'electric'으로 집약되는 포스트록의 한 극단, 그리고 중독성.

 

audioslave - out of exile(2005)

보컬과 연주가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만으로는 무난함과 평범함을 극복할 수 없음.

 

porcupine tree - lightbulb sun(2000)

shesmovedon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죄와 벌

   "늦었어, 이제 가봐야겠다. 난 지금 자수하러 가는 거야. 하지만 난 내가 무엇을 위해서 스스로를 내주려는지 모르겠다."

   굵은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울고 있구나. 내게 손을 줄 수 있니?"

   "그걸 말이라고 해?"

   그녀는 그를 꼭 껴안아 주었다.

   "고난을 당하러 가는 것 자체가 벌써 범죄의 반을 씻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그를 꼭 안고서 그에게 입 맞추고 외쳤다.

   "범죄라고? 어떤 범죄 말이냐?" 그는 갑작스럽게 격분해서 외쳤다. "내가 더럽고 해로운 <이> 같은 존재, 아무에게도 필요치 않은 고리 대금업자 노파를 죽인 범죄 말이냐?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즙을 빨아먹은 그 여자를 죽였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40가지의 죄도 용서해 줄 거야. 과연 그런 게 범죄일까? 난 그런 것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아. 죄를 씻을 생각도 없어. 모두들 사방에서 내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말하지, <범죄다, 범죄다!>라고. 하지만 그 불필요한 수치를 향해 가기로 결심한 지금에서야 비로소 나는 내 소심함과 어리석음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어! 난 단지 비열함과 무능함 때문에 가려고 결심한 거야. 그리고 또 그…… 뽀르피리가 제안한 것처럼 그것이 유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

   "오빠, 오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지만 오빠는 피를 흘리게 했잖아!" 두냐는 절망한 목소리로 외쳤다.

   "모든 사람들이 흘리고 있는 피야." 그는 거의 미친 듯이 그 말을 잡아챘다. "지금도 흐르고 있고, 언제나 세상에서 폭포수처럼 흘렀던 피, 샴페인처럼 흐르고 있는 피, 덕분에 카피톨리움 신전에서 월계관을 쓰고, 훗날 인류의 은인으로 칭송받게 한 그 피야. 그래, 똑바로 쳐다봐, 잘 들여다보란 말이야! 난 사람들을 위해서 선을 원했던 거야. 나 자신은 이 어리석은 일, 아니 어리석다기보다는 그냥 적절치 못했던 이 일 대신에 수백, 수천 가지의 착한 일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왜냐하면 내 사상은 실패한 지금에 와서 생각하듯이 그렇게 어리석은 것만은 전혀 아니니까……. (실패했을 경우에는 모든 것이 어리석게 보이지!) 그 어리석은 행위를 통해 난 다만 나 자신을 독립적인 위치에 올려놓을 수 있는 자금을 얻기 위한 첫걸음을 떼고 싶었던 것뿐이야. 그렇게 되었더라면 모든 일은 그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무한한 이로움을 안겨 주어서 모든 것을 상쇄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난, 난 그 첫걸음을 견뎌 낼 수가 없었던 거야. 왜냐하면 난 비열한 녀석이니까! 바로 이게 문제의 전부야! 어쨌든 너희들의 생각대로 세상을 보지는 않을 거야. 만일 내가 성공했더라면, 내게 월계관을 씌워 주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난 지금 함정에 빠져 있으니!"

   "하지만 그건 아냐. 전혀 그런 게 아냐! 오빠,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아! 형식이 이래서는 안 되었어. 내가 행한 일이 그렇게 미학적으로 훌륭한 형식은 아니었어! 하지만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왜 폭탄으로, 포위 공격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더 존경할 만한 형식이라고 하는 거지? 미학적인 두려움은 무력함의 첫번째 징후야……! 난 이것을 지금보다 더 명확하게 의식해 본 적은 한번도 없어. 그리고 난 지금보다 더 나의 범죄를 잘 이해한 적은 없어! 난 지금보다 더 나의 범죄에 대해 강한 확신을 느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반 일리치의 죽음

바로 이 순간 이반 일리치는 나락에 떨어져 빛을 보았고, 빛을 보는 순간 자신이 살아온 삶이 그래서는 안 되는 삶이었지만 아직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그게' 무엇인지 자문하다 입을 다물고 귀를 곧추세웠다. 여기서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손에 입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자 아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들이 가여워졌다. 아내가 다가왔다. 그는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고, 눈물은 그녀의 코와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절망적인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졌다.

   '맞아, 저들에게 내가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그는 생각했다. '저들에겐 미안하지만 내가 죽는 게 저들에게도 나을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힘이 없었다. '가만 있자. 말이 무슨 소용이야. 행동하면 되지'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눈으로 아내에게 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데리고 나가…… 안쓰러워…… 당신도……."

   이어서 그는 '미안해'라고 말하려다 그만 "가게 둬"라고 하고 말았다. 그는 그 말을 정정할 힘이 없었지만 알아듣는 사람은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한 손을 저었다.

   그러자 갑자기 자신을 괴롭히며 나오지 않는 모든 것이 두 방향, 열 방향, 모든 방향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게 분명히 보였다. 저들이 불쌍해, 저들이 힘들어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해. 저들을 해방시켜주고 나도 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돼야 해. '얼마나 좋아, 얼마나 간단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근데 통증은?' 하고 자신에게 물었다. '어디로 간 거야? 어이, 통증, 너 어디에 있는 거야?'

   그는 귀를 곧추세웠다.

   "아, 저기 있구만. 뭐, 어때. 통증은 그대로 있으라고 하지, 뭐."

   "근데 죽음은? 죽음은 어디에 있는 거지?"

   그는 예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찾아보았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어디에 있는 거지? 죽음이라니? 그게 뭔데? 그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죽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바로 이거야!"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좋을 수가!"

   한 순간 이 모든 일이 일어났고 그 순간이 지니는 의미는 이후 결코 바뀌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임종의 고통은 두 시간 더 지속되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뭔가 부글거렸다. 쇠약해진 육신은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다 부글거리는 소리, 쌕쌕거리는 소리는 점차 잦아들었다.

   "끝났습니다!"

   누군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그 말을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죽음은 끝났어"라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그는 숨을 한차례 들이마셨다. 절반쯤 마시다 숨을 멈추고 긴장을 푼 후 숨을 거두었다.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라스트 데이즈

'재밌게 봤다'고는 말 못하겠다. (ㅋㅋ) 그러나 보기 전부터 어차피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만은 짐작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기타를 치며 부르는 노래는 정말 좋았다. 마이클 피트가 직접 작곡한 것이라고.

 

 











 

 

아래는 보너스.ㅋ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싹트는 생명

싹트는 생명 -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 원제 Germinal Life : The Difference and Repetition of Deleuze (1999)

키스 안셀 피어슨 (지은이), 이정우 (옮긴이) | 산해

 

 

 

========================================

 

들뢰즈에 대한 해설서/연구서들 중에 가장 관심이 가는 것 중 하나. 내가 관심을 가지는 분야인 베르그손-생명철학-들뢰즈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차이와 반복>>에 대해 해설한 [국내에 번역된] 거의 유일한 연구서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생물학 공부의 압박 또한 만만치 않다. 결국에는 해야 하는 것인가보다. 학문이 이렇게 분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인간 존재의 본성에 대해서는 생물학이, 우주의 근원에 대해서는 물리학이 철학보다는 더 그럴 듯한 대답을 내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하면서도 꽤나 허무하군.

 

아래는 책 소개와 목차─

 

========================================

 

들뢰즈의 사유를 다윈과 바이스만으로부터 베르그송과 프로이트에 이르는 근대 생명철학의 한 갈래에 놓고서 그 특성을 밝히는 책이다. 아울러 레이몽 뤼예, 질베르 시몽동, 야콥 폰 웩스퀼과 같은 다양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상가들의 사상까지 포함, 풍성한 바탕에서 들뢰즈의 사유를 사유한다.

 

저자는 들뢰즈 철학의 세 가지 계기인 <베르그송주의>와 <차이와 반복>/<의미의 논리> 그리고 <천의 고원>을 분석함으로써 들뢰즈의 생명철학을 일관되게 구성한다. 들뢰즈가 체계적인 생명철학을 전개한 적은 없다는 점에서, 책은 단지 들뢰즈가 구성해놓은 이론의 주석을 넘어 들뢰즈를 주제로 저자 자신이 일관되게 구성한 생명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저자는 오늘날의 생명철학 일반에 대한 폭넓은 식견을 바탕으로 현대 생명철학의 장 전체에 들뢰즈를 위치시키고 있다. 그것을 통해 들뢰즈(와 가타리)의 생명론이 현대 생명 이론들 일반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으며 또 현대 생명론 전체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과학과 철학의 벽을 넘어 포괄적인 생명론의 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서론| 들뢰즈의 차이를 반복하기

 

제1장 베르그송의 차이 개념:지속과 창조적 진화
서론
직관의 방법
직관과 지속
지속이란 무엇인가? - 잠재적인 것의 시간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들뢰즈와 '생명의 약동'
결론:베르그송을 넘어가는 들뢰즈 - 창조적 진화의 윤리학으로

 

제2장 차이와 반복:사건의 싹트는 생명
서론
선험적 조우들
개체화:시몽동과 다윈의 차이
개체화[의 이론]에 따른 윤리학
반복의 현상과 시간의 세 가지 종합
죽음충동:바이스만과 프로이트
금의 유전과 니체의 우월한 회귀 사건에 무대를 마련하기
결론:바이스만을 넘어선 들뢰즈 - 사건의 문제

 

제3장 한 베르그송주의자의 회상:창조적 진화에서 창조적 행동학으로
서론
복잡성과 유기체
탈기관체와 유기체
다양체란 무엇인가? - 베르그송주의와 네오다위니즘
혼효면으로서의 自然
창조적 절화
자기조직화의 기계적 다질생성
'behavior'의 행동학에서 배치들의 행동학으로
인간의 동물-되기
들뢰즈의 웩스퀼 독해:장점과 단점
기억을 넘어선 되기들 - 바이스만과 하디
결론:절대적 탈영토화로서의 철학

 

결론
주름과 초주름
주름으로서의 회귀
인간을 넘어서

 

옮긴이의 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퍼스의 기호 사상

퍼스의 기호 사상 - 현대사상의 모험 15 | 원제 A System of Logic, Considered as Semiotic

찰스 샌더스 퍼스 (지은이), 김성도 (옮긴이) | 민음사


 

 

========================================

 

현대 기호학의 두 원천 중 한 명. 다른 하나는 물론 소쉬르다. 들뢰즈의 언어학은, 다른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소쉬르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과는 다르게, 이 퍼스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제목이 저래서 우리나라 학자가 풀어 쓴 입문서나 개론서인 줄 알았건만, 지은이가 퍼스 자신인 걸 보니 그저 그의 여러 글들(1차문헌)을 한데 묶어 번역해서 출판한 모양이다. 읽을수는 있을 정도로만 어려웠으면 좋겠는데, 과연.

 

========================================


[역자 해제] 퍼스 사상의 지평 및 기호학의 위상

1. 들어가기
2. 퍼스의 기호학 관련 저술
3. 퍼스 기호학의 철학적 토대
4. 퍼스의 현상학과 범주론
5. 현상학적 범주론
6. 퍼스의 전기 및 지성사
7. 논리학에서 기호학으로
8. 여러 과학들에서 기호학의 위상
9 기호학의 분할
10. 표상 이론으로서의 기호학
11. 기호의 삼원적 분석
12. 기호 유형론
13. 기호의 분류
14. 퍼스의 의미 이론
15. 퍼스의 인지 이론과 진화론적 우주론

 

퍼스의 기호론과 현상론 선집
들어가기

 

[1] 현상학
1. 현상 또는 파네론
2. 범주들: 일차성. 이차성. 삼차성
3. 일차성은 감정과 성질의 범주
4. 이차성은 경험, 대결, 그리고 사실의 범주
5. 삼차성은 사고와 법칙의 범주
6. 이차성과 삼차성이 변질된 경우들

 

[2] 기호이론
1. 기호
2. 세미오시스 또는 기호의 작용: 해석제
3. 기호의 삼분법
4. 도상 기호
5. 지표 기호
6. 상징 기호
7. 발화 기호 또는 준명제
8. 기호들의 분화

 

[3] 현상학적 기호학
1. 마음의 기본 요소
2. 지각과 지각 판단

 

[4] 기호 이론 관련 서간문
1. 웰비 여사에게 보내는 서한(1904년 10월 12일)
2. 웰비 여사에게 보내는 서한(1908년 12월 14일)
3. 웰비 여사에게 보내는 서한(1908년 12월 23일)

 

[부록- 퍼스의 초기 논문 두 편]
1. 새로운 범주 목록에 관하여(1867년)
2. 인간이 가질 수 있다고 주장되는 몇 가지 능력과 관련된 물음들(1868년)

 

참고문헌
인명색인
일반색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언어

"자연상태에서 생각하면 우리의 단순 감각들은 좀더 적은 항상성을 나타낼 것이다. 어렸을 때는 좋아했으나 지금은 혐오스럽게 느끼는 냄새나 향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경험된 그 감각에 동일한 이름을 부여하며, 향기와 냄새는 동일하게 남아 있고 내 취향만 바뀐 것처럼 말한다. 따라서 나는 아직도 그 감각을 응고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동mobilité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될 정도의 명백성을 획득하게 되면, 그 변동을 추출하여 그것에 별도의 이름을 부여하고, 차례가 오면 그것을 취향goût이라는 형태로 응고시킨다. 그러나 실제로는 동일한 감각도 다수의 취향도 없다. 왜냐하면 감각과 취향은 내가 그것을 떼내서 명명하자마자 나에게 사물처럼 보이나, 인간의 영혼 속에는 진행progrés 이외의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감각은 반복되면서 변하며, 그것이 나에게 조변석개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지금 그 감각을 그것의 원인인 대상을 통해서, 그것을 번역하는 단어를 통해서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한다. 감각에 대한 언어의 그런 영향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다. 언어는 우리에게 감각의 불변성을 믿게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경험된 감각의 성격에 대해서도 우리를 속인다. 그리하여 고급스런 맛으로 소문난 요리를 먹을 때, 그것에 부여된 찬사가 가득 실린 그 요리의 이름이 나의 감각과 의식 사이에 개입한다. 조금만 노력하여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반대임이 드러날 수 있는 데도 나는 그 맛이 마음에 든다고 믿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분명히 확정된 윤곽을 가진 단어, 즉 인류의 인상들에서 안정되고 공통적이며, 따라서 비개성적인 것을 저장해 놓은 난폭한brutal 단어는 개인적 의식의 섬세하고도 사라지기 쉬운 인상들을 말살해 버리거나 또는 적어도 덮어 버린다. 대등한 무기로 싸우기 위해서는 그런 인상들이 정확한 단어들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단어들은 형성되기가 무섭게 그것들을 낳은 감각에 대항하는 쪽으로 총구를 되돌릴 것이며, 감각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 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감각에 그들 자신의 안정성을 강요할 것이다.
   직접적 의식의 그러한 말살이 감정의 현상들에서만큼 충격적인 곳은 없다. 격렬한 사랑이나 깊은 우울증이 우리의 영혼을 침입한다. 그것은 수천의 다양한 요소들이 명확한 윤곽도 없이, 서로에 대해 외화하려는 경향은 조금도 없이, 상호 융합하고 상호 침투한 것이다. 그러한 대가를 치르고 그 감정들의 독창성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가 그 혼동의 덩어리 속에서 수적 다수성을 분간해 낼 때, 그것들은 이미 왜곡된다. 우리가 그것들을 서로로부터 고립된 것으로서 동질적 장소—그것을 이제 시간이라 부르든 공간이라 부르든 원하는 대로이다—에 펼쳐 놓는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방금 그들이 자리잡고 있던 곳으로부터 그들 각각은 정의할 수 없는 색채를 빌려왔다. 그들은 이제 탈색되어 이름을 받아들일 만반의 태세가 되어 있다. 감정 자체는 살아 있고 발전하며, 따라서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우리를 점차적으로 어떤 결정으로 향하게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감정이 살아 있는 것은 감정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지속이, 그 지속의 순간들 서로가 스며드는 지속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순간들을 서로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즉 시간을 공간에 펼쳐 놓으면서 그 감정들의 생기와 색채를 잃게 한 것이다. 우리는 따라서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분석한다고 믿었으나, 사실은 죽은 상태들의 병치로 그것을 대체한 것이었다. 그 상태들은 말로 번역될 수 있으며, 그 각각이 주어진 어떤 경우에 사회 전체가 느끼는 인상들의 공통적 요소, 따라서 비인격적 잔여물을 이루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상태들에 대해 추리하고 그것에 우리의 단순한 논리를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상태들을 서로로부터 고립시켰다는 오직 그 사실만으로도 그것들을 유genres로 세우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을 미래의 연역에 봉사하도록 준비한 것이다. 이제 어떤 과감한 소설가가 우리의 상투적인 자아의 교묘하게 짜인 직물을 찢고 그러한 외견적 논리 아래에서 근본적인 부조리를 보여주고, 단순한 상태들의 그와 같은 병치 아래에서, 명명하는 순간 이미 존재하기를 멈추어 버렸던 수만의 다양한 인상들의 한없는 침투를 보여주면, 우리는 그에게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가 우리의 감정을 동질적 시간 속에 펼쳐 놓고, 그 요소들을 말로 표현한다는 사실 자체에 의해, 그 역시 그의 차례가 되어 우리에게 그 감정의 그림자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단,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 그림자를 투사한 대상의 특별하면서도 비논리적인 본성을 의심케 하도록 그것을 배치했다. 표현된 요소들의 본질 자체를 이루는 그런 모순, 그런 상호 침투의 뭔가를 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를 반성으로 초대했다. 그에 의해 고무되어 우리는 잠시 우리와 우리 의식 사이에 개입시킨 막을 걷어 제쳤다. 그는 우리를 우리 자신 앞에 다시 세운 것[뿐]이다."

 

─ 베르그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