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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1/19
    이사
    pug
  2. 2006/10/17
    pug
  3. 2006/10/03
    밤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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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6/10/02
    세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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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09/07
    타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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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09/02
    당당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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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8/24
    곤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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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08/24
    원하는 대로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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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6/08/18
    작가/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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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8/14
    사랑방(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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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여기를 오래 버려두었는데, 혹시나 가끔씩 찾아주었을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사실 다른 곳에 블로그를 열었고, 지인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로 운영하고 있다. 아무래도 여기에서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게 더 이상 힘들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지금까지 쌓인 글들과의 단절이 너무 뚜렷해서일 수도 있고,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해서일 수도 있겠다. 단지 음악 게시물을 올리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여기서는 음원 파일을 내 계정에 올릴 수 없다). 다시 전부 여기로 옮겨오거나 아니면 그리로 이사가야 할텐데, 조만간 결정해야 할 듯 싶다. 여기로 옮겨오자니 음악 게시물들이 아깝고, 이사가자니 굳이 왜 그래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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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중 누구나 서로에게 죄를 짓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제가 가장 많은 죄를 지었어요."

 

언젠가 몸 밖으로 밀어내야 할텐데. 안에서 곪을지도 모르겠다.

 

"Why is there something, rather than nothing?"

 

"사실의 선을 따라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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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밤에 집에 혼자 있을 때 가끔 나는 내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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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

예술 - 학문 - 정치

 

관계항이 세 개가 넘어가면 공식이 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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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

내가 남성이라는 게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쉽게 바꿀 수 없기에 내가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어떤 것이 죽을 정도로 부끄럽다면, 그리고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아마도 살 수 없을 것이다. 살다보면, 타협해야만 하는 순간이 생기기 마련인 것 같다.

 

들뢰즈 덕분에 '-되기'라는 말이 유행해서, '여성-되기'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렸다. 들뢰즈는 '여성도 여성-되기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들뢰즈주의자들도 여기에 동의하는 듯 하지만 나는 이런 말들 때문에 들뢰즈로부터 멀어진 것 같다. 그(혹은, 들뢰즈주의자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 나는 그게 좀 불편했다.

 

남성이라도 여성-되기를 해야만 하는 걸까. 그런데 여성-되기라는 게 그저 그런 수사나 은유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남성이 여성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왜 꼭 되어야만 할까. 나는 이런 질문들 앞에서 딱히 답을 못찾겠고, 그저 조금 슬프고 안타깝다. 무엇 때문인지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나는 왜 비장애인이라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았을까.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라는 것 때문에 괴로워한 적은 없을까. 나는 왜 내가 인간이라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타협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모르게. 생태주의나 장애인 담론을 아주 들어보지 못한 것도 아니었을텐데, 여성주의를 접하고 내가 그랬던 것만큼 엄격한 잣대를 여기에는 들이밀지 않았다. 타협이었을 것이다.

 

나는 무엇에는 타협하고 무엇에는 타협하지 않나? 나도 잘 모르겠다. 여성-되기보다 장애인-되기는 물리적으로 더 쉽다. 그래서 타협했을까. 지구의 암세포인 인간으로써, 내가 살아있는 게 지금 곧바로 죽는 것보다 환경에 더 악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그런데도 살고 있다. 타협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은, 생태주의자들은 타협했을까? 그들도 타협했을 것이다.

 

내 생도 수많은 타협의 산물이다. 다른 사람의 생도 그렇다. 열심히 열심히 낑낑대며 기어가고 있다. 앞뒤에 친구들이 보인다. 주변 사람들도, 슈퍼집 아주머니도 주인집 할머니도 전공수업 선생님도 보인다.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다같이 기어간다. 이마에는 다들 '타협'이라고 쓰여있다. 눈물은 나지만, 왠지 기분은 좋다.

 

덧) '타협'이라는 말의 뉘앙스는 여전히 좋지 않다. 그런데 이건 단지 뉘앙스의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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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게

다음주에, 교재로 살 책의 목록이 확실해지기 전까진,

기다려야 한다. 기다려야 한다. 지르면 안 된다.

 

그동안 사 놓은 책을 다 읽어야 한다. 두 권은 당장에, 두 권은 천천히,

한 권(사르트르의 구토)은 세월아 네월아 하며 읽어야 한다.

 

교재 구입과 당장에 읽어야 할 책 두 권의 독서 후에,

비로소 지를 것이다. 당당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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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

내가 너무나도 쓰레기같아서 잠이 안 오는 그런 밤이 있다. 그런 밤에는 다리가 여럿 달린 흉측한 그리마 한 마리가 벽을 가로질러 달아나고, 나는 굳이 휴지를 둘둘 뭉쳐 꾹 눌러 죽이고서는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 누가 죽었어야만 했는지 궁금해한다. 선풍기 소리가 머리를 꽉 채워서 시끄러운 여름밤.

 

요즈음 나는 아무래도 내 안의 곤충들과 싸우고 있나 보다.

 

흉측하지만, 존재하기를 그만둘 이유는 없는 것들. 끊임없이 출몰하는 것들. 이 공간의 주인이지만, 헤드폰을 쓰고 입바른 소리를 하는 별 것도 아닌 동물에게 쫓겨다닐 뿐이다. 항상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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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대로 살기

어떤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산다. 사방을 둘러싼 의무의 벽 속에서도, 그나마 하고 싶은 걸 한다. 밥값을 아껴서 딸애 학원비로 쓰기도 하지만, 원해서 그리 하는 것이다. 밥값을 아끼는 것보단 딸애 학원을 못 보내는 게 더 괴로운 것이다. 괴로움을 피하고자, 그렇게 한다. 그들은 괴로움을 피하고자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진짜로 원하는 걸 찾아 나선다. 그들이 보기에는,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사실 그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로 원하는 걸 찾는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들을 비웃는다.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은 항상 원하는 대로만 산다. 주어진 조건 아래서는 원하는 대로만 산다. 그러나 진짜로 원하는 걸 찾는 사람들은 결코 진짜로 원하는 것을 찾아내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고 살 뿐이다.

 

물론 조건이란 건 변화한다. 그러나 변화의 원인은 절대로 예측할 수 없다. 여기에 매달리는 것은 미신이다. 대신에, 우리에겐 학문-종교가 필요하다.

 

진짜로 원하는 것을 찾는 사람들은 일상을 견뎌내지 못한다. '의미 있는' 어떤 일의 발견은 그 일 이외의 모든 일의 의미를 삭제한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는 말은, 예외적인 능력 없이는 공허한 말이다. 의미를 겹겹으로 쌓아 두텁게 만드는 화려한 수사들에 속고만 살 수는 없다. 이점에서, 책은 꼭 읽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쉽게 속이기 때문에.

 

악세사리라고, 이 모든 게. 나는 치장하는 중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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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인간

1. 전에 미당에 관한 고종석의 글을 인용했었다. 정치적으로(혹은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못했던 미당의 삶과, 문학적으로 최고 수준의 성취를 보여주는 그의 시를, 모순 없이 일관되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 혹은 그렇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 혹은 일관된 설명을 위해 사실을 훼손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요지로 하는 글이었다.

 

2.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도스토예프스키를 넘어선다'는 말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머리와 손으로 위대한 언어를 쏟아내지만,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작품은 아닐 수 있다는 것. 즉, 자기가 썼되 그 결과물에는 자신이 표현/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죄와 벌>>은 누구의 사상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손을 빌어 세상에 외출한 것일까. 그 누구가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라면, 그는 '인간 도스토예프스키'보다 깊고 풍부하며 복잡하게 사고할 줄 아는, 그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일까?

 

3. 텍스트에서 작가의 무의식의 징후를 발견할 수 있는가? 그 작가는 인간으로서의 자신과 구별되는가? 징후는 작가에게만 적용되는가? 작가는 이 세상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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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음악을 모아두는 곳을 마련했어요.

 

너무 좋아서 (누군가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생길 때마다, 그저 혼자라도 듣고 또 들으면서 끙끙대기만 했었는데, 이런 방법이 있었네요. 네이버에 새로 블로그를 만들어서 열심히 노래들을 수집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심심하면 들러주세요.

 

요 옆의 <놀러오세요~>를 클릭하시고, "뮤직뮤직사랑방"을 또 한 번 클릭하시면 됩니다.^^

 

이게 다, 아래 애슬린 데비슨의 노래 덕분이에요. 이렇게 새 집까지 장만할 줄이야. 하지만 자꾸 이렇게 말하면 기대가 너무 커져서 노래가 그다지 좋게 들리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음, 노래가 사실 별로 좋지는 않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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