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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어찌어찌하다가 생각났는데, 예전에(대학에 오기 전에) 끄적거렸던 것들을 폴더 하나에 모아서 그걸 숨김 파일과 같은 형식으로 속성을 변경해서 "내 문서" 폴더 아래에 쳐박아 두었었다. 물론, 끄적거렸던 것들 중에서도 숨겨야만 했던 것들, 그러니까 은밀한 고민이나 비밀, 개똥철학 같은 것들이 여기에 들어있다. 그런 게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다가, 최근에 발견했다.

 

어제는 인터넷이 안 돼서 하릴없이 쭉 읽었는데, (예상대로) 매우 재미있었다. 과거의 나를 간접적으로나마 다시 보는 일은 참 간질간질하면서도 스릴있다. 부끄러우면서도 대견하다. 이런 글쪼가리들도 나중에 보면 그런 느낌을 줄까? 언제까지 그럴까. 나는 언제까지 변할까. 이런 변화도 성장일까.

 

이런 글이 있다. 2000년 9월 12일에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1 가을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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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이 복잡해 졌다. 당연한 일이지만...... 무엇을 해도 머리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없으니 살아서 더 오래 숨쉬는 만큼 머리속이 복잡해지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는 다르겠지. 모든 일을 머리를 쓰며 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만큼 더 복잡해 질 수밖에. 타고난 성격이라 고칠 수는 없어도 숨길 수는 있다. 남을 의식하며 숨기려고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복잡한 사고 과정중의 하나가 아닐까? 이렇게 따지면 난 머리속이 복잡해지기 위해 태어났나보다. 남들은 '이중인격'이라 말하지만 난 나만의 신조가 있다. 'Grin and Bear it' - 웃으며 참자는 말이다. 내 본마음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 남들에게 알려지지만 않는다면 난 평생 '다듬어진 나'로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미 반년 동안은 잘 버텨왔던 일이고 앞으로도 자신이 있다. 이미 밝혔듯이 난 머리속이 복잡해지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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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특히 '이중인격'이라는 말에 집착했던 것 같다. 나 자신을 이중인격자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조금은 낙관적인 갈등이었나보다. 다음은 같은 해 11월 22일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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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나의 행동기술의 범위와 수준은 중학교 3학년 1학기 말 때를 절정으로 하고 있다. 나는 유머있어 보였으며 친근해 보였고 카리스마있어 보였으며 지적인 듯이 보였고 사려깊은 것처럼 보였고 남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는 것처럼 보였으며 남이 힘들어 할 때 같이 힘들어 해 주는 것처럼 보였고 자존심있어 보였고 인정할 것은 인정할 줄 아는 듯이 보였다. 나는 나와 관계있는 모든 사람에게 잘 대해 주었고 그 모든 사람들이 나에 대해 나쁜 감정이 없으리라는 것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한 편과 다른 편의 중재적 역할을 하였고 그 어느 쪽에 속하든지 어색하지 않았으며 나와 너무도 다른 사람들을 잘 이해했고 나와 뜻이 맞는 사람들을 앞장서서 잘 이끌어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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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부분은 너무 재수없어서 생략. ㅎㅎ

 

아, 나는 이렇게 살았구나.

 

똑같은 것 같다. 지금이랑. 저게 다 해당된다는 건 아니고, 그냥 생각하는 방식이라든지, 어떤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이라든지. 혹은 어떤 기질이나 성향이.

 

그냥 이렇게 멍하니 서서, 어디로부터 왔나, 어디로 가고 있나, 한 번쯤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이 짓을 너무 많이 해서 문제인 것 같기도 하지만.

 

 

이건 고2 여름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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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목적과 장래 희망…… 삶의 목적을 정해 놓고 삶을 시작한다는 것도 참 우스운 이야기다. 삶을 사는 과정에서 느끼고 깨닫는 것이리라. 바로 지금, 난 장래희망이 불분명하다. 내가 커서 무엇을 해야겠다는 확고한 개념이 세워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 것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지금도 하고 싶어하는 것도 있고, 되고 싶은 것도 있다. 하지만 어느 때 부턴가 높다랗기만 한 현실의 장벽을 실감하게 되고, 어쩌면 나 자신이 결국 현실과 타협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만큼 무엇인가가 꼭 되어야 하겠다는 욕심이라든가 야망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욕심은 꼭 필요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가치를 지향하려는 욕심을 야망이라 한다. 아집이나 독선 따위와는 다른 것이다. 야망이 없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성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성취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청소년기에 이런 욕심이 없다는 것은 자신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눈부신 가능성을 썩혀버릴 수 있는 위험한 행위인 것이다. 청소년기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일단 그것에 도전해 보는, 가장 용기있고, 또 아름다운 인생의 시기이기에…… 하지만 나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이런 생각을 한번 쯤 해 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즉, 이것이 나를 잠시 거쳐가는 생각일 뿐인 것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참 재미있다. 거쳐가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그것에 신경을 쓰고. 그만큼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일 것이다. 다행히 나는 왜 내가 청소년기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이런 생각이 거쳐가는 과정에서 그것이 나에게 무엇을 남기고 가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성공 ― 나는 이 단어에 처음으로 회의를 느낀 것이다. 그것이 아무 의미없는 물질적 충족만을 구하는 행위임을 - 그리고 그것의 종점임을 - 어렴풋이 알아챈 것이다. 겨우 이따위 물질적 풍요를 나의 생의 목적으로 세우기에는 마음 한 구석이 너무나 아쉽기 때문이다. 나의 생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다. '인격의 완성'이다. 아니, 그보다는 평생을 두고 인격의 완성을 위해 자신을 도야하는 한 인간의 평온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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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좀 슬프다. 이건 겉으로만 단호할 뿐, 체념의 정서가 그득하다. 이런 생각은, 그 때의 내 감정을 아직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릿한 기억.

 

그 시절에 난 왜 그리도 많은 것에 치이면서도 끊임없이 뭔가를 갈구하고 받아들이려 했을까. 그러면서도 왜 나를 둘러싼 악조건보다도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나의 무기력을 더 미워했을까. 미워하면서도 그걸 끝끝내 감싸안고 어쩔 줄 몰라했을까. 내가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라도 분명하게 만들어 놓음으로써 얻었던 그 만족감, 그런 만족감이 내가 하루 하루를 버텨내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다니. 이 고민들은 이제와 모두 부질없는 것이 되었기에 돌아갈 곳을 잃고 허둥대는 작은 짐승처럼, 보기에 못내 안쓰럽지만, 그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이들이 나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내 몸집보다도 더 커다란 짐을 등에 지고 낑낑대는 나의 모습... 작은 방에서 허리를 굽히고 뭔가를 끄적이며 한숨을 내쉬던 그 시절의 내가 한없이 못나 보이고 바보같고 철없고... 가끔은 사랑스럽다.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선사해준 것은 누구일까. 누구인지 모르지만 감사드린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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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의 내 글을 기억하는지. / 너무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있고, 내가 그 일을 해야 할 의무도, 할 수 있는 권리도 가지고 있지만, 나는 그것을 하지 않겠다는.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나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라는. …… 이제 자명한 것은, 나의 한계는 '태생적' 한계가 아니라, '종교적', 또는 '신앙적' 한계라는 것이다. 굳이 한계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정말 나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선택할 수 없는 기로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 한없이 무지하고, 나약한 자신을 발견했다.  …… 빛이 닿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나는 조그만 희망을 아껴서 먹고 사는 한 마리의 작은 짐승이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분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고, 그 뜻을 따르고 싶어 하지만, 너무나 무지해서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그래서 좌절하지만,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의 사랑을 먹고 연명하는, 언젠가는 빛을 보게 되리라는 마음 속 깊은 소망을 안고 사는, 한마리의 작고 순한 짐승이다. […] (2003년 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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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

알바가 모두 끝나는 바로 그 순간에 내 블로그에는 3,000번째 손님이 다녀간 것이다... 이런 기가 막힌 우연의 일치에다 알바로부터의 해방감까지 더해지면서 내 심장은 불이라도 붙은 듯 쿵쾅거리며 머리카락이나 손톱 끝 모세혈관까지 들뜬 감정을 배달하고, 이럴 때일수록 더욱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다보면 어느새 몸서리쳐지게 배가 고픈 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덧) 디카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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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로"에 대한 추억

꽤나 오래된 기억이라 아마도 미화되었을테지만, 학교로 선본이 총학을 잡았었던 처음 두 해는 참 좋았었다. 이른바 태평성대였다. 그러니까, 총학이 무슨 뻘짓을 할 지 조마조마해 할 필요가 없었다.

 

소위 말하는 '운동권'이 아니면서도(정확히는 "아니기 때문에") 총학이라는 것이 충분히 괜찮을 수 있다는 걸 증명했었는데, 사람들은 이제 그걸 잊어가고 있다. 아쉬운 일.

 

지금 총학은 "운동권이 싫어요!"를 온 몸을 던져가며 외치고 있다. 그 외침은 눈물나게도 진실되어 보인다. 안쓰럽다.

 

소위 말하는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의 대립은 이제 아주 거대한 감정싸움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그 대립(혹은 투쟁), 갑자기 완전히 멈춘다고, 지구가 두쪽날까? 혹은, 노동자들이 피를 토하고 쓰러질까? 지금보다 사정이 악화될까? 나는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문득, 아주 래디컬한 상식주의가 그리운 시점. 혹은, '아주' '래디컬한' '자유주의'.

 

덧) 지금 총학도 '관악 2만 학우' 운운하더라. 괴물과 싸우다 괴물을 닮는다더니. 봉준호의 괴물이나 보러 가야겠다.

 

덧2) 자유주의나 개인주의는, 현실에 대한 가장 강력한 치료제이면서도(즉 현실에 가장 필요한 '운동'이면서도), '운동'이 될 수 없는 게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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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하원칙

몸은 편하고 마음은 힘든 날.

 

1년 전까지 썼던 글들 중에는 건질 게 없다. 내 감정을 토로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거짓말이었다.

 

어떤 기억들은, 꼭 끄집어내어져야만 한다. 그런데 어떻게? 아마도 기억 속의 사건과 기억 밖에서 직접 대면함으로써. (지금은 기억 속에서만 자꾸 대면하고 있다) 그런데 언제? 이게 더 어렵다.

 

점심밥과 저녁밥을 먹는 1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땅 밑에 있었다. 이렇게 웅크리고 앉아서 소설을 읽고 싶다. 누군가 반쯤은 농담투로 권해준 "지하생활자의 수기"라든가. 기왕이면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와 함께.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나는 육하원칙의 대부분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고도 '산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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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보다는

윤리보다는 알바가 문제다, 이런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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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무엇을 하라'고 할 수 있는 적극적인 윤리학이 가능할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점점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 같다.

 

이 질문이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면, 답은 좀 더 쉽게 '가능하지 않다'가 될 수 있겠다. '이렇게 하면 좋지 않습니다', '올바르지 않아요', '이렇게 하지 마세요'와 같은 비판/충고/불평을 듣고서, 대안이나 해결책은 당사자가 직접 찾으면 된다. 그런 과정에서 물론 일종의 매뉴얼이 만들어지는데, 이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상황-의존적일 것이므로 '강령'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이런 게 억압이라고? 부정이라고? 초자아? 법?

 

그렇다면 원하는 게 무엇인가? 자유?

 

자유가 아니라 도대체 윤리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지금 여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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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사전

mbti

mbti 검사를 또 했다. 그러니까, 총 네번째로 한 거다. 그런데 네 번 다 다르게 나왔다!

 

INFJ → ENFJ → INFP → INTP의 순서로 변했는데, 왜 이렇게 변했는지 그 이유도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따라서 mbti(사실은 정식 검사가 아니라 인터넷에서 떠도는 야매 검사지만)에 대한 나의 신뢰는 아직 유효!

 

INTP에게 어울리는 직업으로 철학자가 있으니 어쨌든 만족이다.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잠이나 자야겠다.

 

) 방문자수가 2000명을 넘었다. 블로그를 연지 5개월이 되었으니까 하루 평균 10명도 넘는 방문객이 다녀간다는 말인데...

 

누구신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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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는

거미는 왜 저렇게 무섭게 생겼을까? 다리도 길고 그걸 살짝 꺾어서 사방으로 뻗은 채로 쭉쭉 나아가는 모습을 무심결에 고개를 들다가 모니터 위쪽 벽에서 발견해버렸다. 소름이 확 돋아서 어떡할까 하고 백 번쯤 고민하다가, 홈X파(모기약)를 뿌렸다. 그런데 효과가 거의 없었다. 아마도 살충액이 분사되어 나오는 힘에 살짝 놀란 듯, 다시 성큼성큼 천장쪽으로 기어 올라가는 것이었다.

 

아니, 이렇게 자세하게 묘사할 생각은 아니고, 어쨌든 그 뒤로도 또다시 이백 번은 고민하다가 결국 휴지를 많이 뭉쳐서 눌러 죽이고 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렸다. 근데 요새 부쩍 드는 생각이, 이렇게 죄책감이 심하게 들 수가 없다. 죄책감뿐만 아니라, 나한테 한심한 생각이 드는 것인데, 왜 그런 애들이랑 같이 살 수 없을까?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애들을 보면 몸서리를 치고 몸이 뻗뻗하게 굳어버려야만 할까? 누가 나한테 저 녀석이 무섭다고 가르쳤을까? 혹은, 원래 무서운 동물인 것일까? 그게 진실일까, 저 거미라는 녀석은?!

 

우리 집에는 여러 가지 곤충들이, 다행히도 가끔 출몰하는데, 내가 무서워하는 녀석들은 그리마(돈벌레)와 거미다. 이 두 종류가 특히 무섭다. 바퀴벌레도 싫지만 얘는 우리집 근처에는 안 사나 보다. 나방 종류도 무섭지만 얘도 다행히 찾아오지 않는다.

 

그리마도 아주 어린 녀석을 휴지로 눌러서 죽인 적이 있다. 살겠다고 줄행랑을 치는 걸 굳이 죽여서 버린 이유는, 저 놈이 크게 자라서 다시 찾아올까봐 두려워서였다. 그런데 커 봤자 엄지손가락만한 녀석을(역시 상상만해도 불쾌하지만서도) 도대체 왜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것일까?

 

갑갑하다.

 

우리 집에는 그리마와 거미 말고도 개미들이 아주 많이 산다. 지붕과 벽이 연결되는 부분 틈새 어딘가에 아마도 큰 집이 있나보다. 쉴 새 없이 줄줄이 내려와서 어딘가 갔다가, 또 쉴 새 없이 집으로 향한다. 아주 가느다랗게 한 줄로 가기 때문에, 내려오던 녀석과 올라가던 녀석이 예외 없이 맞부딪친다. 그러면 더듬이끼리 마주대고 아마도 서로 무슨 신호를 주고받는 모양이다. 그렇게 만나는 친구들마다 더듬이로 인사를 하는지, 아니면 먹이가 있는 곳의 정보를 얻는지 어쩌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렇게 스킨쉽을 꼭 하고 지나간다. 얘네들은 보고 있으면 아주 귀여워 죽겠다. 요새는 에어컨 위쪽에 무슨 먹을거리가 있다고 그 쪽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서 또 줄줄이 간다. 가끔은 넋을 놓고 바닥에 앉아서 애들이 지나다니는 걸 구경한다.

 

하여간 중요한 건, 개미는 안 무서운데 왜 거미와 그리마는 무섭냐는 것이다. 아, 이것만 해결되면 애들과 같이 살 수도 있고, 따라서 불필요한 살생도 막을 수 있을 텐데. 어찌해야 할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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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는

-추상적으로는 거의 알겠는데 구체적으로는 모르겠다는 것.

-급진성과 대중성은 '결과적으로는' 꼭 상충한다는 것. 급진적인 어떤 운동이 다수의 대중들을 동원하였을 때, 그 결과를 놓고 보면 분명히 둘 중 하나는 허상이었음이 드러난다는 것.

-아이들은 완전히 중립의 상태에 있다는 것.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있다는 것. (따라서 그들은 '아담'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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