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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영화를 볼 수 있으려면.
다시 묵직한 이론서를 읽어낼 수 있으려면.
다시 불빛 없이도 잠들 수 있으려면.
다시 이야기의 뒷편이 궁금하고 누군가의 발자취가 궁금하려면.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늘 낙서를 할 수 있으려면.
내가 여지껏 알고 있던 나 자신이 돌아오게 될지 확신하진 못한다.
단지 더 오래 걸릴 뿐인걸까, 아니면 달라지는 걸까.
생활을 지탱하는 자잘한 것들을 즐길 수가 없게 된 것도 좋지 않은 일이었지만..
30년이 넘도록 무의식적으로 빈 지면만 있으면 뭔가를 그리고 있어
쌓이고 또 쌓여가던 노트의 넘어가고 또 넘어가던 페이지가
반년이 넘도록 단 한 페이지도 넘겨진 적이 없다는 걸 자각했을 땐 충격을 받았다.
그걸 그때까지 못 깨닫고 있었다는 것에도.
기억이 닿는 한 나는 스스로를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알고 살아왔는데,
비단 일로서 뿐만 아니라
일상적 동작에 가까웠던 행위로서의 낙서까지도 완전히 중단되어 있었고
하고픈 욕구마저도 들지 않고 있었다.
지금도, 일은 어떻게든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니 불안하나마 겨우 재개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 외의 그림은 전혀 그리지 못한다.
작년 봄이 지난 후로 내가 아무런 책무 없이 드로잉한 것이라고는
16개월의 조카에게 크레파스가
종이에 대고 움직이면 뭔가가 묻어나는 물건이라는 걸 시범 보였던 게 전부였다.
의사는 치료는 리부팅이라고 했다.
그게, 시스템 재설치 정도일까, 포맷까지 되는 것일까, 이따금씩 생각한다.
그럭저럭 사람처럼 지낼 수 있게 된 지금까지도 여적 돌아오지 않는 것들을 기억할 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아직 단계를 밟아나가는 와중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사람은 변한다. 굳이 병 때문이 아니더라도.
하지만 올 여름 어김없이 개봉할 블럭버스터 영화가 보고 싶어 극장엘 가게 된다면,
아마도 난 조금 기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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