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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_창간준비 5호] 자본주의 체제 위기와 사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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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체제 위기와 사민주의
                                                              

김병효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정치위기가 가속화되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대중적인 분노와 저항이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는 지금 같은 시점에서 흔히들 “좌파” 또는 “진보세력”이 힘을 얻고 대중적 영향력을 넓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좌파나 진보세력이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대안 사회가 아니라 체제 내에서의 ‘개혁’을 통해 사실상 체제에 대한 구원투수 역할을 하려고 하는 세력일 경우 문제는 달라진다. “좌파” 또는 “진보세력”이라고 일컬어지는 유럽 사민주의 정당들이 현재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퇴조하고 있는 모습(10년 전 유럽 15개국에서 집권했는데 현재 군소 3개국으로 축소됐다)을 보면 한국에서도 진보정당의 운명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

 

  혁명에 반대하고 체제 내 개혁을 추구하는 개량주의 정당이라는 점에서 유럽 사민주의 정당이나 한국의 진보정당(민노당, 진보신당 등)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다만 한국의 진보정당이 집권한 바가 없어서 그 개량주의의 배신적 실체가 아직 대중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퇴조’ 여부를 말하기에는 아직 대중적 검증 자체가 안 된 단계라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현 자본주의 체체 위기, 특히 유로존 위기 속에서 최근 사민주의 정당들이 권력에서 내려오면서 부각되고 있는 유럽 사민주의의 전반적인 퇴조 현상은 자본주의 위기와 개량주의 간에 어떤 함수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주요 사례이다.   

 


사민주의 정당들의 잇단 실각

 

  2011년 11월 스페인 사민주의 정당이 선거에서 패배한 것을 끝으로 서유럽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민주의 정당이 보수 정당에게 권좌를 내줬다.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에 제도정치권의 주류인 “중도좌파” 정당이 왜 이렇게 퇴조하고 있는 것일까?
10년 전 사민주의 정당이 유럽연합(EU) 15개국에서 집권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하나씩 우파 정당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작년만 하더라도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선거로 우파 정당한테 권력을 내주었고, 그리스에서는 파판드레우 총리가 채권시장과 유럽중앙은행, IMF 등 금융자본가 집단이 지명한 “기술관료”에게 총리 자리를 넘겨주고 물러나야 했다. 오스트리아와 같은 몇몇 나라들에서 사민주의 정당이 연립정부의 하위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현재 사민주의 정당 주도의 정부가 남아 있는 곳은 슬로베니아와 노르웨이, 덴마크 3개국뿐이다.
  1930년대 세계대공황 이래 최대의 자본주의 위기와 그로 인한 빈곤과 실업, 긴축 등으로 솟구치는 대중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좌파”의 후퇴가 걷잡을 수 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에 대해 언론들에서는 의아스러워 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위기가 (특히 위기로 인해 대량실업이 뒤따르는 시기에) 자동으로 계급투쟁의 고양을 불러오는가? 그래서 선거에서 보수우파 정당 대신 진보좌파 정당에게 언제나 승리를 가져다주는가? 맑스주의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1930년대에 대공황이 한창일 때 유럽과 북미에서 우파 정부가 대거 들어섰다. 당시 거의 보편적인 모습이었다. 1970년대 말, 80년대 초의 극심한 불황기 당시도 대처와 레이건이 권력에 올라 “신자유주의 혁명”에 착수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트로츠키는 1920-30년대에 자본주의 위기에 휩싸인 유럽에 대해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자본주의 위기로 계급들 간의 사회적 균형이 교란되면서 노동자계급과 중간계급이 (중간계급은 좌로뿐만 아니라 우로도 이동한다) 급진화되고, 이것이 정당들 간의 투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결과, 이 투쟁들의 패배 또는 승리가 다시 다음 국면의 도전에 대한 반응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만일 급진화된 노동자계급이, 필요한 투쟁을 이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위기를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고 자본주의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는 당에 의해 이끌린다면 노동자들의 저항은 위축되고 패배를 겪을 것이다.”

 

  현재의 위기 속에서 “중도좌파” 정당들은 긴축을 실시하여 자신의 전통적 투표자들(빈민, 공공부문 노동자, 불안정노동자, 연금생활자 등)에게 타격을 가했다. 그래서 지지율이 떨어지고 실각하게 된 것이다. 트로츠키가 “노동자계급에 기대어 부르주아지에게 봉사하는 정당”이라고 표현했던 사민주의 정당들은 이미 지난 1백 년 동안 이런 과정을 반복해 왔다.
  유럽의 지배계급들은 국가부채 위기에서 벗어나 미국 및 중국과 계속 경쟁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국 노동자들에게 때로는 부분적 개량을 허용할 필요가 있음을 알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만이 지난 2년간의 제한적인 경제회복으로 자국의 강력한 노동자계급과의 대결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러한 여유도 이제 끝나가고 있다.

 

 

한 시기의 종말
 

 

  1950-60년대에 자본주의적 생산이 상승 추세를 타고 이윤폭이 커지면서 북유럽의 숙련노동자층에게 일련의 양보조치들을 가능케 했다. “유럽 사회모델”이 그것이다. 사민주의자들은 이제 이 장기호황의 행복했던 날들로 되돌아가는 꿈마저도 꾸지 않는다. 꿀 수도 없지만 꿀 생각도 없다.  

 

  이 시기에 공공주택과 의료, 교육 등 복지시스템의 대대적인 확충이 이뤄졌고, 노동조합은 교섭을 통해 지속적으로 임금인상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1970-80년대에 와서 다시자본주의 위기 조건 하에서 이러한 개량들이 잠식되기 시작했다.
  금융거품으로 빚어낸 호황에 기반한 세계화 시기(1992년- 2006년)에 미약하게나마 진행되었던 경제회복 덕분에 사민주의는 많은 나라에서 만년의 짧은 호시절을 누릴 수 있었지만, 이 시기 사민주의의 개량주의는 1945년 이후 시기의 전성기 사민주의와는 뚜렷이 달랐다.

 

  1990년대 중반 영국노동당 토니 블레어가 채택한 “제3의 길”이나 독일사민당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신(新)중도” 노선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투항한 것을 위장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포장에 지나지 않는다. 블레어의 제3의 길은 교육, 의료, 공공서비스를 기업이나 부자들에 대한 세금으로가 아니라, 신용 거품을 크게 일으켜서 지속하는 것이었다. “개혁”은 이제 “노동시장 유연화”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노동기본권을 축소하고, 공공서비스와 기간산업을 시장화 · 사유화하고, 기업에 대한 감세와 금융 규제완화를 실시하는 것이 곧 제3의 길이었다.

 

  사민주의는, 금융호황이 지속하는 한 그 핵심 유권자층(독일에서는 금속 제조업 대기업 노동자들, 영국에서는 공공부분 노동자들)의 역사적 성과물을 어느 정도는 보존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민주의는 저임금 노동자나 임시직, 청년 노동자 및 이주 노동자들에게 부담을 떠넘겼다. 그리고 그 결과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에서, 행동에 나서라는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노조 지도부들이 굴복하면서 대중적인 노동계급 저항이 거듭 터져 나왔다.   

독일을 예로 들어보자. 독일사민당의 슈뢰더는 1998년 녹색당과의 연립내각을 통해 총리 자리에 올랐다. 16년 동안 권력 밖에 있었던 사민당이 이제 개혁조치들에 다시 착수할 것이라는 희망은 산산조각 났다. 반대로 슈뢰더는 2003년부터 “어젠다 2010”이라는 이름으로 연금과 실업급여를 낮추고,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는 일련의 공격에 착수했다. 슈뢰더 집권 당시에 실업자가 400만 명이나 됐다. 그리고 집권 말기인 2005년에는 그 수가 500만에 이르렀고, 실질임금은 멈춰 섰다.

 

  2005년 9월 총선 패배 이후에도 독일사민당은 앙겔라 메르켈이 이끄는 중도우파 기민당과 연립정부를 지속했다. 2009년에는 1백년 내에 가장 낮은 23% 득표율을 기록하며 마침내 연립정부에서도 쫓겨났다. 사민주의가 독일 자본주의에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그 대가는 자신의 지지 기반을 까먹는 것이었다.

 

 

대가를 치르다
 

 

  2007년 위기가 처음 출현한 때부터 지금까지 유럽의 사민주의 정당들은 패배에 패배를 거듭했다. 2008년 4월 이탈리아 사민주의 정당인 민주당(구 이탈리아공산당)은 부패한 언론 재벌 베를루스코니에게 또 다시 굴욕적인 참패를 맛보아야 했다. 무솔리니 시절 이후 처음으로 이탈리아 의회에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말하는 의원이 한 명도 없었다. 복지국가 모델로 유명한 스웨덴 사민주의도 만년 집권당의 지위를 마침내 잃어버렸다. 사상 처음으로 보수당이 2006년에 승리하였고, 2010년에는 더 큰 표차로 연임에 성공했다.

 

  2006년 총선거에서 네덜란드 노동당의 핵심 지지층 1/4이 이탈하면서 간신히 20%대 득표를 넘겼다. 2010년 4월 헝가리에서 신자유주의 우익정당인 피데쯔(청년민주동맹)이 2/3라는 압도적인 득표로 헝가리 사회당을 몰아냈다. 2006년 42% 득표에 190석을 차지했었던 헝가리 사회당이 2010년 19.3% 득표에 58석으로 쪼그라든 것이다. 파시스트당인 조빅스당의 16.67% 득표, 47석에 근소한 차로 겨우 앞선 것이다.
  최근에 독일사민당 당수인 시그마르 가브리엘은 슈피겔 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사민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다시 한 번 길들여질 필요가 있다고 확신한다. 첫 번째는 우리가 독일에서 수십 년 동안 사회적 시장경제를 통해 그것을 이룩해냈다. 그것으론 더 이상 충분치 않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유럽 전체에서, 나아가 전 세계에 걸쳐 해내야 한다. 이것은 공산주의라는 사이비 대안을 부활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시장경제를 다시 전취하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글로벌 자본주의 호랑이를 길들이려고 하는지 -- 그것도 장기호황기도 아닌 “긴축 시대”에 -- 에 대해서는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실제로 지금 유럽의 사민주의 정당들은 현 위기가 터지기기 전 신자유주의가 창궐했던 당시 철저히 자본에 굴종하여 부역했던 경력이나 이념적 해체 상태(영국에서 블레어, 독일에서 슈뢰더, 프랑스에서 조스팽 시절)를 근본적으로 되돌려 놓고자 하는 그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신용경색과 은행권 위기, 그리고 이어서 국가부채 위기 등 자본주의의 역사적 위기의 초입 국면에서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사태들은 “유럽 사회모델”이 더 이상 고쳐 쓰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망가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선거에서 사민주의 정당에 대한 지지도를 떨어뜨리고 정치 일반에 대한 환멸 -- 하락하는 투표율과 냉소주의로 표현되고 있는 -- 을 낳고 있다. 이는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젊은 층들 사이에서 아나키즘과 자율주의가 세를 키워나가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사민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쨌든 이후에도 사민주의는 지속할 것인가? 현재로선 그렇다. 여전히 사민주의는 그 과거의 헤게모니로부터, 그리고 노동조합 및 지방정부에 내린 그 물질적 뿌리들로부터 유래하는 거대한 권력의 비축고를 아직 가지고 있다. 특히 무엇보다, 대다수 나라들에서 사민주의 정당을 대체할 진지한 선거 대안이 부재하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사민주의가 다시 집권할 수 있을까? 역설적으로 이것은 그들 지도부가 정색하며 싫어하는 것 -- 전투적인 계급투쟁 -- 에 달려 있다.   

  노동자계급이 쟁취한 지난 60년간의 사회적 성과물을 되빼앗고 파괴하려는 자본의 기도에 맞선 저항이 솟구쳐 이것이 지속가능한 총파업들 -- 지난해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 로 나아간다면 유럽의 보수우파 정부들을 끌어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노동자들에 의존하면서 자본가계급에 봉사하는 당들이 제 역할을 다시 한 번 수행하도록 호출될 것이다. 자신들의 노동계급 지지자들의 힘을 분산시키고 사기저하로 몰아넣어 자본주의 체제를 방어하는 그 역할 말이다. 또 한 번 배신당하지 않으려면 다른 대안을 찾아 나서야 한다. 투쟁 속에서 만들어지고 투쟁을 위한 대안인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의 길로 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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