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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8] 통합진보당 사태와 좌파의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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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꼬뮤날레 2차포럼]
자본주의 생산의 실패와 좌파의 대안

 

통합진보당 사태와 좌파의 대안

 -  발표/ 고민택 (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 운영위원장)

 -  토론/ 김종철 (진보신당 창준위 부대표)

 

일시: 2012년 6월 18일(월) 오후 3 - 8시
장소: 서강대학교 다산관 209호
주최: 맑스코뮤날레, 기본소득네트워크, 레프트대구,마르크스주의연구,문화과학,실천,진보평론
주관: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영상: 코뮌영상네트워크 http://cafe.daum.net/communepictures

 

 

 

 

통합진보당 사태와 좌파의 대안


 

 

- 고민택(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

 


1. 들어가며

 

  최초에 ‘통진당 사태’가 터져 나온 뒤 시간이 제법 흐른 지금의 시점에서 거두절미하고 곧바로 본론적인 얘기를 하면 이제 ‘통진당 사태’를 말하기 위해서는, ‘통진당에 대해’ 말하는 것을 넘어, 아니 ‘통진당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도, 그 본질에서 곧 ‘좌파가 무엇이냐’를 답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다시 말해 ‘좌파의 대안’이 무엇이냐가 빠진 채 ‘통진당 사태’를 말한다는 것은 더 이상 의미도 따라서 실효성도 없다.

 

  물론 아직도 ‘통진당 사태’가 진행 중에 있고, ‘통진당 사태’가 정세에 미치는 영향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이런 상태는 시공간적으로 적어도 연말 대선까지는 이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실적, 대중적, 정세적 차원에서 ‘통진당 사태’를 둘러싼 쟁점은 의지와 관계없이 객관적으로는 계속해서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라도 이제는 주어를 통진당에서 좌파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이제 ‘통진당 사태’에서 초점은 ‘사태’가 아니라 ‘통진당’ 자체로 겨눠져야 한다. ‘사태’는 통진당을 구성하는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거나, ‘사태’가 어떻게 전개, 귀결된다고 해도 통진당 그 자체는 노동자계급 또는 좌파의 입장에서는 자명하다. 통진당은 통진당 결성 자체에서 이미 그 운명(정체성)이 정해졌다. 통진당은 어떤 ‘진보정당’이냐가 아니라 단지 어떤 ‘국민정당’이냐만 남았을 뿐이다.

 

  ‘사태’가 발생함으로써 달라진 것이 있다면 ‘국민정당화’를 누가, 즉 어떤 세력(정파)가 주도할 것인가가 불투명/불안정 해졌다는 것이다. 이른바 기존 당권파(NL 주사파)가 안정적으로 주도권을 가져가기(행사하기)가 어려워졌지만 역시 신당권파(비주사 NL/국참당/노심조)로써도 주도권을 잡기가, 나아가 설령 잡는다 해도 행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당권 선거를 통해 법적으로는 불투명은 어느 정도 해소된다고 해도 정치적 불안정은 계속될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더 증폭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두 가지로 인한. 즉 첫째 통진당의 국민정당화로의 이행과 둘째는 ‘통진당 사태’가 낳은 ‘정치 공백’을 더는 지배계급이 차지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앞에서 말한 좌파의 정체성 정립이 선행되어야 한다. 통진당에 대한 비판이 곧 좌파의 정체성일 수는 없다. 이미 통진당에 대한 비판의 초점이나 ‘정치 공백’을 메우고자 나서는 일련의 흐름들이 제 각각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좌파의 정체성을 말하는 데 있어 한 가지는 먼저 분명하게 확인해야 한다. ‘통진당 사태’에서 찾아야 할 교훈(대중적 차원) 또는 과학적 분석(운동적 차원) 모두의 측면에서 볼 때, 통진당이 떠난 공백을 또 다른 의회/개량주의 정당이 대신할 수 없으며 대신하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이것은 선언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동시에 지금 당장 그럴 수 있는 현실 여건이 갖춰져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부터 어떻게 하느냐, 즉 다시 말해 앞으로의 정치투쟁에 의해서 그 결과에 의해서만 최종적으로 결정 날 수 있을 뿐이다. 문제는 딴 데 있다. 첫째는 처음(출발)부터 아예 불가능하다고 치부하면서 포기하는 것이다. 둘째는 노동자(피지배)계급이 처한 일반(공통)적 과제를 건너뛴 채 곧바로 정파적 사고를 앞세우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함정)는 사실 서로 다른 각각의 성격을 띠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위 두 함정을 피하면서, 아니 함정을 피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통진당 사태’ 나아가 통진당 자체에 대한 공동의 이해와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에만 눈을 팔거나 말단지엽적인 것에 매달릴 시간이 없다. 지배계급이 가하는 공세에 대해서는 통진당까지를 포함해서 공동대응을 해야 하겠지만,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 훨씬  긴급하고 중요한 것은 ‘야권연대 반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자성’을 주장하는 세력들 간의 공동대응 전선을 형성하는 문제다. 각자 분산된 채로 기존 조직의 관성에 따라 각개약진 하거나 암중모색을 하는 방식으로는 대중의 관심과 동력을 이끌어 낼 수 없다.   

 

 

2. 정세 인식

 

  가장 큰 틀에서 볼 때 지난 4년에 걸친 노동자 민중 투쟁과 이명박 정권이 추진한 ‘친자본, 친기업, 친부자’ 정책에 대한 대중의 불만과 분노 표출의 결과로 반MB 투쟁전선과 정서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었으며 실제로도 이명박 정권의 통치력(지배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새누리/민주통합당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집권 여당(한나라당) 내부는 이른바 ‘친이/친박’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그것은 지난 대선 경선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과 그 후 정권 및 당 운영에서 ‘친이’계의 일방적 (권력/이해)독식에 따른 불만이 작용한 때문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성격은 점차, 비록 부분적이긴, 하지만 정세적/계급적 성격을 내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특히 재보궐 선거와 지방선거에서 연달아 집권 세력이 패배하게 되는데 그 원인이 바로 노동자 민중의 광범위한 불만과 분노가 이명박 정권을 향했던 데 있다.
  박근혜(친박세력 및 보수세력 일부)는 지방선거와 서울시장 선거에서 쟁점으로 떠오른 ‘무상급식’ 문제,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 투쟁, 장기투쟁사업장 특히 희망버스 투쟁을 통해 전면화되기 시작한 ‘비정규직/정리해고’ 문제, 나아가 ‘친자본(재벌)’ 정책이 낳은 양극화 심화 문제 등에 주목하면서 ‘복지’, ‘경제민주화’, ‘재벌개혁’ 등을 포착하고 이를 주요 쟁점으로 삼기 시작했다. 즉 노동자 민중들이 표출하는 광범위한 반MB 정서를 일부 인정/수용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이명박 정권과의 차별화를 통해 총선과 대선을 돌파하고자 한 것이다.(여기에 비대위원장을 맡으면서 당명변경, 쇄신, 공천 등에서의 변화를 추진)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대패한 민주당은 제1 야당이라고 하기에도 무색할 정도로 소수 야당 신세로 떨어졌으며 거리와 투쟁현장 모두에서 노동자 민중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 근본적 원인은 알다시피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진 10년 집권동안 그들 정권이 양극화 유발, 정리해고 남발, 비정규직 양산을 낳은 주범으로 행사한 데 있다. 민주당은 노동자 민중들로부터 한나라당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 정당(세력)으로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민주당도 이명박 정권 초기에 보였던 우경화(뉴민주당 플랜) 노선을 접고 ‘무상급식’, ‘보편적 복지’ 등을 전면에 걸면서 한편으로는 ‘진보정당’과의 연대/연합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 민중들의 요구를 받아 안는 자세를 취했다. 지난 총선에서 충분히 과반, 원내 1당을 차지할 수 있는 정도의 정세가 형성되었음에도 이를 실현하지 못한 것은 노동자 민중의 요구와 주장, 그리고 한나라당의 변신에 충분히 부응/대응하지 않고 오직 ‘반MB야권연대’에만 의존한 탓이다. 민주당이 새누리당에게 제 1당과 원내 과반을 빼앗겼다는 측면에서는 실패(패배)했다고 할 수 있지만, 지난 4년 전의 상황과 비교하면 그 정치력을 괄목할 만큼 회복(성공)을 했으며 연말 대선에서 새누리당과 경합할 수 있는 정도로 부상했다. 물론 민주당은 그럼에도 지난 지방선거, 서울시장 선거, 이번 총선 등에서 보듯이 여전히 ‘진보정당’과의 연대는 물론 박원순, 안철수 등과의 연대/연합을 이뤄야만 하는 조건을 안고 있다.

 

 

  진보정당/‘범좌파’/사회주의 세력

 

  이런 민주당을 결정적으로 되살려 낸 것은 참으로 어이없게도(한심하게도) ‘진보정당’과 민주노총 관료지도부다. 이들은 노동자 민중의 광범위한 반MB 투쟁동력과 정서를 더욱 계급적, 정치적, 투쟁적으로 강화하는 것을 통해 스스로 대안 세력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고 엉뚱하게도 민주대연합/야권연대를 통해 오직 정권교체를 이루고 그 속에서 부르주아 야당과의 ‘공동(연립)정부’ 구성 그리고 원내 (다수) 진출을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진보정당’은 일차적으로 노동자 민중의 반MB, 더 나아가 반자본(재벌) 요구와 투쟁을 앞장서 조직하거나 이끌지 않았다. 오히려 민주당과의 야권연대를 위해 요구와 주장을 민주당과의 그것과 맞추기 위해 하향평준화(우경화, 탈계급화)를 시도했다. 특히 현대차비정규직, 한진중공업 및 희망버스, 쌍차, 장기사업장 투쟁 등에서 야4당과의 중재를 이끌어내면서 투쟁을 왜곡, 약화시키고 야권연대지지(의존)로 전락시킬 뿐이었다. 반값 등록금, 한미FTA 반대 투쟁 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당 내 정동영의 움직임이 돋보일 정도로 ‘진보정당’의 모습은 초라했다. 그로 인해 노동자 민중의 반MB는 요구와 정서를 ‘나꼼수’, ‘박원순/안철수’ 현상 등에 빼앗기는 결과를 낳았다. 결정적으로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박원순과의 단일화까지 나아갔다.
  다른 한편으로 ‘진보정당’은 민주노총이 요구하는 ‘진보대통합’을 계기로 오직 이 문제에만 매달리면서 민주노총 조합원의 관심을 거기에 묶어 두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진보대통합’을 넘어 ‘민주대연합’까지 쟁점이 되기 시작함으로써, 마치 ‘진보대통합’과 ‘민주대연합’이 커다란 차이라도 있는 듯한 착시 현상을 낳았다. 즉 ‘진보대통합’의 뿌리가 곧 ‘민주대연합’이며 ‘민주대연합’의 몸통이 야권연대에 있다는 사실은 감춰졌다. 그 연장에서 ‘통진당’ 결성과 ‘진보신당’의 부분 잔류로 귀결됐다. 민주노총이 총선에서 ‘통진당’에 대한 배타적지지를 감행하는 상황이 발생했지만 이에 대한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투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런 과정에서 ‘범좌파’ 및 ‘사회주의’ 세력은 야권연대에 맞서는, 맞서기 위한 정세, 정치, 대안 구심을 전혀 형성하지 못했다. 단지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공론조차 형성되지 않았다. 그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어느 정도라도 실천에 옮긴 세력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범좌파’부터 ‘사회주의’ 세력을 망라하여서도 야권연대와 진보정당에 대한 정치적 대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즉 정세에 대한 개입과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채 평소와 같은 일반적/추상적 차원에서 단지 각자 조직이 처한 사정에 따라 매우 파편적이고 부분적으로 진행된 선전활동 정도가 전부다. 이런 상태는 총선 이후부터 ‘통진당 사태’가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지금에도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그 바람에 투쟁하는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자신들끼리의 ‘연대투쟁’을 이끌어 내는 것을 넘어 정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근거와 동력을 확보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 역시 야권연대와 진보정당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이런 결과가 그들만의 잘못에 의해 발생한 것은 아니다. 바로 그들을 조직해야 할 세력들이 보인 정치적 무기력이 그들로 하여금 그 이상의 정치적 전망을 갖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 더욱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런 속에서나마 재능 투쟁이 버텨준 것이, 비록 그 내부의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다행한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쌍차투쟁은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달리 심정적 연대와 호소를 넘어 계급적 분노와 요구를 집중시키는 구심이 되지 못하고 있으며 현대차비정규직 투쟁은 아직 본격화되지 못한 조건에 놓여 있다.

 

 

  대선까지의 정세 전망

 

  4. 11 총선 결과에 바탕해 각 정치세력, 특히 지배세력은 연말 대선을 향해 다시 움직이고 있다. 4. 11 총선 결과까지를 포함해 한국사회 정세 전반이 4년 전과 비교하면 괄목할 정도로 좌쪽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반MB는 이제 지배계급 내에서조차 대세가 되었으며 그 자체는 이제 더 이상 정치적 의미를 갖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문제는 노동자 민중의 분노와 불만을 박근혜 새누리당과 민주당/통진당의 야권연대가 양분하여 수렴하고 있다는 점이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진보정당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실망이 현실로서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공백을 안철수와 같은 ‘중도우파’(무당파) 인사가 메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급진적/혁명적 대안이 출현(내용으로나 세력으로나)하지 않는 속에서 나오는 불가피한 결과다.
  물론 한국자본주의가 아직은 세계공황의 직격탄을 맞지 않고 있다는 것이 가장 근저에 깔려 있는 배경이다. 세계자본주의가 경기침체에 허덕이고 있고, 유로존 국가인 PIIGS 나라의 재정 위기(국가부도)가 심각한 상태로 치닫고 있으며 긴축/구조조정/임금-연금 삭감/복지후퇴 등이 일반화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한국은 그와는 반대로 ‘복지’, ‘경제민주화’, ‘재벌개혁’ 등 오히려 자본과 지배계급이 일정한 양보를 하고 나오는 실정이다. 97년 이후 자본과 지배계급이 선제적으로 노동자계급을 공격한 효과를 보고 있는데다가 기존 상태가 너무나 열악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재벌/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한국경제(산업) 구조가 세계시장에서 일정한 경쟁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작용하고 있다. 특히 계급투쟁이 고양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 11 총선은 사회경제적 쟁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지)다루어지지 못한 속에서 치러졌다. 그러나 대선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총선 때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높다. 총선이 비교적 회고(평가)적 성격이 강한 반면에 대선은 미래(대안)적 선택을 중심으로 전선이 형성되는 것이 보통이고 나아가 이미 제출되어 있는 ‘복지’, ‘경제민주화’, ‘재벌개혁’ 등이 19대 국회에서 여야가 서로 대선 정국에서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라도 어떤 형태로든 제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4. 11 총선 이후 예기치 않았던 통진당 사태가 터져 나왔다. 통진당 사태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정국의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첫째는 야권연대에 미칠 영향이다. 야권연대 그 자체를 무산시키는 데로까지 진전될 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야권연대의 위력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높아졌다. 그렇더라도 민주당만으로 또는 민주당과 안철수 연대(후보단일화)를 통해서도 야권연대를 이루지 않고 집권이 쉽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감안하면, 또한 통진당이, 비록 분당에 이른다고 해도, 자기 스스로 먼저 야권연대를 포기하지 않는(포기할 수 없는) 마당에서는 어떤 수준에서든 야권연대 그 자체는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둘째는 어떤 형태로든 통진당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이반과 이탈이 일어날 가능성이다. 우선 민주노총 내부로부터 이런 현상이 벌어질 것이고 그 연장에서 야권연대에 대한 회의가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런 현상은 통진당 왼쪽에 있는 세력들로부터 나타날 것이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분명한 것은 통진당이 차지하고 있던 정치적 영향력에 일정한 공백, 특히 왼쪽으로부터의 공백이 발생할 것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유력한 세력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진보신당을 포함한 ‘범좌파’ 세력도, 사회주의 세력도, 현장활동가들도 아니 이들 세력 모두의 합으로도 아직은 쉽지가 않은 상황이다. 물론 그 전에 실질적으로 정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도의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이들 세력 모두가 공동대응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가 그동안 현 정세에서 가장 일차적으로 시급하게 시행해야 할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과제가 바로 야권연대에 대당할 수 있는 대안 정세 구심, 대안 지도력 형성이라고 말해왔던 것도 그 때문이다. 
  총선이 끝난 후 통진당 사태가 터져 나오기 전의 상황은 야권연대가 돌이킬 수 없는 기정사실로 굳어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통진당 결성 전후부터 총선 국면에 이르기까지 제기된 통진당에 대한 민주노총의 내부의 문제제기가 총선을 계기로 시들어져 가는 상태였다. 즉 야권연대와 통진당의 행보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대안 정세 구심도, 대안 지도력도 없는 조건에서는 통진당이 계속해서 야권연대를 추진하고 심지어 민주당과의 공동정부를 구성하는 상황이 도래한다고 해도, 아니 바로 그렇게 됨으로써 오히려 통진당이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대표/대변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기정사실화 될 것으로 보았다.
그럴 경우 통진당 바깥의 세력(정파)은 대중적 차원에서 활동할 공간을 잃거나 공간이 훨씬 축소된 상태를 맞을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제 세력은 각자 분산된 채 활동하게 될 것이고, 또한 그 결과로 지금보다도 훨씬 내향적(정파적) 활동으로 후퇴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활동가들은 더 무기력에 빠지거나,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운동 주변에서 서성댈 것이고, 그도 아니면 활동에서 아예 후퇴하는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객관적으로는 또는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는 야권연대에 맞설 수 있는 정세, 정치 대안 구심을 형성하는 것이 관건적인 과제이다. 야권연대를 정면돌파하지 않고는, 야권연대를 그대로 놔두고는 전체 노동자계급은 민주노동당 창당 이전 시기의 정세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다. 단순히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통진당이 결합한 야권연대라는 거대한 장애를 앞에 두고 있어 ‘도로민주노동당’ 정도라도 창당할 동력조차 형성하기 어렵다.

 

 

3. 야권연대와 단절하는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을

 

본격화 하자

 

  통합진보당은 지난 총선 때까지 자본가정당과 단절하라는, 야권연대에 반대한다는 노동자계급의 요구와 주장을 묵살하고 끝내 통진당 결성을 감행했으며 야권연대를 막무가내로 추진했다. 지금의 사태가 터진 뒤에도 통진당은 여전히 야권연대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면서 사태를 이 지경으로까지 만들어 놓고도 아직도 야권연대가 흔들릴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여기에는 당권파, 비당권파의 구분도 없다. 이석기 당선자는 현 사태에 대해 “야권연대를 흔들려는 음모”라는 주장을 하고 나오는가 하면, 강기갑 비대위장은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에게 달려가 사과하며 기다려 달라고, 야권연대를 깨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 민주노총

 

  문제는 민주노총이다. 자본가 정치세력인 국참당과 통합하는 통진당 결성 과정에서 이를 저지하기는 고사하고 끝내 총선에서 통진당을 지지했다. 민주노총은 단순히 야권연대를 소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넘어 김영훈 위원장 자신이 총선에서 민주당을 지지하는 지원유세에 적극 참여하기까지 했다. 통진당 사태가 터지고 나서도 민주노총은 달라진 것이 없다. 민주노총 중집은 통진당에 대한 ‘조건부 지지철회’를 결정했다. 통진당을 전면 부정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민주노총도 통진당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야권연대를 포기할 생각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다. 위 강기갑 비대위장의 행태에 대해 어떤 비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민주노총은 강기갑 비대위를 지지하는 것이 마치 더 진보적인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통진당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정도를 넘어 지금 노동자계급 전체를 아예 수렁으로 빠뜨리고 있다. 이번 사태가 터지지 않았더라도 ‘묻지마 야권연대’로 인해 노동자계급은 이미 커다란 어려움에 빠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번, 천 번을 양보해 만약 이번 사태가 터지지 않았다면 통진당에 대한 비판과 통진당을 둘러싼 쟁점은 운동진영 내부의 문제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사태가 터지지 않았으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즉 싫든 좋든, 인정하든 부정하든 객관적으로 통진당이 노동자계급 내에서 어쨌든 다수를 대변하는 세력이라는 것으로부터 발생하는 불가피함이다.

 

 

통진당이 노동자계급 전체를 수렁에 빠뜨리고 있다.

 

  사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라도 통진당은 적어도 지금과 같은 사태는 발생시키지 않았어야 한다. 아니 사태가 터진 뒤에라도 내부 선거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 ‘부실이든, 부정이든’, 진상조사가 ‘사실이든, 과장됐든’ 외부로 알려진 상황에서는, 나아가 그것이 통진당 내부 문제를 넘어 전체 노동자계급의 문제, 전 사회적 문제로까지 번진 마당에서는 그것이 누구의, 어떤 의도 때문이든 간에 먼저 모든 것에 앞서 최소한 노동자계급이 입을 피해와 타격을 최소화 하는 방향으로 모든 처리를 해 나갔어야 하는 것이 천 번, 만 번 마땅한 일이다.
 
  부르주아 정당조차도 이런 상황에서는 지배계급 전체의 이해와 이익을 우선적으로 지키는 것을 당연시 하고 있다. 물론 이 말이 결코 부르주아 정당이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배세력은 통진당을 비판할 자격조차 없다. 그들이 지금 벌이고 있는 행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다만 그렇더라도 지배계급과의 전선을 치는 것은 그 자체로 해야 한다. 또한 통진당에 대해서도 잘못을 덮으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게 아니라 기왕에 벌어진 일에 대해, 터진 사태에 대해 적어도 부르주아 정당보다는, 부르주아 정치체제 내의 수준에서라도, 조금이라도 더 정당하게, 조금이라도 더 질서정연하게, 조금이라도 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려는 태도와 노력을 보여 주어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럴 수 있는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것이 이번에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금 통진당은 지배계급으로부터는 물론이고 온갖 소부르주아 세력에게도 동네북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조차 자신들끼리도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그로 인해 전체 노동자계급에게 씻기 어려운 고통과 어려움을 초래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통진당 사태로 인해 발생한 공백과 쟁점을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혁명주의 세력이 매울 수 있는 준비와 태세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커다란 문제다. 그 때문에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음에도 우왕좌왕 하는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워낙 많은 쟁점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고, 나아가 지배세력이 온갖 정보력과 지배력을 동원하여 그야말로 매일매일 이슈를 만들어 내고 이슈를 주도하고 있어 거기에 대응하기에도 힘겨운 측면이 있다. 나아가 혁명주의 세력이라고 해도, 통진당의 노선과 성격 등에 대해 비판하고 개입하는 것과는 별개로, 벌어지고 있는 행태나 추이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사실에 대한 정확한 확인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바깥에서는 오히려 알 길이 없어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고 굼뜰 수밖에 없는 속사정을 안고 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더는 기다리지 말고 선제적 방침을 갖고 투쟁에 나설 때다.

 

  지금도 이런 조건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으며 달라질 가능성도 별로 없다. 그럼에도 통진당 사태는 계속 진행 중이고 장기화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형국이 계속된다면, 아니 그렇게 되도록 방치한다면, 여전히 사태의 본질과 정곡을 정확히 꿰뚫지 못하고 우왕좌왕 한다면 지배계급이 지속적으로 이 사안을 주도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태를 하루 빨리 막아야 한다. 이제 그럴 수 있는 정도로는 사태가 충분히 드러났다. 더는 사실 확인이나 추이를 지켜보아야 할 필요는 없다. 이제는 노동자계급, 특히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선진노동자들을 포함해 혁명주의 세력이 선제적인 방침을 갖고 전면적이고 대대적인 투쟁에 나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는 시선과 관심을 지배계급이 벌이는 행태와 통진당 내부 사정으로 인해 어지럽게 발생하는 것들에 두어서는 안 된다. 지금 새누리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우익 세력이 통진당 사태를 맞아 가장 일차적으로, 가장 최우선적으로 의도하고자 하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듯이 바로 연말에 치를 대선을 겨냥해 야권연대를 깨거나 약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보수우익 세력은 통진당을 향해 융단폭격 하듯 총공세를 펼치고 있다. 그런데 주로 통진당 내 당권파(지금은 구당권파)를 집중 겨냥하여 공세를 가하고 있다. 당권파야말로 바로 통진당 결성과 야권연대를 이끈 진원지이기 때문이다. 당권파가 저지르고 있는 행태가 지배계급에게 계속해서 명분과 주도권을 충분히 쥐도록 하고 있어서다. 지금 지배계급은 당권파를 집중 타격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고 있다. 이 점은 국면이 바뀌기 전까지는 지속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보수세력이 단지 당권파만을 타격하는 것은 아니다. 당권파를 향해 ‘종북’, ‘주사파’ 등의 딱지를 붙이는 것을 통해 자연스럽게 노동자계급과 혁명주의 세력에게까지 위협을 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보수우익 세력은 ‘진보정당’ 자체에 대한 공격에서는 짐짓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번 기회에 ‘진보정당’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지금보다 더 순치, 순화시키려는 태도를 노골화하고 있다. 물론 이 말이 곧 당권파가 비당권파보다 덜 순치, 순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점에서 그들 사이의 차이는 거의 없으며 있더라도 별다른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당권파와 비당권파가 벌이고 있는 투쟁은 최소한의 의미라도 있는 노선 투쟁이 아니라 오로지 정략만 난무하는 패권 다툼에 불과하다. 이번 사태가 결과적으로 어떻게 끝나든 간에 그 최종 도착지는 개량주의 정당이라는 외투마저 벗어 버린 완연한 ‘국민정당’으로의 변신일 것이다. ‘국민정당’이라고 꼭 하나의 모습인 것은 아니다. 그 속에도 수많은 양태와 유형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 점을 유의해야 한다.    

 

 

야권연대와 단절하는 투쟁을 다시 시작할 때다

 

  야권연대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아직 시퍼렇게 살아 있다. 적어도 연말 대선 때까지는 어떤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라도 계속해서 정세적 규정력을 가지고 노동자운동을 뒤흔들 것이다. 민주당 내에서 야권연대에 대한 회의론과 부정적 견해가 아무리 나온다 해도 야권연대 자체를 완전 폐기하는 데까지 나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야권연대가 아니고도 대선에서 확실히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할 수 있지 않고서는, 반대로 야권연대를 통한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에서는 야권연대는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민주당이 독자적으로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지금으로서는 무망하다. 비록 ‘안철수’ 변수가 있긴 하지만 최소 수준에서라도 야권연대가 진행될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

 

  민주당이 야권연대를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건 바로 통진당 변수다. 즉 통진당은 어떤 경우에도, 특히 상황이 지금과 같이 악화된 조건에서는 더욱 더 야권연대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민주당이 야권연대를 포기하지 않도록, 아니 포기할 수 없도록 통진당은 알아서 모든 짓을 다할 것이 분명하다. 통진당에게는 이제 와서 스스로 야권연대를 깨야 할 그 어떤 명분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이 같은 상황은 갈수록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도 분명하다. 심지어 통진당이 깨진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 경우에는 깨진 두 세력 모두 더 경쟁적으로 민주당과의 야권연대를 성사시키기 위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우위를 점하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이다. 이미 지배계급의 한 부분으로 두 발을 모두 담근 상황에서는 그 길밖에 취할 방법이 없다.

 

  지금 노동자계급이 야권연대에 반대하는 투쟁을 다시 시작하고, 다시 본격화해야 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즉 단지 야권연대가 계속될 가능성이 있다는 예상과 전망 때문만이 아니다. 노동자계급에게 야권연대에 대당할 수 있는, 최소한 대당하기 위한 정세 구심을 형성해야 할 필요가 총선 전보다도 훨씬 더 절박해졌다는 점이다. 아무리 통진당과 야권연대를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그 반대를 노동자계급 또는 대안 세력의 투쟁의 결과로 만든 것이 아니라면 설령 야권연대가 깨지거나 균열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 정치적 효과는 결코 노동자계급이나 대안세력에게 돌아올 수 없다. 그것은 당연히 야권연대를 실질적으로 깨거나 약화시킨 세력, 지금으로서는 보수우익 세력의 몫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한편 야권연대에 문제가 발생한다하더라도 통진당이 다시 지난 시절의 ‘진보정당’으로라도 되돌아 올 가능성은 없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나아갔다. 아니 설령 돌아오고 싶어 하더라도 그것을 허용해서도 안 된다. 그러려면 야권연대에 대당하는 정세 구심을 시급히 건설해야 한다. 오직 이를 통해서만이 야권연대를 저지할 수 있는 가능성과 동력을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통진당이 어떻게 되더라도 바로 그로 인해 발생한 공백을 노동자계급이 메울 수 있다. 아니 반드시 메워야 한다. 지배계급이 그 공백을 다 차지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총선 전과 달리 야권연대 반대 투쟁을 다시 시작하고, 다시 본격화 할 수 있는 새로운 국면이 열린 측면이 있다. 무엇보다 통진당과 민주노총 관료 지도부를 제외하고는 야권연대 반대를 한 목소리로, 보다 많은 노동자계급이 힘 있게 낼 수 있는 공간이 창출됐다. 그 공간을 지금까지는 지배계급이 가져가고 있지만 노동자계급에게도 아직 기회는 열려 있다. 민주노총 관료 지도부조차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긴 하지만, 공공연하게 통진당을 더는 지지할 수 없게 되었다. 민주노총이 ‘조건부 지지철회’를 결정한 또 다른 배경이자 또 다른 이면이다. 그러나 통진당과 민주노총 관료 지도부에게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시간을 허용하는 것은 그것이 단지 낭비여서만이 문제가 아니다. 언제든지 야권연대는 다시 살아 날 수 있으며 그 때가서야 대처한다면 이미 또 늦기 때문이다.

 

  또 하나 짚어야 할 맥락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야권연대 반대를 말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야권연대에 대당하는 정세 구심을 형성하는 투쟁에 지금도 나서지 않고 있는 세력이 보이는 태도다. 이런 태도는 한 마디로 정세와 동떨어져 각자의 조건과 처지를 우선적으로 사고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다. 그 각각의 이유와 주장도 각양지색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 사이에 크게 두 가지 공동점이 있다. 하나는 하나 같이 무기력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야권연대에 대당할 수 있는 정세 구심을 형성할 수 있는 동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강변하고 있다. 진보정당이 그러했듯이 문제의 책임을 대중에게 돌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 하나는 각자 내세우는 논리와 판단은 제 각각이지만 그 논리와 판단을 관통하는 것은 조직 보존주의다. 조직 보존을 우선함으로써 정세 대응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꾀하려 하지 않고 협소한 운동주의나 추상적 대기주의 그도 아니면 막연한 준비론으로 모두 후퇴하고 있다.

 

  야권연대가 노동자계급에게 가장 심각한 폐해를 가져다주는 직접적 원인이자 주범이라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명백하다. 따라서 현재적 실천은 다름 아닌 야권연대 반대 투쟁, 야권연대와의 단절을 위한 투쟁일 수밖에 없다. 혁명적 노동자당 건설이든,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이든 심지어는 ‘진보신당’과 같이 또 다른 의회/개량주의 정당 건설을 위한 투쟁도 역시 야권연대에 대당하는 정세 구심을 형성하는 것과 관련지어야만 비로소 그 현실성을 획득할 수 있다. 진정한 총파업 조직화든, 무슨 반자본주의 공동투쟁체 건설이든, 이러저러한 활동가모임이나 활동가대회 등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그것들을 말하려면 야권연대 반대 공동대응을 가장 우선적으로 조직하고 펼쳐야 한다. 통진당이 저 지경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조차 이를 실천하지 못한다면 노동자계급 대부분은, 적어도 조직된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야권연대 영향력 아래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들을 이렇게 되도록 방치하고 나서 딴 데 가서 논다는 것은 허공을 향해 소리 지르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이래가지고는 야권연대에 반대하는 대선 투쟁을 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대선 투쟁을 우회해 가지고는, 야권연대에 맞서기 위한 대선 투쟁전선조차 형성하지 못한다면 운동은 훨씬 더 후퇴할 것이 자명하다.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을 힘차게 펼치자

 

  민주노총 중집은 통진당에 대한 ‘조건부 지지철회’와 함께 당일 회의에서 “대중적인 제2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중단 없이 추진하며, 이를 위한 특별기구를 설치하기로 의결”했다. 물론 이 결정을 둘러싼 해석과 정치적 의미나 맥락은 당연히 하나가 아니다.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은 ‘제2 노동자 정치세력화 특별기구 설치’와 관련해서도 “그동안 민주노총의 정치위원회가 존재했지만, 단순히 한 위원회에서 논의하는 것을 넘어서 전 조직적으로 많은 전현직 간부들의 견해를 총 망라하는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 특별기구를 설치할 것”이라며, “이를 전 조직적으로 가동시켜, 새로운 정치세력화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 결정은 그 자체가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사안이라기보다는 민주노총 중집회의 결과 중 ‘현 통합진보당에 대한 입장’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내용과 긴밀히 연결, 결합되어 있다.

 

“△통합진보당이 공당으로서 절차적 정당성과 자정능력이 훼손되고 있는 점에 대해 깊은 유감 표명 △통합진보당이 노동중심과 민주주의에 기초한 진정한 진보정당의 길에서 일탈하였음을 확인하고, 이에 대해 깊은 우려 표명 △통합진보당이 혁신비상대책위를 중심으로 당원들의 중지를 모아 신속히 혼란을 극복할 것을 강력히 촉구 △진정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전조직적 논의에 착수하고, 통합진보당이 현재의 혼란을 극복하고 노동중심 진보정당으로 거듭나 이 논의에 함께 하기를 희망”

 

  따라서 앞으로 ‘제2 노동자 정치세력화 추진’ 결정이 어떤 양상으로 어떻게 펼쳐질 지는 지금으로서는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을 민주노총에게만 맡겨둬서는 안 된다. 비록 민주노총의 결정이 통진당 사태 때문에 ‘임기응변 식’으로 제출한 측면이 강하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 결정 자체는 어쨌든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을 펼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민주노총은 지난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줄 곧 ‘진보대통합’, 실은 ‘도로 민노당’을 만들기 위한 것에만 몰두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조차 이루지 못했다.(물론 그렇다고 그것을 성사시켜야 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가정당과 통합하는, 즉 통진당이 결성되는 상황만 불러들이고 말았다. 만약 이번 통진당 사태가 터지지 않았다면 위와 같은 결정이나마 나올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알다시피 총선 전에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에서 의결되지 않았음에도 중집 결정을 통해 총선 방침을 사실상 ‘묻지마 야권연대’를 지지하는 것으로 결정하여 강행했다. 비록 형식논리로는 민주노총 ‘정치방침’은 결정하지 않은 모양새를 취했지만 역시 이번 사태가 없었다면 총선 방침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는다.

 

  통진당은 이번 사태로 인해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빠르게 ‘국민정당화’의 길로 접어들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민주노총 관료 지도부가 적당히 얼버무리려고 해도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 그 자체까지 완전히 묵살하기는 쉽지 않은 지형이 통진당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다. 민주노총 중집에서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 특별기구 설치’를 의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미 일부는 이런 상황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거듭해서 말하지만 민주노총에게만 맡겨둬서는 용두사미로 끝나거나 혼란(분란)만 일으키고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렇다고 지난번에 시도했던 것과 같은 이른바 ‘선언운동본부’ 정도만의 운동과 대응 가지고는 그 한계가 너무나 뚜렷하다.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은 ‘선언운동본부’와 같은 상층 중심의 운동이어서는 성공할 수 없다. 또한 그 연장에서 이른바 ‘범좌파정당’이나 또 다른 의회주의 정당을 다시 만드는 것조차도 어려울 수가 있다. 물론 그런 정당은 설령 만들어진다 해도 통진당 보다 나을 것이라는 어떤 근거도 없다.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아니 최소한 운동을 일관되고 끈질기게 가져가기 위해서는(그런데 이러지 않고 조금이라도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적어도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최소한 야권연대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망라하여 공동대응을 펼 수 있어야 한다. 둘째는 단지 조직 문제만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서는 안 된다. 당연히 정세 대응을 대중적으로 펼치는 사업과 투쟁을 최우선으로 결부시켜야 한다. 셋째는 공동대응 안에서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놓고 치열한 노선 투쟁을 벌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들은 일차적으로는 투쟁하는 노동자, 선진노동자의 자기 요구와 주장을 우선적으로 조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특히 아래로부터의 평조합원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함께 진행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야권연대 반대와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긴밀히 연결, 결부되어 있다. 아니 목적의식적으로 연결, 결부 되도록 해야 한다. 비록 통진당 사태가 아래로부터의 노동자계급과 대안 세력이 투쟁한 결과와 직접적으로는 닿아 있지 않지만, 바로 그 때문에 지금 지배계급이 그 공백을 차지하려고 대거 나서고 있지만 더는 이런 상태가 지속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통진당 사태가 낳은 정치 공백을 투쟁하는 노동자, 선진노동자 그리고 대안 세력이 나서서 채워야 한다. 그럴 때에만, 그럴 수 있어야만 통진당 사태는 위기가 아니라 계기가 될 수 있다.   

 

       

4.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에서의 핵심 과제와 경로

 

 

  ‘진보의 재구성’이 아닌 노동자당 강령 건설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을 대중적, 전면적으로 벌여나가기 위해서는, 나아가 그를 벌여나가는 데 있어 가장 일차적인 핵심 과제는 바로 새로운 노동자당의 성격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당의 성격과 정체성은 곧 ‘강령’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강령, 즉 정치적 프로그램이야말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성과 독자성을 보장하는 제1의 담보물이다.
  정치적 프로그램은 추상적인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또 미래의 어느 시점에 결정적인 정세가 도래할 그 때가서 명확히 하면 되는 문제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투쟁을 통해 건설해야 한다는 이유로 당면 투쟁을 강화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전부 그 반대다. 당면 투쟁을 이끌 정치적 프로그램이 있어야만 투쟁을 강화할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정세적, 정치적 대안 지도력으로 나설 수 있어야만 결정적인 정세가 도래했을 때에도 대안 지도력이 될 수 있다. 이념을 구체적 현실 내지 정세와 연결시키는 능력을 갖추려면 이념과 현실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아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 폐지부터 재벌 문제, 정부 구성 문제(야권연대/민주대연합 연립정부냐 야권연대와 단절하는 노동자정부냐)까지 이들 사안에 대한 노동자계급 자신의 프로그램을 갖고 대(對) 자본 ∙ 대 정권 전선을 쳐야만 자유주의 자본가 정치세력 주도의 야권연대와 제도정치권의 프로그램에 휩쓸리거나 결국 그 꼬리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다. 즉 ‘비정규직/정리해고 없는 세상’ 슬로건을 비현실적 요구라며 비난하는 악선동에 정면으로 맞서서 오히려 그 요구를 ‘재벌 몰수 ∙ 국유화’와 ‘노동자정부’ 요구로까지 연결, 상승시키는 그러한 정치 프로그램을 내걸고 투쟁할 때에만 진정한 노동자 독자 정치세력화를 구현할 수 있다.
  그러지 않고 이른바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이름 아래 ‘추상적 가치’를 나열하는 것으로는 노동과 자본 또는 피지배와 지배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적대성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드러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의도와 무관하게 적대성을 모호하게 만들거나 은폐시킴으로써 노동자계급을 혼돈에 빠뜨리고 혼란에 휩싸이게 할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지배계급과의 전선을 형성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야권연대조차 왜 반대해야 하는가를 일관되게 설명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강령 문제를 중심에 두지 않는 정치세력화 논의는 결과적으로 세력 사이의, 그것도 상층 수준에서의 이합집산이 중심 문제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강령 문제를 제껴버리고 오로지 발생한 공석을 차지하는 데 어떤 세력 조합이 최적의 조합이 될 것인가, 어떻게 판짜기를 해야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나 관심을 두는 정치공학적인 접근방식으로는 대중들에게 정치적 냉소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지금 그 어떤 정치세력도 현재 발생한 정치적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정치적 권위를 확보하고 있지 않다. 그랬더라면 지금과 같은 사태는 도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랬을 때 무엇으로 정치적 권위 또는 지도력을 세워야 하며 세울 수 있을 것인가? ‘도로민주노동당’ 내지 ‘도로진보정당’과 다르다는 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오직 당의 강령으로만 가능하다. 조직적, 형식적으로 아무리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말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대중을 설득할 수도, 조직할 수도, 주체로 세울 수도 없다. 그러한 조직적, 형식적 독립은 ‘민주노동당’의 경험으로 족하다. ‘민주노동당’도 조직적, 형식적 독자성을 가지고 출발했다. 조직적, 형식적 독자성은 필요조건일 뿐이다. 당의 정치적 내용, 즉 강령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조직적, 형식적 독자성은 사상누각일 수밖에 없다.
 
  물론 강령이 모든 것을 일거에 일괴암적으로 해결해주는 만능열쇠는 아니다. 서랍 속의 강령, 주머니 속의 강령은 있으나 마나다. 강령/전술/조직을 하나로 꿸 수 있는 당의 정치활동과 조직활동이 통일적, 유기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 각각이 따로 논다면 당은 오합지졸의 모임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강령의 중요성을 기각시켜야 할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렇긴커녕 오히려 강령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강령을 당의 장식품 정도로 여기거나 세력 사이의 공통분모쯤으로 치부하는 것의 말로가 어떤 것인가를 ‘민주노동당’의 역사가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새로운 정치세력화 또는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운동은 곧 노동자계급의 강령을 건설하는 문제에 다름 아니다. 나아가 강령을 건설하는 문제는 곧 새로운 정치세력화 또는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에 동의하는 세력 사이에 정치투쟁을 벌이는 문제에 다름 아니다. 이 과정을 치열하게 거치지 않고 단지 세력 사이의 판짜기를 먼저 사고하거나 우위에 둔다면 각종 ‘실용주의’ 내지 ‘기회주의’가 판치는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


 
  또 다른 의회/개량주의 정당이 아닌 진정한 대안 정당 건설

 

  ‘민주노동당’은 물론 통진당이 부딪친 근본적인 문제는 의회/개량주의 정당이라는 점에 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민족주의’, ‘패권주의’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의회 개입이나 의회 전술은 계급투쟁 또는 정치투쟁의 한 영역이다. 개량을 위한 투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의회/개량주의를 전제로 하거나 중심으로 삼는 노선을 취한다면 결코 노동자계급의 권력장악은 성공할 수 없다. 이것은 단지 선험적인 예단이 아니다. 지난 세계사가 똑똑히 증명하고 있다.
  물론 그 반대로 의회/개량주의 정당이 아닌 혁명주의 노선을 주장, 고수한 정치세력도 지난 100년이 다 되도록 다시 혁명에 성공하고 있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혁명주의가 틀렸다거나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존재했던 특정한 혁명 세력이 실패했거나 더 나아가 혁명 세력 자체가 부재했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혁명 세력 자체가 부재했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시작되고 있는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 논의와 움직임은 대부분 기존 ‘민주노동당’을 통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실패와 파산의 교훈을 올바로 새기지 못한 채로 출발하고 있다. 실패와 파산의 원인은 민주대연합, 국참당과의 통합, 야권연대 등 자본가 정치세력과의 계급협조를 위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팔아넘긴 데 있다. 따라서 새로운 노동자당 건설의 중심 과제는 노동자운동 내에서 계급협조의 고리를 끊어내고 잃어버린 계급적 독립을 되찾는 데 있다.
  이것은 단순히 지금 통진당 사태의 원인으로 거론되고 있는 패권주의와 비민주성을 노동자운동 내에서 추방하고 자체 쇄신을 이뤄내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배반당한 계급적 독립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고 지금 막연하게 ‘혁신’이니 ‘재구성’이니 따라 외치는 것은 남의 깃발을 들고 흔드는 거나 다름없다. 또한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만 해도 그렇다. ‘민족주의’에 대당하는 노동자계급의 사상과 이데올로기는 ‘노동자국제주의’, ‘반자본주의’인 것이지 단지 ‘종북(주사파)’만을 비판한다고 해서 극복되거나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며 국민정당화로 몰고 가고자 청산주의 캠페인에 나선 사이비 진보주의자들의 나팔소리에 불과하다.
  새로운 노동자당 건설의 문제는 계급적 독립을 수복하는 대적 투쟁의 문제이다. 새로운 강령⋅전술⋅조직의 무기를 가지고서 적들에게 빼앗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위한 투쟁을 조직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새로운 노동자당 건설 문제를 단지 내부의 패권주의와 비민주성을 극복하는 조직운영의 문제나 조직 내부 질서의 문제로 제기하는 것은 파산과 실패의 원인을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방향에서 찾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민주노동당’을 통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전철을 되풀이 하는 식의 대안을 찾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의회/개량주의 정당은 제도권 진출과 국회 입성에 목을 매면서 민노당의 전철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고 결국은 야권연대 같은 자본가 정당과의 연합으로 빠져들 것이 분명하다. 이 과정은 ‘민주노동당’이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압축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렇게 부르주아 노동자 정당의 창건으로 귀결되면 계급적 독립의 과제는 또 다시 배신당하는 사태를 맞을 수밖에 없다.
  현재 프랑스, 독일의 좌파당(좌파 사민주의 정당) 같은, 초기에는 보다 좌익적인 외관을 띠는 부르주아 노동자 정당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에 기반을 두고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자처하는 노동자 정당의 외관을 취하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노선과 정책을 펴며 결정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구원투수 역할을 하는 부르주아 노동자 정당의 계급적 모순으로 인해 그러한 좌파당 역시도 ‘민주노동당’처럼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팔아넘기는 당일 수밖에 없다.  

    

  새로운 노동자 정당이 의회/개량주의 정당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 같은 것은 없다. 예를 들어, ‘개량주의의 물적 토대’를 이유로 대중적 노동조합운동 차원의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필연적으로 개량주의 노동자 정당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견해들이 있다. 개량주의의 물적 토대가 있는지 없는지, 취약한지 굳건한지에 대한 논의 이전에 이러한 견해의 바탕에는 계급투쟁에서 정치의 우위를 부인하는 정치 기권주의가 깔려 있음을 지적해야 한다.
  이러한 정치 기권주의는 좌파 개량주의자들이 말하는 ‘한국에서 혁명정당 불가론’을 강화시켜 준다. 좌파 개량주의자들은 현재 한국의 자본주의 발달 수준과 노동자계급의 상태, 그리고 정치 지형 등을 고려할 때 사민주의 정당 수준을 넘어서기는 불가능한 것 아니냐, 프랑스, 독일의 좌파당처럼 좌파 사민주의 정도만 돼도 괜찮은 것 아니냐며 혁명정당 건설에 반대하거나 나서지 않고 있다.
  안타깝게도 ‘혁명정당 건설’을 주장하면서도 이러한 정치 기권주의를 떨치지 못하고 있는 동지들이 많다. 아무리 ‘혁명정당 건설’을 내걸어도 그 경우 혁명정당 건설은 언제나 추상적 선전의 영역에 머물 뿐 구체적 당 건설투쟁 전술로까지 나아가는 것은 영원히 미래의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투쟁 기권주의는 그냥 기권으로 끝나지 않고 대중적인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이 의회/개량주의 정당으로 귀결되는 데 사실상 일조한다.

 

  한편 정치투쟁 기권주의는 대기론으로도 나타난다. 개량주의의 물적 토대가 공황으로 인해 약화되거나 소멸되고 그래서 개량주의 세력이 무력화되면 그 때 노동자들이 혁명정당 건설 쪽으로 옮겨올 가능성이 만들어질 것이다. 따라서 불필요하게 지금부터 개량주의 세력을 겨냥한 ‘인위적인’ 정치투쟁을 펴는 것은 오히려 대중적으로는 고립될 것이므로 지금은 경제적 생존권 투쟁으로 제한하고 여기에 집중해야 할 때다.... 등등. 설사 이러한 수동적 대기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예컨대 적극적으로 비정규직, 정리해고 철폐투쟁을 개량주의 주도에 맞서 아래로부터의 총파업투쟁으로 조직하겠다고 하더라도 직접적인 정치투쟁에서 기권하고 최소강령 수준으로 투쟁을 제한한다면 결코 개량주의 지도력에 대한 그 어떤 도전도 될 수 없다. 경제위기와 세계공황이 노동자계급 지도력 문제를, 혁명정당 건설 문제를 자동으로 해결해주지 않는다. 그러한 정세 자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주체의 능동적 대응과 전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를 둘러싼 치열한 정치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정치 체제 자체를 정면으로 문제 삼는, 그에 맞서 일관되게 투쟁하는 진정한 대안 정당(혁명정당)을 제기하지 않는다면 현재 부르주아 정당 사이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예컨대 ‘복지’, ‘경제민주화’, ‘재벌개혁’ 문제 등에서 노동자계급의 대안은 실종될 수밖에 없다.


  
  ‘야권연대 반대/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자성’을 인정하는 세력들 사이의 
공동대응 전선

 

  왜 공동대응 전선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충분히 설명했다. 이제 공동대응 전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넘어 그 공동대응 전선이 어떤 성격의 것이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겠다.

 

  먼저 이 공동대응 전선은 ‘과도적 틀’이자, ‘한시적 틀’이어야 한다. ‘과도적 틀’이라 함은 첫째 이 공동대응 전선 자체가 곧 단일한 정당이 아닌 것은 물론 단지 형식적, 조직적으로 단일한 정당을 만드는 것을 목표 내지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공동대응 전선의 최종 결론은 오직 그 속에서의 정치투쟁의 결과로서만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어떨 것이냐는 예정되어 있지 않다. 둘째 그것은 부족하거나 미숙하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선점되어 있지 않은 공백 상태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세력이 이 속에서 자신의 입장과 견해를 맘껏 펼칠 수 있는 정치적 장(공간)으로 기능해야 한다. 셋째 이 점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공동대응 전선인 만큼 각 세력의 정치적 독자성은 여전히 유지된 채로 운영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 때문에 우려할 필요는 없다. 대중으로부터의 압박과 검증을 견뎌내야 하는 것은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것만이 이 공동대응 전선을 형성하고 지속시킬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담보다.
  ‘한시적 틀’이라 함은 물리적 시한을 정하고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정해진 시한 전에 개별적으로 탈퇴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아예 이 공동대응 전선 자체가 어떤 결말에 다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것은 결과이고 그것과는 관계없이 타임 테이블을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까지 이 공동전선이 지속되고 있는 속에서 아직 결말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 때가서 다시 타임 테이블을 새롭게 정하면 된다. 요지는 주어진 시간, 합의한 시간 안에서 최선의 노력과 최대의 시도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정치적 긴장이 형성되고 책임 있는 자세로 임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 공동대응 전선은 ‘야권연대 반대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인정하는 외의 그 어떤 다른 단서나 전제 조건도 필요치 않아야 한다. 오직 이 최소 기준에 동의하는 것만이 이 공동대응 전선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의 전부다. 그 나머지는 이 공동대응 전선 속에서 진행시키면 된다.
  위에서 우리가 제시한 주장과 입장은 지금으로서는 우리의 견해일 뿐이다. 우리는 이 공동대응 전선 속에서 바로 우리의 위와 같은 주장과 입장을 펼칠 것이라는 것을 대략적으로 미리 말해두었을 뿐이다. 바로 누구라도 그러면 된다. 따라서 이 공동대응 전선은 평탄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치열한 정치투쟁이 예고되어 있다. 이 점을 각오해야 한다. 이 정치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누구라도 자신의 올바름을 대중 앞에서 입증해야 한다. 거기에는 어떤 주도권이나 기득권도 무용지물이다. 아니 현재 상태에서 그럴 수 있는 정치적 권위를 획득했거나 패권을 휘두를 수 있는 특정 세력(정파)이 있다고도 보지 않지만 설령 그런 세력이 있거나 스스로 그렇다고 생각하더라도 이 공동대응 전선이 표결로 결정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정치투쟁의 결과로 정치적 재편이 이루어지거나 또 다른 어떤 정치적 결론에 다다를 수 있을 뿐이다.

 

  이 공동대응 전선이 어떤 결과를 낳거나 결론에 다다른다고 해도 그 만큼의 새로운 경험과 축적이 발생할 것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공동대응 전선은 당연히 세력 사이의 특히 그들 세력 상층지도부 사이의 공동테이블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 어떤 밀실도 필요치 않다. 실무적으로 필요한 논의 테이블조차도 완전 공개적으로 이루어 질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업은 대중과 함께, 대중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세력 사이의 장벽을 넘어 ‘입장과 견해’에 따라 기존 조직의 울타리를 넘나들면서 새로운 ‘의견 그룹’이 형성되는 데까지 나갈 수 있다는 예상도 가능하다.
  이건 분명 새로운 시도이자, 실험이다. 과연 현존하는 한국의 정파가 이런 시도와 실험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이 되느냐의 문제가 없지 않다. 동시에 대중이 이 공동대응 전선에서 관객이 아니라 주체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도 있을 수 있다. 아니 이미 정파적으로 입장과 태도가 굳어져 있으며 대중들 사이에서도 그 동안의 경험 속에서 서로에 대한 정치적 판단이 끝났다는 문제가 현실적 어려움으로 작용할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현실의 장벽에 굴복한다면 운동을 진전시킬 수 없다. 어쨌든 넘어서야 한다. 한꺼번에 넘어설 수 없다고 해도 시작이 필요하다. 지금이 그 때다.
 
  끝으로 이 공동대응 전선은 정세에 대한 공동투쟁을 함께 진행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고 단지 당 건설 문제만으로 제약/한정한다면 대중적 관심과 집중을 이끌어 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진행시킨다고 해도 ‘말잔치’에 그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이것이 우려돼서만이 아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정세 대응을 통해 실질적인 대안 세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확인해 나가야 한다. 정세 대응은 공동대응 전선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각자 진행하든 연대를 통해서든 할 수밖에 없으며 이미 하고 있다.
  특히 지금은 장투사업장 투쟁/쌍용자동차 투쟁/현대차비정규직 투쟁을 포함하여 민주노총이 말하고 있는 총파업투쟁은 물론 더 나아가 ‘대선투쟁’에 대해서까지 공동투쟁을 해야 할 필요성이 객관적으로 엄존하고 있으며 요구되고 있다. 이를 외면하거나 회피한다면 민주노총은 이미 지난 총선에서 드러났다시피 야권연대에 또 다시 기대거나 심지어 부르주아 정당에 대한 의존마저 되풀이 할 것이 분명하다. ‘정책협약’, ‘입법청원운동’, ‘서명운동’이 투쟁을 대신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
  이 공동대응 전선이 정세 대응을 담당하고 이끌어 나가는 주체로 나서야 한다. 나아가 노동 문제만이 아니라 전 계급적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현안 문제에 대해서도 최대한 정치적 입장과 태도를 밝히고 이에 기초해 새로운 대중투쟁전선을 만들어 가야 한다. 새로운 대안 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공동대응 전선이 이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왜 그것을 하려고 하는지, 설령 이 다음에 정당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는 물론 대중들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 건설 따로, 투쟁 따로’로는 둘 다 실패할 수밖에 없다. 둘 다 한다고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 같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 달리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여기서 한 가지 ‘대선투쟁’은 비록 정세 대응의 일환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워낙 ‘큰 일’이라서 쉽게 나서거나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만약 ‘통진당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대선투쟁’ 문제가 당 건설 문제 못지않게, 아니 현실적으로는 그것보다 더 공동대응을 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대선투쟁’에 대한 공동대응 문제가 중요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선투쟁’에 대한 공동대응 문제는 여전히 그 자체로 중요하다.
  다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현재 ‘진보신당’ 내에서 논의되고 있는 바와 같이 ‘정당’이라면 ‘대선’을 피해가서는 안 된다는 차원에서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대선투쟁’을 통한 당 건설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87년 이후 언제든 ‘독자 후보’를 내세웠던 전통을 이어가자는 취지도 당연히 아니다. 우리가 ‘대선투쟁’을 말하는 것은 야권연대에 맞서는 정세 구심, 정치 구심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후보 전술’이 필요하다는 맥락에서다. 야권연대에 맞서는 ‘전국적 정치투쟁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차원에서다.  
  누구는, 그렇다면 언제는 ‘후보 전술’이 필요하지 않은 때가 있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 때마다 ‘후보 전술’의 목적과 맥락이 모두 똑 같았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에 비하면 오히려 ‘투쟁으로 돌파’하자는 주장이야말로 언제나 똑 같은 차원에서 제기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깝다고 해야 맞다. 그것이야말로 아무런 대안도 전술도 아니다. ‘후보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의지도, 기획력도, 지도력도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쨌든 위에서 말했듯이 ‘대선투쟁’을 위한 ‘후보 전술’에 대한 동의가 이 공동대응 전선의 전제 조건일 수는 없다. 공동대응 전선 안에서 다룰 것인지 그것 바깥에서 별도로 논의할 것인지를 지금 결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디서든 동의하는 세력 사이에서 추진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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