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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3] 노동자 독자 정당 건설투쟁은 노동자혁명당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노동자 독자 정당 건설투쟁은

 

노동자혁명당으로 귀결되어야 한다!1)

 

 

고민택

 


[노동자혁명당으로 귀결되어야 한다.hwp (37.50 KB) 다운받기]

 

  지금 당 건설을 둘러싸고 ‘어떤 당’이냐와 ‘어떤 당 건설이냐’가 혼미한 채로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제안’을 통해 먼저 ‘어떤 당 건설이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 뒤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객관적으로 ‘어떤 당’에 대해서든 ‘어떤 당 건설’에 대해서든 아직 어떤 분명한 가닥이 잡히지 않고 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더 복잡해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통진당, 민주노총이 변화하고 있으며, 대선이 눈앞에 다가와 있는 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지지부진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물론 누구는 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예컨대 ‘변혁모임’은 9월 9일 토론회를 앞두고 있어 지금 그를 조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활동하고 있기도 하며, ‘제안자모임’ 역시 제안을 한 상태라서 전보다 적극적인 정치행위를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전히 각개약진을 크게 벗어난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현대차비정규직 투쟁’, ‘쌍차투쟁’, ‘투쟁사업장 공동투쟁’ 등에 대해 현재 ‘제2 정치세력화’,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말하고 있는 세력조차 힘 있는 투쟁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다. 대선투쟁은 출발도 시키지 못하고 있다. 당 건설에 대한 전체의 가닥이 잡히지 않고 있는 것이 주요한 원인의 하나다.      

 

  이 글은 크게 세 가지 차원의 문제의식을 말하고자 한다. 첫째는 ‘어떤 당’과 관련하여 그 ‘어떤 당’은 노동자혁명당이어야 함을 말할 것이다. 둘째는 ‘어떤 당 건설인가’를 말하는 것을 통해 그것이 왜 ‘어떤 당’과 분리될 수 없는가를 말할 것이다. 셋째는 이 둘은 결국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전면적인 정치투쟁을 벌이는 것을 통해야만 비로소 의미 있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당’을 단지 개념이나 추상 차원의 대립물로 놓고 소모적으로 논쟁을 벌이거나, 아니면 단지 ‘반(안티) 진보정당’ 내지 ‘진정한(노동중심) 진보정당’으로 ‘어떤 당’을 제한, 제약하는 현실을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당 건설’, ‘현안투쟁’, ‘대선투쟁’이 각각 분리되지 않고 서로 상승작용을 하는 실천과 투쟁이 하루빨리 이루어질 것을 기대한다.

 

 

1. 노동자혁명당은 추상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쟁취해야 할 당면 목표다.

 

  지금 세계는 전 세계 노동자계급에게 ‘개량이냐, 혁명이냐’라는 문제를 또 다시 가장 사실적, 현실적으로 묻고 있다. 이게 객관적 현실이다. 당연히 한국의 현실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 당 건설을 둘러싸고 제시/열거되고 있는 대부분의 그 ‘어떤 당’들이 하나 같이 이러한 현실을 비껴가고 있다. 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거나 말하지 않고 주관적으로 보고 싶거나 말하고 싶은 것만을 취하고 있다. 그것이 마치 현실인 것처럼 둔갑시키고 있다. 객관적 정세가 혁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에도, 그것이 결코 먼 미래에나 벌어질 일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누구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현실 대응은 이와 동떨어진 주장이나 행위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단지 의회/개량주의로 세력으로부터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사회/혁명주의 세력이라고 자처하는 세력도 비록 방향은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크게 다를 것이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노혁추는 노동자혁명당을 단지 추상이나 개념으로만 말하고 있지 않다. 아니 지금은 그러한 개념이나 추상을 둘러싼 논쟁이 유익하다고 보지 않는다. 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그들이 개념이나 추상에 대한 이해는 낮을 수 있지만, 오히려 현실 정세로부터 시시각각 어떤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피부적으로 느끼고 있다. 정파든 활동가든 바로 대중의 그와 같은 상태와 처지에 조응, 부응해야 한다. 정파나 활동가가 모든 정답을 손에 쥐고 있지 않다. 그런 것은 가능하지도 않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거나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털어놔야 한다. 선택은 대중 자신이 주체적으로 하는 것이다. 선택만이 아니라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도 가능하다. 대중이 언제나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중추수(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서로의 소통과 교류가 필요하며 교육, 지도/피교육, 피지도의 위치를 번갈아 하는 것, 그럴 수 있는 정치행위가 있을 때만이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1) 노혁추가 혁명당 건설을 포기했나?

 

  우리가 ‘제안’을 한 후에 우리에 대한 일정한 오해 내지 곡해가 존재한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일부에서 노혁추가 혁명정당 건설을 포기했거나 변경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있다. 분명히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일국적으로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각국 노동자계급이 건설해야 하는 정당은 혁명정당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세계적 공황기’, ‘자본주의 체제 위기’ 정세 아래에서는 더더욱 그래야 하며 그럴 수밖에 없다. 즉 혁명정당만이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노동자 독자 정당으로서의 임무와 역할을 감당/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만약 당 건설을 위한 어떤 형태의 ‘공적 기구’가 결성된다면 그 안에서 우리의 뜻과 주장을 설득, 관철하기 위해 최대한의 정치투쟁을 벌여 나갈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 시점에서 노동자혁명당과 나머지 ‘어떤 당’을 개념적으로 대립시킬 필요를 굳이 느끼지 않는다. 그러한 태도나 방식은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념(자체)의 대립을 말하기 이전에 이미 각자 취하고 있는 입장과 태도 사이에 실질적, 현실적 쟁점이 수없이 깔려 있는 바 이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의사를 충분히 밝힐 수 있고 그것이 가장 살아 있는 생생한 토론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우리의 ‘제안’이 어떤 형태로든 최종적으로 성립하여 진행된다고 해도 끝내 우리가 주장하는 바의 ‘어떤 당’, 즉 ‘노동자 혁명당’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 내지 냉소가 있다. 우리의 답변은 간단하다. 미리부터 그에 대해 어떤 선험적인 결론을 내릴 아무런 이유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럴 거면 ‘제안’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직 정치투쟁의 결과로 마지막 주어진 상황에 맞게 노혁추의 진로를 결정하겠다는 것만이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이는 우리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래야 하며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노혁추는 우리 자신을 확대, 강화하는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포함하여 모든 정파가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 함께 재편해나가는 방식을 통해 당 건설을 이루고자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밝혀 둔다. 우리는 이것이 혁명당을 건설을 앞당길 수 있는 가장 올바르고 빠른 길이라고 확신한다.


        
2) ‘전위정당’ 내지 ‘사회주의 정당’을
어디 가서 건설하고자 하는가? 

 

  한편 우리의 ‘제안’을 두고 자신들은 ‘전위정당’ 내지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하고자 하기 때문에 불참(거부)한다는 일부의 답변이 있다. 이 같은 입장은 먼저 설령 ‘제안’이 성사된다고 해도 결국 그 결과는 현실적으로 ‘전위정당’ 내지 ‘사회주의 정당’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인식과 전망을 전제하고 있다. 이로부터 그들의 고립주의가 발생한다. 물론 그러한 인식과 전망을 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다. 그러나 거기에는 문제가 있다.

 

  공동전선의 결과가 자신들이 말하는 ‘전위정당’ 내지 ‘사회주의 정당’으로 귀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심지어 거의 확실하다고 가정하더라도 고립주의를 취하는 것은 문제다. 왜냐면 공동전선 바깥에서 ‘전위정당’ 내지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기 때문이다. 공동전선이 아닌 어디 딴 데 가서 자신들이 말하는 ‘전위정당’ 내지 ‘사회주의 정당’을 말할 곳이나 주체가 있는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대기주의로 빠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들의 고립주의는 자신들의 대기주의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동전선이 반드시 단일정당 내지 하나의 정당으로 귀결되어야 할 그 어떤 이유(필연)도 없다. 공동전선의 전제조건과 창당의 전제조건은 다르며 다를 수밖에 없다. 즉 최종적인 판단과 선택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져 있다. 그랬을 때 지금은 ‘링’ 위에서 정치투쟁을 벌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링’(공동전선)을 만드는 것에 사회/혁명주의 세력이 앞장서야 한다. ‘변혁모임’이나 ‘제안자모임’과 같은 활동가들이 공개적으로 입장을 제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위정당’ 내지 ‘사회주의 정당’을 단지 개념이나 추상으로만 말하지 않을 거라면, 정세와 무관하게 진공 속에서 당 건설을 할 것이 아니라면 대기주의의 늪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나아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판단, 전제하는 것 자체가 가장 큰 문제다. 지금 정세는 대단히 가변적이며 역동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이미 정치적으로 굳어진 이데올로그나 관료화된 상층 지도부와 전투적 활동가나 평조합원 활동가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전자는 어렵더라도 후자의 범주는 변화될 가능성이 상존한다. 지금이 그들 범주에 속한 활동가들이 급진화, 정치화 될 수 있는 더 없는 기회다. 그들과 사회/혁명주의 세력과의 결합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따라서 최후통첩 방식을 취해선 안 된다. 아니 최후통첩을 취할 정도의 조직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상호 검증과 대중적 검증을 거쳐야 한다. 지금은 지도력을 세워 나가야 하는 과정이지 지도력을 관철할 수 있는 조건은 아니다. 지도력은 오직 현실을 조금이라도 변화, 진전시키는데 실질적, 구체적으로 기여할 때만이 주어진다.   

               

 

3) 노동자혁명당은 현실적이지 않다?

 

  또한 위의 반응과는 다른 맥락에서, 비록 우리의 ‘제안’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 형식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일반명사로서의 노동자 독자 정당을 말하면서도 그것의 고유한, 특정한 성격과 역할로서 노동자혁명당을 주장하는 것을 놓고 노동자혁명당은 현 시기에 현실화되기 어렵다는 반응을 대부분 보이고 있다. 거기에도 몇 가지 오도된 인식과 논리가 있다.

 

  첫째, 그들은 한마디로 대중들의 상태가 아직 혁명당을 말하거나 건설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라고 힘주어 주장한다. 우리도 현재의 단면만 잘라 놓고 보면 그러한 진단이나 판단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 자체를 두고 논쟁할 생각은 없다. 우리 역시 주의주의를 앞세우거나 의지의 과잉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준비되지 않았거나 부족한 것 때문이거나 아니면 혁명정당 자체를 부정하면서 대중을 핑계 삼는 것이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토론을 좀 더 해봐야 한다.    

 

  지금 거의 대부분의 세력, 활동가들은 전 세계적으로는 물론 한국도 자본주의 체제 위기에 휩쓸려 있으며 이로 인해 부르주아 지배체제 역시 심각한 위기국면을 맞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2013년부터는 위기가 더욱 심화된 형태로 등장할 것이며 자본과 국가의 노동자 탄압도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해 질 것이라고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만약 이 같은 인식과 주장이 단지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면 주체 역시 그러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준비와 태세를 갖춰야 한다. 세상에게 기다려 달라고 할 수는 없다. 대중들에게 있는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 그런 후에 그들의 주체적인 판단을 물어야 한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같이 극복, 해결방안을 찾아 나설 것을 제안하고 호소해야 한다. 그것이 대중을 믿는 첫 걸음이며 대중을 주체로 세우고자 하는 올바른 태도이다. 대중을 단지 계몽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둘째, 그들은 대중의 의식과 실천을 단계적, 진화적으로 진전시키려는, 심지어는 그렇게만 진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선전과 선동 사이에, 전략과 전술 사이에, 원칙과 현실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고 있다. 그 결과 실천적, 결과적으로는 ‘진보정당’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투쟁을 좀 더 강조한다는 것뿐이다. 즉 투쟁을 단지 물리적, 기능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투쟁을 둘러싼 정치적 내용, 차이에 대해서는 별로 중시하지 않고 있다. ‘진보정당’이 투쟁과 정치를 극단적으로 분리하고 있지만 이들 역시 분리한다는 점에서는 양적으로만 차이가 있을 뿐 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보니 투쟁을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대중들에게 모험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쳐지고 있다. 정치를 명확히 하지 않는 데에서, 정치의 중요성을 실제에서는 별로 중시하지 않는 데에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결과다. 투쟁은 역량에 따라 유연하게 하더라도 정치는 명확하게 해야 한다. 그 반대로는 대중을 진전시키기 어렵다. 87년 이후 한국 대중투쟁이 걸어온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은 전반적으로 투쟁이 부족해서보다는 정치가 부재함으로써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셋째, 그들은 노동자혁명당을 자신들이 말하는 당 개념과 전혀 다른 별개의 무엇으로 추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개량이냐, 혁명이냐’, ‘사민주의냐, 사회주의냐’, ‘자본주의 철폐냐, 개선이냐’, ‘자본가 정부냐, 노동자정부냐’ 등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아주 현실적으로 ‘비정규직, 정리해고 철폐’, ‘야권연대 반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과 같은 대중적 요구만 놓고 보더라도, 또한 지금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어떤 당’이나 그 ‘어떤 당’을 설명하고 있는 내용에 의하더라도 그것들을 말이 아닌 실천으로 옮기고자 한다면 결코 노동자혁명당을 배제하거나 거부할 이유가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계급전쟁에서, 노동과 자본 사이에서, 지배와 피지배 사이에서, 제국주의와의 대립에서 ‘아와 타’는 명백하게 분리될 수밖에 없으며 분리해야만 한다. ‘바리케이드 이쪽인지, 저쪽인지’를 먼저 명백히 하지 않는 노동정치, 계급정치는 성립하지 않는다.

 

  노동자혁명당을 말한다고 해서 지금 당장 혁명을 하자거나, 지금 정세가 혁명적 정세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혁명 이외의 여타의 정치활동, 즉 전술을 배제하거나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일상적 정치활동과 전술 구사와 지향하는 정치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혁명, 사회주의, 노동자정부 등을 현재의 대중투쟁, 현재의 정세와 어떻게 연결, 결합시킬 것인가를 말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 능동적, 구체적으로 찾아야 한다. 자연스럽게, 저절로 이루어지는 역사는 없다.                      
 

 

2. ‘어떤 당’이냐의 문제는 ‘어떤 당 건설인가’와 분리될 수 없다.

 

  지금 ‘어떤 당’을 둘러싸고 백가쟁명 식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두 가지 잘못된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말했듯이 개념과 추상끼리 부딪치고 있는 형국이다. 또 하나는 ‘어떤 당’인가와 ‘어떤 당 건설인가’가 분리된 채 별개로 진행되고 있다.

 

  즉 ‘어떤 당’에 대한 개념이나 추상이 지금의 구체적 정세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침묵하고 있거나 심지어는 자기가 말하고 있는 ‘어떤 당’(의 개념이나 추상)과 자신이 지금 현재 실제로 취하고 있는 태도나 실천이 서로를 배반, 배척하는 양상마저 펼쳐지고 있다.

 

  ‘어떤 당’을 건설하고 나서 그 때부터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이미 늦는다. 바로 그 ‘어떤 당’을 건설하기 위해 지금 어떻게 할 것인가가 훨씬 중요하다.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어떤 당’이 실제 ‘어떤 당’인지가 결정 날 수밖에 없다. 아래의 몇 가지 예만으로도 충분히  이런 현실을 드러낼 수 있다.  

 

 

1)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 등 당면 투쟁과 당의 ‘변혁적’ 기조와 목표 사이에 장벽을 쌓지 않는 당 건설이어야 한다.

 

  건설할 당의 기조와 목표를 아무리 ‘자본주의 체제 변혁’, ‘노동자계급 중심성’, ‘의회주의 반대’, ‘변혁’, ‘노동자 민중 권력’으로 내건다 하더라도 정작 당면 투쟁에서는 이러한 기조와 목표에 대립하는 조합주의적, 계급협조주의적, 개량주의적 투쟁방향을 허용하는 당 건설이라면, 기조와 목표는 모두 공문구가 되는 당 건설이다.

 

  개량은 혁명적 투쟁의 부산물임을 분명히 하는 당 건설이어야 한다. 당면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투쟁을 특히 현재의 공황기 / 자본주의 체제 위기 정세에서 자본주의 철폐투쟁과 연결시키기 위한 전술/투쟁방향과 정치 프로그램(강령)에 대해 ‘주체의 상태’를 들어 반대하는 대기주의 ․ 추수주의 노선이 만연해 있다. 당면 투쟁과 ‘자본주의 체제 변혁’ 및 ‘노동자 민중권력’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고, 후자를 먼훗날의 과제로 돌리는 당 건설은 진보정당 운동의 전철을 되풀이하는 당 건설이 될 것이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 요구를 ‘노동자 통제 하에 재벌 몰수 국유화’, ‘은행 금융자본 국유화 및 단일 국영은행으로의 통합’, 대선에서 자본가 정당과 단절하는 ‘노동자정부’ 요구와 연결시키는 행동강령 채택을 위해 투쟁하는 당 건설이어야 한다. 이러지 않는다면 대중적, 현실적 요구와 목표로 (재)정립된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는 말로는 외치지만 내심으로는 현실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거나, 아니면 실제로는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도 거기에 단지 급진적이지만 추상일 뿐인 ‘정치적 수사’만 덧붙이는 것으로 비껴갈 수 있다.

 

  따라서 이 지점이 바로 대중들에게는 물론 ‘어떤 당’을 말하는 세력 사이에서도 ‘어떤 당’에 대한 차이를 가르는 실질적인 분기점이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 ‘노동자 통제 하에 재벌 몰수 국유화’, ‘은행 금융자본 국유화 및 단일 국영은행으로의 통합’, ‘노동자정부’는 별개의 요구가 아니다. 그들 사이에 층위나 우선순위를 두고 단계적, 진화적으로 쟁취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 요구는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서로 동조적이다. 따라서 각각 분리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범주로 묶어 동시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들 요구를 내거는 것이 얼마만큼 현실적인가를 묻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다. 이미 대중 자신이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고 있으며 투쟁에서 요구로 내걸고 있다. 이것이 가장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정세다. 지배계급 사이에서조차 ‘비정규직, 정리해고’ 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다. 다만 ‘경제민주화’, ‘재벌 개혁’, ‘복지’ 등으로 뒤틀고 있을 뿐이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 요구를 내걸고 투쟁하고 있는 구체적 현실이 없다면 결코 벌어지지 않을 일이다. ‘경제민주화’, ‘재벌 개혁’, ‘복지’ 등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응대와 대안 제시가 필요하다. 이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대안이 ‘비정규직, 정리해고 철폐’에만 머물러서는 부족하다. 
              

 

2) 자본가 정당 및 야권연대와 단절하고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바로 세우는 당 건설이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반통진당 전선으로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계급적 독자성 확립의 과제는 노동자 정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면서 동시에 당면 계급투쟁에서도 돌파해야 할 절박한 정세적 과제이다. 자본가 정당과 손잡는 야권연대는 지금 통진당이나 민주노총 지도부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많은 노동자 투쟁들에서 부지불식간에 투쟁방향이 야권연대 구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대국회, 대정당 투쟁 등의 이름으로 자본가 정치권에 의탁, 청원하는 방식으로 ‘해결’을 찾는 투쟁방향이 점점 대세처럼 되어가고 있다.

 

  당면한 예로, 쌍차 정리해고 철폐투쟁은 지금 범대위에 의해 국회 환노위를 통한 쌍차 소위 구성 및 국정조사(청문회) 실시로 투쟁방향이 후퇴되고 있다. 국회 환노위에서 쌍차 소위 구성을 거부하는 새누리당에 맞서 민주당과 손잡고 의회를 통한 해결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새누리당을 타격하고 민주당을 압박한다’는 언사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정치적 본질에서는 민주노총 ․ 산별연맹이 민주당과 정책협약을 맺는 방식의 야권연대와 동일한 효과(노동자계급이 자본가 야당의 꽁무니로 전락하는 정치적 효과)를 낳는다. 국회 일정을 중심으로 사업을 배치하고, 환노위 소속 민주당 국회의원이 집회에 나와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발언하는 것 듣고 여기에 박수치도록 노동자들을 방치하고, 이들 국회의원 면담하는 것이 중요한 사업이 되는 당 건설이라면 기존 진보정당과 다를 것이 없다. 
  이것은 22명 죽음으로 촉발된 쌍차 정리해고 철폐투쟁을 야권연대와 의회주의에 갖다 바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대국회, 대정당 집중투쟁이 정리해고 철폐투쟁 전선을 확대 강화하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면 노동자투쟁들과 개별 투쟁전선에 대해 민주노총 지도부가 취하고 있는 야권연대 구도에 스스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정리해고 철폐투쟁 전선을 확대 강화하는 것과 이러한 방식의 대국회, 대정당 투쟁 기조는 양립할 수 없다. 국회 환노위 내 쌍차 소위 구성 및 국정조사(청문회) 실시가 과연 한진 정리해고 투쟁에서 국회 권고안으로 투쟁을 잠재운 것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겠는가?

 

  우리가 건설할 노동자계급 정당이 아무리 ‘자본주의 체제 변혁’과 ‘의회주의 반대’, ‘노동자계급 중심성’을 기치로 내건다 하더라도 이러한 당면 투쟁전선에서의 야권연대 구도와 단절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야권연대 구도에 맞서 그에 대당하는 대안 정세구심을 세워내는 당 건설이 되지 못한다면 계급투쟁에서 무가치하며 따라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의 노동자계급정당 건설투쟁은 출발부터 쌍차투쟁, 17개 투쟁사업장 공동투쟁, 사내하청투쟁 등의 이러한 정세적 핵심 투쟁에서 전투적 ․ 혁명적 지지파를 결집하여 대안 정세구심을 세우는 당 건설투쟁이어야 한다. 개별 사업장 ‘문제 해결’ 기조가 아니라 전국적인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투쟁 전선을 구축하고 이를 공황기 반자본주의 투쟁전선으로 확대하는 기조로 노동자계급정당 건설투쟁을 가져가야 한다. 오직 이러한 투쟁방향과 투쟁전술을 확대, 강화하는 것을 통해서만, 그 결과로써만 대정당, 대국회를 실질적으로 압박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반대로는 야권연대를 넘어서기 어렵다. 이 둘 사이에 있는 기조 차이는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결정적 차이다.  

 

 

3) 대선을 노동자계급 독자후보 투쟁으로 돌파하는 당 건설이어야 한다.

 

  대선에서 야권연대 연립정부 전망에 맞서는 노동자계급 독자 선거투쟁/ 전국적 정치투쟁전선 수립 전망을 담아내는 노동자계급 당 건설 투쟁이어야 한다. 이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입장은 <혁명3호> 다른 글에서 제출하고 있다. 여기서는 다소 중복되더라도 이 글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수준에서 다시 한 번 말하도록 하겠다. 특히 당 건설과 달리 대선투쟁은 일정이 객관적으로 정해진 까닭에 당 건설에 앞서 대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상기하고자 한다.

 

  이번 대선에서 노동자계급 독자 선거투쟁을 전개하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이 기권하도록, 심지어는 야권연대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내몰리도록 허용한다면 그 ‘어떤 당’을 말하거나 힘주어 주장한다고 해도 어떻게, 무슨 힘으로 그 ‘어떤 당’ 건설을 추진할 수 있겠는가. 대선 소용돌이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이 더 한층 파괴되고 노동자계급이 자본가 정당의 꼬리로 완전히 전락해버린다고 할 때 어떻게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어떤 당’을 건설할 수 있는 동력을 만들 수 있겠는가. 각자가 말하고 있는 그 ‘어떤 당’만이라도 실질적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의지와 의사가 있다면 대선투쟁에 나서야 한다.

 

  노동자계급 독자후보 투쟁은 그 기본 성격에서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조합 관료들의 야권연대 후보 지지몰이에 대한 단호한 반대투쟁이다. 그리고 반대는 단선적인 소극적 반대가 아니라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자운동의 현존 지도부(썩은 지도부이지만 현재로선 권력과 자원을 틀어쥐고 있는 지도부)에게 ‘자본가 정당과 단절하라!’라는 요구를 걸어서 이들 썩은 관료 지도부들의 반노동자적 계급협조 노선을 대중적으로 폭로하고 새로운 계급적 ․ 혁명적 지도력(대안 정세구심으로서 전국적 평조합원운동과 혁명적 노동자계급 정당 둘 다)을 바로 세우기 위한 포괄적이고 공세적인 반대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 독자 후보 전술은 당선과 득표율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의회주의 선거운동과는 철저히 선을 그어야 한다. 자본주의 철폐를 핵심 기조로 담아낸 노동자 투쟁강령을 대중들 속에서 선전선동하고, 당선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중의 직접행동을 통해서 현재의 정세와 역관계를 바꿔낼 것을 주장하고, 선거운동을 현재의 노동자투쟁들과 결합시켜 전국적 투쟁전선을 펼쳐내고 자본가 정당과 단절하는 노동자계급의 독립적인 정치투쟁 역량을 결집시키는 계기로 배치되는 투쟁이 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노동자계급 독자후보 투쟁은 현 조건에서 그 자체가 최대의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이며, 현 시기 당 건설 투쟁에서 결코 비껴가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승부처이다.

 


3. ‘어떤 당’은 전면적 정치투쟁을 통해 탄생할 때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우리의 ‘제안’에 대해 공동전선의 기승전결이 너무나 불투명하여 중간에 깨지거나 어떻게 유지된다고 해도 최종적으로 하나의 결론이 아닌 복수의 결과(분열)를 낳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그 경우 하지 안 하니만 못한 더 나쁜 결과를 낳을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우려에도 두 가지 의견이 있다.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설령 ‘공적 기구’를 결성하더라도 사전에 논의를 거쳐 어느 정도는 ‘깨지거나 분열될’ 가능성을 미리 최소화 해 놓고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공동전선 안에서 서로 싸우기만 할 가능성이 더 높은데 그럴 바에는 아예 각개약진 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어떤 의견이든 대부분 자신들이 말하거나 생각하고 있는 ‘어떤 당’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인식과 태도를 우선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사실 그 자체는 크게 문제 삼을 바는 아니다.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어떤 당’을 관철하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또한 우리가 말하는 공동전선도 그러한 정치활동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대로 보장하자는 것이며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 같은 활동을 지금과 같은 각개약진, 고립주의와 같은 방식이 아니라 공동전선(공적 기구)을 통해서 보다 공개적이고 책임 있게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정파 사이의 상층테이블 방식을 넘어 대중과 함께 전국적 차원에서 진행시키자는 것이다.

 

 

1) ‘변혁모임’ 자체와 ‘제안자모임’의 제안이 곧 일종의 제한적/부분적 공동전선이다.

 

  지금 이미 낮은 차원, 제한된 차원의 공동전선이 이루어지고 있다. 예컨대 ‘변혁모임’은 객관적으로 이미 공동전선의 일종이며, ‘제안자모임’에서 제안하고 있는 ‘노동자 연석회의’도 만약 성립된다면 크게 다르지 않다. 2차례에 걸쳐 토론회를 가진 ‘변혁모임’에 상당수의 ‘정파’나 ‘정파’에 속한 활동가들이 참여했다. 실제로 ‘변혁모임’은 특정 정파에 의해 시작되었거나 진행되고 있지 않다. 한 마디로 ‘변혁모임’은 열린 공간이다. 그에 비하면 ‘제안자모임’은 노혁추와 같은 특정 정파는 아니지만 ‘변혁모임’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보다 단일 세력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노동자 연석회의’ 방식을 제안하고 있는 것에서 보듯이 독자 활동만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즉 모종의 공동전선을 예정,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3차 토론회를 앞두고 ‘변혁모임’에서 공개한 토론 자료나 ‘제안자모임’의 제안 내용을 보면 거기에는 모두 ‘어떤 당’과 관련한 기준이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즉 이미 ‘어떤 당’에 대한 일정한 내용을 전제하거나 말하고 있다. 또 제안하지 않은 정파나 활동가들도 ‘어떤 당’에 대한 자기 생각을 모두 갖고 있으며 대부분 공개적으로 표명한 상태다. 우리 또한 ‘어떤 당’에 대해 이미 말한 바 있다. 따라서 우리가 제안하고 있는 전면적/포괄적 공동전선이든 아니면 부분적/제한적 공동전선이든 이 측면에서는 둘 사이에 큰 차이는 없다. 이 둘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어떤 당’을 ‘전제’한 공동전선이냐, 아니면 ‘어떤 당’을 ‘위한' 공동전선이냐다. 물론 그럼에도 ’변혁모임‘이나 ’제안자모임‘이 현재까지 말하고 있거나 말하려 하고 있는 그 ’어떤 당‘(성격, 정체성)은 아직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일종의 가이드라인이어서 ’전제‘의 정도가 그렇게 강하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둘 모두 자신들이 관철하고자 하는 ‘어떤 당’을 대략이나마 미리 알리거나 더 나아가 사전에 최대한 선점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더라도, 아니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서라도 어떤 형태든 ‘공동전선’(공적 기구)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동전선’이야 말로 당 건설을 위한 필수전제조건이다. 다만 우리의 ‘제안’과 같은 전면적/포괄적 공동전선이냐, ‘변혁모임’이나 ‘제안자모임’과 같은, 비록 둘 다 개방되어 있긴 하지만, 사실상 부분적/제한적 공동전선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둘이 결과적으로 제한적/부분적인 이유는 둘 모두 이미 ‘어떤 당’을 비록 잠정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먼저 제시하고 있거나 제시하는 것을 중심에 둠으로써 나타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 결과다. 그럴 경우 선 세력화로 이어질 것은 자명한 수순이다. 물론 그 과정을 일정 정도 거치고 나서 어떤 변화가 생길 가능성은 있다. 

 

  그럼에도 여기서 ‘변혁모임’과 ‘제안자모임’ 사이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해 둘 필요가 있다. ‘변혁모임’은 그 자체가 비록 부분적/제한적이긴 하지만 이미 일종의 공동전선 형식을 띠고 있어 단일 대오와 같은 행보를 취하기는 쉽지 않다는 장단점을 모두 갖고 있다. 그에 비해 ‘제안자모임’은, 비록 성원이 진보신당 당원과 비당원으로 나뉘어 있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단일 대오와 같은 행보를 취할 수 있다. ‘제안자모임’이 ‘노동자 연석회의’를 제안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라고 본다. 즉 ‘변혁모임’ 입장에서는 ‘제안자모임’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여부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거나 심지어 불가능한데 비해 ‘제안자모임’ 또는 ‘제안자모임’에 속한 활동가들이 ‘변혁모임’에 참여하여 논의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제안자모임’이 별도의 독자 제안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변혁모임’이 이미 일종의 공동전선이라는 측면을 보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어떤 당’에 대한 견해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은 하나뿐이다. ‘변혁모임’과 ‘제안자모임’을 포함하여 모두가 동의/인정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건 바로 우리가 말하고 있는 전면적/포괄적 공동전선(그 명칭이야 무엇이든)을 취하는 것이다. ‘어떤 당’에 대한 대략의 기준이나 내용을 서로 밝힌 마당에, 또 자신의 ‘어떤 당’을 문자(개념/추상)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전제조건으로 내세울 것이 아니라면 못할 이유가 없다. 그게 아니라면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공개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다. 그것이 제안자라는 위치에서 져야 할 최소한의 도리다. 나아가 아직 공개적 제안을 하지 않은 단위도 응답해야 한다. 당 건설에 참여, 개입하고자 하는 주체로서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다.

 

 

2) 부분적/제한적 공동전선은 처음부터 복수의 결론을 기정사실화 할 가능성이 더 높다.
            
  어떤 공동전선(전면적/포괄적이든, 부분적/제한적이든)이든 그 공동전선의 목적은 명백히 ‘당 건설’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와 나머지 단위와의 차이가 있다. 우리를 제외한 대부분은 이미 ‘어떤 당’을 전제한 속에서의, 즉 큰 틀에서 ‘어떤 당’에 동의하는 단위 사이의 공동전선(따라서 사실상 부분적/제한적)을 말하고 있는데 비해 우리는 공동전선(처음부터 전면적/포괄적)을 먼저 설치하고 그 속에서 ‘어떤 당’에 대한 논의(정치투쟁)를 펼치자는 것이다. 그랬을 때 우리가 ‘제안’하는 전면적/포괄적 공동전선은 바로 그 ‘어떤 당’에 대한 사전 동의나 전제가 없는 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단일 정당’ 또는 ‘하나의 정당’ 그 자체를 목적하지 않으므로 결국 중간에 깨지거나 최종적으로 복수의 결론(분열)에 도달하는 것이 필연/운명이라는 우려와 비판이 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토론(논쟁)을 하겠다.

 

  하나는 부분적/제한적 공동전선이야말로 시작에서부터 이미 복수의 결론이 내려진 상태라는 점이다. 물론 우리는 결과적으로든, 시작부터든 복수의 결론 그 자체를 문제시 하지 않는다. 우리야말로 ‘어떤 당’이냐를 중시하는 것이지 ‘단일 정당’ 또는 ‘하나의 정당’ 그 자체를 목적하지 않는다. 무원칙한, 무분별한 대동단결은 누구도 생각지 않을 것이다. 한편 복수의 결론이 꼭 분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따로 존재해야 할 객관적, 대중적 근거가 있느냐가 문제다. 우리의 ‘제안’은 그래도 논리적으로 ‘단일 정당’ 또는 ‘하나의 정당’으로 귀결될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부분적/제한적 공동전선은 아예 그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원천봉쇄 하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의 ‘제안’은 ‘공적 기구’ 안에서 모든 정치과정을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가져감으로써 상호 정치적 책임과 강제가 객관적으로 뒤따르지만 부분적/제한적 공동전선은 그들 사이의 경쟁적 관계가 훨씬 더 주요하게 부각될 수밖에 없다. 전면적/포괄적 공동전선 안에서의 정치투쟁에 비해 대중에게 져야 할 책임과 강제가 훨씬 자유롭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우리가 말하는 바의 전면적/포괄적 공동전선을 통해 복수의 결론에 도달하는 것과 부분적/제한적 공동전선으로 처음부터 복수의 결론을 내려버리는 것과는 결과적으로는 복수의 결론이라고 하더라도 그 둘은 하늘과 땅만큼이나마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 둘이 걷게 될 정치과정을 상상해보라. 전면적/포괄적 공동전선은 ‘경로 장악’을 공동으로 목표할 수 있으며 실현시킬 가능성이 있는데 비해 부분적/제한적 공동전선은 ‘경로 장악’을 아예 포기하는 것이다. ‘경로 장악’을 먼저 이루지 않고는 대중적 차원의 ‘제2 정치세력화’,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펼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현안투쟁’에서는 물론 ‘대선투쟁’에서도 힘 있는 대처, 대응을 하기가 훨씬 어렵다. 야권연대에 대당하는 정치 구심, 정세 구심을 형성한다는 것도 거의 무망해 질 수밖에 없다. 활동가들에게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없게 되고 대중이 정치적 무관심 내지 야권연대에 더욱 깊이 빠져드는 것을 막기 어렵다.

 

 

3) 전면적/포괄적 공동전선을 통한 정치경험과 정치훈련을 쌓아야 한다.

 

  공동전선(‘공적 기구’) 안에서 정치투쟁을 통해 ‘어떤 당’을 도출하고자 하는 정치활동이나 정치행위 자체를 마치 대중들에게 노출시켜서는 안 되는 잘못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입장은 대중들이 아직 그러한 상황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의식, 계급의식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인식과 전제를 깔고 있다. 이 또한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가 있는 발상이다.

 

  먼저 사실 대중의 상태나 조건을 말하기 전에 정파나 그 성원들이 대중에 비해 과연 얼마나 더 정치적으로 훈련, 무장되어 있는가를 짚어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과 같은 정세에서 현재 정도의 정치활동에 머물러 있는 현실을 보면 결코 앞서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이는 당연한 결과다. 그동안 정파나 활동가들이 대중을 향한 직접정치, 공개정치를 전면적, 본격적으로 하지 않아 온 결과다. 대중은 언제나 투쟁의 최전선에 내몰려 있다. 따라서 그들의 행위나 사고, 질문은 당연히 구체적이며 근본적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정파나 활동가 자신이 거기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정파 내부 정치 또는 활동가 사이의 경쟁에 훨씬 익숙한 현실을 극복하지 않고는 스스로는 물론 대중을 정치적으로 성장시킬 수 없다.

 

  또한 상호 검증과 대중적 검증을 거치기 위한 치열한 정치투쟁을 통과하지 않고 어떻게 그 ‘어떤 당’이 ‘어떤 당’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겠는가. 공개적, 대중적 정치활동을 통하지 않고 모든 논의를 상층에서 이미 타협한 것을 들고 대중들에게는 사실상 선택을 강요하거나 요식행위로만 접근한다면 지금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그 ‘어떤 당’조차 건설할 수 없다. 대중들에게도 정치적 훈련과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동안 노동자투쟁이 거의 조합주의에 갇힐 수밖에 없던 것도, 정파나 활동가들이 그런 현실을 극복하는데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도 모두 조합주의 이상의 정치훈련과 경험을 대중은 물론 정파나 활동가 자신조차 하지 못한 데 그 근본 원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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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이 글은 곧 발간될 정세월간지<혁명 3호>에 게재될 목적으로 지난 8월에 쓰여진 글입니다. 따라서 구체적 사안과 관련하여 시의성 문제가 존재하지만 글이 견지하는 일반적, 원칙적 입장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판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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