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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_창간준비 2호] <영국 폭동> - 야만스러운 것은 폭동이 아니라 바로 벌거벗은 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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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폭동> - 야만스러운 것은 폭동이 아니라

 

바로 벌거벗은 자본주의다.

 

 

- 김병효

 

 

 

  8월 7일 토요일 경찰서 항의시위로 촉발된 토튼햄 폭동은 며칠 사이 런던 북부, 북동부 도심으로 확대되다가 맨체스터, 샐포드, 노팀엄 등 인근 도시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런데 소위 ‘폭동’이라 불리는 일련의 과정들은 다양한 출신과 다양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 모았다. 영국 정부와 경찰은 이런 이유로 이번 폭동이 사회경제적인 문제와는 무관한 일탈행위로 규정하고자 했다. 언론에서도 약탈이나 폭력적인 행위 자체에만 초점을 맞춰서 보도하는 행태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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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여기서 폭동에 참가한 구성원들이 다양하다고 해서 이번 폭동의 주요 세력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벌어진 모든 혁명과 마찬가지로 이번 폭동 역시 하층 계급 사람들이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노동계급의 젊은 층들이 이번 폭동의 주역이다. 이 청년들은 20%가 실업상태에 놓여 있으며, 흑인이 50%에 이른다. 취업을 한 경우에도 저임금에 시달릴 수밖에 없으며, 학생의 경우에는 등록금 인상으로 힘겨운 상황이다. 게다가 주택 문제도 심각하며, 공공지출 감소로 젊은 층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공서비스도 상당히 축소되고 있는 상황이다.

 

 

  폭동의 주역은 누구인가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실제로 이번 투쟁이 중동이나 스페인, 그리스처럼 반정부 시위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아무런 정치적 주장도 없는 말 그대로 폭동으로 그치고 만 이유는 무엇인가? 저명한 슬라보예 지젝은 최근 논평에서 이번 영국 폭동이 뭔가 심각한 문제에 기인한 것이긴 하지만 2005년 프랑스 파리 외곽의 방리유자르 소요와 마찬가지로 폭동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작년부터 올해에 걸쳐 지속되고 있는 영국 학생들이 명확한 요구를 가지고 저항한 것과 대비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폭동에 참가한 사람들을 두고, 헤겔이 ‘추상적 부정성’이라고 부른 것처럼 조직된 사회적 공간 바깥에 존재하는 폭도들로서 자신의 불만을 비이성적이고 파괴적인 폭력으로밖에 표출할 수 없는 사람들에 가깝다고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러한 지적은 여러 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단 오늘날 경제위기는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며, 여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각국 정부는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한다. 하지만 부자들은 예외다. 왜냐하면 부자들더러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하면 투자가 위축될 것이고, 이는 일자리 감소로 이어질 것이고, 더 큰 고통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유일안 해법은 가난한 자들이 더욱 가난해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가난한 젊은이들은 그저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알랭 바디우도 이러한 상황을 세계 없는 세상이라고 표현하면서, 이 가난한 젊은이들은 어디에도 자신을 위치지울 수 없으며, 여기서 그나마 유일하게 가능한 행동은 의미 없는 폭력일 뿐이라고 말했다.

 

 

  벌거벗은 자본주의, 도덕의 외피를 두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부와 경찰은 이런 분석을 외면한 채 폭동 초기부터 신속하게 이번 폭동을 단순한 범죄행위로 규정해 버렸다. 영국 캐머론 총리는 이번 사태에 대해 책임감 부족, 부모의 보살핌과 훈육 부족, 윤리와 도덕의식 부족 등등을 원인으로 꼽으며 심판자의 위치를 자처하고 있다. 이는 이번 폭동이 정부의 긴축정책이나 만연한 실업과 무관하다는 주장이다. BBC를 포함한 대부분의 영국 언론 역시 이러한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은 이번 사태를 “허무주의적이고 야만적인 10대 청소년들의 난동”으로 치부했다.

 

  이번 폭동을 인종적 문제로 몰아가는 흐름도 존재한다. 극우 파시스트 정당인 EDL(영국수호동맹)은 엘섬 지역에서 (백인의) 영국을 지키겠다면서 거리로 나섰고, 엔필드에서는 ‘엔필드수호동맹’이라고 적인 흰색 셔츠를 입은 채 우익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처럼 흑인 청소년들의 범죄적 행태에 초점을 맞추고, 폭동의 원인을 인종적 문제로 몰아가는 것은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것이다. 실제로 흑인 청소년이 문제가 아니라, 흑인 청소년들이 런던의 소외된 지역에 몰려 있는 것일 뿐이다. 많은 폭동이 흑인 밀집 지역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은 단지 흑인들이 소외된 지역에 몰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줄 따름이다.

 

  자본론 강의로 유명한 데이비드 하비는 최근 글을 통해 영국 언론의 이러한 행태에 대해 1871년 파리코뮌의 기억을 상기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야만’이라는 단어는 1871년 코뮌 투사들이 어떻게 묘사되었는지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코뮌 투사들은 야수, 하이에나 등으로 묘사되었다. 따라서 사유재산의 신성함과 도덕, 종교, 그리고 가족의 이름으로 즉결처형 당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캐머론 총리가 대안이랍시고 제시한 것과 동일하지 않은가? 비행청소년들의 도덕과 윤리, 시민의식 실종, 가족 가치의 해체에 훈육의 부족 등등을 원인이랍시고 이야기하고, 그 대안으로 시내에 16,000 명에 이르는 경찰을 배치하고, 수천 명의 시위진압경찰 훈련을 계획으로 제출하고 있다. 미국 방식대로 선제적인 체포와 발포 허용도 검토하고 있다. 소요 발생 시 통행금지 방안도 준비 중이다. 물대포와 최루 가스, 그리고 고무탄 사용은 이미 허가되었다. 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이번 폭동 확대에 기여했다며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의도를 밝히기도 했다. 극우 세력들은 2005년 프랑스 방리유자르 때와 마찬가지로 인종적 편견을 조장하기까지 한다. 도대체 과연 무엇이 야만적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의 일상생활을 들여다봐도 문제는 마찬가지다. 우리의 자본주의적 일상은 훨씬 더 ‘야만적’이다. 야만적인 정치인들은 각종 위법을 저지르고도 당당하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위장전입, 병역, 투기, 탈세 문제 등등이 없으면 이상할 정도다. 민중들의 지갑을 터는 데 혈안이 되어있는 은행들은 그 얼마나 야만적인가. 4대강 사업, 한강 르네상스 등으로 막대한 재정지출이 벌어지고 그 단물을 일부 세력들이 독식하고 있다. 각종 컨설팅업체들과 투기자본들도 민자 고속도로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공공 자산을 약탈하는 데 천재적인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 통신사들은 IT 강국 운운하며 역시나 가계에 엄청난 통신비용을 부담시켜 초유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폭력성도 마찬가지다. 용산, 포이동 마리 등 철거 지역에서는 공권력의 비호 아래 용역깡패들이 공공연하게 폭력을 행사한다. 유성, 한진, 현자 비정규직 등 노동자 투쟁에서도 이러한 폭력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희망 버스를 가로막은 어버이연합을 보면 우익 테러도 더 이상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이런 예들은 사실 이루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정치인들과 자본의 이런 야만적 행태와 이번 영국 폭동이 구별되는 점은, 이번 폭동이 좀 더 공공연하고 거리에서 이뤄졌다는 점 정도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사실 이번 폭동에서 있었던 약탈이나 폭력행위는 앞서 열거한 정치인들이나 자본가들의 행위와 별 다른 게 아니다. 그리고 폭동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굳이 이런 분석을 하지 않더라도 본능적으로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야만적 행동을 몸소 행했을 뿐이다.

 

 

  결국 이번 사태는 모종의 ‘야만적’ 행동이라기보다 벌거벗은 자본주의의 본 모습이다. 캐머론 총리와 영국 언론들이 재빠르게 도덕과 윤리를 들이민 것도 바로 이 벌거벗은 자본주의를 감추기 위한 것일 뿐이다. 이 얼마나 꼴사나운 짓인가. 실제로 캐머론 총리의 언론 조작은 초기에 상당히 성공적인 듯 보였다. 폭동 초기에 2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폭동 가담자들의 가족에 대한 복지 수당 및 주택 지원을 중단하라는 온라인 서명에 동참한 것이다. 물론 폭동이 잠잠해지고, 좀 더 냉정하게 사태를 바라보게 되면서 이런 흐름은 일주도 안 되서 싹 사라져버렸다.

 

 

혁명으로의 진화 가능성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거리로 나온 많은 군중들은 정부와, 정부의 긴축정책, 그리고 폭력적인 경찰, 부자들에 대해 반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은 명확한 목표나 전술의 부재 속에서 무차별적인 대상 설정, 그리고 구체적인 요구를 제기하는 데 실패하면서 약탈자들이 끼어드는 데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은 불평등과 박탈감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젊은 미조직 노동자들의 운동이 혁명적 행동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파괴적 양상으로 드러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의 취약성일 뿐만 아니라 야만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쇠퇴기 자본주의의 특징이기도 하다. 위기의 심화가 곧바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정치적 지향이 존재하지 않는 무정형의 폭력이 오히려 새로운 사회를 열어갈 노동자계급의 동력을 소진시킬 수도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물론 이 문제의 가장 큰 책임은 바로 자본주의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스스로 이 문제를 풀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공은 노동자 계급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영국 노동운동의 전투성 결핍과 노동자계급 지도력의 위기는 적극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영국노동당은 기간 당세 위축과 당 내 좌파에 대한 오랜 마녀사냥식 태도와 우경화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로 혁명은 고사하고 노동당 의원 가운데서도 지역의 긴축에 대해 반대한 인원이 손에 꼽을 정도인 상황이다. 다른 사회주의 조직들 역시 가난한 젊은 노동자 혹은 실업자들과 정치적 관계를 맺는 데 실패했다. 노동조합도 비정규직노동자들 및 실업자들 조직화에 실패하면서, 젊은 좌파적 성향의 미숙련 노동자들이 버려지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 젊은 노동계급으로 하여금, 노동자권력을 향한 조직적 저항, 혁명적 행동보다 무정형의 파괴적 폭력에 경도되게 한 주요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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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든 이런 상황이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노동조합의 조직률 감소 및 젊은 층으로부터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자본가 정부의 임금 및 일자리 삭감, 공공복지 축소 등이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이 속에서 젊은 노동자들은 혁명적 정신과 과감성, 역동성을 보여주었다. 이와 함께 경찰에 대한 증오와 부자에 대한 적개심 등은 얼마든지 자본가 정부에 대한 반대로 조직될 수 있다.

 

  오랜 기간에 걸쳐 계급의 조건과 상태가 변화하고 있으며, 노동조합이나 정치조직들 역시 이 변화에 발맞춰야 한다. 영국의 폭동은 젊은 실업자 층이 자신을 대변할 어떠한 조직적 형태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특히 50% 대의 실업률에 육박하는 흑인들의 경우 더더욱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011년 8월 영국의 폭동은 노동계급의 젊은 층들이 억압과 긴축, 인종차별에 저항한 역사로 기억될 것이다. 노동계급은 확고하게 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 폭동 참가자에 대한 기소 및 재판 중단과 연행자 석방을 함께 요구해야 한다. 진짜 약탈자는 바로 은행과 자본가 그리고 현 보수-자민 연립정부다. 바로 이들을 감옥에 처넣어야 한다.

 

  물론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이번 소요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은 자본주의가 더 이상 작동을 멈추고 있으며, 앞으로도 ‘정상화’ 될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속에서 착취와 억압에 저항하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등장이다. 현 경제위기의 가장 큰 희생자인 젊은 층들은 혁명적 분노로 가득 차 있으며, 경찰과 부자들을 향한 대담한 행동에도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긴축과 자본의 위기 전가 공격에 맞서 혁명적인 젊은 층을 노동자계급으로 묶어세우는 것이 지금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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