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잔재

분류없음 2016/12/14 03:44

 

최근에 새로 시작한 일터에서 만나는 한 클라이언트. F라고 해두자. F는 동아프리카의 한 나라에서 이민왔다. F보다 먼저 이민온 친척 아저씨는 본국에서 대학까지 졸업했지만 캐나다에서 그 학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F의 아저씨는 온타리오에 있는 대학도시 Kitchener 에 정착했고 그 도시에 있는 한 대학에서 야간 시큐리티 (수위) 로 일하면서 그 대학의 Social Work 과정을 8년만에 졸업했다. 졸업 뒤 근사한 직업을 갖게 된 F의 아저씨는 본국에 있는 조카들을 한 명씩 초청 (sponsorship) 하기 시작했다. F는 그렇게 해서 캐나다 이민자가 되었다. F는 그이의 아저씨처럼 본국에서 공부를 했지만 이윽고 시작된 내전 탓에 대학 졸업장을 얻지는 못했다. 캐나다에 와서도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F는 "공부머리" 가 아니라며 웃었고 여차저하해서 꽃개가 일하는 곳에서 산다.

 

 

F는 여느 클라이언트들처럼 정부보조금으로 살아간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어김없이 만나는 그이의 일상에 한 가지 특이점은 매주 금요일마다 매우 늦은 시간에 피곤한 행색으로 돌아온다는 것. 지난 주 금요일 역시 열한 시가 다 된 시간에 돌아온 F의 손에는 작은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이거 우리 나라 스타일로 만든 케이크야. 반은 네가 먹고 반은 나에게 돌려줘." 간혹 클라이언트들이 작은 선물을 주기는 하는데 밖에서 직접 케잌을 사들고 들어와 이렇게 구체적으로 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봉지를 뜯어보니 치즈케잌 + 아이스크림케잌처럼 생겼다. 케잌나이프로 살짝 반을 갈라 플레이트에 옮기려는데 자기 것은 그냥 원래 있던 컨테이너에 담아서 달란다. 응, 알았어. 포크로 한 입 먹어보니 굉장히 크리미하고 부드럽다. "와, 이렇게 소프트하고 부드러운 케잌은 처음 먹어봐. 너네 나라에서 이렇게 맛있는 걸 먹는다니 무척 부러운 걸." 솔직히 케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짐짓 치켜세우며 말했다.

 

 

"우리 나라는 옛날에 이탈리아 식민지였어. 전통 음식 말고 유럽식 음식은 모두 이탈리아 스타일이야. 금요일마다 일하는 레스토랑에서 제공하는 디저트야. 죄다 이탈리아 스타일 디저트밖에 없어."

 

 

아, 그랬구나. 금요일마다 식당에서 일하느라 그렇게 피곤해보였구나. 그래서 그렇게 금요일마다 늦게 돌아왔구나.

 

 

"너네 나라는 어떠니. 우리 나라는 옛날에 이탈리아 식민지여서 우리 나라에서 공부한 건 캐나다에서 인정해주지 않아. 옆나라 케냐는 영국 식민지여서 그랬는지 케냐에서 메디컬닥터 학위를 받아 캐나다에오면 2년만 공부하면 자격을 인정해주는데 우리 나라에서 의사자격증을 따도 캐나다에 오면 아예 소용이 없어. 다시 처음부터 공부해야 해. 너네 나라는 어때? 사우스코리아는 잘 사는 나라라고 들었는데 사우스코리아에서 메디컬닥터를 받으면 캐나다에서 자격증 따는 건 어렵지 않겠지?"

 

 

오오. 몰랐다. 케냐가 1960년대까지 영국 식민지였던 것은 알았지만 학제와 시스템이 여전히 영국식이어서 케냐에서 공부한 것을 캐나다에서도 손쉽게 (상대적으로 손쉽게)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몰랐다.

 

 

"차라리 우리 나라가 옛날에 영국 식민지였으면 우리 친척 아저씨도 8년동안이나 대학을 다니고 야간에 수위로 일하고 그런 개고생은 하지 않았을텐데. 나도 캐나다에서 고등학교부터 다시 다녀야하는 그런 번거로운 일은 없었을텐데. 왜 하필이면 쓰잘데기 없이 이탈리아 같은 나라의 식민지였을까. 웃기지 않아? 이탈리아 식민지여서 좋은 건 하나도 없어. 아, 하나 있구나. 이렇게 맛있는 케잌을 먹을 수 있다는 거."

 

 

식민지를 겪은 조선-대한민국의 국적을 지닌 사람으로서 그냥 지나치기엔 다소 씁쓸한 이야기다. 아주 먼 옛날 친구들과 농담식으로 차라리 미국 식민지였으면 영어를 모국어로 쓰거나 더 손쉽게 영어를 배울 수 있었을텐데 쓰잘데기 없이 일본 같은 나라의 지배를 받아서 빠께쓰, 쓰봉, 쓰메끼리, 벤토, 와리바시 따위의 올드패션드한 일본식 잔재만 남아있다는 식의 자조와 푸념을 늘어놓은 기억이 떠올랐다. 일본 말고 미국이나 영국의 식민지였으면 수학능력 영어듣기 평가도 더 잘할 수 있을텐데, 토플 공부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텐데, 셰익스피어가 구사했던 영어도 그냥 고문법 정도로 간단히 공부할 수 있었을텐데, 조선은 왜 우리에게 이렇게 형편없이 쓸데없는 것들만 남겨줬을까... 모든 것이 농담 아닌 농담처럼 그러나 제국의 식민지 이후 태어난 탈근대 세대의 농담으로 치부하기엔 상당히 반역사적이고 반주체적인 그런 수다들...

 

 

호기심이 많고 자립심이 강한 편인 F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질문하고 대화하고 생각을 나누는 일에 거리낌이 없다. F는 캐나다에서 취득한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지만 그 졸업장만으로는 F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니, 아프리카 무슬림 백그라운드를 지닌 F는 캐나다로 이민온 뒤 비아프리카 비무슬림 사람들에게서 쏟아지는 편견과 차별에 지쳤다. F가 본국에서 갈고 닦은 지식과 경험을 캐나다에서 동일한 조건과 수준으로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게 됐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지난 십여 년 동안 무수한 도전과 패배, 열패감을 겪으면서 오히려 더 차분해졌다고 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이야. 우리는 기껏 백만 원도 안되는 정부보조금으로 살아가지만 우리가 무슨 범죄를 저지르거나 탈세를 하는 건 아니잖아. 억만장자들이 어떻게 그 돈을 벌었는데, 그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범죄자야. 우리를 뭐 대단한 범죄집단처럼 여기는 사람들을 보면 화도 나지만 이젠 얘기하는 것도 지쳤어. 그냥 나는 여기서 살래. 밖은 지옥이야."

 

 

제국의 잔재는, 식민의 잔재는 오늘도 지구상 곳곳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식민의 잔재, 억압의 잔재는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저항하는 법을 잊게 만드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이것은 F와 전혀 무관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F는 무력한 것도 저항을 포기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몸을 낮추고 기다리고 있다. 그럴 것이다.

 

2016/12/14 03:44 2016/12/14 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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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몸종

분류없음 2016/11/30 01:00

지난 번 ADL 단상 과 상당량의 연관이 있는 일상 정리.

 

클라이언트 한 명의 빨래를 서포트하면서 있었던 일.

 

빨래는 "라운드리스케쥴"에 맞춰 정해진 시간에 해야 한다. 스스로 빨랫감을 정리하여 바구니에 넣거나 따로 준비한다. 빨래를 할 의사가 있으면 미리 스텝에게 말해야 한다. 먼저 세탁기를 쓰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기다려야 한다. 먼저온 사람부터 서비스를 이용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빨래가 끝나면 드라이기에 넣고 역시 다 마치면 스스로 빨래를 개고 정리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세탁기/ 건조기 사용법, 빨래를 하고 끝난 빨래를 개고 정리정돈하는 법, 시간약속을 지키고 이행하는 법, 기다리는 법, 권리를 이해하고 요구하고 스스로 이행하는 법 등을 배울 수 있다. 새로 세탁한 깨끗한 옷을 입으면서 청결이 무엇인지, 얼마나 기분좋은 일인지도 배울 수 있다.

 

 

스텝 처지에선 한 공정 한 공정 하나하나 가르치거나 안내하고 지켜봐야 하고 몇 번씩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다 큰 건장한 사내가 빨래를 할 줄 몰라 더듬더듬거리거나 세탁기 작동법을 몰라 쩔쩔맬 때에는 하나하나 가르쳐주면서 거기에 잘한다고 칭찬까지 해야 한다. 으쓱하면서 다음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거야, 라고 반응하기도 한다. 그러면 또 역시 옳지 잘한다! 해야 한다. 어쩔 때는 보고 있기 답답하고 다음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게 답답해서 거들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꾹 참아야 한다. 스텝이 뭔가를 해버리면, 특히 여성 스텝이 이런 일을 해버리면, "응, 내가 안해도 얘네들이 해주는구나" 혹은 "당연히 여자가 그런 일을 해야지. 내 손으로 그런 일을 해야겠어!" 라며 적반하장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 의존성 (dependancy) 을 키울 뿐 독립성 (independancy) 을 키우는 데에는 효과가 전혀 없는 접근이기 때문에 항상 조심하고 기다리고 격려해야 한다. 감정노동이다.

 

 

아프리카 어떤 나라에서 이민온 뒤 가족과 이별하고 (이별한 이유는 자세히 모른다) 혼자 살다가 여차저차해서 꽃개가 일하는 곳으로 흘러들어온 한 남자, A라고 해두자. A가 저녁 무렵에 빨래를 하고 싶다고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A는 다행히 세탁기 사용법, 빨래를 하고 개는 법 등을 잘 안다. 나름대로 개인청결 (personal hygeine) 도 훌륭한 편이다. 건조기가 다 돌아가서 A를 불렀다. 빨래가 다 끝난 거 같으니까 회수해야 할 것 같은데. 졸졸졸 따라오면서 자기는 곧 착한 아내 (good wife) 를 얻을 것이고 착한 아내와 살면 빨래도 안해도 되고 맛있는 밥도 먹을 수 있다며 매우 희망에 찬 말을 했다. 요즘 여자들은 그런 거 안 좋아해. 했더니 금방 삐친다. 그래, 네가 그럴 수 있기를 바라. 

 

 

정말로 그이가 착한 아내를 얻었으면 좋겠다.

 

2016/11/30 01:00 2016/11/30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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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프레임

분류없음 2016/11/23 02:48

 

1.

미국 정부와 경찰이 선주민 보호구역 Standing Rock 에서 자신의 땅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대포를 발사했다. water cannon. 한국인들에겐 낯설지 않다. 바로 백남기 농민이 이 물대포에 맞아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Standing Rock 은 North Dakota 에 있고 내륙 지방인 그 곳은 겨울이 빨리 온다. 추운 날씨에 시위대에게 워터캐논을 발사한 미국 경찰. 그것을 허가한 미국 정부.

 

백인집단이 왜 그렇게 선주민 압살에 골몰하는지 이유를 밝힌 좋은 아티클을 읽었다. 이것을 공유해준 분에게 감사말씀을. 그리고 이 글은 일제시대에 일제가 조선인들을 어떤 관점에서 다뤘는지, 그리고 여전히 강정과 밀양 등 선주민들을 폭압적으로 다루는 한국 지배계급의 관점이 무엇인지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하면 한국에서든 어디서든 이주노동자들을 대하는 비이주계급의 시선이 담지한 정치적 맥락을 짚을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 뭐 다 아는 얘기잖아,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2.

한국에선 이른바 "순수" 프레임의 일환인 "비폭력" "평화시위" 가 박근혜-최순실 테마를 압도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인들이 유독 "순수"한 것을 좋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뭔가 다른 이유가 분명히 있다. 거리에 나선 민중이 직접 그들의 힘을 드러내는 것, "직접 민주주의" 를 싫어하고 경계하는 부류가 어디엔가 있다. 그들은 조선일보일 수도, 검찰일 수도, 재벌일 수도, 청와대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시민 그 자체일 가능성도 있다. 시민들은-민중은 책임을 지는 것을 원체적으로 싫어한다. 부담스럽다. 그렇게 훈련받고 교육받은 적이 없거나 드물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으라, 고 하면 가만히 있는 데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지킬 것도 없으면서 잃을 것도 없으면서 뭔가 대격변 (upheaval) 이 일어나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주입받고 자랐다.

 

 

이렇게 말하면 그럼 폭력적으로 하자는 거냐? 다치면 누가 책임질 건데? 따위의 반응이 영락없이 돌아온다. 비폭력 프레임을 벗어나자는 말이 폭력을 부추기는 것으로 들린다면 그것은 듣는 이의 귀나 머리가 모자란 탓을 먼저 해야 한다. 바로 그런 전근대의 사고방식, 모 아니면 도 따위의 사고방식이 작금의 혼란을 가져왔고 그게 바로 박근혜 식 사고이자 화법이다.

 

 

In order for nonviolence to work, your opponent must have a conscience.
- Stokely Carmichael, aka Kwame Ture

 

 

흑인 인권운동가 크와메의 일갈이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상대는 떡 줄 생각도 않는데 김치국드링킹이나 하고 앉았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상대가 누군지 제대로 알고 진지전을 준비해할 것 같다. 박근혜-최순실-복어지리 ㄱㄱㅊ-우갑우-좃선일보-삼성, 그리고 2mb 는 비폭력 평화시위를 아주 좋아하는 집단이고, 시민-민중이 "비폭력 평화시위" 프레임에 의문을 갖는 순간 얼씨구나 합체하여 공격을 개시할 집단이다. 그들에겐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는 "양심" 이라는 것 따위는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이 근본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덕목이다. 원래부터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것을 강요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김치국드링킹은 이제 그만. 많이 먹었다.

 

 

 

 

2016/11/23 02:48 2016/11/23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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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새와텃세

분류없음 2016/11/17 01:19

 

1.

 

주중에 일하는 새로운 일터에서 "텃새" 들이 부리는 "텃세" 를 겪고 있다. 예상한 일이긴 하지만 이런 일엔 좀처럼 면역이 쉬이 들지 않는다. 일터에 따라 업계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로 고용안정성 (job security) 이 낮거나 노동자 스스로 자기 직업과 업무에 관한 만족도가 낮을 때, 노동자에게 일에 관한 전망 (예를 들어 승진; promotion 의 전망) 이 보이지 않을 때 새로 들어온 동료들을 경계하거나 심지어 핍박하는 일이 일어난다. 물론 개개인의 인격이나 성장과정, 인성 등도 영향을 미친다.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직장을 잡았을 때에는 학생으로 실습을 하고 실습기간이 끝나자 곧바로 직원이 되었다. 이미 그 곳에서 일하던 비정규직들에게 나의 등장은 어느 정도 "위협" 은 되었지만 매니저라는 사람이 워낙에 연공서열 (seniority) 을 따지던 양반이라 꽃개는 그저 "비정규직" 풀 (pool) 에 들어있는 또 하나의 어리고 미숙한 동료에 불과했다. 외모 탓도 컸다. 얼척없이 어려보이는 탓에 그들 눈엔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어리고 순진한 청년으로 보였던 것 같다. 나중에 나이를 알게 되었을 때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깜짝 놀라는 그들을 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어쨌든, 그래서였는지 모두 친절하고 착실하게 가르쳐주었다. "서두르지 말라" 면서 하나둘 차근차근 일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핵심업무는 결코 가르쳐주지 않았고 그것을 스스로 깨우치는 데 자그만치 2년이 넘게 걸렸다. "핵심업무" 라는 것도 사실은 절대시간이 필요한 일인지라 그들이 애써 가르쳐주지 않았다거나 일부러 감췄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같은 회사 내에 다른 프로그램에서 두번째 직장을 잡았을 때에는 경계가 엄청 심했다. 더구나 나는 같은 회사 출신이었고 (internal hiring) 새로운 매니저는 경쟁구도를 만드는 것을 유독 즐겼다. 영구 정규직 직원들 (permanent full-timers) 까지 나서서 시비를 걸거나 빈정거릴 때에는 정말정말 조심해야겠구나 싶었지만 무엇보다 그들은 이미 같은 회사 내 다른 프로그램에서 충분히 경력을 쌓은 나의 업무능력에 시비를 걸지 못했다. 그래서 더더욱 그들의 심사가 뒤틀렸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들과 여러가지 방도를 통해 친해지면서 "나는 이 곳에서 풀타임을 구할 생각이 전혀 없어" 라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여러번 밝힌 후에야 모든 갈등이 가라앉았다.

 

 

2.

 

어제 새로운 직장에서 있었던 일. 근무가 시작되었고 정규직 직원이 오프를 신청하는 바람에 업무를 같이 하게 된 시프트 파트너 2명 모두 비정규직이다. 남아시아 출신 남성 한 명과 캐리비안 출신 여성 한 명. 둘 다 비정규직으로 그 곳에서 일한 지 5년이 넘었다. 이 말은 업무에 관한 한 눈을 감고도 일을 해낼 줄 안다는 소리. 동시에 정규직화, 승진 기회 등에서 누락당한 경험이 최소 한 번 이상은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더구나 둘 다 비백인 이민자. 꽃개의 센서에 빨간불이 들어온다. 둘 중 출근시간에 늦어 한소리를 들은 남성직원은 아예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자신의 민망함 (frustration) 을 애먼 꽃개에게 투사한다. 꽃개는 새로 오픈하는 사이트로 곧 옮겨갈 예정이므로 포지션이 다소 어정쩡하지만 어쨌든 그들 눈에 꽃개는 "굴러온 돌" 이다. 예상한대로 꽃개의 업무 질문에 이 남성직원이 "### 트레이닝은 받았어?" 라며 신경질적으로 되묻는다. "###" 은 이 업무를 하는데 가장 중요한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아차, 그냥 멀찌감치 빠져있는 게 나을 뻔 했는데 괜시리 나서는 바람에 이 양반 심기를 건드렸구나. 더구나 꽃개는 비백인 이민자 아닌가. 얼척없이 어려보이는 외관상 불리함에 더해 이들이 싫어하는 중국인 (차이니즈) 으로 보일 가능성이 100퍼센트다.  

 

 

캐리비안 여성 직원은 아무 말 없이 분위기를 조성하며 텃세를 부리는 스타일이라면 남성 직원은 은근히 자신의 업무능력 (competancy) 을 과시하는 스타일이다. 단정하긴 어렵지만 이런 데에서도 젠더적 차이가 드러난다. 이럴 땐 둘 간의 연대를 끊어내야 한다; 핵심업무는 손대지 않고 관찰만 한다, 이 둘이 보기에 주변업무인 것 같은 일은 열심히 한다, 여성 직원에게 심리적인 편안함, 친근함을 준다. 말로 하니 우습고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심리적인, 정신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스트레스다. 결론은 -- 그냥 그들이 하던대로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내버려둔다".

 

 

3.

 

근무시간 내내 부아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간신히 다스리고 집에 오는 길에, 집에 와서, 아침에 일어나서 찬찬히 리뷰를 해보니 어제 같이 일한 비정규직 두 명 모두 꽃개의 포지션 (새로운 사이트에서 근무하는 정규직) 에 이미 지원했다가 미끄러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꽃개의 등장은 이들에게 "불편함" 그 자체였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특히 업무능력에 시비를 건 남성직원에게 꽃개는 중국인 디렉터에서 연줄이 닿아 낙하산으로 입성한 "근본도 없는 중국인" 으로 고려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모든 것은 추측이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보아 개연성이 현저히 높다. 

 

 

상상력을 동원해 이 상황을 나름대로 합리화 (justifying) 해보자. 만약 한국에서 일하는데 어느날 누군지도 모르는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노동자가 치고 들어와 나보다 높은 지위 혹은 나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는 자리에 덥석 앉는다면? 꽃개는 억울하고 화가 날 것이다. 바로 몇 주 전, 몇 번이나 지원했던 정규직 자리가 이제 갓 들어온 백인 남성, 그것도 회사 내의 다른 매니저의 아들에게 돌아갔을 때 그 억울함과 절망감, 열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백인남성이 "매니저엄마" 라는 정치적 백업과 "백인" 이라는 차별적 우위를 등에 업고 그 자리에 입성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꽃개는 그런 백업도 인종적, 성적 차별에서 우위를 전혀 갖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오로지 꽃개의 시선일 뿐이다. 그 곳에서 5년간 일했던 비정규직 직원에게 꽃개의 시선이나 관점은 하등 상관이 없다. 사람마다 보는 시선이 다 다르고 각자 자기 입장에서 해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애써 나는 중국인이 아니야, 나는 백그라운드를 등에 업고 정규직 포지션을 구한 아니야, 나는 충분히 자격이 있어 따위를 증명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그것이 그들 눈에 보일수록 그들의 분노는 더 커질 뿐이다. 절대시간이 필요하고 꽃개는 꽃개 자리에서 묵묵히 보이지 않게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4.

 

짐승들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책이나 다큐멘터리에서 본 것은 그렇다치고 예전에 강아지와 함께 살 적에 다른 강아지들이 집에 방문하면 펄쩍펄쩍 뛰면서 예민하게 킁킁거리며 영역 다툼을 하는 것을 본 적이 몇 번 있다. 꽃개와 살던 강아지는 나름대로 "인간화 (?)" 가 많이 된 절반은 인간에 가까운 강아지였는데도 다른 강아지들의 등장엔 매우 단호했다. 이른바 텃새였던 꽃개의 강아지가 부린 텃세에 처음엔 당황했지만 그 "지랄" 을 반복하면서도 꽃개도, 꽃개의 강아지도 익숙해졌고 한참 뒤엔 다른 강아지가 와도 그닥 신경쓰지 않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또 어느날, 익숙해졌는가 싶었는데 못내 날뛰며 설치고 짖는 강아지를 보면서 이들의 세계에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구나 깨닫고 묵묵히 관찰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때가 떠올랐다.

 

그들에겐 생존의 문제다.

 

 

2016/11/17 01:19 2016/11/17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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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벨볼레로

분류없음 2016/11/11 07:14

 

어제 저녁에는 짝꿍과 함께 다운타운 음악당 (Roy Thompson Hall) 콘서트에 다녀왔다. 올해 벌써 세번째 방문이고 모두 시립오케스트라 (TSO) 가 연주하는 행사였다. 첫번째와 어제는 짝꿍이 그동안 자원활동 (volunteering) 한 곳에서 자원활동가 감사 행사 (volunteers appreciation event) 의 일환으로 기획한 행사에 초대받아 무료 티켓을 받았다. 두번째 방문은 짝꿍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다녀왔다. 어제 좌석은 발코니였는데 가격이 최소한 60달러짜리였다. 두 사람이 표를 샀으면 세금붙여서 최소한 140달러 안팎을 지불했어야 했고 따라서 가지 못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기회였다. 짝꿍에게 감사하고 감사하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짝꿍을 만난 것도 감사하고 평소에 부지런히 커뮤니티 활동을 해두어 이렇게 이벤트 기회를 맞이한 짝꿍이 대견스럽다. 늦은 저녁에 피곤을 무릅쓰고 길을 나서준 것에도 고맙다.

 

 

어제 테마는 "1920년대" 였다. 시작곡은 "종달새의 비상 (The Lark Ascending, Ralph Vaughan Williams)" 이었는데 바이올린 콘서트 곡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따로 일부러 찾아 들어본 곡은 아닌데 역시 테마에 맞게 근대적인 느낌이 물씬 났다. 두번째 곡은 알콜중독자 시벨리우스의 7번 교향곡. 시벨리우스의 교향곡은 올해로만 벌써 두개째다. 연주 내내 7번 교향곡을 끝으로 긴 침묵에 들어간 이이가 그동안 과연 술을 끊었을까 아니었을까 뭐 그런 생각을 좀 하다보니 금새 끝났다. 세번째 곡은 비올라 콘서트 곡이었는데 잘 생각나지도 않을 정도. 나는 아마도 비올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마지막 곡은 대망의 "볼레로 (Boléro)". 라벨은 그이의 피아노협주곡 G, 특히 2악장 (아다지오 아사이) 때문에 꽃개가 엄청 좋아하는 작곡가. 라벨은 뭔가 이상야릇한 분위기가 강하고 정통에서 한참 떨어진 것 같은 아웃사이더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아마 더 끌리는지도 모르겠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그이의 "볼레로" 를 직접 듣는 것은 처음이라 설레이는 마음을 간신히 다스렸다. 

 

 

역시 아웃사이더인 작은북과 플루트로 시작한다. 현악기인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 등이 주류라면 타악기, 관악기 등은 어쩐지 아웃사이더 같다. 비유를 굳이 하자면 현악기는 백인주류집단 같고 타악기와 관악기는 비백인들, 때로는 흑인, 때로는 황인 같다고 할까. 작은북을 치는 것도 아니고 안치는 것도 아니고 조용히 그 특유의 가락을 이어가는 동안 관악기인 플루트, 클라리넷 등이 교대로 같은 가락을 연주하고 특이한 것은 섹소폰까지 등장한다는 것. 그리고 재미난 것은 그동안 주류사회를 주름잡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등은 피치카토 (pizzicato, 활이 아닌 손가락으로 현을 튕기는 것) 를 계속하면서 머쓱하게 무대를 지킨다. 볼륨은 점점 커지고 숨어서 연주하는 것 같던 작은북의 연주자는 드디어 북채를 완전한 형태로 잡아들었다. 같은 가락이 계속 반복되므로 다소 지루할 수도 있는데 참여하는 악기, 강도와 세기 등 완급을 조절하여 눈과 귀를 뗄 수 없게 만든다. 원래는 무용가의 제안으로 스페인 민속음악에 착안하여 작곡했다는데 아, 그래서 그렇게 플라맹고 같은 느낌이 나기도 했구나 싶었다. 12분간의 연주가 끝나고 일부러 일찍 일어나 나오면서 사람들의 갈채박수 소리를 밖에서 들었다. 최순실과 박근혜, 투럼푸 등이 심경을 곤란하게 하는 이 마당에 아웃사이더 스스로 무대에 올라 사람들을 위로하는 그런 연대의 장면을 상상할 수 있었던 늦은 밤의 콘서트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차 안에서 시립오케스트라 (TSO) 도 바로크오케스트라 (TAFELMUSIK) 도 헨델의 메시야 (Messiah) 를 프로모션하고 있는 이야기를 나눴다. 원래 크리스마스 시즌에 메시아가 유행이긴 하다. 짝꿍은 세월이 하 수상하니까 더더욱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릴 것 같다는, 간절히 원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허할 것이다. 그동안 사느라 너무 지쳐서 거의 도박하는 심정으로 트럼프를 찍은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메시아는 절대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내 인생을 구원하는 메시아가 되어야 한다. 어쩌랴. 작은북으로 끝까지 무대를 지킨 볼레로의 오늘밤 연주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나는 아마도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절대로 현악기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되고 싶지도 않다. 아마도 어쩌다가 한 가락 연주하는 타악기, 트라이앵글 정도가 될 성 싶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냥 나는 내 자리에서 내가 원하는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다. 현악기들이 지랄만 안하면 좋겠는데. 참 좋겠는데.

 

 

2016/11/11 07:14 2016/11/11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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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디하세요

분류없음 2016/11/08 08:47

 

요즘 세간의 화제를 뿌리고 있는 "이러려고" 시리즈. 창조적인 대통령 각하께서 "이러려고 대통령이 되었나 자괴감마저 든다" 고 하셨다. ㄹ혜 각하의 담화문 (일각에서는 사과문이라고 하는데 우리 대통령은 절대 사과문을 발표한 게 아니었다) 을 세 번 정도 본 것 같다. 일촌친구 최순실 씨를 언급하실 때는 감정적인 목소리 톤이 나오기도 했다. ㄹ혜 각하의 담화문은 목적이 너무나 분명해서 따로 뭘 분석할 것도 없는 것 같다. 지지자들의 결집이다. 국민들에게 사과나 위로를 하려는 목적도, 자신의 처지를 해명하려는 목적도 결코 아니올시다이고 그저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소리를 높이도록 독려하는 차원이다. 뭔가 주술적인 성격이 강하다. 삼천리 방방골골에 숨어있는 바퀴벌레들에게 얼굴을 드러내라고, 어서 움직이라고 격려하는 그런 효과를 노렸다. 일국의 대통령이 국민을 대상으로 발표한 담화문의 내용치곤 정말 괴이쩍은 "절친절교" 와 "굿안했어" 를 애써 넣은 것도 심히 요상스럽다. 이 두가지는 ㄹ혜 각하 지지자들의 정신적-지적-심리적-시대적 능력과 수준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알려준다. 물론 작성자는 복어지리 ㄱㅊ 일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ㄹ혜 각하가 공식석상에서 말할 기회가 있을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만 만약 있다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주술적 단어와 핵심 문장을 넣어 노회한 바퀴벌레들을 독려하는지 잘 살펴봐야겠다. 그런 재미라도 있어야 국민들이 "이러려고 국민이 되었는지 자괴감마저 드는" 일을 조금이나마 상쇄해주지 않을까 싶어서. 

 

 

추운 날씨에 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다소 오래 지속될 축제-싸움을 하고 계실 분들이 부디 건강하시기를. 지치지 않고 견결히 오래 가시기를. 단디 하세요.

 

 

 

2016/11/08 08:47 2016/11/08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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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아프다

분류없음 2016/11/07 13:51

 

헤로인 중독 (Heroin addiction) 을 벗어나고자 재활치료시설 (residential rehab centre) 에 지원한 뒤에 기다리고 있는 한 클라이언트. 저녁시간을 넘긴 시각에 초인종을 눌렀다. 인터폰으로 대화를 해보니 뭔가 약물을 하신 눈치다. 버튼을 눌러 자동으로 문을 열어주는 대신 직접 나가서 문을 열고 맞아 들였다. 잘 걷지도 못하고 눈이 풀렸고 술냄새가 펄펄 난다. 반응이 늦다. 전형적인 진정제 계통의 향정신성 마약 (depressants) 을 과도하게 했을 때 (overdosed) 나타나는 증상. 무슨 약 했니, 물었더니 헤로인이란다. 어떻게 했니, 물었더니 코로 했단다 (snorting). 술은 마셨니, 물었더니 그건 아니란다. 뭘 잡쉈구만. 위험신호. 헤로인과 술을 함께 하면 매우 위험하다. 순식간에 골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병원엔 꼭 안가도 되니까 전문응급처치 (paramedics) 를 불러서 체크업하자, 물었더니 싫단다. 배고프단다. 계단을 이용할 수 있도록 단단히 옆에 붙어서 식당으로 갔다. 메뉴는 멕시칸 음식. 먹을 수 있게 돕고 저만치 떨어져서 모니터하려는 순간 바닥으로 콰당 넘어져버렸다. 못 일어나고 눈을 못 뜬다. 바로 911에 전화. 평소엔 5분만에 달려오는 앰뷸런스가 이십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는다. 대신에 911을 통해 전문가와 전화통화를 하며 이 양반을 이렇게저렇게 돕고 있는데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악화되었다. 처음엔 뭐라뭐라 중얼거리기라도 했는데 아무 말도 없고 숨쉬는 속도, 심박이 점점 떨어졌다. 눈꺼풀을 뒤집어보니 동공이 아예 돌아갔다. 어느 순간 숨을 쉬지 않는다. 아 정말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911 전화를 붙들고 있는 시프트파트너에게 소리를 질렀다. 밖에서 욕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욕까지 했다. 썅 이것들 애 안와 서두르라고 씨발. 어쩔 수 없이 씨피알 (CPR) 을 시작했는데 다행히 그 순간 경찰들과 응급처치 전문가들이 도착했다. 휴우.

 

 

다행히 십 분만에 의식을 회복했고 의식을 찾자마자 죽게 내버려둬 다들 저리 가, 소리를 지르고 발길길을 하는 바람에 억압복과 수갑을 찬 채로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수갑은 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냐고 너무 심하다고 경찰에게 항의했지만 앰뷸런스 요원들이 다치면 책임은 누가 지냐고 묻는다. 젠장. 경찰 중에 한 명 간호사 역할까지 겸임하는 사람이 헤로인을 코로 흡입한 게 아니라 주사를 맞은 것 같다고 알려줬다. 그래서 그렇게 빨리 의식을 잃었구나.

 

 

헤로인은 정말 정말 위험한 마약이다. 마약은 다 위험하다고들 하지만 정보를 충분히 알고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활용하면 꼭 위험한 것만은 아니다. 그런데 헤로인은,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금단 (withdrawal) 과 내성 (tolerance) 이 너무 너무 강하다. 당연히 의존성 (dependency) 도 높다. 요즘엔 헤로인보다 더 강한 화학적으로 재구성해서 나오는 아편류 진정제 (synthetic opioid analgesic), 가령 펜타닐 (Fentanyl) 이나 하이드로몰핀 (Hydromorphone) 같은 게 있기도 하지만 한 인간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마약을 하는지 그 맥락을 들여다보면 헤로인이 더 더 극악스럽게 위험한 것 같다. 마약도 옷이나 음악처럼 트렌드가 있고 연령대, 소득수준과 즐기는 문화에 따라 소비패턴이 확연히 구분된다. 주로 중산층 백인 청소년 사이에 널리 확산된 헤로인은 한번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빠지기 쉽다. 무엇보다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또다른 진정계통의 약물인 술 (alcohol) 과 함께 할 때 그 위험도는 예상할 수 없는 수치로 치솟는다.

 

 

상황이 종료되고 시프트파트너와 복기 (debriefing) 했다. 시프트파트너도 많이 놀란 눈치다. 클라이언트의 숨이 멎었을 때 나 진짜 돌아버리는 줄 알았어. 시프트파트너는 정신분석상담 전문이고 마약에 대해선 잘 모른다. 나도 물론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런저런 공부를 해뒀고 각종 마약 워크샵에 참여한 탓에 어느 정도는 안다. 무엇보다 "안전한 약물 사용 관점 (Harm Reduction Approach)" 에 관심이 많아서 미리 배워둔 게 큰 도움이 됐다. 헤로인이 저렇게 위험한지 몰랐어. 꽃개 네 말이 맞았네. 헤로인은 정말 정말 위험해. 특히 술이랑 같이 하거나, 다른 진정제 계통 약물이랑 섞으면 더 위험해. 헤로인+술 먹고 들어온 사람은 절대로 바로 잠들게 해선 안돼. 그냥 다른 세상으로 가실 수도 있어. 다른 세상? 어디? 천국. 퇴근길에 시프트파트너가 지하철 역까지 데려다주면서 그런 말을 했다. 우리가 사람 하나를 살렸구나. 

 

 

아침에 일어났는데 오른쪽 팔과 다리가 쑤시고 아프다. 전에 없던 근육통. 클라이언트의 기도를 확보하느라 손으로 머리를 받쳤는데 고작 십여 분 그런 것 뿐인데 안쓰던 근육을 갑작스럽게 놀란 상태에서 썼더니 그런 것 같다. 무릎 꿇고 씨피알하느라 애썼더니 아마도 허벅지가 놀란 건 아닐까 그렇게 추측한다. 몸이 놀라고 아픈 것은 그렇다고 치지만 마음과 정신이 다치면 후유증이 길다. 인생이 너무나 고달퍼서 약물을 들이킨 그 양반의 마음과 정신도 아프겠지만 그런 양반들을 돕고 지원하는 노동자들도 무척 아프다. 한국에서 사회복지 노동자들의 처우가 열악하다는 기사를 읽어서 그런지 더 아프다. 세상 더 험악해지기 전에 사회복지노동자들의 처우가 개선되기를 빈다. 호미로 막을 일 가래로 막지 말고.

 

 

 

* 어제 쓴 포스팅을 읽은 짝꿍께서 영어 단어를 한글로 바로 옮긴 게 너무 많아 요상한 글이 된 것 같다고 하셨다. 요즘 말로 "보그체" 포스팅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다시 찬찬히 읽고 한글로 쓸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한글로 옮긴 뒤 영단어를 붙였다. 옛날에 미국에서 태어나 살다가 유치원 나이 무렵에 한국으로 돌아온 꼬마 아이가 화장실에서 똥을 누고 나와 엄마에게 어기적어기적 걸어가 "마미 똥꼬닦아 미" 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현지 시간 1822hrs.

 

 

 

2016/11/07 13:51 2016/11/07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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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분류없음 2016/10/27 10:31

 

1.

새로 일하게 될 회사에서 열린 스탭 미팅에 다녀왔다. 회사 내 전체 프로그램의 풀타이머들이 참여하는 격월간 미팅. 아직 공식적인 시프트는 시작하지 않았지만 월요일부터 트레이닝과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됐고 고용레터도 그 날짜로 시작했으니 당연히 미팅에 참여하라는 분부. 평사원 중에 아시안은 꽃개 딱 한 명. 당연히 백인 수가 많지만 그래도 흑인이 제법 있다. 매니저 급에서도 중국인 한 명, 흑인 한 명 외에 나머지는 다 백인이다. 수직화해서 들여다보면 위로 올라갈수록 백인이 많은 건 모든 조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이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독특한 것은 디렉터 급에 흑인 남성, 백인 남성 각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여성 (백인) 이라는 점. 아침에 도착해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여기서 일한 지 얼마나 됐냐고 묻는다. 이틀. 말하는 나도 물어본 그 양반도 머쓱.

 

이그제큐티브 디렉터 (Executive Director, ED; 한국어로는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가 새로운 프로젝트의 청사진을 프리젠테이션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순간 식겁했다. "여러분은 우리 커뮤니티의 변화를 불러올 주인공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우리 커뮤니티의 주인입니다. 여러분 손에 우리 커뮤니티의 미래가 달렸습니다" 따위의 말씀을 하시는데 뭔가 좋지 않은 기시감, 데자뷰. 한국에 있을 때 들었던 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족같이 일할 분을 찾습니다." 느낌 탓이겠지? 설마.

 

 

2.

작년부터 일년 동안 일한 한 프로그램의 매니저에게 완곡하게 전한 사임은 반려되었고 오히려 붙잡혔다. 붙잡혔다기보다는 사임을 전한 것이 없던 일로 되어버렸다. 되려 꽃개 네가 일하고 싶으면 언제든 알려줘. 우리는 대환영이야. 이거 뭐지. 나쁜 일은 아닌데 꼭 좋은 일만도 아니다. 어기적어기적 뭉개는 걸 딱 싫어하는데 이런 경우엔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모르는 척하는 게 좋은 거라는 조언을 들었다. 꽃개 너 다 좋은데 너무 솔직하게 말하는 거 그거 좋은 거 아니다. 한국인 어른이 이런 말씀 하셨으면 눼눼 하고 돌아서서 잊어버렸겠지만 비한국인 어른이 하신 말씀이니 마음에 새겨 듣는다. 

 

 

3.

내년 여름에 원더랜드에 동물원에 같이 놀러가자며 즐겁게 대화를 나눴던 한 명의 클라이언트가 돌아가셨다. 벌써 며칠 째 연락이 닿지 않아 걱정이 된 스탭들이 매니저의 허락을 받아 유닛을 뜯고 들어갔더니 이미 돌아가신 것. 아직 46살밖에 되지 않아 약물중독이나 여타 파울플레이가 있었는지 염려되어 부검을 했지만 심장마비 돌연사. 주말 밤근무 도중 이메일을 받았는데 머리털이 정말이지 몽창 쭈뼛 섰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야구 이야기로 수다를 떨던 사람이었는데 언제나 안녕,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해주던 스윗가이였는데. 한참을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원더랜드와 동물원은 나중에 이 다음 세상에서 같이 가자. 부디 편안히 영면하시길.

 

2016/10/27 10:31 2016/10/27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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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은짧아

분류없음 2016/10/27 10:09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늘 그렇듯이 마음을 가라앉게 하지만 이번 건은 뭔가 가라앉고 무겁고 참담함을 넘어 허탈하고 허망하다. 한 민간인이 대통령 머리 꼭대기에 앉아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1급 기밀사항을 열람하는 것을 넘어 국가정책 결정에 개입하는 것은 그렇다고 치자.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다만 왜 박근혜 대통령과 그의 정부 인사들, 그의 주변 인물들은 그것을 공식화하지 못했을까. 왜 그 개입을 공식적인 것으로 만들지 못했을까. 정치는 기술이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상대에게 설명하고 설득하고 타협해서 공식적인 것으로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그들은 그런 면에서 빵점이다. 낯설지 않은 일이다. 밤사이 피튀기며 토론해 정해놓은 어떤 룰이 술자리 한 번 거치고 누군가와 사사로이 나눈 대화로 여반장하는 일을 제법 목격했다. 혹은 그런 자리에 있었다. 아니, 쉬는 시간에 나눠피는 담배로도 그 손바닥 뒤집은 일은 흔히 일어났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동네 양아치들이나 하는 짓이었던 것 같다.

 

 

소싯적에 러시아혁명사 공부해 본 사람들은 다 알만한 단어 "미르". 80년대 학생-노동운동 출신들이 낳은 자식들 가운데 이 이름을 쓰는 아이들이 (에고, 지금은 다 성장했겠구나) 왕왕 있을 것이다. "미르" 는 원래 러시아어로 공동체를 이르는 말이고 제정 러시아, 그러니까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 전후로 존재했던 촌락공동체를 통칭한다. 토지를 함께 쓰고 식량을 함께 마련하던 이른바 생활 공동체였다. "미르" 는 "공산당선언" 이 러시아어로 출판될 때 서문에도 등장할만큼 당대의 급진적 이론가, 혁명가들에게 미래의 영감을 준 소중한 역사적 자산이었다고 전한다. 미-소 냉전과 탈냉전의 상징으로 남은 거대한 우주정거장의 이름도 "미르" 였다. 이랬던 미르가 2016년 오늘날, 한국을 뒤흔든 하나의 단어로 새롭게 떠오른 이유는 뭘까. 추측하는 사람들은 "K-스포츠재단" 의 첫 자음인 "ㄱ/ㅋ"을 "미르재단" 의 "미르"에 이어붙이면 "미륵" 이 된다고 한다. 최태민 목사께서 생전에 본인을 일컬어 "미륵" 이라고 했다는데 가히 샤머니즘이 지배하는 제정일치 국가다운 발상이다.

 

 

대통령 각하의 측근이 공식적인 루트로 등장하지 못하고 또는 이상야리꾸리한 재단을 세워 기업의 삥을 뜯은 것은 대통령과 그들의 측근들이 도저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5년은 너무 짧았다. 따라서 그들은 아예 정상적인 방법 내지 합법적인 방법을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2016년 대한민국의 헌법과 현행법률 안에서는 아무 것도 해낼 수 없는 전근대의 인물들이기 때문일수도 있겠다. 2016년에는 아예 존재조차 하지 말았어야 했던 그런 뭉텅이들. 혹자는 박근혜 대통령이 개헌 카드를 집어든 게 현재의 게이트를 덮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꽃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에겐 (혹은 박대통령에게 사술을 부린 집단에겐) 5년이 너무 짧았다. 그 뿐이다.

 

 

 

 

2016/10/27 10:09 2016/10/27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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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아냐

분류없음 2016/10/22 02:39

 

 

 

소녀시대가 내 맘에 들어온 뒤로 뭔가 좋은 일이 생기는 것 같다. 기분 탓인가. 이런 게 팬심이라는 건가. 우연은 아냐. 필연이었던 거지. 이 와중에 트윈스 1패. 괜찮아 곧 잘 될거야.

2016/10/22 02:39 2016/10/22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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