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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변증법 II

이 글은 진보노동당(Progressive Labor Party)web page http://www.plp.org/misc/dialofmath.html에 올라온 글이며, 지난호(108호) 수학의 변증법 I (1. 산술연산의 변증법)에 이어지는 글로 수학의 변증법 II (2. 기하학의 변증법과 3. 산술연산과 기하학의 상호관계 4.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학의 변증법 II

                                                       현장에서 미래를 109호

2. 기하학의 변증법


자연의 형상


기하학(형상, 도형의 수학) 역시 인간 실천의 필요성에서 그리고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자연에서 기하학적 형태를 가져왔다. 보름달의 원, 초승달과 호수의 부드러운 곡선, 빛과 나무의 직선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형태들이었다. 그러나 자연에서 실제 직선이나 정교한 삼각형과 사각형과 같은 도형을 발견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점점 더 규칙적이고 정교한 물건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일상의 필요성 때문에 점차적으로 정교한 도형(figure)의 개념이 만들어 진 것이다.


사람들은 집을 짓고 돌을 자르고 땅을 나누어 울타리를 쳤고 활시위를 당기거나 흙으로 그릇과 같은 도구를 만들기도 했다. 매일 그 도구로 노동을 했고 또 더 정교하게 만들어 왔다.


자연의 형상에서부터 추상적 형상으로


 점차적으로 활시위는 직선이지만 항아리는 곡선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일반화 시켰다. 사람들은 물질에 어떤 형태를 부여했던 것이다. 이 후 나무, 점토, 돌과 같은 물질에 어떤 특징을 부여하고 각인시킬 수 있는 것을 형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형태 그 자체는 구체적인 물질에서 추상화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곧은자로 수천가지 물건을 만들고, 수천가닥의 실타래를 길게 늘어뜨리고 나서야, 그리고 땅위에 수많은 직선을 긋고 나서야 직선이라는 일반적인(추상적인) 개념을 명확하게 설정할 수 있었다. 직선은 이러한 특별한 경험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성질이었다. 이와 같이 실천적 활동은 기하학에서 추상적 개념의 기초가 된다. 


(물론, 요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직선을 그린다. 그것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곧은자로 재조된 물건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기하학의 법칙


같은 식으로 길이와 면적 그리고 체적 등 기학학적 양의 개념은 인간의 실천적 활동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눈으로 길이를 측정하고 거리를 결정하고 면적을 계산한다. 이것은 농부나 건축가들에게 매우 유용했는데, 이들은 실천적 활동을 통해 가장 단순한 일반 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들 들어 사각형의 면적은 두변의 길이의 곱과 같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관계는 농부에게는 경작할 땅의 면적을 계산하여 다음해 수확 양을 예측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기하학 "땅을 측량하는 것"


기하학은 인간의 실질적인 활동의 필요에서 발생한 것이다. 예를 들어 기하학은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토지를 측량해온 결과로 발견한 것이었다. 그들은 나일강에서 주기적으로 홍수가 범람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토지 측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기하학"이라는 단어도 "땅을 측량하다"는 그리스어에서부터 유래되었다)


BC 1700 시대의 이집트 문서에는 창고나 그릇의 용량을 계산하는 문제, 땅을 구획하는 문제 그리고 토목공사에서 길이를 계산하는 문제 등이 적혀 있다. 당시 이집트와 볼리비아인들은 가장 단순한 면적과 체적을 계산할 수 있었고 그들은 원의 지름과 원호의 길이의 비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처럼 초기 산술연산처럼 기하학도 경험에서 유추한 법칙들을 모아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기하학이 전해 내려옴에 따라 새로운 사실들이 축적되었다. 이후 축적된 사실간 상호관계가 밝혀지면서, 여러 명제들을 논리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기하학적 명제로 발전했다. 이렇게 해서 기하학적 이론과 증명의 개념이 발생하였고, 점차적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유추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명제, 공리(axioms)가 나왔다. 이런 식으로 기하학은 점차적으로 수학 이론으로 발전해 갔다.


기하학적 기본단위(geometric body)의 정의


앞서 "수"에 대해 논의한 것과 같이 "기하학적 기본단위"도 정의할 수 있다. 가하학적인 기본단위는 밀도, 색 혹은 무게와 같이 다른 모든 구체적이 특성을 추상화해서 공간적인 형태만을 고려한 실재적인 단위(body)이다.


왜 기하학은 일상생활에 유용할까?


기하학이 넓은 응용분야를 갖는 이유는 산술연산과 같은 이유이다. 즉 기하학적 개념은 우리 주의 세계에서부터 추상화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두 점을 지나야 직선이 될 수 있다는 공리를 알기 이전에도 수없이 직선을 그려왔다. 그러한 원칙을 몰라도 일상적인 경험 속에서 유사한 것들을 봐왔기 때문이다. 종이위에 그려진 두 점, 들판에 박혀있는 두개의 말뚝, 도로 사이에 있는 두개의 전봇대 등에도 이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사람들은 구의 체적이 이라는 사실을 몰라도 여러 종류의 구형의 물체를 가지고 일을 하고 있다. ( 는 그리스 글자로 ‘파이’라고 읽는다. 이 파이는 원의 지름과 원 둘레의 비율이다. R은 원의 반지름으로 원의 중심에서 가장자리 표면까지의 거리이다) 이 공식은 물방울에도 우주의 별에도 베어링 과 야구공에도 적용할 수 있는 공식이다.

 

요약하면 산술연산과 같이 기하학도 실천적 경험과 추상적인 생각간의 연속적인 상호 침투(interplay)를 통해 나온 것이다. 산술연산과 기하학은 모든 수학에서 역사적이고 개념적인 두 개의 근원(뿌리)이다.

 

3. 산술연산과 기하학의 상호관계 : 분수와 고차수학 


부엌 바닥 측정과 분수


김씨가 마루깔개를 깔기 위해 부엌의 면적을 측정한다고 하자. 김씨는 간단하게 발걸음으로 부엌 바닥의 길이가 얼마가 되는지를 잴 수 있다. ‘한발 두발 세발...‘ 방금 김씨는 산술연산과 기하학을 통일시켰다. 부엌바닥의 길이를 측정하기 위해 김씨는 적절한 길이 단위를 적용했고, 그것의 몇 배인지를 계산했다. 첫 번째 행동(응용)은 기하학을 적용한 것이고 두 번째 행동(계산)은 산술연산을 한 것이다. 김씨는 자신의 보폭으로 부엌 바닥의 길이를 계산하는데 이용했고 그리고 총 몇 걸음이나 되는지를 (수를 세면서) 계산했다.


김씨가 벽에 아주 가까이 와 벽까지 남은 거리가 자신의 보폭보다 작을 때는 어떻게 할까? 김씨는 보폭을 나누어서 훨씬 더 정교하게 부엌 바닥의 길이를 측정할 것이다. ‘부엌 바닥은 총 12걸음 반 정도군.’ 김씨는 보폭의 일부를 이용한 것이다. 이로써 김씨는 일반적인 숫자와 함께 분수까지 사용한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분수는 앞서 김씨와 같은 측정에서부터 유래되었다. 사람들은 (예를 들어 옷의) 길이를 측정하고 (들판의) 면적을 계산하고 (물의) 체적(2리터 물)을 측정을 한다. 이렇듯 기하학과 산술연산을 포함해서 무수하게 많은 계산을 해왔고 이 과정에서 분수를 발견한 것이다.- 그 과정은 김씨가 부엌 바닥의 길이를 측정할 때와 유사하다. 이렇게 인간의 실천적인 활동(노동)과 이전에 축적된 산술연산과 기하학의 지식을 종합하여 새로운 개념인 분수가 탄생한 것이다. 


풀어서 익힌 계란의 철학 : 연속과 불연속


또 하나 변증법적 범주 중에 수학에서 중요한 개념이 있다. 이것은 산술연산과 기하학의 상호 연관성을 살펴보는 것인데, 연속과 불연속에 관한 것이다.


 

다음의 재미있는 예를 통해 이 변증법적 범주를 살펴보자. 날달걀 3개를 2명이서 어떻게 하면 공정하게 나눌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달걀을 풀고 휘저어 익혀 나누면 된다.


불연속적인(분리된, 개별적인) 것을 더 이상 나눌 수 없다고 말할 때는 그것을 한번만 더 나누면 이전에 가지고 있던 특성이 사라질 때이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의 1/3이나 날달걀의 1/2를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만약 살아 있는 사람을 자른 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반면에 연속적인 것은 기본적인 특성을 잃지 않고 쉽게 나눌 수 있고 다시 합칠 수도 있다. 그래서 개별적인 날달걀은 나눌 수 없지만 풀어서 익힌 달걀은 쉽게 나눌 수 있다.


연속과 불연속의 통일(과 투쟁)


 

불연속과 연속은 항상 통일되어 있다. 이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1. 절대적으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은 없다. 물리학자들은 한때 전자(원자를 구성하고 있는 입자들 중 하나)가 가장 기본적인 입자라고 했고 더 작은 부분으로 나눌 수 없는 완전한 불연속적인 물질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전자를 구성하는 더 작은 입자들이 발견되고 있다.


2. 완전하게 연속적인 물질은 없다. 풀어서 익힌 달걀을 한 조각씩 잘라서 점점 더 작게 나누어 보자. 점차적으로 작아져서 달걀의 특성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어떤 작은 입자(예를 들어 분자)까지 도달 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실재로 모든 물질은 연속과 불연속적인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수학에서 불연속성을 추상적으로 반영한 것이 숫자이다. 이와 유사하게 연속성에 대한 추상적인 표현은 기하학적 도형(예를 들어 직선)들이다. 김씨가 부엌바닥을 측정한 과정은 수학에서 연속과 불연속의 통일 과정인 것이다. (연속적인) 길이는 (불연속적인) 단위(예를 들어  보폭)로 측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봤듯이 불연속적인 단위(보폭)도 나눌 수 있다. (그것은 불연속적인 단위가 연속적인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고차원 추상과 "현실과 동떨어진(Far Out)" 수학


지금까지 어떻게 인간이 일상 경험들을 추상화하고 일반화해서 산술연산과 기하학의 기본적인 개념에 도달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수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추상에서부터 다시 추상화하는" 훨씬 더 추상화하는 과정을 수행한다. 그들은 새로운 수학적인 개념을 직접적인 경험으로부터가 아니라 다른 수학적인 개념에서 발견한다.


이러한 개념 중에는 음수가 있다. 음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15도는 "영하 0도" 아래의 온도이다.(매우 춥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추상에서 추상화된 음수의 개념도] 실제 물리적인 측정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음수의 제곱근은 또 어떤가? 어떤 수의 제곱근이라는 것도 수의 한 종류이며, 그 뜻은 제곱근을 두 번 곱할 때 원래 수로 돌아오는 수를 말한다. 예를 들어 9의 제곱근은 3이고 3에다 자기 자신 3을 곱하면 다시 9가 된다. 그렇다면 -1의 제곱근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을 두 번 곱해서 -1이 되는 숫자일 것이다.


"상상의" 수(허수, imaginary number)는 새로운 진실을 밝혀낸다.


이 시점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싶다면, 지극히 정상적이다. 당시 수학자들도 같은 심정이었다. 수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놓아야 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1의 제곱근은 존재한다고 하고 "상상"해서 만들어 버렸다. 수학자들은 그것을 "i"라고 불렀고 i에 i를 곱하면 -1이 되었다. i에 기초해서 "상상의" 수(허수)의 집합을 만들었다. 이것은 현대 수학에서 아주 중요한 영역이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허수는 실재적인 어떤 것과 대응하지 않는 관념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 말이 맞다 허수는 확실하게 다른 수에 비해서 실재를 반영하지 않는다. 그것은 허수가 실재 물질과 직접적인 작용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추론을 통해-완전히 수학적인 개념에서부터 유도되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수는 순수하게 정신작용으로 만들어 졌지만 이후에 연구자들에 의해 교류 전기를 설명하고 유체의 운동을 설명하는데 중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허수는 다른 수와 같이 단순하고 직감적으로 실재를 반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확실하게 실재와 대응하고 있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허수는 우리가 바로 눈으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는 새로운 실재적인 면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추상화라는 정신 작용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해 더 깊은 통찰력을 제공해 주고 있다.


"상상의" 기하학


이와 같은 과정은 기하학에서도 발생한다. 고대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는 잘 알려진 기하학의 원리들을 많이 정립했다. 그의 원리 중에는 직선위에 있지 않은 한 점을 지나고 그 직선에 평행한 직선은 오직 하나만 있다는 것이 있다. 역사적으로 수학자들은 이 명제가 참인지를 "증명"하기 위해 매우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이 원리를 만족하는 한 직선을 그리기는 매우 쉽다. 그러나 ‘오직 한 직선만’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19세기 수학자 로바체프스키(Lobachevsky)는 그 한 점을 통과하고 원래 직선과 평행한 직선을 적어도 두개이상 그릴 수 있는 기하학을 "상상"했다. 이러한 기하학은 단지 한 직선만을 그릴 수 있다는 "상식"에 반하고 있다. 그래서 로바체프스키는 그것을 "상상의(imaginary)" 기하학이라 불렀다. 또 한명의 19세기 수학자 리만(Reimann)은 다차원 공간의 개념을 개발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3차원 공간 속에서 인식하기 때문에 다차원공간이란 명확하게 "상상의" 개념이다.


현대 물리학에서 새로운 기하학


이 상상의 기하학은 새로운 "비-유클리드"적인 공간 개념을 기초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것은 일반 상대성이론을 포함해서 아인슈타인의 여러 연구에 수학적인 틀을 제공해주었다. 이러한 기하학적 개념은 추론을 통해 나왔지만 실재 세계의 일부를 반영하고 있다. 물리학자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수학이론을 기초로 해서 현실 세계에 대해 올바른 예측을 하고 있다. 이들 이론은 사람들에게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변혁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그리고 물리학이 새로운 수학에 심오하게 영향을 받듯이 새로운 물리학은 더 고차원 수학을 통해 더 깊이 있게 발전을 거듭한다.


 


4. 결론 수학-변증법


수학은 물질세계에 대한 인간의 투쟁으로부터 나왔다. 물질세계는 변증법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수학이 변증법 개념의 풍부한 원천이라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동시에 변증법적 유물론의 일반 원칙을 더 많이 이해하면 할수록 수학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언젠가 변증법은 기본 교육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어린이들은 기하학적 모양을 인식하고 수를 세는 과정에서 변증법적 개념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변증법적 유물론은 진실이므로 유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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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과 유한: 도대체 왜 닭은 길을 건널 수 없는가?


닭 한마리가 있다. 자 이놈이 어떻게 길을 건너는지 생각해 보자. (“왜 우리가 닭의 고민까지 해야 합니까? 이건 닭의 문제이지 우리 문제가 아닙니다.” 라고 묻지 말기를..) 닭은 도로를 완전히 건너기 전에 도로의 절반을 지나가야 한다. 지금 도로 중간에 도착했다. 이제 절반만 건너면 된다. 나머지 절반을 건너기 전에 닭은 도로의 절반의 절반, 혹은 종착지에서 4분의1 지점에 도착할 것이다. 이제 남은 거리는 전체 도로 폭의 4분의 1만 남았다. 남아 있는 4분의 1을 지나기 전에 또 그 절반의 위치, 종착지에서 8분의 1지점에 도달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계속(무한히) 반복된다. 불쌍한 닭은 도로의 반대편에 결국 도착하지 못할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닭은 쉽게 도로를 지나간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서 무엇이 틀렸을까? 우리가 여기서 헛갈리는 것은 유한과 무한사이의 모순관계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닭을 따라가 보자.


 

수학적으로 이 닭이 도로를 건너는 과정을 살펴보자. 먼저 도로의 절반, 그 다음에 4분의 1 그리고 그다음에 8분의 1씩 계속 지나갔다. 이것은 무한히 널어선 숫자들로 나타난다. 즉 1/2 + 1/4 + 1/8 + 1/16.... ('...'의 의미는 이 수열이 같은 형태로 계속된다는 의미이다. 이해하기 쉽게 닭이 같은 속도로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동한 거리는 시간에 비례한다. 절반을 건너가는데 필요한 시간을 1/2시간이라고 하면 또 그 절반을 건너는 데는 1/4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므로 총 시간은 1/2 + 1/4 + 1/8 + 1/16 ...가 된다.) 이것이 무한수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숫자를 무한히 더하면 얼마가 될까?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아무리 작은 숫자라도 무한히 더하면 결국 어마어마하게 큰 숫자(무한대)가 되지 않을까? 우리가 닭의 예에서 헛갈리는 이유는 바로 이렇게 (비변증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1/2 + 1/4 + 1/8 + 1/16...의 합이 무한대라고 하면 닭은 아무리 걸어도 영원히 도로를 건널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닭의 운명은 도로를 건너기 전에 자동차에 치거나 뜨거운 태양 때문에 탈수현상으로 쓰러져 죽거나 사람들에 잡혀 통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수학자들은 무한수열 1/2 + 1/4 + 1/8 + 1/16....의 합이 무한대가 아니고 1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일렬로 무한히 널어선 숫자들(무한수열)을 무한히 더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값이 유한한 값 1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닭은  무사히 도로 반대편 도착할 것이다.


무한과 유한은 수학에서 그리고 모든 물질적인 실재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고 분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살아있는 것들은 유한하다. 그들은 태어나서 자라고 나이 들어 죽는다. 죽은 후에 땅에 묻혀 썩어간다. 그러면 다시 박테리아의 일부가 되고 점차적으로 다른 식물과 동물의 일부가 된다. 이렇게 죽어버린 유한은 죽지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유한이 되고 이 과정을 계속해서 무한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무한한 유한성을 가지고 있다. 이 닭 이야기는 유한과 무한 사이의 근본적인 모순의 한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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