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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락페스티발

http://www.mplug.co.kr/pop/zoomin_view.php?code=2382

 

 가장 가고픈 페스티발은 코첼라,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역시 서머소닉이다.(펜타포트 등 국내는 뺀다면 말이다) 락페스티발은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바로 음악가와 관객의 거리에 관한 문제 말이다.

 

 거리에 관한 두가지 측면(한가지는 물리적인 거리이고, 한가지는 심리적인 거리이다)중에서 물리적인 거리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는 것 같다.

 

① 옛날 : 사람 - 악기(연주) - 청중

② 근/현대 : 사람 - 악기(연주) - 레코딩 - 유통(음반) - 재생(오디오-스피커)

③ 최근 : 사람 - 악기(연주) 또는 기계(입력) - 레코딩 - 유통(인터넷) - 재생(PC, MP3P 등)

 

근/현대로 발전하면서, 음악이 '상품'이 되었고, 최근에는 유통채널의 혁신적인 변화를 통해 Handheld device를 통해서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음악의 상업화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온 셈인데, 그렇다면 도대체 왜 락페스티발이 존재하는 것인가. 간단하다. 소리가 좋기 때문이다. 그러면 반대의 질문이 나온다. 연주를 직접 듣는 것이 최고라면, 왜, 우리는 mp3따위의 조악한 음질의 음악이 왜 확산되었는지, 더이상 음악가들이 LP나 CD를 발매하지 않고 디지털 음반을 발매하는 시점까지 오게 되었는가 말이다. (물론, 최근의 음악들은 만들어질때부터 전자적인 방법으로 디지털화되어 있으며, 그러한 음악의 경우 디지털로 유통하는 것이 최적일 수 있다.) 심리적인 거리의 경우, 보통은 가사와 창법 같은 것으로 전달되는데, 현장에서는 육성뿐 아니라 몸짓, 눈빛 등 다양한 채널을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어쨌든 락페스티발에서는 음악과 관련된 input의 양와 질이 더 우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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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가 알아야할 모든 것이 들어있는 것 같다.

지드님의 [수련자_태산압정] 에 관련된 글.

 

강홍구님 글펌

겪어보니 사진이라는 매체 역시 다른 시각 매체와 마찬가지로 핵심적인 것은 시선의 문제였다. 그 시선이란 시력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 즉 세계에 대한 해석과 통찰력의 문제였다. ● 인간의 시각은 가장 복잡하고 발달이 느린 감각 기관이다. 예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이어린 음악천재, 수학 천재, 시적 천재는 있어도 나이 어린 미술 천재는 없다. 있더라도 그럴 듯한 의미 있는 작품을 생산하려면 적어도 스물 중반은 넘어야 한다. 심지어 영화도 마찬가지다. 시각적인 것을 다루니까. ● 시각적 정보들을 다른 시각, 다른 관점에서 보고 해석하는 일은 새로운 개념과 통찰력을 필요로 한다. 통찰은 순식간에 온다. 그걸 영감이라 불러도 좋다. 그렇게 온 순간을 놓치지 않고 깊이 있게 하는 힘은 개념 혹은 사고의 힘이다. 창조성 혹은 독창적인 어떤 것은 거기서부터 일 것이다.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순간의 영감은 그냥 지나가고 만다. 요는 붙잡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늘 훈련하고 있다가 타석에 들어선 타자처럼 방망이를 휘둘러 공의 중심을 맞혀야 한다. 땅! 하고 맞아 뻗어가는 공은 잘 맞으면 홈런이 되기도 하고 운 좋으면 텍사스 히트가 될 것이다....

 

- 강홍구님 글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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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emical brothers, coming soon

케미컬 브라더스가 펜타포트에 온다! 이번 펜타포트 라인업 중에 가장 기대되는 밴드이다. 언제나 초절정 엑스타시를 선사하는 그들은 쵝오. 미셸 공드리가 만든 뮤비도 쵝오.

 

곡 Star Guitar 밴드 The chemical brothers 영상 Michael Gond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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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자_태산압정

강홍구, 수련자_태산압정

 

최근에 내가 좋아하는 작품 중에 강홍구 작가의 수련자 시리즈가 있다. (그중에 태산압정*)과 벽호공, 그리고 적엽비상을 좋아한다.) 강홍구 작가의 작품들을 찾아보면서 드로잉에서 디지털아트로의 진화가 작가의 영역을 확대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수련자는 돈키호테와 거의 유사한 역할을 담당하며, 예술가와 활동가 사이의 어느 지점을 수련자로 승화한 느낌이다.

 

참고 : http://neolook.net/mm06/061102f.htm

 

*) 태산압정(泰山壓頂)

위에서 아래로 똑바로 내려치는 검법 초식의 한가지. 태산을 눌러 찌그러뜨린다는 이름과 달리 3류 무사도 시전할 수 있는 하류 무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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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http://wallflower.egloos.com/1578608 를 읽다가 떠오른 기억

 

 3년전인가. 프랑스를 방문한 차에, 현지의 몇가지 와인을 접할 기회가 생겼다. 내 취향에 맞는 와인을 딱 하나만 골라와야겠다고 마음먹고, 용의주도하고 면밀하게 혓바닥을 낼름거린 결과, 떫은 맛(탄닌?)이 너무 강하지 않게 부담없이 마실 수 있는, 현지에서도 비교적 대중적이고 적당히 알려진 것이며, 가격도 적당한 와인을 발견하였다. 바로, 쌩떼밀리옹(Saint-emilion)이다. 물론 이것은 그냥 프랑스의 지명이름이지만, 그 후로 지금까지 내가 마시는 와인은 70%가 쌩떼밀리옹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와인이었다.(최근에는 저렴한 가격때문에 칠레산을 마신다) 물론, 선물할때도 무조건 쌩떼밀리옹이다. 그것밖에 아는게 없다.

 

 혼자 마시거나, 선물하는 경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개인용도가 아닌 경우에 가격대가 높은 와인을 사야하는 경우는 정말 혼란스럽다. 최근에 공식적으로(?) 와인을 사서 전달해야하는 경우가 생겼다. 내가 받은 가이드는 '단가 10만원 이내' 뿐이었다. 아무 정보도 없이 와인샵에 들렀다가 미로속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모든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도대체 주인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맛을 볼 수도 없었고, 맛을 본다한들 이 맛의 우수성(?)을 판단할 기준이 내겐 없었다. (맛을 설명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래서 머리를 짜낸다는게, 주는 사람도 알고, 받는 사람도 아는 유명한 와인을 사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정말 유명한 와인인지 아닌지를 내가 판단할 수 없었으므로, 주인의 입을 믿는 수밖에 없었고,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주는 사람도 모르고 받는 사람도 모르는 와인이었다.(그렇게 믿고 있다)

 

 내가 산 와인은 뽀이약(Pauillac) 지방에서 나온  Pontet-Canet 99년산이었다. 그걸 11만원이나 주고 샀다. 주인이 포장을 하면서 가게의 명함을 넣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선물받은 사람이 전화해서 가격을 물어보곤 한단다. 그래서, 혹시 전화와서 물어보면 두배로 얘기해달라고 단속해두었다. 뭔지도 모르고 받고, 뭔지도 모르고 주고, 그사이에 거품만 커져가는 한심한 현상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가장 어이없던 사건은 히딩크대통령이 전쟁뒤에 마시고싶은 술로 샤또 딸보를 얘기했다고 해서 그 술이 한동안 유행했던 적도 있다고 한다.) 한참 후에 우연히 그 와인의 가격을 검색해본 일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8~9만원정도면 시중에서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최종 유통단계의 마진이 2~3만원 정도 된다는 말인데, 그 바로 전단계(수입, 마케팅비용)의 비용과 마진도 그와 비슷하다고 보고, 제한다면 아마 실제 가격은 4~5만원쯤 한다고 보면 맞을 것 같다. 한국에 들어오면서 가격이 두배가 되는 것이다. 이 사회가 제정신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어쩌다가 한번이라도 마시게 되니 좀 알아야겠다 싶어서 검색하다 보니, 빈티지 차트라는게 돌아다녀서, 유심히 보았다. 이런 식의 표준화가 가능한건지 이해가 잘 안가지만, 이걸 보니 복잡해 보이기만 하던 와인의 가격체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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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1(메모)

 



1) 책 읽기 전에 미리 계획을 세운다.
- 서문을 꼼꼼하게 읽어서 책의 주제, 주제를 다루는 방법, 서술의 순서를 파악해두고, 바쁠 때에는 서문의 내용이라도 노트에 정리하라. 저자, 제목, 출판사, 출판년도와 같은 서지정보와 함께.
- 목차를 보고 책읽기의 세부계획을 세운다.
- 꼼꼼하게 노트할 챕터와 대강 읽을 챕터를 구별한다.
- 이런 계획들을 목차에 써두는 것이 중요하다.

2) 요약정리하는 순서
- 한 챕터를 읽는다.
- 읽으면서 핵심적인 내용을 담은 문단에 체크한다.
- 중요한 개념들도 체크한다.
- 핵심 내용을 담은 문단을 노트에 정리하는 것과 개념을 정리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 직접 인용, 풀어서 재정리하는 것을 구분하여 노트에 정리한다.
- 노트정리한 것을 읽어보면서 자신의 생각을 여백에 적는다.
- 참조할 책들도 적어두면 좋다.
- 더 해야할 일 등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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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2

보풀님의 [저도 의문이랄까 뭐랄까..] 에 관련된 글.

  근본적으로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판단은 인간에게 주어진 숙제일텐데, 개인이 서 있는 어떤 지점에서, 그 지점의 환경이 개인의 가치관과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진보에 대한 개인의 의지의 영역이 교육에 의한 것이든, 환경에 의한 것이든, 완벽한 주체가 되기위한 노력이든, 확대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겠죠. 87년이 의미를 갖는 것은 '현재'의 바탕을 이루는 큰 판(체제)을 이루기 때문인 것 같고요, 개인의 현재 '지점'에서 선택할 수 있는 한계점를 보여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현재의 큰 판은 대략 '87년 체제 + 97년 체제'라고 보입니다. 87년은 '민주화', 97년은 '경제체제(신자유주의)'라고 대강 보는 것 같고요, 대다수의 경제문제가 97년 이후 현재에 이르러 심화되고 있습니다. ('부자되세요'라는 천박한 말이 10년만에 인사가 될 줄이야.)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가 '뭘 먹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된 시대가 되었고, 제경우에는 완전한 주체가 되는 것은 수도사가 되는 일만큼 어렵게 느껴집니다. 말씀하신대로, 여전히 남은 질문들은 '현재'가 되겠네요.똑바로 살라는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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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FO

<패닉 UFO>

 

 



 처음 죽음을 접한 것은 고1때 친구의 죽음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친구가 사라져버렸는데, 처음엔 신기하기도 하고 뭐가 뭔지 하나도 몰랐었는데, 장례식에 그의 여자친구의 슬픈 모습을 보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그때부터 죽는 것에 대해 실감했던 것 같다. 당사자는 이미 없는데, 남은 사람들은 모두 괴로워했다. 친구의 꿈은 수능 잘보기와 파일럿, 여자친구와 행복한 시간 가지기 같은 것들이었는데, 어느 순간 모든게 사라져버렸다. 세상에 남긴 흔적이라곤, 그의 가족과 친지, 여자친구와 몇몇 친구들의 희미한 기억뿐이다. 왜 태어났는지, 왜 살아가는지, 왜 죽는지, 죽고나면 어떻게 되는지, 질문만 남겼다. 어디서 왔는지, 또는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답을 알아낸다면, 그 반대는 수월할 것이다.둘중 하나만 꼽아본다면,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간결한 답은 부모님의 사랑이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것은 나라는 존재가 유일하고 필연적인 것인가이다. 내가 된 정자가 아니라 내 뒤에 따라오던 정자가 나보다 앞섰다면, 난 지금 이자리에서 지금과 같은 얼굴과 모습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마 반쪽의 나와 다른 반쪽의 누군가의 결합이 이 세상 어디엔가는 빈대붙고 있을 것이다. 세상이 아주 조금은 달라졌겠지만, 바뀌지 않는 것도 있다. 아버지가 나를 낳고 아버지의 아버지가 아버지를 낳고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아버지의 아버지를 낳고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를 낳고, 그렇다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아버지들의 아버지는 또 누가 낳았을까? 누가 만들었을까? 희망적이게도 선조들은 몇가지 답을 준비해주었다. 오래도록 알려진 답은 '신'과 '사후세계'이다. 이건 제일 간편한 답이지만, 말하기만 좋을뿐 이성적으로는 납득이 안간다. 두번째는 라엘리안과 같은 기괴한 종교이다. 먼 과거에 외계인들이 원시인류를 아프리카 어딘가에 던져놓고 관찰하고 있다는 기괴한 종교이다. 세번째는 진화론, 천체물리학 같은 과학의 답이다. 이성적이긴 한데,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다. 뭐가 옳다고 할 수도 없고, 틀리다고 할 수도 없고 그냥 믿는게 믿는거다. 세가지 옵션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첫번째 옵션만은 과감히 버리겠다. 치사한 종교지도자들이 설계해놓은 사후세계에 가고싶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고르라면 세번째가 좋다. 무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불교에서는 열반이라고 하나?), 그냥 사라지는 것이 좋다.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은 머릿속에 심어놓은 도청장치에 다름아니다.(맑스가 인민의 아편이라고 칭했듯이)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내 친구와 오늘 변을 당한 얼굴 모르는 동료와 우리의 모든 조상은 도대체 어디로 간걸까? 아마 대다수는 머리에 남은 사회제도와 윤리의 찌꺼기 때문에 삶이 고통이었을 것이고, 삶을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먼 꿈을 바라보면서 사라져 갔다. 그들의 고통이 열반으로써 해소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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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

http://armarius.net/bbs/view.php?id=www_bbs&page=1&sn1=
&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
desc=asc&no=3952&PHPSESSID=db4b6eb3b17c2d3d37043db41778b067

 

 

# 87년의 성과와 실수는 무엇인가? 87년 투쟁의 성격이 무엇이고, 어떤 점이 90년대에 영향을 미쳤는가?

 

# 좌파(또는 정치적 성향)를 규정하는 것이 사회적 지위와 조건인가? 교육인가? 심성/유전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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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공부와 서양의 공부가 따로있나?

김규항님의 블로그중 '공부의 내력' 포스트를 보다가 전반적인 문맥과 함의에는 동의하나, 동양의 공부를 비하(!)하는 대목에서는 '정말 그런가'하는 의문이 든다. 그가 올린 대목은 아래와 같다.

 

 

동양의 전통적인 공부법은 ‘무작정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었다. 동양의 공부란 사람이 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지식과 깨우침이 담겼다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몇 권의 고전을 거듭 공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양의 공부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라면 동양의 공부는 지적 통찰을 체득하는 정신 수련이었다. 사방이 책으로 빼곡한 서양 학자의 서재와는 달리 동양의 학자 공부방에는 몇 권의 책만 있었다.

 

 

김규항님이 동양의 공부를 어떤 시기, 어떤 범위로 규정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전체 문맥으로 볼때, 근대화(박정희 이후)로 규정한다면, 대략 뜻이 맞지만, 굳이 동양의 전통적인 공부법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우며, '동양의 방법은 틀렸다'로 귀결될 여지가 다분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천자문과 사서삼경이 단순히 한자를 '외우는' 공부가 아니라 동양의 신화, 역사, 과학, 철학을 아우르는 내용을 담고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문제는 동양의 공부가 아니라 속성 근대화에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동양의 학자의 공부방에 책이 몇 권 있었는지 난 잘 모르겠으나 그들이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궁금하긴 하다. 또한, 불과 100년전의 선조들이 써놓은 글도 못읽는 행태가 한심하기도 하고, 어떤 생각으로 살았는지 궁금하기도 하여 선조들의 '입문서'인 천자문을 보름전부터 읽고 있는데, 그게 그냥 '하늘천 따지 검을 현 누루 황'이 아니라, '天地玄黃하고, 宇宙洪荒이라'하여 하늘(天)과 땅(地)과 공간(宇)과 시간(宙)의 특성을 한문장에 요약한 엄청난 문장이다. 초급 입문서의 첫문장이 이러한데, 단지 이해의 기회가 없었을뿐, 이러한 '비하'라면 섭한 분들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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