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어떤 사랑’

‘어떤 사랑’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소재로 한 연극

-소극장 공연,, 갈등구조를 통해서 들여다보는 인간문제

세상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다. 현실이라 해서 알기 쉬운 것도 아니요, 가상현실이라 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같은 현실을 두고도, 권력자와 언론종사자들이 계획적으로 담합을 하여 왜곡된 정보를 발신하면 대중은 꼼짝없이 속게 된다. 그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왜곡된 상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혜안 있는 작가에 의해서 어떤 문제를 예술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전달받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진실에 접근하도록 도와주는 지름길이 된다.

1986년에 일어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참혹한 '체르노빌원전사고'만 하더라도 한편의 연극 '어떤 사랑'은 그 어떤 뉴스속보 보다도 더 큰 울림과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 피폭자 가족과 담당 의사와 주변인들이 겪는 갈등구조와 인간문제를 통해서 우리는 원전사고에 대한 진실에 보다 가깝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원전문제 심각하다. 우리나라만 해도 원자력 발전소를 설치하려는 당국에서는 원전이 아무런 위험이 없는 유용한 에너지임을 강조한다. 이뿐만 아니라 지역발전을 위한 예산과 제도적인 뒷받침으로 인한 혜택만 차고 넘치게 해주겠다는 장밋빛 약속에 열을 올린다. 우리나라는 1978년 고리 1호기의 상업운전이 시작된 이래로, 총 23기를 가동하여 세계 5위의 원전국가가 됐다. 그런데 원자력은, 단순히 전기를 가져다주는 고마운 자원으로만 인식하기에는 마(魔)의 얼굴을 가진, 너무나 끔찍한 재앙(災殃) 에너지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원자력이 재앙에너지라는 것은, 체르노빌 원전사고와 일본 후꾸시마 원전사고를 통해서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축소 왜곡하거나 많은 것을 비밀에 부친 채 원전에너지로 산업기반시설을 가동시키려고만 하는 원전마피아가 득세하는 나라는, 수천만명의 인파가 모여있는 장소를 향해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를 질주시키고 있는 것처럼 위험한 게임을 하고 있는 거다. 이들은 당장의 편리함에만 매몰되어 탈 원전에 대한 고민이나 에너지 해결책을 강구하려 하지 않는다.

최근의 예를 보면, 민주주의가 발달하여 국민의 권리가 신장된 나라일수록 개선의 여지를 보이며 탈 원전을 향해서 가고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처럼 권위주주의 체재가 강한 나라에서는 원전반대의 목소리가 씨알도 먹히지 않고 있다. 원전문제야 말로 각종 이권과 부정부패로 얼룩진 그들만의 성역이라서 그렇다. 우리나라가 원전문제에 있어서 얼마나 심각하고도 무지한 국가라는 것은, '원전마피아'들의 전횡으로 인한 부정부패와 잦은 사고와 함께 그런 문제점들을 계속해서 축소, 은폐하고 있는 점이다.

그럼 체르노빌원전사고를 소재로 한 ‘어떤 사랑’이라는 연극을 통해서 원전문제를 들여다 보자. '어떤 사랑'은 이번이 세 번째 앙코르 무대인데 극단 ‘경험과 상상’ 팀이 대학로 <혜화>예술극장에서 류성 씨 연출로 이정아, 김효진, 이승구, 조옥현, 정윤희, 박종욱, 김민중, 유정숙, 김지영, 조석준, 홍정연 등 13인의 출연진이 5일 간 공연한다.

이 극의 시공간적인 배경은 체르노빌 사고가 일어난 2년 후인 1988년 모스크바 인근의 병원이다. 크게 세 군상(群像)이 등장한다. 1집단은 피폭자와 그 가족, 제2집단은 병원으로 대표되는 당국, 3집단은 피폭자를 경원시 하는 제 3자들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극의 첫 부분에서 병원장은 환자문제로 고민하는 의사 안젤리나에게 피폭으로 인한 병증을 축소왜곡하고 사무적인 관점에서 일을 처리하도록 부추긴다. 피폭자들의 피해현상이 힘없는 현장 종사원들의 노력만으로 해결되길 기대하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고로 병원장이나 의사가 불가항력적인 대재앙 앞에서, "병원을 떠나지 않고, 환자들 곁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할 지경이다.

두 번째, 체르노빌 피폭자 가족의 비극이다. 루드밀라는 방사능 피해자이자 원전사고를 수습하다가 중상을 입게 된 소방관의 아내다. 남편은 부상정도가 너무나 심해서 타인이 접근하면 방사능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괴물같은 존재이지만, 남편의 '손을 잡아주고, 키쓰해주고, 위로해줄 사람은' 오직 자신 뿐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여 마지막까지 남편의 곁을 지키며 인간 최고의 휴머니티를 발휘한다. 이런 루드밀라의 과거를 알지도 못한 채, 또 알고난 후에도 루드밀라에게 관심을 갖는 세르게이에게 주변 사람들이 나서서 체르노빌 출신의 피폭자인 그녀를 멀리하라고 충고를 한다. 하지만 아프카니스탄 주둔장교였던 세르게이는 다리 부상을 입고 상이군인으로 지내는 자기 처지를 통해서 '사람을 조건과 이해타산으로만 선택하지 않는다.'

모스크바의 유명한 불꽃놀이 축제 날, 둘은 첫 데이트를 하고 루드밀라의 제안으로 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그런데 루드밀라에게서는 특이한 점이 있다. 관계 외에는 키스나 애무 등 일절의 다른 애정표현을 허락하지 않는 모습이다. 이런 루드밀라에게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만남을 이어가는 가운데 세르게이는 어느 날 그녀가 임신한 것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이때부터 루드밀라는 소식을 끊고 그의 곁을 떠나 종적을 감춰버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세르게이는 루드밀라의 소식을 찾아 헤매는 가운데 피폭자들의 병원을 찾는다. 의사가 환자의 비밀에 대해서 선뜻 말해줄리 없지만, 세르게이는 담당의에게 “루드밀라는 임신한 상태이고, 그 아이의 아빠가 자신인 이상, 아이를 위해서라도 루드밀라에 대한 최소한의 것에 대해서 알 권리가 있지 않겠는가?”고 반문한다.

세르게이는 담당의 안젤리나의 도움으로 루드밀라의 과거에 대해서 알게 된다. 루드밀라는 방사능을 보유한 사람이고, 이 때문에 장기(臟器)가 굳은 아이를 낳았었다는 사실과 남편과 늘 함께라는 상상을 하면서 아직도 루드밀라 자신이 임신할 수 있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루드밀라에게서는, 생명을 존중하고, 아이를 낳아서 기르고 싶은, 보편타당한 모정을 갈구하는 희망이 살아 있었다. 아니 그 꿈을 멈추지 않고 추구하고 있었다.

한편, 또 다른 피폭자 가족인 빅토르와 그의 아내 이야기다. 국가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빅토르지만 그의 가족을 경원시 하는 이웃에게 빅토르의 아내는 “이러면 안 되잖느냐?”면서 호소한다.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화사한 봄철에는 남편에게 꽃을 보여주고 싶어서 꽃다발을 한 아름 사들었으나, 그를 피하는 이웃을 만나면서 상처만 입는다. 하는 수 없이 병원으로 가보지만 피폭으로 인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남편은 거의 실성한 상태에서 절규의 단말마를 토해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얼마 후 빅토르는 군복을 갖춰 입고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사람들은 수근 거린다. 빅토르의 아내는 남편의 장래 식에도 오지 않고 연금을 수령해서 두 아이들과 떠났다고.

장면은 바뀌어, 모스크바 불꽃놀이 광장이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운 루드밀라가 세르게이와 만나고 있다. “아이가 태어났어요. 안아 보세요.”하고 루드밀라는 유모차에서 아이를 안아 올려 세르게이한테 건네준다. 두 사람으로 인해 탄생한 생명이다. 아이는 잠시 아버지의 품에 안긴 채 아이는 짧은 조우를 한다. 루드밀라는 세르게이로부터 아이를 건네받아 다시 유모차에 앉히며 분연히 작별을 고한다.

루드밀라는 자신이 온전한 사람이길 원했다. 생명을 잉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아이를 양육하며 아이와 더불어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이길 원했다. 이러한 권리가 타자로부터 가해지는 폭력과 재앙에 의해서 짓밟히길 원치 않으며 그 어떤 권리에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러시아가 배경이다 보니 오래 전에 봤던 영화 ‘닥터 지바고’의 이별 장면이 겹친다. 지바고가 가족과의 생이별을 하는 장면, 전차 안에서 차창 너머로 라라를 발견하고서 급히 내려 라라를 부르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지는 장면을 보았을 때처럼 가슴 짠하고도 슬픈 감정이 일어난다.

모스크바 광장에서의 세르게이와 루드밀라의 이별 장면에서도 비슷한 안타까움을 느끼며 또 하나의 이별과 슬픔의 데자뷔를 본다. “아이의 아빠로서 책임을 져야한다.”면서 루드밀라를 찾아 헤매던 세르게이의 비장한 절규가 눈에 선하다. 이와 맞물려서 아이가 기형아든, 병력을 갖고 태어나든 상관 없이 혼자 감당하고 싶어 하는 루드밀라의 의지를 보면서 비장미마저 느낀다. 이런 루드밀라가 안타깝고 야속하지만 세르게이는 짧은 조우를 끝내고 떠나는 모자에게 축복을 빌어줄 수밖에 없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그 어떤 꽃이 있으랴!”고 한 어느 시인의 말처럼 세상은 희비극을 번갈아가며 떠안고 있다. 동전의 양면처럼. 두 얼굴의 사나이처럼, 선과 악, 음과 양, 하늘과 땅처럼 이쪽의 끝에는 반드시 저쪽이 있다. 맞서고 대립하지 않는 것들이 도대체 없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어느 한 쪽이 없으면 혼자서 성립할 수 없다. 인간이 살면서 보고 느끼고 껴안고 수용해야 할 모순과 숙명은 그 얼마인가.

아무리 다가가 껴안고 보듬고 치유하며 화해해야만 해결의 실마리가 플리고 긍정적인 세상이 열린다지만, 인간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하는 재앙만은 경계하고 막았으면 한다. 인간의 폭력성과 욕심으로 저지르는 인재와 재앙만은 기필고 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5/07/13 21:02 2015/07/13 21:02
트랙백 주소 : https://blog.jinbo.net/8434pjr/trackback/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