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

SKY채널 S&C에서 팝아티스트인 앤디 워홀에 대해서 봤다. 그는 체코 출신의 미국 미술가로서 출력물 제작자, 그리고 영화 제작자였다. 시각주의 예술 운동의 선구자로 팝 아트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앤디는 이민자 가족의 세째 아들로 펜실베니아주의 피츠버그에서 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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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육체 노동자로서 가정에 대단히 충실한 사람이었다. 일벌레라 할 정도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열심히 했던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성실하게 돌보는 신앙심 깊은 여성이었다. 손재주도 뛰어나고 글씨를 단정하게 잘 써서 여러가지 물건을 만들어 아는 집을 다니면서 이를 팔아 가게에 보탰는데 앤디 워홀은 어머니의 그런 재주를 물려받았나 보다.

신앙은 그들 가족을 성실한 사람으로 이끌어주는 훌륭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일요일이면 매주 10키로를 걸어서 교회에 다녔디고 하니까. 앤디 워홀이 특이한 것은 무도병이라는 병을 앓았는데 이는 근육이 춤추는 듯이 움직이는 병이라고 한다. 이때문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어머니 곁에서 돌봄을 받으며 지내는 시간이 대부분이어서 두 형들에 비해 내성적이었다고 한다. 형들처럼 건강해서 밖에 나가 축구나 야구를 하며 놀 처지가 못되니 자연 그런 평을 받았을 것 같다. 그대신 관찰자가 되어 사물과 현상에 대해서 인간의 변화하는 모습들을 관찰하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정규직을 얻게 되자 교회 가까운 곳으로 집을 사서 이사한 후에도 밖으로 나가기 보다는 정적인 생활에서 유일한 낙은 영화를 보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며 간접경험의 세계에 빠지기도 했다. 앤디는 영화에서 본 셜리 템플의 펜이었고, 펜 레터를 보내어 답장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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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의 그림솜씨를 비범하게 본 부모는 용돈을 넉넉하게 마련하여 앤디를 학교에 보내고, 앤디는 카네기 멜론대학에 진학한다. 카네기 멜론대는 공산품 디자인을 하는 디자인과였다. 앤디는 졸업작품에서 최초의 스캔들을 일으킨다. ' 코파기는 내 마음이다'라는 작품으로 퇴학위기를 맞았다. 졸업작품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에 대해서 교수들로부터 거북감을 샀던 게다. 그래도 1943년 무사히 졸업한다.

그런 다음 21살에 최초로 모친과 떨어져 불안하지만 뉴욕으로 가서 삽화가로 취직하여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앤디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갑자기 돌연사를 한다. 공사현장에서 오염수에 중독된 것이 원인인 것 같다.


"보이는 것의 겉모습이 나의 내면이다." 할 정도로 작품에 대해서는 설명이니 뭐니 보다 보이는대로 느끼라고 말한다. 그는 어릴 적 주로 지병으로 인해 주로 집안에 틀어박혀 활동을 자제하는 생활을 보냈지만 반대급부로 영화광인 덕분에 영화에서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이런 영향으로 셜리템플, 마릴린 먼로,엘비스 프레슬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말론 브란드 등의 유명 배우와 가수를 소재로 작픔을 제작하고, 작품은 유명세를 타며 전 세계로 알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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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용품으로는 콜라병 작품과 캠벨 스프 캔이 유명하다. 워홀은 자신에 대해 물었을 때, "나를 알고 싶다면 작품의 표면만 봐 주세요.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라며 철저하게 '예술가의 내면'을 없애고 표면적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유명한 것에 애정을 숨기지 않고, 스타와 정치인이나 사고, 패션 제품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으며, 그것이 유명하고 또 내 자신도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또한 그 자신이 미국의 유명인이 되고 나서도 걸음을 흩트리지 않고, 유명인들을 모티브로 작품을 연출하고 제작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40대에 총 세발을 맞는다. 그 중 한발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가서 여러 장기에 구멍이 나 5시간 이상을 수술한 끝에 죽었다고 기사가 날 정도였으나 가까스로 회복하였다. 그러나 70년대 80년대는 사교계로부터 의뢰를 받아 초상화 실크스크린 제작 프린트를 다수 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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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라이프지에 의해서 비틀즈와 함께 1960년대 가장 영향력이 있던 인물로 선정된다. 그의 어머니가 피츠버그에서 사망하면서 전 세계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1982년대~1986년 사이에는 재해와 신화를 모티므로 작품을 창조한다.

1987년 2월 21일 뉴욕 코넬의료센터에서 담낭 수술을 받은 다음 날인 페니실린 알레르기 반응으로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58세 때 일이다. 평생 독신이었다. 그의 시신은 피츠버그의 성 세례 요한 성당의 가톨릭 공동묘지에 묻혔다. 피츠버그 시내에서 아르게이니 강 건너 편 언덕에 노스 쇼어 지역에 앤디 워홀 미술관이 있다. 개인 예술과 전문미술관으로 미국 최대이다.

앞서 말한대로 작품에 비해서 그의 내면을 엿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생활을 드러내놓지 않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아무도 모르게 노숙자들을 돌보는 봉사도 했으며 성당을 지날 때는 차를 멈추고 들어가서 기도를 하고 나왔다고 한다.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개인사에 대해서는 노출시키지 않고 오직 보이는 작품만 봐달라고 한 앤디 워홀이었다.

유년시절은 병으로 얼룩진 기간이었기에 또래들로부터 따돌림 받을 만큼 숫기도 없었지만 나중에는 성격이 바뀌었지만 사생활의 비밀스런 점 그대로였고, 항상 가면속에 진실을 감춘 채 관찰자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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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4 19:57 2017/11/04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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