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탄생지...하의도가 선물하는 비보(裨補)사상 메시지
<현장 르포-②>‘개척자 김대중’의 값진 자산
하의도는 어떤 곳일까. 기다림 반 설렘 반으로 새벽을 가르며 어둠 속에 섰다. 여객선 터미널로 가기 위해서였다. 선구상이 즐비한 해안로 249번지에 있는 마리나베이호텔을 뒤로 하고 하의도를 향해서 출발하는 시간이었다. 5시 반에 일어나서 행장을 차린 사람은 모두 세 명, 하의도 길을 안내해줄 문화기획가 문철권 씨와 서양화가이자 칠보예술가인 박베로니카 씨다.
섬으로 들어갈 쾌속선은 7시10분에 물살을 가를 것이다. 편도 요금이 2만4천원인데 도서민들의 배 삯은 5천원이라고 했다. 하의도를 일생에 몇 번 찾을까 말까한 여행객과 지역민과의 차이는 배 삯부터 달랐다. 일반 철부선이 좌석 없이 우리네 온돌방 같은 형태로 돼 있다면 쾌속선은 좌석 제였다. 여차하면 꺼내서 착용할 수 있도록 좌석 밑에는 개인 별 구명조끼가 비치돼 있었다. 우리 일행은 창문 쪽에 일렬로 앉았다. 선창 너머로 하얗게 얼굴을 내미는 포말을 대하는 재미를 즐길 수 있으리란 기대감에서였다.
그러나 30분도 채 되기 전에 차렷 자세로 앉아 있는 것에 싫증이 난 탓에 모두들 선실 밖으로 나갔다. 바람을 쏘이고 싶어서다. 창 너머로 바라보는 흐릿한 풍광은 직접 바라다보는 수평선만 못했다. 그랬다. 넘실거리는 파도의 하얀 이(齒)를 육안으로 대하고나서야 모두 가슴을 활짝 펴며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변화를 주면 이리도 좋은 것을!” 숨을 크게 쉬며 갯바람 냄새를 맡다가 다시 선실로 들어왔다.
이번엔 촘촘하게 배열된 좌석을 비켜 통로 쪽에 자릴 잡고 앉았다. 간격이 비좁은 객실 의자에 차렷 자세로 앉아 있을 때보다 훨씬 넓고 편했다. 1시간 10분 만에 하의도에 당도했다. 쾌속선 덕분에 운행시간이 반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선실에서 나오자 맨 처음 마주친 것은 하의도 주민들이었다. 뭍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며 서있던 그들의 눈망울에서는 척 봐도 자부심이 묻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대통령을 배출한 고장이라는, 결이 다를지는 몰라도 하의도를 찾는 우리들의 심정도 그들의 자부심에 못지않을 거다. 대통령 ‘김대중’을 중심에 놓고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기리려 대통령을 나은 고장을 찾은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선착장을 빠져나오자 단단하게 생긴 조형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진남색이 주조를 이뤘지만 빨강색 기둥이 포인트를 주며 떠받치고 있는 여객터미널이었다. 외지인들 중에서는 잠깐이지만 의식을 치르듯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사람이 있다. 처음 와보는 곳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려는 본능에서이리라. 본 기자도 그랬다. 넘실대는 해면을 한눈에 넣을 듯이 눈 운동에 여념이 없었으니까. 7.8월에는 김대중 평화센터에서 단체로 찾는 방문객들로 붐빈다지만, 우린 겨울로 들어서는 초입에 불현 듯 찾은 특별한 경우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뭐 상관없다. 누가 뭐래도 우린 하의도 땅을 밟고 있으니까.
도착시간은 8시 조금 너머였다. “아침밥을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 문 선생이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뒤돌아보면 매표소와 바다만 보이는, 생판 낯선 섬마을에 발을 디딘 기분을 조금 더 유지하고 싶은 심리에서다. 앞으로 나아가자니 아는 곳이 없고, 뒤를 돌아보니 바다뿐이었기 때문에 잠시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은 이심전심이었다. 기자는 그 틈을 이용하여 선착장 건물 옥상에 올라 바다 풍경 과 터미널 건물을 행해 셔터를 눌렀다.
얼마 있어 “저기 하나로마트가 있다.”면서 베로니카 씨가 앞장서며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캔 커피와 빵 세 개와 ‘초콜릿이 덩어리째’라고 쓰여 있는 비스켓과 맛동산 한 봉지를 샀다. 괜히 그냥 사봤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일 게다. 세끼 식사 외에는 간식이나 군것질을 하는 체질이 아닌 사람들뿐이니까. 실제 문 선생의 경우 신안군 자라도가 고향이라서 “목포에 왔으면 생선매운탕을 먹어야죠.” “하의도에 왔으면 낙지연포탕을 먹어야 제격이지요.”하며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생선요리를 대접하려 애를 쓰는 편이었지, 길에 서서 인스턴트커피나 과자를 쉽게 받아먹는 체질이 아니었다.
문 선생이 콜택시를 불렀다. 일행은 콜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하의중고등학교를 구경했다. 학생 수가 그리 많지 않은, 건물만 댕그랗게 남은 교사였다. 인구가 늘지 않은 탓일 거다. 문 선생이 부르는 소리에 택시에 올랐다. 드디어 하의도 투어가 시작될 모양이다.
먼저 생가 터인 후광리로 차를 몰았다. 그 시간 방문객은 우리가 유일했다. 그래도 생가 지킴이는 일찍 나와 마당을 쓸고 있었다. 반겨주는 모습이 여간 살갑지 않아서 기분 좋은 출발이 시작된 셈이다. 마당에서부터 대통령님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도록 연대별로 사진이 구성돼 있었다. 출입구 왼편에 있는 우물을 잠시 들여다 본 후 초가 지붕으로 눈을 돌렸다. 우리 일행은 중앙 우측 칸으로 들어가서 향을 피우고 절을 했다. 벽면에는 막중한 책임과 함께 영광의 시절이기도 했던 대통령 재임시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세파에 홀로 맞서며 독학으로 쌓아온 알짜 실력과 장례를 넓고 크게 내다보는 혜안으로 국가와 민족에게 ‘평화의 비전’을 제시한 관록이 묻어났다.
생가를 돌아보고 나자 급한 불을 끄고 난 사람처럼 약간의 여유를 가지고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집을 둘러싸고 있는 지형을 살피기 위해 발길을 생가 왼쪽으로 돌아 언덕을 올랐다. 풍수지리가를 흉내 내서 생가 뒤편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죽(竹)은 배산이요. 넘실대는 잔물결과 함께 앞마당 너머에 조성돼 있는 염전을 임수로 보아 이야말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에 자릴 잡았다는 퍼즐 맞추기식 답을 뇌여 봤다.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을 집필한 김택근 씨는 대통령의 생가를 다녀온 소감을 “간척지 위에서 태어난대 다가 간척지 지명인 후광을 아호로 삼았으니, 그 삶이 바다를 메워서 길을 내듯 험했다”고 말한다. 이어 생가 주변의 평범함과 한가로움을 약간 비틀어 "대통령께서는 혼자만의 힘으로, 혼신의 노력으로 오늘에 이른 것 같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보는 관점과 표현 방법에 따라서 차이도 많고 반면교사로 삼아 자기 인생에 적용하는 방식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기자의 관점도 여기서 출발한다. 한 가지 더 우리나라의 풍수지리 사상은 운명론적 관점에서 ‘한 번 정해지면 빼도 박도 못한다.’는 식으로 굴레를 씌우는 학설이 아니다. 팔자소관이나 숙명론에 치여 어쩌지도 못하는 사상이 아니다. 비보(裨補)사상! 이야말로 부족한 것은 메꾸고 채워 삶을 개선하고 발전시켜 승리로 나아가도록 견인하는 생활철학사상이다. 비보사상이란 문자 그대로 ‘도와서 모자라는 것을 채운다.’는 뜻이다.
개인이든 지역사회든 국가사회든 허(虛)한 것은 채우고, 과한 것은 덜어내며 부족한 것은 노력과 실천을 통해서 개선하는 삶의 형태다. 섬마을에서 갯벌을 막아 농토를 만들고 소금밭을 일구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요즘 적폐청산이 한창이다. 국가적으로도 썩은 곳은 도려내고 쌓인 적폐는 청산하는 격이다. 비보사상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자기 앞의 생(生)’을 개척하여 반전시킨 실천의 대가이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무료의무교육을 시킨다. 어린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겠기에 독립적인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위해서다. 그런데 우리네 교육이 지금 자주자립에 기초한 참다운 교육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한들, 해방 이후 지금까지 “교육,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항변한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것이 우리 교육의 현주소다.
인생을 올바르게 살아낸 사람을 표상으로 삼고, 개인과 사회,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도 개척자의 삶을 산 사람을 제대로 찾아서 본받을 수 있는 교육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우리는 제대로 된 참교육이 부족하고 우러러 닮고 싶은 진실한 표상이 절실하다. 속담에 ‘큰 부자는 하늘이 내고, 작은 부자는 동에가 낸다.’는 말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야말로 이 두 가지 사실에 부합하는 삶을 살았다 할만하다.
검증해보자. 대통령의 생가 터는 그리 넓지 않았다. 김대중 생가에서 바라본 정면 내지 좌우 면은 바다라서 간척지와 염전을 일군 길목 언덕 아래에 질박하게 자리를 잡은 모양새다. 선생의 가족은 경작지도 염전도 그 어떤 땅뙈기 없는 형편이었다. 대통령의 모친은 그야말로 반찬솜씨와 노동력을 밑천 삼아 밥집을 경영하여 자식들을 건사한 억척스런 여인네였다. 당시 화염으로나마 소금을 만들러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며 대통령의 모친은 밥집을 경영한 1인 창직자(創職者)자가 되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의 모친은 목포 이주를 단행한다. 하의도의 섬 소년이 후광리 좁은 바닥에서 탈출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길을 향한 첫걸음은 모친의 도움으로 결정되었던 셈이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은 모친의 결단에 경의를 표하며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하지만 모친의 목포이주 결정 이후 김대중은 홀로 뼈를 깎는 노력과 도전으로 정치기로서 일가를 이룬다. 끊임없는 노력과 담금질로 선박회사 사장과 신문사 사장에 이어 국회의원이 된다. 이어 제 15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고, 세계적으로는 아시아 최초로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된다.
더할 것도 없는 인생이었다. 자신의 노력으로 동네부자도 되고 하늘이 낸다는 세상이 알아주는 부자, 나아가서는 세계가 알아주는 부자도 된 셈이다. 김대중이 발신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노력하고 개척하라. 그리하여 자기 실력으로 선구적인 비전을 제시하라!
*글쓴이/박정례 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