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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만의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 만남 후기

 

'40년 만에 처음 만나는데 간단한 선물을 하나 해야지.'

약간 일찍 나가 백화점에서 와이셔쓰 하나를 샀다.

아는 곳이 없어서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날 때 한 번 가본 종각 근처 한식집에서 보자고 했더랬다.

가서 메뉴를 보니 가격이 장난이 아니었다.

일년에 두어번 보는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날 때면 언제나 나는 돈 내는 것에서는 '열외'여서 가격을 몰랐는데 보통 비싼 곳이 아니었다.

그래도 어쩌랴! 비싸다고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할 수도 없고.

기다리니 선생님이 오셨다. 나보다 4년 선배들이 초등학교 동기동창 인터넷카페를 열고 있는데 그곳에서 선생님 최근 사진을 본 터였다.

그러나 나이가 드셔서 그런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는 신체가 작아 보이셨다.

반갑게 인사를 드리고 식사와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40년 전으로 날아갔다.

김창주, 공정석, 공정렬, 송하빈, 신건호, 이남섭, 김용현, 김용태, 박주순, 박일수, 박근웅, 박익순 등 친구들 근황을 서로 묻고 대답했다.

이용환, 김형택, 오갑효 선생님, 그리고 이경하 당시 교장선생님 근황을 물었고, 우리 동네 출신 박상록 선생님 근황은 내가 알려드렸다. 이용환선생님과 이경하 선생님은 돌아가셨단다.

그리고 우리 동네 몇년 선배들 중에 몇사람 이야기도 했고, 우리 동네 어른들 이야기도 했다. 누가 어떤 높은 자리에 올랐고, 누구는 고대 총학생회장까지 했는데 60이 넘었고 아직 결혼을 못했고 등등.

우리 동네 사정을 너무 잘 아셔서 어찌 그리 잘 아시냐 했더니 그 때는 가정방문이 많아서 대충 안다고 하셨다. 우리 동네는 집성촌인 상봉(우리집이 있는 곳), 집성촌이 아닌 중봉 하봉으로 나뉘어 있는데 중봉 하봉에 무슨 성씨 집이 대강 몇채 있는 것까지 아셨다.

그리고 내 바로 윗형은 알고 있었고 내 둘째형도 알고 계셨는데 내 형인지는 몰랐다고 하셨다. 내가 사실을 알려드렸더니 '그러냐'고 하시면서 둘째형과 자신이 군 교육청에 계실 때 에피소드도 얘기해 주셨다. 내용인즉슨 둘째형이 농협 출납계에서 일을 했는데 교육청으로 돈 보낼 일이 있었는데 돈을 너무 많이 보내 선생님이 도로 돌려보내줬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젊은 사람들 미팅하듯이 서로에 대해 캐물었다.

사실 나도 선생님이 어떻게 우리 학교에 오시게 되었으며, 가족은 어떠며, 이후 어떤 학교에서 일을 하셨으며 등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선생님 또한 나에 관한 것을 거의 모르니 그럴밖에.

선생님은 풍양초등학교에 4년 근무를 하셨단다. 그 후 교육청 근무를 몇 년 하셨고,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경기도로 전근을 와서 양평 어디에선가 교장으로 퇴임을 하셨단다. 아들만 넷인데 큰 아들이 나보다 4살 아래였다.

풍양초등학교에서 담임을 네 번 하셨기 때문에 선생님은 1학년 제자, 6학년 제자 등으로 분류해서 기억을 하시고 계셨다. 내가 1학년 때 자신이 담임이셨다는 것을 금방 이야기하실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연유였다.

1학년 제자 중에서 선생님을 찾은 사람은 내가 처음이란다. 어떻게 찾을 생각을 했냐고 고마워 하셨다.

난 풍양초등학교를 졸업을 못하고 서울로 와 나이가 들어 시골을 갈 때마다 면에 있는 초등학교를 들르고 학교를 들를 때마다 언제 김병선 선생님을 찾아 뵈야지 생각을 했는데 선생님은 40년 만에 자신을 찾아온 제자를 무척 고마워하셨고 신기해 하셨다. 사실 자신도 앞서 이야기한 우리 몇년 선배들과 만난 자리에 우리 동네 제자(내 조카뻘)를 보고선 내 소식을 물어봤다고 하셨다.

우리 학교는 내가 44횐가 되니 꽤 일찍 학교가 세워졌네요 했더니 일제시대 때 생겼고 다른 면에 비해 조금 늦었다고 하셨다.

내 얘기도 했다. 시민운동 하냐고 해서 아니라고 했다. 약간 걱정스러워 하셨다. 자기 조카도 대우자동차 노조에서 해고도 되고 노조운동을 했다(지금은 복직해서 회사를 '잘' 다닌다 하셨다.)고 하시면서.

시간이 좀 지나서 내가 나이든 어른들을 만나면 대개 물어보는 주제를 슬며시 꺼내 보았다. 해방공간 때 이야기.

해방공간 때 중학생이셨단다. 무척 고생을 많이 하셨단다. 친척 중에 경찰이 한 명 있었고, 선생님 집은 부자는 아니었는데 인근 4개 부락 중 유일한 기와집이어서 '지방폭도'(선생님 표현 그대로)의 표적이 되었단다. 그래서 밤이면 언제나 산으로 가셨단다. 밤에 활동하는 '지방폭도'를 피해서. 그리고 기와집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단다. 암튼 나로서는 약간 실망이었다. 선생님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조건이나 상황탓이었겠지만 그래도 '지방폭도' 편이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고. 한편으로는 황석영의 '손님'에서와 같은 화해나 해원 등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 해서 우익의 극악한 폭력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이후에도 우익의 폭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겠지만,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폭력과 동일시하는 대중들의 의식이나 이데올로기를 그냥 모른 채 한다면 그것은 운동에 보탬이 안될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런 해원이나 화해가 어떻게 가능할지는 막막할밖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좀 더 하고 다음에 동창들을 모아 한 번 찾아뵙겠노라고 헤어졌다.

선생님은 물론 '그러지 말라', '제자들 부담주기 싫다'고 하셨다.

40년만에 다시 만난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과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렇게 1막을 내렸다.

버릇없기로 치면 두번째 가려면 서운해 할 난, 이 때도 결례를 범했는데 선생님과 식사하면서 술을 몇 잔 기울였는데 너무 반가운 나머지 선생님의 연령과 지위를 생각지 못하고, 술 마실 때 얼굴을 옆으로 약간 돌리는 '센스'를 발휘하지 못했으니... 선생님께서 약간 언짢아 하지 않으셨을까?! 그래서 다음날 메일로 안부를 물었는데 안쓰시는 메일인지 되돌아 와 전화를 다시 드리는 '센스'를 발휘하였지만, 이미 범한 결례가 커버가 되지 못할 것은 정한 이치. 다음부턴 이런 것도 좀 신경을 써야겠다고 다짐한다.

아 참 이번 만남을 계기로 어찌어찌 해도 또 한 놈의 동창과 연결이 되었다. 적당한 시간에 한 번 만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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