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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험가

신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실패 이후, 정세

 

 

1930년대 대불황 이후 최대의 위기를 경험하고 나서 오늘날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사조인 신자유주의에 문제가 많다는 것이 어느 정도 확인되었다

 

        (여기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겠지만 이번 위기가 신자유주의 '때문에' 발생했는가, 아니면 신자유주의(적 개혁)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위기가 하도 깊어서) 발생했는가를 따져보는 것도 흥미 있는 주제로 보인다. 난 운동진영의 통념과는 달리, 신자유주의에도 '불구하고' 위기가 발생했다는 입장에 가깝지만, 신자유주의의의 어떤 측면 '때문에' 위기가 더욱 심각해졌다고 보고 있기도 하다. 이런 입장은 문제가 되는 신자유주의의 어떤 측면을 땜질하고 심지어는 케인즈주의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것이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구조적인 문제(이윤율의 장기추세의 하락과 자본생산성의 하락)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위기 양상은 때마다 달리 나타나겠지만 위기 자체는 자주 반복될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위기가 반드시 파국적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고, 최소한 노인병적 양상을 띨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입장이라면 "신자유주의에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문제가 많다는 것이 확인되었다"고 하는 게 정확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 신자유주의를 신봉해 신자유주의를 집행했던 정치세력들 또는 현재 이를 집행하고 있는 정치세력들 중의 일부가 동요하면서 자신의 행적을 반성한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반성의 형태는 다양하다. 일부 땜질을 하여 완화된 혹은 변형된 신자유주의를 지속하는 세력도 있고, 신자유주의와는 약간 거리가 있어 보이는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 등의 슬로건을 제출하고 있는 세력들도 있다.

 

        (사실 오늘날 운동세력 중의 일부인사들도 일찍 개종을 했을 뿐이지 신자유주의 정책에 동조적인 인사들이 꽤 있었다. 예를 들면 유력한 인사들이 국민주 방식의 민영화를 찬성하기도 했고, 운동세력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일부 단체의 경우, 노동자 민중의 아래로부터의 힘을 이용한 재벌개혁이나 재벌통제가 아니라 주주자본주의를 통한 재벌개혁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런데 유능한 운동세력이라면 이들 정치세력 중 그 진정성을 사줄만한 정치세력들 또는 오히려 이들 정치세력들을 지지하는 민중들을 진보진영으로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이들의 과거 행적에 대해 정확히 비판하고 그 문제점이나 한계를 정확히 지적함과 동시에 이들의 자기반성을 전제로 공동활동을 모색함으로써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이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들의 반성은 전혀 고려치 않고 과거 행적을 지속적으로 물고 늘어지면서 이들과는 절대로 같이할 수 없다는 태도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런 태도라면 우리 편을 거의 키울 수 없지 않을까?

 

한편 이 실패한 신자유주의자들, 혹은 이들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진보진영으로 쉽게 넘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할 듯싶다. 우리들(사회주의/공산주의와 모종의 관계를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진보진영)의 실패도 신자유주의 못지않기 때문이다.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자. 이번 위기에서 사실 가장 심각한 마이너스 성장을 한 나라들은 위기의 진원지인 미국도,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그리스, 아일랜드도 아니고, 구 소련에서 독립한 발트 3국(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과 우크라이나이다. 공히 2009년 경제성장률이 -15% 내외이다. 다른 서유럽 국가들의 경제성장률이 평균 -5% 내외인 것에 비해서. 서유럽 자본들이 들어와 거품을 일으켜 놓고선 문제가 생길 듯하니까 전부 떠나버려서 경제가 붕괴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들 나라에서는 이렇다 할 시위가 거의 없었다. 라트비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소규모 시위가 있었을 뿐 지금 서유럽에서 보이는 대규모 파업이나 시위는 없었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하나는 이들 나라 국민들이 여전히 유순해서 정부에 대들고 따지는 게 약하다(구 사회주의 나라 국민들의 일반적인 속성)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추측에 가까운 이야기이지만, 이들은 더 심각한 위기를 이전에 경험했기 때문에 이 정도의 위기가 그렇게 큰 위기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구 소련 붕괴과정에서 우크라이나의 경우 2009년 정도의 마이너스 성장을 약 3-4년간 연속해서 경험을 했다. 다른 구 소련권 국가들도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장기간의 심각한 위기는 체제가 붕괴하면서 경험한 것이지만 어쨌든 구 소련권 인민들에겐 사회주의와 결부된 위기였던 것이고, 자본주의에서의 이번 위기는 이것에 비하면 차라리 약과였던 것이다.

 

이런 사회주의의 실패 문제는 우리 운동진영에서는 여전히 충분히 따져지지 않았고, 당연히 그럴법한 대안도 마련되지 않았다. 물론 일부에서 이런 작업이 진행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아직 대중적으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이다.

 

요는 신자유주의의 실패 이전에 사회주의의 실패가 있었고 이에 대한 비판적 극복작업이 대중적으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실패를 지적한다고 해서 민중들이 진보진영으로 쉽게 넘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각종 복지국가 담론의 창궐이나 사민주의 혹은 개량주의의 부흥은 당연한 수순으로 인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쇄신된 사회주의 입장에서 이들 담론 자체와 실천양식에 대해 비판할 지점이 많이 있고, 이들이 그리는 사회를 우리의 최종적인 지향으로 전혀 삼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사조는 당분간 불가항력적인 흐름이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보아야 이런 흐름에 좀 느긋해질 수 있을 것 같고, 현재로서는 이들과의 공동활동(당연히 필요한 비판이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과정에서, 대중적으로는 실패한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쇄신하고, 쇄신된 사회주의의 문제의식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킬 계기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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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프라임 사태 8

아래에서 이야기한 프레디 맥과 패니 매, 그리고 리만 브라더스 주가는 어제 미국 전체 주가가 약간 올랐는데도 계속 폭락하고 있다.

 

또 주시해야 할 회사가 GM과 포드자동차인데 이들 회사도

고유가 직격탄을 맞아 주가가 많이 하락하고 있다.

 

이번 금융위기와 고유가가 1-2년 지속되면 이들 회사도 살아남기 어렵지 않을까?

 

미국자본주의가 세계 헤게모니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미국자본주의의 핵심이었던

이들 회사는 2000년대 내내 별로 좋지 않았는데

이번 위기 국면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이와 함께 이번 국면에서 미국헤게모니도 결정적인 약화의 길을 걷지 않을까?

 

그런데 이런 약화가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그나마 다행일텐데

다른 분란을 야기하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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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 발전시키기

이번 촛불시위의 원인에는 두 가지가 겹쳐 있어 보인다.

광우병 소고기의 위험(내용)과 국가주권(검역주권) 포기 혹은 인민주권 무시(내용이자 형식).

시위 초기 (여)중고생의 대거 참여는 전자와 더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광우병 위험은 매우 낮다는 것이 대체로 알려졌다. 광우병 위험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자들 사이의 토론에서든 정부정책 수용자들 사이의 토론에서든.

확률이 낮다고 해서 문제가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든 문제의 심각성 자체는 줄어든 게 사실이다. 

 

그러면 시위규모는 왜 커졌는가?

 

이명박의 계속적인 실언 실책이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명박이 시행하기로 한 다른 정책에 대한 반대도 역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런 실책 혹은 나쁜 정책으로 인해 인간 이명박 자체를 국민들이 싫어하게 된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시위는 광우병 소고기 반대 운동의 성격으로 각인되어 있다.

시위참여자에게나 반대자에게나. 정부의 추가협상에 대한 부산한 움직임 등이 주로 보도가 되면서 이런 규정성은 강화되고 있다.

 

대책회의가 이명박 정부가 시행할 다른 정책에 대한 비판을 추가해서 시위를 해도 이런 성격이 쉬 바뀌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광우병 위험이 현저히 낮다는 것은 시위를 지속적으로 키워가는데 문제가 된다.

 

주권 포기나 주권무시도 중요하지만 이는 형식에 가깝다. 물고 늘어질 내용이 빈약해 진 게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기존에 존재하는 제반 문제들, 자본주의나 자본주의 위기극복수단으로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서 초래된 문제들을 시급히 시위의 쟁점으로 등장시키지 못한다면,

그래서 새롭게 등장한 촛불시위대들이 이 문제를 받아안아 운동을 계속하지 않는다면 이 운동은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시간은 걸리겠지만 소멸될 것이라 생각한다. 날이 갈수록 더해질  반대자들의 공세도 한 몫 할 것이다.

 

그래서 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민중운동들이 이제껏 싸워왔던 문제들(비정규직 문제, 구조조정 문제, 공기업 민영화 문제, 한미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한 농민-농촌 붕괴, 노점상 탄압 문제, 이주노동 단속문제 등) 을 등장시켜야 한다. 대책위가 하듯 슬로건을 거는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광우병 소고기 문제만큼 중요하다. 그리고 이는 동일한 뿌리(자본의 탐욕스러운 이윤활동 혹은 신자유주의)에서 연원하고 있다.

 

결국 소심하게 우리의 요구를 감출 필요가 없다. 그리고 광우병 소고기와 연계해서만 꼭 싸울 필요는 없다. 소고기 운송을 하지 않겠다는 운송하역노조같은 조건을 가진 운동단위는 많지 않다. 그럴 경우 우리의 문제 혹은 악화될 우리의 문제를 들고 그냥 싸워야 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이명박의 광우병 소고기 수입정책과 다른 정책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제대로 이야기하면 새롭게 운동에 뛰어든 사람들도 다 이해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의 문제를 이야기하려는 이런 태도를 '계몽적 태도'니 뭐니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물론 주의할 점은 광우병 소고기 싸움에 기존의 노동자 민중운동의 쟁점을 대립시켜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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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몽?

 

간만에 약간의  여유를 찾은 김에...

이번 시위는 시위대가 매우 적극적이고 활동적이고 창조적이다.

이런 역량으로 생활 노동현장 곳곳을 바꿔냈으면 좋겠다.

 

어떻게? 다음과 같이!

 

우선 노동현장:

 

적절한 노동시간,

적정한 임금,

안전한 작업장,

너무 단조로운 작업 재편성-컨베이어 벨트를 바꿔내야겠지! 그리고  연구자, 기술자, 기능직 사이의 간극도 좁혀졌으면 좋겠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서로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고 실제로 수행하면 좋겠지.

비정규직은 당연히 철폐되어야 하고!

경영진의 고임금은 적절하게 하향 조정하고... 이윤은 공동관리하고 배당은 당분간 최소화, 나중엔 소멸시키기?

중요한 결정은 작업자 참여하에!

 

 

농업-농민:

 

자연과 조화로운 농업, 안전한 농산물 생산, 적절한 보상

도시민들이 좀 이주해 적절한 인구규모, 고른 연령대의 인구구성을 가진 농촌이 되면 좋겠지.

전통문화 현대적으로 복원되면 좋겠지. 

 

학교:

 

봉건적 잔재 없애고, 학생들이 자신의 지적 문화적 육체적 잠재능력을 최대한 발양할 수 있는 교육이 이루어졌으면... 

 

병원:

 

환자를 위한 병원. 의사 간호사 환자 사이에 이야기를 많이 하고 불필요한 위계가 철폐되어야겠지.

글고 좋은 환경에 공간도 넓었으면 좋겠지.

 

자연:

물 공기는 깨끗해 져야겠지.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을까!

 

소비생활:

 

청빈!

화석연료 고갈이나 지구온난화 문제를 고려한다면, 그리고 가난한 (반)주변부 민중들이 건강하고 쾌적한 생활이 가능할려면 세계 다른 지역의 소비수준은 지금보다 낮아져야 할 것 같다. 너무 많은 노동이나 자연자원이 들어가는 고급소비재는 생산이 중단되어야겠지. 에너지체제도 변환되어야겠지.

 

군대와 감옥도 없어져야 겠지. 당연히 전쟁도. 무기산업도.

 

한반도는 통일이 되어야 하고 동아시아 인민들 사이의 교류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어야겠지. 시베리아 횡단열차도 당연히 탈 수 있어야겠지.

 

모든 사람들이 독서와 여행, 다른 문화적 생활을 즐길 수 있어야겠지.

 

그외에도 많이...

 

한국에서 시작해서 이런 운동이 전세계로 확산했으면... 아니 세계 다른 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운동이 서로 도움을 주고 받고 했으면...

 

 

이런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단 이명박은 물러나야겠지. 생활현장 노동현장 곳곳에 생산 소비 조합이 만들어지고 민주주의가 실천이 되어야겠지. 물론 회의로 날이 새고지고 하면 안될 것이고 약간씩 돌아가면서 참여를 해도 되도록 체계를 잡아야겠지.

 

이런 운동의 세계적 확산은 당연히 부시나 미국의 무기상, 그리고고 각국의 거대자본이나 여전히 존재하는 왕족들(중동), 특권층을 그들의 지위나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겠지.

 

 

 

 

네 나이가 몇살인데, 그리고 너의 소시알 포지션(?)에 이따구 낙서나 하고 있냐 하면 뭐라지?

글고 운동에 별 기여도 없이 김칫국부터 마신다 하면?

 

"한 낮의 꿈은 아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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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의 불행 예감

현정세에서 이명박은 뚜렷한 반전의 계기나 카드가 거의 없어 보인다.

6월 4일 지자체 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승리하면 일정한 계기가 될지도.

구체적인 판세를 잘 모르지만서도 설마 그렇게까지 될까?

 

뭐니뭐니 해도 경제가 살아난다는 신호가 있어야 하는데('경제살리기'가 최대 유일 공약이었다),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 유가-물가, 환율불안, 경상수지 적자(예상보다는 낫긴 하다), 내수부진 등등.

 

반면 그는 자신이 걸어야 할, 공기업 민영화, 대운하 등 지뢰밭들을 이미 많이 매설해 놓았다.

 

이명박은 확실히 불운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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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화 의미 변천사

까지는 아니고...

민영화가 요즈음 일반시민들 사이에서 왜 이렇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짧게.

사실 운동진영에서의 민영화반대 주장은 그리 호응이 크지 않았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10여년 전만해도 운동진영의 모 연구소나 모모한 인사들마저 민영화반대가 아니라

국민주 방식의 민영화를 지지했을 정도이니까.

국민들의 공기업에 대한 인식이 안좋고, 또한 그럴 이유도 좀 있는 것이고 하니

국민주 방식의 민영화를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요즈음엔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민영화가 악의 화신쯤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사회운동이 잘 되어서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 지형이 급변한 것인가?

 

내 추측으로는 시민들이 민영화의 부정적인 측면을 절절히 경험했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대표적으로 민자도로가 아닐까? 대부분 자동차를 소유하고 민자도로 경험을 해보거나 소식을 들어보지 않았을까?

민간자본이 도로를 운영하면 엄청 비싸지는구나.... 민영화는 안돼!!

또 다른 경험들도 물론 있겠지!

 

민영화반대 운동은 그만큼 하기 수월해 졌다.

 

그런데 현재의 공기업이나 공공부문을 고수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사회화에 한참 미달한다는 것은 불문가지.

현재의 공공부문뿐만 아니라 사적 부분에서도, 진정한 의미의 사회화를 이룩해야 할 터.

공공부문 노동자들과 다른 노동자들이 같이 합세하여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투쟁을 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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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조 위원장 토르나씨,

부위원장 소부르씨가 결국 강제출국당했단다.

토르나씨는 한국에서 19년이나 살았다는데...

정권이나 이를 집행한 놈들의 망나니짓에 대해선 더 말하고 싶지 않다.

제2의 고향이나 다를바 없는 한국에서 이런 대접을 받고 떠난 두 분의 심정이 어떨지,

같이 활동하고 어울리던 동지들과 제대로 작별인사도 못나누고 떠나는 마음이 얼마나 쓰릴지,

미안하단 말도 못하겠다.

부디 다시 만날 기회가 있길... 한국에서 활동한 이주노동자들 네트워크 구성이 좀 잘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들과 같이 있었던 이주노동자들, 한국의 활동가들도 힘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만).

 

나쁜 놈들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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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시장 폭등의 정치경제학

참세상 칼럼으로 실린 글입니다.  참세상 블로그이지만 글을 모아놓는다는 차원에서 다시 옮겨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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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시가 폭등하고 있다. 올들어 무려 37%가 올랐고, 멀게는 아이엠에프 위기가 한창이던 시절 종합주가지수가 279선까지 떨어졌다가 이제 2000선을 넘보고 있으니 그 때에 비하면 거의 7배로 올랐고, 보다 가깝게는 2003년 500선을 기준으로 하면 거의 4배가 올랐다. 물론 그 사이 99년 2000년의 코스닥 시장에서 엄청난 거품이 만들어졌다가 꺼지기도 하였다.

사실 주식시장의 폭등은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중국, 태국, 터어키, 브라질, 러시아 등 ‘신흥시장’에서도 동일한 양상을 보이고 있고, 미국 증시도 상승률은 덜하지만 대형우량주 30개 종목 지수인 다우지수가 최고치를 연일 경신하고 있다. 가히 세계적인 현상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아 보인다.

 



 

이런 증시폭등은 한국에선 대선을 앞 둔 시점에서 정치쟁점의 하나가 되고 있기까지 하다.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이 실패했다는 비판에 대해 노무현과 그 지지자들은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이 왜 실패했느냐, 증시가 이렇게 좋은데 실패는 무슨 실패냐는 등의 항변을 하고 있다. 증시폭등을 ‘참여정부’ 비판에 대한 반비판 재료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증시폭등이 ‘좋은 경제상황’의 지표나 되는 것처럼.

이 같은 주가상승이 이후에도 지속될까? 이에 대해서는 ‘주가는 신도 모른다’, ‘주가의 향방을 점치는 것은 술 취한 사람의 다음 발자욱이 어디로 내디딜 것인가를 맞추는 것과 같다’는 속설을 소개하고 싶다. 이후 주가가 얼마만큼 오를 것인가, 언제 내릴 것인가에 대해서도 유사한 답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관심사는 아닐 것이다.

주가가 너무 높게 오르고 있다고 때때로 경고를 하는 대가들의 ‘주가거품론’도 그 정확한 시점을 짚어내지 못하기는 매 한가지다. 미국에서 90년대 후반 주가가 지속적으로 오르고 있었는데 로버트 쉴러라는 교수는 97년에 다우지수가 7000선이었을 때 미국증시를 “비이성적인 과열”이라 경고를 해 유명해졌는데 다우지수는 그 뒤에도 한참 오르다가 2000년 1,1700 선에 가서야 하강하기 시작하였고, ‘경제대통령’이라는 별칭이 붙었던 미 연방준비제도위원회 의장(한국은행 총재 격)이었던 앨런 그린스펀의 경우는 주식시장의 거품을 이야기하다 주가가 계속 오르니까 ‘신경제론’에 지지를 보내 주가상승을 정당화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주가가 진짜 폭락을 하기도 하였다. 즉 주가가 거품인지 아닌지는 거품이 꺼진 뒤에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자 민중들의 삶은 고용도 불안하고 임금도 잘 오르지 않아 이렇게 팍팍한데(이랜드-뉴코아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을 보라) 주가는 왜 오르고 있을까? 거칠게나마 몇 가지를 얘기해 보자.

우선, 주식가격이 장래 배당가능성과 무관하지 않다면 그리고 이 배당가능성이 현재의 이윤 및 이후 이윤증가율과 무관하지 않다면 주가상승은 기업이윤이 증대하고 있거나 혹은 증대 가능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증대했거나 증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이야기다. 신자유주의의 심화로 인해 노동조건이 열악해졌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바다. 특별히 2004년 이후 한국 노동자들의 생산성 증가에 비해 임금인상률은 매우 낮아졌다. 그리고 한미자유무역협정 등으로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가 증대할 것이라는 것 또한 우리 모두가 아는 바다. 주가가 안 오르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즉 주가상승은 노동자 민중들의 삶이 팍팍한 이유 그 자체에 한 원인이 있는 것이다. 또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 한국기업들의 이익은 한국노동자들의 착취에만 있지 않다. 이주노동자, 베트남, 동남아시아, 결정적으로 중국노동자들의 착취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이야기이지만 미국계 세계적 기업의 주가상승에는 한국 노동자들의 착취증대도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노무현정권 옹호자들이 주식시장 활황을 ‘참여정부’ 경제정책 성공의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정확히 그들의 계급적 본질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하겠다. 물론 미국의 5-60년대처럼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기업이익 둘 다 개선되던 시기가 예외적으로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노동조건의 악화 위에 기업이윤이 개선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가 문제인 것이다.

둘째로, 주가상승은 이자율과도 관계가 있다. 이자율이 높으면 주가가 낮아지고 이자율이 낮아지면 주가가 높아진다는 게 일반적인 이야기다. 이자율 하락에는 아이엠에프 위기 이후 원화가치 하락으로 인한 지속적인 상품무역 수지 흑자에서 비롯된 경상수지(상품수지, 서비스수지, 소득수지를 모두 더한 것) 흑자의 누적으로 인한 통화증발(달러가 많아지면 그것이 원화로 바뀌어 시중에 풀린다) 효과, 미국의 경상수지의 적자의 확대(세계 각국이 달러를 많이 보유하게 되고 이것이 세계적으로 각국 화폐를 증가시킨다), 일본의 초저금리 지속, 신도시 건설 및 행정수도 이전 등으로 인한 토지보상비의 격증 등 여러 원인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투자부진도 이자율 하락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90년대 중반 과잉축적이 발생한 상황에서 신규투자가 쉽게 증대하지 않고 있기도 하고, ‘주주가치극대화’가 경영의 주요원리가 되면서 자사주 매입, 배당률 증대 등으로 투자가 부진하기도 해 저 이자율이 지속되고 있다. 이유야 어떻든 투자부진은 노동자의 고용성장을 더디게 하고 임금을 억제하게 한다. 현재의 주가상승이 노동자 민중에게 달갑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주가상승이 노동자 민중들의 희생에 기초한 것이라는 위와 같은 사정과는 무관하게,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로 비아냥을 받아온 노무현은 이 주가상승을 자신의 정책의 성공으로 등치시키려 애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지 주가가 단기적으로 너무 급등하고 있어 걱정일 뿐. 얼마 전 노무현은 ‘돈을 빌려 주식을 사고 있는 행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경고성 메시지를 주식시장에 보내기도 하였다. 최근 증권사 사장들은 모임을 갖고 증시급등을 우려하긴 하였지만 특별한 대책을 내놓진 않았다. 사실 이들로서도 주식시장이 급등해서 폭락하기 보다는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장기에 걸쳐 천천히 오르는 것이 훨씬 유익할 것이다.

그러면 주식시장이 노무현과 증권사 사장들의 소망대로 움직여 줄 것인가?

누구도 확언할 수 없는 문제이긴 하나 이들의 소망이 실현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우선, 한국의 자본의 이윤상황은 그리 녹녹치 않다. 한국자본주의의 대표기업인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영업이익은 2003년을 기점으로 상당히 빠르게 하락하고 있다. 2007년은 전년보다 더 악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뚜렷한 반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기아차는 올 봄 유동성 위기설까지 돌았다. 이들 기업을 대체한다는 포스코와 현대중공업의 이익상황은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이윤감소를 커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포스코와 현대중공업, 아니 현재 한국경제의 활로인 중국경제는 과열 그 자체로 보인다. 중국 증시는 연초에 폭락을 하면서 그 징후를 보여주었다. 저임금에 시달리는 농촌출신 도시이주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중국사회의 불안 또한 중국경제를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이라는 경고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자율 또한 서서히 오르고 있다. 국제적으로 이자율이 조금씩 오르고 있고 한국경제의 지속된 경상수지 흑자는 올해 거의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사실 현재 한국경제는 외채, 그것도 단기외채가 꾸준히 늘고 있다. 원화가치가 상승기조에서 하락기조로 바뀐다면(경상수지 흑자 소멸 및 엔화가치 상승 등 그 가능성은 다분하다) 이자율은 더욱 오를 것이다. 현재 주식시장에서 초민족적 금융투기 자본들은 지속적으로 주식을 매각하고 있다. 주가상승 이외에 원화가치 상승이라는 추가적인 매력을 이젠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편 현재의 세계적인 주가 폭등은 90년대 말의 정보기술산업(IT) 거품, 2000년대 중반의 주택시장 거품에 뒤이은 것이다. 크게 보면 현재의 주가상승도 미국 주도 세계자본주의의 조락(凋落)을 상징하는 한 지표라 하겠다. IT로 인한 신경제를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지금은 거의 없다. 주택시장의 거품은 이제 꺼지기 시작하고 있는데 미국에서는 벌써 이로 인해 성장률이 현저히 하락하고 있고 베어스턴스의 두 개의 헤지펀드가 파산을 하였다. 미국보다 더 심한 거품이 낀 나라들도 많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주식시장이 커다란 상승을 할 때면 언제나 ‘신경제’니, 혹은 이번 장은 이전에 거품으로 꺼진 장과 어떤 점에서 다르다느니 온갖 변호론이 판을 쳐 왔다. 그러나 어김없이 거품은 붕괴하였다. 그 시기를 꼭 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현재의 주식시장도 거대한 거품을 쌓아가고 있어 그것이 터질 날이 머지 않아 보인다. 거품이 크면 클수록 그 붕괴의 잔해는 처절하다. 뒤 늦게 뛰어들어 무수한 시체로 쌓일 ‘개미’들, 이후 불어 닥칠 구조조정의 광풍에 스러질 노동자들, 세계적으로는 외환위기 금융위기로 실질적인 파산에 직면할 나라들(앞에서 열거한 브라질이나 터어키 등 신흥시장이 그 주요 후보가 될 것이다) 등등.

그러나 이런 사정을 감지하지 못한 채 노무현 정권은 이 기회를 틈 타 좋은 주식을 시장에 공급하겠다는 명분으로 발전사 등 몇 개의 공기업의 주식을 상장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고, 상수도산업을 공사화 민영화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발전회사의 장부가격 이하 매각과 물 값 인상이라는 금기마저 깨뜨리면서. 그런 점에서 거품붕괴의 시기가 대선 전일까 후일까 는 여러모로 중요해 보인다.

한편 더욱 중요한 문제는 세계적인 거품 붕괴 이후 미국주도 세계자본주의가 다시 자신을 추스르고 재기할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 민중의 투쟁을 통한 대안세계화의 싹이 돋아날 것인가의 갈림길에 우리가 서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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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의 기억속의 몇 장의 사진과 넋두리

 사회진보연대에서 내는 '사회운동'에 쓴 글입니다. 6월항쟁과 관련한 여러 기사와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 읽어보니 불만스러운 점이 없지 않으나 6월 10일을 기념하면서 올립니다. 조금 깁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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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6월 10일, 명동성당 청년단체연합회 소속 조그만 단체 회원이자 증권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이었던 나는 시청에서 열리기로 했던 6.10 국민대회(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결성 이후 첫 국민대회)에 참가했다가 하루 종일 최루탄과 백골단을 피해이리저리 쫒겨 다녔다. 물론 국민대회를 보지도 못했다. 당시엔 오늘날처럼 집회신고를 합법적으로 하고 성대하게 국민대회를 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어서, 중간에 성공회교회 안에서 국본 주요 지도자들 몇 분이 모여 국민대회를 치렀다는 소식을 듣고 그래도 대회는 치렀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을지로 입구 근처에서 텅빈 거리를 보며 오늘 투쟁도 이걸로 끝나는가 하고 아쉬워하고 있던 차, 퇴계로에선 싸움이 아직 진행중이라는 얘기를 전해 듣고 급히 퇴계로로 달려갔다.

 



 

깨진 돌과 돌을 실어 나르는 데 쓰인 리어카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많은 시위대들로 거리는 어지러웠지만 퇴계로는 말 그대로 해방구였다. 그리고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진압경찰을 격퇴시키기 위해 여기저기서 날아다니는 화염병으로 거리는 오히려 환했다. 여길 못들르고 집엘 갔으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 뒤 시위대는 조금 더 싸운 뒤 자연스럽게 명동성당 안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퇴계로와 거리도 가까웠지만 당시만 해도 명동성당과 천주교회는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발언과 행동을 곧잘 해서 시위대는 농성장소로 자연스럽게 명동성당을 선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내가 어려서부터 다니던 복음주의적 개신교 교회를 대학에 온 이후 어렵게 작파하고 교회를 한동안 다니지 않다가 군대에서 ‘졸병’의 권유가 있었긴 하지만 부대 근처 가까운 천주교회인 명동성당엘 나가기 시작한 데에도 천주교회와 명동성당의 이런 모습이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

6월 항쟁의 시작은 이랬다. 물론 이 날이 있기까지는 광주항쟁 이후 야당과 재야 및 학생운동 세력의 지속된 투쟁이 있었다. 굵직굵직한 것만 꼽아보아도 김영삼 26일 단식사건, 미 문화원 점거 투쟁, 신민당 결성 및 2.12 총선 투쟁과 개헌현판식 투쟁, 인천 대우자동차 투쟁, 구로동맹파업 투쟁, ‘서울대 연합시위 사건’, ‘인천 사태’와 이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일어난 권인숙씨 성고문에 대한 규탄 투쟁, 대학생 전방입소 거부투쟁, ‘건대사태’,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규탄 투쟁’ 등. 정권은 이런 투쟁이 있을 때마다 텔레비전 특집프로그램 등을 통해 ‘공장과 학원가에 침투한 좌경용공 세력’ 운운하며 반공이데올로기를 전국민에게 주입시켜도 투쟁은 연이어 일어났다. 그리고 많은 조직이 생겨났고 투쟁과정에서 꼭 열혈 활동가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경찰서와 감옥엘 들락거려야 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규탄투쟁은 두 차례(87년 2월 7일, 3월 3일) 열렸는데 이 때 경찰에 잡혀 들어간 시위대 숫자가 각각 3-4000명을 족히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당시 운동조직에서 어떤 역할을 하면서 조직내외에서 오가는 중요한 정보들을 접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어서 정확한 이야기는 아닐 수 있겠으나 명동성당 농성은 요즈음의 농성과는 달리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진행된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한다. 물론 농성자들 중에 일부 그런 생각을 가진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당시에는 심야투쟁이 일반적이어서 심야투쟁의 자연스러운 연장으로서 농성투쟁을 생각했을 것이고, 그리고 이후 중요한 투쟁시기까지 투쟁에너지를 이어간다는 정도로 농성투쟁을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농성 첫날을 나도 함께 했는데 선전 홍보나 농성단 뒷바라지 등을 명동성당 청년단체 연합회원들이 분담을 했던 것만 보아도 농성주체들이 사전에 튼튼히 준비된 것은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명동성당 농성을 지속하여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를 철회시켜내겠다고 생각을 한 사람은 거의 없지 않았나 싶다. 당연히 국본 주요 관계자들이 결합을 하거나 결합을 하게 하려는 노력조차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농성 시작 초기에는 성당 출입이 자유스럽지 못하긴 했지만 들어오려고 마음을 먹으면 들어올 수는 있었고 명동성당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문화관’에서 농성을 하는 농성대오를 중심으로 움직였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나가는 이야기이지만 명동성당 농성대오에서는 뚜렷한 한 명의 ‘스타’를 배출했는데 그 분이 아직도 활동을 하고 계시는 ‘명동 할아버지’ 이천재 선생이시다. 그는 젊은 사람들 속에 있는 몇 안 된 나이 드신 분이었고 머리가 하해서 쉽게 눈에 띄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연설솜씨나 발언내용이 빼어나 농성단 안에서 유명해 졌다. 농성단 첫날 회의에서부터 매우 조리 있고 내용 있는 발언으로 좌중을 사로잡았는데 초자 활동가인 나에겐 매우 인상적이었다. 명동성당 청년단체에서 배정받은 선전홍보팀의 일원으로 밤에 잠깐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난 첫날 농성을 하고 아침에 명동성당을 나와 을지로 입구 근처 회사에 출근을 했다가 퇴근 이후 비밀스러운 길을 따라 명동성당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런데 여기서 아직도 내 머리 속에 선명한 사진으로 박혀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당시 명동성당 주변 을지로 등지는 명동성당을 들어오려는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낮부터 공방이 있었고 최루탄연기가 자욱했다. 당연히 길거리에는 사람들도 평소보다는 적었다. 그런데 어렵게 해서 성당 안으로 들어갔더니 성당 마당 하얀 돌 벽돌들 위로는 아직 채 지지 않은 6월의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고 있었고, 꽤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혹은 앉거나 혹은 서거나 각자 자유스런 포즈로 약간의 승리감에 젖어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닌가. 거기다 여기저기서 지원을 해서인지 빵은 성당 마당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거나 쌓여 있거나 했다. 자욱하고 매캐한 최루탄 연기로 뒤덮인 바깥 거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성당 안의 평화롭고 안온한 분위기. 한마디로 명동성당은 또 다른 해방구였던 것이다.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에서 오현우와 한윤희가 숨어살던 갈뫼의 분위기와 비교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시끄러운 세상과 격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지극한 평화와 안온이라는 면에서 말이다. 아무튼 투쟁으로 쟁취한, 그리고 투쟁열기가 가득했던 해방구 퇴계로와 명동성당 안의 평화로운 해방구, 둘 다 87년 투쟁에서 잊지 못할 장면이다.

그리고 앞에서도 약간 비쳤지만 당시의 투쟁은 요즈음처럼 몇 시에 시작해서 몇 시에 정리집회를 하고 하는, 일정한 조직에 속한 사람들이 의식(儀式)처럼 진행하는 박제화된 집회나 투쟁이 아니었다. 밤늦게까지 경찰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싸웠고, 을지로에서 싸우는 사람들은 퇴계로나 종로에서도 열심히 싸우고 있겠지 생각을 하고 싸웠고, 퇴계로나 종로에 있는 사람들은 을지로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있겠지 하고 싸웠다. 그리고 결의에 차 있었지만 신나게 싸웠다. 멀리 있는 백골단에 돌을 던지는 모습을 보노라면 흡사 멋들어진 춤사위였고, 얼굴표정은 자기가 세운 계획에 따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표정, 즉 결의와 성취감이 교차하는 표정 딱 그것이었다. 이렇게 오래 신나게 열심히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긴 하지만 확실히 최루탄과 백골단의 공이 컸다. 싸우다 운이 없으면 잡히기야 하겠지만 앞에서 날 호시탐탐 노리는 적과 그들의 책임자인 파쇼 전두환을 그냥 두고 뒤돌아서 집으로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87년 이후 도입된, 신고만으로 합법집회가 가능하게 된 집회신고제, 백골단 해체, 최루탄 미사용 등의 제도변화나, 문민정권의 등장 등은 민주주의적 공간을 넓힌 계기이기도 하지만 운동세력을 순치시키는 효과도 매우 컸다고 생각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후자의 측면이 더 커 보인다. 그런데도 운동세력은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분위기 속에서 별 생각 없이 순치의 길을 달려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또한 당시의 집회나 투쟁은 이렇다할 의식(儀式)이 별로 없었고 그래서 의식을 모르는 일반 시민들이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거리낌 없이 참여할 수 있었다. 요즈음, 조직원만의 모임이 아니라 대중집회나 대중투쟁이 의식처럼 진행된다는 것은 문제다. 의식(儀式)이 새로운 사람들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수단이 되지는 않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연단, 연설, 노래, 동작, 행진, 깃발, 투쟁방식 등 모든 부면에서. 대중집회나 대중투쟁이 의식을 집전하고 의식을 이해하는 사람들만의 행사로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명동성당은 촛불집회, 인근 지역 직장인들의 점심식사 때의 방문, 명동일대에서의 화이트칼라의 시위, 농성단 해산, 6월 18일의 대규모 2차 국민대회 등으로 이내 뚫렸다. 인천 답동 성당과 부산의 어디에선가도 농성이 진행되었지만 국면은 농성국면은 분명 아니었다. 6월 18, 6월 26일 2, 3차 국민대회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민중들의 대거 진출이 있었던 것이다.

6월 18일에도 잊혀지지 않은 장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신세계 앞 분수대 사건. 신세계 앞 분수대를 사이에 두고 남대문 시장과 신세계 앞 일대의 시위대와 최루탄 발사기로 무장한 채 소공동 쪽에 쫙 포진해 있던 전경들 사이에 돌과 최루탄으로 일진일퇴의 공방이 있었는데, 순간 전경들이 분수대까지 밀고오자 시위대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돌과 육탄전을 이용해 상당히 많은 수의 전경들을 고립시켜 장비도 회수하고 전경들을 분수대에 빠뜨려 버렸다. 그 때까지 전경들에겐 맨날 쫒겨 다니기만 했던 시위대들은 분수대에 빠진 전경들을 보고서 무척 통쾌해 했다. 우리가 이길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조금 있다가 더 많은 전경들이 와서 다시 쫒겨나긴 했지만 말이다. 또 하나는 부산 시위 소식. 한참 이리저리 쫒겨 다니다가 저녁 4-5시 무렵이었을까? 식사를 하러 들어간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 어느 식당 안의 텔레비전에서 전국 각 지역에서의 노도와 같은 시위대의 모습을 비춰주었다. 어디 몇천, 어디 몇만 하는 보도가 이어졌는데 부산시위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규모도 10만으로 가장 많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더 인상적인 것은 텔레비전 화면에서 볼 수 있는 시위대의 분노와 결의에 찬 모습이었다. 부산 시위대 모습을 보고 이 정도면 이제 우리가 승기를 잡은 것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서울의 신세계 앞 분수대에서의 일시적이나마 작은 승리와 부산의 노도와 같은 시위대로 인해 6월 18일은 6월 항쟁의 결정적인 날이 되게 되었다.

6월 18일 이후 6월 26일 다시 한 번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마침내 지배세력은 6.29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연이어 7월에서 9월 사이의 전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드문 대규모 노동자 파업투쟁이 일어났다.

그러면 당시 민중들은 왜 그렇게 떨쳐 일어났을까? 지금 한나라당 윤리위원장 인명진목사가 대변인이었던 ‘국본’이 결성되자마자 국민대회를 몇 번 개최하지도 않았는데도 지배세력이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민중들이 대대적으로 진출한 이유를 허약하디 허약한 ‘국본’의 지도력과 조직력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본’은 대대적인 진출을 할 결의에 차 있는 민중들에게 판을 열어주었을 뿐인 것이다.

민중들은 분명히 그 이전부터 움직이고 있었다. 이는 2.12 총선과 개헌현판식에 몰려든 민중들, 그리고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투쟁에 경찰서에 끌려가는 것을 불사하고 몰려든 민중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우선적으로는 전두환 등 지배세력의 파쇼통치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자유가 전혀 없었고 오로지 최루탄, 경찰력, 군대, 정보기관의 사찰 등 억압적 국가기구에 의해 정권이 유지되었고, 정권이 불러주는 내용을 앵무새처럼 떠벌이는 관제언론 및 어용지식인만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숱한 사람들이 군대에서, 학원가에서, 공장에서 소리 소문도 없이 죽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민중들은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사건을 계기로 더 이상 이런 파쇼통치를 참을 수 없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둘째로는 경제적 모순의 심화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앞에서의 파쇼통치의 많은 부분도 이 경제적 원인과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70년대 말 80년대 초 한국자본주의는 이윤율이 하락하고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게 된다. 광주학살을 자행한 뒤 등장한 전두환정권은 강력한 경제위기극복책을 시행해나간다. 노동법 개악, 정부부문에서 대규모 해고 단행, 퇴직금제도 개악, 임금억제정책 등 노동에 대한 공격을 진행하였고, 물가를 강력히 통제하였다(전두환 정권이 벌인 ‘3대 부정심리 추방운동’ 목록에는 ‘물가오름세 심리’도 들어있었다). 86년 87년 상황에 오면 이런 노동에 대한 공격과 86년부터 불어 닥친 3저로 인해 자본의 이윤율은 급격히 개선되고 있었는데도, 이전부터 진행된 노동에 대한 공격과 임금억제책은 지속되고 있었다. 내수침체로 자영업자들의 상태는 매우 안좋았고, 조출, 잔업, 노동강도 강화로 칼라텔레비전과 VCR을 계속 실어내 수출대기업은 떼돈을 버는데 정작 그것을 만든 노동자는 빈털터리였던 것이다. 자영업자들 사무관리직들이 시위에 참가하였고, 노동자들은 7월에서 9월 사이에 작업장에서 노조결성과 파업투쟁을 벌이기 전 6월항쟁 거리시위에도 개별적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86년 87년 민중들의 대대적인 진출에는 이런 정치적 경제적 배경이 있었고, 86년 2월 진행된 필리핀 민중혁명과 마르코스 축출도 한국민중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87년 투쟁에서 민중들은 무엇을 원했고 그것을 쟁취했는가? 부산 시위대를 가지고 얘기를 풀어보기로 하자. 우선 87년 6월 항쟁에서 부산시위대 규모가 커진 것은 김영삼과 연결해서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광주 개헌현판식에 몰려든 사람들을 김대중을 빼고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런데 이 부산 시위대들은 김영삼을 지지하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통해 김영삼을 대통령 시키기 위해 대거 시위에 나섰을까? 난 그랬을 수 있었다고 본다. 아니 그랬다고 이야기하는 게 사태를 더 정확히 보는 것일 것이다. 여기서 한 발만 더 나아가 보자. 그러면 이들은 단지 김영삼을 대통령을 시키는 것 그 자체에만 목적이 있었을까? 여기엔 도저히 양보를 할 수 없다. 답은 ‘아니오’다. 그들은 김영삼을 통해서 특정한 자신들의 요구를 실현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파쇼 세력과 기구의 일소 등 민주주의의 신장 및 제 권리의 확대와 경제적 형편의 개선과 억압과 착취의 제한 및 철폐 등이었을 것이다. 김영삼은 이들의 요구에 부응했는가? 그 이후 정치적 과정을 보면 김영삼은 이들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 물론 김대중도 6월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자신의 지지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한국자본주의의 위기라는 상황 속에서 전두환의 정책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정책을 실시했고, 민중생활의 어떤 측면에서는 전두환 때보다 더 못해지기까지 했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카드는 노동자 민중들의 희생 하에 자본의 이윤율을 회복시키자는 ‘신자유주의’라는 카드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6월 항쟁에 참여하였을 민중들은 김영삼에 실망한 뒤에는 김대중을 지지하고, 김대중에게 실망한 뒤에는 노무현을 지지하고, 이젠 노무현에 실망하고 이명박을 지지하려 하고 있다. 왜 민중들은 계속해서 배반당하면서도 비슷한 정치인을 계속해서 지지하고 있는가? 혹은 속을 줄 알면서도 지지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왜 그렇게 생명력이 강한 것인가?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을 알면 이 글의 제목에 넋두리라는 단어가 들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넋두리삼아 몇마디 해 본다면 그 이유는 대안적 이데올로기, 즉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실질적 부재 때문이 아닐까? 이번 프랑스 선거를 보면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정치세력의 몰락의 끝은 어디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 강력하던 프랑스 공산당이 2% 지지도 못얻어 냈으니. 임시변통은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가오는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 혹은 또 다른 좌파 후보가 일정한 지지를 얻고 더 나아가서 그 이후 선거에서 오늘날의 이명박의 자리를 넘겨받을 수도 있을지라도 그것이 대수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민중들의 해방의 열망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없다면 민중들의 봉기를 맞이해서도 민중들의 해방의 열망을 여기저기로 흘려버릴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87년 6월의 퇴계로와 명동성당의 해방구를 다시 만들어내기 위해서 내가 지금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 즈음에 87년을 경험한 ‘87년의 자식들’ 중의 하나로 ‘운동’에 뛰어들어 20여년이 흐른 지금, 답답해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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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에프티에이와 관련한 또 한가지 이야기

부르주아들이 한미에프티에이 반대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소비자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즉 소고기와 오렌지 등 미국산 값싼 농산물과 이전보다 값이 하락한 미국산 자동차를 소비할 수 있으면 그만큼 소비자들에게 이익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명목소득이 한미에프티에이 체결 전과 동일하게 상승하는 가운데 수입물가가 싸져 실질소득이 체결 전보다 더 많이 상승한다는 것인데... (실질소득증가율=명목소득증가율-물가상승률)

이는 결국 (생산=소득)의 실질성장률의 문제다. 소비자 문제를 생산 및 소득과 따로 독립해서 다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실질성장률이 체결 이전보다 이후가 더 높아지냐 낮아지냐다.

우리의 판단으로는 국민총생산이 이전보다 더 높아지기 힘들 것이라는 것이다.

국민총생산은 물론 국민전체를 한묶음으로 본 것이고 계급계층별로 나눠서 볼 수도 있고, 응당 운동진영에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농민소비자들은 명목 소득은 줄고 약값이나 다른 서비스요금 증가로 인해 실질소득은 현저히 하락할 것이다. (정부의 피해대책이 얼마나 실효가 있겠는가?)

노동자소비자들도 새로운 이농인구에다가 경쟁격화로 인한 구조조정으로 실업인구가 많아지면 당연히 임금이 체결 전보다 더 적게 인상되거나 정체되거나 혹은 비정규직화로 임금이 오히려 줄어들거나 아니면 실업자가 되어 아예 임금이 없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노동자소비자들에게 소고기와 오렌지 등 일부 농산물의 가격하락은 소득의 하락 혹은 정체 혹은 미미한 인상에 비춰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즉 실질 소득이 이전보다 덜 상승하거나 오히려 하락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약값 등 다른 서비스요금 상승도 고려가 되어야 할 것이다.

반면 초민조적 금융자본에 편입된 일부 고소득계층소비자들은 (명목)소득은 소득대로 증가하고 물가는 물가대로 싸져 실질소득이 이전보다 훨씬 높아질 수 있는 것이다.

즉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소비자 문제는 독자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질소득 문제고, 더 자세히 보려면 계급계층별 실질소득 문제라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실질소득증가율이 이전보다 더 높아지기 힘들어 소비자전체로서 체결이전보다 더 이득을 볼 것이라 장담할 수 없고, 그 중에서도 노동자농민소비자들은 더더구나 그렇다. 한미에프티에이를 두고 누가 찬성하고 누가 반대하고 있는가를 보면 소비자도 단일한 집단이 아님이 확연히 드러난다.

물론 소비자문제는 또다른 영역이 있다. 먹거리의 안전성 문제 등이 그것인데 그것은 여기에서 논외로 하였다. 부르주아들이 이야기하는 소비자문제를 주로 살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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