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펌] 철학의 빈곤

이건희가 '고대사태'를 젊은이의 열정 탓으로 돌리고 좀 더 큰 시야를 갖길 원한다고 했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더 이상 문제삼지 않았으면 한다네요. 과연 대인의 풍모네요. 만드는 노조마다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여 족족 깨는 것도 대인의 풍모겠지요, 아마.

-------------------------------------------------------------------------------

 

제목 철학의 빈곤 No. 239866 | Hit 405 | Date 2005-05-04


글쓴이 문대 99(bruce10) (고대인)


부끄러움을 모르는 대학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가 고대에서 명예철학 박사학위를 받아간 일로 나라가 온통 떠들썩하다.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건희에게 수여된 박사학위가 400억 짜리 100주년 기념관을 지어준 것에 대한 대가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경영대 출신 총장(이 아니라 실은 사장)이 취임한 이래 꾸준히 캠퍼스를 시장바닥으로 만들어가던 학교가 이제는 학문적 가치마저 매매의 대상으로 삼기에 이른 것이다. 철학이 ‘상품’이 되어, 그것도 천문학적인 액수에 팔려가는 이 역겨운 모습을 지켜보며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인문학에 이토록 높은 가치를 부여했던가. 그리고 이 낯뜨거운 거래를 지켜보면서 왜 아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가.

자본의 천년왕국인 이 남한 땅에서 이미 왕이나 진배없는 이건희가 그깟 철학박사 학위쯤 하나 더 가진다고 해서 얼마나 더 큰 명예와 권세를 누리게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나는 모멸감과 분노를 감출 길이 없다. 모든 학문은 당연하게도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이 땅에 살아 숨쉬는 모든 인간에게 풍요와 행복을 가져다줌으로써 학문은 제 존재가치를 다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학문이 다른 인간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될 때 우리는 그것을 당장 쓰레기통에 처넣어야 마땅하다.

플라톤의 정의에 따르면, 철학은 “대상을 지적으로 가장 탁월하게 취급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건희에게 철학적 소양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노동자들을 가장 탁월하게 착취하는 능력’이 될 것이다. 철학, 더 나아가 인문학의 기본정신을 이루는 ‘인간’을 살피는 대신 오로지 ‘돈’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이에게 철학박사 학위가 가당키나 한 말인가. 인문학을 가르치는 고대의 모든 선생님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학생들이 먼저 나서 울분을 토하는 지금, 고대의 선생님들은 어떤 응답을 보여주고 있는가. 이런 꼴을 보면서도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듣자하니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며 부총장을 비롯한 9명의 처장단이 모두 사표를 제출했다고 한다. 일본 총리나 전직 대통령이 수모를 당하고 돌아갔을 때도 나오지 않았던 사표다. 정작 학자로서 갖추어야할 학문적 양심은 온데간데 없고, 오직 재벌 총수에 대한 굽신거림이 있을 뿐이다. 이들에게서 더 이상 무얼 배운단 말인가. 보직만 내놓을 것이 아니라 이참에 교수직도 반납하고 아예 학교를 떠나는 것이 어떨까 한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바로 학문의 정신임을 앞장서서 보여주지는 못할 망정 되려 시위 학생들을 ‘징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이들에게서 인간적 연민마저 느낀다.


‘폭력’과 삼성, 그리고 철학

학생들의 시위에 대한 비난은 주로 그것이 ‘폭력적’이었다는 점에 집중되고 있다. 삼성출신 인사들이 즐비한 정부부처와 보수언론들도 덩달아 시위학생들을 폭력집단으로 매도하고 나서는 형국이다. 언어도단이 따로 없다. 폭력이라고 해서 다 같은 폭력이 아니다.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말콤 X가 말했듯이,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폭력은 폭력(violence)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지성(intelligence)이라고 부른다.”

부도덕한 학위매매를 저지하기 위해 고작 몸싸움을 벌인 것이 ‘폭력’이라면,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노동자들을 납치, 감금, 폭행하는 것은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학생들이 (이건희가 노동자들에게 그러했듯이) 학위수여식을 저지하기 위해 핸드폰 위치추적을 했나. 아니면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학위수여식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을 했나. 무노조경영으로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편법상속으로 서민들을 울려온 일상적 폭력집단이 지금 ‘폭력’을 이야기하고 있다.

시위에 참가한 학우들로 인해 학위수여식이 파행으로 치달았고, 이 때문에 앞으로 고대생들이 삼성에 취업하는데 악영향이 있을 것이라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추측 역시 실제로 많은 학우들 사이에 퍼져있는 듯하다. 참으로 안타깝다. 기업 회장의 사적 감정이 직원 채용이라는 공적 업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단 말인가. 그럴리도 없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삼성은 당장 국내 최고의 기업이라는 수식어를 스스로 반납해야 할 것이다. 재벌 총수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절대 안된다는 이런 노예적 발상이야말로 한국경제가 지난 수십년간 앓아온 고질병인 소위 재벌기업의 폐해를 확대재생산하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건희에 대한 철학박사 학위수여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삼성 취업’이라는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를 옹호하고 있는 일부 학우들의 형편없는 도덕성이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돈과 이익’에 따라 몰려다니는 이 꼬락서니가 과연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의 모습으로 적절한 것인가. 대학을 ‘취업 알선소’ 쯤으로 여기는 이런 한심한 학우들이 존재하는 한 한국 대학의 위기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서열화된 학벌구조가 깨어질 줄 모르는 이 사회에서 이런 학우들이 ‘고대 졸업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남보다 더 ‘출세’할 가능성이 월등히 높다는 사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말이지 ‘철학’이 문제다. 이런 학우들 때문에라도 제대로 된 ‘철학’ 교육이 하루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 철학과 교수님들의 무너진 자존심 회복도 할 겸, 이번 기회에 ‘교양영어’ 대신 ‘철학 개론’을 필수과목으로 정하는 건 어떨까. 물론 그 전에 ‘철학박사 이건희’를 배출한 고대 구성원 모두의 통절한 반성과 진지한 자기성찰이 이루어져야 함은 당연하다 하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