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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io Gramsci의 생애와 사상


Antonio Gramsci의 생애와 사상(1)

-노동운동과 그람시 이종래(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

1. 들어가면서: 그람시 사상의 배경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탈리아 반도의 최남단인 자르디니아 지방인 알레스(Ales)에서 1891년 출생하여 1937년에 죽었다. 이태리 공산당 활동을 한 대가로 1927년부터 1937년까지 만 10년간의 수형생활을 하였으며 이 기간에 '옥중수고'라는 저작을 남긴 맑스주의자이다. 그의 아버지가 낮은 직위의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였던 사실이 말해주고 있듯이, 그의 어린시절은 가난과 질병으로 점철되어 있다. 즉 그는 어린시절 얻은 질병으로 인해 곱추라는 신체적 장애까지 얻게 되지만 당시 맑스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가졌던 소아병적 편협에서 비롯된 사상적, 정신적 불구에서 벗어난 사상가로 평가된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보면 그람시의 정치적 입장은 너무나 예외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예외성과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안토니오 그람시에 대한 생애사적 연구는 여전히 필요하다.

이 런 의미에서 그람시의 출생지역인 남부 이태리의 사회적 상황을 먼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남부 이태리는 산업화된 북부와는 판이한 농업지역이다. 그람시 스스로가 강조한 '남부 이태리 문제'란 종교적인 이데올로기가 경제적인 갈등을 봉합하는 현상에서 출발한다. 이 지역에서 카톨릭이라는 종교는 사회적으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산업화된 북부의 노자간의 계급대립과 달리 봉건적인 지주와 소작인 관계가 여전히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그람시는 남부 이태리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인습과 관념과의 투쟁 없이 불가능한 사정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본다. 남부 이태리 문제에 대한 그람시의 이런 평가는 사회주의 운동 전체로 이전되면서 이른바 전략과 전술의 수립으로까지 확장된다. 다시 말해 사회구조와 행위주체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을 메우기 위한 의식적 활동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즉 그람시가 그렇게도 강조하는 '일상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는 '변혁적인 사고방식과 행위양식'의 도입은 주체의 자각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람시가 자신의 인생을 "3배 혹은 4배로 뒤떨어진 지방민"이기 때문에 "후진적인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벗어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옥중수고 15: §19)1)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자평한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일상생활에서의 인식과 활동을 변화시키는 계기의 문제를 문화와 결합하려고 시도한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그람시를 문화주의와 맑스주의를 결합하려 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칭호를 붙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람시의 이런 시도는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나온 경험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람시는 경험에서 체득된 생활의 원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규범과 질서로 사회화되는 장을 '시민사회'(societa` civile)로 개념화한다.2) 하지만 동유럽과 서유럽사회의 차이를 시민사회의 역사적 존재유무로 구분하였다고 안토니오 그람시의 사상을 협소화 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람시의 본래적 모습인 실천가로서의 모습보다 그에 대한 평가가 이론가로서 국한될 가능성이 커지기도 하지만 그람시의 본래적 관심사는 노동자 계급운동이었다는 사실이 호도될 위험까지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먼저 그람시의 생애를 짧게나마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안토니오 그람시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된 '옥중수고'에서 '남부 이태리문제'에 관한 글들은 이태리에 국한되는 문제를 가진 반면 서유럽사회의 특수성을 강조한 '포드주의' 혹은 '아메리카주의'라고 표현한 주제들은 국내에 소개조차 변변히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노동운동가로서 안토니오 그람시를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2. 청년기의 그람시: 대학시절

그람시의 청년기는 1912년 투린 대학 입학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3) 그람시는 이태리??그리스 문학, 역사학, 철학, 언어학, 법학(사법)을 전공과목으로 택한다. 이 과목 중에서 언어학을 첫 번째 전공으로 한다. 이후 자신의 정치이론에서 대표적인 개념으로 알려진 '헤게모니'도 언어학에서 차용된 개념이라는 사실도 알고 보면 바로 이런 전공과목의 선택으로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4) 그리고 전공과목들의 선택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인문학에 대한 그람시의 높은 관심과 반대로 경제학은 빠져 있다는 점이다. 이런 대학시절 전공과목들의 조합은 이후 2차 인터내셔날 시기에도 그람시가 경제주의로 기울지 않고 문화적 관심을 강조한 이유를 밝혀주는 논거로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당시 노동자계급 운동에서 경제주의적으로 환원하는 우파와 문화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좌파로 쉽게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람시의 독자성은 두드러진다. 그람시의 이런 독자성은 유년시절의 경험과 함께 대학시절의 학업과 정치활동에서 토양이 마련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이후 그람시의 사상을 가능하게 한 토대로 보여 진다.

그람시는 대학시절 새로운 지식습득과 더불어 실천 활동을 병행한다. 1913년 이래 그람시는 이태리 사회당(PSI)의 당원이었고, 1914년 그는 사회당내 '변혁적 좌파그룹'에 합류한다. 1915년 그는 졸업이후 대학이나 중등학교에서 이미 보장된 교수나 교장과 같은 좋은 직장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지만, 사회당 중앙위원회에서 발간하던 잡지 'Avanti'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한다. 그는 이 사회당 기관지에 지방정치, 시사문제 그리고 각종 문화 비평적인 글을 주로 발표한다. 그람시가 1916년에서 1920년 사이 170편에 달하는 연극평론을 발표한 것도 바로 이런 활동의 연장선상으로 보여 진다.

그람시는 1915년 키엔탈(Kienthal)과 1916년 짐머발트(Zimmerwald)에서 열린 반전회의에서 레닌의 정치적 입장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정통 맑스주의와 교감을 시작한다. 물론 이전의 시기에도 그람시는 속류 맑시스트들의 글을 알고는 있었지만 정통 맑시스트의 이론을 처음으로 접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정통 맑스주의와의 만남이후 그람시는 맑스의 글을 정독하면서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한다. 1918년 5월 4일 사회당 투리노 시지부의 주간지에 맑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발표된 '우리의 맑스'에서 그람시는 맑스의 정치경제학을 자신의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한다. 그람시는 먼저 정치경제학에 담겨진 이념이 순수한 진실로서 의미가 있기보다 그 이념이 경제적 현실의 부당성을 알리고 폭로하는데 유용하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즉 정치경제학적 이념은 "자의적인 성격"과 "허구로 가득 찬 종교적이거나 사회학적인 추상"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할 뿐만 아니라 실현될 수 있는 이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그람시는 주장한다(Gramsci, 1918: 37).

여기서 우리는 2차 인터내셔날 시기 자본주의 경제의 자연붕괴에 따른 국가소멸론이 유행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그람시의 주장이 지닌 의미성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경제주의자들이 말하듯이 자본주의가 자연 붕괴할 때까지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보다 자본주의 모순의 본질인 경제적 착취 구조를 널리 알려 사회적 설득력을 높여야 할 뿐만 아니라 이런 실천적 활동이 당면과제라고 그람시는 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에 대한 인식은 맑스주의를 절대적 진리로 인정할 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실천적 활동을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맑스의 정치경제학은 종교적인 진리로서가 아니라 실천적 활동을 밑받침할 수 있는 정당성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맑스주의의 탁월성은 존재한다고 그람시는 주장한다. 그람시의 이런 맑스주의 해석은 주의주의(Voluntarismus)적 전통에 근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 노동자 계급운동에서 자신의 입장은 주의주의적 운동과 거리를 분명히 두면서 자신만의 독자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3. 노동운동가로서 그람시

러시아에서 소비에트혁명5)이 일어난 1917년에 그람시는 세계 1차대전(1914-1918)으로 야기된 자본주의 위기국면에서 노동자 계급의 적극적 개입은 절박할 뿐만 아니라 필수불가결하다고 주장한 '화해할 수 없는 혁명 그룹'에 가입한다. 그람시의 이런 정치적 입장은 당시 사회당이 취한 전쟁 불개입이라는 소극적 태도에 대한 명확한 반대가 분명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는 이 혁명 그룹의 조직원이자 이태리 사회당 투린 시지부의 책임자로서 1919년 6월 기업내부 노동자 조직을 러시아의 소비에트 모형에 따라 재편할 것을 제안한다. 즉 그람시는 이태리에서 '노동자평의회'운동을 제안한 것이다. 그람시의 이런 제안은 1920년 투린 시에서 2십만 명이 참가한 총파업으로 현실화되지만, 그람시가 주도한 '노동자평의회'운동은 독일의 칼 립크네히트(Karl Liebknecht: 1871-1919)와 로자 룩셈부르그(Rosa Luxemburg: 1871-1919)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6).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운동이 가진 급진적인 '기동전'에 반대하여 '진지전'적인 사고를 그람시는 이미 그 당시에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운동이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의미에서만 한정되었다면 그람시는 이 운동을 문화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이다. 즉 이태리 '노동자평의회'운동의 기관지인 'Ordine Nuovo'는 정치적인 선전??선동잡지가 아니라 문화 잡지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람시가 노동자평의회 운동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노동자적인 사고, 표현방식과 태도라는 점이다. 여기서 기존의 지배질서가 묻어 있는 사고와 표현방식, 태도가 아닌 노동자적인 혁명적인 사고, 표현방식과 태도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가 혁명의 관건이라는 그람시의 문제의식이 돋보인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단을 모태로 하는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운동은 1918/19년에 독일 공산당(KPD)을 만드는 계기로 되듯이, 이태리에서도 노동자평의회운동은 1921년 이태리 공산당(PCI)이라는 조직을 만드는 초석이라는 점에서 두 운동의 공통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조직건설은 러시아의 소비에트 혁명의 방식이 일반화되던 시기에 이른바 전위정당 건설이 시대적으로 요청된다는 사실에서 이해가 되긴 하지만, 노동자평의회운동의 활동내용의 차이는 이후 서유럽 사회주의 운동에서 전위정당의 역할과 내용을 두고 논쟁거리로 된다.

4. 정치가로서 그람시

1921년 아마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의 지도 아래에서 이태리 공산당(PCI)이 건설된다. 당시 이태리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운동이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위협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보르디가의 이태리 공산당은 파시즘을 특별한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당시 이태리 공산당 지도부의 견해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는 어차피 부르조아 계급독재의 사회이기 때문에 파시즘은 그 다지 대단한 위협이 아니라 정상에서 조금 벗어난 변종일 뿐인 것이다. 이런 정세인식에 따라 보르디가의 이태리 공산당은 볼셰비키 혁명과 같은 군사 쿠테타를 일으킬 수 있는 전위정당화가 주요한 당면과제라고 보았다. 즉 파시즘에 반대하는 계급연합의 결성이 당면한 일차적인 과제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보르디가는 부르조아적인 자유를 지키기 위한 계급연합 보다 노동자 계급내부의 단결력과 응집력을 높이는 도구로서 전위조직의 건설이 당면 과제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보르디가의 이런 정세인식과 달리 그람시는 노동운동에 대해 파시즘이 지닌 위협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대중의 동원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파시즘 반대를 위한 대중동원 투쟁은 사회당, 부르조아 민주주의자와의 연합으로 더욱 사회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입장이 나오게 된다. 바로 이렇게 해당 시기의 단기적인 정세에 대한 두 사람의 대조적인 인식과 운동전망을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명목적인 이런 차이는 결과적으로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실제적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람시가 '노동자평의회'운동을 주도하였을 때 그의 정치적 입장은 1차 대전이라는 자본주의 위기상황을 방관으로 일관하던 당시의 좌파 주류세력에 반대하여 노동자 계급의 적극적 투쟁을 조직하려 하였다는 점에서 주의주의적 전통에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으로 비쳐진다. 하지만 이 주의주의적 흐름이 급진화된 소수 전위정당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그람시는 대중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주의주의적 흐름과 일정 정도 차이를 분명히 한다. 대중이 주체가 된 투쟁이 없으면 서유럽 사회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그람시적인 인식은 바로 이 시기에 획득된 것으로 보인다. 파시즘을 자본주의가 가진 모순의 단순한 표현양태로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및 노동운동에 결정적 타격을 주는 반동의 시대가 올 수도 있다는 인식은 시대를 앞선 그람시만이 가진 탁월성이다.

그람시가 미리 예측한 노동운동의 위기상황은 1922년 10월 무솔리니가 '로마로의 행진'을 통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사실로 드러난다.7) 권력을 장악한 무솔리니는 1926년까지 의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긴 했지만 이태리 공산당에 대한 합법??반합법??불법적인 백색테러를 벌인다. 이런 정세에서 그람시는 1922년 이태리 공산당 대표로 임명되어 코민테른의 본부로 이동하여 잠시 화를 면하지만, 1923년 파쇼정권은 공산당 지도부인 보르디가와 그람시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하면서 탄압을 본격화한다. 파쇼정권의 탄압으로 당의 유지가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1924년 4월 그람시는 면책특권을 지닌 의원 신분을 가지고 이태리로 돌아온다. 같은 해 코모(Como)에서 비밀리에 열린 이태리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그람시는 보르디가의 종파주의적 노선을 강력히 비판하지만, 대의원 다수를 획득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람시는 같은 해 8월 코민테른에 의해 이태리 공산당 사무총장으로 임명된다. 이로서 그람시는 정치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그람시는 당 사무총장으로 취임하면서 반파쇼 연합을 위해 야당들에게 '반(Anti)의회'를 제안하지만 성사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람시는 반파쇼 연합의 필요성을 계속해서 주장하였고 농민과 노동자의 계급연대를 최종적인 목표로 설정한다. 이 노력은 1926년에 당내에서 성과를 거두게 된다. 즉 그람시의 노선이 이태리 공산당 3차 전당대회에서 다수파의 지위를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이태리 공산당은 전위정당에서 대중정당으로 지향하는 방향성의 전환을 하게 되었지만, 파쇼정권은 같은 해에 의회를 해산하면서 공산당을 불법화한다. 그람시는 1928년 재판에서 20년의 형을 판결 받는다. 이렇게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그람시는 1928년부터 집필허가를 얻어 사상의 편린이 담긴 짧은 글들을 쓰기 시작한다. 바로 이 짧은 그들의 모음집이 이후 '옥중수고'로 출판되면서 안토니오 그람시라는 이름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로 된다.8)

4. 사상가로서 그람시

그람시가 사회주의 및 노동운동에 끼친 공헌과 평가는 우선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그람시는 서유럽 맑스주의의 원조로서 이야기된다. 이전의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동구권 사회주의와는 성격이 다른 서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그람시가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이후 정통 맑스주의의 이론적 근거가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지금의 상황에서 그람시 연구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우에 따라 정통 맑스주의와 서유럽 맑스주의의 차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대비해 봄으로써 지금의 노동운동이 처한 대안 상실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즉 그람시 연구를 통해 노동운동에게 하나의 대안적 방향성을 제시해 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그람시 연구는 그람시의 사상적 공헌에 대한 평가만이 아니라 새롭게 진행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그람시가 맑스주의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차용한 많은 개념들이 현대사회에서 일상적으로 회자되면서 일반화되었다는 사실이다. 현대 사회과학에서 학문적으로 빠뜨릴 수 없는 중요 개념인 '시민사회', '헤게모니', '역사적 블록', '진지전', '기동전', '포드주의'와 같은 개념들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그람시가 개발한 개념들 중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분석을 위한 개념보다 문화에 대한 개념이 현대사회에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는 점이다.9) 그람시하면 문화주의자라는 애칭이 의례적으로 붙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통속적인 분류법은 그람시 이해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왜냐하면 그람시가 문화에 관심을 가진 까닭은 문화 그 자체가 아니라 당시 노동자 계급의식과 노동조합운동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문화적 접근법을 채택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람시는 자본주의적 생산력발전이 가져오는 상부구조의 변화는 노동자 계급의식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즉 그람시는 현대자본주의 발전은 노동자 계급운동에 부정과 긍정이라는 이중적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본다. 당시의 속류 맑스주의자들은 기술발전에 무한한 신뢰를 주었지만 그람시는 기술발전에 부응한 생산력 상승이 계급운동의 성장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람시는 기술발전이 노동자 운동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면서 기술발전에 대한 신뢰는 아무런 근거 없는 믿음이라고 논박한다는 점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그의 탁월성을 알 수 있다.

노동운동의 전망에 대한 그람시의 이런 평가는 먼저 '미국주의와 포드주의'에 대한 짧은 글들에서 파편적으로 실려 있다. 그람시는 포드 자동차회사에서 노동자들에게 지급한 고임금이 어떤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지에 우선 관심을 가진다. 여기서 그는 포드기업의 고임금정책이 산업발전에 따른 필연적 결과라는 주장에 대해 먼저 반론을 제기한다. 그 이유로 그는 포드기업 종사자의 높은 이동성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람시는 빈번한 직장이동이 일어나는 포드기업의 고임금정책은 사회적으로 어떤 파장과 결과를 가지는지에 주목한다. 먼저 그람시는 포드의 고임금정책은 노동자 계급의 내부분화를 촉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즉 기업은 평균노동시간이 동일한 조건에서 생산성 증가를 이루기 위해서 새로운 유형의 숙련 그리고 노동력의 양과 사용방식의 변화를 강제해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포드 자동차회사의 고임금을 그람시의 표현대로 하면 "기업이 노동자들에게서 차별성을 요구"(옥중수고 9: 1129)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 인식에서 그람시는 포드주의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합리화를 꾀한 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포드주의는 노동자 계급의식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바로 그람시는 포드주의적 대량생산방식이 기업과 노동조직의 합리화로 이어져 생산체제의 변화를 수반하지만 이것이 노동자의 삶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본다. 즉 산업자본에서 금융자본 중심으로 자본운동이 전환하는 사회적 이행과정에서 자본주의적 모순은 심화되면서도 기술발전으로 인한 물질적 분배는 더욱 용이해져 노동자 계급의 체제내 포섭이 강화되는 이중적인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전이 노동자들을 체제의 이익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자본주의의 본래적 모순은 더욱 은폐될 수도 있다는 지적인 셈이다.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전이 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의 생존의 가능성을 열어둘 수도 있다는 그람시의 지적은 미국주의적 문화적 비평으로 더욱 강화된다. 그람시는 유럽과 미국사회의 차이를 먼저 개인주의적 전통의 유무에서 구한다. 유럽사회에서 이해관계에 기초한 경제적 개인주의는 다양한 이해집단을 형성하는 근거가 된다. 즉 유럽에서는 전통적인 성직자, 관료, 대지주, 대상인과 같이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집단의 형성이 불가피한 반면, 미국에서 이해집단은 생산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노동자와 자본가로 구분될 수 있다는 점이다.10) 다시 말해 구체제의 잔존물인 사회집단이 부재한 미국은 자본운동의 진행에 따라 사회적 재편이 그 만큼 더욱 용이할 수도 있다고 그람시는 평가한다. 즉 유럽과 비교하여 산업생산에 기초한 금융자본의 분배와 축적의 기제가 미국에서는 더욱 쉽게 적용되면서 미국적 실용주의의 전통이 형성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다.

자본이 산업자본에서 금융자본 중심으로 이행하면서 자본운동의 고도화는 진행된다. 금융자본주의의 단계에서 자본운동은 수와 양의 계산에 바탕을 둔 자본 합리성으로 현상적으로 드러난다. 게다가 이 단계에서 자본운동은 시장의 무계획성까지 조절 예측하려 한다는 점이다. 즉 자본주의가 경쟁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진입하면서 시장의 비예측적인 성향 역시 제어될 수 있다는 평가한 그람시는 당시 서구자본주의를 '계획된 경제'로의 진입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람시의 이런 평가는 당시 힐퍼딩(Hilferding)이 산업자본에서 금융자본으로 자본운동이 중심이 이동하면서 자본주의는 자신의 얼굴을 '조직된 자본주의'(Organisierter Kapitalismus)로 바꾼다는 주장과 동일한 맥락에 놓인다. 쉽게 말해 금융자본이 중심이 되면서 자본주의는 자본 합리성에 의해 운용될 수밖에 없다고 그람시는 본 것이다. 수요에 대한 예측에 기초한 대량생산방식의 등장은 자본주의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람시는 노동자가 개성을 상실하는 시대가 도래할 수 있다고 본다. 노동자의 운명이 테일러가 말했듯이 마치 '옷 입은 고릴라'와 같은 대량생산 노동자로 전락할 가능성을 그람시는 미국에서 본 것이다. 노동운동에 대한 이런 비관적 전망과 더불어 그람시는 미국주의의 유럽적 적용은 자본주의 발전에서 또 다른 변종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걱정과 염려를 한다.

미국과 달리 유럽에서 노동자 계급의 탈계급화 현상은 또 다시 굴절될 가능성이 있다고 그람시는 평가한다. 즉 미국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적 세력인 대토지를 소유한 전통적인 지주계급과 대자본이 기존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 간의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고 그람시는 보기 때문이다. 이른바 전통적 부르조아지와 신생 부르조아지간의 계급연합이 형성되면서 파시즘적인 국가조합주의가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람시의 파시즘에 대한 해석은 정통 맑스주의적 해석과 달리한다. 즉 파시즘의 등장을 자본주의가 지닌 내재적 모순의 결과로 해석하는 정통적 해석과 달리 그람시는 자본과 전통적 지배세력이 야합하는 결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지배계급 내부의 타협은 자본주의의 체제위기를 극대화하려는 노동운동의 급진성을 사전에 봉쇄하는 효과를 가지면서 노동운동의 위기를 가져온다. 그람시가 당시 코민테른의 지배적 견해와 달리 이태리에 등장하기 시작한 파시즘을 노동운동의 위기로 받아들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파시즘의 도발에 대해 노동자 계급운동은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과제보다 자유민주주의적인 체제의 유지가 당면의 과제라고 그람시는 강조한다. 전통적 지배계급과 신흥 지배세력이 연합하여 사회적으로 세력을 행사하는 '헤게모니'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노동자 계급운동은 우선 권위적 국가조합주의의 대응형태인 '사회적 조합주의'를 내세우는 것이 타당하다고 그람시는 본 것이다. 이런 '사회적 조합주의'의 건설이 노동자 계급운동에 유리한 조건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그람시는 전통적 맑스주의 내에서 오랫동안 계속되어 오던 개량과 변혁이라는 이분법적 인식구조에서 벗어나게 된다. 즉 자본주의적 발전은 노동자 계급에게 의도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개량이 아닌 변혁적 내용을 담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그람시는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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