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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만의 편지

컴퓨터를 하는 쭌 옆에서 노닥이다 빨간 복주머니를 보았다.

얼핏 보매도 퍽 오래 되어 보였다.

뭔가 싶어 안을 보니 호두 두 알이 나온다.

보름이라고 어머님이 주신 호두는 식탁에 있고,

전에 청소하면서 못 먹게 생긴 것들은 다 버렸는데 이게 뭐지?

 

그런데 호두 한 알이 조금 열려 있고 그 안에 뭔가 희끗한 것이 보인다.

응 뭐야?

호두 껍질을 완전히 벌리니 돌돌 말린 종이가 나온다.

1.5cm쯤 되는 두루마리이다.

퍽 오래된 것인 양, 종이는 누렇게 색이 바랬다.

 

편지를 펼치니 타자로 쓴 글이 나온다.

'행복하라'는 내용이다.

 

쭌과 나 중 누가 받은 거지?

나는 기억에 없는데 쭌도 자기 것인지 긴가민가 한다.

 

뒷장을 보니 '1989.1.20'이라고 년월일이 적혀 있다.

1월 20일이면 쭌의 생일이다. 89년은 그가 고3이었던 때였고.

누가 보냈는 지는 적혀 있지 않다.

나는 쭌의 친구들을 떠올렸고, 쭌은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 한다.

 

로맨스에 목말랐던 나는 흥분을 했다.

다른 호두도 열어보자!

틈새도 없이 꽉 잘 다문 호두를 열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흔들어 보니 안에 뭔가 소리가 난다.

망설이는 쭌을 졸라, 기어이 호두를 열어 보았다.

 

툭, 호두가 열리자 뭔가가 우수수 쏟아진다.

이번에는 2~3mm 정도 되는 너비의 작은 두루마리들이 쏟아진다.

1cm가 조금 넘는, 어여쁜 여자 인형 배지(뺏찌?)도 나온다.

8개의 두루마리이다.

한 개를 골라 열어 본다.

'다섯, 000000000'라는 글귀.

다른 것들도 열어 보니 하나부터 여덟까지 조그마한 글씨로 번호가 적혀 있고,

그 옆에 메시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가을에는 사랑하자...'

일곱번째 메시지에는 아무런 말이 적혀 있지 않다.

그리고 여덟번째, '하루가 꼴깍 넘어가는 날에, K'

드디어 이 메시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감질나겠지만,  왠지 전체 내용을 밝히면 그와 그녀의 소중한 이야기를 3자가 밝히는 것 같아, 그건 내 몫이 아닌 것 같아 여기까지만...)

 

K. 편지를 쓴 이.

그는 이 편지가 이제야 열렸다는 걸 짐작도 못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쭌의 성격을 몰랐던 것이다.

20년 전에 받은 호두를 아직도 간직할 만큼, 그는 남에게 받은 것을 소중히 여긴다.

호두를 받았다면 까먹지 않고 그대로 보관한다.

사탕을 받았어도 까먹지 않고 봉지째 보관한다.

이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유리병에 담긴 사탕을, 찐득하니 너무 오래된 사탕을 그만 버리자고 실랑이를 했었다.

유리병에 담긴 학도 언제까지나 들고 다니려 한다.

 

그는 호두를 열어 보지 않았고, 그저 지니고 있었다.

 

이 메세지를 준 그이는 그 후 쭌을 보며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그가 내 편지를 봤을까, 못 봤을까.

보고도 모른 척 하는 것일까.

모른 척 하는 것이 그의 답인가...

 

(아, 아드레날린이 팍팍 솟는다. >.<)

 

K의 가정사는 불행했다 한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K는 누군가의 소개로 한 기업 회장의 비서가 되었고,

열 살 터울이 나는, 회장의 막내 아들은 K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결혼을 하였고, K는 지금 두 아이의 엄마이다.

소설같은 이야기다.

 

엄청 부유하게 살던 K를 기억한다.

미취학 아들에게 붓던 정성과 돈에 깜짝 놀랐던 것도.

 

감수성이 한참 예민한 그 때, 그가 이 편지를 읽었다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해도, 그게 또 쭌과 나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을까.

 

팍팍한 일상을 촉촉히 적시는 편지다.

 

아마 지금은 네 편지를 이제야 보았노라고 이야기하기가 쑥스러울 지도 모른다.

지나온 만큼 세월이 지나면 그들은 이제야 발견한 편지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그의 로맨스를 이렇게 호의적으로 바라볼 만큼 나는 우리 관계에 자신감이 있는 것일까? 아님 긴장조차 없는..? >.< 누군가에게 사랑하고픈 사람이었던 쭌의 매력을 새삼 떠올리는지도.. 푸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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