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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2> - 장준석

-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수유+너머의 운영비는 초기에는 '고미숙'씨가 전액 부담했었다.

 

현재에 와서는 일반 회원들이 내는 회비와 강의 수입으로 인한 특별 회비, 세미나 회비

 

등이 생겨서 부담이 덜어졌지만, '고미숙'씨에게는 물질적인 충만함보다는 정신적인 충

 

만함이 더욱 우선인 셈이다.

 

세 차례에 이사에 더욱 넓어진 공간의 사용비는, 공간의 증식과 함께 나타났던 예기치 못

 

한 활동비로 충당되었다. 말하자면 공간과 활동과 관계가 동시적으로 증식되는 행운을

 

맛보았던 것이다.

 

계속되는 이런 지출에 비해 얻는 건 실로 엄청났다.

 

그녀는 이런 현상을 '사이보그 - 되기' 라고 표현했다.

 

물질적인 만족이 아닌 타인과의 인연으로 인해서 그들의 능력을 내 것으로 활용할 수 있

 

는 정신적인 만족을 가졌다고 한다.

 

물론 내가 모르는 내용은 아니다.

 

물질적인 행복만을 추구하다가는 정신적으로는 핍박해 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

 

아마 없을 것이다.  다만 이렇게 실천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마시멜로 이야기' 라는 소설에서도 처음에 나오는 내용이 결심과 실천의 차이이다.

 

우리가 살면서 다짐하는 수 많은 결심, 금연이라던가 다이어트 등의 결심들은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면  그것은 항상 제자리 걸음이라고 했다. 결심을 '결실' 로 만들기 위해서는

 

'실천' 이 필요한 것처럼, 내가 아는 내용이라도 실천이 없으면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이

 

다.

 

한 강의 시간에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질문하셨던 적이 있다.

 

"사랑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나에게 질문이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난 사랑은 '이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로서, 자신의 사랑에 대한 생각

 

을 독자들이 엿볼 수 있게 하였다.

 

사랑이란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하는 것이다. 소유와 집착이 아니라, 혹은 자기와의

 

동일성에의 요구가 아니라, 그의 본성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도록 촉발해주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사랑의 이름으로 자신의 욕구를 그대로 이식, 복제하기를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가면을 씌운 소유와 집착이다.

 

진정으로 사랑을 하게 되면 상대방이 너무도 평온하게 느껴진다. 흔히 사람들은 사랑이

 

자극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빠지면 동요하고, 불안에 잠기고, 설레이고, 거절

 

당할 수록 더욱 끌려가며, 그 상실에 대한 불안감_ 이런 감정은 소유와 집착이라고 작가

 

말한다. 그리고 주장한다.

 

사랑은 '코뮌주의(Commune) 다.

 

코뮌이란 프랑스 중세의 주민자치체로서 작가는 의역해서 서로의 기쁨과 행복을 증식시

 

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외부를 향한 감역력을 가지고, 다른 대상들을 촉발하는 것이 사랑

 

이라고 말한다.

 

작가가 주장하는 코뮌주의적 사랑은 이성적인 감정의 사랑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행

 

복한 감정을 나누어 주면, 그 감정들은 계속 순환작용을 일으킨 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부와 재물이란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에게 양도되기 위해 잠시 내게 머무르는

 

것일 뿐이니, 많은 증여와 순환으로서 코뮌주의적 사랑을 하여라.

 

코뮌주의란 노마디즘에 이어 나에게 새로운 생각의 감각을 자극시키게 해 주었다.

 

코뮌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무엇보다도 공간이 비어 있어야 한다.

 

비어야 외부를 향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비움과 열림은 같은 표현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비어 있음의 표현이 바로 청결이다. 청결해야만 곧 변이가 가능하다.

 

공간을 단지 하나의 기능으로만 쓴다면 정말 낭비다.

 

이런 청결함으로 인한 공간 변이성은 수유+너머의 이념인 노마디즘과도 연관성이 있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는 원칙이 자가 발전하면서 전 회원이 유목하기를 택했다는 점이

 

그 점이다. 이런 점에서 보아도 노마디즘과 코뮌주의의 이념은 결합되는 개념인 것 같다.

 

하나 더 말해볼까?

 

흔히 공동체라고 하면 이념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진지한 집단이라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진지함은 공동체의 치명적 약점이다. 그런 공동체들은 내적으로 상하위계가 작동하게 되

 

는 한편, 외적으로는 안팎의 경계가 뚜렷해짐으로써 결국에는 정체될 수 밖에 없다. 그러

 

므로 코뮌이 살아 움직이려면 유머러스해야 된다. 웃음이야 말로 일상의 축제를 만들어

 

내는 기초이자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유머는 코뮌의 원동력이다. 소위 진지한 것

 

이 진실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유머에 익숙해지면 안팎이 사라지면서 새로운

 

관계, 이질적인 삶이 열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유머는 ' 노마디즘의 토대' 다.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 사이를 자유롭게 가로

 

지으며 예기치 않은 흐름들을 만들어내는 동력으로서의 유머. 더 나아가 그것은 주류적

 

질서를 전복하면서 매끄럽게 옮겨 다니는  ' 유목적 특이점이자 우발점의 기법' 이다.

 

그러므로 코뮌을 꿈꾼다면 가장 먼저 웃음의 지혜를 터득해야한다.

 

이렇듯 코뮌과 노마디즘은 하나로 결합되는 개념이다.

 

감정기복이 덜하고, 진지함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에게서 이런 유머의 개념은 낯선 개

 

념이다. 특히 남자는 무뚝뚝하고 진지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는데

 

도, 대한민국 남자라면 가지고 있는 개념이다. 이런 낡은 사고방의 틀을 이 글이 조금은

 

부수게 해 주는 것 같다. 나에게_

 

노마디즘과 코뮌주의는 하나의 획기적인 개념이라기 보다는 그동안 가지고 있던 개념들

 

의 방향을 조금씩 수정해 주는 화이트(white)같은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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