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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글] 나중에 꼭 읽어볼 것!!!

http://blog.jinbo.net/imho/?pid=1429

 

베네수엘라의 Health for All

 

 

(업계로 복귀했으니 이제 공부도 열심히 해야쥐~
잠깐 틈난 사이 메일을 열어보다 보게 된 소식)




베네수엘라의 의료개혁에 대한 이야기가 Social Medicine이라는 저널의 최신호 전체를 채우고 있다.

내용 전체는 요기에서 볼수 있고(왜 구글크롬에서는 게시판 편집기가 잘 안되는걸까나~ 브라우져 바꾸기 귀챦아서 그냥 텍스트버젼으로 씀), 논문 전체가 공개되어 있다.

http://journals.sfu.ca/socialmedicine/index.php/socialmedicine/issue/current/showToc

이 저널은 일차의료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고, 라틴아메리카 소식이 대부분이다. 생긴지 얼마안되긴하지만, 생생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듯.


블로그 http://blog.jinbo.net/BA에도 항상 Barrio Adentro에 대한 최신 소식이 올려져 있음.




아직 Abstract도 안 읽어보고 목차만 훑어본거라 할말은 없네~
번역이나 내용소개는 관심 있는 분들께 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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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유물론적 페미니즘(08년 여이연여름강좌) 3-1

유물론적 페미니즘(08년 여이연여름강좌) 3-1.

★ 작은 틀 ★

 

 

1. 문제 제기 - 계속되는 질문들.

 

 

1) 성의 측면에서 좀더 평등했던 분업이 어떻게 불평등해졌는가?

2) 위계적인 분업이 어떻게 하여 현재의 임금노동에까지 확대되었는가?

 

 

- 가사노동에 대한 분석과 여성 임금노동에 대한 분석이 분리.

70년대 초 중반, 가사노동이나 가부장제의 개념에 대한 분석 등 페미니즘에서 중요한 새로운 논의들이 등장하고, 여성의 역사에 대한 페미니즘적 연구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의 여성 임금노동자의 위치에 대한 분석에 포함되는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 여성의 공적인 노동력으로의 진입이 해방은커녕 여성들은 오히려 그들의 이중의 임무.

대규모 산업이 여성을 가정에서 노동시장과 공장으로 내몰고, 가족의 생계 책임자로 만들면서부터 프롤레타리아트 가정에서의 남성 지배의 최후의 보루는 모두 무너져 버렸다(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여성해방의 최우선의 전제조건은 전 여성이 공공산업으로 재투입되는 것이다.”

 

 

- 여성노동에 대한 연구는 여성이 담당하는 노동의 성격에 의해서도 밝혀질 수 있지만 여성이 처한 사회경제적 현실에 대한 조망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자체와 그 속에서 관철되고 있는 성별 분업의 논리를 함께 보아야 한다는 뜻.

 

 

2. 여성노동에 대한 사회적 이론 검토 및 비판.

 

 

--> (강사 선생님 말씀) 여기에서 주요 이슈는 여성에 대한 차별, 불평등이 “왜” 저임금․불안정․비정규직 노동으로 현상하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한 논의는 크게 2가지가 있다.

 

 

1) 인적 자본론

--> (강사 선생님 말씀) 이것의 대표적인 예는 <여성은 일 시킬 만하면 일을 그만 둔다>이다. 이 예는 위의 “왜”라는 문제 제기에 대한 기존 사회학 이론의 답변(자본 이데올로기) 이다. 이 논의는 이 논의의 한계를 비판하는 이중노동 시장론으로 이어진다.

 

- 노동시장은 동질적, 완전 경쟁적이며 개별 근로자의 직업적 지위나 임금 수준은 학력, 직업훈련, 업무경험, 기술습득 등 인적 자본에의 투자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여성은 남성에 비해 인적 자본에 투자함으로 노동생산성이 질적으로 떨어지며, 이러한 차이가 결과적으로 임금이나 직업적 지위 면에서 성 차별을 가져오게 된다.

 

 

- 여성들이 가족 내의 지위 때문에 남성보다 인적 자본을 덜 가진다는 입장. 인적 자본론자들은 노동시장의 결과가 합리적 선택의 결과임을 암시한다.

 

 

비판) 직업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가족 내의 여성 지위의 결과로서 설명하며, 이는 가족 구성원이나 전체 사회 모두에 기능적인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파슨스의 기능주의와 동일한 논의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개인의 노동 전략이라기보다는 가구의 노동 전략이라는 관념을 인적 자본론과 파슨스 이론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며, 성과 노동에 관한 많은 사회학적 분석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특히 인적 자본론은 고용주가 피고용인에게 그들의 가치에 맞게 임금을 주는 완벽한 노동시장의 가정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돈을 많이 받는 직업’은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직업이고, 이는 실제 기술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강한 권력을 가진 노동자들이 자신의 직업이 고도로 숙련된 것으로 불리도록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크다.

남성과 여성에게 노동시장을 불평등하게 구조화시키는 제도화된 권력관계를 간과한 것이 인적 자본론, 그리고 이와 유사한 사회학 이론들이 실패한 핵심적인 이유이다.

 

 

2) 이중노동 시장론

--> (강사 선생님 말씀) 이 이론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노동시장이 왜 이중적인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는 이론이다.

 

- 노동시장이 완전 경쟁적이고 동질적이기보다 질적으로 구분되는 여러 부분들로 분절되어 있으며 분절된 부분들은 각기 다른 직종으로 이루어져 다른 원리 및 고용관행에 의해 움직여진다는 것. 1차 노동시장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 좋은 근로조건, 다양한 승진 기회, 고용의 안정성이 보장되며, 2차 노동시장은 여자, 연소노동자, 도시빈민 층으로 구성되며 저임금, 열악한 근로조건, 승진 기회의 부족, 고용 불안정성 등이 그 특징이다.

 

 

3. 노동 과정과 산업예비군 이론

 

 

1) 노동 과정-매뉴팩처로부터 근대산업으로의 이행 과정에서 마르크스의 분석

 

 

- 근대산업으로의 이행 과정

① 기계의 도입

② 근대산업에 있어 숙련노동을 미숙련노동으로, 남성을 여성으로, 성인노동을 소년노동으로 대체하려는 경향.

③ 여성과 어린이의 고용. 남성 노동자들의 기계발전에 대한 저항을 무화.

④ 공장 밖 생산. 여성과 어린이가 고용되는 새로운 형태의 가내공업.

⑤ 여성과 어린이의 고용은 새로운 형태의 가족과,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새로운 관계가 등장.

 

 

- 자본이 여성을 고용함으로써 갖게 되는 이익.

① 근대 산업이 가족 구성원 모두를 고용함으로써 재생산 비용이 인구의 모든 구성원에게 나누어지기 때문에 노동력 가치가 낮아지는 경향. 노동자의 재생산 비용이 줄어들면서 잉여가치가 증가.

② 여성 고용으로 상품의 수요가 증대하며 순환 과정이 빨라진다.

③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남성 노동자의 저항을 무너뜨린다는 점.

 

 

- 여성 노동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① 여성의 낮은 훈련 비용. 노동력 재생산 비용도 낮다.

② 여성은 재생산 비용을 부담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져 여성의 노동력은 상대적으로 낮은 가치. 이것이 여성은 가족의 부차적 수입원이고 남편의 임금이 가족의 재생산 비용에 책임이 있다는 가정 때문에 여성 임금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아진다는 것에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라고 설명. 남편과 아버지가 없는 경우에도 여성의 위치는 가부장적 구조에서의 가족 개념으로 규정.

 

 

2) 산업예비군 이론

 

(각주-산업예비군의 정의 1) 유동적 산업예비군의 노동자들은 때로는 근대산업의 중심부에 유인되어 들어가고 때로는 밀려 나간다. 이것은 대부분의 근대산업이 숙련노동자를 미숙련 노동자로, 남성을 여성으로 그리고 성인을 아동으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2) 잠재적 산업예비군은 자본주의적 농업 방식의 침투에 의해 농토에서 추방된 농업인구 가운데 존재한다. 3) 정체적 산업예비군은 가내공업 등에 비정규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로 구성되는데, 그 성원은 근대산업과 농업의 임시 고용인으로부터 충원된다(베로니카 비치, “여성과 생산”, 『제3세계 여성노동』, 여성평우회 편, 창작과 비평사, 1985)).

 

- 맑스는 노동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때에 노동자로 하여금 임금과 고용조건에 대해 협상할 능력을 차단하는데 산업예비군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 “가장 마지막으로 고용되고 가장 먼저 해고되는” 노동자군.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있고 임금이 상승될 위험이 있을 때 임금노동에 충원될 수 있고, 그런 다음 이 수요가 감소하고 실업이 증가하는 불황의 상태에서 잉여노동자가 된다(기혼여성).

 

 

비판) 남자보다 먼저 여자가 일자리를 잃는 과정을 결정짓는 것이 자본이라고 생각한다면, 남자보다 낮은 임금으로 고용될 수 있는 여성을 먼저 그만두게 하는 것이 고용주의 이익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경험적인 증거들이 이 이론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성별 직업분리를 설명하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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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 답답해서...

호흡 열번에 한번꼴로 한숨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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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필요없다....

 

사진 한장이 대변하는 현실.

ㅋㅋㅋ

 

어디선가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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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페미니즘 척결 - 가부장제와 싸운다는 주류 페미니즘은 실은 <자본주의 선전장치>의 성실한 일부

  ▣ 사회주의정당건설운동 ▣ 주류 페미니즘 척결 - 가부장제와 싸운다는 주류 페미니즘은 실은 <자본주의 선전장치>의 성실한 일부
    혁사 무당파
    33625 51  /  10
    2008년 12월 30일 15시 03분 46초  

주류 페미니즘이 그런 저급한 사회의식에 머무는 실제 이유는 그 페미니즘의 주인공들이 작가, 언론인, 교수(강사) 따위 '중산층 인탤리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적 억압의 보다 분명한 피해자인 하층계급 여성의 고통을 이해할 만한 처지에 있지 않으며, 그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단지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사회적 억압인 성적억압을 '남성일반과의 문제'로 만드는 데 열중한다. 건강한 싸움보다 나른한 카타르시스에 익숙한 그들은..


그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들에겐 유감스런 얘기겠지만, 내 주변의 진보주의자 남성들은 하나같이 주류 페미니즘(정확하게, 90년대 이후 한국의 주류 페미니즘)을 마땅치 않아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정치적으로 진보적일 뿐 여성이 처한 성적 억압엔 무감각한 형편없는 남근주의자들인 건 아니다. 그들은 적어도 '여성100인위원회'의 활동을 원칙적으로 지지하고 <밥꽃양>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을 분명한 사회적 억압의 하나로 파악하는 남성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른바 여성에 대한 성적억압과 싸운다는 페미니즘을 하나같이 마땅치 않아 한다.

나 역시 그들 가운데 하나다. '노력하는 마초'인 나는 주류 페미니즘을 몹시 마땅치 않아 한다. 내가 그 페미니즘을 마땅치 않아 하는 이유는 그들의 '사회의식'이 분명한 사회적 억압의 하나에서 출발하면서도, 모든 건강한 사회의식이 갖는 인간해방운동의 보편성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사회의식이란, 단지 제 사회적 억압을 사회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만일 그런 게 사회의식이라면 '서초구민들'이나 '의사들'의 빌어먹을 호소도 사회의식일 테니), 제 사회적 억압을 통해 다른이의 사회적 억압을 깨닫고, 제 억압을 모든 사회적 억압의 지평에서 조망하고 겸손히 연대하는 보편적 인간해방운동의 상태를 말한다.

주류 페미니즘은 다른이의 사회적 억압에 정말이지 무관심하다. 이를테면 주류 페미니즘은 모든 사회적 억압의 출발점인 계급 문제에 대해 정말이지 무관심하다. 그들은 아마도 여성이라는 계급이 일반적인 의미의 계급보다 더 근본적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과연 그런가. 페미니즘을 둘러싼 해묵고 아둔한 논쟁이기도 하지만, 여성의 억압이 근본적으로 계급에서 오는가 성에서 오는가는, '중산층 혹은 상류계급 여성이 하층계급 남성에게서 억압 받을 가능성'을 살펴보거나 '중산층 혹은 상류계급 여성의 억압과 하층계급 여성의 억압을 비교'해봄으로써 간단히 알 수 있다.

주류 페미니즘이 그런 저급한 사회의식에 머무는 실제 이유는 그 페미니즘의 주인공들이 작가, 언론인, 교수(강사) 따위 '중산층 인탤리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적 억압의 보다 분명한 피해자인 하층계급 여성의 고통을 이해할 만한 처지에 있지 않으며, 그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단지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사회적 억압인 성적억압을 '남성일반과의 문제'로 만드는 데 열중한다. 건강한 싸움보다 나른한 카타르시스에 익숙한 그들은 그들이 증오해마지 않는 남근주의를 넘어서기는 커녕 흉내내며(이를테면, 한 대중적인 페미니스트 잡지는 가수 박진영을 '먹고 싶은 남자'라 지칭한다), 심지어 투항한다(이를테면, 한 도발 전문'페미니스트는 정치적 남성인 생리적 여성을 대통령으로 밀자고 주장한다).

나는 성적억압의 실체인 가부장제가 전적으로 자본주의에 의한 것이라 주장하는 덜떨어진 맑시스트가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본주의가 가부장제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가부장제의 기본 단위인 가족은,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기본 단위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좋은 여성'의 실제 임무는 오늘 노동력(남편)을 뒷바라지하고 다음 세대의 노동력(자식)을 양육하는 것이다. 자본은 남성에겐 노동의 일부라도 지불하지만 그들을 노동할 수 있게 뒷바라지하거나 양육하는 여성에겐 한푼도 지불하지 않는다. 자본의 입장에서 '좋은 여성'이란 얼마나 유익한가.

봉건사회의 관습인 듯한 가부장제가 근대사회(자본주의사회)에서 끈질기게 집행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 집행은 제도 교육, 미디어, 도덕 따위 이런저런 자본의 선전장치를 통해 마치 공기를 마시듯 뱃속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가부장제와 싸운다는 주류 페미니즘은 실은 그 선전장치의 성실한 일부다. 유한하기 짝이 없는 그들은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사회적 억압을 일반화하여 카타르시스하는 데 열중함으로써, 모든 여성이 제 억압을 통해 보편적 인간해방운동에 이르는 정당하고 필연적인 기회와 가능성을 성실하게 차단한다. 그 페미니즘은 그저 남근주의의 이면이다.

(김규항, 씨네21 2002/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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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거리에 대해서

어김없이 그날이 왔다.

어차피 이 묵직한 괴로움과 쿡쿡 찌르듯 갑자기 엄습하는 통증을 무시할 수 없는 김에

달거리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사실 난 달거리라는 말을 안쓴다. 생리한다 그러지. ㅎㅎ)

 

생리 기간에 여성들이 겪는 불편함은 개인차가 매우 크다.

어떤 사람은 사나흘, 가끔 생리대를 갈아야 하는 수고만 해주는 것으로 족한 반면,

중학교 때 내 친구처럼, 한달에 이틀은 조퇴나 결석을 해야 할 정도로

사람을 영 제정신이 아니게 될 지경으로 괴롭히는 그런 월경도 있다.

 

당연히 산부인과학에서는 이것을 병으로 정해놓고

병태생리니, 증상에 따른 치료법이니 하는 것들을 모색해놓았다.

그러나 어떤 것도 속 시원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그저 '대부분'의 사람들에서 '참을 만할 정도로'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앞에서 예로 든 내 친구는 자궁을 들어내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웬만한 약이나 치료에는 반응하지 않는

못돼먹은 월경곤란을 겪고 있었다.

 

내 것 같은 경우는, 매달 그 정도가 다르기는 하지만,

대략적인 패턴을 가지고 찾아온다.

월경 전날은 기분이 매우 울적해진다.

그리고 비관적이 된다.

 

예전에는 이 심리상태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

다음날이면 잠잠해질 우울감에 힘들어했었는데,

이제는 '이게 호르몬 때문이겠거니...' 하면서 슬~쩍 무시하고 피해주는 식으로

전술을 바꿨다. 주로, 자버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우울이 덜 힘들어진 건 아니다.

 

신체적인 증상으로는 아주 다양한 것들이 있다.

소화기계증상- 복통, 복부팽만, 소화불량, 오심, 변비 또는 설사

신경계 증상- 어지러움, 실신전조증상, 심하면 실신도 한다.

전신부종, 다리로 방사되는(즉, 다리까지 아픈) 요통,

그 기전이 궁금한 항문통증...(대체 이건 왜생기는걸까? 짧고 강렬한 이 통증은 그 강도가 10점만점에 9점이다.)

 

그렇다. 장난 아니다. 남들보다 좀 심한편이긴 하지. 이걸 어떻게 견디냐구?

다행히 이제는 약을 먹으면 저것들 중 일부는 웬만큼 조절이 된다.(원래 생리통은 나이가 들면서 좀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청소년기 때는 생리가 다가오는게 공포스러웠다. 양호실 신세도 꽤 많이 져봤다.

 

수업 중에 양호실에 가고싶다고 선생님께 말씀 드리면,

남자선생님들은 대체로 묻지 않고, 혹은 묻다가도 학생이 쭈뼛거리면 대충 눈치 채고 보내주셨다.

누가 가르쳤는지 몰라도, '생리통때문에요' 라는 답은 금기시되었다. 심지어 여선생님한테도.

 

우리는 그 말을 쓰는걸 언제부터 금지당했나?

 

생리, 생리대, 생리기간, 생리통.

 

이 말들은 여중 여고에서조차도 마치 암호같은 다른 말들로 대체되어 쓰여졌다.

 

생리는 '그거'

생리대도 '그거' 또는 엄지 검지 손가락을 직각으로 만들어 네모 모양을 흉내내며 '이거 있어?' 라고 하고,

생리기간은 '마법에 걸렸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생리통 때문에 하루종일 골골대며 엎어져 있는 친구를 가리키며,

'쟤 어디 아퍼?' 이러면 짝꿍이 대답해준다. '아... 있잖아... 그거땜에' 그럼 대충 아~ 하고 알아듣는다.

 

근데 그런 암묵적인 규칙들을 따르면서도, 문득 문득, 근데 왜 이말을 안쓰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 금기를 깬 것은, 의외로 대학교 와서였다.

 

대학에서 워낙 인간의 신체와 생리(physiology)에 대해서 까놓고 배우다보니

생리를 포함한 온갖 생리현상에 대해 사회에서 습득한 관념과 부끄러움이 사라져버린거다.

이건 고정관념을 극복했다기보단 상실한 것에 가깝다.

남자 동기녀석하고 있을 때도, '야, 너 오늘 어디 아퍼?' 이러면

'응, 생리통' 이러면 '어... 고생한다.' 이런 대화가 오간다.

그러나 그런 대화 직후엔 우리가 얼마나 예외적인 상황에 있는지를 떠올리게 된다.

생리통이라는 말을 듣고 바로 생리주기 그래프와 생리통의 치료가 뭐더라? 를 떠올리게 되는

특수한 환경 속에 있는 몇명하고나 나눌 수 있는 대화 아니겠는가. 다른데 가서 저런 버릇이 나와서 남들을 당황시키지 않으려면 조심해야 한다. 나의 여자 동기들은 거의 다 그런 일화들을 몇가지씩 가지고 있다. 금기시 되는 생리현상들에 대한 자동 회피 기재를 상실한 바람에 겪는 '분위기 싸~해지는' 경험들.

 

앗... 또 정해놓은 시간이 지나서 컴퓨터 앞을 떠야한다.

ㅜ.ㅜ

셤만 끝나봐라

빠이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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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컨테이너를 넘지 '못'했다

2008.12.27 쓴 일기>

 

명박산성에 대한 글을 읽고.

나도 그날 명박산성 앞에 앉아있었고, 수천명의 사람들과 같이, 그 명박산성을 어찌 할 것인가 토론하고 있었다. 내 생각은 이렇다.

 

 명박산성을 못 넘었네, 안 넘었네, 넘었어야 했다, 아니다 말들이 많다. 그에 대한 내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다. 우리는 못 넘은 것이었다. 우리의 사고가 허용하는 범위가 거기까지여서 라든가, 보수언론이 폭도로 매도할까 두려워서 스스로 결박한 거라는 얘기가 아니다. 스티로폼으로 넘어가자는 조끼 입은 사람들의 주장에는 나도 반대였다. 좀 더 솔직하게 보자. 스티로폼? 그걸로 어떻게 넘을 건데? 스티로폼을 보자마자 든 생각이다. 그걸 쌓고 올라갔다 치자. 어떻게 내려갈 건데? 밧줄? 사다리? 전국의 전경이 다 모여서 진치고 있는, 컨테이너 반대쪽에서는 어떻게 대응할까?
 결국 스티로폼은 하나의 쇼다. 넘어가려는 국민의 의지를 ‘보여주려는’ 몸짓인 거다. ‘쇼하기’에 익숙한 사람들의 아이디어인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광장에서 쇼를 해서 누구한테 보여주려는 것인가? ‘내일 이 사진이 신문에 크게 날’ 것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사람과, ‘저 컨테이너를 넘어서 청와대로 갈’ 것을 그리고 있는 사람들과는 여기서 갈린다. 만일 그 조끼 입은 사람들이 후자와 같은 목표에다가 능력까지 갖췄다면 어떤 그림이 나왔을까?
 그 때 필요했던 건, 스티로폼이 아닌 중장비들이었다. 기중기가 오고, 대형 화물 트럭이 와서, 그 컨테이너를 뜯어냈어야 했다. 나는 90%의 확신을 가지고, 만일 그랬더라면, 그날의 토론은 엄청난 에너지가 되어 컨테이너를 허물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위의 명박산성 스티로폼 회의에 대한 생각에 이어…
앞으로 나올 촛불이 명박산성을 넘는다면 어떤 그림이 나올지 떠올려본다. 먼저 필요한 조건들.
 
조건>
0.   직접민주주의의 발현이라는 성격을 살려내어야
1.   자발성
2.   소통
3.   실천 의지
4.   조직력, 혹은 연대
5.   집단’지성’
6.   적의 상상력을 뛰어넘을 것.
7.   물리적인 성공 가능성
 
스티로폼 회의 때처럼, 일단 사람들이 명박산성 앞에 다수 모여있다. 모두들 명박산성을 넘어가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하며, 어느 정도 희생의 각오가 된 사람들이 필요함. 이들의 숫자는 그렇게 많을 필요는 없음. 일이 시작된 후 행동파로 전환 될 사람들은 이들보다 많을 것임. 동의의 강도와 행동의 강도에 따라 (행동의 강도와 실현 가능성이 동의의 강도를 결정지을 수 있음을 감안할 때, 이 두 가지가 매우 중요.) 일이 시작됐을 때 군중의 숫자가 결정될 것으로 생각함.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물러설 수 없음을 모두가 공감한다. 이에 대해 여러 사람이 떠들기 시작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소조직들의 경우 두셋이 합쳐지기도 하면서 무리를 이룸. 이들이 토론을 시작함. 일부가 이야기하고 일부는 듣기만 함. 박수와 야유가 나올 것임. 마이크와 앰프 장비가 없다면 가청거리를 한계로 하여 토론장이 마련될 것이며, 사람이 많다면 몇 개의 토론장이 형성되어 이들 사이에 소통과 자문의 연결이 자연히 형성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우리에겐 핸드폰이 있거덩. 친구들끼리 ‘너는 저 쪽가서 들어봐 나는 여기서 들을게’ 해서, 서로 다른 그룹에서는 어떤 내용이 나오고 있는지 타진한 후 한 무리에서 나온 좋은 의견을 다른 무리에서도 낼 수 있음. 즉, ‘[펌]’ 하는 것.
혹시 스티로폼 의견이 나오면 이에 대한 반대 의견이 나올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지난번 예에서 봤듯이 성공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그 근거. 그렇다면 가장 성공할 가능성이 큰 방법론에 대한 모색이 시작될 것임.
노조에서 희생을 각오하고 나선다면 좋겠으나, 이것은 무리라고 봄. 개인적으로 실천하기에 매우 어려운 일인데다가, 지금 노조에서 조직적으로 그런 힘을 동원할 것 같지도 않음.
그렇다면? 모금을 해서 장비를 빌리거나 사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온다. 사람들의 절박함(쥐새끼를 끌어내리겠다는 의지의 세기에 더하여 다른 방법이 없다는 절박함이 필요)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저것을 넘어서 성공적으로 청와대로 갈 수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 내려지기까지, 상당히 긴 토론이 필요할 수도 있음. 당연히 길어지면 좋지 않음. 이 결정이 내려지기까지의 시간은, 집단 분노 게이지의 영향을 많이 받을 것으로 보임. (만일 그 전날 경찰이 누구 하나 죽였다면… 게이지 만땅인거다)
모금에는 당연히 얼굴이 좀 알려진 사람, 공인에 버금가는 인물이 필요하다. 미쳤다고 수천만원이 될 돈을 아무한테나 맡기냐. 아고리언은 냉정하(해야한?)다. 혹시라도 누군가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장비가 있으니 가져오겠다, 고 하더라도 그 인물에 대한 최소한의 검증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프락치가 자기가 가져온대 놓고 토끼면 기다린 사람들이 대략 새된다.) 이것은 역시 인파 중에 섞여있을 기존에 노조에서 활동하는 알려진 사람들에 의해 가능할 것이며, 간부급인 사람들은 즉석에서 노트북을 가진 사람들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신원 조회가 가능하다. (이러한 인증단(means just 인증작업을 하고있는 사람들. 권위따위를 가진 ~단 이 아니라)이 신속히 만들어질 수 있음)
아 참, 낮일 것.
중장비를 사용하기로 결정이 났다면, 필요한 물건들이 무엇이 있으며, 어디서 어떻게 조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필요하다. 건설노동자들, 중장비 운전자격증 소지자들이 모일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이러한 기계를 취급하는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겠고, ‘울 아빠가 포크레인 모세요’ 하는 여고생도 있을 수 있다. 아무튼, 이런 사람들은 따로 모여서 더 빠르고 정확한 synergetic한 토의를 해낼 수 있다. 이는 3~40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었을 때 매우 생산적일 것이다. 마치 깃발 회의를 할 때처럼 모이는 거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이들, 갑자기 주요인사가 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미리 구성된 투쟁조직들- 예비군단이나 전대협 등등-이 이들의 안전을 위해 주위를 에워싸고 이동 시에 동행하기로, 소회의에서 결정될 수 있다.
 
한두시간이 걸리겠지. 기다리는 동안도 우리는 뭔가 할 것이다.
일부 기술자들은 일반 시민들이 해줬으면 하는 일들을 (힘 쓰는 일. 마력 대신 인력이다….ㄷㄷㄷ) 또는 필요한 것들을 얘기하고 모집한다. 이 인력들에 대해서는 짧은 교육도 이루어진다. 인터넷으로 즉석에서 거의 전문지식에 가까운 산성 뜯어내기 전략이 세워질 수 있다. 만일 CCTV와의 연계가 가능하다면, 경찰력이 있는 산성 너머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있는지 정보를 알아낼 수 있고, 이것은 산성 해체와 그 후의 돌격 작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암튼 역시 인터넷은 여기서도 엄청 큰 힘을 발한다.
 
마침내 장비들이 도착한다.

 

 

섬망과 같은 수준의 꿈인가?

잠이 들기 직전 상태의, 환상과 현실이 뒤죽박죽 섞인 이상한 꿈...

아... 내가 상상한 이 장면이, 이 큰 흐름에서 얼마나 작은 부분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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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Merry Greece 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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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나온 대운하

 

 

드디어 대운하가 꿈에도 나오셨다.

대략 악몽이다.

 

누구는 대운하에서 물놀이하고

관광 유치해서 돈벌어먹고

 

누구는 살다 살다 거기에 뛰어들고...

 

심지어 '대운하에서 자살금지', '발생시 유가족에 과태료 부과'

이유? 외국인 관광객 떨어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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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그리스 사회주의자가 말하는 그리스 반정부시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