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1차시)
[공룡 공간수업 " 취중공간" ]
다들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 사실...
나의 지난 2-3년 동안의 개인적 공부의 핵심키워드 중의 하나였던 공간에 대한 관심과 공부들.......
그리고 그러한 공부들을 공룡식구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던 욕망......
그럼에도 선뜻 제안하거나 시도하지 못했던 망설임....
그래서 알코올의 힘을 빌려서......ㅎㅎ
가장 중요한 것은 영은이의 도발(??...ㅎㅎ)
"공룡에서 공간수업을 하면 어때요 ?..."라는 한마디에 용기를 내서
그렇게 공룡에서 공간 수업을 하기로 했습니다....ㅎㅎ
이름하여
"취중공간 醉衆空間"
여튼 그래서 지난 주 토요일
즉, 2010년 7월 10일 저녁 9시
공룡의 미완성 공간중의 하나인 도서관 "모르페우스"에서 첫 수업을 하였습니다...ㅎㅎ
첫수업은
우리는 공간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
우리는 기본적으로 공간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만큼 공간은 단순히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삶의 무대
라는 것이지요
그런 공간을 우리는 어떤 식으로 인식하고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게 되는지가
첫번째 이야기의 주제였습니다.
그러면서 전체적으로 이런 인식론으로써의 공간을 어떻게 이야기할까 고민하다가
가장 손쉬운 방식 즉, "보다(see)"라는 시각에 의한 읽기의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 미술에 있어서 회화를 보고 받아들이는 인식의 문제 혹은
회화에서 어떤 식으로 구조화 되느냐 하는 문제에 따라서 건축은 어떻게 회화에서 보여주는
시각의 구현에 적응하는가 하는 문제로 설명하려고 했답니다. ...
(이 설명은 실은 매우 난감한 문제가 있었는데 무엇이냐면 제가 미술에 대한 이해가 매우 조
잡하다는 것
그래서 설명하는 내내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이지요....^^;;....ㅎㅎ)
여튼 그렇게 미술 그중에서도 회화, 조각, 건축을 중심으로 공간을 인식하는 문제에 대한
수업을 진행했습니다...ㅎㅎ
여튼 지난 주 수업에서 있었던 내용을 바로 정리하질 못하고 무려 일주일이나 묵힌 덕에
자세하게 정리하질 못하겠지만 여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공룡 공간수업 1차시 _ 100710
공간으로서의 건축을 어떻게 그리고 왜 보아야 하는가??
작성 : 박영길
필요성
-- 대중은 회화와 음악, 조각과 문학에는 관심을 갖고 있지만, 건축에는 관심이 없다. 피카소의 그림이나 엘뤼아르의 시를 모른다는 사실로 창백해지는 지성인이 르 코브지에나 미스 반 데어를 모른다고 말할 때는 아주 스스럼없다.
-- 신문들은 신간 혹은 전시회에 관해 지면을 할애하지만 새로운 건물의 건설 따위는 무시하며 심지어 그 건물이 어떤 유명한 건축가의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그러하다. 내로라하는 모든 신문은 음악, 연극, 영화에 대해서는 매일 보도하거나 또는 최소한 주마다 예술란에서 다루는 반면에, 건축은 아주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 좋은 건축을 알리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 존재하지 않듯이, 공포감을 줄 건물의 건설을 막을 효과적인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와 서적에 대해서는 어떤 정해진 검열이 있지만, 건축과 도시의 불법행위 즉, 포르노 소설의 출판보다 더욱 심각하고 영속적인 결과를 지닌 행위를 방지하는 수단이 없다.
-- 그렇지만 누구나 라디오를 자유로이 끄고, 자유로이 음악회를 포기하고, 영화관과 극장을 자유로이 멀리하고, 책읽기를 자유롭게 멈출 수 있는 반면에, 도시생활환경을 형성하고 시골에 인간의 특징을 부과하는 건물들을 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기반으로 건축공간 혹은 통칭 건물이라는 이름의 무엇인가를 소유하거나 점유하여 살아간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나치게 이러한 건축공간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시계획자 혹은 권력자들은 그러한 건축 혹은 공간의 힘을 빌려 우리를 배제하거나 통제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 충북도경찰청, 법원과 검찰청 청사, 국민연금관리공단건물 및 무수한 최근의 공공건물들)
그렇기 때문이라도 우리는 언제나 건축 혹은 공간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가령 청주의 경우 공공건물들이 추구하는 지나치게 거대한 스케일과 그러한 스케일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위압적이고 간혹 배제하고 소외시킨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쉽게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최근 엄청나게 거대하게 새워지는 공공건물들을 보면 과연 저런 식의 거의 고통스러워 보이는 건물들이 청주라는 고유한 도시의 이미지를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훼손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공해에 가까운 건축들에 대해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곤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건물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청주의 젓줄이라는 무심천의 경우 하상도로 건설과 하상주차장 건설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은지 얼마되지 않아서 이번에는 무심천 자연형 하천으로의 복원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서 지금처럼 어정쩡한 하천으로 만들어 놓은 과정에서 당시의 시장이라는 지방자치단체장은 바뀌었지만 그런 정책을 수행한 도시공학계획자나 정책을 입안한 사람들 다수는 언제나 양쪽으로 돈을 번다. 하상도로 건설로 돈을 벌었던 몇몇 도시공학전문가는 하천 복원사업으로 다시 돈을 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들은 어떠한 재제도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이는 건축가들이 공공건물을 수주받아서 행하는 행태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들은 그저 건축과 공간의 기획에서 자본에 따라 움직이는 지극히 속물적인 자본가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에 대한 어떠한 책임과 관심도 없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떻게 건축 혹은 공간을 인식하는가?
혹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우리가 시각을 이용해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
가령 우리가 가장 일반적으로 보게 되는 회화와 조각과 건축은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
건축의 주역 -- 공간
건축의 표현 -- 평면도, 외부와 내부의 외관, 단면도 등등
==> 우리가 건축 혹은 공간을 일상적으로 인식하기 힘든 것은 건축 혹은 공간을 표현하는 방법 자체가 별다르게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하게 접하게 되는 방식은 아주 간단한다
그것은 몇몇 건축업자 혹은 공사를 직접적으로 담당하는 기술자들을 위한 도면으로 표현된다.
우리가 흔히 공간 혹은 건축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또 접하게 되는 것은 위의 두 사진일 것이다. 최근 3d형식의 입체적인 조감도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여튼 이러한 도면들을 보고 우리가 흔히 공간 즉, 비어있어서 우리들이 경험하고 살아가게 되는 공간 자체를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 그러나 건축은 공간을 에워싸는 구조요소들의 폭, 길이, 높이의 총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것 그 자체, 즉 인간이 그 안에서 생활하고 움직일 수 있는 에워싸인 공간에 존재한다.
==> 건축은 결국 비어있음으로써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작업이다. 즉, 여섯개의 면을 이용하여 에워싸인 공간을 만들어내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가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건축이 만들어 내는 공간을 인식하여야 하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부분에서 우리가 건축을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는 것이다. 비어있음을 보여준다는 것, 그리고 비어있음을 인식한다는 것은 결국 단순한 시각적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닌 전혀 다른 인식의 방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 결국 공간을 인식한다는 것은 평면도나 단면도에서 보여지는 공간의 배치나 벽 혹은 지붕들의 존재여부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 곳에서 움직일 수 있는 우리들의 몸의 흐름이나 시선들의 흐름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에 대한 적절한 표현 수단은 우리에겐 없다.
-- 건축에서 내부 공간, 즉 어떤 형태로도 완벽하게 표현될 수 없고 오직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만 포착되고 느껴질 수 있는 공간이야말로 건축의 주역이다.
==> 이렇게 단순히 보여지는 것으로서의 ㅇ니식은 참다운 공가느이 인식이 아니라는 것, 공간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직접 체험하고 경험하며 그 공간안에서 사건들을 창출하여야 한다는 것은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경험되지 않는 공간을 보여준다는 것은 실은 그 자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 공간을 파악하는 것, 즉 공간을 보는 방법을 아는 것이 건물을 이해하는 비결이다.
건축이 가지고 있는 몇 개의 차원
회화는 근본적으로 2차원이다. (평면)
==> 우리가 흔히 접하는 미술로서의 회화는 2차원 즉, 평면적이다. 눈에 보여지는 그대로 옮겨지는 것으로써의 회화는 그래서 철저하게 시각적인 인식이다. 이는 회화가 가지는 근원적인 한계인지도 모른다. 본다라는 것이 가지는 지나친 단순성은 결국 삶을 불연속적인 장면으로 만들고 마는지도 모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등장하는 것이 투시화법의 발견 - 15세기 르네상스 화가들로 하여금 마침내 그들이 건축의 여러 차원들과 그 재현 수단에 정통하게 되었다고 믿게 했다.
==> 이는 아마도 평면이 보여주는 현실이 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닌 그 자체가 심히 왜곡된 현실이라는 인식이 가능해지면서 일것이다. 좀더 생각해 보면 실제 현실과 삶은 평면이 아닌 입체적인 구조 즉, 원근감을 가지고 있고 그 속에서 시간과 공간이 얽혀있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혹자의 말처럼 중세의 암흑시대 즉, 삶을 지나치게 종교적으로 박제화 시키는.... 그래서 다이나믹하고 연속적이고 다층적인 삶의 모습을 철저하게 획일적이고 불연속적이며 단순화 시켜버리는 이전의 화풍에서 이제 보다 입체적인 표현이 가능하고 인식이 가능해진 투시화법의 등장은 단순히 회화의 문제가 아닌 건축과 심지어 삶의 태도 마저도 바구어 버린 일대 사건이었다.
여기서 투사화법에 대해서 조금더 알아보면
투시화법의 발견은 곧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옮겨가는 아주 혁명적인 사건이었다는 거다.
투시화법 이전 건물은 평면적이고 찌그러지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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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시화법 이후 -- 건축은 3차원을 가진다고 믿어 졌으며 이를 투시화법을 이용하여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당시 건축가들은 화가와 함께 작업...제도사 (제도사는 이후 1890년대에 사진사들로 대체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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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시도가 보편화 될 때 새로운 차원 즉, 4차원이 발견됨
=> 모든 것이 비판적으로 명확하고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보였던 바로 그 순간에, 인간의 정신은 투시도의 3차원 위에 또 네 번째 차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1차 세계대전 바로 이전에 발생한 공간 개념에 있어서의 입체파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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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파 -
"나는 한 대상 예를 들어 상자 혹은 탁자를 보고 표현한다. 나는 한 시점에서 그것을 본다. 그러나 만약 상자를 쥐고 그것을 회전시키거나 혹은 탁자 주위를 거닌다면, 나의 시점은 변화하며 각각의 새로운 시점에서 그 대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투시도의 3차원으로 그것을 표현한다고 해서 나타나 지지는 않는다. 그것을 완벽하게 포착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시점에서 무수히 많은 투시도를 그려야만 한다."...세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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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에 따른 시각의 이러한 연속적인 전위는 전통적인 3개의 차원에 새로운 차원을 첨가시킴 그래서 시간은 "제 4의 차원"이라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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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차원에 대한 입체파의 정복은 입체파 회화에 대한 미적 평가가 어떠하든가 간에 막대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다. 우리는 비록 파카소의 그림들을 싫어하면서도 제 4의 차원이 지닌 가치를 인지하는 일은 가능하다. 제4의 차원은 프랑스 및 독일의 현대운동 초창기에 입체주의자들의 회화 언어가 건축용어로 바뀌었다는 사실 때문 이라기보다는 진정한 건물들과 도면상의 건물, 즉 건축과 무대디자인 사이의 비평적 구분에 그것이 제공해 주어 온 과학적 원조 때문에 건축에 결정적으로 적용되어 왔다.
==>
따라서 제 4의 차원, 즉 발견하기 위해 그 내부를 걷는데 필요한 시간 없이도 경험되어지고 이해되어지는 건축 작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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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원에 대해서
회화에서 제 4의 차원은 대상이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 즉 화가가 관찰자 측에다가는 물리적인 참여를 요구하지 않은 채 평면위에 투영하려고 선택하는 그 실체의 한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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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에서 형태의 움직임은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조상(彫像)이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이며 그것을 우리는 시각 및 심리적으로 다시 체험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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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서 우리는 전적으로 구체적인 현상(現象)과 관계하고 있다. 여기서 건물 내부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일련의 연속적인 시점에서 그것을 연구하는 인간은, 통합된 실체를 공간에 부여하면서 소위 4차원을 스스로 창조한다. 공간이라는 현상은 건축에서만 구체적인 실체가 되며, 따라서 독특한 성격의 구성요소가 된다.
==>
오늘날 주어질 수 있는 가장 정확한 건축의 정의는 내부공간을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건축은 샤르트르대성당의 경우에서처럼 그 안의 내부공간이 우리를 매혹시키고, 고양시키며,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건축일 것이다. 추한 건축은 그 내부공간이 우리를 넌더리나게 하고 내 쫓는 건축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일은 내부공간을 지니지 않은 작품이 건축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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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 관한 미적 견해에 찬반을 결정하는 것은 내부 공간, 즉 우리를 에워싸고 포함하는 공간이다. 나머지 전부는 중요하거나 혹은 중요한 것일 수 있다고 우리는 말해야 하지만, 항상 공간적 개념과의 종속관계에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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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에 대한 후기(??)...ㅎㅎ
*. 한번쯤은님의 [2010/07/11 - 공간수업] 에 관련된 글.
*. 공미교 웹싸이트에 수업에 제출된 텍스트가 첨부되었고 간략한 수업일지가 올라 있습니다..ㅎ
(수업 스토리텔링 게시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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