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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통 동수의 세월호 증언 3 – 세월호가 넘어가던 순간과 긴박했던 구조활동

~꼴통 동수의 세월호 증언 3 – 세월호가 넘어가던 순간과 긴박했던 구조활동


세월호 사고에 대한 김동수씨의 증언이 세 번째 자리를 가졌습니다.
이날 모임에는 인터넷으로 소식을 접하여 새롭게 참여하신 분도 계서서 그날의 참상을 함께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을 보태주셨습니다.


김동수씨는 먼저 세월호가 인천-제주노선에 신규로 투입된지 얼마 되지 않아 선장과 선원들이 배에 이상을 느껴 집단으로 사직을 했었던 상황을 전해들었었다는 점을 지난 얘기에 대한 보충으로 얘기했습니다.
김동수씨가 알고 있는 세월호의 구조에 대해서도 간단히 설명을 했는데
1층에는 철근, 목재를 비롯한 여러 화물과 무거운 중량의 화물차 등이 실렸고
2층에는 나머지 화물차와 승용차 등이 실렸습니다.
차량들은 바퀴에 버팀목을 하는 것으로 간단히 고정했고, 화물차들은 앞뒤로 하나씩 와이어로 묶고 바퀴에 버팀목을 넣었다고 합니다.
3층에는 화물기사 숙소, 직원 숙소, 일반인 객실 등이 있었고, 선수 갑판쪽에는 컨테어너 등을 비롯해 가벼운 화물이 실려있었습니다.
그위로 4층과 5층에도 일반인 객실이 있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아침에 식사를 마친 김동수는 8시 46분경 부인인 김형숙씨와 간단한 통화를 하고 난후 숙소에서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배가 급회전을 하면서 쿵쿵쿵거리며 기울어졌고, 그에 미끄러져 내린 김동수는 창밖으로 콘테이너를 비롯한 화물들이 바다에 떠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잠시 후 가만히 선내에서 대기하라는 선내 방송이 나왔지만 직감적으로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김동수는 사람들에게 구명조끼를 나눠주고 밖으로 나가자고 얘기했습니다.
그렇게 3층 후미 쪽으로 나와서 난간을 붙잡고 상황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상황을 좀 더 살펴보기 위해 난간을 붙잡고 4층으로 뛰어올라서 주변을 봤을 때, 해류와 반대편 방향에 유조선이 한 대 떠있었을 뿐 주변에 선박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배의 상태도 기우둥한채 모습을 보인 바닥면에는 특별히 이상한 모습이 없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배가 조금 기울어진 상태여서 어렵지 않게 구조될 것으로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사진을 찍어 마라톤동우회 밴드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9시 15분 경 헬기가 도착해서 상공을 선회하기 시작했고, 김동수씨는 4층 중간지점에서 2~3명이 커튼으로 사람들을 끄집어 올리는 모습을 보고 그곳으로 다가갑니다.
그때 커튼으로는 구조가 어렵다고 느껴 일반호수로 다시 구조를 진행했으나 그 호수마저 늘어나버려 구조가 순조롭지 못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 가져온 소방호수를 던져 사람들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는데, 미끄러워서 구조활동이 잘 되지 않아 호수를 몸에 감고 사람을 끌어올렸습니다.
당시에는 통로로 나와있는 사람들만을 끌어올리고 있었는데, 10여 명 정도 끌어올리자 통로에 사람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문이 닫혀 있는 방에는 사람들이 없는줄 알고 좀더 앞쪽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앞쪽으로 이동했더니 80여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보였는데, 배가 기울어진 상황에서 8m정도 되는 경사로를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김동수는 기둥에 소방호수를 묶고 사람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는데, 어린 학생들이 힘들어서 올라오지 못하자 인근에 있던 소방호수를 하나 더 연결해서 두줄로 잡고 올라오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때 헬기에서도 본격적인 구조가 이뤄지기 시작했는데, 처음에 헬기에서 해경 몇 명이 내려와서 상황을 살피고 올라간 이후부터는 해경은 사람이 타지 않은 빈바구니만 내려줬습니다.
그런데 난간 등의 구조물 때문에 바구니를 내리는 것도 힘든 상황이라 사람들을 끌어올리던 김동수가 직접 난간으로 가서 바구니를 잡고 바구니에 사람을 올려 태워야 했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왔다갔다하면서 구조를 하고 있는데 3층에 물이 차기 시작하면서 의자 등이 떠더니는 모습을 보면서 점점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음을 느꼈고, 그에 더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끌어올립니다.


당시 4층 앞쪽 통로에 나와있던 80여 명 중 10여 명이 구조된 상황이어서 그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구조할 것이라는 판단하고 김동수씨는 다시 뒤쪽으로 이동해 다른 사람들을 구조하려 합니다.
이 상황을 떠올리면 김동수씨는 “그때 누군가 상황을 지휘해서 한 두 명이라도 통로로 들어가서 구조를 했으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구조됐을 것이다”며 강한 안타까움을 표했습니다.


그러던 중 배는 더욱 급속히 기울어져 점점 구조는 어려워졌고, 김동수씨는 그 과정에서도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었던 사람들의 안타까운을 얼굴들을 바라봐야만 했습니다.
그 순간 학생들이 “아저씨, 아이 구해주세요”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통로쪽으로 다가가 아이를 잡고 구조보트에 넘겨줬습니다.


배가 너무 많이 기울어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자 마지막으로 바다로 뛰어들어 어선에 올라탄 후 해경 123정에 옮겨지게 된 것이 10시 48분경입니다.
그곳에 올라타서 봤더니 세월호 선원 5~6명이 있었고, 이들은 여기저기 전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조된 승객들도 30명가량 있었는데, 학생들이 추워서 덜덜 떨고 있는데도 해경들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기만 했습니다.
김동수씨가 해경들에게 배에 사람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얘기를 했지만 해경들은 “곧 특공대가 와서 구조할거다”라는 말만 하고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11시 18분경 어선이 123정으로 다가와서 구조된 사람들을 옮겨 싣고 30분 가량을 달려 진도 팽목항으로 이동했습니다.
당시 연락을 받고 달려온 어선들에 의해 구조된 사람들은 근처 서거차도로 우선 옮겨진 상황이라 팽목항에는 많은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팽목항으로 옮겨진 30여 명 중 부상자들은 119에 싣고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구조하면서 팔 등에 상처를 입은 김동수씨는 우선 상태가 심한 사람들에게 119를 양보했습니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먼저 탈출하지 않고 사람들을 구조하는 일에 나서게 된 동기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김동수씨는
“평소에도 사람이 다치면 구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딸 또래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며칠 후면 배 타고 놀러가기로 했던 딸 생각이 나서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고 담담하게 얘기했습니다.
상황을 설명하면서 말이 빨라지는 것에 대해서도
“사고 이후 오랜 시간동안 국가와 부딪히다보니 마음만 답답해지고 그럴수록 더 마음이 급해져서 말도 빨라지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다시 떠올리며 얘기하는 심정은 어떠냐는 질문에는
“예전 같았으면 울화통이 터졌을텐데, 약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지금은 이런 얘기를 해도 특별한 감정이 들지 않는다”며 답답함과 담담함을 동시에 드러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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