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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저는 성민이라고 합니다.
제 얘기를 들으려고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첨부된 사진은 그동안 제가 살아온 삶을 그래프로 그려본 것인데요
먼저 이 그래프를 그리는 방법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가능하면 여러분도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도화지를 가로가 길게 놓아줍니다.
왼쪽 끝으로 길게 세로 선을 긋고, 가운데로 길게 가로선을 그어줍니다.
세로선과 가로선이 만나는 지점에 숫자 0을 적고, 위로 다섯 눈금을 표시해서 차례대로 1부터 5까지 써 넣고, 밑으로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해서 -1부터 -5까지 적어줍니다.
가로선으로는 자신의 나이만큼 눈금을 표시하시고, 중간 중간 자기가 알아볼 수 있게 숫자를 적어줍니다.
이제부터 자신의 삶을 그래프로 그리기 시작하는 거거든요.
내가 열 살 때 행복했으면 그래프가 위쪽으로 가고, 열다섯 살 때 불행했으면 그래프가 아래쪽으로 가는 식입니다. 아주 많이 행복했으면 5까지 가겠고, 조금 행복했으면 1이나 2정도가 되겠고, 반대로 조금 불행했으면 -1이나 -2로 내려가고, 심하게 힘들었으면 -5까지 내려가면서 그래프를 그리면 됩니다.
그 순간들을 그렇게 숫자로 나타내는 것이 쉬운 건 아니겠지만, 삶의 흐름을 그린다고 생각하시고, 특징적인 기억들을 중심으로 그리시면 될 겁니다.
너무 어렵게 고민하시지 마시고, 자기가 살아온 얘기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리면 됩니다.
제 그래프 굴곡이 좀 심한가요?
작은 종이에 압축적으로 그리다보니까 이렇게 되버렸습니다.
태어날 때 기억은 없기 때문에 0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저는 1969년에 제주에서 태어났는데요, 어릴 때는 그냥 즐겁게 지냈던 거 같아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저랑 여동생 셋이 제주시에 있는 방 두 칸짜리 집에 세 들어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운수노동자였는데, 택시 트럭 용달차 등을 운전하셨어요.
어머니는 집에 계셨는데, 아버지 수입만으로 살기가 어려워서 가끔 일본으로 돈 벌러 가시곤 했습니다. 제주도에는 일제시대나 해방 이후에 일본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집들이 종종 있었는데, 저희 외가도 일본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가끔 친지방문 명목으로 일본에 가셔서 몰래 가방공장 같은 데서 일을 하시곤 하셨거든요. 요즘 말로 하면 불법체류 이주노동자였던 샘이죠.
1~2년마다 그렇게 일본으로 돈 벌러 가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어려서 슬프거나 힘들다거나 그런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비행기를 보면 엄마 생각이 난다는 정도...
우리가 살던 동네는 제주시 외곽지역이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살았어요. 특별히 잘 사는 집도 없었고, 특별히 못 사는 집도 없고 그래서 동네 또래들과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들이 많습니다.
가끔 아버지가 술을 먹고 들어와서 어머니와 싸우다가 어머니를 때리시던 일이 정말 싫었는데, 그것 말고는 어렸을 때 기억들은 좋았던 기억들로 남아있습니다.
그 즐거웠던 기억들 속에 얼굴이 붉어지는 기억이 떠오르네요.
초등학교 1~2학년쯤이었던 것 같은데, 동네 아이들과 놀다가 여자아이들의 팬티 속에 손을 넣곤 했었습니다. 그 나이에 성에 대해서 눈을 떠서 그런건 아니고, 그냥 뭔가 은밀한 짓을 한다는 것에 대한 쾌감 비슷한 감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최초의 악행인 것이지요.
중학교 들어가면서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조금씩 생기기는 했는데, 제가 공부를 좀 하는 편에 속했기 때문에 중학교 때 까지는 그런대로 행복했었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제 악행에 대한 얘기를 해야겠네요.
중3 때 우연히 부반장을 하게 됐습니다. 당시에는 학교에 군대식 서열문화가 강해서 부반장이면 주어지는 권력이 만만치 않았거든요. 처음으로 그런 권력을 가져본 저는 알게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지요.
어느 날 선생님의 지시로 뭔가를 검사했던 것 같은데, 무슨 이유에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친구가 제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순간 화가 난 저는 그 친구의 뺨을 때렸습니다. 순간적인 제 행동에 그 친구는 당황해했고, 옆에 있던 다른 친구는 제게 강하게 항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뺨을 때린 친구가 집도 가난하고 약간의 언어장애가 있는 친구였다는 점입니다. 제게 주어진 권력에 도취되어 있던 저는 가장 만만한 친구를 상대로 권력을 휘둘렀던 거지요. 그게 제가 살면서 누군가를 때렸던 첫 기억입니다.
이제 슬슬 그래프가 밑으로 떨어지는데, 고등학교 때 부터였습니다.
무난하게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시험 보고 어느 정도 이상 성적이 되는 애들만 모아놓았으니까 당연히 중학교 때 성적이 나오질 않죠. 그래서 첫 시험 보고 충격을 먹었던 기억이 있고요. 부모님은 자식들을 믿는 편이라서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별로 주지 않으셨는데, 입시위주의 인문계 고등학교라는 것이 성적을 강조하기 때문에 공부와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았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억압적인 군대 분위기였습니다. 선생들도 그랬지만, 가끔 선배들이 점심시간 같을 때 교실을 돌면서 복장 검사하고 기합 주고 그랬는데, 그런 분위기가 정말 싫었어요. 정말 군대였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는 즐거웠던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여기 그래프가 급하게 떨어져서 -5까지 갔을 때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그때 용달차 운전을 하던 아버지가 실직을 하셨는데, 오랫동안 일자리를 찾지 못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지금의 제 나이보다 어렸던 나이였는데, 자식들이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면서 한참 돈이 들어갈 때 실직이 된 거였죠.
그렇게 몇 달을 보내시다가 결국 아버지가 일본으로 가셨습니다.
그동안 어머니는 자주 일본에 갔다 왔는데, 아버지가 일본에 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저는 철부지라서 몰랐는데, 그때 어머니도 파출부 다니고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철없는 저는 빨리 고등학교만 졸업해서 집을 벋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고...
암튼, 그렇게 아버지가 일본에 가셔서 석 달 만에 돌아왔습니다.
원래 친지방문 비자로는 석 달 이상 채류 할 수 없기 때문에 석 달이 기본이고, 그 기간을 넘어서는 숨어서 지내야 하는 거였어요. 어머니는 그렇게 숨어서 6개월씩 있다 오곤 했는데...
그때 돌아오시는 아버지를 마중하러 공항에 나갔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어머니랑 동생들이랑 같이 공항에 가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때 유명했던 ET라는 영화의 외계인처럼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저씨가 우리들을 향해서 환한 얼굴로 걸어왔어요.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아저씨가 아버지인줄 몰라봤어요. 그때 정말 놀랐어요.
일본에 가서 갈빗집에서 일을 했다고 하는 얘기만 하고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으셨어요.
지금도 가끔 그때 얘기를 하시면 자세한 얘기는 하시지 않고, 새벽에 졸리니까 커피를 많이 먹게 돼서 지금도 커피를 많이 먹는다고만 하시죠.
그 당시 환율로 만엔이면 10만 원 정도가 되기 때문에 석 달 동안 아버지가 벌어온 돈으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고 했는데, 문제는 다시 돌아와서도 일자리를 계속 구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아버지는 다시 술을 드시게 되고, 술을 먹고는 어머니와 싸우시고, 그러면서 어머니 때리고...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다보니까 아버지는 밤낮으로 술만 먹게 되고...
하루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왔는데 술 취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고 있더라고요. 순간 책가방을 던져버리고 파출소로 달려갔어요. 집에 강도가 들었다고 하고는 순경을 데리고 집으로 왔죠. 순경을 보자 아버지는 술과 흥분과 체념으로 충혈된 눈을 한 채 두 손을 내밀면서 “나 좀 잡아가세요”라고 말하고...
가출도 해보고, 경찰을 또 데려오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계속 이어지고...
후~
정말 지옥이었어요.
그때 생각하니까 또 가슴이 벌렁거리네요.
물 한 모금 마셔야겠네요.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더 나빴던 것은 그때 담임선생이었어요.
집안 분위기가 몇 달 동안 계속 그러니까 저도 자포자기 상태에서 시험을 망쳐버렸거든요.
중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던 애가 갑자기 전교에서 거꾸로 10등을 하면, 당연히 담임이 불러서 상담을 해야 하잖아요.
저도 너무 힘들어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선생이 모른 척 하는 거예요.
어느 날에는 부모님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부모님에게 무슨 편지를 쓰겠어요?
그런데 저는 “선생님이 내 편지를 보고 나를 도와주겠지...”하는 생각에 집안 얘기를 자세하게 썼어요.
그래도 그 선생은 쌩까더라고요.
그 선생이 국민윤리 담당이었는데, 그게 국민윤리였습니다. 나~ 참!
그렇게 힘든 한 해를 보내고 아버지가 운이 좋게 농협에 들어가게 되면서 집안 형편이 좀 풀렸어요.
제가 고3이었는데도 돈 벌러 어머니가 일본으로 가셨지만, 워낙 힘든 한 해를 보내고 나서 그런지 고3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어요.
그때는 내신과 학력고사 성적으로 대학을 들어가던 때였는데, 내신은 엉망이었지만 학력고사 성적은 서울에 있는 대학을 지원해볼 수 있을 수준이어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지원을 했지요.
솔직히 집에서 나가고 싶었던 생각이 더 강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지원했던 것도 있고요.
그런데 떨어졌어요.
부모님도 그렇고, 저도 당연히 재수를 생각했는데, 제가 서울에서 재수하고 싶다고 얘기를 드렸더니, 아버지가 잠시 생각을 하시다가 허락을 해주셨어요.
당시 집안 형편으로는 서울에서의 학숙비와 학원비를 감당하는 것이 좀 무리였는데, 저는 어떻게든 집을 나가고 싶었고, 부모님은 무리를 해서라도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제대로 공부시키고 싶었던 거죠.
그렇게 1988년부터 객지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숙을 하면서 대형입시학원을 다녔는데, 외롭고 힘들고 그랬어요.
그때 친했던 고향 친구가 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면 자주 만났어요.
그 당시 학생운동이 아주 활발하던 때였는데, 제 친구가 사회문제에 대한 얘기를 하곤 했거든요. 그러면 저도 괜한 자존심 때문에 지지 않으려고 논쟁을 하는데 매번 깨지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자존심은 더 상하고 그래서 대학생들이 보는 책들을 보기 시작했죠. 학원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에 사회과학 서적들은 보기 어려웠고, 사회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민중소설을 많이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옛날 제주도에 4.3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고...
나중에는 그 친구가 고향선배들이 만든 ‘4.3연구회’라는 사회과학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그 동아리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면서 운동권 문화도 접하고, 이해되지 않는 문건도 보게 되고...
그때 그 동아리 선배들이 PD계열이었는데, NL이 뭐고 PD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나는 PD다”라고 생각하고... 흐흐
암튼, 그렇게 재수생활 끝에 다시 시험을 봤는데, 또 떨어졌어요.
다시 시험에서 떨어지니까 약간 자포자기도 있었고, 운동권 물을 먹은 것도 있고 해서, 대학 가는 걸 포기하고, 군대 갔다 와서 공장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부모님은 전문대라도 들어가라면서 저 몰래 원서를 넣어버렸어요.
그래서 제주전문대를 다니게 됐고...
거기서 친구들 사귀면서 재미있게 한 학기 지내고 나니까 다시 4년제 대학에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름부터 다시 입시 학원 다니고...
그렇게 해서 삼수 끝에 대학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 그래프가 5까지 올라갔을 때가 대학 1학년 때였어요.
삼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에 군대영장이 연기가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 학기만 다니고 군대를 가야했기 때문에 한 학기 동안 정말 열심히 학교 다녔거든요.
아침 일찍 도서관에 가서 밤늦게까지 공부도 하고, 수업도 열심히 듣고, 미팅도 자주 나가고, 동기들이나 선배들이랑 술자리도 자주 갖고, 집회도 열심히 나가고...
군대에 가야했기 때문에 동아리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90년에는 큰 집회들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집회에 참가했어요.
90년 5월 9일이 3당 합당을 통해서 만들어진 민자당 창당일이었는데, 그때 엄청나게 큰 집회가 열렸어요. 저녁 6시에 서울시청 앞에서 집회가 시작됐는데,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면서 자정까지 싸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그렇게 한 학기를 마치고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눈이 나빠서 18개월 방위 판정을 받았어요.
아버지가 농협에 들어가면서 직장이 제주시가 아니라 시외였는데, 집안 형편도 좀 나아지고 출퇴근 문제도 있고 해서 외가쪽 도움을 받아서 시골에 집을 지어서 이사를 갔거든요.
그래서 방위 생활은 그 근처 파출소에서 출퇴근하면서 했는데 정말 편했어요.
주간과 야간으로 근무를 했는데, 근무가 없는 날에는 친구들도 만나고, 봉사단체 나가서 자원봉사도 하고, 책들도 많이 읽고...
그렇게 1년 6개월을 보내고 나서 제대하고 복학 할 때까지 6개월이 남았어요.
그때까지는 책으로만 사회문제나 노동문제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제는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해봐야겠다”는 생각만으로 작은 공장에 들어갔는데, 일이 너무 힘들어서 보름 만에 그만두고는 자괴감에도 빠져보고...
복학하기 전에 뭔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제주도에 있는 단체에 들어가서 잠시 활동도 하고...
그렇게 하다가 2학기에 복학을 했어요.
복학 하고는 동아리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운동권 동아리들을 살펴봤지요.
그래서 맑스철학연구회라는 운동권 분위기가 풀풀 나는 동아리랑, 소나무라는 사회과학 학회에도 들어가고...
집에 기대기 싫어서 독서실 생활을 했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수업이 없으면 동아리나 학회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술도 먹고 집회도 나기고 그랬는데, 그런 것도 없을 때는 갈 데가 없어요.
독서실은 칸막이된 책상이 전부거든요. 밤에는 의자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 밑에 이불을 갈고 자야하는 공간인데, 정말 잠만 자야하는 공간이었어요. 그래서 시간이 있어도 밖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잠잘 때만 가야해요.
동아리나 학회에서도 나이 많은 예비역이 들어오니까 1학년 후배들이랑은 친하게 지냈지만, 나이 어린 선배들과는 관계가 어색했죠.
결국 두 달 만에 휴학을 하고 고향에 내려왔죠.
잠시 방황을 하다가 연말에 대통령선거가 있었는데, 그때 백기완후보 선대본이 제주도에 만들어져서 그곳에 들어가서 대선이라는 것도 치러봤죠.
겨울방학 지나고는 다시 복학해야겠다는 생각에 복학을 합니다. 그렇게 복학해서는 수업도 안 들어가고 동아리랑 학회에서만 살았어요. 집에는 미안했지만, 이미 학생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2년 동안 학생운동만 했어요.
92년부터 2년 동안 학생운동을 했는데, 저는 처음부터 동아리 들어가서 체계적인 학습을 받으면서 선후배 관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서 맨땅에 헤딩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그게 좋았어요.
토론하고 고민하고 그런 거보다는 집회 다니고 선전물 만들어서 붙이고 그러는 게 활동이라는 생각이 강해서...
그때는 학생운동이 침체기라서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기도 했고, 노동자나 빈민들이 많이 죽고 그래서 주말이면 항상 집회에 나가고 그랬어요.
그렇게 학생운동 2년을 하고 이후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데, 소위 ‘선’이라는 게 저에게는 없었어요.
노동운동을 하던 선배들은 현장을 정리하고 복학하는 분위기였고... 청년운동이나 진보정치운동 하는 선배들이 좀 있었지만, 저는 노동운동을 하겠다는 생각이 강했고...
그래서 무작정 어느 노동운동단체에 가서 일하고 싶다고 했죠. 그때는 아는 선배나 조직을 통해서 사람들을 충원하는 분위기여서 그렇게 무작정 찾아오는 경우는 없었거든요. 그래서 서로 좀 황당하기는 했는데, 그곳에서 일하게 됐어요.
그런데 그 단체가 정말 스파르타식이었거든요. 해야 되는 일도 장난이 아닐 정도로 많았고, 단체 분위기도 권위주의적인 것이 매우 강해서 시키면 군소리 없이 해야 했고...
1년 정도 그런 분위기에서 활동하다보니까 배우는 것은 많았는데, 그런 분위기에 도저히 적응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만뒀어요. 그만둘 때도 솔직히 “이런 문제 때문에 못하겠다”는 얘기를 못꺼내고, 집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둘러대서 도망치듯이 빠져나왔죠.
그만두고 나서 현장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 ‘선’이 없었어요.
그래서 또 맨땅에 헤딩을 했죠.
단체 활동하면서 알게 된 다른 노동운동단체 사람을 만나서 현장에 들어가고 싶다고 얘기했더니 울산 사람을 소개해줬어요.
그래서 96년에 울산으로 내려갔어요. 그때가 스물여덟 살이었죠.
아! 그전에 집안문제가 있었어요.
제가 대학 4학년을 마칠 때쯤 부모님이 제 졸업식을 기다리고 있었나 봐요. 그런데 저한테서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까 학교로 알아본 거죠.
제가 졸업을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부모님이 충격이 크셨어요. 아버지가 이틀 동안 회사에 나가지 못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부랴부랴 고향에 내려가서 사실대로 말씀드리려고 했지요.
잔득 긴장하고 고향에 갔는데, 아버지가 횟집에 데리고 가서 회를 시켜 놓고는 “니가 하는 일이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들이 했던 그런 일이냐?”라고 묻더라고요. 그 질문을 받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약간 난감했는데, 노동운동에 대해서 일일이 설명하기도 그렇고 그래서 그냥 “예”라고 대답했더니, “우리는 잘 모르지만, 몸 다치는 일 없이 해라”라고만 하더라고요.
아버지가 과묵한 성격은 아닌데, 큰 충격을 받으시고도 의외로 너무 쉽게 나를 믿어주시는 게 좋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자식에 대한 믿음이라는 게 그런 거였어요.
그리고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울산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하고는 학교 후배들을 챙긴다는 마음에 자취방으로 초대를 했습니다. 저를 많이 따르는 후배 두 명이 와서 밤늦게까지 술을 먹고 잠을 자게됐지요.
둘 중에 한 명이 여자 후배였는데, 새벽에 잠이 깬 저는 살며시 그 여자 후배 곁으로 다가가서는 옷속에 손을 넣고는 곳곳을 만졌습니다. 그러다 잠이 깬 그 후배는 황급히 그곳을 나가버렸지요. 나중에 제가 울산으로 도망치듯이 내려오며 그 후배에게 편지를 썼는데 “너를 사랑해서 그런 것이다”는 황당한 변명만을 남겼습니다. 당시 총여학생회 간부였던 그 후배가 받았을 충격과 배신감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거죠.
몇 년 후에 제가 구속되는 일이 생깁니다. 출소 후에 후배들이 저를 챙겨준다고 불러서 서울로 갔는데, 후배들과의 술자리에 그 여자후배가 왔더라고요. 이렇다저렇다 특별한 말이 없이 무덤덤하게 저를 바라보는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뭐 암튼, 그렇게 해서 울산에 내려갔는데, 그곳 단체 사람들과 어떻게 활동할거냐는 논의를 하다가 현장에 들어가지 않고 막 바로 단체 상근을 하는 것으로 결정했죠. 그때 단체가 약간 어수선한 상태여서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고, 현대자동차를 중심으로 대공장 활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현장에 들어간다는 의미가 크게 없기도 했어요.
단체 상근자가 저까지 다섯 명이었는데, 상근비가 없는 것은 고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돈을 구해 와야 하는 상황이어서 돈을 마련하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아는 사람들한테 전화 걸어서 “돈 좀만 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 때문에 친구랑 의가 상하기도 하고...
그렇게 몇 달 버티다가 도저히 안 되겠기에 나중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힘들 게 울산에 적응해 가는 상황에서 96년 연말에 노동법 날치기에 항의하는 전국총파업이 일어나요. 정말 큰 투쟁을 경험했죠.
울산에서만도 수 만 명이 모여서 집회도 하고 행진도 하고 이런 저런 투쟁도 했어요.
다른 지역에서는 화염병을 던지기도 하면서 격렬하게 싸웠고... 울산에서는 현대자동차 조합원이 분신을 하기도 했는데, 지도부가 아주 철저하게 통제했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노동운동의 위력과 함께 관료주의의 힘도 실감했지요.
그리고 98년에는 현대자동차에서 정리해고 움직임이 있어서 반대투쟁이 아주 격렬했어요.
나중에는 국제적 이슈가 되기도 했죠.
96~97년 총파업 투쟁은 울산에 내려가자마자 닥친 투쟁이라서 거의 지켜보는 수준이었고,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은 현장 활동가들이랑 같이 다양한 활동을 직접 결합해서 하는 투쟁이었어요. 정책논리도 만들고, 각종 선전물도 만들고, 토론과 교육도 하고, 집회에도 참가하고 하면서 올인 했죠.
그때 보여줬던 활동가들의 헌신성과 조합원들의 역동성은 정말 잊을 수가 없어요.
집회 도중에 폭우가 쏟아지는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여름 내내 이어진 현장 농성에 매일 수 백 명이 참가하고, 막판에 노동조합이 정리해고에 합의하려고 하니까 조합원들이 조합 앞으로 달려가서 “내가 나갈테니까 정리해고는 합의하지 말아라” 막 이러면서 항의하고...
나중에는 노동조합 지도부가 조합원들의 요구와 의지를 따라가지 못해서 정리해고에 합의해버리거든요.
이 얘기를 하면 정말 할 말이 많은데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이 정도만 할게요.
그때 대중의 역동성을 믿고 끝까지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어요.
그 투쟁이 그렇게 끝나고 나서 현장은 아주 어수선해졌고, 무급휴직과 정리해고로 쫓겨난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서 이것저것 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현대자동차가 있던 동네는 사람들이 떠나면서 빈집도 곳곳에 생기고... 그러면서도 활동가들은 생계문제도 같이 고민하고, 무너진 현장을 추스르는 활동도 다시 하면서 어려운 상황들을 조금씩 극복해갔어요.
그러는 와중에 저한테 슬럼프가 왔습니다.
울산에 내려오자마자 연달아 큰 투쟁을 경험하고 나니까 “나는 그 투쟁에서 뭘 했지?”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까 제 자신이 너무 무의미해 보였어요. 그러면서 이렇게 활동하는 것에 대해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주위에 힘들게 버텨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힘이 빠지기도 하고... 그래서 휴직을 요구했고, 단체 사람들이 말렸지만 잠시 쉬겠다면서 고향으로 내려왔어요.
휴~ 숨차다. 흐흐.
저한테는 엄청났던 일들이었는데, 흐름으로만 얘기하려니까 막 달리게 되네요.
목 좀 축이고 할게요.
이때쯤에 선을 몇 번 봤어요.
서른이 넘어가니까 집에서도 걱정을 하고, 나도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고...
물론 잘 안됐죠. 제가 상품가치가 없잖아요. 하하하
연애 한 번 해보고 싶어서 이런 저런 일들도 많았는데, 그 얘기하면 좀 길어질 것 같아서 그냥 또 달려볼게요. 좀 쪽팔리다.
몇 년을 정신없이 달려오다가 고향에 내려와서 쉬고 있으니까 좋았어요.
쉴 때는 그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푹 쉬어야 해요.
그렇게 6개월쯤 쉬다보니까 슬슬 걱정이 되요.
“다시 복귀를 해야 하는데...” 하면서도 용기가 나지 않고...
그때 현대자동차 활동가 한 분이 제주도에 놀러 와서 만났고, 그 분이 울산으로 와서 같이 일해보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특별한 고민 없이 복귀하게 됐죠.
그때가 2000년이었을 거예요.
그전에 활동하던 단체가 아니라 현대자동차 현장조직 간사로 복귀했죠.
현장조직이라고 하면 좀 생소한가요?
현대자동차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만든 조직인데, 현대자동차는 워낙 크다 보니까 활동가만 수 백 명이 되거든요. 그 사람들이 정치적 성향에 따라 모여서 조직들을 만들었어요. 제가 있었던 조직은 큰 편에 속하는데 그 당시에 조직원이 100명이 넘었거든요. 그 사람들이 회비를 내서 사무실도 마련하고, 선전물도 내고, 저 같은 사람을 상근자로 고용해서 운영하기도 했던 거죠.
현장조직 간사라는 게 외부에서 단체로 있을 때와는 달리 현장과 관련된 일들을 직접 하는 거였거든요. 그래서 일들이 많았지만, 그런 게 좋았어요. 사람들도 좀 더 폭 넓게 만나고, 다양한 일도 해보고...
그러다가 2000년 연말에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임원선거에서 저랑 같이하던 동지들이 당선됐어요. 그 다음부터는 더 바빠졌고, 긴장감이 더 높아졌죠.
2001년에 들어서면서 울산 여기저기에서 투쟁사업장들이 많아졌어요.
그 중에서 효성과 태광이라는 화학섬유사업장이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파업이 일어나는 등 장난이 아니었거든요. 나중에는 효성에 경찰이 투입되고, 시내에서 화염병도 던지면서 더 장난이 아닌 상황으로 갔어요. 그러니까 민주노총에서 총파업을 한다고 그랬고, 그 중심에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있었는데, 총파업 바로 전날에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파업을 철회해버려요. 완전 좆 된 거죠.
그때 욕도 많이 먹었고, 내부에서 비판도 많았어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뱉은 말을 지킨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실감했죠.
그 과정 거치면서 조직의 정체성에 혼란이 생기고, 조직원들이 자신감이 없어졌어요. 그걸 극복하려고 당시 의장이랑 몇 몇 동지들이 엄청 노력했어요. 일부러 연대투쟁도 더 열심히 다니고, 교육사업도 엄청 강화하고, 일상 활동도 여러 가지 시도해보고...
그러다가 2002년 연말부터 근골격계 사업을 하게 됩니다.
근골격계 직업병이라는 것이 뭐냐면, 노동자들이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어깨 손목 허리 이런 데가 망가지는 그런 직업병이에요. 2002년부터 여기저기서 관련한 투쟁들이 벌어지면서 심각함이 많이 알려졌죠. 그래도 우리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현대자동차에서도 노사합동으로 근골격계 관리프로그림이 운영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그런 프로그림이 있는 줄도 몰랐지만, 현대자동차도 그만큼 심각할 줄 몰랐거든요.
그래서 노동안전단체들이랑 같이 교육도 하고, 선전물도 만들고, 실태조사도 하고...
정말 열심히 달라붙어서 했어요.
나중에 실태조사 결과가 나왔는데, 얼마나 심각한지 장난이 아니었어요.
그 내용을 유인물로 만들어서 현장에 뿌리니까 현장이 발칵 뒤집힌 거죠.
그때부터 막 드라이브를 걸었어요.
“노동조합이 제대로 하지 않으면 현장조직이 한다”하면서 현장조직 사무실에서 상담과 검진을 하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막 찾아오는데, 처음에는 긴장한 표정으로 왔다가 상담을 받고 밝은 표정이 돼서 돌아가기도 하고... 그렇게 백 명 넘게 검진하고 나서 그중에 상태가 심한 사람들 중심으로 부산에 있는 병원으로 보내서 정밀검진을 받게 하고, 산재신청을 위한 준비를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사람들 사연 하나 하나를 들으면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일을 하고 있는지, 그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게 됐죠. 몇 년 동안 밖에서 이런 저런 일들 해왔던 것들이 뻘짓이었던 거죠. 직접 대중을 만나보니까 밖에서 생각했던 거랑 완전 달라요. ‘대중과 고통을 함께 한다는 것’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때 느꼈어요.
암튼, 정말 힘들게 해서 열 몇 명이 집단산재신청을 내요.
후~ 그때 너무 힘들어서 네 번을 울었거든요.
현장조직 혼자서 회사와 노동조합을 상대로 투쟁을 해야 하는데, 조직원들은 노동안전부서의 일로만 생각하고, 이런 저런 선거나 각자의 일들에 빠져있었어요. 그리고 그때 조직 내부가 아주 심각한 분열 상태에 있어서 그 일을 처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상태였고...
그래도 어떻게 해요. 아픈 사람들 모아놓고 “이제부터는 당신들이 알아서 하세요”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집단으로 산재신청 들어가니까 회사는 더 난리를 치고, 개별 개별에서 연락해서 취소하도록 공작하고, 근로복지공단은 여유를 부리면서 시간 끌려고 하고, 현장에서는 활동가들끼리 견제하고, 조직 내에서는 파벌싸움 벌어지고...
미쳐버리기 일보직전이었어요.
산재환자들 만나면 흔들리지 않게 “단 한사람도 불승인되는 사람이 없게 하겠다”고 얘기하고 그랬어요. 산재환자 분들도 정말 열심히 하셨고요.
그러다가 근로복지공단으로 우르르 들어가서 제 몸에 신나를 붇고는 “산재승인 빨리 내라”고 난리를 쳤죠.
그렇게 해서 전원 승인 받았어요.
저를 포함해서 셋이 구속됐고...
구속되고 나서 그 안에서의 생활은 별로 어렵지 않았는데, 밖에 상황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산재승인 받고 구속자가 생긴 이후에 현장에서 후속사업이 힘있게 되질 못했죠.
그런 상황을 보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더 속상하고...
그러면서 시간은 흐르고, 재판은 현대자동차 사측에 의해 농락당하고...
구속된 우리한테 등 뒤에서 칼 꽂는 사람도 있고...
현장은 점점 연말 임원선거로 달려가고...
그러던 중에 한진중공업 김주익 위원장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에서 노동자들의 죽음 소식이 들려와요.
전국적으로 들끓었죠.
그때 저도 뭔가 같이 해야겠다는 생각에 단식을 1주일 정도 했거든요.
그런데 밖에 있던 우리 동지들이 저의 단식투쟁을 통제하고 있더라고요.
저의 단식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임원선거에 대한 얘기만 하고 있는 거죠.
참~
이해하려고 하면 이해는 되요.
그때 구속된 세 명에 중에 두 명이 실형을 먹어서 교도소에 남아 있었는데, 조합원이었던 한 명은 임원 후보로 옥중 출마를 했고, 저는 조합원이 아닌 외부세력이었거든요. 임원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외부세력이 단식을 한다는 게 선거에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었던 거죠. 웃기는 얘기지만 그게 현실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그 동지들은 임원선거에서 당선이 됐어요.
그리고 저는 그 조직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죠.
그렇게 8개월 살고 나서 만기출소 하고, 잠시 고향에 내려왔다가 결핵이 발견됐어요.
그래서 결핵 치료를 명목으로 8개월 정도 고향에 있었죠.
그때 울산에서는 비정규직 투쟁이 크게 벌어졌는데,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가 자살했어요.
박일수 열사라고, 저도 아는 사람이었거든요. 현대자동차에서도 사내하청 투쟁이 벌어졌는데, 우리 동지들이 임원으로 있는 정규직 노동조합이 그 투쟁을 통제하려고 하고...
그런 상황들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나름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봤지만 역시나...
결국 공식적으로 그 조직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하고 편지를 써서 보냈어요.
8년 동안 모든 열정을 쏟았던 조직을 떠나는데...
후~
제가 너무 분위기 가라앉혔죠?
자, 물 한 모금 마시고, 마음도 정리하고...
2004년 9월에 다시 울산으로 복귀해서 새로운 활동공간을 찾기 시작했어요.
몇 군데에서 같이 일하자고 제의가 왔는데 고민하다가 근골격계 투쟁을 같이했던 노동안전단체에서 일하기로 했어요. 그 단체가 부산에 있어서 부산으로 나들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그동안 익숙했던 현대자동차와 울산이 아닌 새로운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죠.
그런데 몇 달 버티지 못하고 그만 뒀어요.
활동 스타일이 맞지 않았던 거죠.
그리고 좀 심하게 방황을 했어요.
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새롭게 출발을 하려고 하다가 실패를 했기 때문에...
술에 빠져 살면서 운동을 그만둘까 하는 고민도 하고...
그러던 중에 울산에 인터넷신문이 생겼는데, 그곳에도 사람이 필요하고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인터넷신문 기자로 일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의외로 재미있었던 거예요.
울산에 있으면서도 주로 현대자동차 활동을 하다보니까 다른 사업장들에 대해서는 잘 몰랐는데, 다양한 사업장과 단체들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것을 알고 배우게 되고...
크고 작은 투쟁들에 함께 하면서 그 절박함과 당당함을 몸으로 느끼면서 전달하는 것이 좋았어요.
일부러 현대자동차는 취재를 하지 않고, 작은 사업장들을 돌아다녔어요.
현대자동차를 취재하더라도 비정규직만 취재하고...
제가 붙임성이 좋은 편이라서 사람들과 금방 친해져요.
그래서 자타가 공인하는 사이비기자가 됐죠.
“기자님” 이렇게 불리는 거보다는 “어이, 사이비 왔어!” 그렇게 불러주는 게 저는 더 좋거든요.
2006년 초에 어린이집 선생님 두 분이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것 때문에 해고가 됐는데, 그 분들이 노동조합 경험도 없고, 노동조합 조직력도 약하고, 주위에 도와주는 사람도 별로 없는 상태에서 힘들게 싸우는 모습을 취재했어요.
처음에는 애정을 갖고 취재만 했는데, 가만히 지켜보니까 속상하고 답답한 거예요.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서 비공식적으로 달라붙어서 사람도 붙이고, 선전물도 만들고, 집회도 조직하고, 회의도 같이 하고 그래버렸어요. 기자가 그러면 안 되는데, 어차피 사이비였으니까... 히히
기자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이 한 발 떨어져서 투쟁을 지켜봐야 했던 것이었는데, 보육노조 투쟁은 제3자가 아니라 당사자가 돼 버렸거든요. 몇 달을 그렇게 붙어서 같이 투쟁을 하면서 힘든 만큼 즐거웠어요.
결국 어린이집 원장은 물러나고 해고자들은 복직했죠.
그런데 그러고 나니까 해고자 두 분이 완전 쌩까는 거예요.
노동조합 활동도 거의 하지 않고, 매일 연락하던 사람들이 연락도 한 번 없고...
해고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그러는 거라는 점은 이해가 되지만, 솔직히 많이 섭섭했죠.
그렇게 보육노조 투쟁이 끝나니까 이번에는 요양원 간병사 분들이 집단해고가 됐어요.
50~60대 여성분들이었는데 역시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것이 해고 이유였어요.
그분들도 노동조합 경험이 없고, 노동조합이 힘이 없는데다가, 요양원이 울산에서 한 시간 동안 차로 가야 하는 곳에 떨어져 있고...
보육노조보다 더 열약한 조건이었어요.
처음에는 해고된 여섯 분만 요양원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취재하러 가보면 그렇게 즐거우신 거예요.
분위기가 다른 해고자들이랑 완전 달라요.
50~60년을 ‘사는 게 그러려니...’ 하면서 힘든 걸 힘든 줄 모르고 살아왔던 분들이, 해고를 당하니까 오히려 자유로워지신 거죠.
출근투쟁이 소풍 나오는 기분이었어요.
그분들하고도 금방 친해져서 누나라고 부르게 되고, 사람들 연락해서 그곳까지 가달라고 부탁하고, 회의도 같이 하고, 투쟁할 때는 항상 같이 있고...
보육노조 투쟁은 힘들게 했는데, 간병사분들 투쟁은 즐겁게 했어요.
2006년에는 그런 거 말고도 재미있는 것들을 많이 해봤어요.
제가 기자라는 신분 말고는 소속된 조직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일을 만드는 게 쉽지가 않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못할 것도 없더라고요.
처음에 해 본 게 부안 핵폐기장 반대투쟁에 대한 책을 쓴 고길섶씨 초청강연회를 조직했는데, 한 사람이 만원씩 준비기금을 내서 그 사람들이 강연회를 준비하는 거였어요.
제가 기자 신분이기 때문에 사람들도 많이 알고, 인터넷신문을 통해서 언론플레이를 할 수 있으니까 주된 실무는 제가 처리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더라고요.
울산에서 강연회 같은 거 하면 사람들 많이 안 오는데 고길섶 초창강연회는 준비위원만 50명이 참가했거든요.
완전 성공이죠.
그러고 나니까 탄력을 받아서 영화상영회도 해보고, 연극공연도 해보고, 연말에 콘서트도 해보고, 비정규직 투쟁지원금도 모아보고...
여러 가지 실험을 많이 해봤어요.
그때 제 화두가 ‘자발적 대중운동’이었는데 빵빵한 조직이 없어도 그게 되더라고요.
그게 나중에 촛불집회라는 형식으로 전국적으로 타올랐죠.
그렇게 2006년은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제일 행복했던 한 해였어요.
그렇게 2년 정도 기자활동 하다보니까 지치기도 했고, 직접 대중 활동을 해보고 싶기도 했고, 이런 저런 다양한 시도들을 더 해보고 싶은 욕심도 생기고 그래서 2007년 초에 과감하게 기자를 그만뒀어요.
그런데 너무 준비 없이 나가다보니까 잘 안돼요.
그런 가운데 같이 일해보자는 데는 있었는데, 이런 저런 고민들이 막 생겨나는 거예요.
대중과 직접 호흡하면서 함께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는데, 그렇게 힘든 과정을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지레 겁도 나고...
익숙한 상황에서 판이 보이니까 먼저 몸을 사리게 되는 거죠.
“울산에서 10년 넘게 활동하다보니까 이런 저런 일에 대한 자신감도 있고, 보이는 것도 있는데, 잘못하다가는 매너리즘에 빠져서 능력 팔아먹고 사는 식의 관료로 전락하지 않을까?”
“이렇게 맛탱이가 가면 안 되는데...”
웃기는 얘기 같지만 정말 그런 고민들을 했어요.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정말 무식한 결정을 내렸죠.
“스물여덟 살에 아무 것도 없이 과감하게 울산에 내려왔던 것처럼 과감하게 울산을 떠나자.”
“새로운 도전을 하자.”
뭐, 이런 거죠.
어디 가서 뭘 해보자는 계획도 없이 무작정 울산 활동을 정리하고, 경기도 일산에 있는 막내동생 집으로 옮겼어요. 당장 갈만한 곳이 그곳 밖에 없어서...
처음에는 조급하게 하지 말고 긴 호흡으로 이러저러한 것을 알아보자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사회적 관계들을 단절하고 혼자 있으니까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래서 서울에서 조심스럽게 아는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는데, 그 사람들도 다 제 코가 석자고...
심하게 얘기하면 “니가 알아서 살아남은 다음에 만나자”라는 식이예요.
정말 실망했죠.
하지만 그게 현실이었어요.
그러면서 혼자만 지내게 되고, 밤에 잠을 못자니까 매일 술과 담배와 야동으로 버티고...
그런 생활이 몇 달 동안 이어지면서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자살도 생각하게 되고...
그때 막내 도움이 컸어요.
그런 제 모습을 보면서 가끔 “술 너무 먹지 마”라고만 할뿐 저에게 뭐라고 하지 않으면서 이것저것 신경을 써줬어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뭐라도 혼자서 해보자는 생각에 시작한 것이 인터뷰였어요.
다양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정리하는 것이었죠.
처음에는 아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다른 사람에게 소개도 받고 해서 무작정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그렇게 들은 얘기를 정리해서 인터넷에도 올리고...
그러다보니까 정말 배우는 게 많았어요.
“내가 그동안 울산에서 얼마나 편하게 활동했나...” 하는 생각도 하면서 반성도 하고, 비슷한 고민들도 듣고, 새로운 경험도 알게 되고...
그 와중에도 거의 매일 혼자서 술을 먹기는 했지만, 우울증은 조금씩 좋아졌어요.
그렇게 불안정한 상태로 일 년 정도 지내다보니까 아주 오래간만에 사람들을 만나면 실수를 많이 하게 되요. 그동안 느낀 것들을 얘기하면서 말도 막 함부로 하게 되고, 술 취해서 성추행도 하게 되고... 그러면서 막 괴로워하고...
그때가 2008년 5월쯤이었는데,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가 엄청나게 커졌어요.
자연스럽게 촛불집회에 결합하면서 푹 빠져버렸죠.
울산에서도 몇 만 명 모이는 큰 집회나 여러가지 격렬한 투쟁도 많이 경험해봤는데, 촛불집회는 그동안의 제 경험과 상상을 완전히 초월하는 용광로였어요.
매일 집회에 나가고 거의 매일 밤을 새면서 거리를 돌아다니고...
와~ 그때 경험은 뭐라고 쉽게 표현할 수가 없어요.
큰 집회는 큰 집회대로 재미있고, 작은 집회는 작은 집회대로 재미있고...
그렇게 미친놈처럼 돌아다니다가 기륭전자 해고조합원들이 단식투쟁을 하게 되는 곳에 가게 됩니다. 광화문에서의 즐거운 촛불집회와는 완전 딴판으로 기륭전자 촛불집회는 처절함 그 자체였어요. 그 모습을 보고 나니까 더 이상 광화문에 가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매일 기륭전자 앞으로 촛불 들러 갔어요.
석 달 가까이 단식투쟁이 이어지는 현장을 매일 찾아간다는 건 정말 피 말리는 일이었어요.
진이 다 빠져요.
결국 추석을 앞두고 협상이 결렬된 상태에서 단식이 중단됐고...
내 역할은 거기까지라는 생각에 촛불을 껐죠.
광화문과 기륭전자 앞에서 그렇게 촛불을 들었던 게 100일 정도 됐던 거 같아요.
그렇게 즐겁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나니까 가슴 속에서 새로운 것들이 막 샘솟아요.
그래서 그동안 사람들 만나서 느꼈던 것들을 글로 정리하고, 앞으로 해보고 싶은 활동에 대한 계획도 크게 그려보고, 다시 새로운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그렇게 다시 생기를 회복해서 움직이려고 하는 때였는데, 2008년 11월쯤에 경찰서에서 출두요구서가 날아왔어요. 촛불집회 때 사진이 찍힌 게 있어서 조사받으라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크게 한 게 없기 때문에 당당하게 조사를 받고 묵비권도 행사하고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황당하게 구속영장이 발부되는 거예요.
그때 좀 긴장했죠.
영장실질심사에서 구속영장은 기각됐는데, 제대로 한 번 긴장해봤어요.
그런 과정을 쭉 거치다보니까 지쳐서가 아니라 외로워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정말 강하게 들더라고요.
몇 년 동안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고민 고민 하다가 용감하게 고백을 했어요.
조심스러운 거절의 답장을 받고 나서 술 먹고 엉엉 울고...
좀 쪽팔리다. 히히.
그런 연말을 보내다보니까 더 외로워지는 거 있죠.
그래서 몇몇 사람들한테 전화를 했는데, 연락이 되지 않거나, 연말에 바쁘니까 연초에 보자고 그러고...
그러다가 크리스마스 지나서 한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울산에 있는 친군데 잠시 얼굴이나 보자고 그러더라고요.
그리고 반가운 사람 두 명이 함께 자리를 했고...
셋 다 제가 가장 믿는 사람들이었거든요.
정말 기분 좋게 술을 먹었는데...
제가 너무 기분 좋아서 말을 또 함부로 했나 봐요.
갑자기 그 친구가 몇 달 전에 제가 저질렀던 성추행에 대해서 얘기하더라고요.
순간 술이 확 깨고 얼굴이 하얗게됐죠.
그러니까 그 친구가 웃는 얼굴로 “왜 아무 말도 못하지”라고 하더라거요.
그리고 나서 필름이 끊겼어요.
그렇게 2008년 연말에 원 투 쓰리로 펀치를 얻어맞고는 넉다운이됐죠.
2008년 연말과 2009년 연초 1주일을 밤낮으로 술만 먹었어요.
밥도 안먹고 오로지 술만.
술을 먹고 죽을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자살도 생각하고...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그 친구랑 성추행 피해자에게 메일을 보냈죠.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길게 쓸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나서 모든 걸 정리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죠.
울산을 떠난지 2년만에 만신창이가 돼서 내려온 거였습니다.
정말 고마운 건 부모님이나 동생들이나 저한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동안 뭘 하면서 어떻게 지냈는지, 왜 고향에 내려왔는지, 앞으로 뭘 할 건지 이런 것들...
제주에 내려와서 처음 얼마 동안은 좋았어요.
지옥의 끝에서 한 발 물러섰더니 편안한 천국이 펼쳐진 기분이었죠.
고향에 내려와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요.
대인기피증이 생겨서 사람도 만나지 않고 집에서만 지냈죠.
집에서 책 보고, 텔레비전 보고, 잠 자고 하는 게 거의 전부예요.
부모님이 농사를 짓기 때문에 도와드리면 되는데, 그것도 쉽지 않아요.
우선 부모님이 아들이 내려와서 힘든 농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으세요.
저도 고향에서 농사짓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어서 이런 저런 것들을 배울 생각도 없고...
더 중요한 건, 가끔 가서 일을 도와드리다보면 부모님과 제가 세상을 보는 방식과 일하는 스타일이 많이 달라서 사소한 것들에 부딪히거든요. 그게 보이지 않게 서로 간에 스트레스예요. 또 힘들어서 짜증을 내거나 그러면 부모님이 제 눈치를 보는 것도 미안하고...
그래서 밭에도 아주 바쁠 때 아니면 잘 안가요.
그냥 혼자서 도 닦는다 생각하며 지냈죠.
그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혼자서 지내다보니까 이런 저런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요.
아주 조심스럽게 저를 돌아보게 되는 거죠.
제 자신을 성찰한다는 생각으로 소설이라는 것도 써보고, 앞으로 제가 해보고 싶은 일들을 생각하면서 기획안도 써보고, 제 열정과 꿈과 신념을 되살려보기 위해 사람들한테 나눠줄 수 있는 것을 찾아도 보고...
그렇게 끝임 없이 제 자신을 돌아보면서 긍정하려고 노력했죠.
그래서 -5까지 떨어졌던 그래프가 잠시 올라왔었는데 또다시 굴러떨어집니다.
그때 어머니가 우울증을 앓고 있었어요.
저도 만만치 않게 우울한 상태였고요.
한 집안에 두 명의 우울증 환자가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서로가 아주 예민해있기 때문에 사소한 것도 조심조심 극도로 신경을 씁니다.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하는 아들은 밤에 조심조심
약을 먹고 잠들었다가 새벽 일찍 일어나는 어머니는 새벽에 조심조심
혼자만 방에서 지내는 낮에는 제 자신에게 조심조심
이런 날이 계속되다보니까 성격은 점점 날카로워지고...
그런 제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님은 저를 더 조심조심 대하는데
그럴수록 저는 더 예민해져서 불쑥불쑥 짜증과 화를 내고...
한 번은 어린 조카들이 할머니집에 놀러와서 재롱을 부리는데
아주 사소한 문제로 조카랑 실랑이를 벌이다가 뺨을 후려갈겨버리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점점 감정조절이 되지 않는 괴물로 변해가기 시작하는 거였어요.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생각했던 게 제가 갖고 있는 수 백권의 책들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거였어요.
내가 갖고 있는 자산이라는 건 그게 유일했으니까.
만나는 사람이 없으니까 무작정 인터넷에 ‘책을 나눠드립니다’라고 글을 올렸거든요
그런데 의외로 반응이 좋은 거예요.
그래서 발송비까지 제가 부담하면서 전국으로 책을 보냈죠.
그렇게 세상과 소통하고 간접적으로나마 세상사람들과 연결되는 것이 좋았어요.
나중에는 구속된 양심수들에게도 책을 보내기도 했거든요.
그러면 그분들도 고맙다고 편지를 보내오고...
그렇게 몇 달을 즐겁게 하다보니까 책이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인터넷에 ‘양심수들에게 책을 보내려고 하니 도와주세요’라고 글을 올렸죠.
그 동안 제가 뿌린게 있으니 조금은 돌아오겠거니 생각을 했었는데
아주 싸늘하게 찬바람만 불더라고요.
세상 좆같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했죠.
그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제 자신을 달래기 위해서 글도 많이 썼거든요.
소설도 써보고, 편지도 써보고, 기획안도 만들어보고, 혼자서 참 많은 걸 써봤어요.
그러다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으로 책을 내보는 건 어떨까 생각했어요.
그냥 어떻게라도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세상사람과 소통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만나는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도전해봤어요.
무작정 출판사에 메일을 보낸 거죠.
제가 책을 접했던 출판사는 거의다 시도해봤어요.
수 십 군데 메일을 보냈죠.
그런데 역시나 아주 냉혹한 현실만 확인하게 됐어요.
그때 확인한건 뭐냐면요, 한국에서 진보라는 가치를 내건 출판사들은 전문가나 지식인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거였어요.
그렇게 진보의 냉혹한 현실을 또 한 번 확인하며 다시 좌절했죠.
그러다가 2011년에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에 반대하는 투쟁이 크게 일어났어요.
집에서 tv로만 그 소식을 접하고만 있었는데 점점 상황이 심각해지더라고요.
그렇게 tv로만 소식을 접하는 게 마음이 불편해서 강정마을에 찾아갔다가
이런저런 헤프닝아닌 헤프닝만 벌이고 튕겨나와버렸죠.
극도로 예민한 고슴도치가 극도로 긴장감이 흐르는 사람들 사이에 섞일수가 없었던 거예요.
제주에서 보낸 시간은 그런 과정의 연속이었죠.
삶의 구렁텅이에 빠져서 발버둥치고
온갖 힘을 다해 구덩이 밖으로 나오려하면 굴러떨어지고
다시 발버둥치고 올라오려하면 또 굴러떨어지고...
그런 과정이 반복되다보니까 점점 제 안으로 숨어들어가게 되고
그러면서 저는 점점 더 괴물이 되어가고...
그러다가 울산에서 부고가 전해졌어요.
저랑 무척 가까웠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그 소식을 듣고 하루 동안 망설였거든요.
울산에 가서 무수한 사람들을 다시 만나야 하는 것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에...
그렇게 하루를 고민고민하다가 고민하는 그 자체가 더 힘들어서 울산으로 갔어요.
영안실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엄청 긴장했거든요.
그리고 밤이 돼서 사람들이 떠나가자 고인의 영정사진 앞으로가서 300배를 했어요.
그냥 그렇게라도 해야 될 것 같아서...
한 시간 여를 절하고 났더니 다리에 힘도 풀리고 긴장도 풀리더라고요.
그래서 영안실 구석에 가서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조금 떨어진 자리에 모르는 여성분이 잠을 자고 있더라고요.
그 순간 그 여성분의 손을 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다가 그만 그 분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죠.
다음날 새벽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주도로 도망와버렸어요.
그렇게 제주로 와서는
이해되지 않는 제 행동에 대한 자괴감에 빠져있는데
울산에서 전화가 한 통 걸려왔어요.
발신자는 2008년 연말에 제 가슴에 칼을 꽂았던 바로 그 친구.
술이 떡이 된 그 친구는 영안실에 갔다가 자책감 비슷한 감정이 들어서 저한테 전화를 한거였는데
저는 그 친구의 목소리를 듣는 게 너무 무서운 거예요.
그래서 화를 내며 전화를 끊어버렸죠.
그리고 바로 다음날 휴대폰을 해지해버렸어요.
그렇게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또 하나 닫아버렸지요.
세상을 향한 문을 닫아걸고 방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대인기피증과 분노조절장애는 점점 심해지는데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가족들도 힘들어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생과 매제가 은근히 사람을 우습게 본다고 성질 한 번 부렸더니
동생과 매제도 저를 가까이 하지 않으려 했고,
사소한 일에 신경질을 자주 부리는 저를 감내하기만하던 부모님도
제 행동에 짜증을 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더 예민해지고 더 짜증을 부리게 되고...
그러다가 어느 날 아버지와 사소한 일로 다툼을 크게 벌이고는
충동적으로 제주를 떠나 일산에 있는 막내동생 집으로 와 버렸습니다.
만신창이가 돼서 제주로 내려간지 3년만에
통제불능의 괴물이 돼서 다시 일산으로 가게 된 거였죠.
그때는 정말 벼랑 끝에 서있는 기분이었어요.
마지막 보루였던 가족들에게서마저 튕겨나온 거였으니까요.
울산에도, 서울에도, 제주에도 제가 서있을 자리는 없다는 생각에
절망감과 두려움과 무기력함이 저를 휘감았습니다.
더 이상 뭘 어떻게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제가 노동운동을 할 때 알고 있는 한 목사님을 찾아갔어요.
목사님을 만나서 제가 처해있는 상황을 간단히 얘기했죠.
목사님은 성직자라서 그런지 저의 절박함을 충분히 이해하시고는 따뜻하게 감싸주시더라고요.
그렇게 목사님을 몇 번 찾아가면서 마음의 위안을 찾고 있었는데
목사님이 자신이 있는 민중교회로 와서 같이 일해보자고 하시더라고요.
여자도 소개시켜주겠다고 하시고...
그 얘기가 제게는 구원의 손길이라는 걸 알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일선에서 떨어져 있었는데가가
제 상태가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민을 많이했죠.
며칠을 고민하다가 그 손길을 거절하면 위태로운 제 삶을 이겨낼 자신이 없어서 목사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죠.
그렇게 결정을 하고 났더니 마음이 너무도 편안해지는 거예요.
몇 년동안 좀처럼 가시지 않던 먹구름이 말끔히 걷히더니 환한 햇살이 비추는 그런 행복감이 순식간에 몰려왔어요.
영화 속에서 봤던 그런 장면처럼 말이죠.
한순간에 환희가 찾아온다는 걸 그때 경이롭게 실감했죠.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목사님과 만남을 기다리고 있는데 목사님이 메일을 보내오셨어요.
서울의 어느 대학강사가 자살을 해서 대책위가 꾸려지는데 그곳에 가달라고 하더라고요.
그 메일을 보고 너무 당황스러웠죠.
제 상태가 어떤지 충분히 알고 계신 분이 갑자기 그런데를 가라고 하니...
그래서 일부러 애교 섞인 표현을 써가면서 그곳에 가는 건 어려울 것 같다고 답신을 드렸거든요.
그랬더니 그 후로 다시는 연락이 오지 않는 거예요.
아~ 그 심정을 이해하시겠어요?
몇 년만에 먹구름이 걷혀서 화사한 햇살이 비추는가 했는데
순식간이 먹구름이 다시 몰려왔고
저는 낭떠러지 앞에 그대로 서있다는 사실을 확인한거죠.
그때 제게 익숙한 녀석이 찾아오더라고요.
‘자살’이라는 친구
그 녀석이 이렇게 말을 하더라고요.
“야, 내 이름을 뒤집으면 ‘살자’가 된다고 그러잖아. 그런데 그걸 한 번만 더 뒤집으면 다시 내 이름으로 돌아오는거야. 너도 이제 세상을 어느 정도 살아봤으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그때 정말 무서웠습니다.
그 친구의 말이 너무도 정확했기 때문에요.
그런데 그 타이밍에 영화 같은 일이 또 하나 일어납니다.
제가 가장 믿고 따르던 분이 오랜만에 연락을 주신거예요.
저를 보고 싶다고 연락 좀 주라고.
너무나 무서웠던 저는 그 분에게 제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지 솔직하게 털어놓는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내가 너의 손을 잡아줄게”라면서 만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그후로 그 분과 메일을 계속 주고받았는데
그 분은 자신이 있는 울산으로 내려오라고만 할뿐
저를 만나러 오시지는 않더라고요.
그렇게 낭떠러지 앞에 저는 계속 서있었습니다.
그때의 하루 일과는 이랬어요.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제가 일산에서 지냈던 몇 년 동안의 일과이기도 하죠.)
아침 9~10시쯤 되면 더 자고 싶은데 눈이 뜨입니다.
그렇게 멍하니 tv를 보다가 아점을 먹고 집을 나서죠.
동네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고는 지하철을 탑니다.
지하철은 한 번 들어가면 5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오후는 지하철을 타고 다디며 시간을 보냅니다.
지하철에서 사람에 치이다가 저녁에 집에 들어와서 밥을 먹고는
술과 담배와 야동을 벗삼아 새벽까지 버팁니다.
새벽 3~4시가 되면 술 기운에 취해 겨우 잠이 들지요.
그렇게 세상에서 버림받을데로 버림받으면서 폐인이 되는 가는 속에서도
제가 죽지않고 버틸 수 있었던 동력 중의 하나는 ‘읽는 라디오’라는 겁니다.
‘읽는 라디오’라는 게 뭐냐면요
제가 라디오를 진행한다고 생각하면서 혼자만의 원고를 쓰는 거예요.
그리곤 거의 찾는 사람이 없는 블로그에 올리는 거죠.
이건 제주도에 있을 때부터 시작했었는데
일산으로 와서는 비공개로 전환해서 혼자만 쓰고 즐기는 방송으로 했거든요.
일주일에 한번씩 할 얘기도 없는 저를 향해 제가 말을 거는 거죠.
웃기는 일인데, 이게 저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줬어요.
매번 힘빠지는 얘기를 하면서도 제가 저를 위로해줬으니까요.
그렇게 다시 2년을 일산에서 버티고 있었는데
어느 날 몸 곳곳에서 이상신호를 보내기 시작하는 거예요.
계속 되는 술로 위와 장이 좋지 않아서 신호를 보내는데
무릎과 허리에 문제가 생기고
담배로 인해 폐도 나빠져서 기침이 계속 나오고
치아는 충치와 잇몸질환으로 엉망이었고
시력은 갑자기 급속히 나빠지고
코는 비염이 생겨서 막혀버리고...
하나하나를 놓고보면 별거 아닌데
이런 증상들이 한꺼번에 닥치니까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삶의 구렁텅이에서 발버둥치고 발버둥치고 하면서 버텨온 결과는
병든 몸과 마음 뿐이라는 사실을 무섭게 실감했죠.
그 상태로 더 지속되면 기다리는 건 죽음 뿐이겠더라고요.
그래서 모든 걸 포기하기로 했어요.
제가 활동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 아니라 발버둥치는 것까지 다 포기하기로요.
휴~ 숨 좀 돌릴까요.
주절주절 늘어지지 않게 얘기한다고는 했는데 막상 얘기를 꺼내놓으니 늘어져버렸네요.
자기가 힘들었던 시기에 대한 얘기를 자세하게 하고 싶어하는 게 사람의 보편적 심리인거 같아요.
듣는 분이 다소 짜증스러웠다면 “이 대목에서 하고싶은 얘기가 많아서 그랬구나”하고 생각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자, 얘기를 더 이어가볼까요.
세상에 대한 분노와 미련 같은 걸 다 내려놓고 다시 제주로 내려왔죠.
조용히 농사나 지으면서 살려고요.
다행이 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계시고, 둘째동생이 농사지을 땅을 빌려줬고, 첫째동생이 제 생활여건을 많이 마련해줬어요.
그때 집에 이러저러한 사정이 있어서 농사지을 밭에 콘테이너주택을 갖다놓고 지내게 됐거든요.
중산간마을 외곽이라서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이었죠.
사랑이라고 집에서 기르던 개를 데리고 가서 둘이서 벗삼아 지냈는데 편안하고 좋더라고요.
이것저것 배워가면서 조금씩 일을 해나가는 것도 좋았고
다소 불편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온전히 가질 수 있는 것도 좋았고
틈틈이 명상과 운동을 할 수 있는 것도 좋았고
내가 재배한 채소들로 반찬을 만들어 먹는 것도 좋았고
가게가 멀어서 술을 자주 사러갈 수 없는 것도 좋았어요.
담배는 제주에 내려오기 전에 건강 때문에 끊었어요.
모든 조건이 좋았지만 제주생활에 연착륙한 건 아니었어요.
마음을 다스리는 게 쉽게 되질 않아서 감정이 불쑥불쑥 했거든요.
부모님이 자주 챙겨주시는데, 사소한 일에 화가 나면 격하게 분노를 드러내는 일이 종종있었거든요.
그렇게 평화로우면서도 불안한 생활이 1년 여쯤 이어질 때 사건이 한 번 터졌어요.
고추를 심기 위해서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데 아버지랑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서 고추모종을 전부 집어던져버리며 아주 심하게 난리를 쳤어요.
그리고나서 며칠 동안 감정이 가라앉지 않았는데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제주에서의 모든 걸 포기하고 어딘가로 떠나버리려고 했는데 더이상 갈데가 없는 거예요.
결국 1주일만에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새로운 농사를 준비했죠.
그래서 고추농사 대신에 시도해 본 것이 녹두재배였어요.
저는 당연히 처음인데 부모님도 녹두를 재배해본 적이 없어서 주위에 물어가면서 했거든요.
녹두가 어릴 때 병충해가 많이 생겨서 초반에 긴장을 많이 했어요.
그래도 나름 열심히 해서 녹두는 잘자랐어요.
드디어 정성스럽게 재배한 녹두를 수확할 때가 됐는데
그때가 언제나면 7월말부터예요.
녹두는 한꺼번에 수확을 하는 게 아니라 매일 익어가는 걸 따야하거든요.
한참 더울 때 한 달 동안 매일 녹두를 땄어요.
낮에는 너무 더워서 못하니까 매일 아침 저녁으로 녹두를 땄죠.
땀으로 목욕을 하는데 모기들은 신나서 달려들고 녹두는 따도따도 계속 익어가고...
정말 한 달 동안 정신없이 보냈거든요.
제가 태어나서 가장 많은 땀을 흘린 여름으로 기억될 거예요.
그렇게 녹두를 따다보니까 여름이 금새 지나가더라고요.
그리고 녹두 수확을 마치고 저는 병원을 다녀야했습니다.
매일 허리를 숙여 녹두를 따느라 허리가 탈이 나버렸거든요.
병원을 두 달 넘게 다녔어요.
녹두 수확해서 35만원 벌었는데 병원비로 다 날라가버렸죠. 하하하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나니까
내 머리 속을 가득채웠던 지난 날의 악몽들은 어느 사이에 흘러가버렸고
자연의 흐름에 몸이 맞춰지고 먹는 것도 자연에서 얻는 걸 먹으니까 몸도 조금씩 좋아지고
사람들에 치이는 일이 없어지니까 주위의 몇 안되는 사람들이 더없이 소중해지고
사랑이랑 마음을 주고받다보니 애정이라는 게 내 마음에 다시 생겨나고...
그 모든 게 너무도 편안하고 좋은 거예요.
그렇게 행복이 찾아왔죠.
오래간만에 찾아온 행복을 만끽하며 지내고 있는데 세상은 박근혜 때문에 난리가 났어요.
외진 곳에서 혼자 지내는 삶이라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 피부로 와닿지는 않지만 관심은 가거든요.
그렇게 tv로만 세상소식을 접하는데 촛불집회의 열기가 점점 달아오르더라고요.
그 소식을 접하면서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생각도 나고 그랬는데, 집회의 열기가 점점 뜨거워지니까 혼자서 평화롭게 농사 지으며 보내고 있는 제 자신이 불편해지더라고요.
그렇다고 나한테 배신감만 안겨준 운동권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는 것도 싫고...
몇 번을 고민하다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촛불집회에 나가게 됐죠.
그리고는 바로 그 열기에 빠져버렸어요.
2008년이 거대한 용광로 같은 분노의 에너지로 넘쳤다면
2016년은 장작불을 때는 것처럼 뜨겁고 간절한 열망의 에너지로 넘쳤죠.
촛불집회에서 받아온 에너지로 일주일을 보내면서 매주 토요일이 즐거워졌어요.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이후 연말을 넘기면서 집회 열기가 줄어들면서는
일주일 동안 모아놓은 에너지로 촛불집회를 버티는 것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그해 겨울을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보냈더니
봄에는 그 간절함이 이뤄지더군요.
얼마나 기뻤는지...
그렇게 또 한번의 촛불집회를 경험하고 나니 세상에 나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었어요.
그 즈음에 정혜신이라는 분의 세월호 관련한 책을 읽는데 저랑 너무도 비슷한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세월호 사고가 났을 때 tv에서 울먹이는 유족의 모습이 나오니까 “주위에서 사람들이 발버둥칠 때는 나몰라라 하다가 지 새끼가 뒤지니까 저러지”하며 짜증이 확 올라와서 채널을 돌려버렸거든요.
그런 감정이 몇 년 동안 계속 이어졌었는데, 정혜신씨의 책에 그와 비슷한 얘기가 나왔어요.
그게 제대로 치유되지 못한 마음의 상처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됐죠.
그때부터 저를 치유하기 위해서 세월호에 대한 책들을 열심히 읽기 시작했어요.
엄청 무거운 이야기들을 읽으며 깊은 바다 속으로 같이 가라앉았죠.
그때 페이스북을 통해서 우연히 세월호 생존자인 김동수씨를 지원하기 위한 모임을 알게 됐고, 운명처럼 그 모임에 참여하게 됐어요.
10년만에 처음으로 세상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라서 처음에는 긴장을 많이 했죠.
그래서 계속 나갈까말까 고민도 많이 했었는데
김동수씨와 그 가족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제가 보냈던 10년의 악몽이 떠오르더라고요.
그 이유 때문에 모임에 계속 나갔어요.
나중에는 매주 모여서 김동수씨 가족들이 겪어야했던 힘겨운 과정들에 대한 얘기를 듣는 자리가 마련됐는데
그 자리를 꼬박꼬박 참석하면서 서로의 마음이 모아지는 걸 확인하니까 제 자신이 좋아지더라고요.
그렇게 마음의 문이 열리니까 사람들과도 금방 친해지고 너무 좋았죠.
다시 수다스러우면서도 거침없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예전의 제 모습으로 돌아간 듯 했어요.
그렇게 너무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자꾸 제 뒷목이 따끔거리더라고요.
그동안 제 고통만을 부여잡으며 제게 상처를 줬던 사람들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 고통의 기억들을 흘려보내고나니까
제가 상처를 줬던 사람들의 기억이 올라오는 거였어요.
그들도 나로 인해 나와 같은 고통의 시간을 보냈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더라고요.
그 즈음 metoo의 열기가 갑자기 휘몰아쳤죠.
당연히 제가 무수히 저질렀던 성폭력에 대한 기억들도 떠올랐고요.
그리고 저는 불안과 죄책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됐어요.
저의 악행들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제 자신을 까발리기도 했지만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계속 들리더라고요.
그래서 사회적 관계들을 다시 단절하고 혼자만의 세상으로 돌아와버렸죠.
10년만에 찾아온 즐거움과 행복들이 너무도 짧게 끝나버렸지만
예전처럼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았어요.
다시 혼자만의 세상에서 고요함을 즐기고 있다면 이율배반적이죠?
그런데 솔직히 그래요.
딱 지금의 제 상태예요.
행복수치 0인 상태죠.
그냥 0이 아니라 –5에서 올라온 0.
그래서 저는 아직 행복하기는 한데
다시 플러스로 올라갈수도 있고 마이너스로 내려갈수도 있는 상태에 서 있어요.
요즘 100세 인생이 현실화되고 있다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저는 지금 막 전반전을 마친 상태예요.
50년을 달려와서 다시 출발점에 서있는 거죠.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는 모르겠지만
제 삶의 그래프에서 +5까지 올라가는 경우가 한 두 번은 있을테고
-5까지 떨어지는 경우도 한 두 번은 더 있겠죠.
휴~ 잘 헤쳐나가야할텐데...
이상 성민이의 라이프스토리였습니다.
끝까지 들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자, 이제 숨 좀 돌리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네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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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0년 12월 8일 처음 쓰였고
2018년 4월 11일 수정 및 추가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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