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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하면서 살다보니 어느새 늙어버렸네 - 안영순이 살아온 삶

 

 

 

1. 부모님은 없었지만 행복하게 자랐던 어린 시절

 

안영순은 1948년 북제주군 애월면 고내리에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는 할머니와 부모님, 두 명의 언니들이 같이 살고 있었지만 안영순이 갓난아이였을 때 아버지가 일본으로 밀항을 가시면서 헤어져 살게 됐다. 당시 경찰이었던 아버지가 신변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한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일본에 가시게 됐다고 듣기는 했지만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아버지가 일본으로 가시고 몇 년 후 어머니도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밀항을 하는 바람에 어린 세 자매는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다. 아버지는 워낙 어릴 때 떠나서 기억이 없지만, 어머니와는 다섯 살 때까지 살았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남아있었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가 언제든 버스를 타고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버스정류장에 가서 하염없이 기다리며 울었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부모님 없이 자라지만 어린 시절은 비교적 행복했다.

당시 할머니에게 재산이 좀 있어서 어렵지 않게 살 수 있는데다가 아버지가 일본에서 보내주는 돈도 있었기 때문에 크게 고생이라는 것을 모르고 지냈다. 할머니도 성격이 따뜻하셔서 어린 세 자매를 정성스럽게 키우셨고,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작은 고모와 고모부가 많이 돌봐주시며 부모님 역할을 대신 해주셨다. 자매들끼리도 사이가 좋아서 어릴 적 싸웠던 기억 하나 없다.

다섯 살 차이나는 큰 언니가 국민학교에 다니게 되자 어린 막내의 손을 잡고 학교에 같이 가서 자신의 의자 옆에 앉아있도록 했다. 수업시간에는 언니 옆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쉬는 시간이 되면 바닥에 떨어져있던 연필이나 지우개 같은 걸 주워서 언니에게 건냈던 기억도 남아있다.

나중에 국민학교에 들어가서는 운동회 때 기억이 가장 선명한다. 달리기를 잘해서 이어달리기에 출전하면 순위에 들어서 상을 타기도 했고, 점심시간이 되면 할머니와 고모가 차롱에 밥과 반찬을 들고 와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환하다.

고생 없이 자랐다고는 하지만 부모님이 없다는 것은 마음 한편에 큰 허전함으로 남았다. 어느 날 큰언니가 세 자매를 모아놓고 과자를 먹으면서 “우리가 나중에 커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살게 되면,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들 버리고 멀리 가지는 말자”고 했던 말이 아직도 생각나서 눈물이 난다.

 

그렇게 큰 탈 없이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던 중 큰언니가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니 일본에서 아버지에게서 건너오라는 연락이 왔다. 당시 일본과 국교가 수립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일본으로 가기 위해서는 밀항을 해야 했다. 큰언니가 일본으로 떠나고 몇 년 지나 둘째 언니도 중학교를 졸업하자 역시 일본으로 밀항하게 된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할머니와 살던 안영순은 둘째언니마저 일본으로 떠나버리자 많이 외로웠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셋째도 일본으로 보내라는 연락이 왔다. 두 언니는 제주도에서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밀항에 대한 단속이 심해져서 제주도에서 밀항선을 타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부산 영도에서 제주도 사람이 운영하는 하숙집에 들어가서 밀항선을 알아보게 된다. 그곳에서 3개월을 기다려도 배를 구할 수 없자 진해에 있는 이모네 집으로 옮겨 그곳에서 배편을 알아보다가 여의치 않아서 또 다시 부산 영도로 돌아와 하염없이 배편을 기다리게 된다. 당시 그곳에는 일본으로 밀항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어 있어서 배편을 구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게 몇 달은 기다리다가 어렵게 밀항선을 구하게 됐다. 그리 크지 않은 고깃배에 올라타서는 고기를 저장하는 칸 속에 4명씩 들어가서 쪼그려 앉은 채 숨죽이며 출발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후 대마도에 도착했다고 해서 사람들을 내려주고 배가 돌아갔는데, 그곳은 대마도가 아니라 남해에 있는 외딴 섬이었다.

밀항에 실패하고 제주도로 돌아오자 할머니는 “일본에 가지 말고 나랑 같이 살자”고 울면서 손녀를 끌어안았다. 그 후에도 몇 번 일본에 가려고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아서 포기해야했다.

 

제주도에서 할머니와 같이 편안하게 지냈지만 마음은 일본을 향한 채 청소년시절을 보내던 그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1964년 동경올림픽을 개최하게 된 일본은 특별히 재일조선인 자녀들의 일본방문을 한시적으로 허가했다. 당시 동경 거류민단 단장이었던 아버지는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동원에서 자녀의 일본방문을 성사시켰다. 제주도에서 겨우 3명만이 얻을 수 있었던 엄청난 혜택이었다.

할머니와 같이 밀항선이 아닌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가서 부모님과 언니들을 만날 수 있었다. 부모님을 워낙 어릴 때 헤어져서 서먹서먹한 관계였고, 그나마 언니들이 있어서 반갑게 맞아줬다. 감수성 예민한 열일곱 살 소녀였던 안영순은 얼굴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어머니를 만나자 “자식들 버령 여기왕 사난 좋읍디까?”라며 가슴 속 맺힌 한을 풀어버렸다.

 

그렇게도 바라던 부모와 언니들을 만났지만 일본에서 살아가는 가족들의 삶은 만만치 않았다.

일본으로 와서 재혼을 한 아버지는 새어머니와 살고 있었고, 어머니는 일본에 건너온 후 낳은 막내 동생을 돌보며 홀로 살고 있었다. 언니들도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가방공장에서 일을 하며 새어머니의 구박을 묵묵히 참으며 지내고 있었다.

일본에서 지내는 한 달 동안 낮에는 언니들이 하는 가방공장 일을 도와주고, 쉬는 날에는 동경시내 이곳저곳을 구경하면서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자 아버지는 일본에서 학교도 다니면서 같이 살자고 했지만, 할머니는 “야이 어시믄 나 못 산다”면서 손녀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울면서 하소연을 했다. 안영순도 새어머니를 얻어서 살고 있는 아버지도 싫고, 냉정한 성격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정이 별로 없어서 일본에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버렸다. 결국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가족들과의 만남은 한 달로 끝나고 할머니와 함께 다시 제주도로 돌아왔다.

 

제주도로 돌아온 안영순은 고향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게 된다.

생계걱정이나 집안문제 같은 고민거리가 없었던 그는 가끔 땔나무를 구하기 위해 멀리 다녀와야 했던 것이 고생의 전부였다. 저녁이 되면 친구들과 모여서 풀빵을 사먹으며 놀고, 낮에는 남자아이들과 함께 어울려서 산과 들로 놀러 다니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언니들과는 열흘에 한번 꼴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 연락을 하고 지냈고, 가끔 일본에서 이것저것 물건들이 보내지면 주변 친구들은 그런 그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행복하게 10대의 생활을 하던 때 동네 오빠와 달콤한 연애도 하게 됐다. 잘 생긴 외모에 당시에는 드물게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인재였던 그 오빠는 갑자기 베트남전쟁에 자원을 했고, 베트남에 가서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돌아올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만 전쟁터에서 죽고 말았다.

 

2. 결혼과 함께 시작된 고생길

 

고향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행복하게 살던 중 혼기가 찬 그에게 맞선이 들어왔다. 옆 마을에 사는 남자를 소개받아서 몇 달 동안 만나고 있었는데 남자의 부모님이 둘의 사주가 너무 좋지 않다면서 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무산됐다. 그리고 얼마 후 친척분의 소개로 옆 마을에 사는 네 살 연상의 남자를 소개받았다.

남자는 화물선에서 선원으로 일하고 있어서 한 달에 한두 번 배가 들어올 때만 만날 수 있었다. 배가 들어와서 만나면 멋있는 것도 사먹고 영화도 보러 가면서 데이트를 했는데, 잔정이 많아서 다정했던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만나다가 결혼을 하게 됐다. 그때 나이 21살이었다.

 

결혼하고 열흘 정도 시댁에서 지내다가 제주시내에 방을 얻어서 따로 살기 시작했다. 방 하나에 조그만 부엌이 달린 단칸방이었다.

배 타는 것이 싫다고 했더니 남편은 뱃일을 그만두고 운전면허를 땄고, 대형화물차 회사에 취직을 했다. 하지만 운전경력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 1년 동안은 조수로 일해야 했다. 당시 조수는 견습기간이라서 월급이 없이 차비 명목으로 아주 적은 돈을 받고 일해야 했다.

결혼을 할 때 일본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목돈을 보내주셨는데 결혼식 비용을 제하고 남은 돈이 500만원이었다. 당시로는 꽤 큰 금액이어서 그 돈으로 집도 구하고 생활비도 해나갔다. 시아버지는 매우 자상했고, 시어머니도 무난한데다가 시누이들과도 사이가 좋아서 시댁 식구들과도 무난하게 잘 지냈다.

 

결혼 후 1년이 지나서 첫 아들이 태어났고, 남편도 조수생활을 끝내고 정식으로 운전을 하기 시작하면서 가정의 틀이 잡혀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후 조금 더 방이 넓은 집으로 이사를 했지만, 단칸방이긴 마찬가지인데다가 주인이 물 쓰는 것까지 깐깐하게 간섭을 해서 눈치가 많이 보였다.

그 후로 딸 둘이 더 태어나면서 단칸방 생활이 북적거리면서 정신없어 지기 시작하자 어머니가 전세자금을 보내줘서 방이 두 개인 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이사 간 집은 주인이 서글서글하고 정이 많아서 살기에 너무 좋았다. 그래서 그 집에서만 10년을 넘게 살게 된다.

 

대형화물차를 운전하던 남편은 좀 더 좋은 직장을 알아본다며 3년 만에 그만두고 회사 사장 운전기사, 택시기사 등으로 자꾸 직장을 옮겨갔다. 직장을 자꾸 옮기면서 생활이 불안정해지고,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집에 가져오는 돈도 줄어들었다. 셋이나 되는 아이들은 자라기 시작하는데 생활은 점점 어려워지자 결국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가게 됐다.

당시 친지방문 목적의 비자는 6개월이 기한이고, 한 번 다녀오면 최소 2개월은 지나야 다시 비자가 나오기 때문에 일본에서 6개월 일하고 돌아와서 2개월 후에 다시 일본에 가는 삶이 반복됐다. 어린 아이들은 시누이에게 맡겨두고 가야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일본에 있는 언니네 가방공장에서 일을 했다. 당시 재일조선인들은 대부분 가방공장이나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가방공장의 경우 집에 재봉틀을 대여섯 대 들여놓고 물량을 받아와 일하는 구조였다. 그래서 큰언니네 집에 살며 보조로 이 일 저 일을 하며 일을 배워갔다.

언니네 식구들에게 미안해서 아침 7시부터 청소를 하며 하루 일을 시작하면 밤 10시까지 일을 했다. 그리고 조카들과 한 방에서 자며 지냈는데, 이모를 많이 따랐던 어린 조카들을 보면 제주도에 두고 온 자식들이 생각나서 밤마다 많이 울기도 했다.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갈 때면 큰언니가 직접 만들어준 아이들 옷을 바라바리 챙겨서 돌아오기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도 어린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이 가장 마음 아프게 남아있다.

 

그렇게 6개월을 일하고 돌아오면 300만 원 정도의 목돈이 생겼지만, 집으로 와 보면 빚만 늘어나 있어서 좀처럼 삶이 나아지질 않았다. 한 직장에 정착하지 못하는데다가 술을 너무 많이 먹는 남편 때문에 싸우기도 많이 했고, 말다툼은 종종 매질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 와중에 뒤늦게 막내 딸도 태어나게 되면서 삶은 더 힘들어져갔다.

 

일본에 가서도 언니네 가방공장의 일감이 줄어들어서 그곳에서 일하는 것이 어렵게 되자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불고기집에서 일을 하게 됐다. 식당 근처에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하숙집이 있어서 방 하나에 세 명이 함께 살며 식당을 드나들었다.

그 식당은 꽤 큰 식당이어서 종업원들이 많았는데 일본말을 하지 못하는 그는 주방에서 설거지와 청소를 맡아 하게 됐다. 정신없이 밀려드는 설거지거리에 몸은 힘든데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어서 구박도 많이 받았다. 그렇게 매일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일을 하고 일요일에 쉬는데, 쉬는 날에는 목욕을 하고 부족한 잠을 자다보면 시내 구경 한 번 갈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일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식당으로 찾아와서 빵을 건네줬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렇게 수시로 일본을 드나들며 돈을 벌었지만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직장을 자주 옮기던 남편은 개인용달차 운전을 하면 돈이 된다는 말을 듣고 용달차를 한 대 사게 됐다.

개인용달은 직장생활보다 돈이 됐지만 크고 작은 사고들이 문제였다. 당시에는 보험이라는 것이 별로 없던 시절이라 사고가 나면 고스란히 차주가 물어내야 했다. 좁은 시장골목에서 물건을 싫고 내리고 하다가 사람이라도 치이게 되면 치료비와 합의금으로 큰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타격이 컸다.

그때마다 친척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녀야 했는데 사채금리로 돈을 빌렸기 때문에 이자도 만만치 않았다. 어렵게 돈을 빌려서 근근이 이자 갚다가 일본 다녀와서 어느 정도 빚을 갚아나가다 보면 사고가 나서 또 돈을 빌려야 하는 악순환이었다. 그런 생활이 오래되다보니 친척 중에 한 분과는 관계가 틀어져서 연락도 하지 않고 지내게 됐다.

일본을 가지 못했을 때는 파출부로 일을 하기도 했다. 신제주에 새로 들어선 아파트에 사는 젊은 새댁네 집에 가서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빨래, 설거지, 청소, 반찬 만들기 등을 했다. 일당이 5천원이었는데 부족한 생활비를 메우는 데는 조금 도움이 됐다.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가는데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남편이 어느 날부터 집에 돈을 가져오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남편의 동료에게서 남편에게 여자가 생긴 것 같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수소문 끝에 그 여자가 일하는 곳으로 친한 언니들과 같이 찾아가서 남편과의 관계를 정리하라고 요구했더니 다음날 남편이 술에 취해서는 집안 가구들을 때려 부스며 엄청난 매질을 해댔다.

둘째가 태어났을 때도 술을 먹고 술집여자를 집에까지 대리고 왔던 남편이 떠올라 지긋지긋했지만 아이들 때문에 이혼은 생각하지 않았다. 어릴 때 큰언니가 동생들을 모아놓고 “우리가 나중에 커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살게 되면,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들 버리고 멀리 가지는 말자”했던 말이 그때마다 생각나서 참고 참으면서 살았다.

그렇게 20대 30대의 시절이 지나갔다.

 

3. 삶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하니 몸이 아파오고 늙어가기 시작했다.

 

10여 년 동안 용달차를 운전했지만 돈을 모으지는 못한 남편은 고민 끝에 용달차를 팔아버리고 일본으로 돈을 벌러 갔다. 두 번 정도 일본을 다녀왔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고민할 때 아는 사람이 애월농협에 기술직 자리가 있으니 지원해보라고 알려줬다. 비교적 안정적인 일자리였기 때문에 경쟁률이 높았지만 몇몇 사람들의 도움으로 애월농협에 취직할 수 있었다.

애월농협에 다니려면 애월읍에 거주해야 했기에 고내리에 있던 친정에 새로 집을 지어서 들어가게 됐다. 집을 짓기 위해 또 돈을 빌려야 했지만 안정된 직장이 있어서 큰 걱정은 아니었다. 그 즈음 시아주버니가 시댁재산을 몰래 처분하고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남의 집에서 살던 시어머니도 모셔 와서 같이 살게 됐다. 시어머니는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치매가 나타나기 시작해서 7년 동안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남편이 안정된 직장을 구했다고는 하지만 기술직이어서 월급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 학비가 지원됐기 때문에 살림에 큰 도움이 됐고, 아버지 명의로 있던 밭에서 농사도 지으면서 부족한 생활비를 메워나갔다. 아직 빚은 남아있었지만 이곳저곳 돈을 빌리러 다니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남편이 짐을 싫고 육지로 출장을 나가곤 했는데, 고속도로에서 오래 운전을 하다보면 졸음이 몰려와서 위험할 때가 많다고 했다. 그래서 남편이 출장을 가게 되면 같이 가서 조수석에 앉아 있곤 했다. 2박3일 정도 일정으로 나가서 육지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바람을 쏘이는 기분이어서 좋았다.

아이들도 자라서 아들은 육지로 떠나고 딸들은 학교 졸업해서 취직도 하기 시작했다. 딸들이 돈을 벌어오면서 빚들도 조금씩 갚아가기 시작해서 지긋지긋했던 빚더미에서도 탈출했다.

 

아버지 명의의 밭에서 몇 년 동안 농사를 지어왔는데 아버지가 그 밭들을 팔아서 일본에 있는 둘째 부인의 자식들에게 물려줘버렸다. 그 일 때문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틀어지기도 했는데, 그런 아버지도 얼마 후에 돌아가셔버렸다. 친정 밭을 빼앗겨버려서 다른 친척언니의 밭을 빌려 농사를 이어갔다. 농사는 혼자서 하는 일이라 큰돈은 되지 않았지만 뭔가 자기 일을 꾸준히 하면서 잡념들을 지울 수 있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살면서 나이가 들어가다 남편이 정년퇴직을 할 즈음, 큰 딸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며 받은 퇴직금으로 밭을 하나 사게 돼서 퇴직한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지어갔다. 남편과 같이 일하게 되면서는 서로 일하는 방식이 달라 크고 작은 싸움이 많아 힘들기도 했다. 자기 밭에 비닐하우스를 지어서 쪽파농사를 짓다가 나중에 감귤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감귤농사는 밭작물에 비해 일도 편하고 돈도 더 돼서 좋았다.

 

그렇게 조금씩 삶이 펴져갔는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50대 중반쯤 됐을 때부터 가슴이 답답해지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가슴에서 열도 올라오고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꽉 막혀 버려서 너무 힘들었다. 증상이 나타나서 너무 힘들면 마을에서 떨어져 있는 비닐하우스에 가서 한참 동안을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마음 속 응어리들을 쏟아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고함을 지르다보면 조금은 답답함이 불렸다. 그와 함께 우울증도 와서 이래저래 힘겨운 시기였다. 그때 딸들이 결혼해서 따로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아프다고 하면 급히 달려와서 병원에도 데려가는 등 딸들도 고생이 많았다.

병원에서 받아온 약도 잘 듣지 않아 병원을 몇 번 옮겨 다니다가 우울증이 아니라 화병이라면서 약을 바꿨더니 조금씩 증상이 나아지기는 했다. 젊었을 때 모든 것을 가슴 속에 담아둔 채 참으며 살아왔던 것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렇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4~5년 정도 고생했던 화병은 조금씩 나아졌지만 밤에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은 여전해서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오랫동안 먹어야 했다.

 

딸들은 결혼해서 잘 살아서 별다른 걱정도 없었고, 귀여운 손자들 보는 재미도 좋았다. 나중에 육지에서 살던 아들도 고향으로 돌아와 살게 되면서 농사는 아들에게 넘겨주고 큰 딸이 하는 민박에 청소를 하러다니면서 일들을 줄여나갔다.

민박 청소 일이라도 꾸준히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 적적하지는 않았는데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하면서 민박 일을 하지 못하게 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서는 남편이 폐암 판정을 받게 되면서 병간호를 하게 됐다. 남편은 폐암 말기인데다가 나중에 파킨슨병까지 겹쳐서 오는 바람에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갔다. 똥오줌까지 받아내면서 힘들게 간호하는데 정신이 오락가락해진 남편이 욕을 하고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결혼하고 한 번도 행복하다고 느껴보질 못했을 정도로 평생 고생만 시켰던 남편이 막판에도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그렇게 속을 썩일 때면 정말 미웠다. 그런 남편이 2년 동안 누워 있다가 죽고 나니까 집에 혼자만 남게 됐는데, 미웠던 남편이라도 옆에 없으니까 너무 허전하고 쓸쓸했다.

 

남편이 죽고 1년쯤 지나니까 적적한 것은 어느 정도 견딜만해졌는데 이곳저곳 몸이 아픈 것이 제일 힘들다. 아픈 곳이 많아서 수술도 하고 약도 많이 먹지만, 정신과약을 너무 오래 먹으면 치매가 올 확률이 높아진다고 해서 밤에 잠을 자기 위해서 먹는 약을 조금씩 줄여나가고 있다. 그래서 잠을 자는 것이 힘들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노력은 해보고 있다.

치매 예방을 위해 색칠하기도 하고, 수영도 다니고, 낮에는 드라마도 재미있게 보고 하면서 지내는 것이 요즘 일상이다. 몸 아픈 것만 조금 나아지면 민박에 가서 소일거리로 청소라도 하면서 지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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