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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빈, 105일 단식 투쟁 끝에 옥사 - 박준성

이한빈, 105일 단식 투쟁 끝에 옥사

살다보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현실에서 뿐 아니라 역사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새롭게 알게되면서 가슴 찡하게 만드는 인물들이 있다. 지난번에 보았던 강주룡이나 이번에 소개할 이한빈이 내게는 그런 인물이다.
해방 후 첫 번째 메이데이는 1946년 5월 1일이었다. 메이데이를 앞두고 <전국노동자신문> 4월 26일자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위원장 허성택의 연설문이 실렸다. <전국노동자신문>은 전평의 기관지였다. 연설문 제목은 "피투성의 歷史를 살리자. 鋼鐵갓치 뭉치고 싸우자. -메-데-에 際하야 勞動者 동무들에게"였다. 이 연설문에서 허성택이 소개한 인물이 이한빈이었다. 그때 말투와 한자 표현을 바꾸어 다시 소개하면 이렇다.

특히 여러분에게 소개하려는 것은 함남 신흥 출생 이한0(李翰0) 동지는 1929년 신흥 탄광 습격사건으로 망명하다가 1936년 검거되어 5년형을 마치고, 강도 일제가 만들어 놓은 정치 예방구금소에 구금되면서부터 "정치 운동자를 내놓으라" "예방구금소를 철폐하라" "야만적 박해와 비인간적 취급을 하지 말라"는 등 7개 요구를 내 걸고 두 번 단식 투쟁을 하여 적지 않은 승리를 하였으나 놈들은 제일로 미운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그에게 온갖 모략, 위협, 00 무고와 테러를 하였기 때문에 분을 이기지 못하여 1943년 3월 1일 단식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놈들은 단식한지 20여일 후에도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국 일본에 대한 반역자임으로 죽이라고 말로서 다할 수 없는 능욕을 가하였습니다. 그는 단식한지 백 오일 만인 6월 13일에 39세의 생을 마치고 영원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뼈만 남았던 그는 죽기 삼일 전에 나에게 부탁하기를, 나는 더 살 수 없으니 나의 뒷일을 동무들이 계승하여 조선 독립을 완성하기를 바라며, 만일 동무가 살아 나가거든 동무들에게 일제가 이같이 나를 죽인 것을 전하여 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았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여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지 못하다가, 오늘 이 기회에 소개합니다. 그는 적과 가장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비참하게도 장렬한 전사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선배들은 생명을 아끼지 않고 이와 같이 싸웠습니다. 우리들은 선배들의 위대하고 장렬한 투쟁을 본받아 이 기념을 통하여 더욱 굳게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전평 위원장 허성택과 정치예방구금소에 함께 갇혀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가 소개하지 않았다면 눈길을 끌지 못했을 이한빈이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조선노동자신문>에서 '李翰彬'의 마지막 彬자가 보이지 않아 안타까웠다. 얼마 뒤 전평을 연구하는 역사학연구소 안태정 연구원이 <해방일보>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면서 기사를 복사해주었다.
이한빈(李翰彬)! 이렇게 해서 이름 석자를 찾았다.
이한빈 이름 석자를 가지고 짤막한 글을 쓰고, 강의할 때 소개를 하곤 했다.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다른 자료를 찾던 중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나온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을 보았다. 일제 식민지 시대 검거 투옥되었던 인사들의 신상기록 카드를 모아 출판한 자료집이었다. 아, 여기에 이한빈의 신상기록 카드가 실려 있지 않은가. 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 찡할 사이도 없이 눈물이 주루루 흘렀다.
맞다. 본적이 함남 신흥이고, 1905년 생이니까 단식 투쟁 끝에 목숨을 잃은 1943년이 우리 나이로 39살이다. 허성택은 신흥 탄광 습격 사건을 1929년이라고 했는데, 16년전 일이라 연도를 잘못 기억한 모양이다. 1930년 6월에 함남 신흥 탄광 노동자 150여 명이 탄광시설을 파괴한 사건을 말하는 것 같다. 신흥탄광습격 사건 뒤 망명할 때는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 공산대학 속성반을 수료하기도 하였다. 이한빈이 5년 동안 감옥살이 한 것은 1925년부터 식민지 조선에 적용하기 시작한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이었다. 일본에서 사회주의운동을 탄압하려고 만들었으나 식민지 조선에서는 사회주의운동을 포함한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던 악법이었다. 5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풀려 나왔다가 다시 잡혀 들어간 정치예방구금소는 일제가 1941년에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제정하여 전향하지 않은 사상범을 검거하여 격리 수용한 서대문구치소 안의 강제수용소였다. 해방이 되었을 때 예방구금소에서 풀려난 사람들은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비타협으로 투쟁하던 사회주의자.민족해방운동가들이었다.
이한빈은 단식 투쟁을 하다가 예방구금소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살아서 해방을 맞이하지 못했지만, 허성택의 말대로 "우리들의 선배들은 생명을 아끼지 않고 이와 같이 싸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방 후 50-60만 명되는 조합원이 가입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를 만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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