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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근 - 혁명을 위해 죽음을 서두른 여성 테러리스트

추근 - 혁명을 위해 죽음을 서두른 여성 테러리스트

날카로운 단도를 손에 든 차림으로 찍은 추근(秋瑾 1875~1907)의 사진은 여성 혁명가의 삶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조용하면서도 차분한 혁명에 대한 결의가 잘 드러나 있는데, 그녀가 일본 유학 시절에 찍은 사진이다. 그는 너무 일찍 피었다가 죽음을 서두르듯, 혁명에 실해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여자다.

<자객 열전>을 애독하다

양무운동이 실패하고 변법운동도 좌절되자, 청나라를 타도하자는 극단적인 혁명 운동이 중국 대륙을 뒤흔들었다. 그 혁명운동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추근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녀는 칼을 사랑했고, 사마천의 <사기> 가운데서도 <자객 열전>을 애독했다.
사마천은 <자객 열전>에서 여러 자객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진 시황제의 목을 노린 연(燕)나라의 형가에 열정을 기울이고 있다. 그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진나라의 장수 번어기는 황제의 미움을 사 연나라로 망명 해온다. 그는 자신을 받아준 연나라에 은혜를 갚기 위해 형가가 시황제 암살을 수행하는 데 미끼로 쓸 수 있도록 스스로 목을 찔러 죽는다. 형가는 그 목을 들고 시황제를 찾아가 암살 기회를 노렸지만 결국 실패하여 죽고 만다. 번어기나 형가 모두 자신의 목숨을 던져 진 시황제를 죽이려 했다.

추근은 이 두 사람을 특히 좋아했다.
추근은 청나라의 광서제가 즉위한 그해 1875년 푸젠성의 아모이에서 태어났다. 청나라 관료였던 할아버지의 임지가 아모이였기에 추근의 부모도 동행했던 것이다. 1890년 추근은 할아버지를 따라 그의 고향 소흥으로 갔다.
그 당시 여성이 학문을 배우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추근은 교양이 풍부한 어머니 덕분에 사숙에서 시와 서를 배웠다 또한 외가의 영향으로 창술과 검술, 승마 등을 배우기도 했다.
1894년 아버지가 후난성으로 부임하자 추근도 그곳으로 갔다. 1896년 스무 살 때 추근은 그 지역 부호의 장남 왕정균과 결혼했으며, 다음 해 1897년에는 장남이 태어났다.
그리고 2년 뒤 남편 왕정균이 돈으로 관직을 사는 바람에 추근 가족은 베이징으로 이주했다. 1901년에는 장녀가 태어났다. 그런데 이 베이징행이 추근의 인생을 완전히 바구어 놓았다. 시야가 넓어지자 추근은 도저히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추근은 베이징에서 만난 이웃 오지영에게 많은 여향을 받게 됐는데, 그녀는 남편 직장 동료의 아내였다. 그녀는 시화 서화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추근은 오지영과 사귀면서 새로운 출판물을 보게 되었고,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어떻게 여성이 자립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자신의 출세를 인생의 목적으로 생각하는 남편과의 괴리감 때문에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일반적인 남자였던 그녀의 남편에게도 남녀평등을 주항하는 여자를 데리고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추근은 이혼하려 했다. 그러나 이혼은 터부였다. 관료인 남편은 같이 살 수 없는 여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혼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혁명 운동에 가담하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한 이후 일본으로 유학 가는 중국 젊은이가 많아졌다. 1906년경에 그 정점을 이루었는데, 한때는 1만 명이 넘을 정도였다. 이른바 제1차 일본 유학 붐이다. 제2차 유학 붐은 중국의 개혁.개방 시대가 시작된 1980년대부터 이다.
추근은 처음에는 미국 유학을 생각했으나, 1904년 중국 철학 연구자인 핫도리 우노기치의 아내 시게코를 만나면서 그 생각을 바꾸었다. 그녀와 몇 번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추근은 일본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핫도리 우노기치는 경사대학당(베이징대학의 전신)을 개설하는 데 힘을 기울인 인물로, 그 당시 베이징에 살고 있었다. 그는 뒷날 도쿄제국대학에서 중국 철학을 가르쳤다.
추근의 남편은 물론 그녀의 일본 유학에 반대했다. 그는 유학을 단념시키려고 경제적인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추근은 자신의 물건들을 팔아서 유학 비용을 마련했다. 남편은 자식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설득했지만, 추근은 어린 자식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속박당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두 아이는 유모에게 맡기기로 했다.
1904년 7월, 추근은 일본에 도착했다. 그녀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일단 도쿄 칸다에 있는 청나라 유학생 강습회에서 그녀는 일본어를 배웠다.
그런데 추근은 학교보다는 다른 데서 많은 것을 배운 것 같다. 즉 그녀는 청나라 타도를 지향하는 비밀 결사 단체 ‘삼합회’에 들어가 사격 훈련을 받고, 그곳에서 폭탄 제조법도 배웠다.
일본에 온 지 반년이 된 1905년 초, 추근은 유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일시 귀국했다. 그러나 남편은 역시 한 푼도 내놓지 않았다. 결국 소흥에 사는 어머니가 옷가지를 전당포에 잡혀 돈을 마련해주었다.
추근은 그때 두 살 연상의 소흥 출신 서석린을 만나 의기투합했다. 간단히 말해 두 사람은 행동과 실천이 앞서야 한다는 데에 의견 일치를 본 것이었다. 추근은 서석린의 소개로 저장성 사람들의 혁명 단체인 ‘광복회’에 들어갔다.
1905년 7월 추근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녀는 그 시대의 교육자로 유명한 시모다 우타코가 설립한 짓센여학교 부속 청나라여자사범대 공예속성과에 들어가 교육과 공예, 간호학 등을 배웠다. 이때 돈이 보족했던 추근은 걸어서 학교에 다녀야 했다.
여기서 추근의 인생과 혁명가 쑨원의 인생이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쑨원은 도쿄에서 ‘중국혁명동지회’를 결성하여 청나라 타도를 지향하는 모든 혁명 단체를 통합하려 하였다. 여기에 다수의 유학생이 가담하였고, 추근도 가입했다.

루신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다

유학생들이 혁명 운동에 가담하면서 일본은 혁명의 기지가 되었다. 청나라 정부는 그 문제로 골치를 썩이면서 일본 정부에게 유학생의 혁명 운동에 제재를 가해달라고 요청했다. 일본 정부는 그 요청을 받아들여 ‘청나라 유학생 규제 규칙'을 제정했다. 일본의 언론도 ’방종비열(放縱卑劣)‘이라는 말로 유학생들을 비판하고 나섰다.
유학생들은 거기에 반발하여 항의하고 나섰는데, 그 주장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항의 의사 표시로서 일단 공부를 그만두고 귀국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단은 자중하면서 일본에서 공부를 계속하자는 것이었다. 추근은 첫 번째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때 유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진천화의 자살 사건이다. 후난성 출신의 진천화는 추근과 동갑으로 1903년 일본으로 유학을 왔고, 도쿄에서 발표한 그의 계몽서 <경세종警世鍾>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혁명 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는 다음 해인 1904년 창사에서 봉기를 꾀했지만, 정보가 누출돼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런 그가 1905년 오모리 해안에서 투신자살했다.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자신의 몸을 던짐으로써 유학생들의 행동을 촉구하려 했던 것이다.
진천화의 자살 후, 추근은 더 강력한 목소리로 전 유학생의 일시 귀국을 주장했다. 그녀는 귀국에 동의하지 않는 유학생을 반동으로 취급하여 ‘사형에 처한다’고 선언했다. 추근은 격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듯, 품고 있던 일본도를 빼내 연단에 꽂으며, “조국으로 돌아간 뒤에 만주 정부에 투항하여 동지를 배신하고 한족을 억압한다면 나의 이 칼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추근에게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 가운데는 후일 작가로서 이름을 떨치는 루신도 들어 있었다. 루신은 추근보다 여섯 살 아래로, 그 당시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루신은 귀국 종용에 동의하지 않고 계속 공부했다. 루신이 의학을 그만두고 문학으로 방향을 바꾼 것은 다음 해 1906년의 일이었다.
추근에게는 그 당시 아직 무명이었던 루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신은 추근의 그 강렬한 개성을 잊을 수 없었다. 그가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19년, 춘근에 대한 추모의 정을 듬뿍 담은 <약藥>이란 단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교육열을 불태우다

추근은 언행일치를 주장하고 실천에 옮겼다. 한 가지 예로 일시 귀국의 주장을 스스로 실천에 옮겨, 1905년 연말에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로 향했다. 그녀의 일본 체류는 고작 1년에 지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는 일본 땅을 밟지 않았으므로.
귀국한 추근은 고향 소홍으로 돌아가, 그 지역의 여학교 교사가 되어 일본어와 위생을 가르쳤다. 성실하게 교사의 임무를 다하면서 남녀평등과 여성의 자립에 대해 열성적으로 젊은이들을 이끌었다. 그러나 학부모들은 그 혁명적인 여교사에게 불안을 느끼고, 학생들을 선동하는 선생이라고 비난했다. 그 때문에 추근은 고작 몇 달 만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추근은 상하이로 옮겨 여성을 위한 잡지 창간을 시도했다. 자금 조달 때문에 고생을 했지만, 1907년 1월에 <중국여보中國女報> 창간호를 냈다. 그녀는 ‘창간사’에서, 여성의 자립, 여성의 해방을 호소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배워야 하고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식이 없고 의지가 부족하여, 자립하지 못하고, 한 곳을 세워주면 다른 곳에서 쓰러지고 마는 것이 우리 여성 세계의 폐단이다. ...... 우리나라 여성을 생기발랄하고 용맹한 정신을 가진 인간으로 만들고, 진취적인 기장을 가지게 하여 하루라도 빨리 광명의 세계로 인도하고 싶다.”

두 달 후에 <중국여보> 제2호가 발간되었다. 그러나 자금을 조달하지 못해 제3호는 빛을 보지 못하고 정간되고 말았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잡지 편집을 하면서도 추근은 청나라를 타도하려는 혁명의 열정을 불태웠다. 그녀에게 혁명이란 무장 봉기를 의미했다. 그래서 폭탄을 제조하다가 폭발사고를 일으켜 손에 화상을 입기도 했다.
추근은 <중국여보>의 창간호를 낸 다음 소홍으로 돌아갔다. 혁명 동지인 서석린이 소홍에 설립한 사범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기 위해서였다. 서석린과 그 동지들은 학교를 혁명의 기지로 삼으려 했다.
추근의 인생은 서석린을 만난 이후 그의 인생과 깊이 얽히게 된다. 서석린은 1901년, 그의 고향 소홍에서 수학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소홍의 관리가 그를 중용해준 덕분에 1903년에는 오사카 박람회 시찰 명목으로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 그는 일본의 혁명파 유학생들과 의기투합하여 청나라 타도를 결의했던 것이다.
귀국 후인 1904년 말에는 저장성 사람들로 구성된 혁명 단체인 광복회에 가입했다. 추근의 광복회 가입도 서석린이 이끈 것이었다. 서석린은 청나라 관료 조직 내부에서 정부 전복을 기도하기 위해, 친척이기도 한 은퇴한 청나라의 고관을 활용했다. 그는 서석린에게 예전에 자신의 부하였던 안후이 순무 은명을 소개해주었다. 안후이 순무는 안후이성 전체의 행정과 군사를 책임지는 자리이다.
전 고관 덕분에 서석린은 은명의 신뢰를 받아 안후이성 육군학교와 경찰을 책임지는 자리에 기용되었다. 서석린은 관리의 직위를 이용하여 봉기 준비를 갖추면서 무기를 모았다. 그리고 혁명운동을 지원하는 사람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상하이에서 총과 탄환을 구입하여 소홍으로 옮겼다. 또 그는 빈 창고를 학교로 개조하여, 그 학교에 무기를 저장했다. 추근이 교장으로 취임한 것은 바로 그 무기고인 ‘대통사범하교’였다.
이 학교는 6개월 코스의 체육과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오로지 군사 지식을 가르쳤고, 체조를 통해 체력을 단련시켰다. 겉으로는 나라를 위해 싸울 군인을 기르는 일이었지만, 서석린과 추근에게는 혁명 예비군 양성이었다. 추근은 남장을 하고 말을 타거나 배를 타고 학교로 출근했다. 소홍은 운하가 많은 도시였기 때문이다. 고향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그 여자 교장을 지켜보았다.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가느냐

서석린을 비롯한 광복회 회원들은 안후이성과 저장성에서 동시에 봉기하기로 결의했다. 당초의 계획으로는 우선 1907년 7월 8일 안칭시에서 행해지는 안후이순경학당의 졸업식에 맞추어 봉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지전에 은명의 사정 때문에 경찰학교의 졸업식이 7월 6일로 예정보다 이틀 당겨지고 말았다.
서석린이 봉기에 즈음하여 준비해둔 대중에 대한 고시(告示)는 ‘모든 악의 근원은 만주 정부가 서민을 우롱하고 한족을 학대하는 정책이며, 항복하지 않는 만인은 죽일 것이고, 한간(漢奸, 만주에 협조하는 한족)으로서 반성하지 않는 자도 죽인다’라는 것이었다.
식장에는 순무 은명을 비롯한 안후이성의 고관들이 모였다. 식이 시작되려고 할 때 서석린은 갑자기 은명에게, “오늘 혁명당이 봉기할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것이 신호였다. 서석린의 동지가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불발이었다. 그러자 서석린은 장화 속에 감추어두었던 총을 빼들고 은명에게 발사했다. 서석린은 심한 근시라 한 발로 처리하지 못했다. 은명은 그 자리에서는 죽지 않았지만 결국 총상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서석린과 두 동료는 30여 명의 졸업생들과 함께 무기고로 달려갔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대에 포위되었다. 미리 약속해둔 청군 내부의 혁명파 군인이 움직여주지 않는 바람에 결국 네 시간의 전투 끝에 서석린은 사로잡히고 말았다. 처형은 다음날 행해졌다.
그러나 추근이 그의 죽음을 안 것은 7월 10일이었다. 독자적인 정보망이 아닌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보고 서석린의 봉기 실패와 처형 소식을 알게 됐던 것이다. 그녀는 가장 절친한 동지를 잃고는 식음을 전폐하고 울기만 했다.
정부는 곧 추근이 서석린의 동료란 것을 알아차렸다. 7월 11일 약 300명의 군대가 추근을 체포하기 위해 항저우에서 소홍으로 행했다. 추근은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동지들은 그녀에게 도망치라고 권했으나 추근은 도망치기를 거부하고 그냥 소홍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옥에 가지 않는다면 누가 간단 말이냐. 혁명은 피를 흘려야 비로소 성공하는 것이다. 내가 단두대에 오르면 혁명이 5년은 빨라질 것이다.”
추근은 자신의 목을 기꺼이 혁명의 제단에 바치려 했다. 7월 14일 추근은 대통사범하교에서 체포되어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처형되었다. 그녀의 나이 서른셋이었다.
청나라 정부는 추근에게 처형당하기 전에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가족과 친구에게 편지를 쓰게 해줄 것, 처형할 때 옷을 벗기지 말 것, 처형한 후 목을 매달지 말 것을 요구했다. 첫 번째 요구는 거절당했지만, 다른 두 가지 요구는 받아들여졌다.
추근은 봉기를 준비할 때 남긴 문서에 이렇게 적었다.

“지금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가까이는 200년에 달하는 한민족 노예화의 수치를 씻고, 멀리는 이조만리의 풍성한 대지에 신제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현재 소홍 시내 추근이 처형된 자리에는 ‘추근 열사 기념비’가 서 있다.


- ‘반역자’중에서, 아라이 도시이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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