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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51회 – 성찰의 봄

 

 

 

1

 

이웃 마을에서 저희랑 같은 품종의 감귤을 재배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부모님과도 친분이 있어서 가끔 소식을 주고받는 사이입니다.

3년 전에 남편이 돌아가시고는 혼자서 농사를 지어오시고 있어서

물어볼 것이 있으면 가끔 제게 연락을 하곤 하십니다.

같은 품종을 재배하고 있기는 하지만 저 역시 배우며 해나가는 입장이라 난감하기는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얘기해드리며 서로 도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확이 다가오면 그분에게서 전화가 자주 옵니다.

감협에서 왔다갔느냐, 언제쯤 수확할거라는 얘기는 없느냐, 시세는 어떻다느냐 같은 소소한 것들을 자꾸 물으시는데

처음에는 이렇다 저렇다 답변을 해드리다가 나중에는 짜증이 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 역시 수확을 앞두고 이래저래 신경 쓰이는 것들이 있는데

그런 전화를 자주 받으면 괜한 조바심이 제게도 전해지기 때문이죠.

며칠 전에도 연락이 와서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보는데

살짝 짜증이 나서 상대에게 마음이 전해질 수 있을 정도로 건성으로 대답을 해버렸습니다.

 

그렇게 전화 통화를 마치고 났더니 마음이 조금 불편하더군요.

저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감귤 농사를 오랫동안 해 오셨던 분에게 귀찮을 정도로 자주 전화를 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그랬고

그분에게도 가끔 전화를 해서 이런저런 정보들을 알아보기도 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감귤농사에 대해 조금 알아가기 시작하니까 교만한 마음이 움트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감귤 수확을 하면 해마다 주변에 나눠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까이 사시는 친척 할머니, 농사에 대해 이래저래 도움을 받았던 친척 형님, 아버지가 각별하게 대하셨던 분, 과거 인연이 아직도 이어져서 마음을 전하는 분 등 많지는 않지만 수확의 즐거움을 나누곤 합니다.

그렇게 나눠드리면 어떤 분은 고맙다며 가벼운 답례를 하시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반가운 전화 통화로 마음을 전하시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그런 고마움을 전달받는 것도 귀찮아서 동생을 통해 전달하기도 합니다.

뭔가를 바라는 것 없이 저한테 있는 것을 그렇게 나눌 수 있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이 몇 년 동안 이어지다보니 마음이 묘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감귤을 드릴 때마다 답례를 해주셨던 분들은 답례가 들어올 것을 미리 계산하게 되고

답례 없이 전화로만 마음을 전하시는 분은 그 연락이 립 서비스로만 들리게 되고

이럴 때 아니면 제게 연락 한 번 주지 않는 현실이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뭔가를 주고도 이렇게 마음이 불편할 거면 차라리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런 제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봤더니

역시 교만함이 자리를 잡아 뿌리를 내리고 있더군요.

처음에 그분들에게 수확물을 드렸을 때는 관계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렇게 제 자신을 추스르면서 세상으로 조금씩 나아가려는 노력이었죠.

그런데 이제 어느 정도 홀로서기를 할 수 있게 되고 보니

관계의 소중함과 순수한 고마움보다는 나의 이로움과 주고받는 계산이 앞서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교만함을 바라보며

마음의 안정을 위한 명상 대신

마음의 정화를 위한 108배를 했습니다.

그렇게라도 제 마음에 자리 잡은 교만함을 뽑아내고 싶었습니다.

 

 

2

 

대장내시경 검사를 했습니다.

검사를 앞두고 장을 비워내기 위해 약을 먹고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는 과정이 조금 힘들었지만

장을 깨끗이 비우고 났더니 몸이 가벼워서 좋더군요.

가벼워진 몸과 조금 긴장된 마음을 안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병원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와 의사 특유의 무뚝뚝한 말투와 사회적으로 번진 의료에 대한 반감 등이 겹친 가운데

불편한 자세로 장시간 이어진 내시경 검사를 견뎌야했습니다.

검사가 끝난 후 장의 불편함을 참으면서 사무적이고 건조한 의사의 설명을 듣고 병원을 나왔습니다.

 

병원을 갔다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불편했던 문제를 해결했다는 개운함과 함께

뭔가 속 시원하지 않은 불안감이 달라붙어 있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빌어먹을 의료시스템과 의사들을 비난하곤 하지만

누군가를 비난할수록 마음만 어지러워지니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기 위해 주문을 외워봅니다.

 

“내가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나길 원합니다.

내가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것처럼

모든 생명들이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나갈 바랍니다.”

 

 

3

 

노숙인들에 대한 두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한 권은 노숙인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의를 하시는 분의 얘기였고

한 권은 여성 노숙인 당사자들의 얘기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자세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아래로부터의 연대와 온기

질퍽한 환경 속에 삐뚤어지는 마음

같은 것들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지금의 저를 자꾸 돌아봤습니다.

한때 그들과 특별히 다를 바 없는 환경에서 살아오다가

지금은 분명 그들보다 나은 조건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그들 곁으로 돌아갈 것도 아니고

간접적으로도 그들을 향해 손길을 내밀 것도 아니면서

그들의 얘기를 듣고 그들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애써 그 의미를 찾아봤습니다.

그들의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해서

당당했던 과거의 나 앞에서 주눅 들지 않기 위해서

내게 상처를 줬던 이들과 화해하기 위해서

내가 상처를 줬던 이들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서

세상을 밝히는 힘을 느껴보기 위해서

 

책을 덮고 사랑이와 함께 산책을 나선 길에

감귤농판장에 묶여 살고 있는 강아지를 만났습니다.

어린 강아지가 제대로 된 돌봄도 받지 못한 채

그곳에서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매일 지켜봅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자주 다가가서 친해지려고 노력하지만

가끔씩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사랑이는 그 강아지를 싫어하고

저도 조금 조심스럽게 다가가곤 합니다.

하지만 매일 마주치는 그 강아지를 외면할 수는 없기에

산책할 때마다 간식이라도 챙겨주려고 노력합니다.

지금 제 조건에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이 강아지입니다.

 

 

 

(문시연의 ‘마음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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