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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농의 샘, 보는 이의 마음까지 경건하...
- 12/13
타는 목마름으로 남몰래 불러봤던 이름, 목이 터져라 외쳐봤던 이름, 모진 시련 속에 마침내 쟁취했던 이름, 민주주의!
한쪽에서는 민주주의의 과잉을 얘기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민주주의의 후퇴를 얘기하는 이 때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인가?
현장민주주의의 핵심은 대중과 함께 토론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대한이연은 그 전통을 유지하면서 현장을 지켜내고 있다.
“현장에 문제점이 발생하면 쉬는 시간에 조합원들 소집을 해서 ‘부서에 이런 이런 문제가 있다’ 쭉 얘기를 하고, ‘이 문제가 비단 그 사람의 문제냐. 누구든 찍히면 잔업을 안 시킬 수 있는 거 아니냐. 이건 문제다’라고 서로 공유를 하고, ‘그러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라고 물어보죠. 그러면 조합원들이 ‘가서 얘기를 해라’ ‘어떻게 하자’ 얘기를 하죠. 그러면 요구를 명확히 걸죠. ‘부서 관계자는 명확히 사과하고, 이거에 대해서 잘못된 것은 고쳐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부터 잔업거부 하겠다’ 그리고 잔업거부 들어가는 거예요. 잔업거부 들어가면 부서에서 요구가 올 때도 있고, ‘부서장 처벌해라’ 같이 회사를 상대로 얘기해야 하는 큰 사안 같은 경우에는 회사에서 전무가 직접 오는 경우도 있어요. 내부적으로 그런 것들이 해소되면 잔업 풀고... 그런 식으로 투쟁을 하는 거죠.”
- 대한이연 양선배
적발한 투쟁 공간에서 현장민주주의는 가장 모범적인 형태로 드러나곤 한다. 대중주체의 직접민주주의는 하나하나의 대중을 주체로 만들기 위해 최소 단위에서부터의 민주적 공동체운영에서 나타난다. 2001년 폐업에 맞선 갑을전자노조 투쟁과 장기간 노조 탄압과 구조조정에 맞서 투쟁을 벌였던 호텔리베라노조의 사례는 투쟁시기 현장민주주의의 생생한 모범을 보여준다.
“10명 단위로 8개 조를 짜서 조장들이 있어요. 농성을 하다보면 몸이 아파서 늦게 나올 수 있는 건데, 조합원들이 ‘얄짤 없다. 누군 안 아프고 안 힘드냐? 규율을 분명하게 해야 된다’ 그래요. 나는 오히려 그렇게 하면 위화감 생길 수 있고 단결이 저해될까봐 걱정했는데... 조합원들이 조합원 투표 붙여서 압도적 다수가 ‘그렇게 해야 된다’ 해서 했어요. 조별로 출석 체크 다하고, 마지막에 일괄 정리할 때 출석률에 근거해서 지급했어요. 그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노동자 규율인거 같더라고요. 돈 한 푼 더 받고 이런 문제가 아니라...
출근은 아침 8시까지 해서 그날 저녁 6시까지 일정이에요. 밤에는 2개조씩 돌아가면서 자고... 연대집회나 이런데 안 나가면 아침 집회부터 30분 하고 20분 쉬고 이런 식으로 계속 해요. 지루함 없이 해요. 그 진행은 간부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조별로 조원들이 나와서 하게 해요. 전체 율동에, 조별 율동에, 노가바(노래가사 바꾸기) 만들기, 구호 만들기 이런 것도 쭉 진행하고... 저는 로비에 앉아 있은 적이 거의 없어요. 맨날 회의도 해야 되고, 바쁘니까... 간부들 다수가 그랬어요. 간부들 바쁘니까 위에 있고, 조합원 자체적으로 다 운영했어요. 투쟁이 짜증스럽고 위험한 것이 아니라 진짜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이어올 수 있었던 거고... 그러면서도 빡쎘어요.”
- 갑을전자노조 전 위원장 김소연
“그때 우리도 투쟁조직을 9개조로 운영했어요. 이게 2001년에 만들어져서 2003년 파업투쟁에 그대로 이어지고, 2004 폐업투쟁에도 그대로 갔어요. 지금도 사람들 그대로 모임을 하고 있어요. ‘노동조합 아니면 안 돼!’ 이런 것들이 조합원들 머리에 다 박혀서... 노동조합이 그 개개인에 대해서 끈끈한 것이 굉장히 강해요. 여기 안 나오면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사수대 포함해서 한 조당 평균 20여 명 되는 9개조를 완벽하게 운영을 하고... 여기서 철저하게 조별토론을 통해서 문제점이나 조별 안건이나 이런 것들을 모으고... 이 토론들을 꾸준히 했어요. 조별 문제제기를 안건으로 만들고 전체토론을 하고, 이게 전체토론의 내용이 아니다 그러면 전체투표 하고... 본인이 어떤 날 한마디를 하더라도 이게 전체토론 시간에 나오는... ‘내가 뱉으면 이게 실제 이뤄지는구나’하는 것을 굉장히 모범적으로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 호텔리베라 박홍규
현장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운영은 구성원을 중심으로 갇히는 순간 내부의 형식으로 축소되고, 공동체는 고사한다. 90년대 초반부터 구로노동자문학회 활동을 해왔던 송경동의 경험은 이를 보여주고 있다.
“노동자문학회 활동 하는 과정에서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안 되는 지점이 있더라고요. 중간에 회원 조직의 한계를 느꼈던 거 같애요. 써클화 되는 운동에 대해서도 고민이 됐고... 저는 구로노동자문학회가 처음 설립했던 취지의 활동을 밀고 나가는 게 맞다는 고민을 했었으니까요. 나중에는 있는 회원들끼리의 친목모임처럼 자꾸 가게 되더라고요. 다른 사업들은 축소되고 자르고... ‘그런 것들을 넘어서 어떻게 가야 되나?’ 그래서 ‘전문적으로 노동자나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노동자문학교육센터 이런 걸로 갈 필요가 있지 않나?’ 이런 고민을 했었죠. 그런데 잘 소통이 안 되더라고요. 아직은 동력이 있다고 생각이 되니까... 회원들 모이고, 맨날 즐겁고 그러니까 좋잖아요.
전형적인 활동들이 안 만들어지다 보니 활동가층도 안 만들어져요. 모두가 조금씩 밖에 책임이 안 돌아가는 조건이다 보니 그랬죠. 그러면 자연스레 자신을 더 투여할 곳들을 찾게 되요. 구심력은 자꾸 줄어들고 원심력만 생겨나가는 것을 보았죠.”
- 시인 송경동
민주적 과정을 통해 의사결정이 이뤄졌다고 하더라도 그 민주주의가 누구의 민주주의인가 하는 문제에 따라 다른 결정이 나올 수 있다. 대전지역에서 의료생활협동조합운동을 벌이기 위해 2000년 병원과 한의원을 열었던 대전의료생협은 병원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이런 문제를 경험한다.
“처음에 병원 이름을 짓는 것이 큰 고민이었어요. 그래서 이쪽 지역주민들한테 직접 물어봤습니다. 그 당시 나왔던 여러 가지 의견 중에 ‘주민의원’ ‘행복한 의원’ ‘건강한 의원’ 이런 것 몇 가지를 해가지고 거리에서 스티커를 붙이는 거리투표를 했어요.
그렇게 해서 하나가 결정이 됐는데, ‘지역주민들한테만 의사를 물어볼 것이 아니라 300명이나 되는 조합원들한테도 의견을 물어봐야 할 것이 아니냐?’라는 수정제안이 나왔어요. 그 중의 한 분이 ‘이름을 민들레로 하자. 우리가 대전지역에서 이런 이런 취지로 의료생협을 만들었고, 이게 단순히 하나의 병원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척박한 이 땅에 의료가 소외받지 않고 보건예방 활동을 하는 여러 가지 목적이 녹아드는 병원을 세운 것은 민들레꽃을 하나 심은 것과 같고, 앞으로 계속 퍼져나가야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얘기를 한 거예요.
그래서 그때 저희들이 처음으로 한 조합원 사업이 그겁니다. 실무자들이 전화를 일일이 다해서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거의 압도적으로 ‘민들레’가 좋다는 거예요. 지역주민들 하고는 정서가 약간 달랐던 거죠.”
- 대전의료생협 조병민
민주주의가 구성원 중심의 이해에 갇히는 그곳에서 관료주의가 싹튼다. 2004년 민주노총의 핵심 사업장인 현대자동차에서 현장조사활동을 벌였던 공유정옥이 보았던 모습은 관료적 노동조합운동의 전형이었다.
“제가 소재공장을 담당했는데, 소재공장이 10개가 있어요. 토요일날 오전에 조합 사무실이 비어 있잖아요. 이만큼 큰 궤도가 벽에 붙어 있으면, 종이를 대서 지도를 그렸어요. 그걸 복사기로 축소복사 축소복사해서 작게 축소를 했어요. 그걸 놓고 지도를 외웠어요. 공장이 흩어져 있으니까 내가 맡은 공장이라도 외워야 된다 싶어서... 그리고 현장에 갈 때마다 ‘여기가 몇 번 문이고, 여기가 게시판이고, 조합원들은 여기서 쉰다’는 걸 지도에 표시를 했어요. 하나하나 메모해놓고 계속 봤어요.
나중에 주철공장 출신의 활동가 차를 얻어 타고 대자보를 붙이러 가는데 경합금공장을 가게 된 거죠. ‘이렇게 도셔서 저기 문이 있는데, 거기로 가면 게시판이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나보다 더 잘 아냐?’고 그래요. 그러면서 얘기하게 되니까 자기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20년을 다녀도 자기 일하는데, 대의원을 하더라도 자기 선거구 밖에 모르는 거예요.
회사가 보기엔 ‘거기 운동하는 놈 있어? 걔 영역 요만큼’ 이거잖아요. ‘걔 괜찮아. 뛰어봤자 거기까지야’ 이런 거잖아요. 위원장급으로 튀는 사람만 몇 사람 쳐주면 되니까. ‘이거 되게 허름한 시스템이다’ 싶었어요.
대의원들이 자기 선거구 관리하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라인을 가다가 ‘여기까지가 내 선거구기 때문에 더 이상은 안내하지 못 한다’ 그래서 ‘그쪽 선거구 들어간다’고 전화를 하더라고요. 너무 황당했어요. 그런데 상집들이건 현장 활동 하는 사람들이건 자기 나와바리(구역)가 있어서 딱 그만큼인 거예요. 그걸 깰 수가 없는 거죠. 이 경계의 문을 열어야 하는데...”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공유정옥
구성원들의 이해에 갇힌 조직은 조직보존논리에 의해 타 조직과 대립하기도 한다. 다양한 구성원들이 모여 있는 학교라는 공간에는 조직 대상을 달리하는 여러 개의 노동조합이 공존한다. 그런 조건에서 노동조합 간의 이해대립은 왕왕 발생한다.
“최근에 전교조하고 공무원노조 교육기관본부하고 다툼이 있었거든요. 그게 뭐 때문에 그랬냐 하면... 학교 환경조사 하는데 그게 ‘보건교사가 할 일이냐’ ‘학교 행정실에서 할 일이냐’는 다툼이 있었는데... 교육부 지침이 해석을 애매하게 내렸어요. 공무원노조 교육기관본부는 해석하기를 ‘이거는 보건교사의 일이다’라고 해석을 하고, 전교조 보건위원회에서는 ‘이거는 행정실에서 할 일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그래서 서로 다투기까지 했어요. 서로 ‘우리 할 일 아니다’고 자지 주장을 하는 거예요.
학교 환경문제라고 하면 교사도 아니고 학교 행정실도 아니고 자치단체에서 할 문제지 학교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와 가지고 오염도 얼마 되고 측정하고 하는 거는... 전체적으로 자치단체 내의 시설 관리하고 하는 거는 지방자치단체에서 할 문제지 학교에서 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전문적인 문제도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이 있는데, 그거를 각자의 자기 요구로만 하는 거예요.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그게 각자의 요구일 수밖에 없는 거는 현재의 제도 틀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그거는 서로 소통하고 하면서 공동의 요구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 전교조 부천지부 최덕현
관료주의에 질식되는 민주주의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자생적으로 꿈틀대는 흐름들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관료화된 질서는 그런 흐름을 쉽게 제압해버린다. 2005년 부산지하철 매표소노동자들의 집단해고에 맞선 투쟁에서 우창수는 살아있는 광장민주주의를 위한 시도를 해보았다.
“부지매(부산지하철매표소해고자투쟁)는 부산지역에서 비정규직투쟁으로서 굉장히 중요한 투쟁인데... 지침에 의해서 조직되고 협상테이블에서 진행되는 투쟁이 아니라 연대의 기풍이 아래로부터 복원돼야 하겠다. 그런 공간으로서 어떤 게 필요한가? 그러면 문화제를 해야 되겠다. 그래서 부지매 동지들을 만나서 ‘시청 앞 광장에서 촛불문화제 합시다. 일단은 1주일에 두 번을 합시다. 엠프나 이런 거는 제가 구해오겠습니다. 처음에 사회도 제가 보겠습니다’ 그랬어요. 그래서 노문위, 소금꽃, 학생 등에 제안을 하고...
그때 내가 왜 처음에 사회를 맞았냐 하면... 소위 말하는 촛불문화제 하면 짜여진 극본 안에서 끕들만 발언하고 그런 거는 하지 말아야겠다. 대중적으로 선전하는데 연대하고 싶으면 누가나 그날 오면 대중적으로 함께 참여하는 것을 해봐야겠다. 그래서 순서도 없고 발언자도 없는 거예요. 내가 노래를 처음 한 곡 하고,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느끼는 데로 얘기하고... 처음에는 내가 계속 노래했죠. 문화패들이 가끔 오면 노래하고 얘기하고... 두 달쯤 지나니까 부지매에서 사회도 보고... 그래서 잘 됐어요.
광장정치, 그게 강의가 필요한 게 아니라, 교육시간이 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대하면서 선배노동자가 와서 하는 얘기 듣고 경험하고 이런 게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그 역할도 했어요.
이게 4~5개월 넘어가니까 이벤트화 되데요. 민주노총이 들어오고 그러면서 부산시장 선거할 때 하남식(부산지하철 매표소 무인화를 추진했던 당시 부산시장 후보)이 있는 데로 농성장을 옮겼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날짜도 바뀌고 지역본부에서 하는 문화제로 바뀐 거죠. 끕들 나오고, 순서가 정해지고 이런 거예요.”
- 노동가수 우창수
자신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들을 모색하게 된다. 조직 내부의 민주주의와 조직 간의 민주주의 문제로 내홍을 겪었던 제주참여환경연대는 지역사회에 녹아드는 민주주의를 고민하게 된다.
“시민단체가 성장과정에서 단 한 명, 또는 몇몇이 사실상 단체 활동의 주를 형성하게 됩니다. 많은 정보가 단 한명, 몇몇을 중심으로 모이고 따라서 조직 내 의사결정의 상당한 부분을 주도하고, 그것이 조직을 키우는데 큰 힘이 되기도 했는데, 한편에서는 비판적인 요소가 되는 거죠. 지역 사회에서 다른 단체와의 연대에 있어서도 늘 견제대상으로 되요. 우리가 의제를 늘 선점하고 있으니까...
저는 그 그늘에서 계속 성장을 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일을 더 빨리 배울 수 있었기는 한데, 그걸로 인한 고민도 굉장히 많았죠. 나는 다른 사람하고 일을 안 해봤으니까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제가 사무처장을 하면서 조직의 중심에서 일을 하는 할 수 있는 위치에 서고, 새로운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죠.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리더십이 요구되는 것 같은데, 이를테면 의제세팅이나 독자적인 활동력보다는 연대나 지역 시민사회와 함께하려는 일종의 네트워크 리더십이 중요해진 것 같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연대할 수밖에 없는 굵직한 현안들이 많았고, 그렇게 하다 보니까, 실제로 다른 단체들의 눈에도 우리 단체에 대한 평가가 달라져 있다는 걸 느껴요.”
- 제주참여환경연대 고유기
2007년 부산에서 넘나들면서 울산과학대투쟁에 결합했던 우창수는 현장민주주의가 구성원 안에서만 민주적이고 공개적인 것이 아니라 밖을 향해서도 민주적이고 공개적일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고 강조한다.
“과학대는 전술과 전략이 아주 공개적인 거예요. 내가 농성장에 참여하는데, 할 수 있는 게 그대로 전력과 전술이 되고 집행이 되는 거예요. 이게 제대로 되니까 문화패가 시너지 효과를 낸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화요일 와서 농성장에서 노래배우기 하면서 즐겁게 놀고, 수요일 집회에 와서 대중적 공간에서 노래 부르는 거였거든요. 전략과 전술이 공개되면서 모여 있는 연대단위들에 의해서 공동으로 집행되고 실천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거예요.”
- 노동가수 우창수
7년을 싸우면서 비리재단을 민주화시켜낸 에바다학교투쟁은 민주적 공동체운영과 연대투쟁의 모범이었다. 재단이 민주화된 그곳의 민주주의는 더 많은 관심과 참여를 요구한다.
“저도 10년 20년 후에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거예요. 개인에 의지하다보면 사람이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항상 어디가도 요구를 하는 게, 에바다에 함께 했었던 사람들이 ‘이제 에바다는 잘 돌아가겠지. 느그가 알아서 하겠지’ 그런 거는 상당히 무책임하다는 거예요. 그거는 에바다투쟁의 의미를 같이 싸웠던 사람들이 희석시키는 거다. 계속 에바다의 건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개인에게 맡겨 놓을 것이 아니고, 계속 감시를 하고 견제를 하고 같이 함께 참여하고 이렇게 해야죠.
에바다투쟁 과정 자체가 전국적으로 볼 때도 모범적인 모델이 될 수 있었듯이 투쟁 이후에서도 투쟁에 같이 했던 사람들이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감시하고 같이 참여하면서 운영해나가는 과정에서도 하나의 좋은 모델을 만들어가야 한다. 투쟁할 때는 오히려 쉬울 수가 있거든요. 운영하는 것은 투쟁할 때보다 더 힘들고 어려울 수 있거든요. 그런 부분들만 꾸준히 이어진다면 에바다가 가장 모범적인 케이스로 성장할 수 있다고 보는 거고, 그렇게 됐을 때 많은 장애인시설 운영하는 사람들한테는 발목을 잡는 대비를 명확하게 시켜버리는 거예요.”
- 에바다학교 권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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