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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활동가 유미희 이야기

민주노조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던 시기에도 대공장의 그늘 속에서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채 투쟁을 이어갔던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힘겨움과 고통이 많다. 울산 남구지역에서 활동을 이어왔던 유미희 동지를 만나 그 삶과 투쟁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67년 부산에서 태어난 유미희는 86년 부산대 사회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기자가 되고 싶었던 유미희가 맞이한 대학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다방에서 하는데, 가보니까 내가 생각했던 대학생들은 거기 아무도 없는 거야. 흔히 생각하는 낭만적 분위기에 젖어 있는 사람도 없고, 잘생긴 선배도 없고... 남자 선배들은 그 당시에 유행했던 야상을 까만 물 들여서 입고, 수염들 기르고... 여자 선배들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사람들이 깨제제 하고, 담배나 빡빡 피우고 있고... 그런 분위기였어요. 되게 암담한 느낌을 받아서 놀래기도 하고...

노래라는 걸 처음 가르쳐주는 게 ‘타는 목마름으로’를 가르쳐 주는데, 노래가사에 ‘피’도 들어가고... 그런데, 리듬이나 가락이 나한테 이상한 울림을 주더라고요. 한편, 거부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

뒷풀이를 갔는데 지하 학사주점에 간 거야. 짬뽕 국물, 오뎅 국물, 튀김 이렇게 해갖고 소주가 쫙 나오는데... 나는 그전까지는 소주 한 잔도 안 하던 고등학생이었거든요. 친구들이 술 먹으면 ‘너 그렇게 타락하면 안 된다’ 그랬으니까. 소심한 거지. 더 벗어나면 힘들어질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76학번 선배가 소주를 먹으라고 억지로 그러는 거야. 그렇게 불쾌할 수가 없더라고요. 주변에 같이 온 남학생 동기들도 끌리는 스타일들도 아니고, 고등학교 때 술 먹고 담배 피우던 그런 학생들 같더라고요.

그날도 술 한 잔씩 되니까 돌아가면서 노래도 부르고 그러는데, 선배들이 되게 암울한 세상 얘기를 하는 거야.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그때 대학이라는 곳이 내가 생각해왔던 낭만이나 그런 것과 다른 현실이 있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느끼면서... 돌아올 때 ‘내가 이 과를 계속 다녀야할까?’하는 고민을 할 정도로 두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했고...”

 

사회학과라는 과의 분위기 속에서 학회와 학생회 주변에 자연스럽게 있게 됐지만, 그 기간은 갈등의 기간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과의 분위기와 내 안에 나의 욕구가 계속 충돌하면서, 과에 계속 다니면 내 양심상 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은데, 이 길이 너무 무섭고 두려운 거라. 그 당시에는 운동권 학생이라는 이미지가 되게 무섭게 각인돼 있던 시기라서 ‘내가 운동권 학생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데, 운동권이 안 되면 학교를 못 다니겠는 거라.

그때 애학투련(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이라고 건대사건이 터졌어요. 그때 소문들이 쫙 돌았는데 ‘사람들이 떨어지고 난리가 났다’는 그런 얘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수업거부하고, 학생총회가 열리고 그랬어요. 그때 내가 최초로 분임토론이라는 걸 경험했어요. 1학년들끼리 모여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최소한 이런 것은 해야 되지 않겠냐?’하면서 수업거부를 결의해 가는 거지.”

 

1학년을 마치고 이어진 겨울방학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시작했다.

 

“나는 86년 겨울방학 때 최대의 고민에 빠지는 거지. 계속 다닐 거냐 말거냐. 경험한 세상이 너무 무서운 거지. 금요일마다 학교 앞에서 시위를 하는데, 그 앞에서 벌어지는 폭력적 상황을 봐야 하는데 보지 못하고, 가까이 가서 그 상황을 직면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두려움이 많더라고요.

그렇게 겨울방학을 고민하면서 보내고 있을 때 87년 1월 14일 박종철 열사 사망사건이 발생하고, 선배들의 비상연락이 쫙 오는 거야. 가서 얘기를 듣고, 그 다음번에는 엄마한테 발목이 잡히면서 집 밖에 못 나갔어요. 근데, 엄마가 잡기도 했지만, 내 두려움이 굉장히 많았던 거고...

그리고 연이어서 계속 집회와 시위가 이어지면서 개학을 맞이한 거야. 2학년 때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 거죠. 1학년 때는 뭔가 엄혹한 분위기였다면, 2학년 때는 책에서 읽었던 대중투쟁과 봉기의 가능성을 발견한 거죠.

처음에 4월달부터 학민투(학원민주화투쟁)부터 들어가요. 단과대부터 단식 들어가고... 우리의 과제는 연구사(대학 내에서 학생들에 대한 감시 사찰 업무를 전담했던 직원)를 쫓아내는 거, 학생들을 감시해서 강제 징집 보내는 교수들 쫓아내는 거. 여기저기서 봤을 때 사회적 정당성이 무르익을 때였어요.

그 당시만 해도 학교에서 16개 단과대가 있었는데, 8개는 민주화된 학생회고, 나머지 8개는 어용 학생회라고 부르고 있을 땐데... 학민투가 초반에 벌어질 때는 이 8개가 참가를 안 하는 거예요. 반쪽짜리로 시작을 하다가, 단과대 총회를 하면서 나중에 전체 총회를 하게 되면서 그들도 참여하게 되고...

그러다가 공과대가 쫙 붙게 되는 과정이 있었어요. 공과대가 4천명이라서 여기가 일어나야 뭔가 되는데 여기가 안 일어나는 거야. 그래서 사회대에 여학생들이 많은데, 우리가 가서 좀 폭력적인 행동을 했죠. 가서 고추를 잘라 던지고, 그런 걸 했어. 그래서 공대 학생들이 되게 열 받은 거야. 그 다음날인가 자체 총회를 하고 4천명이 줄 지어서 사회대로 다 쳐들어왔더라고요. ‘일단 우리가 집회에 나간다. 그런데 사회대 느그들한테 사과를 받아야겠다’ 그러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공과대가 나오니까 그 다음에는 나머지 단과대도 쫙쫙 붙어가지고, 대학원생까지 해서 2만 명이 있었는데, 거의 1만5천씩의 집회가 계속 되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막판에 총장이 나와서 사과하고... 그게 끝날 무렵에 87년 6월항쟁이 물고 이어진 거야.”

 

격렬한 대중투쟁 속에 87년을 보내면서 자신의 두려움과 싸워야 했던 유미희는 3학년이 되면서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된다.

 

“3학년이 되니까 내가 선배가 되는 거잖아요. 4학년들은 졸업하거나 현장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선배가 될 준비가 하나도 안 돼 있는 거야. 늘 갈등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밑에 후배들이 들어왔는데 내가 이 후배들한테 무슨 얘기를 할 것인가? 내가 온 몸을 던지지 않는다면... 그래서 내가 조직을 찾았죠. 내가 되게 아끼고 좋아하는 후배들이었는데, 이 후배들에게 뭔가 나눌 수 있는 거를 가지고 싶었고, 더 이상의 방황은 없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고...

그렇게 생각해서 ND(민족민주)계열의 선배를 선택했어요. 그 선배는 그동안 봐왔던 인간적인 신뢰나 이런 것들을 중심으로 해서 찾게 되더라고요. 막상 들어가 보니 조직이 와해 직전에 있었던 가야. 졸업한 선배들은 현장으로 가 버리거나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처음에 나한테 ND 학습을 시켜준 그 선배도 현장으로 가야겠다고 해서 가버리고... 그래서 그 보다 더 학습능력이나 이런 게 탁월했던 선배가 있었는데, 그 선배하고 학습을 하면서 내가 정말 깨지는 게 많았어요. 전위에 대한 것이나 이론학습을 다시 하면서 ‘여기에 이만큼의 심오한 가치판단이나 이런 게 있었구나’ ‘어떤 삶이 여기에 뒷받침 되는구나’하는 철학적 사유가 이전의 사회과학적 지식하고 다르게 다가오는 거예요. 그때 확신이 서는 게 있었어요.

그 선배가 지역의 몇 개 대학의 86학번들을 모았어요. 86학번 친구들이 16명이 있었어요. ‘우리는 현장을 가야 된다. 이제 너희들이 학생운동 안에서 남아야 된다’ 그러는데 우리는 지역의 센터가 될 준비가 안 돼 있는 거지. 대중적인 기반을 갖고 있지 않고, 소수파 그룹으로 존재하면서... 마지막으로 9박10일 사상학습을 하러 MT를 갔어. 그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이 조직이 가지고 있었던 사상적 갈래와 그런 거에 대한 집중적인 토론을 해요.

그 뒤로 우리가 지역의 센터로 서는데, 센터 밑으로 기반이 너무 없는 거예요. 후배가 없어요. 학교에 있는 후배들이 학습팀으로 묶이는 게 거의 주사파로 다 묶여가고, 소위 좌파라고 하는 사람들은 몇 개의 팀을 갖고 있고, 또 PD(민중민주)계열도 있잖아요. 소수들이 얼마나 잘 났는지 비밀도 많고, 다른 것도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 그럴 때였어요. 그렇게 센터가 되면서 ‘우리는 뭘 할 거냐?’ ‘대중적으로 가자’하면서 노선논쟁을 시작하게 됐고, 결론적으로 초정파로 구성하는 선진학생투쟁조직인 민학련(민주주의학생연맹)을 만들게 되요. 그 뒤에 통민학련(통일민주학생연맹)과 서민학련(민주화투쟁학생연합)을 만나게 되요. 이 친구들은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고, 우리는 지방에서 활동하는 소수파였고...”

 

이후 ND계열의 학생조직들은 전국조직인 민학련(민주주의학생연맹)으로 통합하게 된다. 부산지역 민학련도 이에 합류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공안기관의 표적이 됐고, 곧 중심 활동가들에 대한 수배로 이어진다.

 

“민학련을 띄우고 나서 수배가 떨어져요. 수배가 되면서 집을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거예요. 무수한 갈등 속에 선택과 동시에 4학년이 되면서 수배가 되는 거지. 그전까지 엄마한테 말을 안했었는데, 집에 가서 짐을 챙기는 과정에 엄마를 발견하고 ‘갑니다. 못 들어옵니다’ 그러고... 엄마는 나를 불러봐야 소용이 없는 거고... 그때가 내가 제일 크게 엄마한테 배신을 한 순간이었던 거고...

그 이후로 2년을 수배생활을 해요. 그때 내 나이가 23살 때였어요. 그때까지 엄마가 ‘딸이지만 대학공부 시켜야 되겠다’해서 대학에 보내고 자랑스러워했는데... 내가 집에 늦게 들어오고 그러면서 약간 걱정을 하고, 책들 보면서 ‘불 태워라’그러면서 그렇게 말리고 그래도 ‘내 딸이 운동권 학생은 절대 안 될 거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때 내가 폭탄을 날린 거죠.

그러고 나와서 학교에 있는 조직 사무실에서 기거하고 바깥 잠을 자기 시작한 거죠. 내가 원래 간이 크지 않거든... 그리고 엄마를 전면에서 배신할 만큼 냉정한 인간이 못 되거든...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낸 거지. 그때 가위눌리는 게 되게 많았어요. 눈만 감으면 무서운 탈들이 막 덮치는 거야. 그래서 밤새도록 잠을 못 잤는데... 늘 그런 밤들을 보내고... 한 번씩 엄마를 만나면 김치 넣은 김밥하고 ‘쌕쌕 오렌지’랑 같이 학교 그늘에서 주고...그걸 받아오면서 돌아서 가는 엄마를 생각하면 미치는 거지. 대학 졸업식 날 나는 수배자라고 졸업식장엘 못가는 거라. 엄마는 혹시나 해서 학교에 왔다가 졸업장과 앨범을 받아들고 집에 와서 통곡을 했다고... 우리 엄마는 내가 간첩의 돈을 쓸까봐 돈을 밀려서 그 당시에 20만원씩 붙여주셨거든. 그렇게 하면서 엄마도 같이 수배를 받고 있는 거예요. 그 2년 동안 우리 엄마가 못 먹던 술을 맨 날 먹고, 맨 날 기도하고 다니시고...

나는 보위 때문에 이리 저리 짐 싸서 옮겨 다니면서 이완 없는 긴장상태를 이어가고 있었죠. 스무 서너 살에...”

 

학생운동을 마칠 즈음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과 접촉을 하게 되고, 비합법 정치조직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91년 조직의 파견으로 울산의 동양나이론에 입사하게 된다.

 

“그 당시에 ‘두 가지 전술(투텍)’에 입각해서 편집부 라인으로 간 친구들과 현장 라인으로 간 친구들이 있는데, 각자 자기가 선택하기도 하고 조직적 선택에 의해 가기도 해요. 나는 ‘죽어도 현장을 가서 대중 활동을 하겠다’고 해서 현장을 선택한 거죠. 만약에 취업이 계속 안 됐으면 나도 편집부 라인으로 갔을 건데... 편집부 라인으로 간 친구들이 문건이나 이런 거 나오면 갖다 뿌리는 거, 우리는 현장에서 사람을 만나는 거. 현장모임들은 다 분리돼 있어요. 동양나이론 소조가 있고, 현대자동차 소조가 있으면 소조별로 모임을 하죠. 보위 때문에 서로 교류는 없어요. 심지어 애인하고도 옆에서 뭘 하는지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회의를 엄청 했는데 무슨 회의를 했는지 솔직히 모르겠어. 실제로 현장 활동을 할 틈은 없었고... 그렇게 활동을 했어요.

그때 월 30~40만원을 받아서 조직에 내고 활동비를 받아 사는데, 다들 어려울 때라 차비가 없어서 걸어 다닌 적이 많아요. 조직선으로부터 연락을 받으려면 다방에 가서 삐삐를 치고 기다려야 되는데, 커피 값이 없어서 조금 있다가 사람 오면 시키겠다고선 물만 마시고 연락받고 돌아서 나올 때가 많았어요. 참... 부끄럽고 서러웠죠.

한번은 라면하나 살 돈이 있어 라면을 끓여 먹다가 잘못해서 쏟아 버렸는데...

91년 11월쯤에 조직사건이 터지면서 사람들이 잡혀 가는데, 나는 모르고 있었어요. 나는 아는 언니 집에 가서 가고 있었는데, 똑 똑 그러는 거예요. ‘누구십니까?’ 그러니까 ‘다 알고 왔습니다’ 이러는 가야. ‘어떻게 해야 되나? 서류들이나 이런 거 불 태워야 되나?’ 이런 갈등 하는 속에 다른 대응을 할 수 없는 속에 들이 닥친 거지.

울산에 며칠 있다가 서울 장안동 대공분실로 갔는데 참 무서웠거든. 거기서 많이 맞았고... 내 후배인 연정이가 동양나이론에 있었는데 같이 잡혔다는 것을 알았지. 이 친구가 내 맞은 편 방에 있다는 걸 알고 조사받으면서 ‘살아서 만나리라’하는 노래를 부른 기억이 있어. 얘한테 들리라고... 그때 조사 받을 때 형사들이 밤새도록 번갈아가면서 공갈하고 잠을 못 자게하고... 초긴장상태였지. 역할 바꿔서 부드럽게 하는 놈이 있고, ‘야, 씨발년아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하면서 사정없이 두들기는데, 그거는 정말 공포스럽거든...”

 

사노맹 사건으로 연행됐던 유미희는 결국 사노맹 건이 아닌 민학련 건으로 구속 수감돼 첫 징역살이를 하게 된다. 그리고 출소 이후 정치조직 활동을 정리하게 된다.

 

“내가 민학련 때부터 상명하달이라는 조직의 질서가 너무 힘들었어요. 나름대로 조직에 배신감을 느꼈던 거는 그렇게 지키라고 하던 보위들을 윗선에서 안 지킨 게 드러난 거잖아요. 그리고 대중투쟁에 대한 관점이 조금 달랐는데 이런 게 계속 어긋나는 거야. 또 솔직하게 얘기하면 다시 감옥에 가는 게 너무 싫었고 수배와 긴장이 두려웠기도 해요. 다시 우리 엄마한테 배신감을 주고 싶지 않았고...”

 

출소 이후 부산에서 문화 활동을 고민하기도 했지만 다시 울산으로 돌아오게 된다.

 

“부산에서 연극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인사는 해야되겠다고 해서 울산으로 온 거죠. 우리 때문에 같이 구속됐었던 현장 분들이 출소를 했어요. 그 분들 석방 환영식 하는데 가서 현장사람들을 만나게 된 거죠. 거기서 발견하게 되는 게, 우리로 인하여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대공분실도 왔다 갔다 하게 되고, 너무 많은 피해를 입었더라고요.

내가 여기에 들어올 때는 평생 노동자로 산다고 생각하고 들어왔거든요. 내가 노동자로 살 거기 때문에 현장 활동을 한다고 생각하고 들어왔단 말이지. 이런 의미는 내가 살아가면서 같이 공유하지 않으면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는 거지. ‘느그 학출(학생운동출신)들은 와서 한 판 사건치고 가면 되는 거 아이가? 남은 우리는 뭔데?’ 이런 얘기를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하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그게 성립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또 결심을 하게 되는 거지.”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를 중심으로 대규모 대중투쟁이 벌어지던 동구, 북구와 달리 남구지역은 대중투쟁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해고자들만 늘어나고 있었다. 남구에서는 규모가 큰 사업장이었던 동양나이론은 89년 노조가 만들어진 이후 어용노조민주화투쟁을 통해 민주노조가 들어서기도 했지만 막 바로 핵심간부들의 해고로 이어진다. 대중적 신망이 두터웠던 1세대 해고자들은 동양나이론해고자협의회를 구성해서 해고투쟁을 벌이고 있었고, 그 뒤를 이어 학생운동출신을 중심으로 한 조직사건으로 5~6명의 해고자가 다시 발생한다. 이 시기 1세대 해고자들은 해고자 활동을 정리하게 되고, 그 뒤를 이은 해고자들이 해고투쟁을 이어간다.

 

“그 전에 ‘남구지역 노동자의 집(남노집)’이라고 91년도까지 있었는데, 남노집이 없어지고 난 다음에는 지역에 모일 수 있는 곳이 없었는데, 동해협(동양나이론해고자협의회)에서 남해협(남구지역해고자협의회)을 만들어요. 그러면서 이게 남구지역 노동운동의 거점처럼 되어가면서 93년에 해고투쟁을 공동으로 하게 되는 거예요. 전해투(전국구속수배해고노동자원상회복투쟁위원회) 투쟁이 막 일어날 즈음에 우리도 공동투쟁을 하자 해서 민주당 사무실 점거하고 단식농성을 시작했어요. 그때 18일간 단식을 했어요. 나는 기획과 홍보를 담당하느라 단식자는 아니었어요. 후배 연정이가 18일간 단식했죠. 참 마음 아팠고 미안했어요. 그러면서 지역적 관심을 받게 되는 거예요. ‘남구에서도 뭔가 하네...’ 이런 식으로... 그 투쟁이 큰 성과가 있었던 거는 아닌데 의미 있게 정리가 됐어요.

그렇게 하면서 남해협이라는 단위로 일도 해보고, 지역에서 발언도 하고 그렇게 존재감을 확인하다가 94년에 현해협(현대그룹해고자협의회)과 합쳐져서 울해협(울산지역해고자협의회)이 만들어져요. 그래서 내가 울해협 초대 사무국장이 되죠. 그때는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해고자들이 우리들 많이 챙겨주고, 해고자들이 많아서 어디 다니면 뽄때났어요. 1년에 한 번씩 울해협 송년회도 하고... 94년에 울해협 송년회를 MBC방송국을 빌려서 했는데, 500명 정도가 모여서 되게 분위기 좋았어요. 그걸 어떻게 해서 빌리게 됐는지 나는 모르겠는데, 그게 가능했다니까.”

 

해고자들을 중심으로 한 지역투쟁과 해고자들의 전국조직이었던 전해투를 통한 전국투쟁은 많은 것을 배우게 하는 계기가 됐다.

 

“93~94년도에 전해투 투쟁을 되게 열심히 하고 다녔어요. 전국 해고자들하고 같이 농성도 하고 하면서 전국을 휘젓고 다녔죠. 그때 내가 배운 게 참 많았어요. 해고자들이라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 각 현장의 사정들도 많이 알고... 내가 구체적인 싸움하고 하는 것을 잘 못하고 못 견뎌 해요. 욕도 못하고... 전해투 가서 아 배렸잖아(웃음). 웬만하면 ‘에이 씨발’하면서 싸움을 걸고 그런 게 되게 많았어요. 그게 필요할 때가 많다는 걸 깨달았죠. 머리 굴리는 것보다 몸이 먼저 나가는 정서에 대한 것을 그 투쟁에서 굉장히 많이 배웠고...”

 

그렇게 해고자투쟁을 열심히 하던 95년 대우정밀 해고자였던 조수원 열사가 농성 중이던 민주당사 계단에서 스스로 목을 메 자결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 친구는 동갑이라서 친밀감을 강하게 갖고... 전해투 안에서 27살짜리들 양띠 모임을 했어요. 양띠 모임을 하면서 뭔가 틀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같은 또래들인데 다르게 살아온 역사를 얘기하기도 하고, 그게 굉장히 힘이 많이 되기도 했었고, 가슴도 되게 많이 아팠던 때였고... 조수원이 하고 다 같이 단식할 때 처음 만났으니까...

그 친구가 그렇게 떠나가고, 열사라고 하는 이름이 되게 무겁고 싫은 거예요. 그 친구가 죽고 병원에서 보름 동안 자리를 같이 지키면서 장례투쟁이라는 걸 하는데, 밤마다 술 먹고 빈소에 앉아서 ‘아무리 우리가 투쟁을 해서 뭔가를 따낸다 해도 니가 돌아오지 않잖아’라며 엉엉 울며 보냈어요. 너무 슬프고 미칠 거 같았어요. 그런 마음이 들면서 열사라는 이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런 것이 있더라고요. ‘그 계단을 내려갔을 때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 생각이 너무 많이 드는 거야. 며칠 전까지 나한테 전화를 하면서 ‘너무 힘들다야. 니가 빨리 와서 노래나 한 곡 불러줘라야’ 하는 얘기를 하고 있을 때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미안해. 나 며칠 있다 갈게’ 이런 식으로 얘길 하고 있었는데... 되게 이성적일 거 같은 그 친구가 아무런 유서 한 장 없이 그렇게 나갈 때, 너무 혼자였을 거 같은 그런 게... 그 전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거죠. 그 뒤로도 그런 건 나한테 공포예요. 사람을 안다는 게, 혹시 어느 순간 사람을 무척 외롭게 하지 않을까 하는... 내가 어쩔 수 없는 거라는 걸 아는데, 한동안 그거에 계속 얽매이는 거예요. 그런 게 ‘운동이 참 힘들다’는 걸 느끼는 계기가 되는 거예요.”

 

90년대 중반부터 해고자 중심의 남구지역 활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현장조직운동과 지역선진노동자조직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게 된다.

 

“남구지역 선진노동자들의 조직을 만들어야겠다는 논의가 됐어요. 남구지역 각 현장에 노민추(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보다는 한 발 더 나가는 현장조직들을 만들어야 되겠다고 해서 남연추(남구지역현장조직연합추진위원회)를 만들었어요. 남연추로 있다가 7~8개의 현장조직들이 결합해서 남노련(남구지역노동자연합)을 만들어요. 남노련을 하면서 남구지역 노동조합운동의 구심 역할로서 노동조합 활동을 지원하는 게 많았죠. 현장조직들이 와서 모임도 하고, 노동교실, 문화교실, 철학강좌 이런 것들을 계속 가져갔었죠.”

 

그렇게 해고자활동과 지역사업들을 열정적으로 벌이던 95년 생각지도 못했던 사노맹재건위라는 이름으로 연행이 된다. 그러나 이미 정지조직활동을 정리한 상태에서 실체가 없는 조직사건이었기 때문에 연행된 내용과 상관없이 단순 업무방해로 구속된다.

 

“그때 3개월만에 나와요. 아무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때 내가 많이 지쳤어. 감옥에 대한 염증도 있었고, 남노련 실무자가 이런 저런 사건들을 많이 일으키고 자꾸만 자기 또아리를 만들고 그것에 부디치며 싸우는 게 일이고... 그래서 너무 지쳐서 결혼을 빌미로 휴가를 달라고 했어요. 엄마에 대한 미안함도 있고, 좀 안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거지.”

 

쉬고 싶어서 선택한 결혼생활은 삶의 도피처가 되지 못했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데 이상하게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거야. 관계가 달라져버리니까 그동안 하지 않아도 되었던 치레들을 해야 되니까. 이런 걸 싹 끓지를 못했던 거지. 세월이 가면서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노하우가 생긴 건데, 그땐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라 현실에 타협한 거죠. 그전에 너무 못한 게 많으니까 빚갚음 같은 게 있어서...

남편은 지역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주로 내가 경제적 뒷받침을 하게 되요. 그때 마음은 ‘당신은 활동해라. 나는 쉬면서 돈 벌겠다’ 그런 역할분담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살다보니 스트레스 팍팍 쌓이데... 나는 하루 종일 학원 갔다가 파김치 돼서 오면 삶이 전망이 없잖아요. 밤 11시 12시 돼서 마치고 오면 사람들도 못 만나요. 그럼 쉬고 싶다고 했는데 쉴 수는 있는가? 쉬지도 못해. 서른 살 서른한 살 때 삶이 또 가파르게 흘러가요.”

 

결혼 이후 생계를 위한 활동과 함께 남구지역에서 여성활동가모임, 문화활동, 현대정공 노동조합 문화강사 등의 활동을 계속 해오던 중 2000년 민주노총 울산본부 문화국장 활동을 제안 받게 된다.

 

“내가 노동조합 상급단체 활동에 대해서 거부감이 많은 사람이라서 ‘그냥 두 눈 질끈 감고 하자’ 이런 심정이었는데, 하다 보니 월급을 주는 거예요. 세상에! 봉투를 딱 받는데 기가 막힌 거야. 그전까지 해고자 활동하면서 신문배달 하고, 포장마차 하고, 과외 하고, 이런 식이었고... 명절 되면 사람들이 고향가라고 양말도 사주고, 돈도 쪼깨씩 찔러주고, 이런 것들로 그냥 살아왔거든... 그렇게 살아왔는데 월급을 주니 기가 막히잖애. ‘이런 걸 내가 받아도 되나?’ 하면서 되게 씁쓸했어요. 들어갈 때는 70만 원정도 받았는데... 나중에는 100만원이 넘더라고. 그런데, 이게 처음에는 그렇게 이상하고 씁쓸하더니만 매달 받는 버릇을 하니까 ‘오늘 월급날 아니가?’ 이런 말이 나오는 거야. 이게 어느 순간 참 싫고... 비정규직 노동자보다 월급이 많은 것도 부담스럽고...

초반에 문화국장 할 때는 지역 문화패들의 약간의 터부와 이런 것들 속에서 묵묵히 했어요. 나는 굳이 그런 걸 편 가르고 싶지 않았거든... 그리고 내 스스로 ‘나는 노동조합 투쟁에 결합하는 상집 간부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보니까 민주노총에서 보면 조직적이지 못하고 혼자 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을 거예요. 체계 속에서 잘 녹아들어가지 않고... 거기 함께 했던 사람들과 긴밀하게 소통하지 못한 게 나올 때 정말 미안하더라고. 잘난 것도 없는 게, 결국은 지가 부족해서 담장을 허물고 만나려고 하지 않았던 건데... 피해의식도 많고 그러면서 또아리를 틀고 있었는데, ‘관계에 대해서 오만했다’는 걸 나올 때 깨달았고...

그러면서 민주노총 문화국장이면서 거의 쟁의국장 역할들을 하고, 투쟁 판을 만들고, 싸움들을 준비하고, 이런 것들을 하게 되요. 이전에 학교 다닐 때도 주로 그런 것들을 해왔으니까 익숙하기도 하고...

2001년 초에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문제가 떠져가지고 그때 우리는 집회 준비하면서 물량(화염병)을 준비하면서 투쟁 판을 만들었었거든요. ‘그만큼 사람들이 맞았는데, 이거는 복수해야 된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준비했는데, 못 썼어요. 회의를 몇 번 거치면 물량이 없어져. 영남권 집회도 부산역에서 하는데, 헬리콥터 날고 난린데 물량이 없어지고... 이런 상황들을 많이 겪으면서 성토해 봐도 안 되는 것도 있고, 실제로 그런 투쟁 대오들이 없다는 걸 그때 발견했어요. 실제로 그렇게 전투부대를 할 노동자들이 있는가? 없어! 그런데 늘 물량은 나와야 한다고 얘기하잖아요. 만들 사람도 없어!”

 

2000년부터 2001년까지 울산은 크고 작은 투쟁들이 여기저기서 계속 이어지던 시기였다. 그런 투쟁들에 결합하면서 1년 중 200일 이상을 각종 농성장에서 살아야했다.

 

“투쟁 하나 끝나고 ‘하루만 나 휴가 가자’ 그래서 친구랑 변산반도에 놀러를 갔네. 가서 저녁에 술 한 잔 할라 하는데 효성(동양나이론을 비롯한 효성계열사들이 97년 구조조정과 함께 하나의 회사로 통합했다)에서 전화가 온 거라. ‘박현정(당시 효성노조 위원장) 잡혀갔다. 어떻게 해야 되냐?’ 그래서 바로 그 다음날 부랴부랴 내려왔죠. 갈 때 은박지 있는 청바지에 빨간 신발 신고 갔다가 그 차림 그대로 집회장에 가서 그날부터 효성투쟁에 엮인 거야.

내 친정사업장이잖아요. 후원회 활동하면서 많은 동지들이 친밀감을 갖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렇게 관계 맺고 있었던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거야. 지역본부에 공식적으로 요청을 해야 되는데,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원하는 거였어요. 민주노총 문화국장의 이름을 갖고 들어가기는 했는데, 사실 지역본부 결정으로 파견된 건 아니었어요. 내가 늘 가서 살아뿌니까. 지역본부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누군가 붙어야 되는데, 내가 갈 일은 아니었고... 나중에 지나고 보면 지역본부 동지들한테 미안하기는 해요.

내가 효성에 들어가서 하지 못했던 투쟁들을 거기서 다 했다고 보면 되고, 내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에너지를 다 짜냈다고 보면 되고, 그리고 투쟁하는 사람들과의 사랑이라는 걸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됐어요. 아주 강력한 소통이 오고가는 현장이었어요. 말 한마디를 해도 신뢰와 애정과 걱정을 가지고 하고 있음을 느끼죠. 오늘 밤 함께 넘겨야 되는... 세상에 보지 못했던 온갖 험한 꼴을 다보고, 두렵고 무서웠던 거는 마찬가지였어요. 지나고 나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상황을 견뎠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투쟁하는 과정에서 봐왔던 사람들에 대한 신뢰와 같이 그 고비를 넘어가는 과정에서 삶에서 쉽게 느낄 수 없는 것을 느꼈죠. 날마다 초초해 하면서도 날마다 함께 느끼고... 그때 18시간씩 집회를 해도 목이 안 쉬는 거야. 프로그램들을 계속해서 생성해내고... 그때 문화패 단위들이 많이 붙어서 했었고... 13년만의 파업이었는데, 이들한테는 파업 자체가 정말 희망이었던 거였어요. 불법이든 뭐든 이런 게 중요하지 않았고... 굴종된 삶이 너무 차있어서 터지는 순간들이었다고 보거든요. 거기에 전적으로 호응하고, 그거를 최대화시켜내고...

대신에 걱정했었던 거는 ‘모든 투쟁이 승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들이 이 순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것이 나한테는 굉장히 중요했어요. 투쟁하는 과정에서 타자와 함께 한다는 느낌, 그리고 모든 소통에 있어서 아주 열려져 있는 상태, 그리고 당당하게 공장 안의 질서를 유지했을 때의 주체감, 이런 게 나는 인간다운 삶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그것에 대한 느낌을 잊지 않기를 바라면서 글쓰기라든지 기록하기를 한 거죠. 나중에라도 잊지 말라고... 민주주의 훈련을 한다고 분임토론을 막 하면서 창발성이 돋아나기 시작하죠. 활동가들도 그전에 대중 활동을 제대로 해보지 못했던 거를 굉장히 열심히 하고... 나의 몫은 이런 대중 프로그램을 계속 기획하고, 대중과 호흡하고, 사회를 보고 하는 건데...

그때는 내 몫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쉬운 것은 내가 아닌 그 사업장의 누군가가 했어야 했다라는 게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거기에서 같이 활동하고 있지 않잖아요. 어느 순간 어떤 곳에서 내가 최선을 다 하는 것은 참 중요하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어도 되는 몫이었다는 거죠. 그들도 나한테 사회 보거나 그런 걸 의존하게 되는 건데, 전장이니까 역할을 나눠서 해야된다고 생각해서 했는데, 지나고 보면 ‘다시 그런 상황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겠다. 부족하고 힘들어도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서브하는 것이 되겠다’ 생각해요. 그 당시에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발을 빼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구조조정 문제로 시작한 효성투쟁은 위원장의 갑작스러운 구속으로 급속히 대중적 분위기가 올라오기 시작했고, 사측의 방해로 파업찬반투표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하자 5월 25일 노조의 전격적인 파업선언으로 파업이 이뤄진다. 이어 용역과 구사대들의 끊임없는 침탈시도를 막아내면서 10일간 파업을 이어간다. 6월 5일 경찰병력이 투입되면서 지도부는 공장 내부 두 군데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게 되고, 나머지 조합원들은 시내 복산성당에 농성장을 마련해 투쟁을 이어간다. 그 이후 화염병이 등장하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고 전국적 핵심 사안으로 떠올랐던 효성투쟁은 7월 5일 총파업이 무산되면서 급속히 하강국면으로 접어들었고, 결국 지도부의 직권조인과 그에 반발하는 조합원들이 투쟁을 이어가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대규모 해고자를 남기고 투쟁은 정리된다.

 

“마지막 공권력이 들어오는 날, 새벽까지 마지막 집회를 하고 ‘민들레처럼’을 같이 부르고, ‘서로 이 순간을 잊지 말자’고 하고... 그때는 서로가 다 감성이 극대화 되요.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살아서 만나자’ 약속을 하고, 지도부 일부는 고공에 올라가고, 나보고 남으라고 하더라고요. 공장 밖에 나가서도 투쟁은 이어져야 하고, 그 투쟁에 누군가가 서 있어야 된다. 나는 수배자로 떴기 때문에 잡혀가면 끝인데, 그리고 마이크도 워낙 많이 잡아서 ‘일계급특진’이 붙은 거죠. 그런데 그 전술에 대해서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현장의 지도부들이 잡혀가도록 그렇게 다 올라가는 게 과연 맞는가?’ ‘그들이 스스로 지도부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올라가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다 올라가지 않아도 되는데...’ 그들은 최선을 다하고, 그 뒤에는 누군가가 또 최선을 다한다는 건 맞지만, 거기에 내가 남아서는 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나중에 하게 되는데...

그래서 내 보고 살아남아라는 주문이 오는 거죠. 그러면 공권력이 투입되는 순간 나는 거기 있으면 안 되는 거거든. 그래서 사람들이 빠지라고 하죠. 그 몇 시간 동안에 엄청나게 고민을 했어요. 내가 스스로한테 했던 약속들이 있었거든. 광주항쟁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누군가에게 알리러 나가는 사람의 몫도 필요하지만, 그냥 그 순간 거기 있어야 한다’는 게 내가 가지고 있는 소신이었거든요. 그런데 나가라는 주문이 들어오는 거죠. 그러면서 나가는 결정을 마지막 순간까지 못하고 있다가 나가기로 하고 넘어가는데...

그때 내 가슴 속에 또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 상황을 피하고 싶은 내 마음이 있었던 거야. 나를 괴롭혔던 거는 그 마음이었던 거죠. 나갔다는 그 자체의 행위가 아니라, 내 마음 속의 그것 때문에 나갔다면 두려운 공포 속에 있는 그 사람들은 뭔가? 그러면서 되게 괴로운 고민의 시간들을 겪었어요. 그리고 옆 사업장 담벼락을 넘어서 발을 딛는 순간 후회가 막 밀려오는 거예요. 그렇게 넘어오고 나서는 초긴장의 상태에 있다가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바로 차에 실려서 그 동네를 빠져나오게 되죠.”

 

효성투쟁 이후 다시 수배상태에서 지역본부 간부 활동을 이어간다. 효성투쟁이 마무리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경찰들도 수배자를 연행할 시도를 하지 않았지만, 수배상태라는 심리적 불안감을 계속 안고 살아야 하는 3년의 세월이 흐른다. 그러던 2004년 초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동자였던 박일수 열사가 분신을 하면서 다시 울산은 뜨거워진다.

 

“박일수 열사 투쟁을 수배상태에서 겪었던 거죠. 현대중공업 경비들이 따라다니기 시작하는 거거든. 나는 영안실에 꼼짝없이 갇혀 있었어요. 그거를 54일간인가 했잖아. 정말 피 말리는 거였거든. 영안실에서 매번 영정을 맞이하면서 투쟁을 하고, 나는 여전히 마이크를 잡고 있는데... ‘내가 뭐하는 짓이냐?’ 투쟁하겠다고 집회 온 사람들한테 ‘투쟁합시다’ 하는 소리나 하고 있고, 실제 단 한 사람이라도 데리고 올 수 없는 게 민주노총 간부였다는 거예요. 오지 않은 사람들을 어떻게 오게 할 것이며, 어떻게 조직된 단위들의 결의를 통해서 돌파할 것이냐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그 동안 조직된 노동조합운동의 결과가 이 거냐? 조직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내가 단 한 명이라도 조직할 수 있는 간부가 아니고, 사람은 계속 영안실에 있고, 하청노조 단위들은 계속 자기 요구들을 하는데 그 사람들한테 너무 미안하고...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힘든 시간들을 지내고 있었고... 관계들이 다 깨어지고, 그러다보니까 힘이 드는 거는 몇 배로 힘이 들고... 온 몸과 머리 속에서 모든 에너지가 다 소진되어 가버리는 그런 느낌이었죠. 합의사항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걸 번복할 힘도 없고, 합의과정에서 내가 끼어들 틈도 없고, 아무 것도 해줄 게 없는데 나는 그 영정을 마주하면서 거기 앉아 있어야 되는 그런 감정이었어요. 그걸 누구한테 얘기할 수도 없어요.”

 

박일수 열사 투쟁이 끝나고 민주노총 울산본부 활동을 그만두게 된다.

 

“한 인간이 겪는 일 중에 참 큰 일 이거든. 개인적으로도 다 망가진 상태...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가 하나도 없는 상태... 완전히 텅 빈 것 같은 거 있잖아요. 모든 이데올로기와 나를 지탱해 왔던 가치관들이 나한테 힘이 되지 않는 그런 상태... 그런 상태에서 ‘홀로 제대로 서야 겠다’면서 떠났죠. 혼자서 도보여행 2주일을 하는데, 지금 돌아보면 나한테 정말 좋은 시간이었는데, 그때는 너무 힘들었어요. 참 많이 울기도 하고, 많이 두려워하기도 하고, 너무 아파가지고...마음이 아픈데 몸까지 같이 아프더라고... 그래서 상담도 받고...”

 

민주노총 활동 정리 이후 수배생활을 정리하기 위해 자진출두로 세 번째 징역살이를 하게 되고, 출소 이후 결혼 관계를 정리하고, 깨어진 주변 관계들을 정리하면서 자기 치유의 시간을 힘겹게 보낸다. 그런 속에서 문화운동을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욕구 속에 조심스럽게 연극아카데미, 여성주의 워크샵 등을 찾아다니게 된다.

2001년 수배 시절 극단 새벽에서 시작한 연극작업에 대한 열정을 삶의 힘으로 끄집어내는 시간을 보내지만 아직은 사람만나기가 힘겨운 상태였다. 2006년 울산지역 연말콘서트 형식으로 ‘우연공감’이라는 프로그램이 자발적인 모인 사람들에 의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 그를 이어 2007년 울산과학대 청소용역노동자들의 해고투쟁에 조직노동자들만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사람들이 함께 하면서 새로운 연대투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런 일련의 흐름들 속에 창작뮤지컬 ‘하여도’공연이 이어지고, 2008년 소극장 ‘품’이 문을 열기에 이른다.

 

“그때 되게 힘든 상태에서 시작한 거예요. 되게 예민해져 있고, 날이 서 있고, 여려져 있는 상태에서 ‘우연공감’을 하면서 마음앓이를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힘을 얻어가는 중이었고... 새로운 관계들에 대한 가능성을 느끼게 되면서 나한테 힘이 된 거지.

그리고 울산과학대 투쟁을 거의 올인 하다시피 하면서 조직운동에 대한 회의와 이런 것들이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안에서 새롭게 관계가 재편돼야 하는 거구나’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가는 관계가 기존의 조직적 관계와는 다른 힘이 있었다는 거죠. 거기서 내가 되게 힘을 많이 받은 거 같애요.

그러면서 ‘뭘 해볼 수 있겠다’하고 생각하고... 그리고 그 때 느낀 걸로 사람들이 뮤지컬 해보겠다고 해서 그 일을 전면적으로 들어가서 울산과학대 투쟁에서 느낀 것들을 ‘하여도’에 담아 1차 대본을 구성했죠. 이후 ‘뮤지컬 하여도’제작에 몰입하면서 힘겨움과 힘을 동시에 받게 됐어요. 그거 하고 공간을 만들겠다 해서 쭉 온 게 있는 거죠.

그런 과정에서 삶의 다른 패러다임을 보게 되요. 사회과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삶을 가졌던 내가 심리학적인 인간의 마음 갈래들을 보기 시작하고... 나도 상담을 장시간 받으면서 내 마음 안에 있었던 또아리들과 피해의식들을 다시 보게 되고... 기존에 갖고 있었던 관계들에 대한 애착을 털어내는 과정이 있었죠. 그러면서 새롭게 만나는 관계들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고, 그걸 담는 그릇을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죠.

따지고 보면 내가 최초에 생각했던 길들을 나는 꾸준히 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큰 벽을 만나면서 기존 것을 털어내고 다시 담아내려고 하는 과정이 있었고, 그런 과정 안에서는 지독하게 힘들었고... ‘아무도 안 만나고 싶다’부터 시작해서 납작 엎드려서 혼자 울기만 하는 시간도 몇 년간 있었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서 폭력적으로 터뜨려지고... 그러고 보니까 비로소 ‘23살 그 어린 친구가 감당하기 어려운 세상을 살았구나. 너 참 힘들었지?’ 하는 게 된 거죠. 그 전까지는 ‘해야 된다. 그건 누구나 겪는 거다’하면서 스스로 힘들었던 거를 방치시켰는데, 진짜로 넘어질 지경이 되니까 자기를 다시 보게 되는 거 같애요. 그게 되니까 타인들을 향한 원망이나, 거대한 운동에 대한 회의나 이런 것들을 벋어날 수 있게 되는 거 같애요.”

 

거대 남성대공장이 중심으로 자리 잡혀 있는 울산에서 여성 활동가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완고한 가부장성이라는 문제도 심각하게 대면해야 했다.

 

“내가 남성화 돼 있었고, 내가 남성적 코드로 살았고, 그래서 내가 불평등한지도 몰랐고... 그런데 결혼은 ‘내가 여성이구나’하는 거를 자각하게 해줘요.

그리고 남성들과의 소통에서 나중에 엄청 짜증이 나는 게 있더라고요. 노동운동에 대한 얘기는 잘 하는데, 삶에 대한 얘기는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다른 가치관에 대해서 얘기가 들어갔을 때 안 되는 거라. ‘같은 약자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동지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하는 회의도 하게 되는 거죠. 특히, 비정규직 문제 들어가면서 남성들의 남성성은 더 강화되더라고요. 비정규직이라고 하면 노동자 안의 또 다른 약자잖아요. 노동자는 세상의 가장 약자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안에 또 다른 층계가 생겼을 때 이 남성들의 태도는 또 다른 지배자의 모습과 똑같다는 거지. 그리고 여성에 대한 문제들이 제기됐을 때 보여주는 그 완강함...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나는 그거 뭔지 모른다. 좀 가르쳐줘’ 이런다고.

한때는 ‘왜 모르냐? 세상을 바꾸자고 하는 당신이 이렇게 이상한 관계들과 이상한 억압들에 대해서 왜 문제의식이 없냐? 공부해라. 우리는 그 문제의식에 대해서 공부한다. 노동자의 억압에 대해서 공부하지 않았냐? 그것처럼 왜 공부하지 않느냐?’ 그러면서 그것 같고 엄청 싸웠어. 그래서 대공장 남성노동자들은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던 적도 있었어요.

그것도 서서히 깨지는 게 있었어요. 여성들 안에도 그게 있고, 내 안에도 그게 있음을 내가 발견했어요. 남성들이 갖고 있는 정치지향적이고, 관계를 지향하지 않고 그런 게 분명히 있어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할 거냐? 갖다 버릴 거냐? 그런 게 아니라 서로가 같이 바뀌어 나가야 되는 거다. 그래서 소통해야 된다. 소통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고, 여성이라고 해서 전부 다 그렇지 않고... 사회화라는 게 굉장히 무서워서, 내 안에도 남성적인 게 있어서, 그런 코드로 단정하고 그랬던 게 있다는 거지. 그래서 지금은 조금 다르게 보고 있는 게 있죠. 때때로는 그게 좀 막혀요. 어느 지점에 가면 소통이 안 되는 한계를 느껴요.”

 

‘하여도’ 공연 이후 극단 새벽 단원활동을 결심하면서 오랜 조직 생활 기피의 습을 단절하고 다시 공동체의 꿈속으로 들어간다. 그를 이어 소극장 ‘품’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고통 받은 삶의 치유와 소통을 통해 자본주의 문화와 싸움을 모색하고 있다.

 

“이곳은 내게 전선... 자본주의와 싸우고 다른 세상을 향한 관계를 만드는 진지라고나 할까요. 자본주의 너무 싸가지 없잖아요. 내가 아무리 부드러워지고 널널해 지고 싶어도 안되는 게 이 지점이죠. 사람들을 너무 괴롭히고 파괴하잖아요. 그래서 자본주의 문화와 악착같이 싸우고 싶어요. 그런 것을 문화예술을 통한 소통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내 몫이라고 생각해요. 자본주의적인 가치관과 삶의 양식이 아닌 다른 대안적인 삶의 양식이나 여러 대안적인 것들을 여기서 소통시켜 내고 싶은 게 있는 거고... 투쟁할 때만 만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만나면서 우리 안의 관계를 달리 가져가는 그런 것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사랑방이나 거점 이런 거라고 생각을 하고... 나는 문화예술이라는 매개를 가지고 하고 싶은 게 있는 거죠.

문화예술을 가까이 느끼고 누리고 향유할 수 있어야 된다. 그 과정에서 어떤 관계나, 어떤 가치관이나, 어떤 감성들을 서로 나누고 교류해야 된다는 게 있는 거죠... 내가 선택한 매체가 연극인데, 끝임 없이 관계성에 대한 것들을 고민하게 하는 거고, 끝임 없는 노가다를 동반하게 하는 거고... 그 안에서 내가 느끼는 안정감과 나한테 맞는 길 같은 게 있는 거 같애요. 그것을 잘 하고 싶은 것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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