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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노조 울산본부 여승선 이야기

어떤 노동조합이든 어용노조가 아닌 한 쉬운 활동은 없다. 그 힘겨운 노동조합을 공무원들이 만들었다. 가공할 만한 정권의 탄압, 차가운 여론, 거대 규모에 턱없이 모자란 간부역량이라는 조건을 감수하면서 10년의 세월을 버텨오고 있는 것이다. 공무원노조 울산본부 여승선 동지를 만나 그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63년 경상남도 남해에서 태어난 여승선은 초등학교 3학년 즈음 아버지 장사가 망하면서 야반도주 같이 고향을 떠나게 된다. 그렇게 부산으로 옮겨온 가족은 불안정한 삶을 이어갔고, 가정형편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1년 미룬 후 83년 취직한 형의 도움으로 부산 지산간호전문대학 방사선과에 입학하게 된다.

 

“재수는 하기 싫고, 어쨌든 1차는 떨어졌고, 2차는 어디에 할까하고 찾아보다가... 방사선과라는 것이 뭔가 과학적이고 첨단적으로 그렇게 보였어요. 홍보 사진을 억수로 멋지게 띄워놨잖아요. 깨끗하게...”

 

2년의 대학생활을 마치고 군 생활까지 끝내고, 88년 전공을 살린 병원생활로 사회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88년에 제대를 했는데, 마침 학교 선배 한 분이 자그마한 병원에 있었어요. 자기가 하도 바쁘니까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가게 됐죠.

그 당시에 삐삐가 있었잖아요. 선배가 삐삐를 차고 있으니까 퇴근 후에도 긴급한 일이 생기면 매일 불러들이는 거야. 나는 들어가서 CT를 일찍 배웠거든요. 그게 일반적인 촬영을 하는 것보다는 약간 고급기술이라서 CT를 일찍 안 가르쳐줘요. 그런데 이 선배는 들어가서 얼마 안 되니까 그걸 가르쳐주더라고요. 그러면서 삐삐를 나한테 맡기는 거 있죠. 아이 참...”

 

그렇게 병원생활을 시작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여승선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직원이 40여 명 정도의 자그마한 병원이었죠. 진료 과가 5개 정도 있고, 병실도 좀 있고... 이 병원도 보니까 건물 짓고 개원하면서 빚도 있고 그런가 보더라고요. 원장이 아주 좋은 차를 굴리는데 ‘이런 차가 없으면 돈을 안 빌려준다’ 이런 소리를 들은 거 같애. 돈을 많이 빌리고 다녔나봐. 그러면서 원장의 사모님이라는 사람은 치와와 강아지 한 마리를 들고 다니면서 원무과에 앉아 있고... 내 그래서 치와와를 싫어해요. 분위기가 어떤지 알겠죠?

그런 분위기 속에 임금이 세 달 정도 밀렸어요. 그러면서 노동조합이 생겼죠. 우리 선배가 그걸 시작했으니까 나는 그냥 사무국장을 하게 됐어요. 내가 3월달에 들어갔으니까 병원 들어가서 몇 달 되지 않아서 노조가 만들어진 거죠. 나는 처음에는 모르고 있었어. 선배들이 만나서 작정하고 그랬나보더라고요. 나중에 나하고 얘기를 하면서 같이 하게 된 거죠. 나는 그냥 하라고 하니까 했지.

그 당시에 백병원하고 메리놀병원에 노조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사무일이나 이런 거 배우러가기도 하고, 거기 있는 동지들이 와서 노래도 가르쳐주기도 하고... 그때 농민가, 님을 위한 행진곡, 5월 이런 노래들을 배웠지.

원장이 임금 체불되고 그러니까 일본으로 도망가쁜기라. 그러니까 진짜 대책이 없잖아요. 의사도 다 가뿔고, 환자도 다 나가뿔고... 우리가 건물 외벽에 스프레이로 ‘체불임금 해결하라’ ‘원장 잡아온나’ 이런 구호도 막 적어놨단 말이야. 그러면서 요금 못 내서 전기도 끊기고, 수도도 끊기고... 병원 같은 경우는 의료보험 청구를 하면 한 달이나 두 달 뒤에 나와. 그래서 우리가 의료보험 정리해서 청구를 하는 거야. 그래서 반 정도씩 월급 받은 적도 있었는데, 그것도 다 떨어져 버리고... 나도 그 당시에 특별한 계획이 없었어요.

그때 노무현이를 처음으로 만났다니까. 노무현이를 만나서 우리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하니까 ‘해봐야 실익이 없다. 돈 나올 구멍이 없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거야. 그 당시에 그런 쪽으로 일을 많이 했나보던데 나는 그런 건 잘 모르고, 변호사를 만나다고 하니까 갔었는데, 내가 들은 결과로는 그렇더라고요.

12명 정도가 농성은 계속 하고 있었죠. 처음 시작은 조합원들이 많았죠. 그 당시에 우리 집사람도 있었지. 그렇게 농성을 이어가는데 병원 앞길이 88올림픽 성화가 지나가는 길이였고 성화봉송로 환경미화관계로 공권력에 의해서 다 들려나왔죠. 밖에 나오니까 다들 막막한 거죠. 나도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고... 그러다가 의료보험 청구한 게 온 게 있어서 그걸 마지막으로 해서 해산했죠.”

 

그 이후 여승선은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 부산지역에서는 병원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1년 가까이 시간을 보내다 친구의 소개로 찾아간 곳이 진주 윤양병원이었다. 고향인 남해와 가깝고 그래서 진주로 옮겼고, 두 번째 병원생활을 시작하고 결혼도 한다.

 

“그 당시에 시대 분위기도 있었고, 거기가 시내니까 경상대 학생들이 종종 로터리를 점거하고 그런 거를 보기도 하고, 최루탄 가스를 맡기도 하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병원의 처우에 대한 불만들이 각각 있었어요. 방사선과에 남자들이 다섯 명 있었는데 ‘이래서 안 되겠다. 우리가 노동조합 한 번 만들자’ 이러다보니까 내가 또 거기에 덜렁 하게 됐어요.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계기가 특별하게 튀어나온 것은 없었어요. 원장이 상당히 권위적이었어요. 원장이나 원무과 같은 위에 있는 지휘계통의 강압적인 것에 대한 불만이 굉장히 차 있었죠. 나도 6개월 정도 됐으니까 분위기를 막 익혀갈 때였죠. 그 전부터 거기 있었던 선배들이 많은 불만들을 갖고 있고, 그런 분위기 속에 내가 옛날에 노동조합을 해봤다는 것 때문에 역할을 맞게 됐죠.”

 

진주에 있는 한국노총의 도움으로 노동조합을 만드는 데까지 성공했지만, 20대의 열정만으로는 노동조합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진주에는 병원 쪽으론 노조가 하나도 없었어요. 사실은 3개 병원 정도가 같이 하려고 했는데, 한 군데서는 못 하겠다 그래서 우리 윤양병원 하고 고려병원이 같이 ‘한 번 만들어보자’해서 준비했죠.

나 같은 경우는 병원의 나이 많은 선배들 하고 얘기를 하면서 서류를 갖춰갔죠. 그러던 중에 실·과장들의 제어가 있었고... 그때는 그런 일을 처음 당하니까 걱정도 되고, 신경을 많이 써서 속도 쓰리고... 그래도 당시에 젊은 혈기로 했어요.

그래서 (노동조합 설립) 신고를 했어요. 조합을 설립하고 나니까 본격적으로 탄압이 들어오더라고요. 조합원 120명 정도였는데, 3개월 정도 밖에 못 갔어요. 진주라는 지역이 굉장히 보수적인데, 거기 일하는 간호사나 이런 사람들이 다 안면으로 들어온 거야. 그러니까 압력이 집으로 가는 거야. 나도 실장이 고향 선배니까 이 분이 아버님한테 전화를 해서 ‘여승선이가 병원을 말아먹으려 한다’ 이런 협박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조합원들이 떨어지더라고요. 3개월 정도 되니까 조합원이 12명 정도 남았어요. 그때는 왕성한 혈기만 있었지... 지역의 연대나 경험 있는 분들의 가르침이나 이런 게 있었으면 달랐겠지만... 거의 혼자서 했으니까... 그래서 아작이 난 거지. 고려병원도 아작 나고...

그렇게 있다가 독서회를 만들었어요. 그때부터 월간지 ‘말’지를 구독하기 시작했죠. 거기서 목적의식적인 많은 것들을 받아들였어요. 독서회를 하면서 의식적으로 책도 사고, 읽어보면서 이야기도 하고... 그런 생활을 쭉 해왔죠. 그러다보니까 ‘에이, 더러버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는 것도 잘 안되니까 그 당시에는 벋어나고 싶은 생각이었어요.”

 

그렇게 마음을 잡지 못하던 중 친구의 소개로 공무원시험을 보게 된다. 생각지도 않은 공무원시험 합격과 함께 울산 생활을 시작한 것이 91년이다.

 

“환경위생과라는 곳이 뇌물이 상당히 심했거든요. 사람이 워낙 없으니까 9급 시보 때부터 환경관련 업무를 보면서 인허가 업무를 맡게 되었지. 그러면서 뇌물들을 많이 접하게 됐죠. 같이 간 사람이 받아서 얼마를 주는 거야. 나는 이게 막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구세군 냄비에 넣기도 하고 그랬어요. 나중에는 차츰 익숙해지더구만(웃음). 결국 위에도 가야하고 그렇더구만. 그런 거에 대한 불만들이 많이 있었던 거 같애요. 흘러 내려오는 체계에서 9급이 불만을 처리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점이 있었어요. 그렇다고 ‘에에, 더러버라’하고 뛰쳐나올 수도 없고...

그렇게 구청생활을 1년 반 정도 했었는데 솔직히 힘들었어요. 사람들은 많이 만나지더구만. 내가 1년 반 정도하는데 명함이 2백 장 정도 모여지더구만. 그런 단속업무를 하면서 될 수 있으면 민원편이었거든요. 무작정 권위적인 구청의 업무를 하는 게 아닌... 야간 단속 나가보면 작은 포장마차들도 있고 그런데... 이런 불만들이 있는데도 조직적인 그런 게 있어서... 그렇게 하다가 보건소로 발령이 나서 오니까 마음이 억수로 편한 거라. 남들은 ‘구청에 가야 진급이라도 하는데...’ 그러지만, 나는 보건소가 마음도 편하고, 여유도 있고 좋더라고요.”

 

울산 중구보건소를 거쳐 동구보건소 방사선과에서 욕심 없이 편안한 공무원생활을 이어가던 가운데 외환위기 이후 철밥통 개념이 무너진 공무원사회에서도 조직화의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99년부터 합법적인 형태로 직장협의회가 각 지역별로 구성되기 시작하더니, 2001년 법적 규정을 넘어서 전국단일조직인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이 만들어지고, 이는 2002년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창립으로 이어진다.

 

“2002년 말쯤에 직장협의회가 생긴다는 얘기를 듣게 됐어요. 보건소라는 데가 구청하고 떨어져 있으니까 소외지역이에요. 그리고 내가 행정직이 아니라 보건직이기 때문에 정보도 떨어져요. 일부러 찾아 듣지 않으면 힘들어요. 그래서 들리는 이야기로만 듣고 ‘그렇구나. 있으면 좋지’ 이 정도 하면서 있었어요.

직장협의회 생기고 수련회 하면서 4명의 동지들이 ‘우리도 노래 한 번 해보자’ 해서 노래패 ‘비상’이 만들어졌데요. 그 중 내가 잘 아는 동료가 한 명 있으니까 나보고 ‘노래하러 온나’ 그랬어요. 나는 노래패에 들어가는 거에 대해서 고민을 억수로 했어요. 노래패가 어떤 건지 알기 때문에... 이 친구들은 ‘니 노래 잘하니까 와서 노래나 해라’ 이런 식이었어요. 이 사람들은 기타 치면서 노래하는 그런 취미생활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고민하니까 이 친구가 ‘와? 뭘 그리 고민하는데?’ 그래서 ‘가만 있어봐라. 내가 다음 주에 가서 얘기해줄게’ 그러고... ‘그걸 하면 집회나 이런 데 가서 노래하고 그래야 되는데, 내가 그걸 할 자신이 있을까?’ 그런 고민을 했죠.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해보지 뭐’ 이렇게 결정을 했죠. 그때는 그 전에 읽었던 책이나 이런 게 많이 영향을 줬어요. 목적의식적인 게 조금은 있었던 거 같애. ‘내가 집회에 서겠다’는 이런 작정을 했었으니까.”

 

나이 마흔에 접어든 여승선은 2003년 공무원노조 울산본부 노래패 비상으로 다시 노조활동을 시작하면서 열정을 되찾는다.

 

“처음에는 1주일에 두 번씩 연습했어요. 많은 시간들을 투자했죠. 연가도 많이 내고... 그 당시에는 전국에 공무원노래패가 울산의 ‘비상’밖에 없었거든. 정말 많이 다녔죠. 서울의 집회, 지역의 창립대회, 대의원대회... 상당히 많은 활동들을 했어요. 참 재미있고 좋았어요. 갔다 내려오면서 소주 한 잔 먹으면서 많은 얘기들을 했어요. ‘이 노래는 하지 말자’ ‘니들은 노래도 잘 못 부르면서... 노래를 한 번 하면 감동을 줘야 될 거 아냐?’ 이런 얘기들도 하면서...

지역에 문예활동 하는 동지들이랑 처음부터 같이 하다보니까 역량도 많이 올라오고, 그 동지들의 지도로 창작도 하고 그랬으니까. 그러면서 노래라든지, 창작이라든지, 문예운동에 대한 이런 거까지 고민하면서 역량이 많이 늘었어요.”

 

출범과 함께 모진 탄압을 이겨내야 했던 공무원노조는 그게 맞서 치열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두 번의 연가파업에 이어 2004년 공무원노조의 총파업이 선언된다. 그러나 총파업은 하루 만에 끝이 났다.

 

“그때 생각하면 참 안타까운 게, 지역이 거의 방치돼 있었거든요. 그때 나는 서울에 있었는데, 보건소에서 나한테 계속 전화 오는 거야. ‘여 주사님, 과장이 들어오라고 하는데요’ 이러는 거예요. 현장에서 누가 책임져서 대처를 하거나, 대오를 어디 모아서 착착 대처를 해야 되는데, 이런 게 없는 거예요. 다 자기가 알아서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서울에 올라가서도 ‘이렇게 전화가 오는데, 이렇게 방치해서 되냐?’ 그랬는데... 다른 지역에 보니까 조직한 곳이 있기도 한데, 목적의식적으로 된 게 아니라 ‘야유회나 가자’ 이런 식으로 된 거 같고... 그러다보니까 한 두 사람 경찰에 붙들려가고 그러면서 얼마나 불안해요? 울고 불구 난리 나는 거야.

서울에서의 1박2일의 일정은 상당히 타이트했죠. 전체 노동자대회에서 파업선언을 하고 공무원노조만 빼서 연세대로 갔단 말이야. 산개해서 가는데 학생들을 따라가기도 하고, 빨간 모자를 따라가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어쨌든 잘 모르니까 막 따라가는 거야. 그러다가 거의 다 왔나 봐요. 지하철이 공무원노조 조끼로 가득 차는 거야. 그때 머리가 쭈삣쭈삣 하는 거야. 감동이 막 끓어오르잖아요.

연대 입구에서 광장까지가 제법 멀데. 학생들이 대로를 차단해서 차 세우고 ‘빨리 오세요’ 막 이러는데, 가슴이 막 뛰는 거예요. 그렇게 뛰어가서 그 밤에 연세대 노천광장에서 집회를 하면서 정말 감동이었지.”

 

하루 만에 끝난 총파업에 이은 후폭풍은 대규모 징계였다. 4개 구청이 파업에 들어갔던 울산은 대량징계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 과정도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당시 민주노동당 출신 구청장이 있었던 북구와 동구가 징계를 거부하면서 남구와 중구에서 먼저 징계가 이뤄졌다. 징계를 거부하던 북구와 동구마저도 양 구청장이 행정명령 불이행으로 기소된 후 법원의 실형선고와 함께 업무가 정지되면서 2006년부터 징계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북구하고 동구가 늦어지면서 울산 전체로는 징계가 2년이 간 거예요. 징계국면이 너무 오래간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조합원들이 많이 지쳤지. ‘중구하고 남구는 가서 울었다’는 둥 어쨌다는 둥 이런 얘기들은 들리고, 북구하고 동구는 징계는 없이 일은 하지만 신경은 쓰이고... 노래패도 그러면서 그만 두는 사람이 생기고...”

 

그 뒤를 이어 몰아친 것이 2006년 공무원노조 탈퇴 지침과 지부사무실 폐쇄 행정대집행이었다. 당시 행정대집행이 벌어지던 2006년 9월 20일 현직에 있던 여승선은 연가를 내고 행정대집행 저지투쟁에 결합하게 된다. 그러나 여승선의 연가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어 징계위에 회부돼 파면 처분을 받게 된다. 해고자 신분이 된 여승선은 지부와 본부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달라붙게 된다.

정권의 계속 강경탄압에 맞서오던 공무원노조 내부에서는 대응방식을 놓고 합법노조로 전환하자는 온건파와 기존 공무원노조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강경파가 대립하게 된다. 결국 온건파는 2007년 독자적으로 대의원대회를 열어 민주공무원노조로 분리하게 된다.

 

“조합이 아작 나고 갈라질 때 나는 억수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어쨌든 선택을 해야 하잖아요. ‘이것저것 다 싫다’ 이럴 수는 없으니까. 2007년 7월달인가 저마들이(민주공무원노조 추진 세력) 대의원대회(독자적으로 민주공무원노조를 창립하기 위한 대의원대회) 잡고, 우리 공무원노조는 광화문 앞에서 한 달 단식투쟁을 하고... 그때를 마지막 선택지점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때까지는 많은 고민을 하면서 이렇게 찢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내가 올라가서 광화문으로 갔거든. 1주일 동안 전국순회를 하는 팀에 끼어서 여러 지역의 동지들을 만나보니까 뭘 해야 되는지 알겠더라고. 그렇게 해서 마음을 다 잡기도 하고... 그때 나한테는 억수로 중요한 고비였어요.”

 

계속된 탄압과 대규모 징계 등으로 무너진 조직력은 쉽게 극복되지 않았다. 해고된 간부들을 중심으로 유지되는 노동조합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 와중에 공직사회 구조조정과 자치단체장들의 공직사회 통제권은 더 강화되기만 했다. 그래서 여러 현안문제를 갖고 힘겨운 역량이라도 대응을 이어가고 있다.

 

“이길 수 있다는 이런 거 보다는 이걸 가지고 노동조합의 인정이라든지 이런 걸 해내면서 다음에 할 때는 아무래도 안됐겠나 싶어요. ‘알았어’ ‘잘못했어’ ‘미안해’ 이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는 생각은 하고 있어요.

문제는 간부만 하는 게 아니라 조합원들이 함께 해야 하는 거예요. 조합원 하고 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조합원 하고 같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나’ 고민하고 있어요. 이런 저런 거 고민하고 찾아보고 있는데...

여기저기서 민공노(민주공무원노조)가 단협을 갖고 가니까 기관측에서 민공노 하고 우리(전국공무원노조)를 분리하려고 해요. 동구가 아침 조기출근문제로 1인 시위 하는데 민공노랑 같이 하자고 해서 하고 있어요. ‘어쨌든 뭔가 손 하나라도 같이 걸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해요.”

 

많지 않은 간부들도 서로 많이 지쳐있다.

 

“얼마 전에 술을 진탕 먹은 적이 있어. 그런데 한 동지가 나한테 ‘내가 나태해져서 미안하다’고 그러더라고. ‘좀 더 열심히 하면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팍 땡길 수 있는 어떤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같이 이런 고민들 해보면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현장 일상 활동과 함께 여승선이 주요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 학습이다.

 

“지금 우리가 교양학습을 6강을 하고 있거든요. 내부에서 기본적으로 하고 필요하면 외부강사로 한다고 해서 하고 있고... 우리 동지들이 투쟁의 사이클을 올리려면 교양학습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계속 교육학습에 대한 얘기를 했고...”

 

공무원노조 노래패는 3명으로 줄어들어 독자적인 활동을 하기에는 어려워졌다. 그래서 울산노동자노래패연합이라는 형태로 지역의 여러 문예활동가들과 함께 공동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 속에서도 문예활동가들이 자기들만 모여서 연습하고 공연만 하는 식의 활동을 넘어서기 위한 모색들도 이뤄지고 있다.

 

“노래패연합만 보더라고 이제까지의 공연이 한정된 장소에서 했는데, 2008년에는 거리에서 대중과 직접 접촉하는 그런 고민을 하다보니까 거리공연을 두 번째 했거든요. 앞으로 계속 해나가자 할 작정이고...

만들어진 노래만 부르는 게 아니라 창작을 하는... 자기 현장의 정서는 자기네가 가장 잘 알거든요. 예를 들어 예전에 미포(현대미포조선)에서 만든 ‘해라 마라 좆까’ 이런 노래도 그 현장이 아니면 나올 수 없거든요. 그래서 앞으로는 그런 현장의 정서를 담은 창작을 좀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쨌든 불러 모으는 공연이 아닌 가서 만나는 공연을 하자는 고민이 있죠.”

 

40대 중반을 넘어서 나이 쉰이 보이기 시작하는 여승선은 미래를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나는 한 때 ‘남들은 나를 활동가라 하는데 내가 활동간가?’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있거든요. 지금은 활동가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고민 끝내고 나니까 달라지더구만요. 내가 해야 될 일이 뭔지 알게 되더라고요. 처음에 나는 사실 한쪽 발은 빼고 있었던 것 같애... ‘활동가가 얼마나 어려운데’ 하면서... 그런데 그런 고민을 하면서보니까 ‘지역의 문화행사나 가고, 연대나 열심히 가고 하는 것’에서 넘어서지를 못하더라고요.

한때는 지도에 대해서 상당히 목말라 했어요. ‘뭔가 좋은 거 없나?’해서 강의 들으러 가고 그랬었는데, 그것도 ‘나는 활동가다’라고 작정을 하니까 큰 문제없어요. 그때는 ‘누가 없을까? 누가 나를 안 가르쳐주나?’ ‘이런 고민들 확 트이는 얘기 누가 안 해주나?’ 이랬었거든. 그런데 그걸 넘어서고 나니까 자유로워져요. 이렇게 얘기하니까 도통한 거 같아서 이상한데 (웃음)... 마음이 편해지면서 ‘조합원은 간부의 거울이다. 열심히 하자’ 이런 마음이에요.

그래서 미래에 대한 고민은 별로 없어요. 지금 열심히 하는 만큼이 미래라고 생각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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