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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내 친구 하나

내 친구 하나



2006년 7월 22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느님 아버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 엄마 좀 살려주세요.

지금까지 정말 착하게만 살아온 분입니다.

누군들 고생 없이 살아왔겠습니까만

정말 고생만 하면서 살아오셨습니다.

제가 못 나서 아직도 고생스럽게 살아가고 계시지만

하늘나라로 가기에는 아직은 너무 빠릅니다.

말도 못하고 못난 아들도 알아보지 못 한 채 누워있는 엄마 옆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엄마 손을 꼭 잡고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우리 엄마 정말 착한 사람입니다.

우리 엄마 좀 살려주세요.

정말 간절하게 부탁드립니다.



2008년 10월 7일


하느님

왜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저도 나이가 들다보니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다는 것쯤은 이해합니다.

그리고 착하게 살면 잘 살게 된다고 믿을 정도로 어리석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건 너무합니다.


창석이 형처럼 착한 사람을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너무 착해서 남한테 싫은 소리 한 번 제대로 못합니다.

투박한 얼굴에 미소라도 생기면 정말 어린아이 같아 보입니다.

어설픈 거짓말을 하다가 들통 나면 금방 얼굴이 빨개지는 사람입니다.

가끔 제가 싫은 소리를 하게 되면 기분 나쁜 표정을 애써 감추라고 하는 모습 때문에 더 이상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합니다.


그런 창석이 형이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힘든 벌을 주시는 겁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깊은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 하더라도

어렵게 다시 일어서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또 뒤통수를 때리는 것은 정말 너무합니다.

세상에 나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너무 속상해서 술 한 잔 했습니다.

술 먹고 횡설수설해서 정말 미안하지만...

이건 아니잖아요!



2008년 10월 25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 엄마를 살려주신 하느님

창석이 형네 가족에게도 손을 내밀어주시면 안될까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으라고 얘기하신 하느님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금 그 복이 너무 간절하게 필요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하느님

지금 너무 힘들어하는 제 이웃 때문에 저도 너무 힘듭니다.


오늘 수없이 기도문을 외웁니다.

제 기도가 들리시면

창석이 형에게 하느님의 전지전능한 힘을 조금만 보여주십시오.



2008년 11월 13일


창석이 형 아들이 어제 집을 나갔습니다.

중학교 3학년인 그 어린 것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도 그 나이쯤에 가출이라는 것을 해봐서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압니다.

청석이형이 술을 먹다가 울고 말았습니다.

죽고 싶어도 아이들 얼굴 때문에 죽지못했다고...

큰 애는 학교 갔다 와서는 술에 취해있는 아버지 얼굴을 보고 다시 나가버렸습니다.

형수는 식당에서 그릇을 나르고 있겠지요.

저는 이런 형에게 술을 사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

이 불쌍한 사람을 한 번만 봐주십시오.



2009년 4월 6일


봄입니다.

고향에서 봄을 맡아 본 것이 20여 년 만이군요.

저 멀리 보이는 쪽빛 바다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화창한 하늘에 구름이 여유롭게 떠다니고 있습니다.

햇살은 얼마나 따뜻한지 모릅니다.

이곳 작은 동산에도 푸른 기운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군데군데 성질 급한 꽃들은 벌써 피고 있습니다.


부모님은 갑자기 고향으로 내려온 아들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반가워 해주십시다.

부모님은 아픈 데도 없이 농사로 두 분이 먹고 살만합니다.

그 지긋지긋했던 빚도 이제는 없습니다.

동생네 가족들도 표 나지 않게 신경을 많이 써줍니다.

동생네 가구점도 자리가 완전히 잡혔습니다.

어린 조카들은 얼마나 귀여운지 모릅니다.


이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하느님이 만드신 에덴동산이 이런 곳일까요?

천국에 들어와 있다 보니까 하느님 생각이 났습니다.

평소에는 생각도 하지 않다가 힘들 때만 하느님을 찾아서 미안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직도 교회에는 나가지 않습니다.

제가 좀 이기적이죠?

하지만 그렇게 힘들 때 손을 내밀 곳이 필요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기도를 하면서 울고 싶었습니다.

그것으로 고마웠습니다.

하느님

고맙습니다.



2009년 5월 8일


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오전에 밭에 가서 부모님과 같이 일을 하다가

밖에서 점심 먹자고 제가 먼저 얘기를 했습니다.

부모님은 덤덤하게 그러자고 하셨지만

기쁜 표정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돼지갈비를 무척 좋아하셔서 차를 타고 시내에 있는 갈빗집으로 갔습니다.

제가 어릴 때 아버지가 친구 분들과 갈비에 술 한 잔을 하시고 들어오시는 날이면

먹다 남은 갈비 뼈다귀를 은박지에 싸서 갖고 오시곤 했습니다.

저와 동생은 자다가 일어나서 아버지가 싸온 갈비 뼈다귀에 붙어 있는 갈비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거의 30년 만에 어버이날을 맞아서 부모님과 같이 갈빗집을 온 것이었습니다.

뼈다귀는 별로 없이 살코기만 있는 갈비가 너무 맛있었습니다.

특별한 얘기 없이 맛있게 갈비를 먹고 나서 계산은 아버지가 하셨습니다.


저녁에는 동생네 가족들이 와서 횟집으로 갔습니다.

어린 조카들의 재롱 속에 술도 한 잔 했습니다.


하느님

요즘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2010년 5월 22일


마음이 싱숭생숭 하니 잠이 오지 않아서

오래된 사진들을 들여다봤습니다.

40년에서 20년 전 사진들을 보면서

그 때를 생각하니까 기분이 묘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사진에서 잊고 지냈던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군대를 마치고 집에서 놀고 있을 때

우연치 않게 장애인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오전에 두 시간 정도 정신지체장애인 수업에 들어가서 선생님들을 도와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어느 봄날 바닷가로 놀러가서 같이 찍었던 사진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그들과 만났던 첫날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자원봉사 담당자는 간단한 상담을 하고 수업이 진행되는 교실로 저를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다섯 명의 학생들과 한 명의 자원봉사자와 선생님 한 분이 교실에 있었습니다.

자원봉사 담당자는 오늘부터 같이 할 사람이라고만 저를 소개하고는 교실을 나가셨고, 저는 깍듯이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그래, 반갑다. 이름이 뭐니?”라고 저한테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때 23살이었던 저보다 3~4살 정도 밖에 많아 보이지 않는 선생님이 대뜸 반말을 하는 것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공손하게 제 이름을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이름은 쓸 줄 아니?”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뭔가 이상하다 싶기는 했지만, 그 교실 분위기가 그런가보다 하고는 그냥 대답을 했습니다.

제 대답을 듣고 선생님은 “여기 칠판에 와서 이름을 써볼래?”라고 했고, 저는 앞으로 걸어가서 칠판에 제 이름을 썼습니다.

제가 생긴 것도 무식하게 생겼지만, 글씨도 워낙 악필이라서 반듯한 글씨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름을 쓰고 나니까 선생님이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글 잘 쓰네. 저기 뒤에 보면 이름 쓰는 표가 있거든. 제일 밑에 빈 칸에 가서 이름 써 넣을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제가 자원봉사자이고,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완전 어린애 취급하는 것에 기분이 무척 상했습니다.

하지만 첫날부터 인상을 쓰고 싶지 않아서 아무 말 없이 선생님이 말하는 곳으로 가서 이름을 써 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표를 살펴보았더니 자원봉사자 이름을 쓰는 표가 아니라 장애인 학생들의 이름을 쓰는 표였습니다.

그때야 저는 상황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뒤로 돌아서 선생님에게 얘기했습니다.

“선생님.”

“왜?”

“저는 자원봉사자인데요?”

“......”

얼굴이 빨개지신 선생님은 그날 저와 눈을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그곳에는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의 학생 다섯 명이 있었습니다.

몸도 불편하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존댓말을 씁니다.

저를 부를 때는 선생님 또는 형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나이가 많으면 형 또는 누나라고 부르고, 나이가 어리면 이름을 불렀습니다.

우리는 금방 친해졌습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복지관 현관에서 통학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과 함께 의자에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양복 입은 아저씨가 우리들을 지켜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든 말든 우리는 나름대로 재미있게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시던 그 아저씨가 그중에 가장 똑똑해 보이는 저에게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습니다.

“너 숫자 셀 줄 아니?”

“예.”

“한 번 열까지 세어볼래?”

나는 손가락을 꼽아가면서 아주 천천히 일부터 열까지 숫자를 세었습니다.

“더 셀 수 있는데, 더 할까요?”

“아니다. 너 숫자 정말 잘 세는구나.”

그때 통학버스가 왔고, 담당 선생님이 저한테 손짓을 하면서 말을 했습니다.

“자원봉사 선생님, 애들 데리고 오세요.”

저는 그들과 함께 버스를 타러 갔고, 그 양복 입은 아저씨는 멍한 표정으로 저희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사진을 보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렸습니다.

오래된 기억이라서 많은 기억들이 나지는 않았지만, 유독 내 옆에 서 있던 누나에 대한 기억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30대 초반이었던 누나는 한 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와야 하는 조금 먼 시골에 살고 있었습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같습니다.

손가락이 약간 부자연스럽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그 누나는 항상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30대 초반의 여자가 입고 다니기에는 많이 초라해 보이는 옷이었지만, 제 눈에는 아주 단정하고 예쁜 옷차림이었습니다.

장애인들은 보통 머리 관리가 편한 짧은 머리를 하고 다니는데, 그 누나는 어깨까지 기른 머리를 하고 있었고, 가끔 머리띠를 하고 오기도 했습니다.

어떤 날은 입술에 연한 루주를 바르고 오기도 했는데, 누나의 성격상 제대로 펴지지 않는 손으로 직접 발랐을 겁니다.

단정하게 앉아서 수업을 받곤 했던 누나는 말을 제대로 하지는 못했지만, 제 얘기를 잘 들어줬고 반응도 그때그때 보여주곤 했습니다.

어느 날에는 이름표를 달아야 했는데, 손이 부자연스러운 누나가 저에게 이름표를 달아달라고 했습니다.

가슴에 달아야 했기에 제가 쑥스러워서 매우 조심스럽게 달아줬더니, 누나는 살며시 웃어주었습니다.


하루에 두 시간씩 3~4개월 정도 그들과 시간을 보내고 저는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잊은 채 20년의 세월이 지난 것이었습니다.

복지관에서 그렇게 즐거워했던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리고 다시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끔 연한 루주를 바른 입술로 뭔가를 웅얼거리면서 말을 하려고 했고, 나를 보면 살며시 웃어주기도 했던 누나는 지금 50대 아주머니가 됐을 겁니다.


하느님

누나 잘 살고 있지요?



2009년 6월 10일


며칠 전에 창석이 형 소식을 들었습니다.

집을 나갔던 둘째는 돌아왔지만

형수랑은 올 초에 결국 이혼을 했다고 하더군요.

매일 같이 술을 끼고 살다가

어느 날 어디로 간다는 얘기도 없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 얘기를 듣고 덤덤해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어제 밤에 꿈을 꿨습니다.

창석이 형이 내 가슴에 꽂았던 칼을 빼내면서 미안하다고 울더군요.

내 가슴에서는 피가 흐르고

칼에서도 피가 떨어지는데

아프지는 않았습니다.

울고 있는 창석이 형 얼굴을 보면서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는데

무서워서 그러질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또 칼을 꽂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새벽에 잠을 깨서

이곳 동산에 올라왔습니다.


작년 연말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둘이서 송년회 하자고 불러낸 것은 저였습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그동안 힘들었던 기억을 술로 지워보자고 했지요.

기분 좋게 술을 먹었습니다.

너무 기분이 좋았었나봅니다.

1년 만에 새로운 직장을 갖게 돼서 제 기분이 더 좋았었나봅니다.

제가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창석이 형 얼굴이 약간 굳어지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워낙 착한 사람이었고

서로를 너무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그냥 가볍게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술기운에 풀릴 데로 풀린 저의 입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 순간 창석이 형이 잠시 정색을 했다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면서

저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렸습니다.

술기운이 확 달아났습니다.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는 저에게

창석이 형은 다시 미소를 지으면서

왜 아무 말도 못하냐고 하더군요.

그것이 창석이 형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한 달 동안 미친 듯이 술을 먹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날 창석이 형이 왜 그랬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형은 너무 지쳐있었습니다.

형이 울면서 얘기했던 것처럼 죽지 못해서 살고 있었던 것이었지요.

그런 형 앞에서 저는 다시 찾아온 행복을 얘기했습니다.

쉼 없이 혼자서 주절주절

어쭙잖게 형을 격려하기도 하고 훈계하기도 했습니다.

형한테 그게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 생각도 하지 않고...


그런 형이 꿈속에 나타나서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

저는 무섭기만 했습니다.


하느님

혹시라도 창석이 형 소식을 듣게 되도

저한테는 이제 얘기하지 말아주세요.

이런 저와 형을 그냥 지켜만 봐주세요.



2009년 6월 26일


요즘 조카들이 저를 많이 따릅니다.

저녁에 조카들이 놀러오면 그 조그만 손을 잡고 바다로 산책을 나갑니다.

어린이집에서 배운 노래를 큰소리로 부르면서 저를 즐겁게 합니다.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집에만 있다가 조카들이 와서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되면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조카들 손을 잡고 바다로 가고 있으면

뒤에서 동네 어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가끔 들립니다.

서울에서 무슨 일이 있어서 내려온 거 아니냐고도 하고

아직도 결혼을 못해서 어쩌고저쩌고 하는 등의 얘기입니다.

애써 못 들은 척 해보지만 즐거운 기분을 망쳐버리기에는 충분합니다.


제 귀에도 그런 얘기가 들리는데

부모님 귀에는 오죽하겠습니까?

하지만 부모님은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몇 년 전 추석 때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가 마흔이 되기 전에 결혼해야 하지 않겠냐고 조심스럽게 한마디 했다가

결혼을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어도 못하는 걸 어쩌란 말이냐

다리 저는 병신한테 언제 제대로 걸을 거냐고 하면 그 병신은 어쩌란 말이냐 하면서

죽어버리겠다면서 칼을 들고 설친 이후

부모님은 더 이상 결혼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밭에서 일을 하고 온 부모님이랑 같이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어머니가 어렵게 국제결혼에 대한 얘기를 꺼냈습니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저는 밥 먹던 숟가락 내던지고 집을 나와 버렸습니다.


지갑 속에 오천 원 밖에 없어서

소주 두 병을 사들고

이곳에 왔습니다.


부모님한테 그러면 안 되는데...

저는 정말 나쁜 놈입니다.



2009년 7월 9일


아침에 갑자기 배가 아파서 병원을 찾았습니다.

이런저런 진찰을 해보더니 의사가 요로결석이라고 했습니다.

의사 얘기로는 죽을 병은 아니지만 죽을 만큼 아프다고 했는데 정말 아팠습니다.

두 시간 정도 진찰을 하고 나서 30분 정도 결석제거 시술을 하고, 한 시간 정도 쉬다가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해졌습니다.


의사가 아팠을 텐데 잘 참는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조금 웃었습니다.

병원에 있는 몇 시간 동안 병원비가 얼마나 나올까 하는 걱정만 했습니다.

그러고 있으면 아픈 걸 별로 못 느끼거든요.


나이 마흔이 넘어서면서 크고 작은 병으로 병원을 찾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벌써 몸이 고장 나기 시작하는 나이가 돼 버렸습니다.



2009년 8월 3일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짜증이 많이 납니다.


어제는 아버지가 나가서 친구들도 만나라고 하시면서 10만원을 내밀었습니다.

얼마 안 되는 돈도 다 써버렸기 때문에 집에 내려와서는 담배 값을 아버지한테 타서 쓰고 있거든요.

없이 사는 것에 워낙 익숙한데다가 이곳에 내려와서는 만날 사람도 없기 때문에 돈 쓸 일이 별로 없습니다.

두 분이 농사지어서 1년에 1500만 원 정도 들어오는데 내 생활비까지 들어가는 게 미안하기도 했는데...

미안한 마음에 돈을 내미는 아버지에게 짜증을 내버렸습니다.

아버지는 무안한 표정으로 돈을 다시 집어넣었고

저는 밖으로 나와 버렸습니다.


오늘은 더워서 밤에 잠을 설쳐서 오전 내내 멍하게 있었습니다.

새벽부터 밭으로 나가 오전 일을 마치고 온 부모님과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기운이 없어 보이신다면서 개고기라고 사와야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또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밥을 다 먹지도 않고 그냥 나와 버렸습니다.


부모님이 저를 걱정해서 그러는 줄 잘 알지만...

오늘은 괜히 속상합니다.



2009년 8월 29일


오래간만에 재철이 형이 불러서 시내에 나갔습니다.

고향에 내려와서는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고 지내는데

재철이 형 하고는 아주 가끔 술을 먹습니다.

20년 만에 만난 재철이 형은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얼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고향사람들이 좋은 것은

오래간만에 만났는데도 그동안 어떻게 지냈고 왜 내려왔는지 하는 걸 시시콜콜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평소 만나왔던 것처럼 대해줍니다.


오늘은 재철이 형만이 아니라 친구 분이 한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시청에 있는 분이었는데 형하고는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좋아보였습니다.


형이 원래 말이 많은 편이 아닌데다가

저도 요즘 들어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다보니 무슨 얘기를 해야 될지 모르겠고

형 친구 분이 혼자서 얘기를 이끌어가 보지만

자리가 영 어색한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색한 술자리는 오래 가지 않아서 끝났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너무 힘듭니다.



2009년 9월 10일


날씨가 많이 선선해져서

동네 뒷산으로 산책을 나왔습니다.

코스모스가 많이 피었습니다.


어릴 때 이곳에 와서 칼싸움을 했던 정훈이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군대에서 고참들한테 시달리면서도 고시공부를 하던 석철이 형은 판사가 됐을까요?

처음으로 가슴 떨리는 연애편지를 보냈던 은정이는 결혼해서 잘 살고 있겠지요?

서울에서 같이 자취를 하던 정호는 다친 허리가 좋아졌을까요?

회사 그만두고 통닭집을 차리기 위해 저한테 50만원을 빌려가서 갚지 않은 길수는 아직도 통닭집을 하고 있을까요?

밀린 월세에 이자까지 악착같이 받아냈던 그때 집주인은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을까요?

퇴직금 주지 않으려고 도망 다니던 사장은 대리점을 계속 하고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사랑을 고백했던 혜정이 누나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그 사람들도 저를 기억하고 있을까요?


중학교 때 저한테 뺨을 맞았던 절름발이 점수는 맞지 않고 살고 있을까요?

술을 먹고 몸을 더듬었던 윤수는 저를 용서했을까요?

제가 아끼는 바지에 검은 물감을 칠해서 엄청 혼나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던 경호는 다 커겠지요?

흑심을 품었던 저 때문에 불편해했던 옆집 아줌마는 이제는 편하게 지낼까요?

20만원을 빌리고는 연락을 끊었던 상용이 형한테 이자까지 갚아야 하는데...

그 사람들도 저를 기억하고 있겠지요?


하느님

가을 타나 봅니다.

많이 외롭습니다.



2009년 10월 7일


오늘은 하느님께 고해성사를 하려 합니다.

저 혼자서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제 얘기를 들어주셨던 것처럼

오늘도 제 얘기를 들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십계명 중에 간음하지 말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있는 줄은 알지만

저는 매일 밤 음탕한 짓을 합니다.

제가 아는 모든 여자를 매일 밤 불러내서

해볼 수 있는 모든 음란한 행위를 다 합니다.

저의 욕구에 맞춰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여자들이 따르도록 요구합니다.

그렇게 저는 매일 밤 쾌락을 즐깁니다.


하느님

이렇게 못된 짓을 하는 것에 대한 변명을 조금만 할게요.


하는 일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익숙해졌지만

아직도 밤이 되면 힘듭니다.

잠은 오지 않고

텔레비전을 봐도 재미가 없고

책을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이런 저런 잡스러운 생각만 떠오릅니다.

서울에 있을 때는 술을 마시곤 했지만

고향에 내려와서는

부모님이 걱정하실까봐서

술은 자주 마시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힘겨운 밤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쾌락을 쫓는 것뿐입니다.

생각해서는 안 되는 모든 음란한 생각을 다 동원해서

밤의 쾌락을 즐깁니다.

빨리 끝나면 안 되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즐기려고 노력합니다.

이러다가 제 몸과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지만

저는 매일 밤마다 쾌락을 즐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제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2009년 10월 15일


하느님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합니까?

저를 불쌍히 여기신다면

제발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2009년 10월 18일


뭔가를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뭐를 해야 할지

뭐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것도 자신이 없습니다.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는 것은 더 자신이 없습니다.

지금 이 나이에 뭔가를 새롭게 배운다는 것도 자신이 없습니다.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자신이 없습니다.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온통 자신 없다는 생각뿐입니다.


하느님

저에게 용기를 주십시오.



2009년 10월 22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루에도 수 십 번씩 기도문을 외워봅니다.

하느님

제 기도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교회를 나가지도 않고

성경책을 보지도 않지만

그동안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의 모든 얘기를 다 했고

저의 가장 부끄러운 것까지 고백하면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매일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 끝에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새 삶을 얻었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 말을 믿습니다.

하느님

한 말씀만 해주세요.

하느님이 하라는 대로 할 테니까요.


정말 다시 일어서고 싶습니다.

정말

정말

정말요!



2009년 10월 30일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던

독하신 하느님!


저는 십자가가 싫습니다.

제가 뭘 그렇게 잘못 살았다고

저한테 이러십니까?

정말 너무 하십니다.



2009년 11월 7일


어제 후배 한 명을 만났습니다.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이곳으로 온 김에 제가 보고 싶어서 연락을 했다고 했습니다.

산뜻한 커플 옷을 맞춰 입은 두 사람은 정말 행복해보였습니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후배이고

신혼여행인데다가

고향에 찾아온 손님이기에

제가 횟집으로 안내해서 술을 샀습니다.


예쁘장한 신부는

이렇게 좋은 곳에 살고 있어서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냥 웃었습니다.

후배는

옛날에 친했던 선배라고 나를 소개하고는

우리가 친하게 지냈던 시절의 자기 얘기만 늘어놓았습니다.

술을 마시면서 후배의 얘기를 묵묵히 들었습니다.

중간 중간 맞장구도 쳐주면서...


얘기하는 내내

행복한 눈길을 서로 주고받고

가벼운 스킨십도 나누던 그들은

뒤늦게 제 술기운이 올라오려니까

피곤하다면서 숙소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손을 굳게 잡고 악수를 하고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를 잊지 않고 찾아준 것에 대해 기뻐해야겠지요?

힘들어 하는 사람보다는 행복한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겠지요?

몇 달 만에 같이 술 먹을 사람이 생겨서 좋아해야겠지요?


제가 너무 늦은 시간에 불러냈습니까?

술 취해서 횡설수설해서 죄송합니다.

하느님

이제 들어가서 편안하게 주무세요.

행복한 꿈꾸시고요.

저 같은 건 생각하시지 마시고요.

젠장!



2009년 11월 21일


정말 오래간만에 창수가 연락을 해왔습니다.

회사 다닐 때 보고 나서 4년 만에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안부도 묻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얘기를 했습니다.

무슨 일로 전화를 했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고향에 내려와서 처음으로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라서 반가웠습니다.

그냥 안부 전화려니 하고 끊으려하니까

정수기 하나 필요하지 않냐고 하더라고요.

제가 괜히 무안해졌습니다.

집을 이사하려고 하는데 이사하고 나서 연락 주겠다고 했습니다.

알겠다면서 끊더군요.

좀 그럴듯한 말을 했어야 하는데

너무 거절하는 것이 표 나게 해버렸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하느님

정수기 하나 필요하지 않으세요?



2009년 12월 1일


오늘 뉴스를 보다가

강원도 어느 곳에서 3명의 남녀가 한 여관방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살사이트에서 만났다고 했습니다.


텔레비전을 끄고

그냥 누워있는데

눈물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하느님

그 사람들이 하느님 곁으로 가면

꾸중하시지 말고

그냥 따뜻하게 안아주세요.



2009년 12월 24일


세 살 난 조카가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감기가 오래가더니 폐렴이 돼서 1주일 정도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조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해주려고 며칠 전부터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병원으로 달려 가다보니 빈손이었습니다.


애들 폐렴이라는 것은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린 것이

환자복을 입고 그 조그만 손에 주사바늘을 꽂고 있는 모습이 많이 안쓰러웠습니다.

저를 보자 삼촌왔다고 하면서 웃어주는 모습이 제 마음을 환하게 했습니다.

조금 있으려니까 여섯 살인 큰 애가 아빠랑 같이 들어왔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밭일을 마치고 병원으로 달려왔습니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나중에 해주더라도 온 가족이 모인 김에 케잌이라도 하나 사와야겠다 싶었습니다.


병원 근처 빵집에서 커다란 케잌을 하나 사들고 병실로 들어섰는데

조카가 큰소리로 울고 있었습니다.

손에 꽂았던 바늘이 빠져서

간호사가 다른 손에 바늘 꽂을 자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바늘이 들어가지도 않았는데도

겁에 질린 조카는 병원을 처렁처렁 하게 큰 소리로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 조카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병실을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냥 조카 옆에 선 채 벽만을 바라봤습니다.

조카의 울음소리가 내 가슴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제 손이 아팠습니다.


어렵게 주사바늘을 꽂고

엄마가 한참을 달래주고 나서

조카의 울음이 그쳤습니다.

그제야 제가 사온 케잌을 가운데 두고

온 가족이 둘러앉았습니다.

조카들은 손과 코와 입에 케잌을 잔득 묻히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하느님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예수님에게도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하느님에게도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착한 조카가 빨리 퇴원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2010년 1월 17일


오늘 창석이 형네 가족 소식을 들었습니다.

큰 애는 올해 대학에 들어간다고 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간 둘째가 아직도 말썽을 부리고 있고

형수는 공장에 다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형은 아직도 소식이 없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듣고

담담했습니다.

안쓰러운 마음은 있었지만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일들을 두루 알고 계시니까

지금 형이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있겠지요?

그리고 저에게 그랬던 것처럼

형이 힘들면 힘든 대로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그냥 보고만 계시겠죠?

형이 잘 살도록 기도합니다.



2010년 1월 23일


둘째 조카가 요즘 노래 부르는 것을 엄청 좋아합니다.

어린이집을 마치고 할머니 집에 놀러오면 조카가 좋아하는 노래 DVD를 틀어줍니다.

조카는 제 무릎에 와서 앉고는 제 손을 잡고 안아달라고 합니다.

어린 조카를 살며시 껴안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면서 노래를 같이 부릅니다.


숲속 작은 집 창가에

작은 아이가 있었는데

토끼 한 마리가 뛰어와

문 두드리며 하는 말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저를 살려주지 않으면 사냥꾼이 총으로 빵! 쏜대요.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라~



2010년 2월 14일


설날이어서 오래간만에 친척들이 모였습니다.

옛날에는 먼 친척들까지 모두 찾아가면서 차례를 지냈는데

자식들이 커가면서 조금씩 갈라지더니

몇 년 전부터 직계가족들만 모여서 차례를 지냅니다.

우리 할아버지 밑으로는 아들이 둘이지만

큰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우리 아버지가 장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큰아버지 밑으로도 사촌 형이 세 명인데

큰 형을 제외하고는 모두 객지에 나가서 연락 없이 살고 있기 때문에

큰 형네 식구들만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 식구들도 올해는 오지 않고 큰 형만 왔습니다.

작년부터 형수랑 사이가 많이 안 좋아져서 별거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부모가 그러다보니 자식들도 부모랑 서먹해져서 올 설에는 찾아오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큰 형네 집안도 말이 아닙니다.


우리 집안 차례를 지내고 나면

앞 집 할머니에게 세배를 드리러 가곤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할머니를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할머니는 자식이 일찍 죽어서

손자들을 어릴 때부터 키워왔는데

손자들도 지금은 다 커서 객지에 나가 살고 있습니다.

아흔이 넘으신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셨는데

작년 연말에 손자들이 찾아와서

요양원에 입원해드렸다고 합니다.

손자들이 찾아가면

할머니는 집에 가고 싶다고 사정을 하고

그런 할머니를 보면서 손자들은 울고만 온다고 합니다.


우리 사촌 형은 돈 욕심이 좀 있어서

원래 가족들이랑 관계가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도 성격이 조금 모질어서

어릴 적부터 손자들이랑 많이 싸우고 그랬습니다.

그래도 나쁜 사람들은 아닙니다.


하느님

이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지켜봐주세요.



2010년 2월 21일


오늘 처음으로 교회를 가봤습니다.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하느님과 얘기할 수 있는데

꼭 교회를 가야하나 하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리고 솔직히 교회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도 사는 게 저랑 크게 다르지는 않은데

교회를 나간다고 뭐 달라지겠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왠지 교회를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교회를 다니겠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가면 한번쯤 하느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가자고 했을 텐데

교회 다니는 사람을 알지도 못해서

무작정 시내에 있는 한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좀 쑥스러워서

교회 앞에서 서성이다가

예배시간이 돼서

한쪽 구석을 찾아가 앉았습니다.

낯선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앉았다 일어 섰다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면 입만 벙긋거렸습니다.


솔직히 하느님을 만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 더 솔직한 얘기겠지요.

그러다나 목사님이 설교 하시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하느님한테 간절하게 바랄 때마다 외우곤 했던 주기도문에 대한 얘기를 하셨습니다.

어려운 얘기도 많고 너무 길어서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하느님은 저 높은 하늘 위에 계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과 한 몸이시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가

죽음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보여주셨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서

지금 이곳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와 하나이신 하나님이리고 하시더군요.


오늘 그 얘기를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솔직히 잘 이해는 되지 않았고

믿음이 없는 저로서는 그저 그런 얘기였지만

하느님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얘기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있다는 것은 좋은 얘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제 마음대로 이름을 바꿔도 괜찮겠지요?



2010년 3월 9일


오래간만에 재철이 형을 만났습니다.

우리 동네에 놀러온 김에 연락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쌀쌀했지만

동네 방파제에서 술을 가볍게 한 잔 했습니다.

형을 만나면 언제나 그렇지만 별 얘기는 없었습니다.

요즘 지내는 얘기를 조금씩 주고받았습니다.

자주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나도 그렇고

형도 그렇고

지내는 얘기가 별 것 없습니다.

형이 말이 많지 않은 편인데다가

나도 할 말이 많지 않아서

얘기하다가 할 말이 없으면 그냥 바다만 바라보고 술을 먹었습니다.


형이 치질이라서 바닥에 앉기가 힘들다고 하면

내가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하고

형은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고는 잠시 말이 끊기고...

형이 어머니가 김치를 담그고 있는 집에 있기가 싫어서 나왔다고 하면

내가 심심했는데 오래간만에 방파제에서 술 먹어본다고 하고

또 말이 끊기고...

뭐 그런 식입니다.


재철이 형을 만나면 편하기는 하지만

즐겁지는 않습니다.

불편하거나 싫은 건 아닌데

왠지 나 자신을 보는 듯 한 느낌 때문에 그렇습니다.


객지에 나가서 고생고생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고

성격이 그래서 주위에 사람들이 많지도 않고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이곳저곳 몸에 탈이 난 곳이 많고

그러면서도 매일 같이 술을 먹게 되고


‘아’ 그러면 ‘어’를 안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봅니다.

치질이 있다는 얘기에 술로 버텨야 하는 삶이 보입니다.

그래서 서로 말을 길게 하지 않아도 되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이 편하긴 하지만

내가 나를 알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서로의 얘기를 듣기만 하는 거죠.


오늘 형이랑 헤어지고

집에 왔더니 조금 심란해졌습니다.

나도 치칠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김치 담그는 어머니를 도와주지 않고 밖으로 나와야 하는 것도 왜 그런지 알고

상할 대로 상한 몸에 만취되도록 술을 먹고 싶지만 가볍게 마시고 헤어져야 하는 기분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내가 그렇게 간절하게 부를 때도 아무런 대답도 없었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2010년 3월 17일


오늘 하나님 생각을 많이 해봤습니다.

목소리 한 번 들려달라고 애걸복걸 하지 않을 테니까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ㅋㅋㅋ


웃기는 얘기지만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니까

하나님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무수한 사람들의 얘기를 그저 듣고만 있어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하게 기도하던 내 얘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아픈 사람 때문에 아파해야 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면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까

많이 미안해지더라고요.

나 때문에 그렇게 힘들게 해서...


그래서

이제부터는 내가 하나님 친구를 하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도 외롭고 힘들고 아플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뭔가 바라지 말고

그냥 나한테 얘기를 하세요.

나도 그냥 듣고만 있을게요.


내가 하나님처럼 마음이 넓지 못해서

어줍지 않게 이것저것 얘기를 해주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고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얘기에 힘들어할지도 모르고

가끔은 나도 힘들어서 짜증을 낼지도 모르고

감정 조절이 잘 안 돼서 울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이 외롭고 힘들고 아플 때

그냥 옆에 있어주고 싶어요.


내 말에 동의하는 거죠.


그럼, 우리 지금부터 친구다.

친구끼리는 말 놓고 지내는 거고.

이제부터 우리는 친구니까

너를 그냥 ‘하나’라고 부를게.


내 친구 하나야

우리는 하나잖아.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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