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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강제수용소에서 물은 언제나 부족한데다 변소는 언제나 오물 속에 잠겨 있었다. 게다가 설사병이 유행하고 사방이 진흙투성이였기 때문에, 통상적인 의미의 ‘청결’이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저 깨끗이 해보려는 시늉만 하는 데에도 비상한 노력이=] 필요했다.
어느 생존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몸을 정돈하고 씻고 깨끗이 하는 것, 이 세상에서 가장 간단한 그런 일이 불가능하게끔 만들어져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몸을 씻을 물도, 장소도 시간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_레빈스카 Lewinska
그러한 환경이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재소자에게는 가장 끔찍스런 발견이었다.
숙소와 하수구, 진흙, 블록 뒤에 있는 똥 무더기들. 처음에 그 모든 것들의 참을 수 없는 불결함은 나를 얼떨떨하게 했었다. 그러나 나는 곧 그 이유를 알았다. 그것은 혼란이나 무질서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수용소 생활의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는 철저히 계산된 고의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를 우리 자신의 똥오줌 속에 빠져 죽게 하고, 진흙창과 배설물 속에서 죽어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스스로의 품위를 떨어뜨리기를 원했다.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파괴해서 우리를 짐승 수준으로 타락시키기를 원했더 것이다. _레빈스카 Lewinska
이러한 깨달음을 얻고 난 수용자에게는 두 가지 반응만이 가능했다. 자포자기 하든가 저항하든가 양자택일을 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많은 생존자들에게 있어서 저항의 의지가 탄생하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한 그 순간, 나는 마치 미몽에서 깨어난 것만 같았다. 나는 내 밑바닥으로부터 나오는 ‘살아야 한다’는 명령을 들었다. 설사 내가 만일 아우슈비츠에서 죽는다고 해도 나는 ‘인간’으로서 죽을 것이며 끝까지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킬 것이다. 나는 결코 놈들이 원하는 대로 비천하고 더러운 짐승으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난 후로는 무서운 투쟁이 밤낮으로 계속 되었다. _ 레빈스카 Lewinska
다른 생존자는 이야기한다.
그때 거기서 나는, 총살되지 않으려면, 교수형을 당하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견디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고 결심하였다. 더 이상 나는 무관심에 빠져 허탈해 있어서는 아니 되었다. 나는 외모를 사람답게 만다는 데 집중하기로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것은 좀 우습게 들릴는지 모르겠다. 내가 새로이 발견한 정신적 저항력과 내 몸에 걸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누더기와 무슨 관계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묘하게도 그것들은 관계가 있었다. 그때 이후로 수용소 생활이 끝날 때까지 나는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주위를 살폈다. 그 결과 어떤 여자든 세수를 할 기회가 있는데도 하지 않거나, 신발 끈 매는 것을 에너지의 낭비라고 생각하는 여자에게 생의 종말이 시작되는 것을 보았다. _바이스 Weiss
몸을 씻는다는 것은 건강상의 이유로 씻는 것과는 별개의 형식적 의미의 행동이라도, 수용자들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것이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일임을 알았다. 이를 중단한 사람들은 얼마 안 가서 죽는 것이었다.
4시 30분이면 커피-아무 영양가 없이 고약한 냄새만 나는 엷게 우려낸 향료-가 배급되었다. 우리는 흔히 두어 모금만 마시고 나머지로 세수를 하곤 했는데 우리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 보잘것없는 커피조차 안 마실 수가 없었기 때문에 씻기를 그만 두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덤을 향한 첫 걸음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씻는 데 실패한 사람은 곧 죽는다. 이것은 철칙이었다. 그것이 내부적 쇠약에 의한 결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결코 빗나가는 법이 없는, 틀림없는 전조였다. _도나트 Donat
집단 강제수용소에 들어간 사람은 처음에는 절망감으로 인하여 자신의 외모에 대해 무관심해지지만, 점차로 씻지 않고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무엇하러 세수를 한단 말인가? 그렇게 하면 내가 더 잘 살 수 있는가? 아니면 남을 좀 더 즐겁게 할 수 있는가? 씻어봤자 에너지와 열을 빼앗길 뿐, 헛수고에 지나지 않을 텐데...... 그러나 나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저 오물투성이의 더러운 대야 속, 저 탁한 물에나마 세수를 하는 건 남아 있는 생명력의 징조이며 도덕적 생존의 한 수단이라는 것을...... _레비 Le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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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상황 아래서의 삶은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 의식을 기반으로 유지된다. 어느 하나도 조직 활동을 통하지 않고는 성취될 수 없다. 존재의 사회적 기반이 그 나름의 공통 의식을 갖게 하고, 외부 환경에 대처해 나가기 위해 나름의 규율을 가지려면 필연적으로 정치적으로 되지 않을 수 없다. 아우슈비츠의 두 생존자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듯이, 이런 경우의 ‘정치적’이란 의미는 아주 초보적인, 인간성의 기본 수준을 의미한다.
무제한의 자기중심주의와 동료 재소자들의 희생 위에 자기의 삶을 구하는 파괴적인 욕망, 그것은 정치의식을 갖기에는 아직 미숙한 재소자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이들은 자기들만 살아남겠다는 태도는 SS대원들이 재소자에게 가하는 압박만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능력이 없었다. 아우슈비츠에 입소하기 전에 거친 강제수용소에서 우리가 얻은 경험은, 모두 힘을 모아 집단적으로 대처해나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각성이었다. 나치와의 투쟁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 정치의식을 갖는 일은 성공의 필수 조건이었다. 가시철조망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삶의 목표를 부여하고 그들로 하여금 견뎌나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정치적 연대 의식이었다. _크라우스 Kraus, 쿨카 Kulka
소용소의 재소자로서 어떤 일이건 집단적인 행동이 개별적인 노력보다 어떤 일이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 또 그들 사이의 연대 의식을 굳히면 굳힐수록 더 큰 효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아마 그는 정치적으로 미숙한 사람이라고 단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미숙한 점을 드러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고립을 개인주의로 착작하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 비극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조직 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업가 출신들은 말할 것도 없고, 냉소주의자들, 정치적으로 미숙한 비조직 노동자 출신들 등, 우리가 자유로웠던 시절의 소위 위대한 개인주의자라고 부르던 사람들은 모두 정신분열 증세를 나타냈다. 그들은 나치를 위한 무감각한 도구로 번해 갔다. 그들은 나치의 호의를 얻기 위해 아첨과 비굴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지만, 이런 노력은 그들의 입장을 한층 더 비열하고 힘겹게 만들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켄발트에서 오래 생존할 수가 없었다. _바인슈톡 Wein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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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행진이 계속되던 수주일 동안 사람들이 서로 도왔던 것보다 더 이상 아름답고 또 더 이상 비참한 사실은 없을 것이다. 나치의 동부전선이 붕괴되자 연합군의 점령 직전에 놓이게 된 수용소들은 차례로 서쪽으로 이동되었다. 공포와 죄의식 때문에 거의 미치다시피 된 SS대원들에게 이끌려진 재소자의 행렬은, 살은 에는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겨울 새벽 속으로 끝없이 걸어갔다. 집단 강제수용소 내의 전 재소자들이 폴란드의 얼어붙은 황야를 가로질러 독일로 향하는 행진을 강요당했다. 이들은 종종 빵 한 조작도 먹지 못하고 맨발로 여러 주일 동안 걷기도 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뒤로 처지거나 행진을 멈추는 자는 그 자리에서 총살되었다. 그리고 밤중에는 수많은 재소자들이 잠든 채로 얼어 죽어갔다. 최후의 극한 상황은 생존자들을 인내의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따라서 만일 이런 상황에서 이기적인 생각이 조금이라도 작용했더라면, 지쳐 쓰러진 사람들 가운데 동료 재소자에게 이끌려 행진을 계속함으로써 살아날 수 있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이 생존자들의 증언은 헌신적인 도움의 사례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짜내어 서로를 부축하며 행진해 갔던 것이다.
내 손은 모두 얼어붙었고 상처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을 느꼈다. 나는 완전히 허리를 굽혀 두 손을 허벅지 사이에 넣은 채 거의 기다시피 걸었다. 점점 졸음이 덮쳐왔다. 무릎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힘이 빠졌다. 드디어 나는 눈 속에 쓰러졌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흔들며 이름을 불렀다. “제발 자게 내버려 둬......” 나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부인은 나를 더 거세게 흔들었다. 졸음 때문에 반쯤 감진 눈으로 보니 클라리였다. “클라리, 제발, 나를 그만 자게 내버려둬......” 하고 나는 애걸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 팔을 잡아끌어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_바이스 Weiss
이런 조그만 사건들은 무수히 일어났다. 매우 간단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또 다른 도움은, 밤중에 서로 잠들지 않도록 깨우는 일이었다. 지칠대로 지친 몸으로 눈 속에서 잘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잠든다는 것은 곧 죽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들은 철야로 불침번을 서야 했다.
“일제!” 나는 그녀를 흔들었다. “제발 건드리지 말아 줘!” 그녀가 항의했다. “일제!” 나는 다시 소리쳤다. “일어나! 넌 지금 잠들려 하고 있어!” 그녀는 비로소 깨어났다. 나는 그녀의 얼굴과 빳빳해진 손을 문질렀다. 나는 수지와 리젤을 불렀다. 그들의 대답이 들렸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서로를 부르며 잠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우리는 잠들지 않는데 도움이 된다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했다. _클라인 Klein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것만으로도 매우 힘이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힘든 것은 더 이상 걷지 못하는 사람을 힘으로 부축하며 걸어가는 일이었다. 어떤 소녀가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면 누군가가 잡아 일으켰다. 그녀는 겨우 의식을 회복하고 자기를 일으킨 사림이 아우슈비츠의 식당에서 같이 일한 여자인 것을 알았다. “그녀는 나를 더 힘차게 자기 몸쪽으로 끌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내 몸무게 때문에 비틀거리면서 간신히 걷는 정도였다. 그 여자도 나와 똑같이 여위고 허약했던 것이다”_베란바움 Birenbaum 생존자들이 그들의 쓰러진 동료를 부축하여 같이 걷도록 할 때면, 도움을 준다는 자체가 체력의 한계에 달한다.
형언할 수 없이 괴로운 행진이 한 시간쯤 지속된 뒤 벤지는 우리들에게 자기를 그냥 버려두고 가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그를 버린다면 행렬의 뒤에 있는 SS대원들이 지쳐 쓰러진 그를 간단히 총살해 버릴 것이 뻔했다. 그 장면이 눈에 보이는 것 같은데 어떻게 우리가 그를 내버려 두고 갈 수 있겠는가? 우리는 체력의 밑바닥에 최후로 남은 모든 힘을 동원하여 그를 부축하며,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그 밤길을 걸어갔다. _운스도르퍼 Unsdorfer
자신도 지쳐서 다 죽어가는 그들에게 도대체 어디서 남아 있는 힘이 있어서 이런 도움을 줄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생명의 탄력성에 관한 가장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 중 하나다. 부분적으로는 죽음의 행진을 계속한 재소자들이 어렴풋이나마 전쟁은 거의 끝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번만 더 살기 위해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파악하면, 이런 상황 아래서도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것은, 일찍이 형성된 강한 동료 의식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즉 자기 목숨이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간신히 유지될 수 있었던 수개월 또는 수 년 동안의 악몽 같은 집단 강제수용소 생황을 거치는 동안, 재소자들 사이에는 누가 무슨 일이 생기든 간에 서로 밀착되어 도와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 정도가 되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은 것을 다시 갚아주는 것 따위는 대단한 일이 아니었고, 서로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들 사이에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 이상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 등의 표현을 이런 극한 상황에서는 단순한 수사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하찮은 도움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재소자들은 서로 도움을 주는 구체적 행동을 통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렇게 일어나는 무수한 작은 행동들이 모여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커다란 흐름으로 발전해 갔다. 예를 들면 나치의 집단 강제수용소에서 ‘아펠’이라고 불렀던 점호 시간을 위해, 재소자들은 새벽부터 눈이 오거나 비가 오가나 차렷 자세로 몇 시간씩 서 있어야 했다. 똑같은 일이 저녁에도 계속되었다. 저녁 점호는 최소한 두 시간씩은 걸렸고 때로는 서너 시간씩 걸리기도 했다. 심한 경우는 하룻밤 내내 점호를 받는 수도 있었다.
재소자들은 SS장교들이 열 사이로 지날 때 모자를 벗었다 썼다 하면서 끝날 때가지 똑바로 서 있어야 했다. 사소한 잘못도 혹심하게 다뤄졌다. 그런데 이런 사소한 규칙 위반은 너무나 많았다. 재소자들은 지친 나머지 고통을 견디다 못해 비틀거리다가 쓰러져 바로 그 자리에서 죽어 갔다. 저 참혹한 겨울의 점호 시간은 실제로 유태인 말살 정책의 한 형태라고 부켄발트의 한 생존자는 말한다. “게다가 점호 시간에 쓰러져 죽어가는 것 외에 이 때문에 폐렴에 걸려 죽는 사람도 많았다.”_바인슈톡 Weinstock 점호 시간에 쓰러져 있는 것이 SS대원에게 드러나면 그 자리에서 심한 매질을 당하든지 아니면 바로 총살이었다. 그래서 재소자들 사이에 널리 사용된 방법은, 더 이상 자기 몸을 지탱할 수 없는 동료 재소자가 생기면 가까이 있는 재소자가 자기 몸을 받침대로 그를 받쳐주는 것이었다. 생존자들의 보고서 대부분에는 점호 시간에 이런 종류의 도움을 주고받은 순간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몹시 지친 데다가 쇠약해진 몸을 더 이상 지탱할 힘도 없었기 때문에 점호 시간 동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 곁에 가까이 서 있던 동료 재소자들이 내가 쓰러질 것 같은 것을 알고 내 양쪽에 바짝 붙어 섰다. 그들이 나를 이런 식으로 떠받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서 있을 수 있었다.” _찰렛 Szalet
오른쪽으로 고개를 조금 돌려보니까 감각이 없어진 페더바이스의 빳빳한 몸이 그의 앞뒤에 서 있는 재소자에게 떠받쳐져 있는 게 보였다. 뒷사람은 그의 허리띠 부분을 잡아당기고 있었고, 양쪽에 있는 사람은 자기 등으로 페더바이쓰의 가슴을 밀어붙이면서 그가 앞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그들은 SS대원들이 이것을 눈치 채지 못 할 만큰 저쪽으로 멀어져 갈 동안 계속해서 이런 자세로 그의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_운스도르퍼 Unsdorfer
물론 재소자들 사이에 서로 돕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많은 인원들을 집합시켜 놓은 곳에서는 어느 정도 서로 돕는 게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SS대원의 인원수로는 도저히 그 많은 재소자들을 모조리 감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기껏 할 수 있는 일은 줄을 지어 서 있는 재소자들 사이를 한 줄씩 흘낏 지나치며 검사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도움을 주고받는 일이 일단 발각되면 생명이 위험했다. 그럼에도 도움을 주고받아야할 필요성은 너무도 절실했기 때문에 종종 아주 교묘한 방법을 취하곤 했다. 재소자들은 앓아누운 동료 재소자들이 점호 시간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그들을 업고 점호하는 곳에 나왔다. 그리고는 SS대원의 감시를 피해 가며 번갈아 그가 쓰러지지 않도록 부축했다. 심하게 앓아누워 아무래도 며칠 동안은 도저히 움직이지 못하는 동료를 위해서는 그의 점호를 도와주는 것뿐만 아니라, ‘조직 활동’을 통해 얻은 여분의 음식을 갖다 주는 등 그가 건강을 되찾게 될 때까지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 재소자들은 앓고 있는 동료들을 이쪽 막사에서 저쪽 막사로 옮기기도 하고, 점호 시간을 무사히 넘기기 위해 그의 몸을 떠받쳐 주기도 했다. 또 그가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고 제정신을 잃고 있을 때는 SS대원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일은 결국 그날그날 “죽어야 할 자를 선발하는” SS대원의 잔인한 눈을 속이는 일이었다. 예를 들면, 티푸스에 걸린 어떤 재소자는 그의 동료들의 도움으로 매일 캐나다로 몰래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 쌓인 거대한 옷더미 속에 숨어 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특별한 비밀 휴식처에 가려면 앓거나 허약한 재소자를 모조리 가려내어 처형장으로 보내는 일만 전담하는 카포들 앞을 지나가야 했다. 그러므로 매일 두 사람의 재소자가 그 티푸스 환자를 카포들 가까이까지는 양쪽에서 부축하여 갔지만, 그들 앞을 통과할 때는 그 환자 스스로 걸어가야 했다. 이곳만 통과하면 그들은 다시 그를 부축하는 것이었다.
집단 강제수용소의 재소자들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다. 그것은 그 자체로도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어떤 때는 한 개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도 많았다. 비르케나우의 어느 소녀의 경우가 그것이다. 그 소녀는 “감자 깎는 일을 하는 곳에 자기가 없는 것이 발각되면 심하게 채찍질을 당할 위험이 있었는데도 매일 저녁 아픈 사람들에게 커피를 갖다 주었다. 이런 일은 그 소녀가 처형당하기 하루 전날까지 계속되었다.” _스마글레브스카 Szmaglewska 또 어떤 경우에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형태가 집단적으로 일어났다. 어떤 집단의 재소자들이 다른 재소자 집단의 작업을 도와주는 일도 있었다. 창고에서 시멘트를 꺼내어 건설공사 현장까지 운반하는 작업조 사이에도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
나는 그런 대로 이 일을 감당할 만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는 몇 군데 다른 수용소를 거쳐 오는 동안 몸이 쇠약해져서 힘을 쓸 수 없는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나를 포함한 몇몇 젊은 사람들은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자기 몫 이상의 작업을 해야 했다. 우리는 체력이 감당할 수 있는 데까지는 서로 돕자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우리는 몇몇 재소자들이 품고 있었던, 자기만 살겠다는 이기주의 철학에 굴복할 수가 없었다. _바인슈톡 Weinstock
무슨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는 언제, 어디서라도 집단적으로 서로 도왔던 것이다. 하나의 실레를 들어보자.
다섯 명의 부녀자들이 자갈을 가득 실은 궤도차를 밀면서 가고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잘못되어 이 차가 궤도를 벗어나 모래 속에 처박혀 버렸다. 그 여자들로서는 이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작업 감독은 근처에 없었지만 온갖 노력을 해도 탈선한 궤도차는 모래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언제 그 잔인한 작업 감독이 다가올지 몰랐으므로 이 여자들은 거의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주위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은밀하게 한 사람씩 사고가 난 곳으로 모였다.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사방에서 탈선한 궤도차 쪽으로 모여들었다. 모래 위에서 작업하던 여자들, 자갈을 싣고 있던 여자들, 방금 자갈을 부리고 돌아오던 사람들 모두 힘을 합쳐 그 차를 궤도 위로 끌어올렸다. 어떤 사람들은 등으로 밀기도 하고 작업도구로 쓰던 삽으로 떠받치기도 했다. 그 궤도차는 간신히 모래 속에서 빠져나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포감이 재소자들을 사로잡고 있었으므로 보통 때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그 차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좀 더 힘을 들여 밀어 올리다 보니 이제 한쪽 바퀴가 선로 위에 올라섰다. 작업을 감시하던 카포 한 사람이 멀리서 그쪽으로 쫓아왔다. 아무래도 여러 사람이 한쪽으로 몰리다 보니 작업장 군데군데에서 인원수가 모자라는 것을 눈치 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닿기 전에 이미 그 탈선한 궤도차는 선로 위에서 전혀 사고가 없었던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_스마글레브스키 Szmaglews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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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소자들의 체험기를 보면, 남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과 똑같이 기본적인 본능이라는 사실을 훌륭하게 증명하고 있다. 그것은 극한 상황 속에서의 삶이 가진 사회적 본능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생존자들 사이에 전혀 예기치 못했지만 무척 성행했던 활동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집단 강제수용소에서는 이런 본능들이 주로 선물을 주고받는 형태로 나타났다. 재소자들끼리 끊임없이 보잘 것 없는 조그만 물건들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이런 행동을 할 수 잇다는 사실은 자기들끼리 사기를 높이는 면에서도 대단히 큰 효과가 있었을 뿐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투쟁에서 실질적으로 유용한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도움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어느 날 저녁, 우리들은 밀기울로 만든 수프를 마시고 있었다. 그날따라 나는 이 수프를 대단히 맛있게 먹었다. 왜냐하면 장염 때문에 매일 나오는 애채수프를 마실 수 없는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어떤 매춘부가 내 침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자기 수프를 내게 내밀었다. “마슈린, 이 수프는 너도 먹을 수 있는 것 같구나. 여기 내 몫까지 더 먹어.”라고 하면서 자기 수프를 내 식기에 전부 따라 주고 가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그날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지냈다. _마우렐 Maurel
선물을 주고받는 일이 보다 빈번했던 관계는 아무래도 친구나 자기 근방에서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굶주린 사람들이 자기 것을 나눠주기 위해 그토록 열성이라는 사실은 놀랄 만했다. 우리가 작업을 끝내고 돌아와 보니 막사 안의 모든 침대 머리맡에 오렌지가 반쪽씩 놓여 있었다. 우리 친구 중 한 사람이 소포로 보내온 오렌지를 받았던 것이다. 그는 우리가 돌아오는 것도 기다리지 못하고 서둘러 미리 나눠넣고 기다렸던 것이다. _베르나르트 Bernarad
아우슈비츠의 지하조직 활동에 가담하고 있던 어느 재소자는 자기 생일날 시퍼런 사과 한 개와 “너무 오래 사용해서 한쪽 끝이 다 닳아 없어진 낡은 칫솔 한 개를 선물로 받았다.”_렝기엘 Lengyel 선물로 주는 물건이 구하기 어려운 것이고 또 그것이 명백하게 선물인 이상,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준다는 행위 자체에 ‘무언가 줄 수 있다’는 기쁨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간 반에서 일하는 일제가 정오에 올라왔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뒤로 돌아서서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는 “당신한테 줄 선물”이라며 신이 나서 그것을 건네주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싱싱한 잎으로 싼, 빨갛게 잘 익은 나무딸기 한 개였다. _클라인 Klein
재소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줄 선물을 우연히 구하기도 하고 ‘조직’하기도 했다. 음식물이 든 소포를 외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수용소도 있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수용소에서는 물물교환을 통해 필요한 물건을 구했다. 다음의 예는 아우슈비츠의 어느 재소자가 SS대원 한 사람에게 궐련 한 갑을 주고 빵 한 덩어리를 얻은 뒤, 이것을 나눠주는 광경을 보여준다.
나는 그날 밤 부자였다. 수용소 안에서 배급되는 검은 빵이 아니라 독일군 장교들의 식탁 위에서나 볼 수 있는 흰 빵을 한 덩이 통째로 갖고 있는 오만한 부자였다. 나는 이걸 야간 작업반원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게 즐거웠다. 특히 급식이 모자라서 도저히 굶주림을 이기기 어려웠을 때, 종종 자기 몫의 빵과 수프를 나에게 주곤 했던 내 친구 벤지에게 조금 큰 빵 조각을 나누어줄 수 있다는 것이 특별히 기쁜 일이었다. _운스도르퍼 Unsdor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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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나 나치의 어느 수용소에 가든지 재소자들이 납득하고 인정한 단 하나의 법이 있다. 이것은 ‘빵의 법률’이라고 불리는 법칙이다. 이 법은 수용소 안에서 도덕적 질서의 중심이며 기초였다. 작센하우젠의 어느 생존자는 이 법의 기원과 그 방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남의 것을 훔치는 일이 재소자들의 막사 안에서 그치지 않고 일어났다. 굶주림은 재소자들을 끊임없이 괴롭혔고, 그들을 어쩔 수 없이 짐승으로 만들어 버렸다. 예전에 상당한 존경을 한 몸에 모았던 근엄한 신사들까지도 다른 사람이 잠들었을 때를 틈타 다음날 아침에 먹기 위해 침대 머리맡에 아껴 둔 빵 조작을 훔쳐 먹는 일이 생겼다. 낮이 되면 누구나 한결같이 도둑질을 저주했다. 그러나 밤이 되면 도둑질은 다시 반복되는 것이었다. 드디어 서로 모여 대화를 나누는 때에 이런 도둑질을 근절시킬 방안들이 논의되었다. 그런데 빵을 훔치는 자들 가운데는 자기가 저지르는 범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재소자들이 많았다. 그것은 그들이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정신 이상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빵 한 조직이, 우리가 이토록 모진 고생을 참아가며 기다리는 해방의 날이 올 때까지 체력을 유지시키는 유일한 생명 보호 수단이라고 생각한다면 도둑질은 어떻든 없어져야 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빵 도둑을 붙잡을 경우, 그가 다시는 도둑질을 해서 식욕을 채울 생각을 아예 잃을 만큼 혹심하게 처벌을 했다. _찰렛 Szalet
소련의 집단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난 어느 생존자도 똑같은 경우를 기술하고 있다.
재소자들 사이에서 빵 도둑은 슬프게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동료의 빵을 훔치는 일은 어떤 이유로 그런 짓을 하게 되었든지, 수용소 당국에 정보를 제공하는 것 다음으로 용서할 수 없는 범죄로 취급됐다. 따라서 남의 빵을 훔치다가 붙잡힌 동료에게 가해지는 처벌은 그만큼 혹독했다. _노르크 Nork
아우슈비츠 재소자 막사에서 빵을 훔친 자들에게 가한 처벌은 실제로 매우 가혹한 것이었다.
“그래, 어떻게 처벌했소? 다른 사람들이 그를 몹시 때렸습니까?”
“아니, 당연히 죽여 버렸지요. 그런 파려치한 녀석을 때려준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18번 구역의 법이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빵을 훔치면 피해자가 도둑을 죽여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도둑맞은 사람이 힘도 없고 체력도 딸려 처형할 능력이 없을 경우는 다른 사람이 대신해 주기도 했다. 그것은 정의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써는 몹시 거친 방법이기는 했지만, 음식물을 남에게서 빼앗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에서는 공평한 방법기도 했다. _ 브로바 Vrba
이런 방법이 비록 거칠고 너무 심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빵의 법률로 이런 엄격한 강제는 필요했다. 이것은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생명이 걸려 있는 공동체를 보호하고 신뢰의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귀중한 빵을 도둑맞았다는 것을 알고 나면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그대로 쓰러져 버리기도 했다. 극한 상황에서 음식물을 이런 식으로 빼앗기는 것이 얼마나 개개인에게 심리적으로 타격을 주는 것인지는 상상할 수도 없다. 뿐만 아니라 도둑질은 우리 전체에게도 의심, 증오 등의 감정을 퍼뜨려 분위기를 해치는 것이었다. _셈프룬 Semprun
사회적 혼돈과 질서 사이의 차이, 즉 아무런 가치 기준도 없다는 자포자기와 이런 상황 아래서도 어느 정도 분별력 있는 선행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 사이의 차이는, 바로 빵의 법률이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은 사실 누구에게나 중요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도둑질이 주고받는 행위의 중요성을 저해하고, 따라서 전체적으로 재소자 사이에 암암리에 형성된 자발적 공동체를 허물어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부켄발트의 어느 생존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굶주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의 빵을 훔칠 만큼 도덕적으로 타락한 재소자가 생겼다 하더라도, 그를 SS대원들에게는 물론 구역 감독에게도 보고하는 사람은 없었다. 같은 방을 사용하는 사람이 직접 처벌했던 것이다. 그가 죽을 만큼 매를 때리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화장터에 보내지기 꼭 알맞게 만들어 버렸다. 사람들은 모두 이 빵의 법률을 인정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법은 실제로 수용소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도덕성을 유지시키고, 동시에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모두들 깨달았기 때문이다. _바인슈톡 Wein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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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가 나타남에 따라 사람들은 서로 ‘이웃으로서의 도움’에 의지한다. 이러한 형태의 패턴은 수용소 세계 어디에서나 나타났다. 주고받는 행동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그러한 상호 교류의 강도는 다만 상상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인간들이 자기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때에는, 아무리 작은 호의라도 그들의 연약한 생명의 세계를 지진과도 같이 흔들어 놓는다. 그런 순간이 지닌 힘은 엄청난 것이며, 그렇게 이룩된 유대는 범죄나 명예 그리고 일상적인 의무에서 비롯된 것보다 훨씬 강하다. 이런 종류의 ‘베풀기’ 행동에 관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동정심’ 같은 것은 거기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때로는 아무리 하찮은 것-한 순간의 눈초리, 한 마디 말, 한 가지 동작-이라도 쓰러져 가는 사람을 구해주기에 충분했다. 한 번은 동료 재소자에게 삶은 감자를 주었을 뿐인데, 그는 자기 목숨을 살려준 데 대하여 언제까지나 감사하는 것이었다. 또 한 번은 행진 중에 접질린 친구의 다리를 맞추어 주었다. 그는 무사히 살아남았는데, 나의 도움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못하고 아마 쓰러진 자리에서 죽고 말았을 거라고 우겼다. 수용소에서는 몇 조각의 빵을 얻는 것보다 친절한 한 마디의 말을 듣는 것이 더 어려웠다. 재소자들은 힘이 닿는 데까지 서로 도왔지만 감정이 흐르는 것은 피했기 때문이다. 도움은 좋다. 하지만 동정을 금물이다. _도나트 Donat
동정이란 ‘고통을 함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의 세계에 상상력으로 동참하는 행동이며, 그와 똑같은 종류의. 같은 정도의 고통을 스스로 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맞는 행동이다. 동정을 통해서 우리는 한 사람의 상황과 다른 사람의 상황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있다. 그리고 저절로 굴러 들어온 행운과 어쩔 수 없이 닥친 불행 사이의 거리가 우리의 상식적인 세계에 머무는 한, 동정은 도덕적 지상명령이다. 그러나 그것은 운명의 시련을 겪지 않은 우리들에게나 그렇지, 생존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집단 강제수용소의 사람들은 모두가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이었다. 모두 침묵 속에서 슬픔을 참고 있었다. 누구나 타인의 눈물을 이해했지만, 동정하지는 않았다. 불행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동정하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의 재난에 동요하지도 않는 것이다.” _도나트 Donat
두 여인 사이의 대화를 들어보자.
“왜 울고 있어?”
나는 더 심하게 흐느껴 울었다.
“정말이지, 왜 울고 있는 거야? 우리는 모두 함께 있는데, 그리고 모두가 똑같이 심하게 당하고 있는데 말이야.”
_파블로비츠 Pawlowicz
- 『생존자 -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테렌스 데 프레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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