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다시! 80회 – 삶에 감사해
- 11/04
-
- 다시! 78회 – 일렁이는 파도
- 10/21
평신도와 만인사제직 : 예배와 권력의 상호관계
권진관(성공회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예배는 권력 관계를 포함한다. 누가 예배를 인도하고, 성례전을 집행하며 누가 축도를 하느냐는 교회권력에서 가장 중심 되는 주제이다. 모든 것이 정치적이고 권력의 표현이라고 하지만, 교회와 그 예배는 더욱 그렇다. 영적이고 신앙적인 것을 매개로 한 권력 관계가 예배에서 그리고 교회 생활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목사는 종교적 물질이라고 하는 예배의 모든 순서를 독점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헌금 등 실질적 물질도 장악, 관리하고 있다. 이러한 권력의 불평등성을 극복하지 않으면 교회와 예배는 근본적으로 위선에 불과하게 된다. 본 필자는 이제부터 만인사제직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를 논해보려고 한다.
1. 자기 중심적 세상에서의 공동체와 제도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집단들은 자발적 공동체와 이익집단적 결사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익집단적 결사체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확장을 그 목적으로 한다. 이에 반하여, 자발적 공동체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보다 높은 이념이나 가치를 목적으로 한다. 이익집단은 제도에 의해서 내부의 결속을 이룬다. 왜 제도인가? 그것은 이익집단 속에 돈과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회사를 생각해 보자. 회사에는 돈과 권력이 있다. 회사의 사람들은 돈과 권력을 추구한다. 너도나도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집단에서는 무질서의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합리적인 이익집단들은 제도에 의해서 질서 잡을 수밖에 없게 된다. 어떤 조직에서나 제한된 재력과 권력이 존재하며 이것들은 또한 일정한 사람들에게 집중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 제한된 권력과 재물을 자기가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욕심을 갖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한된 재물과 권력를 합리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하며 성원들 간에 합리적인 질서를 잡기 위해 제도가 필요해 진다. 제도란 원래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것을 목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제도는 “중립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제도는 소수의 엘리뜨에 의해 관리될 때가 많다. 그렇게 되면 합리적 제도 대신에 “제도주의”가 사물을 관리하게 된다.
이익집단일수록 “제도주의”에 의해 움직인다. 제도주의는 제도 자체의 발전을 그 목적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회사와 같은 이익집단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 극대화이다. 회사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가장 효율적인 내부적 질서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질서가 이른바 제도라 하겠다. 제도 속에는 위계질서가 생기게 되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권한(power)과 재물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무한적으로 보장받는다면 위계질서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분배해야 하는데 여기로부터 위계질서가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제도주의”의 특징은 위계질서이다. 또 위계질서의 제도적 집단은 차별화를 특징으로 한다. 성원 사이에 차별이 존재함을 인정하며 이것을 제도화한다. 예를 들어, 제도적 집단에서는 상사와 부하의 계급적 차이가 강조된다. 의사소통의 방식은 일방통행적이다. 특히 제도교회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서,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강조된다. 그리하여 사제나 목사는 남자만이 될 수 있다. 사제와 평신도 사이에도 차별이 존재한다. 이러한 계급적 차이는 제도주의적 집단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 특징이다.
원래 교회는 제도를 가지지만, “제도주의”에 의해 움직이는 이익집단은 아니었다. 교회는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목적으로 하는 공동체이다. 교회 안에 있는 제도는 하나님의 선교를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마련된 것이다.1) 교회는 세상을 위해 자기 자신을 종으로 내어 주는 공동체이지 자기 자신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존재하는 집단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제도주의적 교회들은 자신의 확장을 자기 목적으로 삼고 있다. 제도교회 안에 돈과 권력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관리하기 위해 교회 안에 제도가 생길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제도에 의해 움직이는 집단은 그 결속력이 강한데, 그 결속의 동기는 자기 중심주의에 있다. 이 자기 중심주의는 이중적인데, 한편으로는, 집단적 자기중심주의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집단에 참여하고 있는 성원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자기중심주의가 있다.
이에 반해, 자발적 결사체인 공동체는 자기 중심주의를 극복할 때에만 성장할 수 있다. 자발적 공동체의 성원들이 자기 중심주의에 빠져 있게 되면 공동체가 성립될 수 없다. 자발적 결사체들은 어떤 특정한 목적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인다. 자발적 공동체가 가지는 가장 큰 어려움은 성원들 간의 결속력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성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기초로 하여 모이는 자발적인 공동체는 성원들이 자발성을 가지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다. 자발적인 참여는 어떤 경우에 일어나는가? 공동체의 성원들은 강제나 미혹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와 자율에 의하여 참여한다.
공동체 성원들의 자유와 자율은 자발적으로 책임을 감당하는 것으로, 즉 자발적인 수임(受任)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가 설 수 없다. 공동체가 서지 않는 이유는 공동체 속에 책임의 자발적인 수임이 일어나지 않고 아노미(무질서)의 상태로 빠져 들어가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수임은 성원의 자유와 자율에 기초하여 이루어 진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원리를 카리즘 (은사)의 원리라고 말한다.
2. 카리즘 (은사): “공동체” 교회의 기본 원리
그런데 공동체는 자칫하면 무책임한 성원들로 구성되어 질 수 있고 활동의 질도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 모두가 방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주인없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공동체는 곧 아노미의 상태에 들어가고 성원들은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공동체가 빠질 수 있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책임이 전체 성원들에게 균등히 나뉘어져야 한다. 어떤 개인, 혹은 일부의 집단이 공동체의 일에 있어서 궁극적인 결정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책임을 모든 성원들에게 균등히 나누어야 한다. 책임의 나눔은 공동체 조직의 원리이며, 이것은 성령이 주는 은총의 선물, 즉 카리즘(charism)의 원리이다 (고전 12장).
카리즘의 원리는 제도주의의 원리와는 달리 차별을 부정한다. 다양성과 서로 다름은 인정하거나 북돋되, 차별은 부정한다. 카리즘의 원리는 성원들에게 고정된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 분담과 책임의 수평적, 순환적 나눔을 강조한다. 특히, 계급주의를 부정한다. 또한 카리즘의 원리는 의사소통적 대화구조를 강조한다. 이러한 카리즘의 원리를 말하고 있는 고린도 전서 12장의 중요부분을 인용해 보자.
은총의 선물은 여러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직책은 여러가지이지만 우리가 섬기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4-5절).
유다인이든 그리이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3절).
그뿐만 아니라 몸 가운데서 다른 것들보다 약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우리는 몸 가운데서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부분을 더욱 조심스럽게 감싸고 또 보기 흉한 부분을 더 보기 좋게 꾸밈니다 (22-23절).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습니까? 또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26절)
바울이 설명하는 카리즘의 원리에서는 다양성 속에서의 하나가 강조되며 (4, 5, 13, 26절), 계급적 차별성이 부정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3, 22, 23절). 그리하여 성원들 간에 평등한 참여와 자발적인 책임이 강조되고 있다. 이에 반해 카리즘이 없는 공동체의 모습을 바울은 이렇게 그리고 있다.
만일 온 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또 온 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17절)
모든 지체가 다 같은 것이라면 어떻게 몸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19절)
여기에서 바울은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상징어로 설명하고 있다. 몸에는 지체가 있다. 지체가 없으면 몸 즉 공동체가 될 수 없다. 몸이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지체 즉 다양한 카리즘을 가진 지체들이 참여해야 한다. 모두가 다 눈이 되거나 모두가 다 귀가 된다면 그것은 카리즘의 원리에 맞지 않으며, 공동체로 성립할 수 없다.
여기에서 카리즘과 달란트 (talent)의 차이점에 대해 유의해야 한다. 달란트라는 용어는 개인의 역량을 말할 때 쓰인다. 어떤 사람은 많은 달란트를 가졌고 또 어떤 사람은 적게 가져서 개인적인 역량에 차이가 있음을 강조할 때 달란트라는 상징이 사용된다. 달란트는 타고난 능력을 표현하기 때문에 개인의 역량의 숙명적인 성격을 가지는 데에 반하여, 카리즘은 가변적이며 비숙명적인 성격을 갖는다. 공동체는 달란트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카리즘의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 카리즘이 분배되지 않은 공동체는, 즉 책임의 공정한 나눔이 없는 공동체는 바울이 말하는 “몸” (즉, 공동체)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말뿐의 공동체이지, 공동체로서의 실질적 내용이 부재한 집단이다.
카리즘은 성령으로부터 나왔고 카리즘에는 위계나 서열이 없으며 평등만이 있을 뿐이다. 성령은 공동체의 기반이다. 성령은 활동하는 영이요,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영이다. 성령의 선물인 카리즘(은사)은 규격화되어 반복되는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움을 창조하는 활동을 하게 한다. 그런 면에서 카리즘은 제도주의를 뛰어 넘는 조직의 원리이다. 이것은 새로운 의미에서의 제도이다. 이것은 제도주의로부터 해방된 제도이다. 카리즘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제도이다. 민주적인 제도는 카리즘의 원리로부터 온다. 그것은 모든 성원은 카리스마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한다.2) 카리즘은 모든 성원들, 특히 사회적인 약자도 주체로 세우는 새로운 의미의 제도인 것이다.3)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주체자가 되게 하는 분이다. 남에게 종속되거나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 안에서 주체적으로 일어나 자유한 인간이 되는 것을 예수가 원했다는 것을 요한 복음서 기자는 증언한다.4) 결국, 신자의 자유나 카리즘의 원리는 특히 성령의 시대인 교회의 시대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성령의 공동체들은 자기중심적인 제도주의적 교회들에 의해 에워싸여 있다.
3. 자발적인 공동체
공동체교회는 교회의 역사 속에 나타났던 소종파 교회로부터 자발주의를 배운다.5) 소종파주의는 자발성을 철저하게 강조했다. 교회에 관한 한 강압이나 강제가 없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거의 강압적으로 강권하여 사람들을 끌어 들이는 자기 중심적인 개교회주의를 보이고 있는데에 반하여, 소종파적인 교회에서는 이러한 강압을 볼 수 없다. 순수한 자발주의는 세례도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재세례를 주장했다. 소종파적 자발주의는 후에 민주주의의 근거가 되는 관용의 정신을 배태한다.6)
또 소종파주의는 자발적 참여 속에서 형제 자매적인 공동체적 교회를 형성하려고 했다. 가톨릭 교회는 교회제도주의로 나갔고, 개신교는 개인주의적 신앙으로 나간 데에 비해 소종파 주의는 형제 자매의 공동체적인 유대를 강조했다. 프리드만 (Friedmann)은 세 개의 종파들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도표로 설명하는데 매우 잘 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소개한다.7)
(도표 생략)
위의 도표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교회와 교회의 위계 질서가 교인들과 하나님을 매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교인들은 교회와 사제를 떠나서는 구원의 대열에 설 수 없다. 중세 가톨릭의 교회절대주의는 여기에서 설명된다고 하겠다. 반면에 개신교는 모든 개인이 각각 직접 하나님과 관계한다. 동료 교인들과의 횡적인 연대없이 자신의 구원의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푼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의 현실을 보면 목회자들은 개인의 구원을 돕는 도움이의 역할을 한다. 목회자는 가톨릭의 주교나 사제처럼 개인의 구원을 위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구원의 문제는 신앙인의 개인적인 문제이다. 개신교도들은 언제든지 자신들의 구원문제를 더 잘 해결해 주고 조언해 줄 수 있는 목회자에게로 옮겨 갈 수 있다. 이것은 출석교회를 바꿈으로써 가능하다. 개신교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가장 좋은 인도자라고 선전한다. 그리하여 더 많은 교인들을 끌어 들이기 위해 마치 세일즈맨과 같이 자신을 소개하고 선전한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소종파적 재세례파의 신학 입장에서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연대성, 형제자매의 확인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한 전제가 된다. 교회는 개인의 집합이 아니라 개인들이 이루어 놓은 유기체적 공동체이다. 이러한 유기적 공동체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은 남미의 기초교회공동체들과 헝가리의 복꼴 공동체 등이라고 본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소종파의 형제자매의 교회의 이상과 만인사제의 이상을 실현시키고 있다. 그 뿐아니라, 이러한 공동체들은 사회변혁의 전망을 견지하며 실천한다는 점에서 과거의 소종파들의 약점을 극복하고 있다.
4. 이야기 공동체
공동체는 이야기적 언어를 사용한다. 명제나 분석이나 논리적 언어가 아니라 가장 민중적인 언어인 이야기를 주로 사용한다. 예수의 이야기에서부터 못가진 자들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나눈다. 오늘날 대형교회들도 이야기적 방법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들의 이야기들은 주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 잘된 사람들의 이야기, 간단히 말하면 가진자들의 이야기이지만, 민중의 기초교회공동체는 어려운 사람들의 고난과 삶과 희망의 이야기,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의 “위험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민중교회공동체에서는 교리를 선포하거나 가르치기 보다는 삶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기성의 연역적 진리나 원리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서 귀납적으로 의미를 전달한다.
5. 연대 속에 있는 교회
“공동체” 교회는 다양한 모습으로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땅에서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자라나고 있다. 남미의 기초교회공동체를 비롯하여, 헝가리의 복꼴 기초교회공동체, 필리핀의 기초교회공동체, 이밖에 아시아, 아프리카 등에 많이 존재하고 있어 전세계적으로 산재해 있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진보적인 교회들이 있어왔다. 김교신, 함석헌의 무교회주의 운동, 요즘 많이 진행되고 있는 민중교회운동, 두레공동체 운동, 나눔의 집 운동은 공동체교회의 전형적인 모습들이라고 보여진다. 이러한 다양한 공동체들이 존재하고 스스로 자신의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 공동체들은 서로 연대한다.
연대를 통해서 전체 교회들의 공의회성을 경험하며, 친교를 확대한다. 이것을 통해 공의회적인 (conciliar) 거룩한 성례전의 거행과 공동예배의 경험을 할 수 있다. 작은 공동체의 한계를 이러한 연대를 통해 극복한다. 여기에 따라서 공동의 프로젝트를 계획할 수도 있다. 연대는 세속적 일반 시민단체들과 공동체들과의 연대를 포함한다. 교회공동체는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온갖 시민사회단체들, 민중운동체들, 빈민운동체들 등과 연대하며 공동 프로젝트를 가질 수 있다.
6. 기초교회공동체
현재의 제도교회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새로운 교회형태인 기초교회공동체에서의 삶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1) 첫째의 특징은 “소외시키는 구조들의 부재, 직접적인 관계, 상호관계, 깊은 친교, 상호 지원, 복음의 이상들의 공유, 구성원들간의 평등성”에 있고 또 구성원의 자유로운 참여의 보장이 이루어짐으로써 바깥 사회의 비민주적인 위계질서 등이 이곳에서는 있을 수 없다는 데에 있다.8) 이러한 참여와 민주적인 삶을 북돋는 공동체는 기독교 정신에 본질적으로 부합한다.
(2) 이러한 평등하고 참여적인 공동체 안에는 다양성이 보장된다. 기초공동체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각기 자기가 받은 은사(charism)로써 공동체에 봉사하게 되어있다. “세례받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카리스마적 인물이다.”9) 다양한 은사를 받은 여러 사람들이 각자 동등하고 독립된 인간으로서 공동체의 삶의 전영역에 참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3) 평신도 지도자에 의해 성례전의 집행된다. 기초공동체에는 사제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임으로, 이러한 특수한 사정 속에서 사제 없이 서품받지 않은 평신도에 의해 성찬예식이 집행된다. 만인사제의 이상이 기초공동체 속에서 실현되고 있다.
(4) 기초교회공동체에서는 예배를 행할 뿐만 아니라 성원들의 정치의식화, 사회.정치.경제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성서연구, 정치적인 활동, 교육훈련 등 정치적, 사회적인 참여와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기초교회공동체는 소종파적 교회처럼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사회와 무관해 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뛰어들어 사회정의가 이루어 지도록 노력한다. 기초교회공동체는 다른 사회변혁 세력들과 연대한다. 노조, 노동당, 기타 시민사회를 강화하기 위한 여러 운동세력들과 손을 잡고 전체사회의 변혁과 인권회복을 꾀하고 있다. 여기에 기초교회공동체와 세상과 절연하려고 하는 소종파들과의 다른 점이 있다 하겠다.
그러면 기초교회공동체를 조망시켜 주는 교회론적-신학적 입장은 무엇인가? 기초공동체에서는 교회를 공동체로 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고, 나아가서는 성령의 성사(sacrament)로 보고 있다. 교회를 통합시키는 신학적인 개념은 은사(charism)이다. 모든 성원은 모두 은사를 받은 카리스마적 인물들이다. 그들은 각자 자기의 은사대로 공동체와 이웃을 위하여 봉사한다. 따라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방식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입장에서 참여한다. 은사를 가진 성원들이 주체적이고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임재를 사크라멘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곧 교회의 본질이라고 본다. 사크라멘트적인 교회론은 나아가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 (the People of God)이라는 신학적 입장으로 연결된다. 모든 사람들은 평등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느 누구의 매개에 의해서가 아니라 직접 그리스도 안에서의 친교와 봉사에 참여한다. 여기에서의 참여는 기초공동체의 예식에의 참여일 뿐만 아니라 모든 결정과정에의 참여를 말한다. 이러한 입장은 그리스도의 대행으로서의 사도들의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하는 기존의 주교(로마주교 포함)와 사제 중심의 제도교회의 위계질서를 뒤바꾸는 대안적 교회 구조를 잉태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최근까지 교회는 “백성들을 위한 사제들만의 교회”였는데 이제는 “백성의 교회”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와같은 교회론에서는 주교나 사제들은 하나님의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위치가 아니라 조정자 (coordinator)의 역할로 이해된다.10) 이것은 또한 가난한 자와 약한자의 교회, 박탈당한 자의 교회, 해방자 교회, 진정한 사도적인 교회라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7. 헝가리의 기초교회공동체: 전체교회를 대체할 기초공동체
다음으로는 헝가리의 기초교회공동체운동을 또다른 변혁적 교회운동의 일환으로 보고, 여기에서 나타나고 있는 교회론적인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는 기초교회공동체가 남미에만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를 가졌었지만, 독일에서 있었던 한 세미나 모임에서 헝가리의 기초교회공동체 운동을 하는 사함들을 접하게 되고 그들로부터 몇 편의 자료를 제공받은 후 이러한 운동은 세계 도처에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중에서 Gyorgy Bulanyi(불라니)라고 하는 헝가리의 기초교회운동 지도자가 1980년도 부다페스트에서 쓴 "Church Order"(“교회의 질서”)라고 하는 논문을 중심으로 헝가리의 기초교회공동체운동의 상황과 그 교회론적 특징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브라질의 기초교회공동체의 경우와는 달리 헝가리의 기초교회공동체들(기초공동체들을 헝가리에서는 숲이라는 뜻을 가진 복꼴‘BOKOR’이라고 부른다)은 제도카톨릭교회로부터 이단시되거나 섹트(소종파)로 간주되고 있다. 복꼴은 1945년에 시작되어 그동안 사회주의 체제와 제도교회로부터 많은 탄압을 받아았고, 정부당국과 제도교회로부터 불법적인 집단이라고 간주되어 왔다. 복꼴 회원 중 300명 가량이 감옥에 갇혔었고, 그중에는 교수형을 당한 사람들도 있다. 제도 카톨릭교회가 비록 기초교회공동체를 불법적이라고 몰아붙였지만 기초교회공동체로서는 카톨릭의 제도교회를 비판하지만 그 존재 의의를 완전히 부정하고 있는 것같지는 않다.
“교회의 질서”의 저자인 Bulanyi(불라니)는 교회질서는 곧 사랑의 질서여야 하며 그것은 네 가지의 지상적 요소(unconditional elements)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예수, 사랑, 공동체, 자율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공동체의 개념이 그의 사상의 중심을 이룬다. 공동체는 인간 대 인간의 직접적인 관계에 기초한 작은 공동체를 의미하며, 이 공동체의 목적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는 것이라 한다. 이 기초공동체는 현재의 카톨릭의 상하 위계적 교회질서에 대한 대안적 새로운 교회질서라고 말한다. 이 공동체 안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사제라고 하는 만인사제의 이념이 실현되고 있다. 헝가리의 기초공동체운동에서는 사제와 신자들 사이의 괴리가 부정된다. 모든 사람들이 사제이며,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공동체를 형성하고 창조해 내는 사람이 바로 사제라고 생각한다. 신학교에서 전문적인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사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는 사람이 진정한 사제라는 것이다. 공동체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능력이 없으면서 정규신학 교육을 받고 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을 받는 것으로 사제가 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고 “교회의 질서”는 주장한다. 이와같이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를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는 것, 즉 사제와 평신도로 나누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카톨릭 교회에서는 결혼하지 않고, 남자이고, 다른 직장을 가지지 않고, 정규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에 한해서 사제로 안수한다. 그러나 “교회의 질서”에서는 어떻게 결혼 안한 사람이 결혼한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으며 (부모의 관계 속에서 자식을 직접 사랑하고 양육해 보지 못한 사제가 어떻게 부모들을 훈육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직장에서 일하지 않는 사람이 직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평신도)을 인도할 수 있겠는가고 질문한다. 마치 소경이 성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왜 인류의 반수인 여성들이 사제가 될 수 있는 길을 막는 것이며, 또 인류의 성인(成人)중 대부분이 결혼을 한 사람들인데 왜 이들이 신실한 제자가 되는 길을 단지 결혼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막을 수 있는가고 질문한다. “교회의 질서”에서는 인생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결혼도 해야하고, 직장의 경험을 가져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공동체를 제대로 이끌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도 신학을 공부한 사람보다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사랑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성들이 남성보다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사랑을 덜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교회의 질서”는 카톨릭 교회의 사제들이 신도들에게 “고용”되었기 때문에 결국 신도들의 눈치를 보게 되고 또 힘있는 당국자들의 입김에 영향을 받게 됨으로 그들의 비위에 맞는 행동을 하느라고 진정한 예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없게 된다고 지적한다. 사제들은 따라서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마치 바울 선생처럼 자기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자기의 노동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좋은 설교를 했다고 그것으로 생활비를 받는 것은 복꼴(BOKOR)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 복꼴에서는 어느 누구도 월급을 주거나 받지 않는다. 모든 공동체의 일은 자원봉사의 원칙(voluntary-work basis)에서 이루어진다. 설교하는 사람은 자기의 역량껏 하지만 그것으로 생활비를 벌지 않으며, 심방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누구나 능력이 인정되면 설교할 수 있으며, 심방이라는 것도 누구나 하게 되어 있다. 하나의 복꼴(기초교회공동체)은 그 구성원이 10-13명 정도로서 그 이상이 될 수 없도록 함으로써 구성원의 상호간 긴밀한 인간관계를 맺게 되어 있고 서로 방문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이러한 기초공동체가 천여개 되고 있으며, 그 구성원은 1980년 현재 약 만명을 헤아리고 있으며 현재 계속 늘어가고 있다.
“교회의 질서”라고 하는 논문의 저자인 Bulanyi(불라니)는 복꼴운동이 그리스도 교회의 회복을 위한 운동이라고 확신하며, 이 기초공동체가 현재의 카톨릭의 질서를 대체하게 되는 때를 꿈꾸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것은 정말로 꿈(dream)이요 소망(hope)이다. 실제로 만 명이라는 많은 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고 기성교회가 갖지 못하는 순수한 복음적 열정, 청빈의 정신, 만인사제 사상, 성원의 참여보장 등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래의 대체교회로서 많은 호응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복꼴에서는 사제란 성전 담당자 (sanctuary servant)가 아니라 공동체를 창조하는 사람(community-creator)이라고 본다. 공동체를 창조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100명, 1000명 모이게 되면 더 이상 공동체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만한 숫자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을 모두 잘 알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일찌라도 이렇게 많은 성원을 가진 모임에서는 성원들과 매우 피상적인 관계만을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공동체에서는 이러한 피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모두 성원들이 내면적인 친교와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예수가 열두 명의 제자를 가졌듯이 공동체도 13명이 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교회의 질서”에서는 공동체를 구성하게 하는 세 가지의 조건을 들고 있다. 그것은 (1) 성원들이 공동의 목표를 나눌 수 있어야 하며, (2) 공동체 속에 남아 있기를 원하는 의지가 있어야 하며, (3) 서로 잘 알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하는 것 등이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거나 약화되면 공동체는 성립될 수 없다고 한다. 공동체 성원들은 다른 성원들을 위해 시간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공동체의 구성원의 수가 너무 많으면 서로 만나서 대화하기 위하여 하루 24시간 모두를 써도 모자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은 한 공동체에 속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하며, 그러나 특별한 경우는 최대한으로 한 두 공동체에 더 참여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기초교회공동체 운동의 근저에는 인간은 서로 만나고 친구로 사귀며 서로 사랑하고자 하는 본성과 필요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름 아니라 우정(friendship)이요, 친구 사귐 (making friends)을 의미한다고 한다. 하나님 나라는 이러한 사귐 속에 임재한다. 한 탁월한 교구신부가 열심히 노력해서 5000-6000명이나 되는 신도들을 다 만난다고 가정하자. 그는 기껏해야 신도 한 사람을 1년에 한번 정도밖에 만날 수 없을 것인데, 이러한 만남은 친구사귐이 될 수 없다고 한다. 구성원의 수가 적을 때만 친구사귐이 가능해 진다. 현재의 헝가리의 카톨릭 교회는 사제의 수가 만성적으로 모자르기 때문에 한 사제가 수천명을 상대해야 하는데 이러한 형편 속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친교와 우정은 싹틀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헝가리의 카톨릭 교회는 외국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아서 신부들을 위해 교회건물이나 수양관을 짓는다거나, 차를 사는 등 교회를 유지하는 데에 이것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불라니는 이러한 천문학적인 양의 재물을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다면 더 좋을 것이며 그것은 기초공동체적인 교회질서를 가질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기초공동체는 교회건물을 더 이상 지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개인 집의 식탁에 둘러 앉아서도 모임을 가질 수 있고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새 교회당을 지을 돈이 있으면 사회를 위해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동체의 지도자를 비롯해서 성원 모두가 재정적으로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를 운영하는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
헝가리에서는 신학생 중에 많은 숫자가 기초공동체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것은 기초교회공동체 운동의 전망이 매우 좋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애석한 것은 이 신학생들이 교회당국으로부터 냉대나 의혹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신학생들은 기성교회보다는 기초공동체를 활성화하는 데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더욱 다행인 것은 신부들 중에서도 기초공동체에 참여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기초교회공동체는 현재 약화되어가고 있는 헝가리의 카톨릭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 훌륭한 대안들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기초공동체의 지도자를 뽑는 것은 철저히 공동체 성원 안에서의 투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기성의 카톨릭 교회가 시행하고 있는 임명제와 대조를 이룬다. 기초공동체에서는 사랑의 행위를 중요시하는데 반하여, 기성 조직교회는 성례전 중심의 교회라고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기초교회공동체 운동지도자들은 기성교회들이 성례전을 너무 과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기성의 카톨릭 교회는 믿는 자들을 사제와 평신도로 나누어 놓음으로써 평신도들이 예수가 지상에서 가졌던 목표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있으며, 기존교회질서가 가지고 있는 기본조항들을 어길 경우 의심하거나 소종파(섹트)라고 낙인찍는다. 이리하여 예수의 길로 나아가는 길을 차단하였으며, 그 결과로 교회는 비게 되었고, 신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고 “교회의 질서”는 분석한다. 또 예수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신학생들은 축출되고 있다고 공격하고 있다.
기초공동체 성원들은 필요하면 기존교회에서 집행되는 미사에도 참여한다. 이것은 예수가 유대성전에 참여했던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기초공동체가 기성 카톨릭 교회에 대해 정면으로 불복종하고 저항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성교회의 잘못된 점을 고치고자 하는 것이다. 그 개혁할 부분이 너무 근본적인 영역이라서 기초공동체와 기성 카톨릭 교회 사이에 긴장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초공동체는 기성의 교구들이 기초공동체에 호의적일 것과 교인들을 기초공동체로 재조직화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여기에 교구와 기초공동체 사이의 대화를 위한 공통기반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기초공동체의 활동은 미사나 성찬예식에 중심을 두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기성교회에서 취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기초공동체에서는 그리스도적인 사랑의 실천에 더 많은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사랑이 나타나는 표지가 되기를 원한다. 화체(化體)의 선언이나 미사보다는 공동체의 창조에 더 많은 가치를 두고 있다. 공동체의 창조야 말로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길이라고 “교회의 질서”는 본다.
“교회의 질서”는 아무 위험부담이 없는 기존의 교회질서를 추종하기 보다는 위험부담은 있지만 새로운 미래, 진정한 교회를 위하여 기존 교회의 테두리에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미래의 꿈은 믿음을 가질 때 예수처럼 위험한 물위를 걸을 수 있듯이, 비록 위험하지만 그 위험 속으로 믿음을 가지고 뛰어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고 말한다.
헝가리의 복꼴 기초공동체의 주요한 특징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a. 예수는 신부와 신자들을 불러모은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모은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제자로 만들 과제를 가졌다.
b. 예수는 자신의 공동체를 13명의 성원으로 하는 모범을 보이셨고, 이러한 공동체를 조직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셨다.
c. 공동체의 지도자는 임명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투표에 의해 뽑혀야 된다. 지도자는 구성원의 신임에 기초하여서만 자신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다.
d. 예수는 그의 말과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셨다. 우리도 사랑으로 모든 이웃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며 이들과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배의 법칙이 아니라 봉사와 섬김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e. 이 땅의 소유자는 하나님이며 우리들은 그의 관리자들이다. 우리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빵을 나누어야 한다.
f. 살인은 죄이므로, 군복무를 거부한다.
g. 박해받는 삶은 곧 제자들의 삶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믿는다.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복꼴 기초공동체는 헝가리 카톨릭교회로부터 현재 파문당하고 있고 이단이라고 규정받고 있다.
8. 회복되어야 할 교회적 이상들
지금까지 우리는 제한적이나마 우리들의 문제를 새롭게 조명해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몇 가지의 대안적인 교회론들을 살펴보았다. 이제는 우리의 상황에 적합한 대안적 교회론을 찾아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이제 필자는 이 장을 한국교회가 시급히 회복되어야 할 이상들을 열거함으로써 마치려고 한다.
A. 만인사제사상의 실제화를 통하여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교회로 바뀌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기성의 교회질서 속에서는 만인사제의 이상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교회질서가 생겨나야 한다. 목사나 신부 및 장로 등 소수에 의해 움직여지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교회의 모든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뿐만 아니라, 사도로서 예배 속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교회목회는 안수받은 목회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평신도들은 단순한 객체로서 목회자가 베푸는 사랑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교회는 평신도의 교회가 아니라 평신도를 위한 교회이다. 이러한 목회자 중심의 교회생활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교회 속에 공동체성이 회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
B. 사회발전, 인권과 정의에의 공헌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의 기성제도교회들은 인건비를 비롯해서 자체를 유지하고 운영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재정을 사용하고 있고, 사회선교와 이웃을 위한 봉사를 위해서는 극히 작은 예산만을 배정되어 있을 뿐이다. 사회선교비는 대체로 현재 교회의 예산의 5-7%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한다. 최근에 많이 논의되고 있는 “작은 교회”는 교인의 숫자가 작다고 작은 교회가 아니라, 인건비 및 교회의 유지.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을 최대한으로 줄이고 사회선교나 구제를 위해 예산을 되도록 많이 쓰는 교회를 말한다. 이것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과제나 일과들은 “자원봉사”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과 연결된다.
C. 첫번째의 이상과 관련된 것으로서, 구성원의 “참여”가 보장되고 구성원 모두의 주체적인 참여를 통해 “공동체성”을 확보해 나가야 한다. 교회 목회의 기본방향을 비롯하여 운영에 관한 모든 의사 결정과정에 몇몇 사람만이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참여를 통해서만이 공동체 안에 사랑과 신뢰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D. 공동체성의 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 참여는 공동체에서만 진정으로 보장된다. 공동체는 그 구성원의 숫자가 작아야 한다. 공동체의 내적인 의미는 “서로 잘 아는 사람들”의 모임을 뜻한다. 공동체의 성원들은 서로 잘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교회안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모른다. 일주일에 한번 만나서 서로 묵묵한 인사만을 나누고 씁쓸하게 웃고 헤어지는 차디찬 분위기가 대부분 교회의 모습이다. 따듯한 온기가 흐르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 내에 공동체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대형교회에서는 구조적으로 공동체성을 가질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교회의 형식으로서 기초공동체가 대안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E. 새로운 인간상이 태어나는 교회여야 한다. 현재의 잘못된 세상은 그릇된 인간을 양산한다. 즉, 자본주의적이며, 비공동체적이고, 비주체적이며, 비연대적인, 자기중심적인 인간을 현대의 교회는 양산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새로운 교회는 이러한 경향에 역류하여 새로운 미래지향적 인간상을 창조해 내야 한다. 이것은 새로운 영성을 통해서 가능하며, 교회의 새로운 프락시스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현재의 계급적(class), 위계적(hierarchical)인 교회 속에서는 이러한 인간상이 태어날 수 없다. 이러한 교회는 교회 밖의 세상과 본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회에서의 경험은 진정한 복음적 경험일 수 없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