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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라디오 '내가 우스워 보이냐?' (6회)

 

읽는 라디오 ‘내가 우스워 보이냐?’ (6회)

 

 

 

1

 

이제는 봄이라고 얘기해도 될 만큼 날씨가 많이 포근해졌습니다.

비교적 춥지 않은 겨울을 보내다가 마지막에 몰아친 2월 추위가 매서워서 그런지

따뜻한 3월의 기운이 몇 배는 더 달콤하게 느껴집니다.

 

점심을 먹고 무거운 몸을 달래려고 밭으로 향합니다.

많이 따뜻해졌다고는 하지만 바람이 불면 차가운 기운이 아직은 남아 있습니다.

10여 분 정도 걸어서 밭으로 가서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갑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 하우스 안은 바깥 보다 훨씬 따뜻합니다.

햇살이 비치는 날이면 하우스 안은 계절이 한 달은 빨라서 4월의 봄기운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우스 구석자리 햇살이 잘 비치는 곳에 낡은 소파가 하나 있습니다.

커피를 한 잔을 들고는 소파에 앉아 따뜻한 봄 햇살을 즐깁니다.

겨울 동안 거의 자라지 않던 채소들이 하루하루 자라는 게 눈에 보입니다.

여기저기 왕성하게 자란 잡초들은 벌써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가 더 없이 달달합니다.

 

아직 겨울에 적응돼 있는 무거운 몸이

따뜻한 햇살과 달달한 커피 향에 감싸여

나른하게 풀리기 시작 할 때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조용히 흥얼거려봅니다.

 

 

아직도 내게 슬픔이 우두커니 남아 있어요

그 날을 생각하자니 어느새 드려진 안개

빈 밤을 오가는 마음 어디로 가야만 하나

어둠에 갈 곳 모르고 외로워 헤매는 미로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 줄 사람 있나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사랑하고 싶어요 빈 가슴 채울 때까지

사랑하고 싶어요 사랑 있는 날까지

 

 

2

 

오래 전에 구속 되서 재판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초범인데다가 사안이 해결됐기 때문에 곧 풀려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구속되고 보름쯤 지나서 보석신청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보석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기다려지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보석이 받아들여지면 보통 저녁 시간에 출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저녁만 되면 교도관의 발소리에 귀를 쫑긋하고 있었습니다.

이틀 후에 보석신청이 기각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덤덤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을 했습니다.

 

1심 재판은 빠르게 진행 되서 구속 된 지 한 달이 조금 넘으니 선고공판이 잡혔습니다.

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집행유예로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면회 오는 분들의 표정도 모두 밝았습니다.

공판 전날부터 가슴이 설레기 시작하더니, 공판 당일 날은 아침부터 초조하게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실형이 선고됐습니다.

다시 구치소로 들어온 그날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항소 후에는 일정도 조금씩 길어지고 구속 생활도 쉽지 만은 않았습니다.

그렇게 다시 석 달 정도의 시간이 흘러서 항소심 선고공판 일정이 다가왔습니다.

이제는 살만큼 살았으니 나갈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고공판이 있던 당일 오전에는 담당 교도관과 마지막 인사까지 나눴습니다.

점심을 먹고 출정을 기다리고 있는데 나를 부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면회 온 분이 얘기하기를 재판부 기류가 이상해서 변호사가 공판을 연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면회 온 분에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한 차례 연기됐던 선고공판이 보름 후에 열렸습니다.

자칫하면 나가지 못할 수도 있었기에 그날은 정말로 초조했습니다.

재판정에 들어서서 참관을 와 있는 분들의 얼굴을 보니 1심 때와 달리 굳은 얼굴들이었습니다.

똑바로 서서 선고를 하는 판사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들었지만 “항소를 기각한다”라는 말만을 들어야 했습니다.

다시 구치소로 돌아온 그날은 1심 선고 때보다 더 힘겨운 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그렇게 형이 확정된 다음날 5개월 동안 길렀던 머리를 짧게 잘랐습니다.

 

국민학교 때 소풍을 앞두고 며칠 전부터 일기예보를 유심히 듣곤 했습니다.

그리고 소풍 전날에는 초조한 마음으로 계속 하늘만 바라봤습니다.

소풍 가는 날 아침에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제일 먼저 창밖을 바라봅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소풍 날 비가 내리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혹시나 곧 비가 그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등교시간까지 기다려보지만 비는 그치지 않고 소풍이 취소됐다는 연락을 받게 되면 완전히 풀이 죽어버립니다.

그렇게 소풍 가방 대신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가는 발걸음은 정말 무거웠습니다.

5개월의 재판 동안 초조하게 소풍을 기다리는 국민학생과 같은 기분을 몇 번이나 경험했던 것입니다.

 

벌써 몇 년 째 담장 안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용산투쟁 구속자분들을 석방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사면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많이 들렸습니다.

혹시 3.1절 특사로 구속되신 분들이 나오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3.1절에 그 분들의 석방소식은 들리지 않더군요.

운동도 없고 출역도 없는 3.1절 하루가 그 분들에게 힘겨운 하루로 다가온 것은 아닌지 살며시 걱정이 됩니다.

앞으로 또 초조하게 소풍을 기다리는 국민학생과 같은 심정으로 보내야 하는 건 아닌지...

 

용산투쟁으로 구속되신 분들에게 들려드립니다.

정태춘의 ‘형제에게’

 

 

갇힌 자 더욱 자유로운 땅

이 땅에 흐느끼는 소리여

높은 담 벽 아래 시들은 풀잎

저보다 더욱 초라한 역사여

 

깨인 자들에게 쏟아지는 시련

달빛 속으로 쫓기는 양심들

주검 없이 죽어간 청춘의 꽃들

다시 활짝 필 참세상은 어디

 

아 묶여서도 통일이라네

다시 만나야할 형제있으니

아 갇혀서도 해방이라네

조국의 역사로 살아 숨 쉬니

 

 

3

 

1917년 칠레의 어느 가난한 농촌에서 비올레타 파라라는 여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기타 연주를 잘했던 아버지와 노래를 잘 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기는 했지만, 낭만적인 분위기와 달리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텨야 했던 가난한 딴따라 집안이었을 뿐입니다. 한량인 아버지는 음악을 즐기기 위해 기타를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어머니는 7남매를 키우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불러주고 돈이나 먹을거리를 받아오는 삶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죽자 비올레타 파라는 17살 때부터 동생과 함께 식당과 기차 등에서 노래로 동냥을 하면서 10대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유일하게 제대로 된 공부를 하던 남동생을 따라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로 올라온 비올레타 파라는 술집을 전전하면서 노래로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노래에 대한 열정과 밑바닥에서 버텨온 그의 성격은 대단해서 술에 취해 치근거리는 남자가 있으면 노래를 부르다말고 기타로 그 남자를 갈겨버리는 당당한 성격이기도 했습니다.

 

밤무대 가수로 살아가던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유행가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처럼 가난하게 살면서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의 정서를 담은 노래를 부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35살의 나이에 혼자서 칠레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민중들의 노래를 채집하기 시작합니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걷거나 노새를 타고 먼 길을 떠나서 무작정 낯선 마을의 노인들이 사는 집들을 찾아갑니다. 그렇게 찾아간 노인들 앞에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불러주면서 호감을 사고 난 후, 옛 노래를 가르쳐달라고 졸라서 노인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민속음악들을 배우고 모아나갔습니다.

그렇게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모은 노래들을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소개하게 되면서 고향을 떠나온 많은 이들의 응원을 받게 됩니다. 그들 역시 비올레타 파라처럼 가난한 지방출신들이었기에 그 정서를 같이 느끼고 즐길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런 노력이 결실을 이뤄서 1955년 칠레의 민속음악대상을 받게 되고, 그 소식이 외국에 알려져 바르샤바 국제민속대회에 초청됩니다. 칠레 민중의 민속음악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던 비올레타 파라는 가족을 두고 바르샤바로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대회 도중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그는 딸의 죽음을 잊기 위해 오히려 미친 듯이 공연에 몰두했고, 대회가 끝난 후에는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칠레음악을 알립니다. 유럽에서는 생소한 칠레음악에 대해 제대로 대우를 해주지 않았고, 남편은 이혼을 요구하게 됩니다. 음악에 대한 열정만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려고 했던 그는 결국 딸의 죽음에 이어 두 번째 이혼을 하게 됩니다.

 

유럽에서도 싸구려 술집에서 노래를 하고, 허접한 여관들을 전전하는 삶으로 버티면서 몇 년을 고생한 끝에 파리에서 음반도 내고, 인류박물관과 유네스코에 칠레의 소리를 기록으로 남기고, 칠레 민속을 소개하는 책을 발간하고, 루브로 박물관 부속 전시실에서 자신이 만든 수공예품을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칠레음악을 알리면서 유명해졌지만, 가난은 벋어날 수 없었습니다.

 

외국에서의 성공을 밑천 삼아서 칠레로 돌아온 그는 산티아고 변두리에 천막을 치고, 그곳을 민속음악의 메카로 만들려는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비올레타 파라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기대했던 행정적인 지원은 거의 없었고, 변두리까지 음악을 들으러 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린 데다 마지막 남자가 되어주기를 간절히 원했던 연인의 결혼 소식까지 들려왔습니다. 민속음악의 전당으로 키워보겠다고 생각한 그 천막에서 비올레타 파라는 마침내 권총을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그렇게 그는 49년의 삶을 스스로 끝내버립니다.

 

개인적으로 그의 음반을 제대로 들어본 적은 없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한 두 곡을 들어본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기타 하나 들고 가만히 앉아서 노래를 부릅니다. 아주 고운 음색도 아니고, 화려한 리듬이 있지도 않고, 음유시인처럼 나지막하게 읊조리지도 않습니다. 가늘고 어두운 목소리로 가사도 알아들을 수 없는 단조로운 노래를 무표정하게 부르는데... 그냥 가만히 노래를 듣게 만들더니 어느 순간 잘 알지도 못하는 노래에 빠져들어 버립니다. 그런 것이 내공인가 봅니다.

 

1973년 쿠데타로 민중정권을 무너트린 독재정권에서 수 만 명의 칠레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됐습니다. 소리 없이 죽어간 자신의 가족과 동료들을 생각하면서 칠레사람들은 비올레타 파라의 ‘삶에 감사해(Gracias a la vida)’를 불렀다고 합니다. 본인 역시 평생을 가난과 고통 속에서 살아갔으면서도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고 합니다.

이 노래를 한국말로 불렀을 리는 없겠지만, 번역된 가사로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두 눈을 떴을 때

흰 것과 검은 것,

높은 하늘의 많은 별,

그리고 많은 사람 중에서 내 사랑하는 사람을 완벽하게 구별 할 수 있는 빛나는 두 눈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합니다.

 

귀뚜라미와 까나리오 소리,

망치 소리, 터빈 소리, 개 짖는 소리, 소나기 소리

그리고 내 사랑하는 사람의 부드러운 목소리

이런 소리들을 밤낮으로 어느 곳에서나 들을 수 있는 청각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합니다.

 

어머니, 친구, 형제

그리고 내 사랑하는 영혼의 길을 비춰주는 빛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말하는 단어의 소리와 문자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합니다.

 

도시와 웅덩이, 해변과 사막, 산과 평원

그리고 너의 집과 너의 길,

너의 정원을 걸었던 그 피곤한 나의 다리로 행진을 하게한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합니다.

 

인간의 지식의 결실을 볼 때

악에서 아주 먼 선을 볼 때

너의 맑은 두 눈의 깊이를 볼 때

그것을 알고 떨리는 심장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드립니다.

 

행운과 불행을

내가 구별하게 한 웃음과 울음을 내게 준 삶에 감사드립니다.

웃음과 울음으로 내 노래는 만들어졌고

모든 이의 노래는 같은 노래이고

모든 이의 노래는 내 자신의 노래입니다.

 

 

어떠셨는지요?

무조건 “괜찮아, 힘을 내!”라는 식으로 허망한 위로를 일삼는 노래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한 편의 시를 읽는 것 같은 깊이 있는 내공에 몸이 떨려오는 노래였습니다.

 

내친 김에 한 곡 더 듣겠습니다.

이번에 들을 곡은 ‘열일곱으로 돌아간다는 것은(Volver a los 17)’이라는 노래입니다.

칠레로 돌아와 천막 극장에서 또 다른 좌절 속에 자살을 생각하던 그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만든 노래라고 합니다.

열일곱 살은 그가 산티아고로 와서 싸구려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정말 힘겨운 삶을 살아온 그가 사십대 후반의 나이가 돼서 자신의 삶을 어떤 마음으로 돌아보고 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한 세기를 살고 열일곱 살로 돌아간다는 것은

고명한 현자는 아니지만 암호들을 풀어내는 것과 같고

문득 찰나같이 연약한 존재로 되돌아가

신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깊숙이 느끼는 것이네

이것이 바로 이 풍요로운 순간 내가 느끼는 것

 

당신들의 걸음이 앞으로 나아갈 때 내 걸음은 뒤로 물러났지만

하나됨의 활이 내 둥지를 관통해

그 풍요로운 색채는 내 혈관을 물들였네

우리를 묶는 운명의 단단한 사슬마저도

내 고요한 영혼을 비추는

순정한 다이아몬드 같기만 하네

 

벽에 담쟁이들이 자라듯

그렇게 휘감겨 가네, 휘감겨 가네

돌멩이에 이끼가 끼듯

그렇게 싹을 틔우네, 싹을 틔우네

그렇게, 그렇게....

 

감정으로는 가능한 그것

지식으로도 불가능했었고,

가장 명확한 행동으로도,

가장 넓은 사고로도 어찌할 수 없었네

그 모든 것을 바꾸는 순간의

관대한 마법은 우리를 부드럽게

증오와 폭력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네

단지 사랑만이 그 기지로 우리를

그다지도 순수하게 되돌려놓네

 

사랑은 원초의 순수함을 지닌 회오리바람

광폭한 짐승조차도 그 부드러운 떨림을 속삭이고

순례자의 발길을 붙잡고,

죄수들을 자유로이 해방하네

그 광채로 사랑은 노인을 아이로 되돌리고

단지 애정만으로 악인을 순수하고 신실하게 만드네

 

벽에 담쟁이들이 자라듯

그렇게 휘감겨 가네, 휘감겨 가네

돌멩이에 이끼가 끼듯

그렇게 싹을 틔우네, 싹을 틔우네

그렇게, 그렇게....

 

마법처럼 창문이 활짝 열리자

망토를 걸친 사랑이 망설이는 아침처럼 들어왔네

아름다운 기상나팔에 맞추어

사랑은 자스민을 싹 틔우고,

사랑의 대천사는 날아오르며

하늘에 귀걸이를 걸었네

그러자 아기천사는

내 나이를 열일곱으로 되돌려놓았네

 

벽에 담쟁이들이 자라듯

그렇게 휘감겨 가네, 휘감겨 가네

돌멩이에 이끼가 끼듯

그렇게 싹을 틔우네, 싹을 틔우네

그렇게, 그렇게....

 

 

(비올레타 파라에 대한 얘기는 우석균씨가 쓴 ‘바람의 노래 혁명의 노래’라는 책에서 빌려왔습니다.)

 

 

4

 

남쪽에 비 온다는 소리가 자주 들리는걸 보니 봄소식도 속도를 낼 것 같습니다.

먼지만 날리고 있는 이곳 운동장에도 초록이 싹트겠지요.

가슴속에 쌓여있던 무거운 사연들을 조금씩 털어내시며 향기 있는 음악과 함께 희망의 길, 사랑의 길을 질주하셨으면 합니다.

이곳에선 황정민 FM방송 1시간과 점심 때 교화방송 1시간을 듣는 답니다.

선택권 없는 TV보다는 생생함이 있는 아침 방송이 하루를 여는 벗이랍니다.

음악에는 무식함뿐이지만 듣는 것은 좋아합니다.

분노와 절망을 사랑과 희망으로 바꿔주는 노랫말이면 더 좋아하구요.

반드시 살아야할 이유가 수 천 만 가지나 있는 동지들을 하늘로 보내면서 맛이 안가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요.

이 나라 정리해고처럼 대책 없는 해고는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나니, 국가가 저지른 저지르고 있는 살인 행각에 분노는 더욱 커지기만 합니다.

표를 얻기 위해 생쇼를 하고 있는 놈들을 보노라니 참 거시기 합니다.

수출 좋아하는 정권이니까 노동자 잡아 죽이는 기술까지도 수출하지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죽고 사는 문제로 만드는 짐승들의 인피를 벗기고 싶을 뿐입니다.

스스로 노예 되겠다고 자청하는데 어쩌란 말이냐구 대들 땐 어찌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절망의 높이가 이곳 담장보다 높을 때면 “꺾이지 않는”이란 영국 시인의 시를 읽곤 합니다.

 

온 세상을 지옥처럼 캄캄하게 뒤 덮은 밤의 어둠을 빠져 나오며 굴하지 않는 영혼을 내게 주신 모든 신들에게 감사하노라.

잔인한 환경의 억센 손아귀 속에서도 나는 움츠리거나 울지 않았노라.

운명의 몽둥이질 아래서 피투성이 되어도 결코 고개 숙이지 않았노라.

분노의 눈물이 이 세상 너머에 어둠의 공포만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세월의 위협은 지금도 앞으로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리라.

그 길이 아무리 좁다 해도

온갖 형벌로 가득하다해도 상관치 않으리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요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니

         

- 월리엄 어니스트 헨리

 

꺾이지 않는 마음들을 모아 함께 간다면 더디지만 더 멀리 갈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파이팅 하시길 바랍니다.

희망은 늘 가까운 곳에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두서없는 소식 맺을까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2. 2. 26

화성옥에서 한상균

 

 

이 방송을 진행한 지 석 달 만에 드디어 사연이 도착했습니다.

혼자서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었는데...

사연을 소개하면서 할 말이 너무 많은데...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으면 오히려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한상균씨,

제 손을 잡아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5

 

방송 한 번 분량을 쓰기 위해서는 며칠이 걸립니다.

이번 방송을 쓰는데도 나흘이 걸렸군요.

처음 방송 내용을 쓰기 시작한 날은 아주 화창했는데

방송 끝부분을 쓰고 있는 오늘은 비가 오고 있습니다.

 

봄비가 내리는 하우스 안은 분위기가 색다릅니다.

그렇게 많이 내리는 비가 아니어도 비닐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더욱 크게 들립니다.

하우스 문을 모두 닫아 놓았기 때문에 습도도 높지요.

오늘 제주지역 낮 기온이 11도 정도라고 하니 하우스 안은 17~18도 정도 되지 않을까요?

 

잡초들을 조금 뽑다가 소파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귀에 익은 노래가 흘러나와서 소리를 높입니다.

시끄러운 빗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노래에 빠져봅니다.

가볍게 낮술 한 잔 하면 좋은 날입니다.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

쇼윈도우 글라스엔 눈물이 흘렀다

이슬처럼 꺼진 꿈속에는 잊지 못할 그대 눈동자

샛별같이 십자성같이 가슴에 어린다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 때엔

찢어버린 편지에는 한숨이 흘렀다

마로니에 잎이 나부끼는 이 거리에 버린 담배는

내 맘같이 그대 맘같이 꺼지지 않더라

 

네온도 꺼져가는 명동의 밤거리에

어느 님이 버리셨나 흩어진 꽃다발

레인코트 깃을 올리며 오늘 밤도 울어야 하나

베가본드 맘이 아픈 서울 엘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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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방송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하는 방송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메일을 공개합니다.

성민이 mk10293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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