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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5/03
    이것이 복음이다
    깡통

우리 시대의 아나키즘

우리 시대의 아나키즘

우리 시대의 아나키즘

 

내가 이런 책을 읽고 흔적을 남긴다는 것에 대해 의혹의 시선을 던질 분들이 계심을 알지만 그래도 흔적은 남깁니다.

 

숀 쉬한이 쓰고 조준상이 옮긴 2003년 10월 1판 2쇄된 책을 읽었습니다.

 

아나키즘(anarchism)은 보통 ‘무정부주의’로 번역되곤 한다. 하지만 무정부주의는 혼란, 혼동 등 온갖 부정적 의미이 대명사처럼 돼버려 anarchism의 정확한 번역어가 되기 어렵다. 무질서나 혼동이 아닌 긍정적인 의미를 담아 이 말을 사용한 최초의 사람은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단어의 어간인 아나키(anachy)는 그리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강제가 없는’(without coercion), 또는 ‘지배자가 없는’ 이라는 뜻이다. 이 책에서는 이런 원래 의미를 살려 ‘아나키즘’ ‘아나키스트’라는 말을 한국어로 바꾸지 않고 원어 발음 그대로 사용하고자 한다.(역자) (17)

 

 

완벽한 사회란 존재할 수 없다고 할 때, 더 나은 사회로 가는 과정에서 제재의 필요성, 심지어는 강제의 필요성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는 아나키스트가 있다면 그는 아마 아나키스트들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유토피아주의자일 것이다.(82)

 

 

현 상황은 고정돼 있지 않다는 깨달음, 그리고 흔히 인간의 본성으로 간주되는 것이 사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습관이며,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아나키즘은 소중히 여긴다.(102)

 

 

오늘날의 아나키스트가 1917년과 1921년 사이에 러시아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이야기한다면, 그는 볼셰비키가 얼마나 배반적이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좌익 혁명정부도 자본주의 정부와 다르지 않게 행동한다는 점을 설명하는 것이다.(140)

 

 

공동의 적이 주는 위협은 중앙의 권위주의적 지배를 합리화하는 근거가 되는 동시에, 아나키스트들에게는 전술적인 차원에서 기본 원칙들을 희석시켜도 좋은지를 놓고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149)

 

 

뭔가 효과적인 행동이 이뤄지지 않는 한 기존 질서는 본질적인 변화 없이 그래도 존속할 것이라는 진리가 바로 그것이다.(167)

 

 

문화적 아나키즘이 모더니즘의 특정 측면들과 겹칠 경우 전면에 부각되는 아나키즘은 대개 개인주의적인 종류의 아나키즘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아나키즘이 부각되면 그 결과는 계급 착취의 문제들을 편의적으로 제쳐둔 채 쪼개님, 다원성, 차이를 찬양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성격의 단순한 스타일의 정치나 라이프스타일 아나키즘으로 이어지기 쉽다.(206~207)

 

 

엠마 골드먼이 “내가 장단 맟춰 춤출 수 있는 그런 혁명만을 원한다”고 말했을 때 그가 지칭한 유형의 실존에 관한 것이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는 데 적절한 종류의 정치적, 문화적, 개인적 변화에 관여하는 예술은 아나키즘 미학이라는 개념에 포함될 권리가 있다. 이처럼 반본질주의적이고 반규정적인 정의는 느슨한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정의는 폭넓은 아나키즘 예술 형태들을 포괄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210~211)

 

 

아나키즈적인 사고와 행동은 언제나 세계적이었다. 그러나 현대적 아나르코 공산주의 전통이 분명한 모습으로 출현한 곳은 프랑스 혁명 이후의 유럽이었다. 봉건제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등장을 처음으로 목도한 유럽이 현대적 아나르코 공산주의를 출현시킨 것이다.(226)

 

 

혁명은 일회성 사건으로 계획할 수 있거나 계획돼야 하는 것이 아니다. 혁명은 더 이상 기존 질서를 폭력적이고 강제적으로 전복한다는 관점에서 정의될 수 없다. 혁명은 이제 권력 행사와 정부 행정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에 심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돼야 한다.(234)

 

 

아나키즘은 하나의 의견, 하나의 나침반, 하나의 잠재력, 하나의 환경적 분위기가 아니라 하나의 사상(idea)이다. 아울러 아나키즘은 양적인 게 아니라 질적인 것이며, 되어감과 자율성의 관점에서 세계와 삶의 가능성에 올바로 방향 설정을 하고자 하는 욕망이다.(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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