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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7/15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살고자하는 마음
  2. 2010/07/06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살고자하는 마음
  3. 2010/06/29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살고자하는 마음
  4. 2010/06/23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살고자하는 마음
  5. 2010/06/16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살고자하는 마음
  6. 2010/06/14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살고자하는 마음
  7. 2010/06/09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살고자하는 마음
  8. 2010/06/06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살고자하는 마음
  9. 2010/06/03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살고자하는 마음
  10. 2010/06/01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살고자하는 마음

사람은 왜 사나요?-3

사람은 왜 사나요?-3

 

구도자: 혹시 제가 집을 짓는데 자격조건 같은 것이 있나요? 머리가 좋아야 한다든지 초기투자금이 있어야 한다거나 어느 정도의 사회적인 위치에 있어야 한다거나 두려움이 없고 도전적이라거나 죄가 없고 착하고 의로워야 한다거나 뭐 이런 요건들 말입니다.
건축가: 사람은 마음속에 있는 선악의 죄로 인해 의인이 하나도 없으며 중생하지 않은 양심과 착함도 심판대에 올려지고 아들을 따르지 않는 의는 오히려 불법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언급한 것들은 원수가 힘의 논리로 이끌어가는 이 불의하고 죄악된 세상의 요구들이니 오히려 집을 짓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방해요소들입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취하시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가지만을 보시니 그것은 바로 살고자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 양심을 가질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으니 건축의 기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주어져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든 남자든 나이가 적든 많든 부하든 가난하든 몸과 정신이 건강하든 불편하든 지위가 높든 낮든 배움이 있든 없든 귀하든 천하든 지난날 어떠한 사람이었든 현재 어떠하든 어떤 종교를 가졌든 종교가 없든 한반도에 거하든 외국에 거하든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거룩에 이르기 원한다면 누구나 인생의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구도자: 저의 마음과 몸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건축되는 과정을 간단히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건축가: 첫째 아들의 십자가의 피를 믿고 자신의 죄들을 “회개(confession)”하므로 죄의 사함을 받고 영이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면 거룩하신 영께서는 거듭난 자의 마음속에 있는 영과 함께하시며 그가 거룩에 이르도록 도와주십니다. 둘째 사람들은 집을 짓기 위해 이리저리 좋은 장소를 찾아 다니되 그러려면 현재 자신이 앉아있는 곳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즉 소망 없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나와야 하니 이것을 보고 거듭난 자들은 바울의 “회심(conversion)”이라 부르되 아버지께서 내려주신 건축재료들을 거부하고 오직 인간들의 가르침(dogma)과 자기의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들을 설계도로 선택한 후 거룩과 선을 자신의 힘과 수행으로 이루려는 자들은 “출가”라고 표현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회심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아직은 마음속에 죄의 뿌리가 있고 의로운 것은 없을지라도 의롭게 여기심은 그가 불의한 자신이 아닌 아버지의 의를 이루신 아들을 따르고자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마음대로 짓지 않고 설계도를 따라야 하니 가장 먼저 자기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이미 이루신 뜻대로 내가 이 땅에서 그대로 이루겠다는 마음이 중요하되 그러려면 자기의 생각에서 돌이키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진리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마음과 몸에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아는 자들은 이것을 “회개(repentance)”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회개한 사람을 자신의 마음에 합당하게 받으시고 그가 나중에 아버지의 의의 기준을 행하면 비로소 의롭다고 칭하십니다. 셋째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각자의 기술을 가지고 함께 짓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보다 먼저 회심하고 회개한 사람들과 함께 거하며 오직 모퉁이 돌 위에다 기초부터 완성까지 함께 쌓아 올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앞에는 성화(거룩)와 영화(영광)와 심판과 부활이 순서대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도자: 만약 자신의 마음과 생각과 몸과 입술로 더럽게 집을 지어도 아버지께서는 새로운 집을 주시나요?
건축가: 이 질문은 매우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이미 당신은 그 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설계도를 오직 자신의 독생자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내려주셨으나 원수도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에 이것이 설계도라며 그려주니 바로 그것이 이 허무한 세상에서 사람들의 헛된 꿈이 되지만 아버지께서는 각 사람이 지은 집을 보시고 의로우시고 정직하신 영원한 심판을 그리스도를 통해 내리십니다.

 

구도자: 아! 그렇군요. 자신을 더럽게 지은 자들은 더러운 육체를 받고 영원한 유황불 못으로 원수를 따라 들어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과 몸과 입술을 더럽힌 만큼의 뜨거운 형벌을 받지만 이것이 진리라며 사람들을 사망으로 들어갈 이 세상으로 이끌어 들인 영혼의 사냥꾼들은 더 중한 심판을 받겠군요. 지금까지 친절하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친절하게’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건축가: 사람은 상대방을 위하면 친절하고 자신을 위하면 불친절하니 백성의 월급을 받으며 백성을 위해 일하고 있는 공무원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첫째 어떤 목자가 양을 돌보되 털을 깎아 팔아서 얻는 돈과 명예에 마음이 있으면 불친절하고 순수하게 그 양의 생명을 위해 마음을 다하고 있으면 친절합니다. 그리하여 불친절한 목자는 나중에 자신의 목자장에게 받는 상급에 목적을 두고 그 일을 하고 있으나 친절한 목자는 자신의 목자장이 나타날 때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날을 바라보며 하고 있습니다. 둘째 더러운 풀과 더러운 물을 먹여 더러운 털이 나게 하면 불친절하고 깨끗한 풀과 물을 먹여 새하얀 털을 나게 하면 친절하되 과학이든 종교든 이단이든 사이비든 진리든 전부 이것이 진리라며 먹입니다. 셋째 불친절한 목자는 길을 잃은 양이 찾아오면 지금은 한밤중이니 해가 뜨면 오시오라며 돌려보내되 친절한 목자는 한밤중에도 그를 자기의 처소에 맞아들여 그 한 영혼을 위해 몇 시간이라도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듯 먹입니다. 그러므로 불친절한 목자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보고도 내일은 예배요 법회요 미사라며 미루되 친절한 목자는 이미 생명의 울타리 안에 있는 99마리의 양들을 위해 문을 잘 잠그고 한밤중에도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떠납니다.

사람은 왜 사나요?-2

사람은 왜 사나요?-2

 

구도자: 혹시 건축재료를 창조자가 아닌 우주나 자연과 같은 피조물과 종교나 철학에서 받아도 되나요?
건축가: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셋째하늘과 낙원이 있는 둘째하늘과 이 첫째하늘을 계획하시고 태초에 만물을 지으셨으며 또한 아버지와 아들과 거룩하신 영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의 육체와 마음을 지으시고 영혼을 넣어주신 후 가장 중요한 건축재료를 은혜로 내려주셨으니 그 은혜는 오직 한 분 신이신 아버지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시요 우리의 유일한 구주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끝에 아들을 다시 보내주시어 둘째하늘과 첫째하늘을 합하시고 아들을 통해 천 년 동안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게 하셨으니 자신을 거룩하게 건축한 자녀들과 백성들을 모두 추수하신 후에는 만물을 멸망하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유황불 못으로 들어가 멸망 당할 우주와 그 안의 만물들이 건축재료가 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종교나 철학이 말하는 하나님은 삼위일체가 아니요 셋째하늘에서 선악의 죄를 창조하고 끝까지 돌이키지 아니하므로 쫓겨난 원수가 그들의 아버지이며 그와 함께 타락했던 종(천사)들이 그들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은 후 불만을 품고 무저갱에서 세상으로 올라와 사람들의 마음과 혼에 생각을 주며 원수의 뜻을 이루어가는 흑암의 세력들이 그들의 성령이며 그들이 말하는 신성(divine nature)은 아버지가 아닌 원수의 성품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우주가 우주를 창조했다고 생각하며 만물이 곧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심지어 번뇌에서 벗어나 평안을 얻기 위해 명상과 수행에 빠지되 그것이 참으로 무모한 행위임은 번뇌와 두려움을 주는 존재가 바로 사람의 안에 있는 그 어둠의 존재들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번뇌와 불안의 뿌리를 거부하기보다 오히려 흑암의 세력들을 사모하며 그들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을 따르며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열어 더욱더 충만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도자: 다양한 종교적 철학적 가르침들과 종교다원주의가 어디서 발생하는지 또한 사람들이 그것들을 따르게 되는 이유와 결과에 대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원수가 주는 생각을 받아들이면 올바른 이성과 양심을  사람일지라도 지어진 집(만물)을 보고도 집을 지은 자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창조자가 없다고 믿거나 셋째하늘에서 쫓겨나 이 첫째하늘에 갇혀있는 원수를 아비처럼 여기며 따르게 된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 우리가 정성을 다해 땀 흘리며 숨쉬는 동안 집을 지어도 결국엔 죽을 텐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죽고 난 다음에는 더 이상 그 집에서 살 수가 없지 않습니까?
건축가: 어떤 사람이 매우 좋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으나 별로 안 좋은 컴퓨터에 사용하니 기능은 제한적이고 고장도 잘 나고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에게 슈퍼컴퓨터를 선물해주니 그 프로그램은 드디어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께서는 당신이 썩어질 집에 있을 때 당신의 마음과 영혼과 몸과 혀를 아름답게 지은 것을 보시고 당신의 거룩함에 맞는 거룩한 육체를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리스도께 심판 받은 후 새로운 집을 분양하시니 당신의 영혼은 그 좋은 집안으로 들어가 아버지나라의 모든 것을 자유롭고 영광스럽게 누리며 영원히 살게 됩니다.

 

구도자: 그 소프트웨어의 능력은 원래 어느 정도였나요? 그 새로운 하드웨어는 얼마나 좋나요?
건축가: 당신의 영혼이 거룩한 육체를 만나면 가장 기본적인 능력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주라 부르는 이 첫째하늘이 놀이터이고 그리스도의 낙원이 있는 둘째하늘은 이 첫째하늘보다 열 배가 넓기에 동네고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없는 영원한 셋째하늘은 아버지와 아들의 나라이니 그 집이 얼마나 좋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의 영혼은 본래부터 이런 무한한 능력이 있지만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땀을 흘리며 자신을 의롭고 거룩하게 건축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자 사람들의 영혼을 썩어질 육에 잠시 동안 넣어두시므로 먹고 마시며 숨을 쉬게 하셨고 또한 생명나무의 약속을 모든 사람들과 영원히 썩질 아니할 항상 살아있는 씨(말씀)로 맺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같이 잠시 동안 사람의 육을 입고 이 땅에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을 보십시오.

 

구도자: 그렇다면 그 좋은 것을 처음부터 저에게 왜 그냥 안 주시는 건가요?
건축가: (
매우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역시 친절하게)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대학을 찾아가 ‘왜 그냥 입학 안 시켜주시는 건가요?’ 혹은 올림픽의 마라톤시상식대에 올라가 ‘왜 그냥 금메달 안 걸어주시나요?’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영광은 고난을 당한 사람에게 주어지고 열매는 땀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사람이 거두는 것이 마땅하듯 그 새로운 몸도 자신을 아버지의 뜻에 맞게 가꾼 사람에게 입혀주시는 아버지의 상급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며 깨달음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왜 사나요?-1

사람은 왜 사나요?-1

 

어떤 구도자가 길을 가다 자신이 왜 사는지 간절히 알고 싶었다. 그런데 마침 많은 구도자들이 모여 진리를 깨달았다는 목자에게 사람이 왜 사는지 질문하고 있었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자는 아비의 씨와 어미의 밭 없이 자신이 스스로 생겼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이니 자기의 두 눈으로 삼라만상을 똑똑히 보고도 창조자를 찾지 않는 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이 사는 이유는 제쳐두고 사람이 어떻게 죄 사함을 얻어 중생하는지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진리도 모르는 자였다. 하지만 그는 교만하여 사람들의 앞에 서서 영광 받기를 좋아하니 겸손히 모른다 말하지 않고 ‘사람이 존재하니까 왜 사나를 생각합니까?’ 아님 ‘왜 사나를 생각하니까 존재합니까?’라며 자기도 모르는 말로 되묻고는 그러니까 왜 사냐는 질문은 잘못된 생각이고 자살하게 된다느니 사는 데는 이유가 없다느니 하면서 불쌍한 구도자들의 영혼에게 무안함과 두려움을 주었다. 또한 “왜”가 아닌 “어떻게”라는 엉뚱한 답 즉 인생은 기쁘고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면 된다고 말함으로써 고비를 넘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모인 많은 자들은 그의 무식한 대답을 듣고는 지혜로운 말이라며 박수를 쳤고 그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박수를 받으며 뿌듯했다. 그러나 사람을 모아놓고 앞에 서서 이것이 진리라며 가르치는 자는 더 이상 구도자가 아니라 선지자요 선지자의 심판은 보통사람과 다르니 참된 선지자는 자신을 아버지께 제물로 드리고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영광에 이르되 거짓선지자는 원수를 따라 유황불 못의 가장 뜨거운 심판으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역사에서 징기스칸, 히틀러, 트루먼처럼 많은 사람들의 육체를 사냥한 악한 자들보다 더 악한 거짓선지자로부터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돌이켜 계속 그 길을 걸었다. 이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그 영혼의 양심과 갈급한 마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그것에 대한 답을 정확히 알려줄 수 있는 건축가를 만나게 해주셨다.

 

구도자: 사람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결국에는 죽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사나요? 어차피 죽을 텐데 말이죠!
건축가: 죽기 전에 아름답고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구도자: 당신은 왜 먹고 마시며 살고 있나요?
건축가: (어리석은 질문임을 알아도 친절하게) 맞습니다. 사람은 살기 위해 먹고 마시지만 오히려 먹고 마심으로써 조금씩 죽음으로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름답고 튼튼한 집을 지으려면 힘을 쓰며 땀을 흘려야 하고 그러려면 몸에 음식과 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먹고 마십니다.

 

구도자: 사람은 스스로 숨을 쉬고 있는 것인가요?
건축가: 잘 생각해보세요.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심장을 뛰게 할 수 있습니까? 또한 스스로 숨을 쉴 수 있겠습니까? 창조자께서 숨을 쉬게 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숨을 쉬며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도자: 창조자께서는 왜 우리에게 숨을 쉬게 하시나요? 또한 얼마나 오래 숨을 쉬도록 계획하셨나요?
건축가: (사람은 이 두 가지 질문의 답을 통해 사람이 죽는 이유와 때에 대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므로 구도자가 그의 간절한 마음과 지혜로 곰곰이 생각해보기를 바라며) 당신은 앞선 세 번의 질문과 답변을 통해 창조자께서 왜 우리에게 숨을 쉬게 하시는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좀더 길거나 짧을 수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70-80년으로 오직 한 번을 받되 사람이 죄나 거룩의 한계를 채우면 영혼을 꺼내시니 그가 비로소 숨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가 없고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나이에 죽은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단 한 번의 기회를 공평한 방법으로 베푸시고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이 반복된다는 것은 단지 원수가 주는 생각이니 창조자께서는 그런 무질서하고 불완전한 일을 계획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구도자: 집을 지으려면 건축 재료가 있어야 하는데 창조자께서는 어떤 재료들을 주셨나요?
건축가: 첫째 설계도, 둘째 흙, 셋째 물과 방수액, 넷째 나무기둥 5개, 다섯째 동료인부들과 건축자재상의 배달원들과 감독관을 주셨습니다. 창조자께서는 사람들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땀을 흘리며 일할 수 있도록 손과 발에 각각 다섯 개씩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공평하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 다섯 가지를 재료로 주신 이유는 누구나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구도자: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설계도는 무엇입니까?
건축가: 이 세상으로부터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없는 영원한 셋째하늘의 새예루살렘성에 계신 영혼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진리가 설계도이고 흙은 인자의 살입니다. 다른 것들은 거듭난 후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회심과 회개를 한 영혼에게만 그의 안에 계신 거룩하신 영께서 깨달음을 허락하십니다.

깨어있는 형제자매를 위하여-2: 첫사랑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깨어있는 형제자매를 위하여-2: 첫사랑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이 말씀은 살고자하는 마음이 간절한 영혼들과 말씀의 기초를 통하여 썩어질 육의 욕심을 내려놓고 헛된 세상에서 나와 그리스도를 따르겠노라 결단한 영혼들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드리기 원하는 영혼들을 위한 두 번째 말씀이니 누구든지 신랑이 신부에게 베푸는 큰 사랑과 신부가 신랑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그 인내를 깨달으면 자신과 가족과 주변의 영혼에 큰 유익이 있다.

 

어떤 남자가 한 여자에게 큰 사랑을 베풀고 정혼한 후에 먼 길을 떠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과의 혼인준비를 다 마치면 다시 돌아오겠소!” 이때 정혼한 여자가 비록 외로울지라도 남자의 약속을 믿고 외모가 좋은 다른 남자들에게 이끌리지 않고 오직 자기의 신랑 될 남자 만을 기다리게 하는 힘은 과연 무엇일까? 힘 들고 어려워도 남자가 더디올지라도 자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가꾸며 오직 자기의 신랑 될 남자 만을 기다리는 힘은 과연 어디에서 오늘 걸까? 그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으니 바로 “첫사랑”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거룩한 피로 베푸신 첫사랑을 마음에 고이 간직하고 소망이 없는 이 헛된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자기의 영과 혼과 육을 정결하게 유지하므로 정직하게 자신의 재림을 기다리는 영혼들을 사랑하시되 보혈로 거듭남의 은혜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썩어질 육과 헛된 바벨론에 마음을 빼앗긴 영혼들에 대해서는 첫사랑을 회복하기 원하신다.

 

더불어 아버지께서는 살고자하는 마음과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전세계에 흩어져 주님을 신실하게 믿는 믿음으로 아들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영혼들을 거룩하신 영을 통해 마지막 때에 세상에 있을 모든 환난들을 피할 수 있도록 또한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정결한 한 몸 안에서 재림을 준비하도록 미리 예비해두신 그 피난처에서 친히 양육하신다.

 

그리하여 첫사랑을 끝까지 마음에 간직한 그 영혼들이 영과 혼과 육의 정결함을 유지하여 공중으로 들림을 받고 또한 인자의 살과 피를 힘입어 아버지의 뜻에 이른 자들이 대환난에서 목 베임을 통해 아버지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는 그 피를 몸의 거룩한 산 제사로서 올려드리게 되는 것이다.

 

첫사랑을 고이 간직하고 전세계에 흩어져있는 십자가의 피로 하나된 거룩하고 정결한 신실한 형제자매들이여! 영원한 본향 셋째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의 독생자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머리 밑에서 한 몸으로서 하나될 그날이 다가오고 있도다!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깨어있는 형제자매를 위하여-1: 대화의 시작과 끝 그리고 환난의 시작

깨어있는 형제자매를 위하여-1: 대화의 시작과 끝 그리고 환난의 시작

 

이 말씀은 살고자하는 마음이 간절한 영혼들과 말씀의 기초를 통하여 썩어질 육의 욕심을 내려놓고 헛된 세상에서 나와 그리스도를 따르겠노라 결단한 영혼들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드리기 원하는 영혼들을 위한 첫 번째 말씀이니 대화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더불어 인격체는 대화를 통해 문제를 푸는 경우도 있고 풀지 못하고 서로를 외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우선 한민족의 환난에 속한 말씀들 가운데 “미국이 공격을 개시할 때의 상황”과 “전쟁 전 말싸움의 내용들”에서 전해진 것처럼 남과 북은 전화로 대화를 끝내기 전에 즉 환난이 시작되기 전에 각기 외치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대화를 끝낸다는 것은 대화를 시작하는 시점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그 두 가지 말씀을 통해 그들이 전화상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을 보면 환난이 가까이 왔음을 깨달을 수 있다.

 

둘째 “미국이 공격을 개시할 때의 상황” “전쟁 전 말싸움의 내용들”에서 그들은 결국 그들의 문제를 풀지 못하고 대화를 마친다. 하지만 그것은 오른쪽의 강한 민족이 늘 약한 민족들을 훼방하며 자기의 유익을 취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 주는 것이니 그 자유로운 여자의 나라는 남쪽을 돕겠노라 하되 사실은 자기의 유익을 굳히고자 알릴 바를 알린 후 단추를 누르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이 문제를 풀지 못한 채 전화대화를 끝내는 것을 보면 환난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네 목자들은 다 바람에 삼켜질 것이요 너를 사랑하는 자들은 사로잡혀 가리니 그 때에 네가 반드시 네 모든 악 때문에 수치와 욕을 당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목장의 양 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내 양 떼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 때문에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 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 버리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순교를 소망하는 형제자매를 위하여-1: 한민족의 환난의 시기

순교를 소망하는 형제자매를 위하여-1: 한민족의 환난의 시기

 

사람은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상대를 비난하며 결국에는 죽이기까지 한다.

 

상대방을 죽이므로 자신이 옳고 의롭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죽으셨으니 그들은 말로는 믿는다 하나 정작 그리스도의 밖에 거하고 있음을 그러한 비난과 살인을 통해 스스로 증거한다.

 

사람은 또한 한 번 가지게 된 생각은 자신도 역시 죽기까지 바꾸지 않으려 한다.

 

그리하여 세상의 권세자들은 결국 세상의 이념이 다른 자들을 죽이고자 환난을 시작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춥거나 덥거나 배고픔을 원치 아니한다.

 

자신의 죽음은 더욱더 원치 아니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울 때도 아니요 추울 때도 아니요 오직 그것을 피하고자 그에 맞는 계절에 시작한다.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네 목자들은 다 바람에 삼켜질 것이요 너를 사랑하는 자들은 사로잡혀 가리니 그 때에 네가 반드시 네 모든 악 때문에 수치와 욕을 당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목장의 양 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내 양 떼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 때문에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 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 버리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돌밭 길을 흰 시멘트로 포장한 길을 경계로 좌측에는 편리하고 화려한 도시가 있었고 우측으로는 여유롭고 평화로운 농촌이 있었다. 그리고 도시에는 살진 암소와 힘센 소들이 많았으나 농촌에는 오직 한 마리의 수소가 땀 흘리며 밭을 갈고 있었다. 그런데 어린양 3마리가 포장된 길에 서서 도시와 시골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몇 가지를 깨달았다. 그러므로 도시에는 검은 십자가를 비롯해 수많은 네온사인이 불야성을 이루었고 그곳에 거하는 양들은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했으니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오직 돈과 음란과 명예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얻고자 어떤 양은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어떤 양은 몸을 뜯어고치거나 팔았고 어떤 양은 자기자리를 유지하며 높이기 위한 연구만했다. 심지어 검은 십자가 밑에 있는 양들은 자기의 새끼들을 살진 암소에게 부탁했고 암소는 힘센 소에게 팔아 넘겼으되 그런 자신을 의롭게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4개의 뿔이 달린 힘센 소가 전쟁을 일으키고는 이것은 모든 양들이 살기 위한 전쟁이라면서 42달 동안 짓밟았고 마지막에 천조국을 다스리던 염소는 다른 도시들이 버섯을 못 쏘게 하늘에서 감시하다 6개의 버섯을 던졌으니 그로 인해 수많은 양들이 죽은 후에야 전쟁이 끝났다. 그러자 2개의 뿔이 달린 새끼 양이 나타나 용처럼 유창한 말로 평화와 안전을 외치며 모든 도시들을 하나로 만들어 왕처럼 다스리되 자신의 악한 마음과 계획은 숨겼다. 그러나 새끼 양은 자신의 마음을 숨기는데 한계가 있었으니 잠시 후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수양과 암양을 순서대로 잡아 모조리 도살했다. 그러다 결국 하늘의 심판으로 땅이 갈라졌으니 자신만 사랑하던 양들은 살진 암소들과 염소들과 그 새끼 양을 따라 도시와 함께 땅속으로 내려갔다. 반면 농촌에서는 어떤 농부가 이런저런 말을 하며 수소를 인도했으니 수소는 농부의 말에 맞춰 즐거운 노래를 부르며 밭을 갈았다. 그러므로 농부와 수소가 함께 땀 흘린 결과로써 곧은 왕의 대로가 나자 농부는 수소에게 가죽옷을 입히고 오른쪽 밭으로 가서 자기의 마음에 합한 수양에게 멍에를 씌웠으나 밭을 갈아본 적이 없었기에 삐뚤게 가기도 하고 갑자기 서거나 뒷걸음도 쳤다. 이에 농부는 밭을 갈아본 수소의 어깨에다 두 마리를 함께 묶는 멍에를 씌운 후 그것을 수양의 어깨에 걸쳐서 둘이 함께 밭을 갈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수양은 농부의 이런저런 말에 맞추어 수소와 함께 즐거운 노래를 부르며 차근차근 밭을 갈았다. 또한 12마리의 독수리가 날아다니며 왕의 대로로 인도했으니 수양은 결국 자신의 밭을 갈아 엎었다. 이에 농부는 수양에게도 가죽옷을 입히고 마음껏 먹고 마시며 쉬게 한 후 이번에는 수소를 데리고 왼쪽의 밭으로 가서 합당한 암양을 찾기 시작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시멘트로 포장된 길에 서있던 어린양 3마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러므로 첫째 암양은 자기의 목숨도 내어줄 수 있는 친구와 그럴만한 가치 있는 일이 농촌에 있음을 깨닫고 자기를 부인하고 싶었다. 이에 7마리의 비둘기가 날아와 그 암양을 왼쪽 밭에서 기다리던 수소에게 이끌자 농부는 자기에게 돌아온 암양의 등에 멍에를 씌웠으니 첫째 암양도 쉽게 밭을 갈아 엎은 후에 가죽옷을 받아 입고 마음껏 먹고 마시며 쉬었다. 그러나 둘째 암양은 단단한 자신의 밭을 가는 것에 전혀 무관심했으니 수소가 짊어진 멍에를 거부하고 자기가 원하는 밭을 골라 열심히 갈았다. 그러므로 둘째 암양은 힘들게 밭을 갈기는 했으나 자기 밭은 씨를 뿌릴 수 없을 정도로 망쳤다. 한편 셋째 암양은 자신만을 사랑하던 양이었으니 좌측으로 들어가 스스로 도시의 부속품처럼 살며 그곳에서 자신이 원하던 것들을 얻었으나 결국에는 편리하고 화려한 그 도시와 함께 땅속으로 내려갔다.

 

이처럼 거룩하신 영께서는 거듭난 영혼을 오직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원하시되 둘째사람은 자신의 마음과 인격이 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앞으로 이끌림을 얻는 자가 그리스도의 멍에를 얻게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은 거룩이니 그리스도의 멍에라는 것은 오직 거룩의 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오직 한 분 신이신 아버지의 아들이시되 동시에 우리와 같이 연약한 육신을 입고 계셨다. 그러므로 인자는 이 땅에 계실 때 늘 거룩하신 영께로 이끌리셨으며 또한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그 일곱 영들의 섬김과 보호를 받으며 십자가의 길에서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이루셨다. 그런 후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승리하고 결국 그 거룩한 몸을 얻으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십자가고난을 통해 거룩에 이른 후 영광스런 부활의 생명에 이르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어두운 세상에 거하며 선악에 따라 말과 행위를 하므로 원수를 아비로 섬긴다. 그러나 중생할 때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영접하니 그때는 인침 받은 모든 영혼들이 세상이 아닌 오직 주님만을 따르며 섬기겠노라 굳게 약속한다. 하지만 정작 그리스도께서 부르실 때 자신의 첫 마음을 지키는 자도 있고 이 세상이 좋아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자도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어떠한 영혼들을 인도하시며 일곱 종들은 어떠한 자들을 섬기고 보호하리요? 그리하여 살고자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인자와 함께 멍에를 걸친 자에게는 그 거룩의 길이 참되고 복되며 쉬운 길이 되데 스스로 의로움을 얻으려 하는 자는 마음도 몸도 매우 고난이요 또한 그 길에서 도움을 얻지 못하니 그것이 매우 힘든 길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 짐은 오로지 죄악이니 그리스도의 앞에 나와 그 짐을 내려놓는 자는 그 영혼의 짐을 벗게 되므로 그가 이제는 비로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자신의 십자가를 받아 지고 가되 그가 스스로 지는 것이 아니요 이미 인자께서 지고 가셨으니 그 십자가는 오히려 그에게 가볍고 또한 영광스러우며 결국 아버지께로 의로움과 거룩함도 얻게 된다.

 

하지만 거듭난 영혼들 가운데 더 좋은 부활과 큰 구원에 이르고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인자를 따르기 원하는 자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 사람은 인격체요 또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걸어갈 수 있는 발이 있으니 세상과 일곱교회를 갈라놓은 그 경계를 스스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을 가진 자 외에는 그 경계를 넘지 못하며 그 마음이 없으면 넘으려 하지도 아니하고 일곱 영도 돕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입술로는 그 푯대를 소망한다 하되 자신의 마음이 썩어질 것과 헛된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는 자들에게는 그 쉬운 것이 불가능하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어떤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전부다 머리에는 40킬로그램의 모래 짐을 이고 등에는 60의 흙 짐을 지고 있었으나 그것들을 벗을 수 없었으며 열거나 찢어서 모래와 흙을 따라낼 수도 없었고 다른 사람들의 짐도 도와주지 못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늘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다니며 어디서든 무엇이든 짐에 따라 생각과 말과 행위를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들을 별로 힘들어하지 않았으니 벗고 싶어하기 보다는 오히려 무겁게 느껴질 때마다 기쁘고 즐겁고 편했다. 하지만 어떤 두 명은 짐을 지고 다닌 자신의 지난날을 가만히 돌아보고 오늘날의 자신을 바라보니 그것들이 늘 슬픔과 불안과 고통을 안겨주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짐을 벗고 싶었으나 스스로 벗지 못하니 그저 애통하며 주저앉아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왕들의 왕이 그 마을로 들어와 모든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짐을 벗기 원한다면 그 짐을 진 채로 내게로 오라. 그러면 더 이상 그 짐에 의해서가 아니요 자유롭게 생각과 말과 행위 할 수 있는 방법과 또한 완전히 벗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겠노라.” 하지만 다수가 왕의 말을 믿지 못함은 자기의 짐을 옳게 여겼기 때문이되 늘 애통하던 두 명은 왕의 말을 듣자마자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들을 그대로 가지고 왕에게 달려왔다. 이에 왕은 나무칼로 짐들을 찌르자 그 안에서 검은 연기와 썩은 것이 조금 흘러나왔다. 그러므로 그들은 짐 때문에 겪은 지난날의 후회와 슬픔과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난 후 기뻐하며 왕께 감사 드렸다. 그런데 첫째 사람은 자신의 짐에서 연기와 썩은 것이 다 나오거나 벗겨지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니 그 정도에만 만족하며 1년 후에 다시금 마을을 향해 자신의 손을 폈다. 한편 둘째 사람은 그 뚫린 구멍으로 연기와 썩은 게 더 나오도록 자신의 힘을 다해 흔들어보았지만 더 이상은 나오지 않았으니 가벼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노력할수록 더 절망하며 낙심했다. 이에 그는 짐을 벗기 원한다면 자신에게 오라고 했던 왕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고민에 빠졌다. 그때 왕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너희가 그 짐을 벗을 수 있도록 내가 이미 다 이루었으니 누구든지 마을에서 나와 나와 함께 거하며 나의 말을 들으면 생각과 말과 행위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겠고 또한 누구든지 나를 따르는 자는 그의 짐에서 연기와 썩은 것들이 서서히 빠져 나오며 짐이 점점 더 가벼워 질것이요 그러다 마지막에는 그 짐이 스스로 벗겨질 것이로되 나와 함께하지 않거나 나의 말을 듣지 않거나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될 것이니라.” 하지만 전자는 조금 나온 연기와 썩은 것에 만족했으니 왕의 말을 듣고도 왕과 함께하거나 왕의 말에 순종하거나 왕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나왔던 마을로 다시 들어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했으니 그 짐에 따라 생각과 말과 행위 한 그는 후회 슬픔 불안 고통 허무가 점점 더해갔다. 반면 후자는 마을에서 나와 왕과 함께 거하며 왕의 말을 들었으니 자유롭게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하며 언제나 어디서나 어디까지나 왕만 끝까지 따라갔다. 그러므로 그의 짐에서는 연기와 썩은 것들이 서서히 흘러나와 점점 더 가볍게 되었으니 왕을 따르는 그 길에서 기쁨과 만족과 평안을 얻었다. 그러다 결국 그 짐들이 스스로 벗겨졌을 때는 왕의 왕의 임재로 인하여 마음의 천국과 평화가 이루어졌으니 내가 다 이루었다는 그 약속이 왕을 따른 그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다. 반면 무거운 짐들을 지고 마을을 방황하던 사람은 환난과 곤고를 당하면서도 항상 이렇게 거짓말하며 자위했다. “나는 왕이 다 이루었음을 믿는 자이니 나는 그 짐에서 해방되었노라.”

 

이와 같이 무거운 짐이라는 것은 사람의 안에 있는 그 죄를 뜻하는 것이니 수고하는 자는 원수가 심은 그 선악에 따라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마음을 다하여 싸우는 자다. 즉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피로 거듭남의 은혜를 얻은 자들 가운데서 오직 두렵고 떨림으로 아버지의 뜻에 이르고자 애쓰려 하는 영혼들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람은 거룩의 소원이 있을지라도 아무리 애쓸지라도 자신의 속에 거하는 죄로 인하여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는 거룩을 이룰 수 없다. 오직 온유하고 겸손하신 인자의 살과 물과 피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우선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말씀을 전하는 자신이 먼저 말씀에 순종하며 늘 아버지의 그 때를 기다리셨다. 또한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행위를 하므로 자신의 뜻을 이루거나 자신을 높이려고 하지 않으셨다. 오직 진리만을 전하므로 아버지의 뜻과 계획만을 이루어가셨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그 길에서 그의 육은 비록 고난에 거했으나 온유하고 겸손하신 성품으로 인해 아버지께로 내려오는 사랑과 은혜를 입었기에 그의 마음에는 늘 기쁨과 만족과 평안을 누리셨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흠 없는 생축제물로서 거룩과 아버지의 의를 다 이루셨던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뜻과 의를 다 이루신 그리스도께서는 선악의 짐을 지고 있는 모든 둘째사람을 불쌍히 여기신다. 하지만 사람은 연약한 육을 입고 있으며 원수는 공중권세를 붙들고 있으니 사막에 그대로 거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거룩을 이루려 하기보다는 이미 그것을 다 이룬 자신에게로 나와 오로지 자신을 의지해 이루어가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모든 사람가운데 오로지 수고하는 영혼들에게만 허락하신 것이니 그 의미는 이것이다.

 

“나는 이미 죄에서 해방되었으며 세상을 이기었노라. 또한 거룩을 완성했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에게로 오면 그는 그 죄와 더 이상 함께 하지 않겠노라. 또한 나와 함께하는 자는 거룩에 이를 수 있는 그 오직 한 길을 그가 찾을 수 있겠노라.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원하는 영혼은 불의하고 죄악된 이 세상에서 나와 나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인자와 함께 거룩을 이루어가도록 누구에게 이 어두운 세상에서 나와 푸른 초장으로 들어가는 그 길을 보이시며 도우시리요? 그러므로 오직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죄를 애통하며 이기고 싶어하는 영혼과 진리에 굶주린 영혼들만이 진리와 함께하며 그 결국과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이 불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목소리높이는 의인과 자신의 죄는 숨기고 형제에게 미련하다면서 지옥불로 들어가는 자와 오직 믿음과 은혜만 외치며 순종치 않는 담대한 자와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상급을 위해 충성하자며 거룩에 마음 없는 율법에 빠져 다른 복음을 따르는 자들은 결단코 진리와 함께하고자 아니하리니 거짓된 자들은 새 한 사람으로서 인자와 영원히 함께하게 될 그 부활의 생명보다는 그 짐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어떤 아비가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화를 자기가 낳은 아들에게 주고 싶었다. 또한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그 아들만을 사랑하며 올바르게 키웠다. 그러므로 아들은 커가면서 자신이 아비에게 받은 은혜와 사랑을 깨달았으니 자신도 역시 다른 어떤 것들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자기아비의 말에 온 마음을 다해 순종하며 아비의 뜻만 이루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비가 아들에게 이러한 말들을 해주었다. “나의 사랑하며 기뻐하는 아들아! 내가 너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주고 싶은 것처럼 네 동생들에게도 똑같은 것을 주는 게 내 소원이니 너는 이 포도 씨를 가져가 땅에 심거라. 그러면 그것을 통해 네 동생들도 가장 소중한 것을 얻을 수 있겠노라.” 아들은 아비의 말을 듣고 난 후 아비의 뜻과 계획을 이루고자 또한 자기동생들을 위해 씨를 땅에 심으려고 했으나 그 씨는 반드시 자기의 목숨을 잃어야만 심을 수 있는 씨였다. 그러므로 아들은 자기아비가 자신에게 어떠한 마음과 믿음을 품고 있는지 또한 동생들을 향한 그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지 헤아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동생들에게 가 자기가 원하는 말과 행위를 하거나 자기의 뜻과 계획을 이루려 하지 않고 오직 자기아비의 말과 뜻만을 전한 후에 쟁기로 땅을 파고 그 씨를 심었다. 이에 둘째 아들과 셋째 딸은 그 쟁기와 죽음을 보며 사람은 자신의 뜻과 계획이 아니요 오로지 큰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 아비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과 또한 아비를 어느 정도까지 섬겨야 할지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므로 그들도 자신의 마음을 다해 아비의 말에 순종하며 오직 아비의 뜻을 이루어가다 마지막에 결국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 반면 넷째 딸은 그의 쟁기와 죽음을 보고도 마땅히 깨달아야 할 바를 깨닫지 못했으니 마음과 뜻을 다해 아비의 말에 순종하며 아비의 뜻을 이루어가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뜻과 유익을 위해 자기가 원하는 말과 행위를 하다 결국 독 사과의 씨를 심었다. 이에 아비는 포도 씨를 심고 목숨을 잃은 맏아들과 자녀들에게는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보화와 자신의 모든 유산을 나누어주었으되 그들이 영광과 기쁨을 누릴 때 자신도 함께 기뻐함은 자신의 소원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까지 불법을 행하다 죽은 넷째는 그것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쓴 열매를 맺은 만큼 책망받고 쫓겨났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육체를 입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아버지를 섬겨야 할지 밝히 보이시고자 자신의 십자가로써 그 율법과 법도를 다 이루셨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바로 그 인자가 율법과 예언대로 오신 메시아임을 그 십자가를 통해 확증했고 이방인은 그 십자가의 죽음을 보며 바로 그가 속죄와 영생을 주시는 아버지의 아들이심을 믿었다. 그리하여 가까운데 있는 자들도 먼데 있는 자들도 그를 따르는 신실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오직 진리를 따른 자들이 맏아들과 함께 약속의 자녀들이 되어 아버지의 그 영광과 권세에 참여하므로 아버지의 그 소원을 영원토록 이루어 드릴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은 이방인과 달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기 전에도 이미 아버지를 섬기는 법도를 알고 있었다. 또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으니 자신의 마음과 뜻을 다해 거룩을 이룬 후 마지막에는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 여호와를 섬긴 구약의 그 선지자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시 그곳에 모여 이 말씀을 듣던 자들도 이미 그것을 알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그들에게는 아직도 음침한 마음이 있었다. 즉 그들은 인자에 대한 의심스런 마음을 아직도 품고 있었으며 또한 말씀들을 자신의 유익으로만 삼키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그 음침한 마음들을 지적하시고자 그들에게 이 말씀을 전해주신 것이니 그 목적은 두 가지다.

 

우선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과 순종의 관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하므로 그들의 앞에 서있는 그 인자가 곧 메시아임을 그들에게 확증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인자는 자신이 원하는 말과 행위를 하므로 이 땅에서 자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려 하지 아니하셨고 오직 아버지의 그 뜻을 이루고자 오로지 말씀만을 전하셨다. 또한 사람들이 어떻게 아버지를 섬겨야 할지 깨닫도록 인자가 율법과 법도를 이루겠노라 예언하셨고 자신의 십자가로 자신의 말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음침한 그들이 아버지의 뜻과 계획만을 이루어가는 인자를 보고도 어찌 아버지의 아들임을 확증하지 못하리요?

 

둘째 입을 열어 주님을 사랑하노라 주님께 감사하노라 고백하는 자들이 만일 아버지를 진심으로 섬기길 원한다면 자신의 품에서 낳으시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시며 기뻐하시던 그 소중한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아버지를 자신은 과연 어떠한 마음으로 섬겨야 할지를 또한 어떠한 영혼이 되어야 하는 가를 깨우쳐주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아버지만을 섬기셨고 이 땅의 모든 사람들도 섬기고자 오직 아버지께로 또한 아버지의 소원에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그것들을 아낌없이 희생하므로 그것을 분명히 보이셨다.

 

결국 교회시대에 아들의 십자가를 보고 아버지의 그 뜻을 깨달은 자들도 사람이 어떠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섬기며 또한 어떠한 영혼이 되어 거룩하신 아버지를 섬겨야 할지 알고 있다. 그러므로 택함의 은혜를 받은 이방인의 교회는 이 마지막 때에도 자신의 마음을 썩어질 육과 헛된 세상의 영광에 빼앗기지 아니하고 오직 생명의 은혜를 주신 아버지와 거룩에 자신의 마음과 믿음을 두고 아버지의 뜻만을 이루고자 애쓰되 마지막 희생을 바라보며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신의 마음과 목숨을 다 내어주신 아버지와 아들의 그 뜻과 계획을 그들이 알고 있으며 또한 자신을 희생하므로 남을 살리는 그 참된 진리를 믿고 따르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그들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와 아버지의 소원을 또한 아버지의 경륜 그 기쁘신 뜻 그 영광의 자유도 모른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어린아이는 진리를 얻고 또한 깨달음도 얻지만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는 진리를 얻지 못하고 또한 아무리 보고 들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그 이유는 전자에겐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 주시고 거룩하신 영을 통해 그의 마음의 눈과 귀를 여시어 깨닫게 하시되 후자에겐 세상의 신이 내주는 신비가 그의 마음을 혼미케 할뿐만 아니요 오히려 아버지께서 주시지도 않으시고 또한 깨닫지도 못하도록 가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눈으로는 아버지를 불의하시고 불공평하신 분으로 볼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되도록 계획하신 아버지의 뜻이 오히려 공의롭다고 말씀하신다. 한 가지 비유를 통하여 어린애와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가 각각 어떤 자들인지 또한 아버지께서 이렇게 계획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또한 그것이 어떻게 의로운지 그 깨달음들을 얻을 수 있다.

 

한 아이가 어떤 꼬마에게 잘못과 실수를 범했다. 그런데 그 꼬마는 단순했다. 그러므로 자신도 그 아이한테 똑같이 대했다. 그러자 어떤 어른이 꼬마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네가 만일 잘못하며 실수할 때 다른 아이들이 너를 불쌍히 여기며 용서해주고 함께하길 원하니 아님 용서하지 않고 너에게 보복하길 원하니? 그래, 맞아! 그러니까 너도 너의 잘못과 실수를 인정하고 돌이키며 다른 친구의 잘못과 실수를 보면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되 네가 온전할 때 비로소 입을 열어 친구들도 올바른 길을 걷도록 말해줘라.” 이에 꼬마는 어른의 선한 말이 이해되었으며 또한 옳게 여겼기에 그대로 묵묵히 순종하기 시작했다. 반면 어떤 지혜로운 아이도 어른에게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말을 들었으나 잘못하고 실수하는 아이를 때로는 비난하고 멀리하고 나쁘게 대하며 절대 용서를 못했다. 또한 자신의 잘못과 실수는 숨기고 그냥 넘어가되 그런 자신을 의롭게 여겼다. 이번에는 단순한 꼬마와 똑똑한 아이가 동일한 어떤 상황에서 거짓말을 하자 어른은 사람은 자신의 욕심과 유익을 구하면 거짓말하게 되고 거짓말은 결국 큰 화를 불러오니 항상 정직하라고 일렀다. 이에 단순한 꼬마는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에게나 항상 솔직했으나 똑똑한 아이는 거짓말이 더 쉬웠다. 이제 어느덧 두 아이가 커서 각각 자기가 원하는 여자와 남자를 만나서 결혼했다. 그런데 단순한 남자는 결혼 후 몇 초가 지나자 자기여자보다 다른 여자들이 더 아름답게 보였고 똑똑한 여자도 다른 남자들에게 마음이 끌렸으니 남자는 마음으로 음행하다 실제로도 다른 여자들과 간음했고 여자도 하체가 큰 이웃 남자와 심히 음란하게 행하므로 어른의 노를 격동시켰다. 그러자 어른은 잠시 동안 그들을 지켜보다 이렇게 가르쳐주었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 마음과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이방인을 바라보게 될 것이요 음행은 두려움과 괴로움을 가져올 것이요 어른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결단코 음란의 기쁨을 멈추지 못하리니 결국에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질 것이로되 음행에는 큰 심판이 있으니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는 것이 옳도다. 또한 거룩한 부부관계는 자신도 또한 자식들도 아름다운 열매를 함께 얻겠노라.” 그 말을 듣자 단순한 남자는 깨끗함을 원했으며 또한 자기여자와 자녀들로 하여금 그런 열매를 얻게 해주고 싶었으니 자신의 첫 마음과 약속을 지키고자 돌이키고 회개한 후에 순결한 마음과 몸으로 오직 자기여자만을 사랑했다. 그러나 지혜로운 여자는 자기의 육신을 즐겁게 해주는 돈과 명예와 교만을 사랑했으니 점점 더 큰 하체를 가진 남자들과 간음하되 끝까지 육신의 기쁨에서 돌이키지 못했다. 게다가 어른의 말을 매우 듣기 싫어했다. 그러므로 어른은 겸손한 꼬마들과 남자들에게는 계속해 선한 말을 해주었으나 교만한 아이들과 여자들에게는 더 이상 선한 말을 해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사람은 마음의 안에 거하는 그 죄로 인하여 누구나 다 불의와 죄악을 범한다. 그러나 동일하게 더러운 그 사람들 중에서 깨끗한 영혼이 있고 깨끗하지 못한 영혼이 있으니 그 차이는 그에게 오직 살고자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다. 그러므로 깨끗한 영혼은 자신의 더러움을 알고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여 오로지 진리를 구하되 더러운 영혼은 자신이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도 깨끗함을 원치 아니하니 오직 자신의 육과 의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을 구하며 따라간다.

 

사람의 이러한 마음과 인격으로 인하여 만약에 깨끗한 영혼이 진리를 찾으면 그는 오로지 진리를 따르며 배우고 깨우친 진리에 순종하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그는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진리로 씻겨져 결국에는 거룩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독사의 자식과 교만한 영혼은 진리를 구하지 않고 보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주어도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거부함은 자신의 욕심과 영광을 이루는 그 길에서 진리는 부딪히는 돌이요 자기생각이 곧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죄는 더러운 영혼들의 안에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사람의 이런 마음을 잘 아시기에 그 선악의 죄를 씻어낼 수 있는 거룩한 진리를 더러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오직 깨끗한 영혼에게만 주시되 깨끗하지 못한 영혼에게는 허용치 아니하시겠다는 것이 바로 이 말씀의 의미다.

 

그렇다면 비유에서 단순한 꼬마가 나중에 맺게 될 아름다운 열매는 무엇인가? 그것은 천년왕국과 영원한 셋째하늘에서 맺게 될 열매이니 어린아이들은 심판대에서 그리스도처럼 살과 뼈가 있는 거룩하고 영광스런 몸을 입고 부활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천국과 그 끝에 올라가게 될 주님의 셋째하늘에서 제사장과 왕으로서 다스리는 장자의 명분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이유는 그들은 육의 기회가 있을 동안에 오직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원수가 공중권세를 잡고 이끌어가는 이 불의하고 죄악된 세상에서는 사람이 단지 외모만 좋으면 그가 깨끗하지 않아도 영광스런 자리에 올라가 권세를 부릴 수 있으나 아버지와 아들의 나라에서는 오로지 어린아이들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어 주님의 가까이에 거하게 하시니 그들이 참으로 그 높은 자리에 앉아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되 그것이 천년 후에 영원히 간다. 이러하니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예정된 아버지의 그 기쁘신 뜻이 어찌 의로우시고 공평하시지 아니하리요?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