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오늘하루

 

#1.담배 한갑, 그리고 커피 세개. 하루에 허용된 자유의 양.

 

 

"커피라도 마시고 가요"

 

첫번째 찾아간 집에는 오십대 중후반 아저씨가 혼자 계셨다.

실태조사와는 별개로

이런저런 이야기가 길어졌다.

 

천천히 태우시던 담배를 비벼끄신 후,

커피를 대접하겠다고 불편하신 몸을 일으키신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내가 한 잔 마시고 싶어서 그래"

라면서 아저씨는 기어코 물을 끓이기 시작하셨다.

.

.

.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앞에 두고

또다시 이어진 이런저런 이야기.

 

남들처럼 회사다니면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어느날 정신질환이 찾아왔다고 한다.

아니, 서서히 찾아온 병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겠지.

술 때문이라고 아저씨는 자조섞인 목소리로 말씀하셨지만

글쎄..술이 아니면 견딜 수 없었던 삶의 무게라는 것도 있었겠지.

 

결국 시설에 갇혔다고 한다.

그곳을 아저씨는 '돼지 우리'라고 하셨다.

'창살없는 감옥'이라고도 하셨다.

'억울하다'라는 말도 여러번 반복하셨다.

 

정신질환이라는 것이

약도 없고 치료방법도 없는 병인데...

그러니까 병원에서는 잠오는 약이나 주고 드러눕혀 놓는 건데

계속 드러누워 있어야 장사가 되니까

의사는 가족들한테 병 나으려면 멀었다고 하고

가족들은 의사말을 더 믿게 된 거니까

면회와서는 의사말 잘듣고 말썽피우지말고 있으라는 이야기만 하니

가족들이 면회를 와도 뭐

잘 있다, 잘 가라, 라는 말 외에 할 말이 뭐 있나

나가고 싶다, 집에 가고 싶다, 이야기해도 소용없지 뭐

돈많은 인간들이야 그나마 살만한 곳에서 지낸다손쳐도 

나같은 인간들은 돼지우리에 갇히는 거지,

자유가 없으니까 돼지우리인 거야.

 

구구절절한 이야기...

담배 한갑에 커피 세개, 그것이 아저씨가 그곳에서 하루에 맛볼 수 있었던 자유였다고 한다. 그 말씀을 하시면서 아저씨는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담배를 한모금 피우신다.

 

 

 

 

#2.어색한 가족사진.

 

방이자 거실노릇을 하고 있는 자그마한 공간 벽에는

가족사진이 하나 걸려있었다.

밝게 웃고 있는 아저씨와 아들 둘, 세 남자 사이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앉아있었다.

사진관에서 찍은 듯한 분위기인데, 웨딩드레스라니?

좀 어색했다. 게다가 셋이서 환하게 웃고 있는 것과는 상반되게 그녀는 다소 긴장한 표정.

 

"아드님 결혼 사진...인가봐요?"

"아냐, 내 처야."

 

의아해하는 나와 류에게 덧붙이는 설명.

가족사진이 없어서 사진관에서 사진을 박았는데,

아내의 모습은 결혼사진에서 따다가 합성했다신다.

십 수년 전에 이혼해서 이제는 함께가 아니므로...

 

어색한 가족 사진.

그 어색함이 서글픔이 되는, 그런 사진.

 

 

 

 

 

#3.여기서 살려면 일자리도 맘대로가 아니야.

 

커피를 대접받고 금방 일어서기가 뭣해서

또다시 이야기는 이어진다.

 

담배를 한대 더 꺼내 피워무신 아저씨,

적정생계비/적정임금 관련하여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실태조사를 하고 있다는 우리들을 위해 친절하게도 같은 층에 사는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해주신다.

 

"건너건너집에는 여자가 딸 셋을 데리고 살고 있어.

남편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

아무튼 셋을 키우니, 돈이 얼마나 들어.

그러니 일을 하긴 해야하는데

정부에서 주는 알량한 혜택이란게 일을 하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바로 끊기는 거거든. 그런데 그게 끊기면 애들 교육시키는게 그게 정말 막막한 거거든. 그러니 그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통장으로 돈이 바로 안들어오는 일, 그러니까 밤에 룸싸롱 주방에서 일하는 거나 뭐 그런거지.

그래, 그렇게 힘들게 살아. 여자 혼자 애 셋 데리고서...."

 

 

 

 

#4.다 같이 밥이나 먹을 수 있으면 좋겠어.

 

찾아간 다른 집에서 만난 아주머니는

나는 그런 거 잘 몰라, 눈이 잘 안보여, 그거 정확하게 해야하는 거 아닌가,라면서...실태조사를 안 해주실 것처럼 하시다가

하나하나 던지는 질문에

서서히 이야기 보따리를 펼쳐놓기 시작하셨다.

 

"이러면 들어오는 것보다 나가는 것이 더 많네요? 그럼 어떻게... 지내시는 거예요?"

 

"다 빚이지 뭐...빚...그래도 여기서 사니까 그나마 다행인거야. 집값이 싸잖아."

 

"그렇죠, 영구임대아파트같은게 더 많아져야죠. 서민들이 그래야 살죠. 그래도...다행이긴 해도, 그래도 조금만 더 이렇게 좋아졌으면 좋겠다, 싶은게 있으시죠?"

 

"글쎄...뭐, 조금만 더 넓어졌으면 좋겠어. 그래야 상이라도 좀 놓고 온 가족이 다 같이 둘러앉아 밥이라도 좀 먹지. 지금은 뭐...한 사람 먹고 나가야 다른 사람이 먹고, 그렇거든. 좁아서 다 앉지를 못해. 뭐, 많이 바라는 건 아니고..."

 

너무나 소박한 바램...

기타 의견란에서 대기하고 있던 볼펜 끝은

너무나도 소박한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적어넣어야할지 몰라

한참을 방황하였다.

 

 

 

#5.안다는 건 상처받는 것

 

가가호호 방문을 위해 흩어졌던 우리들, 다시 모인 자리.

오늘의 행사에 함께했던 대학 신입생 한 친구는

오늘 만난 사람들, 만난 이야기들로 인해 너무나도 슬퍼졌다면서,

안다는 건 상처받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새로운 걸 알면 즐겁고 기쁘고 그렇잖아요...그런데 오늘 제가 알게 된 사실들은 저를 너무 아프게 하고 상처주는 거에요...왜 나는 여태 이런걸 몰랐을까, 좋은 대학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렇게 편하게 살았는데, 여태껏 난 뭐하고 있었나..그런 생각도 들고.."

 

그런 아픔들.

익숙하기도 하고 새삼스럽기도 한 그런 아픔들.

이랜드 문화제에서 이경옥 동지가

"강남성모병원 비정규직 동지들도, 기륭도, KTX도, 코스콤도..."라고 말할때, 그럴때 찌르르하는 그런 아픔들.

 

비록 안다는 건 상처받는 것, 이상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 뿌듯함과 희열 역시 동반한다는 사실이 덧붙여져야 한다손치더라도

 

어쨌거나 그런 아픔들,

어쩌면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말고, 익숙해지지도 말고

아픔은 아픔대로...그렇게 느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아픔을 그냥 느껴야 하는 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요 얼마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것들이 어느순간 가벼워짐을 느낀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