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기

from 2001/06/29 18:20
비가 오고 있었다. 뱃속에서부터 불쾌한 돼지고기와 마늘이 섞인 냄새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입안을 가득채우고도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딘가 많이 아픈 것 같기도 했지만, 특별히 아플 이유도 없었고 사실은 아마도 아프지 않은 것이었다.
자주 그렇듯, 기침이 좀 나기는 했지만, 이 기침에 대해서는 신경성이라는 라벨이 붙은지 오래다.
오후 5시까지 빗소리를 들으며 비가 싫다, 특히 더러운 비는 딱 질색이다라고 생각했다.
방안이 눅눅하고 끈적끈적한 공기로 더럽혀져있었다.
어제는 미친듯이 많이 먹었다.
돼지고기 목살 3인분쯤을 혼자서 아무생각없이 마늘과, 파절임과 상추 등의 채소를 곁들여 먹었다.
배가 고팠다.
그렇게 먹고 난 다음날은,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고 싶어지지 않는다.

화장실에 갔더니, 미국영화에나 나오는 거지 할멈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퉁퉁부은 눈과 허연 기름이 줄줄 흐르는 얼굴을 가진 여자가 텅빈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활기찬 페미니스트들따위가 세상에서 두번째로 싫었다.
먹고 살아남자 라고 쉰소리를 해대는 여자들이란, 일반 남자들만큼이나 추하기 짝이 없다.
먹어야 겠다는 생각에, 도시락집에 도시락을 시켰다.
착한 목소리로, "하나도 배달이 되나요?" 하고 예의바르게 물었다.
먹고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나도 회사에 다닌 적이 있다. 7개월이나 버텼으니, 뭐 나도 쓰레기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곳에는 두명이서 하면 될 일을 30명이나 모여들어 제대로 하고 있지도 않았다.
사람이 너무 많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라고 해봤자 변명거리도 못된다.
다들 미친 것이다. 나는 정신병원 같은 그곳을 떠나기로 했다.

내 방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는 것이 좋았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안내로 모르는 곳에 가는 것은 특히 안 좋다.
안내인이 없다면이야, 조금은 재미있을 수도 있지만.
어제는 아주 오래전에 한 번 가보았으나 매우 낯선 곳으로 오라고, 누군가가 나를 불러냈다.
너무나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뭐 그리 특별한 인간이라고, 내멋대로 군다는 말인가'하는 생각에 갈 수 밖에 없었다.
지하철을 갈아타는 사당역에는 매우 다른 인간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눈을 감고 싶었지만 걷기위해서는 눈을 뜨고 있어야 했다.
그 수도 없이 많은 인간들이 나를 향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다가와 나의 나약함을 비웃고는 사라져갔다.
약속장소에서는 T.V가 유리창을 통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서웠다.
나는 정말로 무서웠다.
배가 고파서 그랬을 것이다.
나는 내가 배가 고파서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많이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먹고 난 뒤에는 후회뿐이다.
그냥 가만히 누워서 움직이지 않고, 최소한의 열량을 섭취하는 것만이 해 볼 만한 일인 것이다.
나는 그곳에 가서는 안되었다.
기분이 좋지 않다.
비가 엄청나게 온다. 두더지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것이다.
거대한 소리, 거대한 크기, 거대한 것들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난 배가 불러진 다음에는 거짓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새벽 3시까지 헛소리와 술과, 엄청난 양의 담배를 낭비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배가 불러서 생긴 용기는 가짜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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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29 18:20 2001/06/29 18:20